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켈러는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따라서 말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극한적 한계를 극복하고 금세기 위인 중의 한사람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좋은 선생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설리반이 헬렌 켈러의 가정교사로 왔을 때 헬렌 켈러는 그야말로 그 집안의 거친 애완용 동물처럼 지내고 있었다. 설리번 선생이 애정과 정성을 다하여 가르친 까닭에 헬렌 켈러가 나름대로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많은 향상이 있었지만 사물의 본질을 인식하는 일에는 별로 진척이 없었다. 도대체가 촉감을 통해서만 사물과 접촉할 수 있는 아이에게 모든 사물이 이름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는 일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헬렌 켈러 자신도 역시 안타까웠지만 설리번 선생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어느 날 설리번은 헬렌 켈러를 데리고 앞마당에 있는 펌프 앞으로 데려가서 펌프 꼭지에 헬렌 켈러의 손을 갖다 놓고 펌프질을 시작했다. 설리번 선생은 펌프물이 헬렌 켈러의 손에 흘러내릴 때 큰 소리로 외쳤다. “Water, Water!” 그 순간 헬렌 켈러는 분명하게 인식했다. 자기 손등과 손바닥에 흘러내리는 시원한 그 무엇이 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 이전 까지 그녀의 의식 속에는 이름과 사물이 연결되지 않고 뒤엉켜 있었는데, 이제 모든 사물에는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됨으로써 세계의 질서를 깨닫게 됐다. 헬렌 켈러의 의식을 고양시킨 그 대상이 물이었다는 사실은 우연일까, 아니면 그 물의 본질적 성격으로 인한 당연한 귀결일까?
우리도 헬렌 켈러의 경험을 가져보면 좋겠다. 눈을 감고 수도꼭지를 틀어서 거기서 흘러나오는 물을 우리 손과 얼굴에 갖다 대 보자.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물이 무엇인지 몰라야 한다는 점이다. 생전 처음 만져보는 사물이어야 한다. 우리 손등에 와 닿는 그 부드러움, 그 시원함, 또는 그 따뜻함, 흐르기도 하도 멈추기도 하는 그 자유로움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물과 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서양 철학의 시조라 불리는 탈레스(기원전 6세기)는 물이 만물의 근원이라고 하였다. 그가 무엇을 보고 그런 말을 했을까? 망망한 바다를 보고 그 넓이와 그 깊이에 기가 질려 그런 말을 했는지, 홍수의 그 강력한 힘을 보고 그랬는지, 혹은 아침 이슬이나 안개를 보고 그런 직관에 도달했는지 잘 모르겠으나 그가 한 말은 오늘의 잣대로 검토해 본다 하더라도 별로 틀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시사해 주고 있다 하겠다. 탈레스는 원래 B.C. 585년의 일식을 미리 알아낸 것으로 유명해 졌다고 하는데, 철학자라기보다는 과학자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 고대 사회에서는 철학자와 과학자가 구분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다른 긴 말 할 필요 없이 인간 몸의 6,70%가 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물이 만물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 알만 하다. 또한 물의 화학적 구성은 수소 두개와 산소 한개(H2O)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지구의 대기가 일정한 조건만 갖추게 되면 어느 때고 물을 생산해 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풍부한 물을 자원으로 갖고 있는 지구는 생명을 배태하고 유지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가진 혹성이라 할 수 있다.
물은 한 마디로 생명이다. 아폴로 우주선을 타고 달에 착륙한 암스트롱이 아무런 생명체도 발견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곳에 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금성도 그렇고 화성도 역시 그렇다. 식물의 광학성 작용이란 것도 물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지 않은가. 인간이 음식물을 먹지 않고 생존할 수 있는 날짜는 최소한 한 달은 되지만 물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게 될 때 그 날짜는 일주일을 넘기지 못한다고 한다. 그만큼 생명과 물은 직결되어 있다.
물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 중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성격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의 일정한 형태를 고집하지 않고 주변의 여건에 따라 바꾸어 나간다. 낮은 곳으로만 흐르고, 때에 따라서는 그 흐름을 멈추기도 한다. 물은 땅 속에서도 존재하고 개천이나 강을 이루기도 하며 바다의 형식을 가질 뿐만 아니라 구름의 모습일 경우도 있다. 물이라는 사물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그 <자유로움>일 것이다. 노자의 사상을 빌려올 필요도 없이 그 자유로움은 자기를 비우고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 인간은 너무 자기의 의도가 강한 동물에 속한다. 의도라는 것 자체가 배타적이기 때문에 자신의 의도를 성취시키려고 하다 보니 상호충돌이 없을 수 없다. 따라서 인간 사이에는 자연스러움이 깨지고 만다. 물이 아래로만 흐르는 것처럼 우리가 자연스럽게 아래를 향해서 살아간다면 별 문제가 없을 텐데 지나친 욕심을 갖고 억지로 거슬러 올라가려고 하다 보니 별 이상한 일들이 많이 벌어진다. 얼마 전에 체첸 공화국을 무력으로 침공한 러시아만 하더라도 그렇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논하던 러시아가 세계의 평화를 깨는 행위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정치가들이 입으로는 국민이 어떻고, 복지가 어떻고 하면서 살신성인 할 것처럼 떠들어 대지만 최소한 이념적 확신도 없이 결국은 자기들의 개인적인 의도를 채우려는 욕심에 불과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자들이나 교회도 예수님의 말씀과는 정반대로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무던히 애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혹시라도 교회가 세상 앞에서 자기를 자랑하려고 했다면, 그리고 교회 끼리 서로 앞서려는 경쟁에 열을 올렸다면 부끄러워해야 한다. 금년 얼마 남지 않은 동안이라도 물의 자유가 어디서 시작하는지 곰곰이 헤아려보자. <94.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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