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해서

몇 년 전에 한번 사회적 이슈로 잠시 부각되었다가, 지난 5월21일 종교적인 이유로 병역을 거부한 여호와의 증인 신도 두 사람에 대해 재판부가 그동안의 대법원 판례를 깨고 1심에서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다시 논쟁의 불길이 지펴진 '양심적 병역 거부' 문제는 우리 기독교의 입장을 매우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이 문제에는 우리가 이단으로 간주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주로 연루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직접적으로 개입하기가 약간 찜찜하다는 말이다. 만약 우리가 그들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반대하면 교회 밖으로부터 종교적 갈등이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고, 거꾸로 그들의 주장을 지지하면 교회 안에서 이단과 영합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우리의 생각을 쉽게 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남에게서 무슨 소리를 들을까 하는 것이 걱정이라기보다는 이 사안 자체가 매우 복잡하기 때문이다.
교회 밖에서는 사람들에 따라서 아주 간단히 종교의 자유보다는 국가가 우선이라는 점을 내세워 이들 여호와의 증인을 비판하기도 하고, 국가의 의무보다는 개인의 양심이 우선이라는 점을 내세워 옹호하기도 한다. 그러나 국가와 종교, 또는 국가와 양심의 관계를 이렇게 규범적으로 재단할 수는 없다고 본다.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국가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그 국가라는 체제도 결국 역사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국가를 절대화할 수 없다. 거꾸로 인간의 양심이라는 것이 소중하고, 또한 종교의 자유가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지만 그런 것들이 늘 진리로 작동된다는 보장은 없다. 모든 기존의 국가와 문화와 역사의 틀을 부정하고 훨씬 높은 영적 가치를 추구한다던 수많은 소종파들이 실제로는 인간을 파괴하는 일이 많았다. 따라서 이런 이념들의 충돌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판단되어야지, 일반적 잣대로 접근하면 아무런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의 가장 결정적인 상황은 분단체제이다.
해방 이후 거의 60년에 가까운 분단체제 안에서 살아온 덕분에 한국 사람들에게는 군복무 문제가 거의 절대이념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회 공익 업무로 군복무를 대체해달라는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술자리에서 나누는 대화의 상당 부분이 군대에서의 체험이라는, 약간 특이한 이런 현상을 감안한다면 그들의 종교적 주장은 공감(共感)을 얻기보다는 공분(共憤)을 얻기에 안성맞춤이다. 물론 공론화의 계기로 들어선 이 문제를 전향적으로 해결해보려는 노력들이 사회 일각에서 있기는 하지만 대세를 얻기에는 역부족이다. 아마 남북통일의 기운이 현재보다 훨씬 강력하게 가시화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상당 기간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은 감옥에 가는 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논란은 그렇다 치고, 우리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응해야만 할까?
한국 기독교는 이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를 신학적으로 진지하게 다루기보다는 사회가 요구하는 일반적 논점이나 더 나아가 종파 이기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 같다. 진보적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보수적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의 입장이 다른데, 이번 문제에서만은 주로 한기총의 목소리가 강하게 나온다. 한기총이 반대하는 근거는 두 가지이다. 한 가지는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국가적 안보불안이다. 양심적 병역거부의 무죄판결은 "비록 1심 판결이지만 병역기피 확산으로 이어져 국가 안보를 위태롭게 하며 국민들의 위화감이 조성될 것을 크게 우려한다." 또 하나의 이유는 헌법이 보장하는 양심의 자유보다는 병역거부를 명시화하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 교리가 이번 판결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독실한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이 보이고 있는 병역거부 태도가 개인의 양심과 국가의 관계를 보다 심층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한 상태에서 나왔다기보다는 여호와의 증인에서 가르치는 '교리'에 충실해야겠다는 신앙적 결단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한기총의 이런 비판은 일단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들의 교리 자체가 이미 그들 나름대로 충분한 신학적 반성을 거친 결과물이기 때문에 제 3자인 우리로서 그게 양심이니, 교리이니 시비를 걸 일은 아니다.
한기총을 중심으로 보수적 입장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양심적 병역 거부 문제를 이렇게 강하게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저런 이유가 있겠지만 실제로는 두 가지로 집중된다. 하나는 그들이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듯이 국가 안보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그들은 이런 양심적 병역 거부가 일반화함으로써 군사력에 치명적인 차질이 생길지 모른다는 염려를 실제로 한다. 비록 일부분이 철수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막강한 화력을 보유하고 있는 미군과 동맹관계에 있는 남한의 군사력이 소수의 양심적 거부자들로 인해서 결정적으로 손상을 입는다거나, 더 나아가서 북한이 이것을 기회로 도발할지 모른다는 염려는 쓸데없는 노파심에 불과하다. 국가의 군사력 문제는 내가 판단할 범위를 넘기 때문에 접어두기로 하고, 다만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북한의 실체에 대해서 거의 노이로제 증세를 보이고 있다는 그 현상의 이유만은 몇 마디 지적해야겠다.
보수적 기독교 지도자들과 신자들은 기회만 있으면 북한과의 관계를 악화시키거나 아니면 그들의 일방적인 양보를 받아내는 데에 힘을 쏟는다. 나는 그분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고 본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반김일성, 반김정일, 반공 등으로 무장되어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반적인 정서를 그대로 갖고 있다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대형교회의 지도자들 중에는 북한 정권과의 갈등으로 인해 월남한 분들이 많다는 것이다. 북한 정부와 이들 목회자들 사이에 원초적 악연이 있다는 말이다. 좀더 신앙적인 이유를 든다면 이런 분들은 공산주의의 무신론이 기독교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북한 집단을 향한 이들의 분노와 적개심은 결국 양심적 병역거부와 같이 국가 안보를 약간이라고 헤칠 지도 모를 개연성에 대해 전투적인 자세를 보일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으로, 한기총의 반대 주장에 들어있는 훨씬 깊은 속내는 이번 일로 인해서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선교적 이득이 돌아갈지 모른다는 염려일 것이다. 만약 여호와의 증인 신도가 됨으로써 병역 거부가 합법화된다면 당연히 선교의 장이 넓어지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병역을 피하기 위해서 웃지 못할 일들이 많이 벌어지는 오늘의 현실에서 보면 이 문제가 여호와의 증인을 크게 키워주는 계기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각설하고, 나는 양심적 병역 거부 문제, 더 정확하게 말해서 대체 복무에 대해 기독교 측에서도 적극적으로 지지 입장을 보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노코멘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지해야 할 이유는 이미 사회 안에서 여러 통로를 통해서 잘 알려진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예수님의 경구를 문자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폭력과 억압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해체한 십자가와 부활을 신앙의 토대와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증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거나 축자적 해석에 머물기 때문에 벌어지는 모순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심적 병역 거부는 하나님 나라의 평화 지향성이라는 큰 틀에서 볼 때 우리가 마땅히 지지할만한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노코멘트'가 훨씬 기독교인답다. 비록 총과 칼이 기독교적인 방식이 아니지만 큰 폭력을 막아내기 위해서 작은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는 오늘의 현실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기꺼이 군대에 간다. 흡사 권세에 복종하라는 바울의 가르침(롬 13장)이 무질서로 인해서 당하게 되는 신앙적 피해보다는 악한 질서라도 있는 게 낫다는 의미와 같다 하겠다. 우리가 궁극적으로는 비폭력이어야 하지만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지 못한 이 현실에서 어쩔 수 없이 반(反)폭력을 선택했다면 비폭력을 현실화하려는 그들의 노력을 부정하지는 않는 게 바른 태도라고 본다. 우리의 선택은 우리의 책임며, 그들의 선택은 그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아직도 궁극적인 것을 이 현실 세계 안에서 확실하게 담보하지 못한 우리가 앞장서서 양심적 병역 거부를 반대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이럴 때는 입 다무는 게 본전이다. (2004.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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