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출 미학에 대해

최근 몇 년 동안 일부 젊은 여성들이 배꼽을 드러낸 티셔츠를 입고 다녔다 해서 단속 대상이니, 아니니 하는 의견이 분분했던 적이 있다. 그런 여성들을 직접 보진 못했지만 그런 모습을 그려보면 재미있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해괴하게 여겨진다.
배꼽은 태아가 어머니 배속에 있는 동안 생명의 영양소를 공급받던 탯줄을 출생 시 의사가 잘라낸 흔적이다. 인간이 세상에서 제일 처음으로 칼을 맛보는 자리다. 두 주일 동안 배꼽의 상처를 잘 아물게 해야지 자칫 하다가 파상풍에라도 걸리는 날이면 심한 고생을 하게 된다. 요즘 태어나는 아이들이야 모두 옴폭하게 생긴 예쁜 배꼽을 갖고 있지만 내가 어릴 적만 하더라도 어떤 아이들의 배꼽은 툭 튀어나와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곤 했다.
자신의 배꼽을, 경우에 따라서는 세로로 찢어진 모양으로 성형수술을 해서 까지 예쁜(?) 배꼽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어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 이유를 사회심리학적으로 탐색해 볼만도 하지만, 이 자리에서 배꼽 노출에만 한정해서 생각할 건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배꼽티만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현대 여성들의 패션이 노출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배꼽티도 기본적으로는 노출로서 아름다움을 찾아보려는 미학적 심리일반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노출 미학(美學)은 존재한다. 위대한 화가들이 나체를 -주로 여성을 대상으로 했지만- 그렸다는 건 가려지지 않은 몸의 아름다움을 전제한다. 실제로 우리 같은 비전문가의 눈에도 그런 그림들은 우리의 정서를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 또는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독주회에서 여성 연주자가 앞가슴과 등이 훤히 내다보일 정도의 연주복을 입고 있어도 그렇게 야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연주회장이라는 특수한 상황 가운데서는 음악과 노출이 우리를 보다 승화된 정신과 예술세계로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어떤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의 노출을 말하고 있다. 우선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해 보자. 어느 정도의 노출이 아름답게 보일까? 아름다움의 기준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엄청나게 다르기 때문에 노출의 한계에 대한 대답을 찾는 일 보다 어리석은 건 없다. 예컨대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경우에 모든 여성들이 젖가슴을 드러내 놓고 살아가지만 아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반면에 50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의 여성들은 대개 전신을 가리는 한복을 입었다. 여대생들도 검은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었고, 신여성이라는 이름이 붙은 여자들도 역시 무릎 밑을 한참이나 내려가는 양장을 입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가능한대로 노출을 많이 해야만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따라서 노출의 절대적 기준을 찾는 헛수고 보다는 오히려 여성 옷차림의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질문이 더 요긴하다. 아름다운 여성이란 그 나이와 사회적 위치와 장소에 따라 적합한 복장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20살 안팎의 젊은 여성들이 아주 짧은 치마를 나부끼며 대도시의 번화가를 활보하는 건 나름대로 도시의 활기와 잘 어울린다. 그러나 40대 전후의 여성들이 20대 여성들처럼 달랑 들어 올려진 치마를 입고 다닌다면 아름답기보다는 격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게 될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약간 방향을 바꾸어 이 문제에 접근해 보자. 얼마 전 신문 해외 토픽 란에 클린턴 대통령의 부인 힐러리 여사의 앉은 모습이 실렸다. 짧은 치마를 입어서 그랬는지 다리 사이로 팬티가 보이게 찍혔다. 그 사진을 브라질의 속옷 회사에서 광고용으로 내보냈다. 이렇듯 짧은 치마는 행동거지를 매우 불편하게 하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나이든 여성들이 그런 복장을 하고 다니는 이유는 여성들의 노출심리일반에서 찾아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인간은 일종의 관음증(觀淫症)을 갖고 있는 동물이다. 상대 성을 가진 사람의 은밀한 곳을 향한 호기심으로서 사실은 은연중에 이 관음증이 영화나 일반 상품 판매와 경영에도 이용되고 있다. 요사이 컴퓨터 통신의 발달로 선정적이고 퇴패적인 영상이 청소년들에게 거의 무방비로 제공된다고 하여 학부모들의 염려가 많긴 하지만, 이는 결국 모든 인간의 심리적 기능인 관음증의 문제다. 인간 본질이 바뀌지 않는 한 이런 사회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말이다. 이와 유사한 심리적 현상이 바로 노출증(露出症)이라 할 수 있다. 간혹 벌건 대낮에 벌거벗고 뛰어다니는 사람들의 돌출행동이 있기도 하지만, 이는 인간 의식의 깊은 곳에 그런 노출 요구가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관음증과 노출증의 상호작용으로 여성들의 과다한 노출현상이 두드러지게 되었는데, 한편으로 이런 심리적 현상들이 사회적으로 적절하게 제어되거나 승화되지 못해서 성폭력 사건이 늘어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이 자리에서 여성들의 노출을 비방하거나 죄악시 하자는 건 절대 아니며, 더구나 21세기를 눈앞에 둔 오늘의 여성들에게 이런 말은 사실 가당치도 않을 것이다. 짧은 치마나 배꼽티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여성들이 온몸을 어두운 색깔의 천으로 감싸고 사는 회교권 여성들에 비해 부도덕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다만 그가 어떤 옷을 입고 다니든지, 어느 정도의 노출을 하든지 단순히 첨단의 유행을 무의식적으로, 무비판적으로 뒤좇아 다니지는 말아야 한다는 걸 지적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옷은 나름대로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옷은 그의 언어이며, 존재다. 이런 점에서 육체의 미학은 노출 자체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적절한 은폐에 있는 건 아닌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95.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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