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의 딜레마

설교는 신자들의 신앙을 고취시키기 위해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시키는 작업이다. 비록 신학대학에서 소정의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다고 하지만 설교자로 나선다는 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설교가 단순히 어렵기 때문만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설교자가 서야할 실존적인 한계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인의 비논리적이고 감상주의적 정서로 인해 설교자가 받는 정신적 압박감은 상당히 심각하다. 과연 설교자의 딜레마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첫째로, 성경해석의 문제가 설교자를 힘들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2천년 내지 2천5백 년 전에 기록된 문서를 지금 해석해낸다는 건 아무리 엄격한 역사비평의 과정을 거친다고 해도 역시 어렵다. 성경을 읽는 오늘의 시대와 성경이 기록되던 시대 사이에 놓인 간격이 엄청나기 때문에 아무나 쉽사리 접근할 수 없다는 말이다. 성경을 영적으로 읽으면 아주 쉽게 이해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긴 하지만 그건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다. 성경과 우리 사이에 놓인 2,3천년이라는 시간적 간격은 성경말씀을 해석하려는 우리를 두렵게 만들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에 절망하게 만든다. 우리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고 해석해 내야 하지만 성경은 그것만으로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역사적 성격을 갖고 있다. 역사를 초월하는 진리이지만 역사적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런 역사적 과정을 해석해 낼 수 있어야만 성경에 접근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한국 교회의 설교가 갖는 문제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성경의 역사적 성격을 간과해 버리고, 흡사 도사들이 도통해서 신비한 세계를 풀어가듯이 성경을 해석해 내려고 한다. 이런 이들로 말미암아 성경이 ‘이현령비현령’ 식으로 해석되고, 나아가서 많은 사이비 종파가 득세하게 된다.
둘째로, 성경의 말씀을 오늘 우리의 삶에 적용시키는 작업이 또한 어렵다. 지금 청중들은 매우 세속적인 세상에서 세속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그 철저성과 과격성, 그리고 그 투쟁성을 요구한다는 건 어린 아이들에게 쌀가마니를 짊어지라는 것과 비슷하다. 대개의 신자들은 일주일 동안 신이 없는 것 같이 돌아가는 이 세상, 지나치게 영악한 세상 속에서 비장한 심정으로 살아간다. 매사에 돈이 연관되고, 이익과 손해에 의해 계산된 세상 구조 속에서 조금이라도 밀리지 않으려고 사생결단식으로 살아간다. 요즘은 한결 괜찮아졌지만 얼마 전만 하드라도 주변에서 땅 투기를 해서 며칠 만에 수천만 원을 벌었다는 소문을 듣고, 혹은 경제적 여유가 있는 학부모들이 담임교사에게 도에 넘칠 정도로 촌지를 뿌려대는 그런 세상 속에 일주일을 보내다가 교회에 나와 설교를 듣는 청중들의 마음 밭에 어떻게 사랑과 희망과 평화에 대한 설교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한국교회는 흡사 ‘갓바위’식의 설교를 해댔다. 그들의 귀에 솔깃한 설교, 축복받는다는 그런 설교, 다 잘된다는 그런 설교, 그들에게 직접 이해타산이 걸려 있는 그런 설교를 해야만 신자들이 모여들었다. 설교를 듣는 청중들의 요청이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설교자가 세일즈맨이라면 그렇게 해서라도 장사를 잘하면 된다. 그러나 설교자는 상품을 파는 게 목적이 아니라 삶의 변화를 목적으로 말을 해야 하기 때문에 비록 청중들에게 호응을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성경의 진리론적 근거로 부터 이탈되어서는 안 된다. 청중의 요구에 빗겨 서 있으면서도 의연하게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게 바로 설교자의 십자가다.
셋째로, 설교의 내용 앞에서 설교자 자신이 스스로 떳떳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 설교자는 당황스럽다. 즉 자신의 말에 충실한가, 하는 점이다. 예컨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설교를 하면서 목사 스스로 이웃에게 인색하다면, 돈을 사랑하는 게 일만 악의 악이라고 외치면서 돈을 밝힌다면 어떻게 되는가? 물론 일반 신자들 보다 목사의 신앙생활이 좀더 종교적으로 세련됐을지 모르지만 성경과 설교의 차원에서 볼 때 목사도 역시 일반 신자들과 차이가 없다. 스스로 행할 자신이 없는 설교를 외쳐야 한다는 설교자의 고민이 없을 수 없다. 어느 설교학자는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목사는 그렇게 행할 자신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즉 그렇게 살기 때문에 설교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살도록 힘쓰겠다는, 또한 힘쓰자는 뜻으로 설교를 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그런 설명만으로 말과 행위의 분열로 부터 목사가 자유로운 것은 절대 아니다. 아마 설교행위를 그만 둘 때 까지 목사는 이런 딜레마로 부터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설교는 일종의 투쟁이다. 청중을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아는 재주로 설교할 수는 없다. 설교자의 전 실존, 전인격이 송두리 채 바쳐지는 그런 절치부심의 행위여야 한다. 설교는 주부교양강좌나 대학 강단의 강의 보다 훨씬 심각하게 그 행위자를 압박한다. 교양강좌나 대학 강의는 그 장소와 그 시간에 이루어지는 메시지의 내용으로만 평가되지만, 설교는 설교자의 인격 까지 평가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신학자였던 칼 바르트는, 설교자는 하나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당위, 그리고 그걸 전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 사이에 놓여있다고 말했는데, 바른 지적이다. 그만큼 설교자의 딜레마가 심각하다는 말이다.
설교자는 결국 성령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성경을 완전하게 해석해 내지 못했지만, 청중을 완전하게 사로잡지 못했지만, 또한 스스로 말씀에 완벽하게 서 있지는 못하지만, 성령이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신다는 믿음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9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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