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사설을 읽고


오늘(3월10일) 아침 인터넷으로 조선일보의 사설을 보았다. 어제 있었던 대통령과 평검사의 대화 건을 어떤 논조로 분석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서 조선일보가 어떤 편향된 시각으로 이 세계를 보고 있는지에 대해서 들었으며, 나 자신도 그런 사실들을 확인하고 있었지만 굳이 <안티 조선> 운동 같은 게 오늘의 다원적이고 민주적인 사회에서 필요할까에 대해서는 회의적으로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그것은 지금도 역시 변함없다. 어떤 언론에 대해서 집단적으로 안티를 한다고 해서 그 신문의 영향력이 줄어들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역작용이 일어날 수 있기도 하고, 근본적으로는 어떤 강제적인 힘으로 진리를 일으켜 세울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의 사설을 읽으면서,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훨씬 많이 들었다. 외형적으로만 보면 한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신문에서 이런 사설밖에 쓸 수 없다는 사실에 연민과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대통령·검사 對話', 이 方式으론 안된다>는 제목의 이 사설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검찰 인사파동의 돌파구를 평검사들과의 직접토론을 통해 마련하겠다는 뜻으로 시도된 ‘대통령과 전국검사들과의 대화’는 한마디로 이런 방식으로 대통령이 현장과의 대화를 계속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 우리의 느낌이다. 우선 대통령은 검찰개혁의 필요성과 방법을 젊은 검사들에게 설득시키지도 못했고, 검사들은 검찰의 인사권을 왜 법무장관에서 검찰총장에게 이관해야 하는지 그 필요성을 대통령에게 납득시키지도 못했다."

대통령과 전국 검사들과의 대화를 이렇게 한 마디로 매도하고 마는 것일까? 대통령이 검찰개혁의 필요성과 방법을 젊은 검사들에게 설득시키지 못했다는 이 논설위원의 주장은 어떤 사실에 토대하고 있다기보다는 단지 자신의 개인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다. 이 사람은 그 대화의 자리에서 당장 젊은 검사들이 "예, 대통령님, 대통령님의 말씀을 들으니 우리가 잘못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고백해야 설득이 되었다고 여기는 걸까? 그 자리는 서로의 입장을 상대방에게 밝히고 올바른 검찰 개혁을 위해서 좋은 방향을 모색해 보자는 것이었지, 어떤 심포지움이나 정당 끼리의 토론장이 아니었다. 대통령과 검사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국민들은 이미 어느 쪽에 설득력이 있는지 대체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검사들이 당장에 자신들의 소견이 짧았다고 말하지는 않았어도 대통령의 솔직하고 합리적인 설명에 상당히 공감했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주장도 나의 개인적인 판단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미 설문조사에서 나와 있듯이 (조선일보 자체의 설문에도 그렇다) 국민들의 대다수가 이런 대화의 자리가 바람직했으며, 또한 대통령의 주장에 훨씬 더 무게를 두고 받아들였다는 데에서도 <이 방식으론 안 된다>는 사설자의 주장은 일종의 편견이나 선입견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대통령과 검사들이 설득해야 할 대상은 마주앉은 상대만이 아니라 오히려 국민이었다는 점에서, 이 대화는 시종 국민을 위태위태하고 조마조마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는 게 정확한 판단일 것이다."

이번 대화를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는지 조선일보 스스로 잘 알고 있을텐데도 국민을 "위태하고 조마조마하게" 만들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들의 편견이 얼마나 심한지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조선의 사설자는 조마조마 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재미 만끽이었다. 누가 말을 잘하고 못하고의 차원이 아니라 속에 있는 말을 서로 주고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보는 이로 하여금 재미를 느끼게 했다는 말이다. 정치는 국민에게 건강한 재미를 주는 게 아닐까? 뭐가 그렇게 조마조마 한지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 사설자는 군사독재 시절의 대통령 상을 그리면서 저러다가 검사들 크게 다치지, 하는 생각 때문에 조마조마했던 것일까?

"국민에게 직접 호소한다는 참여정치의 리더십은 그것대로 평가할 요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평검사들과 나눈 대화의 형식과 내용은 ‘노무현 정치’의 상표인 직접민주주의가 내포한 함정과 위험을 적나라하게 노출시키는 데 그치고 말았다. 이 점에서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갈등의 현장에 직접 뛰어들 때 짊어져야 할 대통령의 정치적 부담과 국정운영의 부작용을 내다보는 사려(思慮)가 모자랐다고 지적할 수밖에 없다."

노무현 식의 직접민주주의가 내포한 함정과 위험이 적나라하게 노출되었다고 하는데, 그게 무얼까? 이 사설자의 논지는 정곡을 찌르지 않고 계속해서 수사적 표현으로 변죽만 울리고 있다. "정치적 부담과 국정운영의 부작용"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의 실체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물론 사설이라는 좁은 지면으로 인한 한계가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한 두 개 정도는 구체성을 적시할 수 있어야만 했는데, 그게 없다. 나는 어제의 대화를 보면서 부담과 부작용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저렇게 해서 서로의 다른 입장들이 그 차이를 조금씩이나마 좁혀 갈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사설자는 노무현 대통령이 나라의 모든 문제를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해결할 것처럼 미리 예단하고 있는 것 같다. 교사들이 데모를 하면 그곳으로 득달같이 달려가고, 약사들이 데모하면 또 그렇게 하고, 뭐 이런 식으로 대통령 직을 수행할 것처럼 보고 있는데, 아마 이렇게 대통령이 현장으로 달려가는 일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는 청와대와 내각 인사 후에 처음으로 단행하는, 어떤 면에서 국가의 가장 햄심 권력기관에 속한 인사문제였기 때문에, 또한 법을 먹고 사는 검찰들의 불법적 집단 행동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서 현장에 나섰을 뿐이다. 노 대통령이 한 달 사이에 다섯 번쯤 현장에 나가서 직접 문제를 풀려고 하다가 문제만 불거지고 말았다면 조선일보의 사설자가 염려할만 하다. 그런데 이게 처음이다. 처음부터 딴지를 거는 이유는 감정이 앞섰던지, 아니면 최소한의 양식이 없다고 볼 수밖에 없다.

"어제의 토론은 대통령 지위가 갖는 품위와 권위를 어떻게 유지하고 왜 존중해야 하는가 하는 쌍방의 이해가 거의 내비쳐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민주적 토론의 기본틀조차 엿보기 힘들었다.

"종국에는 대통령의 입에서 '모욕감을 느낀다'거나 '여러분 말 속에 비아냥이 들어있다'는 등의 직설적인 언사가 튀어나오고'대통령 당선 전에 부산동부지청장에게 청탁전화를 왜 하셨습니까'라고 질문이 나오는 데 이르러서는, 국민들은 토론내용을 좇기보다는 이미 엎질러진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를 먼저 걱정해야만 했다."

사설자는 대통령 품위와 권위 운운하고 있다. 조선은 그동안 앞서의 대통령들을 제왕적이라고 비판했는데, 이제 와서 허심탄회하게 일선 검사들하고 대화하고 있는 대통령에게 품위와 권위를 내세우면서 이 대화 자체를 냉소적으로 비판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물론 검사들이 대통령의 약점을 지적할만한 자리는 아니었으며, 대통령으로서도 모욕감을 느낀다는 표현을 다른 식으로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사건들은 말 그대로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아주 작은, 양념과 같은 해프닝에 불과하다. 이런 것을 침소봉대해서 우리의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기억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을 깔아뭉개는 저의를 나는 도대체 알 수가 없다. "국민들은 토론내용을 좇기보다는 이미 엎질러진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를 먼저 걱정해야만 했다."고 하는데, 이 사설자 말고 누가 걱정을 그렇게 했을까? 약간 앞서 나가는구나 하는 생각은 했지만 걱정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그 대화는 그런 아슬아슬한 장면을 거치면서 결국은 모양 좋게 정리되었다. 아마 권위주의적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게 무척이나 걱정스럽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사유의 틀을 가진 대개의 국민들에게는 오히려 즐거운 게임처럼 보였을 것이다. 걱정하지 마시라.

"노무현 대통령은 이제 스스로 정치적 무기로 자신하고 활용해왔던 ‘노무현 표(標) 직접민주주의’에 대해서 허심탄회하게 돌아볼 때가 되었다."

조선의 사설자는 아무런 사실적인 바탕도 없는 주장으로 글을 끝내고 있다. 무게가 실리지 않은 글의 본보기이다. 노모현 대통령이 정치적 무기로 활용해왔던 "직접 민주주의"에 대해서 반성하라는 주문이었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이 이런 직접민주주의를 몇 번이나 했다고 이런 말을 하는지 여전히 모르겠다. 대통령 선거할 때 연설하던 것을 보고 말하나? 모든 후보자들도 그렇게 했는데 말이다. 장관할 때 현장에 나선 것을 보고 말하나? 그런 것은 오히려 바람직한 게 아닌가? 앞서 말한 대로 이제 처음 시도된 것을 두고 늘 이런 방식으로 접근한 것처럼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사설자의 고의성이 엿보인다.

사람은 보수적일 수도 있고, 진보적일 수도 있기 때문에 보수적인 조선일보사의 논설위원들이 진보적인 노무현의 정책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다. 조선일보가 보여준 그간의 행태라고 한다면 평검사들의 집단 행동에 대해서 나무라고 대통령의 인사권을 존중해주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나갔어야 한다. 설사 그럴 생각이 없다면 사실에 대해서만이라도 정당하게 평가해야만 한다. 검찰 인사권을 법무장관이 아니라 검찰총장에게 주어야 하는 이유를 소상하게 밝혀야 한다. 그런데 이건 어처구니 없게도 대화 방식 자체에 대해서 시비를 건다는 것은 흡사 어제 검사들이 대통령의 형에 대한 비아냥과 비슷한 수준이다. 이런 정도의 사설을 쓸 수밖에 없는 신문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신문이라는 사실은 도대체 무언가? 그런 구조 안에서 그런 구조를 재생산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의식 수준은 어디에 있는 걸까?

(정용섭, 2003년 3월10일)


<사설 전문> 2003.3.10. 조선일보

'대통령·검사 對話', 이 方式으론 안된다

검찰 인사파동의 돌파구를 평검사들과의 직접토론을 통해 마련하겠다는 뜻으로 시도된 ‘대통령과 전국검사들과의 대화’는 한마디로 이런 방식으로 대통령이 현장과의 대화를 계속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 우리의 느낌이다. 우선 대통령은 검찰개혁의 필요성과 방법을 젊은 검사들에게 설득시키지도 못했고, 검사들은 검찰의 인사권을 왜 법무장관에서 검찰총장에게 이관해야 하는지 그 필요성을 대통령에게 납득시키지도 못했다.

더구나 대통령과 검사들이 설득해야 할 대상은 마주앉은 상대만이 아니라 오히려 국민이었다는 점에서, 이 대화는 시종 국민을 위태위태하고 조마조마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는 게 정확한 판단일 것이다.

국민에게 직접 호소한다는 참여정치의 리더십은 그것대로 평가할 요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평검사들과 나눈 대화의 형식과 내용은 ‘노무현 정치’의 상표인 직접민주주의가 내포한 함정과 위험을 적나라하게 노출시키는 데 그치고 말았다. 이 점에서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갈등의 현장에 직접 뛰어들 때 짊어져야 할 대통령의 정치적 부담과 국정운영의 부작용을 내다보는 사려(思慮)가 모자랐다고 지적할 수밖에 없다.

어제의 토론은 대통령 지위가 갖는 품위와 권위를 어떻게 유지하고 왜 존중해야 하는가 하는 쌍방의 이해가 거의 내비쳐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민주적 토론의 기본틀조차 엿보기 힘들었다.

종국에는 대통령의 입에서 “모욕감을 느낀다”거나 “여러분 말 속에 비아냥이 들어있다”는 등의 직설적인 언사가 튀어나오고“대통령 당선 전에 부산동부지청장에게 청탁전화를 왜 하셨습니까”라고 질문이 나오는 데 이르러서는, 국민들은 토론내용을 좇기보다는 이미 엎질러진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를 먼저 걱정해야만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제 스스로 정치적 무기로 자신하고 활용해왔던 ‘노무현 표(標) 직접민주주의’에 대해서 허심탄회하게 돌아볼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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