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 <열린 토론실>입니다. 다비안들의 부담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채>와는 달리, 보다 진지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나 주제를 나누고 싶은 분들을 위한 게시판입니다. 가급적 예의를 갖추시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대화는 다비안을 비롯한 여러 네티즌들의 온라인 상에서의 자유로운 것이기에 그 방향과 정체성이 반드시 다비아와 일치하지는 않음을 밝혀둡니다.
글 수 253
한가지 저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의문이 있어서
스스로 정통 신앙을 가졌다고 믿으시는 분들은 어찌 생각하시는지 질문 드립니다.
신약에는 많은 구약의 구절들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인용을 보면, 가끔은 본문의 맥락에 맞게 인용되어 있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그야말로 자기 입맛에 맞게 원래 문맥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경전인 성경을 다른 맥락에서 제멋대로 해석하고 인용하는
그런 사람들을 일컬어 우리는 "이단"이라 부릅니다.
구약을 해석하고 인용하는 것만 놓고 보자면,
구약을 경전으로 가지고 있는 유대인의 입장에서 기독교는 이단임에 분명합니다.
제가 교회 다니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는데,
이런 질문을 목사님께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신약 저자들이 구약을 해석하고 인용하는 식으로 지금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고 인용한다면,
그게 바로 이단이 되는게 아니냐"고요.
그때 목사님께서는 매우 놀랍게도, "그렇다"고 긍정하시더군요.
딱히 제가 뭘 주장하고 싶은 건 아니고,
과연 "정통" 신앙을 가진 분들께서는 이 부분을 어떻게 보시는지,
어떤 의견을 갖고 계시는지 한번쯤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과연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도 맞닿아 있는 의문이라 생각되네요.
기탄없는 의견 부탁드립니다.
스스로 정통 신앙을 가졌다고 믿으시는 분들은 어찌 생각하시는지 질문 드립니다.
신약에는 많은 구약의 구절들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인용을 보면, 가끔은 본문의 맥락에 맞게 인용되어 있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그야말로 자기 입맛에 맞게 원래 문맥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경전인 성경을 다른 맥락에서 제멋대로 해석하고 인용하는
그런 사람들을 일컬어 우리는 "이단"이라 부릅니다.
구약을 해석하고 인용하는 것만 놓고 보자면,
구약을 경전으로 가지고 있는 유대인의 입장에서 기독교는 이단임에 분명합니다.
제가 교회 다니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는데,
이런 질문을 목사님께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신약 저자들이 구약을 해석하고 인용하는 식으로 지금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고 인용한다면,
그게 바로 이단이 되는게 아니냐"고요.
그때 목사님께서는 매우 놀랍게도, "그렇다"고 긍정하시더군요.
딱히 제가 뭘 주장하고 싶은 건 아니고,
과연 "정통" 신앙을 가진 분들께서는 이 부분을 어떻게 보시는지,
어떤 의견을 갖고 계시는지 한번쯤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과연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도 맞닿아 있는 의문이라 생각되네요.
기탄없는 의견 부탁드립니다.
2007.03.06 11:02:25
구체적인 성경구절에 대한 난상토론이 되는 걸 원하지는 않아서 뭉뚱그려 넘어가려 했는데,
운영자님께서 요청하시니 몇가지만 예를 들겠습니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게 마태복음이겠군요.
마태는 예수가 구약에 예언된 그리스도임을 증명하기 위해 구약을 많이 인용했는데
많은 구절에서 무리한 인용을 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마2:14,15)
이것은 호세아 11장1절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 내었거늘"
을 인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었다는 구절이며,
그리스도를 애굽에서 불러낼 것이라는 예언의 의미로는 전혀 해석될 수 없습니다.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마 2:17,18)
이 구절 역시 후에 이러한 학살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예언의 의미로는 전혀 해석될 수 없는데,
마태가 무리하게 갖다 쓴 구절일 뿐입니다.
더구나 헤롯의 유아학살은 마태복음에 따르면 베들레헴과 그 지경에서 이루어졌는데,
왜 한참 떨어진 라마에서 애곡을 해야 할까요?
그밖에도 에베소서 4장 8절은 시편 68:18절을 인용하면서 원문을 훼손하였으며,
그 외에도 전체 문맥과 상관없이 부분적으로 필요한 부분만 인용한 곳은 다 열거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렇게 한 귀퉁이에 있는 구절을 문맥에 상관없이 그저 편한 대로 가져다 쓰는 그런 인용 방법이
이단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을 인용할 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대략 이정도 예를 들면 될까요?
운영자님께서 요청하시니 몇가지만 예를 들겠습니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게 마태복음이겠군요.
마태는 예수가 구약에 예언된 그리스도임을 증명하기 위해 구약을 많이 인용했는데
많은 구절에서 무리한 인용을 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마2:14,15)
이것은 호세아 11장1절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 내었거늘"
을 인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었다는 구절이며,
그리스도를 애굽에서 불러낼 것이라는 예언의 의미로는 전혀 해석될 수 없습니다.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마 2:17,18)
이 구절 역시 후에 이러한 학살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예언의 의미로는 전혀 해석될 수 없는데,
마태가 무리하게 갖다 쓴 구절일 뿐입니다.
더구나 헤롯의 유아학살은 마태복음에 따르면 베들레헴과 그 지경에서 이루어졌는데,
왜 한참 떨어진 라마에서 애곡을 해야 할까요?
그밖에도 에베소서 4장 8절은 시편 68:18절을 인용하면서 원문을 훼손하였으며,
그 외에도 전체 문맥과 상관없이 부분적으로 필요한 부분만 인용한 곳은 다 열거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렇게 한 귀퉁이에 있는 구절을 문맥에 상관없이 그저 편한 대로 가져다 쓰는 그런 인용 방법이
이단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을 인용할 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대략 이정도 예를 들면 될까요?
2007.03.06 14:06:00
주제넘게 끼어 드는건 아닌지.
예전에 제가 믿음 없이 성경공부만 할 때,
이런 문제들로 한 동안 설전을 벌인 적이 있어서요.
그 때 우리들의 결론(?)은, 그러한 인용의 근본의도가 무엇이냐가 중요하다는 걸로 모아졌지요.
(공부 지도하셨던 목사님 절대 자신의 의견은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우리들끼리 토론하게 하고, 스스로들 결론내리게 하였지요.
화두만 툭 던지고, 끝나면 '수고 하셨습니다'가 전부 였으니까요)
마태 공동체의 경우 유대교와의 결별 이후,
유대교와의 대척점에 서서 스스로를 새로운 이스라엘이라 선언하면서,
예수님의 메시아성이 구약에서 기인한다는 점을 적극 강조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
또한 모세를 비롯한 구약의 예언자들을 극복하기 위한 의도의 과도함에서 등등.
다른 복음서에선 이와 같은 경우가 흔하지 않는 점에서
마태 공동체의 특수성에서 기인한 것 같은데
그 특수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제가 설명할 능력이 없군요.
전문가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역시 주제 넘었습니다.
예전에 제가 믿음 없이 성경공부만 할 때,
이런 문제들로 한 동안 설전을 벌인 적이 있어서요.
그 때 우리들의 결론(?)은, 그러한 인용의 근본의도가 무엇이냐가 중요하다는 걸로 모아졌지요.
(공부 지도하셨던 목사님 절대 자신의 의견은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우리들끼리 토론하게 하고, 스스로들 결론내리게 하였지요.
화두만 툭 던지고, 끝나면 '수고 하셨습니다'가 전부 였으니까요)
마태 공동체의 경우 유대교와의 결별 이후,
유대교와의 대척점에 서서 스스로를 새로운 이스라엘이라 선언하면서,
예수님의 메시아성이 구약에서 기인한다는 점을 적극 강조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
또한 모세를 비롯한 구약의 예언자들을 극복하기 위한 의도의 과도함에서 등등.
다른 복음서에선 이와 같은 경우가 흔하지 않는 점에서
마태 공동체의 특수성에서 기인한 것 같은데
그 특수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제가 설명할 능력이 없군요.
전문가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역시 주제 넘었습니다.
2007.03.06 15:04:20
박정훈님! 안녕하세요?
지난 달 초였던가요?
매우 인상적으로 가입 인사를 하신 분이죠?
님의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토론은
앞으로 전개 되리라 기대 하고..
저는 이 곳에서 대부분 신학(신앙)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고 있는 처지이기에 제 깜량대로만
코멘트를 해 볼까 하는데..괜찮으시겠어요?
시간 여유가 되신다면,
신학마당-신학단상 메뉴로 가셔서 우선
48번/56번/59번 글을 읽어 보시면
큰 틀에서 1차적으로 도움이 되실 것 같은데요..*^^*
지난 달 초였던가요?
매우 인상적으로 가입 인사를 하신 분이죠?
님의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토론은
앞으로 전개 되리라 기대 하고..
저는 이 곳에서 대부분 신학(신앙)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고 있는 처지이기에 제 깜량대로만
코멘트를 해 볼까 하는데..괜찮으시겠어요?
시간 여유가 되신다면,
신학마당-신학단상 메뉴로 가셔서 우선
48번/56번/59번 글을 읽어 보시면
큰 틀에서 1차적으로 도움이 되실 것 같은데요..*^^*
2007.03.17 21:12:39
답변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흠... 다른 분들은 스스로 "정통"이라 생각지 않으시는 모양인가 봅니다. ^^
아니면 너무 기초적인 문제라 답변할 필요를 못 느끼시는 것인지....
실상 유태인들의 입장에서는 기독교에서 구약을 해석하는 방식은 그야말로
본문을 난도질하고 문맥을 무시하면서 필요에 따라 갖다쓰는,
"이단의 수법" 그대로라고 느낄 것입니다.
이는 한두 구절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구약의 사건을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이해하는
그러한 이해 자체가 구약을 기록한 저자의 의도와 문맥과는 전혀 동떨어진 해석이라는 것이지요.
성경에 대한 이러한 방식의 이해가 신약의 저자들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는 허용되었고
지금은 허용되지 않는 것일까요?
이번엔 "정통"이 아니신 분들께 여쭤볼까요? ^^
흠... 다른 분들은 스스로 "정통"이라 생각지 않으시는 모양인가 봅니다. ^^
아니면 너무 기초적인 문제라 답변할 필요를 못 느끼시는 것인지....
실상 유태인들의 입장에서는 기독교에서 구약을 해석하는 방식은 그야말로
본문을 난도질하고 문맥을 무시하면서 필요에 따라 갖다쓰는,
"이단의 수법" 그대로라고 느낄 것입니다.
이는 한두 구절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구약의 사건을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이해하는
그러한 이해 자체가 구약을 기록한 저자의 의도와 문맥과는 전혀 동떨어진 해석이라는 것이지요.
성경에 대한 이러한 방식의 이해가 신약의 저자들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는 허용되었고
지금은 허용되지 않는 것일까요?
이번엔 "정통"이 아니신 분들께 여쭤볼까요? ^^
2007.03.17 23:52:34
박정훈 님,
오늘에야 이 글을 읽었습니다.
우선 미안, 죄송, 슐디궁(독어)입니다.
신약성서 기자들의 구약해석가 적용의 문제를 지적하셨군요.
숫자 인용도 착오가 있고, 해석 자체에도 오류가 있을 겁니다.
그런 것만 따로 모아도 한 트럭은 나오지 않을까요?
그러나 그런 착오와 오류는 옥의 티라고 보아야지요.
제가 일방적을 신약성서 기자들을 옹호하려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특별한 영적인 경험을 했답니다.
하나님 경험이지요.
그걸 변증하기 위해서 구약을 인용하기도 하고,
그 당시에는 일반적이었던 신화적인 글쓰기도 하고,
그런 방식으로 작업했지요.
그게 핵심인데,
만약 핵심 자체가 오류라고 한다면 그건 역사적으로 폐기되었을 겁니다.
이런 점에서는 기독교는 여전히 진리론적인 시험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가 참된 그리스도인가 아닌가의 문제를
보편적인 진리의 차원에서 검증받아야 한다는 뜻이지요.
지난 2천년 동안의 신학역사는 바로 그걸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지금도 신학자들은 진리논쟁에 뛰어들어야 하며,
앞으로도 그래야 합니다.
그럴 때 도올의 언급도 별로 주목을 끌지 않는 성숙한 기독교가 될 겁니다.
도올은 정직한 분이기 한데,
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별 것 아닌 걸 침소봉대하는 경향이 좀 보이네요.
이미 신학에서 걸러진 문제를 새 것처럼 포장한다는 말이지요.
말이 옆으로 나갔습니다.
좋은 문제 제가 감사했습니다.
좋은 주일이!
오늘에야 이 글을 읽었습니다.
우선 미안, 죄송, 슐디궁(독어)입니다.
신약성서 기자들의 구약해석가 적용의 문제를 지적하셨군요.
숫자 인용도 착오가 있고, 해석 자체에도 오류가 있을 겁니다.
그런 것만 따로 모아도 한 트럭은 나오지 않을까요?
그러나 그런 착오와 오류는 옥의 티라고 보아야지요.
제가 일방적을 신약성서 기자들을 옹호하려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특별한 영적인 경험을 했답니다.
하나님 경험이지요.
그걸 변증하기 위해서 구약을 인용하기도 하고,
그 당시에는 일반적이었던 신화적인 글쓰기도 하고,
그런 방식으로 작업했지요.
그게 핵심인데,
만약 핵심 자체가 오류라고 한다면 그건 역사적으로 폐기되었을 겁니다.
이런 점에서는 기독교는 여전히 진리론적인 시험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가 참된 그리스도인가 아닌가의 문제를
보편적인 진리의 차원에서 검증받아야 한다는 뜻이지요.
지난 2천년 동안의 신학역사는 바로 그걸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지금도 신학자들은 진리논쟁에 뛰어들어야 하며,
앞으로도 그래야 합니다.
그럴 때 도올의 언급도 별로 주목을 끌지 않는 성숙한 기독교가 될 겁니다.
도올은 정직한 분이기 한데,
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별 것 아닌 걸 침소봉대하는 경향이 좀 보이네요.
이미 신학에서 걸러진 문제를 새 것처럼 포장한다는 말이지요.
말이 옆으로 나갔습니다.
좋은 문제 제가 감사했습니다.
좋은 주일이!
2007.03.19 19:14:09
정목사님, 답변 감사합니다.
이런 뜬금없는 질문도 좋은 문제라고 해주시고, 역시 목사님은 자상하시군요. ^^
결국 궁금한 것은,
성경을 본문에 충실하게 해석하기만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에서 벗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지요.
오히려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본문 자체에 충실한 것을 넘어서,
어떤 다른 조명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신약시대의 유대인 랍비들이,
성경을 본문에 충실하게 해석했더라면 신약기자들과 동일한 해석에 도달했을까요?
아마도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재조명되지 않는다면,
구약의 본문 자체에만 매달려 있다면
결코 신약기자들과 동일한 해석에 도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 해석에 중요한 것은 저자의 의도나 본문에 대한 충실함이 아니라,
어떤 영적인 "조명"에 따르느냐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만약 신약 기자가 구약 성경을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영적인 "조명"에 따라 인용해서,
그것으로 자신의 영적 경험을 표현하는 것이 정당하다면,
이 시대에 사는 누군가가 성경을 역시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어떤 영적인 "조명"에 따라 인용해서
자신의 영적 경험을 표현하는 것 역시 정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적이 "조명"이 정말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인지,
참인지 거짓인지는 수천년의 세월이 흘러야만 알 수 있는 것이고,
당장 그렇게 "본문이 기록된 의도에 상관없이 마음대로 인용한다"는 것만 가지고는
그를 비난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얻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혹시나 도움이 될만한 책이라도 소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런 뜬금없는 질문도 좋은 문제라고 해주시고, 역시 목사님은 자상하시군요. ^^
결국 궁금한 것은,
성경을 본문에 충실하게 해석하기만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에서 벗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지요.
오히려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본문 자체에 충실한 것을 넘어서,
어떤 다른 조명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신약시대의 유대인 랍비들이,
성경을 본문에 충실하게 해석했더라면 신약기자들과 동일한 해석에 도달했을까요?
아마도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재조명되지 않는다면,
구약의 본문 자체에만 매달려 있다면
결코 신약기자들과 동일한 해석에 도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 해석에 중요한 것은 저자의 의도나 본문에 대한 충실함이 아니라,
어떤 영적인 "조명"에 따르느냐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만약 신약 기자가 구약 성경을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영적인 "조명"에 따라 인용해서,
그것으로 자신의 영적 경험을 표현하는 것이 정당하다면,
이 시대에 사는 누군가가 성경을 역시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어떤 영적인 "조명"에 따라 인용해서
자신의 영적 경험을 표현하는 것 역시 정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적이 "조명"이 정말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인지,
참인지 거짓인지는 수천년의 세월이 흘러야만 알 수 있는 것이고,
당장 그렇게 "본문이 기록된 의도에 상관없이 마음대로 인용한다"는 것만 가지고는
그를 비난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얻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혹시나 도움이 될만한 책이라도 소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신약에서 잘못 인용하고 있는 구약 성구의 대표적인 사례를 몇 가지만
들어서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러면 논의하기가 훨씬 용의할 것 같군요.
보다 구체적인 토론을 위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