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12
구원과 돈
톨스토이의 동화집 중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이야기가 있다. 땅을 많이 갖고 싶어 하던 어떤 사람이 드디어 그럴 기회를 잡았다. 그 나라 왕이 그에게 약속하기를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 까지 그가 발로 밟고 돌아온 땅을 모두 주겠다고 했다. 단 해가 질 때 까지 처음 그 자리에 돌아오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하루 종일 점심도 거른 채 가능한대로 멀리 돌았다. 거의 해가 빠질 때 까지 조금이라도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생명을 걸듯이 걸었다. 거의 탈진한 상태에서 이제 해가 서산을 막 넘어가려고 했다. 해의 뒷부분이 들어가는 순간에 다행히 처음 출발한 자리에 발을 디딜 수가 있었다. 이 사람은 결국 수백 만평의 땅을 소유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됐다. 그러나 너무 진을 다 뺀 나머지 마지막 발자국을 끝내는 동시에 숨이 끊겨졌다.
계몽적인 의도가 깔려 있어서 약간 진부한 냄새가 풍기지만 이 동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주옥과 같다. 자기 생명 까지 내 던지면서 소유해 보려했던 그 땅은 인간역사 이래로 항상 투쟁의 빌미였다. 이스라엘 역사를 비롯해서 세계 역사가 그렇고, 개개인의 삶도 이것과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땅은 생존의 근거이면서, 동시에 재화의 수단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부동산 투기는 그런 현상의 극치였다. 땅을 많이 가진 사람이 돈도 많이 벌고 나아가서 권력도 쥐게 되었다. 어쨌거나 톨스토이의 이 동화는 바로 오늘 무분별한 부의 축적에 삶을 내맡기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잘 그려주고 있다.
분명히 이 시대는 돈이 곧 구원이라는 명제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돈의 위력이 이 정도로 막강한 시대를 우리는 보지 못했다. 이 땅 위에서 그것 없이는 도대체가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통 보이지 않으니 통탄할 일이다. 우리는 준엄하게 질문해야 한다. 참으로 돈이 구원인가? 아니면 최소한 구원의 수단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오늘의 이런 세계구조와 질서는 하루 빨리 깨지거나 근본적으로 개혁되어야 한다.
솔직하게 말해서 돈이 많으면 세상을 편리하게 살아갈 수 있다. 이런 뜨거운 여름철 분리형 에어컨을 설치할 수도 있고, 구름을 탄 듯한 고급 승용차를 구입할 수도 있고, 과목당 1천만 원짜리 족집게 개인지도를 자식들에게 시킬 수도 있고, 온 집안에 수천만 원짜리 수입가구로 떡칠을 할 수도 있다. 어디 그것 만이겠는가? 골프 회원권, 콘도, 외국여행 등 멋진 인생을 설계할 수도 있다. 그렇게 까지 많은 돈은 아니라도 적당한 크기의 자기 집과 중간 정도의 승용차, 그리고 자녀들 대학 공부시키는 데 쪼들리지 않을 정도의 돈이 필요하다. 조금 여유가 있어야 남에게 손을 내밀지도 않고, 어려운 이웃을 도울 수도 있다는 점에서 돈은 반드시 필요한 만큼은 있어야 하고, 가능한대로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간혹 가난한 북한, 방글라데시, 에티오피아 등의 나라들을 보면서 저렇게 가난에 찌들려 살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요즘 북한에서는 심지어 굶어 죽는 사람들이 있고, 식량을 얻기 위해 월경을 마다하지 않는다고 하니 같은 민족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런 저런 처량한 모습들을 보면서 우리가 이 정도로 경제적 성과를 거둔 게 대견스럽게 여겨지기도 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가난한 나라로 뒤쳐지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기도 한다. 그게 우리 모두의 바람이고 철학이기도 하다.
여기까지야 누가 탓할 수 있겠는가? 기왕에 한평생 살다가 가도록 되어 있는데 조금이라도 편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누가 나무랄 수 있겠는가? 그런 각오로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어서 자신과 자식들에게 투자하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삶의 자세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가치관이 돈에 고정되어 버렸다는 데 있다. 그것만이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고 자유롭게 하고, 결국 구원케 한다는 확고부동한 생각이 우리를 지배한다는 점에서 위기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라. 돈이 독선적으로 지배하지 않는 구석이 하나라도 있는가를.
돈이 지배하는 사회 구조 속에서 교회의 구원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만약 교회가 좋은 믿음을 가져야만 더 많은 축복을 받고 자식도 잘되고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선전하기만 한다면 바알 종교와 차별성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복음을 상품으로 여기고 높은 생산성만을 절대이념으로 생각한다면 교회는 자본주의 이념을 위한 도구에 불과할 것이다.
무엇이 복음의 구원인가? 구원은 교회에서 흔히 말하는 대로 돈으로 값을 주고 살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참여하는 것이다. 만약 이 말이 옳다면 부를 소유하고 축적해 감으로써 얻어지는 게 아니라 철저하게 하늘로 부터 배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돈으로 매매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함이다. 그건 평화, 기쁨, 자유, 사랑, 정의로움 같이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절대적 신뢰다.
조금 더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자. 우리가 어떻게 행복해 질 수 있는가? 많은 소유가 우리를 그렇게 만들지 못한다는 건 예수님이 누차 강조한 말씀이다. 비록 물질적으로 넉넉지 못해도 하늘과 바람과 별과 하나 되는 세상을 바라보며, 또한 이웃을 돈벌이의 대상으로서 바라보지 않고 진정한 형제애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때 행복하게 된다. 기독교적인 언어로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뢰심이다. 아무리 돈이 전횡을 일삼는 이 현실 세계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것 너머에서 우리를 향해 비추고 있는 참된 구원의 현실성들을 확인해 나가야 한다. (96.7.14)
톨스토이의 동화집 중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이야기가 있다. 땅을 많이 갖고 싶어 하던 어떤 사람이 드디어 그럴 기회를 잡았다. 그 나라 왕이 그에게 약속하기를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 까지 그가 발로 밟고 돌아온 땅을 모두 주겠다고 했다. 단 해가 질 때 까지 처음 그 자리에 돌아오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하루 종일 점심도 거른 채 가능한대로 멀리 돌았다. 거의 해가 빠질 때 까지 조금이라도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생명을 걸듯이 걸었다. 거의 탈진한 상태에서 이제 해가 서산을 막 넘어가려고 했다. 해의 뒷부분이 들어가는 순간에 다행히 처음 출발한 자리에 발을 디딜 수가 있었다. 이 사람은 결국 수백 만평의 땅을 소유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됐다. 그러나 너무 진을 다 뺀 나머지 마지막 발자국을 끝내는 동시에 숨이 끊겨졌다.
계몽적인 의도가 깔려 있어서 약간 진부한 냄새가 풍기지만 이 동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주옥과 같다. 자기 생명 까지 내 던지면서 소유해 보려했던 그 땅은 인간역사 이래로 항상 투쟁의 빌미였다. 이스라엘 역사를 비롯해서 세계 역사가 그렇고, 개개인의 삶도 이것과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땅은 생존의 근거이면서, 동시에 재화의 수단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부동산 투기는 그런 현상의 극치였다. 땅을 많이 가진 사람이 돈도 많이 벌고 나아가서 권력도 쥐게 되었다. 어쨌거나 톨스토이의 이 동화는 바로 오늘 무분별한 부의 축적에 삶을 내맡기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잘 그려주고 있다.
분명히 이 시대는 돈이 곧 구원이라는 명제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돈의 위력이 이 정도로 막강한 시대를 우리는 보지 못했다. 이 땅 위에서 그것 없이는 도대체가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통 보이지 않으니 통탄할 일이다. 우리는 준엄하게 질문해야 한다. 참으로 돈이 구원인가? 아니면 최소한 구원의 수단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오늘의 이런 세계구조와 질서는 하루 빨리 깨지거나 근본적으로 개혁되어야 한다.
솔직하게 말해서 돈이 많으면 세상을 편리하게 살아갈 수 있다. 이런 뜨거운 여름철 분리형 에어컨을 설치할 수도 있고, 구름을 탄 듯한 고급 승용차를 구입할 수도 있고, 과목당 1천만 원짜리 족집게 개인지도를 자식들에게 시킬 수도 있고, 온 집안에 수천만 원짜리 수입가구로 떡칠을 할 수도 있다. 어디 그것 만이겠는가? 골프 회원권, 콘도, 외국여행 등 멋진 인생을 설계할 수도 있다. 그렇게 까지 많은 돈은 아니라도 적당한 크기의 자기 집과 중간 정도의 승용차, 그리고 자녀들 대학 공부시키는 데 쪼들리지 않을 정도의 돈이 필요하다. 조금 여유가 있어야 남에게 손을 내밀지도 않고, 어려운 이웃을 도울 수도 있다는 점에서 돈은 반드시 필요한 만큼은 있어야 하고, 가능한대로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간혹 가난한 북한, 방글라데시, 에티오피아 등의 나라들을 보면서 저렇게 가난에 찌들려 살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요즘 북한에서는 심지어 굶어 죽는 사람들이 있고, 식량을 얻기 위해 월경을 마다하지 않는다고 하니 같은 민족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런 저런 처량한 모습들을 보면서 우리가 이 정도로 경제적 성과를 거둔 게 대견스럽게 여겨지기도 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가난한 나라로 뒤쳐지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기도 한다. 그게 우리 모두의 바람이고 철학이기도 하다.
여기까지야 누가 탓할 수 있겠는가? 기왕에 한평생 살다가 가도록 되어 있는데 조금이라도 편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누가 나무랄 수 있겠는가? 그런 각오로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어서 자신과 자식들에게 투자하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삶의 자세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가치관이 돈에 고정되어 버렸다는 데 있다. 그것만이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고 자유롭게 하고, 결국 구원케 한다는 확고부동한 생각이 우리를 지배한다는 점에서 위기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라. 돈이 독선적으로 지배하지 않는 구석이 하나라도 있는가를.
돈이 지배하는 사회 구조 속에서 교회의 구원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만약 교회가 좋은 믿음을 가져야만 더 많은 축복을 받고 자식도 잘되고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선전하기만 한다면 바알 종교와 차별성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복음을 상품으로 여기고 높은 생산성만을 절대이념으로 생각한다면 교회는 자본주의 이념을 위한 도구에 불과할 것이다.
무엇이 복음의 구원인가? 구원은 교회에서 흔히 말하는 대로 돈으로 값을 주고 살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참여하는 것이다. 만약 이 말이 옳다면 부를 소유하고 축적해 감으로써 얻어지는 게 아니라 철저하게 하늘로 부터 배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돈으로 매매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함이다. 그건 평화, 기쁨, 자유, 사랑, 정의로움 같이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절대적 신뢰다.
조금 더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자. 우리가 어떻게 행복해 질 수 있는가? 많은 소유가 우리를 그렇게 만들지 못한다는 건 예수님이 누차 강조한 말씀이다. 비록 물질적으로 넉넉지 못해도 하늘과 바람과 별과 하나 되는 세상을 바라보며, 또한 이웃을 돈벌이의 대상으로서 바라보지 않고 진정한 형제애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때 행복하게 된다. 기독교적인 언어로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뢰심이다. 아무리 돈이 전횡을 일삼는 이 현실 세계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것 너머에서 우리를 향해 비추고 있는 참된 구원의 현실성들을 확인해 나가야 한다. (96.7.14)
2008.04.01 20:07:25
스콧니어링이 미국사회로 부터 외면당하고 자기 아내와 시골에서 자족자급하면서 한가지 규칙을 정하면서 생활했는데, 그것은 그들 부부가 1년 예산을 세우고 그 예산이 채워지면 더 이상 일하지 않고, 여행과 강연 그리고 이웃과 더불어 그 시간을 같이 했다고 하더군요.
아마 그들 부부는 철저하게 자본의 힘과,파괴 욕망을 충분히 인지한 분들이라 생각되어졌습니다.
돈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돈으로 매매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 나라의 참여함이다. 그건 평화, 기쁨, 자유, 사랑, 정의로움 같이 새로운 새계에 대한 절대적 신뢰다" 이 말씀 가슴 깊이 새깁니다....
아마 그들 부부는 철저하게 자본의 힘과,파괴 욕망을 충분히 인지한 분들이라 생각되어졌습니다.
돈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돈으로 매매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 나라의 참여함이다. 그건 평화, 기쁨, 자유, 사랑, 정의로움 같이 새로운 새계에 대한 절대적 신뢰다" 이 말씀 가슴 깊이 새깁니다....
이웃을 진정한 형제로 관계하는 세상..
돈으로 살 수 없는 하느님의 세상..!!
아, 가슴이 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