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목적으로 다루어 지지 않고 수단으로 다루어질 때, 그 이념이나 체제는 건강할 수 없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가 인간이 주인이라는 구호를 외쳐댔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렇지 못했다.

소위 현실 사회주의는 인간의 얼굴을 상실한 관료주의적 공산당에 의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프로레타리아에게 해방과 자유를 약속했던 저들은 결국 가난과 소외만 불러온 것이다.

그렇다고 자본주의가 진정 인간의 얼굴을 한 체제라고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자본이 원활하게 움직여 가능한 많은 이들에게 많은 부를 안겨 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오히려 자본은 한쪽으로 편중된 위험성이 다분히 많타고 보아야 한다.

다행히 서유럽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가 기본적으로 부의 재분배라는 정신에 입각한 사회보장 제도를 일찌감치 실천하므로써 경직된 사회주의 보다는 비교적 성공한 경제질서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 앞으로 어떤 결과로 진행될지 확실하게는 알 수 없지만 자본을 인간 상위 개념으로 이해하는 사회로 진행된다면 그 전도가 어둡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빈익빈 부익부라는 말이 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원론적인 비판이 될 것이다. 한국 사회는 비록 유럽 여러 나라와 같지는 않더라도 다행히 아직까지는 변증법적으로 그 모순과 약점을 나름대로 치유해 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안타깝게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확대되고 있는 것 같다.

성결교회만 보더라도 현재 1천8백여 개의 교회 중에 3분의 1에 속하는 교회가 재정적으로 자립을 하지 못하고 있다. 농촌 교회는 한국의 농촌 경제가 그러하듯이 젊은 사람들이 떠남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며, 도시의 개척 교회는 대개 도시 빈민들의 생활처럼 전세방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들 교회는 넉넉한 여러 교회로부터 보조를 받아 꾸려 나가고 있다. 수완 좋은 교역자는 넘치게 도움을 받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교역자는 최저 생활비도 보장받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목사나 전도사도 먹고 살아야 하는데 최소한의 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상태에서 복음을 소신대로 전한다는 것은 그렇게 말처럼 쉽지 않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미자립 교회 문제를 단순히 개교회에서 선교비를 보조해 주는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미봉에 불과하다. 보다 근원적인 해결책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는 분명히 크다. 작년에 보도되어 적지 않은 파문을 던진 것처럼, 세계 50개 대교회 중에 한국에 있는 교회가 반수를 차지한다고 한다. 한 교회에 수천 명의 교인은 보통이며, 많게는 수십만 명을 헤아릴 정도다.
그러나 모든 교회가 이렇게 활성화되어 있지는 못하다. 작은 교회는 여전히 몇 십 명의 교인도 되지 못한 형편이다. 수십, 수백억 원의 일 년 예산을 갖는 교회가 있는 반면에 수백만원도 되지 못하는 교회가 수두룩한 이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우선은 한국 사회의 경제구조가 교회의 구조를 그렇게 만들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농어촌 교회의 어려운 형편은 농어촌 교회의 젊은이나 일꾼들이 모두 서울이나 대도시로 빠져 나가기 때문에 발생하는 불가피한 현상이다.

또한 한국 교회 교인들이 신앙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다만 세련된 종교행위에 만족하고 있다는 점도 그런 현상을 심화시키는 요인 중의 하나다. 오늘의 신자들은 초호화판 교회 시설과 데커레이션, 그리고 세련된 성가대의 합창과 적당히 교양심을 부추길 만한 설교에 만족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하고 그것이 육화되는 변화를 희망하지 않고, 신앙을 흡사 좋은 영화 한 편 감상하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이러한 형편이라면 신자들이 시설 좋은 교회에서, 어떤 부담감 없이 익명성을 유지한 채 참여하는 것을 선호하기 마련이다.

오늘의 신앙이 신자들에게 교양과 취미생활, 그 이상을 의미하고 있을까?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하다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풍토라면 마치 현대인들이 너도 나도 재래식 시장보다는 세련된 백화점을 선호하듯이, 투자를 많이 해서 편리한 교회에 사람들이 모이게 마련이다.

교회의 빈익빈 부익부 문제를 해결하려면 큰 교회가 형편에 따라 작은 교회를 어느 정도 도와 주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올바른 교회론이 회복되어야 한다. 즉 교회는 오직 하나의 교회만 있을 뿐이라는 확고한 생각을 우리 모두 가져야 한다. 서울의 어느 대형 교회나 현풍의 작은 우리 교회나 할 것 없이, EH한 장로교회나 성결교회나 할 것 없이 모든 교회는 하나의 교회다. 어느 교회에서 사역을 하거나 목사는 목회라는 면에서 하나의 지체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지교회 중심주의가 깨어지고 전체 교회, 보편적 교회가 우선해야만 한다.

너의 교회, 나의 교회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만 있을 뿐이다. 우리가 만약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나의 교회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할 수 있다면, 잘난 교회도 없고 못난 교회도 있을 수 없으며, 바울의 가르침처럼 오히려 약한 지체가 더 소중히 여김을 받게 될 것이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거지 나사로의 비유가 나온다. 나사로는 부자집 문 앞에서 걸식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잣대로 판단한다면 그는 무능력한 사람이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 먹을 것을 자기가 알아서 벌어 먹어야 할텐데, 그는 그저 부자의 도움으로만 살아가려고 했다.

아마 그 부자는 심심치 않게 나사로에게 동정을 베풀었을지 모른다. 나사로가 그렇게 살아간 것이 그 부자에게 책임이 없었을텐데도 불구하고 그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갔다고 한다.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신 이유는, 가난한 사람에게 동정을 베푸는 것만으로는 하늘 나라에 갈 수 없다는 것을 뜻하는게 아닐까?

넉넉한 교회가 가난한 교회를 돕는 것은 남의 교회를 돕는 일이 아니라 자기 교회를 돕는 일이다. 그것은 남에게 베푸는 행위가 아니라 당연히 교회가 해야 할 본질적인 일을 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작은 교회를 동정해서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구원을 위한 최소한의 의무다. 오늘의 한국 교회 구조 안에 놓여 있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 모두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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