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자유와 숙명

나는 어렸을 때 간혹 엉뚱한 생각을 하곤 했다. 만약 내가 부잣집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면, 잘 사는 국민으로 태어났다면, 나의 부모가 지식이었다면 어땠을까?
나의 출생은 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 없이 발생하는 일종의 숙명이다. 출생만이 아니라 어쩌면 그 이후의 삶도 역시 그런 숙명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지 모른다. 내가 만약 목사가 아니라 다른 직장인이었다면, 내가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면 어땠을까?
직업이나 결혼 같은 문제는 나의 자유로운 선택인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이것 또한 숙명적인 성격을 배제하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숙명적으로 나는 목사가 되었고, 또한 현재의 나의 아내와 결혼했는지 모른다.
만약 내가 기독교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면 교회에 나갈 기회가 없었을 것이며,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면 당연히 목사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대구에 내려오지 않았다면 현재의 내 아내될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며, 그렇게 내 인생이 흘러갔다면 나는 다른 여자와 결혼했을 것이다. 이런 투의 이야기는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 사건들, 그 모든 대상은 자신의 선택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무엇인가의 틀 안에서 진행되는 것 같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인간이 전적으로 자신의 자유로움안에 머무는 부분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아마 이런 의미에서 칼빈은 예정론을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인간의 삶을 곰곰이 살펴보면 거의 숙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칼빈은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며 예정이라고 이해했다.
기독교적 의미에서 인간의 운명을 말할 때, 더 정확히 말해서 인간의 구원을 말할 때 하나님의 전적인 예정과 인간의 자유로운 참여의 문제는 초대 교회 이후 오랫동안 갈등의 요소가 되었으며, 그 갈등의 투쟁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다.
기원후 4세기 경에 하나님의 절대적 은총을 주장하던 어거스틴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던 펠라기우스 사이에,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공방이 뜨겁게 가열된 적이 있었다. 물론 그 당시 교회는 펠라기우스를 이단으로 단죄하였지만 그 싸움이 그것으로 종료된 것은 아니었다.
이 논쟁의 핵심은 결국 인간론에 집중된다. 인간이 완전히 부패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 운명이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지, 아니면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이후에도 여전히 선한 부분이 남아서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 영역을 갖고 있는지의 문제다. 이러한 논의는 종교개혁자들을 거쳐 20세기 초의 독일 변증법 신학자들에게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조금 더 확장시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미래는 결정되어 있는가, 아니면 반대로 열려 있는가? 앞으로 인류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결정론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그 미래가 창조시에 이미 결정되었다는 주장도 가능하며, 반대로 인류의 미래는 인간이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인류의 미래, 역사의 미래에 대한 주제는 역사학이나 물리학, 혹은 인간의 미래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모든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다. 예를 들어 헤겔에게 있어서 역사는 절대 정신으로서의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내는 장소이기 때문에, 그것은 절대 역사로서 이미 완전한 역사가 된다.
이 말은 하나님의 절대성을 표현하는 것 같지만 동시에 인간의 자유가 상실될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다. 이미 완료된 역사라고 한다면 이 역사의 미래를 위한 인간의 자유는 설 자리가 실종되고 만다.
미국의 저명한 기독교 윤리학자 리차드 니버의 형인 라인홀드니버(1892~1971)는 1961년에 <인간의 본질과 운명>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은 그가 20년 전에 행한 기포드 강연을 묶은 것으로서 2권으로 짜여졌다.
그는 이 책에서 서구문명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인간의 본질과 인간의 운명이라고 전제하면서, 이것은 곧 개인과 역사의 관계라고 피력하고 있다. 개인이 역사와 어떤 관계 안에 놓이는가의 문제다.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개인의 운명이 어떻게 좌초당하는가의 문제, 혹은 그 역사를 어떻게 극복해 가는가의 문제가 필자가 설명해 보려는 핵심적 내용이다.
지난 7월 26일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사고가 있었다. 110명 중에서 생존자는 44명뿐이었다. 비행기가 산에 추락했는데도 3분의 1이 살았다는 것은 기적적인 일이다.
그런데 탑승객 중에 열 한 명이 취소로 인하여 대기자들이 대신 탑승했다고 한다. 어떤 연유에선지 열 한 명은 그 비행기를 타려다가 취소했고, 대신 탑승한 이들이 이 사고를 당했다. 자신들의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했지만, 그것은 그들의 운명을 정반대로 갈라 놓은 사건이 되었다.
같은 비행기에 탑승했지만 뒷줄에 앉은 사람은 62%나 죽음을 면했다고 한다. 비행기의 좌석 번호에 따라 생사가 갈린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아무리 숙명적인 사건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들에게 밀어닥친다고 하더라도,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며 살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 숙명을 바꾸기 위하여 점을 본다거나 주술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갈 수도 없다. 그것은 또 하나의 숙명주의에 불과하다. 인간은 끊임없이 숙명적인 사건 앞에 노출되어 있지만 자유를 상실하면 안 된다. 인간 문명의 발전은 숙명주의와의 투쟁이요, 그것의 극복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인간이 숙명의 노예로 살아가라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유한 영혼을 갖고 살아가라는 말이다. 여자로서의 숙명, 가난이라는 숙명, 분단국이라는 숙명, 노동자라는 숙명을 자유혼으로 극복하며 살아가야 한다. (1993년, 정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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