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개방, 무엇이 문제인가?

요사히 쌀개방 문제로 인해 대한민국 전체가 온통 야단이다. 냉해와 추곡가 싱갱이로 그렇지 않아도 마음 쓰라린 농부들이 때 아닌, 사실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지만, 쌀개방 때문에 볏단을 불사르기도 하고 농기계를 반납하면서 개방반대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으며, 농대교수들은 성명서를 발표하고, 국회농수산 위원회는 여야 위원들 사이에 저자거리의 싸움질 처럼 난장판을 펼쳤다.

농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더구나 국제 경제질서에 대해서 거의 까막눈이라 할 목사가 쌀개방 문제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섣불리 뇌까린다는 것이 무모한, 그리고 무례한 소치라고 생각되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말해야 하지 않느냐는 책임감(?) 때문에 짧은 소견일지라도 용기를 갖고 언급해 보고자 한다.

쌀은 우리 배달의 겨레가 조상 대대로 주식으로 삼아온 우리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에 쌀개방은 경제적인 논리 보다는 우선 정서상의 문제가 앞선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가전제품이나 자동차, 대리석 같은 건축자제, 여자들의 옷, 심지어 쇠고기나 담배에 이르기 까지 거의 모든 부분에서 수입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쌀 수입이라는 상황 앞에서 우리 국민이 느끼는 절망감 내지 분노는 다른 어떤 합리적 답변으로 상쇄시킬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쌀개방은 우리의 정서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경쟁력이라는 면에서도 다른 품목과 근본적으로 그 성격을 달리한다. 경쟁력이란 기본적으로 그 품목의 성능과 값에 의해 결정되는데, 쌀은 우리가 미국이나 캐나다와 경쟁하기에는 너무도 취약한 품목이다. 그렇다고 쌀소비를 줄이거나, 아니면 오늘날과 같은 개인주의 시대에 애국심 운운으로 해결할 수도 없을 것이다. 예컨대 벤츠 승용차는 수입이 되더라도 워낙 비싸기 때문에 아무리 성능이 좋아도 우리나라 자동차가 그것과 경쟁할 수 있다. 쇠고기의 수입도 처음에 예민한 문제였지만, 우선 한우가 수입고기 보다 훨씬 좋은 맛을 갖고 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한우 농가에서 더 좋은 육질을 개발하도록 자극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쇠고기 수입은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담배수입은 어떤가? 양담배가 국산 보다 결정적으로 유리한 것은 없다. 값에 있어서나 질에 있어서나 큰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다만 그럴듯한 외국 모델의 선전공세 때문에 청소년 층과 외국 선호적인 사람들이 애연하게 될지 모르지만,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쌀은 우선 값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를 나타낸다. 아는 바로는 미국 캘리포니아 쌀생산비가 우리에 비해 30%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고 미질이 형편없이 떨어지느냐 하면 그렇도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이 있듯이 수입쌀이 경기도 여주 이천의 “아끼바리”만큼이야 갈 수 없겠지만, 그 질의 차이가 값의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다. 더구나 앞선 기술로 그 나라에서 우리 입맛에 어울리는 쌀을 대량생산 한다면 우리와 같이 주로 소농이나 중농으로 이루어진 영세한 농업구조를 갖고서는 도저히 경쟁할 수 없다. 결국 쌀개방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만 하면 언젠가는 수 천년 동안 지어오던 벼농사를 때려치우고 호주나 미국, 그리고 캐나다에서 수입된 값싼 쌀을 사먹고 살게 될 것이다.

쌀개방을 좋은 쪽으로 생각해 볼 수도 없지는 않다. 이 지구 위에 살고 있는 전체 인류가 앞으로 가족 처럼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요사히 흔히 회자되는 <글로벌 스피릿>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모든 인간이 지역이나 민족을 뛰어넘어 지구 전체를 생각하는 삶의 자세이다. 그렇게 될 때 지역별로, 혹은 국가별로 생산성 높은 업종을 전문적으로 발전시키고 그것을 정의롭게 분배하게 되면 모든 인류가 결국 값싸게 먹고 쾌적하한 문화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른다. 금년 안에 타결될 것으로 전망되는 <우르과이 라운드>의 근본취지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비옥한 땅이 많은 나라에서는 농산물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우리나라나 일본 같이 작은 국토를 가졌지만 산업이 발전된 나라는 공산품이나 가공식품을 주로 생산하게 되면 서로가 좋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한 나라가 모든 인간의 필요상품을 가장 저렴하게 생산할 수 없다는 것은 경제학의 기초원리에 속한다. 만약 이렇게 상부상조의 국제경제질서가 잘 진행될 수만 있다면 우르과이 라운드는 성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제질서는 어디 까지나 민족이기주의로 흘러갈 위험성이 농후하다. 우리가 농사를 전면적으로 포기하고 전자제품 단일 품목으로 세계경제를 휘어잡을 수 있다하더라도, 먼 후일 언젠가 국가간 신뢰가 상실되고 질서가 허물어졌을 때 농산물을 우리에게 수출해야할 나라들이 그것을 무기화 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컴퓨터나 비디오가 없이는 살아도 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절대로 쌀개방을 거부해야만 하며, 또한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문제의 심각성은 그것이 그렇지 못하다는데 있다. 그것이 바로 공산풍 수출에 목을 걸고 살아가는 우리, 그리고 우리 정부의 딜레마다. 자동차와 텔레비 수출은 기를 쓰고 하면서 그 나라의 쌀을 수입하지 않겠다고 버틴다면 부도덕한 일이다. 이미 쌀개방을 결사반대 할 수 없는 국제적 대세가 한반도를 감싸고 있다. 명분이 충분하지 못한 절대불가 만을 외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우리 나라의 생존권을 확보하면서 세계적인 대세에 발을 맞출 것인지 그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정작 문제는 쌀개방을 수용하는가, 않는가가 아니라 그동안 이 나라를 통치해온 이들에게서 드러나는 농업정책의 졸속에 있다. 수출산업만을 육성했지 농수산업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 수십 년간 방관하다가 갑자기 농산물 개방이라는 파고를 만나 허둥대는 모습이다. 경쟁력은 하루 이틀에 제고되지 않는다. 이미 늦은 감도 없지 않지만 이제라도 쌀농사를 생산성에 상관 없이 장기적인 정책 안에서 살려나가야 한다.

경상도 사람들은 쌀을 <살>이라고 발음한다.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 쌀은 우리 민족의 생명인 살이다. <93.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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