아! 이철수 대위

‘철수’란 이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했다. 지금은 어떤지 확인해 보지 못했지만 오래 전 초등학교 저학년 국어책에 나오는 아이의 이름은 ‘철수, 영희’였다. ‘철수야, 이리와 나하고 놀자.’ 대충 이런 문장들이 기억에 남는다. 그만큼 철수란 이름은 부르기도 좋고 어감도 괜찮아서 많이 쓰였다. 요즘은 아주 독특한 이름을 짓는 경우가 적지 않아 이런 철수란 이름을 들으면 약간 진부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이렇게 우리에게 익숙했던 ‘철수’란 이름을 가진 북한의 한 젊은 공군 조종사가 지난 5월23일 북한의 요격기인 미그19기를 몰고 귀순했다. 그날 한 시간여에 걸친 탈출로부터 수원비행장에 안착할 때까지의 숨 막히는 순간은 흡사 현대판 <007시리즈>의 한 장면 같았다. 우리 공군의 방어체제와 순간적 판단력은 출중했으며, 특히 경기도 오산의 공군 중앙방공통제소(MCRC) 벙커에서 근무하던 이기영중사는 레이더에 잡힌 이 비행물체를 놓치지 않았고 즉시 보고와 조치를 통해서 귀순 비행기를 안전하게 유도하는데 일등공신이 됐다. 비록 서울의 민방공 체계에 문제점이 드러나기는 했지만 공군의 임전태세는 대체로 만족할만한 수준이었다.
이철수 대위(30세)는 귀순한 지 5일이 지난 28일 내외신기자회견을 가졌다. 그의 말에 의하면 북한은 24시간내 서울함락(1단계), 대전(2단계)을 거쳐 7일내 부산을 포함, 남한을 완전히 점령(3단계)한다는 <남한점령 7일 전략>을 세워놓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전쟁이라도 터져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가릴 것 없이 새 사회가 들어서야 된다는 것이 대다수 북한 사람들의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공군 조종사라면 북한에서도 특수계급에 속하는 위치인데, 그는 1년에 발싸개 2개와 양말 2켤레밖에 보급 받지 못했다고 하면서 북한경제가 얼마나 궁색한지를, 반면에 군량미를 비롯한 전쟁 준비를 위해서는 철저하다는 점도 곁들였다. 그는 귀순동기에 대해 두 번 언급했다. 첫 번째는 귀순한 날 짧은 기자회견에서 “이북 체제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어 이남으로 넘어왔다.”는 것이고, 28일 내외신 기자회견에서는 좀더 길게 설명했는데, 다음과 같다. “북조선사회는 극심한 식량-경제난으로 굶주려 있는데다가 부정부패, 강도, 도적질 등 사회악이 그칠 새 없습니다. 반면 소위 당일꾼, 안전원, 검찰, 재판관 등 한줌도 안 되는 관리들이 실제적 권한을 갖고 오직 자기가족들만을 위해 생활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아첨과 뇌물 없이는 인정을 못 받는 사회입니다. 사회, 군대가 모두 썩었습니다. 이토록 인민들은 학대받고 굶주리고 있는데, 김정일은 전쟁준비에만 온 힘을 쏟고 있습니다. 식량난이 심해도 군대에 우선적으로 쌀을 내줍니다. 전 전선에 무력을 집중 배치, 맹훈련을 하며 눈코 뜰 새 없이 전쟁연습으로 달달 볶습니다. 저는 더 이상 이런 곳에서 살 수 없었으며, 이런 실태를 이남 민중에 알리고 전쟁위협을 고발하기 위해 내려왔습니다. 이북에 가족을 두고 있지만 나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북민중을 굶주림 속에서 구원하기 위해 귀순했습니다. 며칠 동안 서울을 돌아보고 내가 귀순한 것이 옳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우리는 북한체제가 얼마나 자기모순에 빠져있는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한계에 도달됐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철수 대위의 입을 통해 좀더 사실적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그가 북한인민을 구원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남쪽으로 미그19기의 기수를 돌렸다는 말에서 강철 같은 그의 민족애 내지 사명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엘리트 조종사며, 지금 당장이라도 남한 공군의 조종사로 근무해도 부족함이 없을 듯한 이철수 대위의 행동을 보면서 무언가 가슴에서 떠나지 않는 게 있었다. 남한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든, 영화의 한 장면을 극적으로 연출한 한민족의 아들, 이철수 대위에게 느껴지는 연민의 정체는 무언가?
이철수 대위는 북한 공군복 안쪽에 가족사진을 한 장 품에 안고 왔다. “영원히 추억 속에”란 문장이 새겨진 가족사진이었다. 공군정장을 한 이철수 대위, 사진 속에서도 미인형으로 보이는 아내 이성옥(27세), 아들 명진(4세), 딸 명심(2세) 네 식구가 함께 찍은 사진은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가족사진이었다. 신문에 실린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이철수는 어떤 사연이 있기에 이런 가정을 북에 내버려두고 혼자만 내려왔을까, 하는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아픔이 다가왔다. 이 아픔은 곧 짜증스러움으로 변했다. 이철수 대위는 영웅인가, 아니면 돈키호테인가? 부모, 친척이야 그렇다 치고, 어떻게 젊디젊고 예쁜 아내를, 스스로 말하듯이 사람이 살 수 없는 북한에 버려두고 혼자만 뺑소니 칠 수 있는가? 아내는 그렇다 치고, 눈망울 초롱초롱한, 토끼새끼 처럼 복스런 아들과 딸을 자기도 견디지 못한 그곳에 그렇게 버릴 수 있었는가? 이건 도저히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다. 북한 인민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 아내와 자식을 포기한다는 건 이런 상황에는 어울리지 않는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
이제 북한에 남겨진 27세의 젊은 그의 아내는 세상물정 분간 못하는 서너 살 박이 아이들을 데리고 어떻게 그 척박한 세상을 살아갈 것인가? 아무리 이념이 좋아도, 체제가 못마땅해도 다복한 가정을 해체시키는 행위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 그런 그를 영웅시 하는 우리 정부와 그 사건을 센세이셔날하게 다루고만 있는 우리의 매스컴은 진정 인민구원의 담지자들인가? 만약 나 같으면 그 어떤 악한 체제하에서라도 가족을 그렇게 내동댕이치고 떠나지는 못할 것 같다. 아, 젊은 이철수 대위! (9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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