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을 귀
13 또 이르시되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14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15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16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17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18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19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20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21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22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24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25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23절에는 ‘들을 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당시의 관용어겠지만, 종교적인 차원에서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귀가 있다고 해서 모든 소리를 듣는 게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을, 그리고 들을 수 있는 것만 듣습니다. 음악가들은 고도로 예민한 귀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놓치는데도 그들은 음악의 소리를 다 듣습니다. 영적인 소리도 그와 같습니다. 말씀을 아무리 읽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들을 귀가 없는 증거입니다. 어떻게 들을 귀를 가질 수 있을까요? 음악가들이 훈련을 하듯이 그리스도인들도 듣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가장 바른 훈련은 신학훈련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중심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들어도 이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는 것이 바로 신학훈련입니다.
주님,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를 허락해주십시오. 우리의 영혼이 말씀의 빛을 받아 열리게 해주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