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궁금하더라도 다 듣게 되면 좀 이해될 겁니다)


3 영적 존재에서 (1) 하나님   (2) 천사   (3) 인간

천사와 인간은 같이 영적 존재입니다.


인간 - 육체를 가진 인격.
천사 - 육체가 아닌 인격.

그러니까
인간이 천사와 같은 영적 존재이나 인간은 육체가 있는 인격.
천사는  육체가 없는 인격이라는 것이 다른 점이다.
인간은 육체를 가진 인격이고
천사는 영체를 가진 인격입니다.

영적 존재라는 것은 <영>이라는 자체가 비물질, 무형으로서,
<항구적 존재>즉 <영원한 존재>라는 말이다.
영원한 존재인데,
<영원한 존재>로서의 <하나님>과,
<영원한 존재>로서의 <하나님의 피조물>이 어떻게 다르는가?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계신 분으로서 <영원 전>이라 말하고 있고,
<피조물>을 말할 때는 <영원 전>이라는 말이 단 한마디도 없다.
성경 자체를 통해서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계시고,
                만세 전부터,
                창세 전부터이다.... 이렇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영원 전!
그러나 어떤 피조물이든지, 피조물은 <창조된 이후>부터 영원하다는 것이지, 피조물에게는 <영원 전>이란 것이 없다.


하나님이 누구시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한다.
그 하늘이란 것은 새가 나르는 공중 하늘.
                 별들이 떠 있는 궁창 하늘,
                 신들의 하늘이 있는데 (히브리인들의 하늘에 대한 개념이다)
<천사가 있는 신들의 하늘>을<하나님의 하늘> 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아버지가 없으신 분이시다.
하나님만 유일하게 아버지가 안 계시다. 그는 스스로 계신 분이시다.
         자존자이시다.
누구든지 아버지에 의해 태어났다.
         그러나 하나님만은 아버지가 없다.
         하나님만이 유일하시게 아버지가 없는 분이시다. 그러니까
         이 아버지! 란 말은 영원 전부터 계시다는 뜻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영원 전부터 계시는 분! 그러니까
         모든 것이 다-지음 받은 날이 있지만, 그 분은 지음 받은 날이 없다.
         창조된 날이 없다.
어느 날 시작되었다든지, 시작하신 날이 없으시다. 그러니까
이쪽이 영원하면, 반대로 영원 후도 영원하시다.            


이 공중에 있는 분이 아니라, 궁창에 있는 분이 아니라,
신들의 하늘에 계신 그 분이 <아버지>시다.
만물을 창조하신 <아버지>시다.
이 아버지란 말은 영원 전부터 계신 분이시다.
<아버지>는 오직 그 분 한 분이시다. 고 하셨다.
마 23:9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했다.
너희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이시다.
이는 영원 전부터 계신이시라. 이 말이다.

그래서 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할 때,
그 분을 <아버지>라고 말할 때는
언제나 영원 전부터 계신 분이란 뜻과 같은 것이다.
영원 전부터!
그리고 모든 피조물은 영원함!
그러니까 천사도 영원함!
         인간도 영원함!  


그러니까 여기서 잘못하면,
         인간이 영원하다.
         천사도 영원하다 하니까
이 영원이란 것이 하나님과 동일한 것인 줄로 생각한다.
천사는 영원 전! 이 없다. 지음을 받던 날이 있다.
겔 28:15  지음을 받던 날이 있다.
사람도, 창 1:1에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시니라.
모든 피조물이 창조된 날이 있다.
그래서 영원한 것이다.

천사와 하나님과 다른 점이 무어냐?
다시 말하면, 피조물과 하나님이 다른 점이 무어냐?
조금 다른 것이 아니다. 계급으로 한 계급 높으신 분이 아니다.
하나님이 천사보다 높으시다 하니까,
한 계급 높으신 분이다는 줄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한 계급이 아니라, 그는 영원 전,
그러나 인간이나 천사는 영원 전이 없다.
지음을 받던 그때부터 영원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지음 받은 분이 아니라 창조자이시다. 창조될 수 없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창조된 분이 아니니까 영원 전부터..... 우리의 상상도 초월하고 초월한 영원 전부터 계신 분이다.
영원 전부터 라고 하는 “부터” 라고 하는 말부터 어폐가 있다.
그냥 스스로 계신 분....... 표현할 단어라도 있나?


그러니까 영원 전이 있으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영원 전이 있으시다.
그래서 <아버지>란 말은 그 뜻에서 하는 말이다.
<사람>도 아버지가 될 수 없다.(본질적으로)
왜냐하면, 이것은 창조된 날이 있으니까!
그러나 이 분에게는 <아버지>가 없다. 이 분은 스스로 계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하는 것은 그냥,
우리가 아버지를 <대우>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그게 신앙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 그러나
인간과 천사는 창조된 날이 있는 영적 존재.
그리고 피조된 영적 존재 가운데 천사와 인간이 다르다. 그럼,
누가 먼저 지음 받았나?
천사가 훨씬 먼저 지음 받았다. 왜냐 하면,
새들이 나르는 공중 하늘과,
별들이 떠있는 궁창 하늘과,
신들이 있는  하늘---


신들의 하늘 할 때,
<우라노이스>란 말은 <복수>로 되어있기에 그 하늘을 말하는 것이다.
신들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할 때,
여기서 뭐가 먼저 지어졌느냐?
하나님이 흑암으로 가두사 윗물과 아랫물을 나누사 궁창을 만드시고,
아랫물에서는 뭍이 드러나고 위에서는 새가 나르고,
물에는 고기가 있고, 육지에는 사람이 있다. 이렇게 말했다.


창 1: 의 다섯째 날에 <공중에는 새들이 충만 하라>
<바다에는 물고기가 충만 하라>
<육지에는 사람을 만드시고, 땅에 충만 하라>
다 같이 충만 하라. 충만 하라. 충만 하라. 이렇게 말해서 되었는데,
여기서 바다,물고기가 먼저 만들어지고 사람은 나중에 지음 받았다.
그와 같이, 하늘은 그 이전에 만들어졌다.


여기서 보면,
공중이나 궁창보다도 먼저 만든 게 별.
별들보다 먼저 만든 것이 <신들>이다.
왜냐하면, 창조 자체가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부름꾼들이 그 전에 먼저 있다 이 말이다.
그러니까 사람보다 몇 년이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보다도 오래 전,
영원 전이 아니라, 오래 전, 그때 신들이 이미 창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인간보다 먼저 창조된 것이 신들(천사들)


신들이 죄를 지었고,(벧후2:4)
먼저 타락했기 때문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함이니라“
그러니까 벌써, 마귀는 처음부터 이미 범죄자요,
               인간은 죄를 지어봐야
               마귀로부터 교사 받은, 마귀에게 속한 자라. 이렇게 본다.
악한 자에 의해서 죄를 지은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천사는 인간보다 훨씬 먼저 지어진 존재들이다.


인간은 그렇다는 사실을 히 2:에서 알 수 있다.
5절- 하나님이 우리의 말한 바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 했다.
그러니까 세상보다 천사가 이미 먼저 존재했다.

인간은 우주 안에서 창조된 것이고,
천사는 우주 밖에 신들의 하늘에서 창조되었다.
<신들의 하늘>이란 말에서 나오듯, 그 하늘에서 창조되고,
우리는 우주 안, 다시 말하면, 공중 안에서 창조된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시간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천사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창조되었고,
(히 1:7) 심부름꾼이기 때문에 천사 이상으로 발전할 수 없다.
왜냐? 하면, 심부름꾼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천사 이상은 없다. 이거다.
천사는 심부름꾼 이상은 없다는 말이다.

고로 히 1:13에 보면, 천사는 <주>가 될 수 없다.
<구세주나, 주관자>가 될 수 없다.
천사는 오직, 하나님의 부림을 받는 종으로 지음을 받았다.
그러기 때문에 천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히 1:5)
그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다.


사람은 비록 연약한 존재로 태어나지만, 사람을 위한 심부름꾼이 될 뿐이다.(히 1:14)
서열로 치면 사람 밑으로 내려간다.
<하나님><인간><천사> 이렇게 된다. 천사는 오직 심부름꾼이다.
그럼, 어떤 심부름꾼인가?


여기에 보면, 사람을 위한 심부름꾼인데, 사람은 <하나님의 후사>라 했다.
<하나님의 후사>지, 그냥 무조건 <사람>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히 1:14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그러니까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들만 위해서 하라.

2: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위한,
<특별히 하나님의 후사가 된 사람>
<하나님의 후사라 하니까, 하나님이란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왕의 왕이시니까, 그와 함께 왕권을 갖는 자들>
왕의 기업을 이을 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을 위한 심부름꾼으로 창조되었다.

그러니까 벌써, 어느 정도 열등한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만약, 천사를 숭배하는 일이 생기면 저주받는다고 했다.
그러니까 절대로 우리 신앙은, 천사들을 숭배하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

골 2:18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기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했다.
만약에 겸손한 체- - 하고 천사 앞에 숭배하고 - 하면, 저주받는다.
하나님이 상을 다 빼앗는다고 했다.
천사는 절대로 숭배 받는 자가 아니다.

* 마귀가 하는 짓이 무언가?
하나님과 비기리라 하고 이사야 14:12에 말한 바와 같이
스스로 교만한 마음이 생겨- - -그게 천사라고 했다.
마 4:10에 ‘나에게 경배하라. 내가 천하 영광을 주리라’
그게 바로 사단이다.
계시록에 보면 요한이 천사에게 절하니까,
‘나에게 절하지 말라. 절은 오직 하나님께만 하라’
그러니까 타락하지 않는 거다.


같은 천사라도, 미혹의 영은 하나님께 속한 악령이고,
적그리스도, 이단의 영, 적그리스도의 영은 사단에 속한 악령이다.
그러나
미혹의 영이란 것은 하나님께 속한 영이고,
거짓 선지자의 영은 사단에 속한 악령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종>이란 것은 <무조건 복종하는 것 뿐>인데,
벌써 <미혹된 영들>은 하나님께 대해서 반드시 촐랑대었다.
하나님께 반역한 것은 아니지만,
쉽게 말하면, 주책 떨었다. <누가 아합을 죽게 할꼬!> 하시니까,
‘내가 하겠습니다’하고 투-ㄱ 주책 떤다. 이거다.
<그럼, 네가 하라>하고 시켜 버린 거다.
<누가 하겠느냐?>    ‘내가 하겠습니다.’
<어떻게 하겠느냐?>  ‘거짓말하는 영이 되겠습니다’
<그래라>하고 허락 하신 거다.


이와 같이 유혹을 역사 하사,
저가, 하나님 앞에 충성을 보이지 않고,
                  게으름을 부릴 때에 하나님이 유혹을 역사 하사.
하나님께 믿음을 보이지 않고,
         불신앙을 보일 때에 하나님이 유혹을 역사 하사,
불신앙을 조장하고,
그럴 때, 가변의 영이 붙게 되게 되어 있다.


겔 14:7- (대강의 뜻은) 어떤 자가 자기 심령을 묻기 위하여
         ‘내 심령이 어떠냐? 컬컬하니까, 기도 좀 해 달라’할 때
          선지자가 이 말을 듣고, “딸아, 딸아!”하고
          한바탕 하는 날이면, 그러면,
          하나님이 가변 시켜 버린다는 것이다. 미혹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천사 자체가 촐랑(?)대고 있다 이거다. 그러니까 그냥 가변 되는 것 아니다.
반드시 그런 사람들은 미혹의 영과 함께 미혹 받는 쪽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
의심 되느냐? 하나님은 말리지 않는다. 그냥 놔둔다.
불만 하느냐? 말리지 않는다. 마음껏 불만하도록 놔둔다.
교회와 성경을 놔두고 다시 세상으로 되돌아가도 말리지 않는다.
인격 존중 차원이 아니라 그 속성은 어쩔 수 없는 거다.
손자를 끝까지 오냐오냐 할 수 없다. 할아버지는 보호하려고 모든 조치를 다 해 놓았어도 어린 녀석은 호기심에 여기저기 기웃거려도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그래서 만약 선지자가 유혹을 받으면 나 여호와가 유혹한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아무 근거도 없이 미혹을 받는 것이 아니다.
벌써, 그 영(혼)이 주책 떨면 그렇게 된다. 이거다.

제발 천사의 보호를 받고 있어도 주책 떠는 것 가지고 있지 말아야 한다.
이 주책 떠는 것 때문에 망한다. 주책 떠는 것 영역 없다. 부자든 지식이 있는 자든 계급이 높은 자든 아무 방패가 되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을 경외 하는 것만이 방패 된다. 주책 떨지 말고 영혼을 잘 지키자.

입신하는 사람 쳐놓고, 천사 숭배 않는 사람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그리하지 말라.

또.....<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복을 받았다.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
복을 줄 때는 반드시 천사의 손을 의탁해서 주셨다.
천사로부터 복을 받은 사람 치고  
그 복 가지고 영생에 들어간 사람 한 사람도 없다.
그러니까 율법은 천사로부터 받은 것이다.
율법을 인해서 구원받을 사람 한 사람도 없다.
이건, 이 땅에서는 보상을 받는다.
그러나 절대로 영원한 것은 하나도 얻지 못한다.
그러니까 천사로부터 어떤 약속과 기업을 받았어도
그것으로 영생에 들어갈 사람 하나도 없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천사로부터 받은 기업인데,
그러나 그 <이스라엘>이란 이름 가지고 구원받을 사람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오직, 우리의 축복은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직접 받은 것임을 알라.
히 2:6,7의 말씀같이
천사가 인간보다 잠시 월등하지만,
인간이 천사보다 잠시 못하게 함을 지음 받은 것은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히 2:7- 주께서 천사보다 잠깐 못하게 함을 입은 것은
죽음을 맛보려하는 것이다.


천사보다 못함 = 죽음을 맛보려 하심.
                잠시 동안 뿐이다.
이렇게 예수께서 죽음을 먼저 통과하시기 위하여 인자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누구의 모형이냐?
하나님은 아들인 참사람<인자라 하셨다>을 이 땅에 보내셨다.
인자 = 사람의 아들이란 뜻으로 나온 말이 아니다.
<인자>란 말은 <사람의 아들>이란 말이 아니고,
<여인의 아들>이란 말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아는 자는 마리아 밖에 없다.
여자의 몸에 태어나셨기 때문에,
인간의 혈통의 유전에 관계없이 태어났다고 해서 <여인의 아들>이지,
<여인의 아들>이란 말은 혈통과 무관할 때 쓰는 말이지,  
<사람의 아들>이라 하면 혈통과 관계있는 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예수는 <여인의 아들>이다. 혈통과 무관한 분이지, 사람의 아들이 아니다.

<인자>란 말은 <참사람>이란 말이다. <사람이신 예수>란 말이다.
다시 말하면, 진리의 사람이라 생각해보라.
<진리요, 사람이신 ><진리의 사람이신> 이렇게 말해야 하겠다.
그는 자신이 진리시란 말이다.
또 자신이 사람이시다.
<참사람>이신, <진리요, 사람이신 이>
<진리의 사람이신 이>인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보다 먼저 나셨을까?
***아니면 인간이 그 분보다 먼저 났을까? 생각해보라.
참사람-이 먼저 났나? 사람이 먼저 났나?


하늘이 무너지고, 머리가 두 쪽 나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렇다. 참사람이신 인자- 인자가 먼저다.
예수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했지만, <나는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고 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했지만, 아브라함의 자손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여인 속>에서 나왔다.
아브라함의 자손과 정혼한 <여인의 몸>에서 낳았다.


그러니까 그는 <내가 네게 오리라>하는 약속으로 말미암아
그 약속은 아브라함의 자손 속에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그 약속대로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신 분이시다.
그래서 죄와 관계없는 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혈통은 유전하니까, 죄와 관계가 있다.

인간이,
인자(여인의 후손)를 본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에서 보았고
인간은 창세 때에 에덴동산에서 보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눈으로 볼 때에
‘예수는 사람의 아들이라’고 오해들을 한다.
신앙과 불신앙이 거기서도 구분되는 것이다.

사람 만들 때, 어떤 모델이 있었다.
어떤 표본이 있었다.
사람을 만들 때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했다.
예수는 하나님의 참 형상이시고,
사람은 그 분의 참 모양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형상은 보이는 것이니까>
즉 예수는 하나님을 보여주신 형상이요,
사람은 그 형상의 모양이다.

창 1:26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 - -했다.
주님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볼 때는 사람을 모양이라 하고,
주님을 그냥 하나님으로 볼 때는 사람을 형상이라 이렇게 말한다.
         주님을 인자로 볼 때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사람은 그 모양이요,
         주님을 하나님으로 볼 때는 인자는 그의 형상이요,
이렇게 말한다.
형상이라 말할 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참사람>의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같은 인자이다.
그리스도도 사람이요, 사람도 인자, 사람인데,
그리스도는 <참사람>이시고,
    사람은 <참사람>의 모양대로 만들어진 <피조물>이다.
<참사람>은 피조물이 아니다. 인자는 피조물이 아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것이지,
말씀이 육신으로 창조되어 오신 분이 아니다.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것이지,
<말씀>이 육신으로 지음 받아 오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은 창조된 사람.
인자는 창조하시는 조물주.  창조하시는 조물주이신 사람.
그럼, 누가 <참 사람>이냐?
바로, 그리스도가 <참사람>이요, 우리는 <참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만이 <참사람>이다. 우리는 그 분의 창조된 사람.
이것은 완전히 <인자>란 말에서 구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참사람은 영원 전부터 계신 사람.
하나님의 품속에 감취었던 비밀이었다.
만물을 창조 하신 창조자이시다.
영원 전부터 계신 분.
그러나 여기 (인간)은 영원한 사람. 이렇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완전히 구분이 되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고후 4:4, 빌 2:6,7,8 히 1:3 등에 기록했다.
사람은 그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 사람은 그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
참 사람을 놓고 볼 때,
그 분 앞에서 우리 인간은 이름 자체에서도 볼 수 있듯,
초라한 피조물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인간은 왜 지음 받았는가?
참사람, 인자가 온 것은 히 2:7, 특별히 9절에 말씀하신 바와 같이,
참사람이 온 것은 죽음을 맛보기 위해서 잠간 오신 것이다.
죽음을 맛보기 위해서 잠간 천사보다 못하게 하심을 입었다.
마귀는 천사와 같은 수준인데- - -  
마귀는 사망 권세를 가지고 예수를 죽였다.  
그러니까 잠시 죽음을 맛본 것은- - -
그러니까 참사람인 그 분은 죽으려고,
                          천사보다 못하게 하심을 입고 왔다 이거다.
또 사람은 왜 창조됐느냐?
사람도 잠간 천사보다 못하게 함을 입었다.
못하게 함을 입은 것은 역시 사람도 죽음을 맛보게 하려 함이다.

참사람이 나타나신 것은 곧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고,
사람이   창조된   것은    죽음을 맛보게 하려 하심이다.
이해됩니까??

***참사람이 나타나신 것은,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고
***사람 이 창조된 것은, 죽음을 맛보게 (하려) 하심이다.



성경을 그냥 어물쩍 넘어가지 말고,
이게 성경 전체를 뚫고 온 어마어마한 지식을 확인하고 배워야 한다.
회로가 잘 안되면 아무 것도 안 되는 거다.
반도체가 회로를 초월할 수는 없다.


<< 복창: 참 사람이 나타나심은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사람이 창조된 것은 죽음을 맛보게 하려 하심이라>>

사람은 똑같이 죽음을 맛보게 하려 하는 것이다.
죽기만 하면 무슨 소용 있나?
예수께서 왜 죽는다고 했나?
요 10:17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즉, 내가 죽는 것은 살기 위하여 - - -
         목숨을 버리는 것은 살기 위하여 죽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둘<참사람과 사람>은 똑같은 경험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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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3: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기서 뭐라 하시나?
우리의 형상대로 만든 사람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했다.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어떻게 알고 있나? 선악과를 뭐라 말하나?
                       선은    착한  것을 말하고
                       악은    죄악,
                               죄짓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말한다.
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것 다 자기 윤리 기준으로 성경을 보기 때문이다. 자기 개념을 비우지 않은 상태에서 성경을 읽기 때문이다.
그럼, 하나님이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하면,
하나님이 뭐라 말하는 것이 되나?
<내가 죄를 지었으니, 죄 짓는 일에 나와 같은 자가 되었다>는 소린가?
<선악을 아는 일에 나와 같은 자가 되었으니>할 때,
<내가 죄도 짓고, 착한 일도 하는데,
이 사람이 이제 죄도 짓고,
착한 일도 하는 나와 같은 사람이 되었다>하는 소리인가?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 - ->의
<우리 중 하나같이>는 성부, 성자, 성신 삼위일체 가운데 한분이신데,
삼위일체 가운데 한분이 경험 할 그 경험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선>이란 것은 착한 일을 의미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다.
또 <악>은 저주나 죄를 의미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선,악과>라는 것을 타락이라고만 생각 하면 답이 안 나온다.
죽음과 생명이라는 뜻이다.
죽음과 삶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란 말씀은  
생명과 죽음을 맛보는 우리 중의 일에- - - 하나같이 되었다 이거다.
좀 더 화끈하게 말하면......<죽고 살 수 있는 그리스도의 일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죽음과 생명을 맛보러 오신 것이다. 요 10:17,18
나는 죽을 계명도 받았고, 살 계명도 받았다.
     죽을 권리도 받았고, 살 권리도 받았다.
나는 살기 위하여 죽는다고 말씀했다.      


1) 나는 살기 위하여 죽는다.
2) 나는 죽을 권리도 있고, 살 권리도 있다.
3) 나는 죽을 계명과, 살 계명을 받았다.

나는 살기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죽을 권세와 살 권세를 가지고 왔다.
나는 죽을 계명을 받고 살 계명도 받았다.   이렇게 말씀했다.


그러니까
천사보다 잠간 못하게 하심을 입고- - -  사람으로 나타나신 것은,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이거다.

천사는 <죽음>을 맛볼 수가 없다.
영원한 지옥에 가서 형벌은 맛봐도,
예수같이 숨 딱 끊어져서 무덤에 들어가 장사지내는 일은 할 수도 없다.
천사는 죽음을 맛 볼 수 없는 일이다!!
그리스도는 천사를 위하여 죽은 것이 아니다.
천사를 위하여 죽었어도 천사는 따라갈 육체도 없다.
천사에게는 기업이 없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천사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

그러나 주님은 죽음을 맛보셨다 이거다.
사람이 만들어지기 전에 먼저, 죽음을 맛보려 결정되어진 분은 누구신가?
예수님!!

죽도록 결정되어진 분은 그 분이시다.
히 1:2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 -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 3:8) 이렇게 말씀했다.


인간보다 그분이, 사람으로 오실 계획은 이미 이전부터 있었다.
그것은 하늘에서의 뜻이다.
우주 안에서 이루신 뜻이 아니라, 하늘에서 이루신 뜻이다.



사람은 왜 만드셨나?
선악과를 먹게 하시려고?
물론 아니다.
그러나 사람은 먹는 쪽으로 길을 택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의 주제는 - - -
어차피 선악과를 먹은 길로 빠졌으니 하나님의 손길도 그 길로 뻗쳤고, 성경도 이렇게 방향이 흘러........ 이렇게 기록 될 수밖에 없었으니 우리의 길은 이렇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오늘 주제도 이렇게 되고 있는 중이다.

계속하자.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다.(창 3:22)
인자(참사람)가 죽음과 생명을 맛볼 수 있었는데- - - - -
그것을 에덴동산에서 사람이 선악과를 먹음으로서 당겨 버린 것이다.
그래서 참사람은 그 죽음과 생명을 맛보는 일을 하게 되었다. 는 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똑같이 죽었다가 부활하는 맛을 보는 것은
피조물 가운데 사람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다.
그런즉,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누구를 닮은 것인가?
<< 어떤 사람이 손자 업고 나오니까,
‘야 --! 네 할아버지가 꼭 너를 닮았구나! ’하면
이 얼마나 쌍스러운 소린가!
어디에 할아버지가 손자 닮았나? 손자가 할아버지 닮았지!  >

****************************  

사람의 형상도 그 분의 형상을 따라 모양대로 지음 받았고- - -
선악을 아는 일에도 그 분과 같이 선악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이젠 좀 생각이 리모델링 되어야 한다.
나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다는 생각도 좋지만 그건 태어날 때나 생각 하는 것이고 - - - 좀 철들면 어린아이 같이
주관적인 생각에서 탈피해야 한다.                                      

그런즉, 사람이 죽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죽는 것이 아니고,
        누가 죽었기 때문에 사람이 죽는다고 했나?
<그리스도가 죽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에 우리가 따라 가는 것이 아닌가!!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주님이 죽었다고만 생각 하면 안 된다.


주님이 죽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 죽고,
주님이 살기 때문에 우리는 사는 것이다.
구원 받았다면 모든 계획이 그 분(참사람)대로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그림자는 따라가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그 분의 목적,
              그 분의  뜻대로, 꼭두각시처럼,
참 사람에 의해서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그 분은 필름 속에 있는 것과 같고,
우리 사람은 스크린에 나타나는 것과 같다.
오직 그 분에 의해서만, 인간이 움직여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죽어도 그 분과 함께 죽고,
                     살아도 그 분과 함께 살고 해야 한다.
그런데 사실 그 분과 함께 죽으려 해야 하는데,
            그 분과 함께 죽으려 하지 않고, 전부 자기 뜻대로 죽으려 한다.



그런즉,
짐승과 사람도 다른 점은 무엇인고 하니,
짐승은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것이다.
                살다가 죽는다 = 이것이 짐승이다.
그러나 사람은   -------------------
                죽고 다시 산다 = 이것이 사람이다.
즉, 살기 위해서 죽는다 이 말이다.
짐승은 살다가 죽는 것이 짐승이다.
그러나 사람은 죽어야 다시 살게 되어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씨와 같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듯,
씨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나지 않음같이, 사람은 지금 씨다.
씨가 텃밭 속에서 묻혀 있는 것 같다.
지금은 하나의 씨다. 죽은 다음에 다시 사는 것이다. 이런 씨와 같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다시 살아나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야하는 것이다.
짐승은 살다가 죽는다. 이것이 끝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게 아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상당히 긴 줄 아는데,
사실은 60,70년 생각해보라, 얼마 안 된다.
나무를 생각해 보라.
인간은 이 세상에 산다 하지만, 나무보다 못하다.
내가 길러 놓은 이 나무는 계속 있어도 나는 없어지겠지! 그 생각해 본다.
심기는 내가 심어서 자라지만, 나는 없어지고, 나무는 계속 자라겠지!
그러니까 우리는 수명이 나무만도 못하고,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몇 년 동안 그 나무를 보다가 없어졌다.
그러나 그 나무는 여전히 있고,
그 다음 다른 사람이 와서 그 나무를 보다가 없어졌다.
그래도 그 나무는 여전히 있다 이거다.

인간이 이 땅에서는 잠간만 있다가 가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농삿군이 농사짓기 위해서
바가지에 씨앗을 담아 가지고 밭에 나가 있는 것과 같다.
여기서 뿌려지고 잠시 후면, 땅에서 싹이 올라오는 것 같다.
농부의 손에 쥐어진 종그락 속에 담겨진 씨와 같다.
이 씨들이 생각할 때, “ 이 종그락 속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다”
주인에게는 그 소리가 들리지도 않겠지만,
주인이 말한다면,
‘야! 네가 땅에 떨어져서 다시 살아나야지,
왜 종그락 속에서 오래 살려고 그러냐?’하지 않겠나!

그래서 60에 죽는 것이 굉장히 절망이고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끝이 아니고, 우리는 영원한 것이다.
그러니까 소망이 있느냐?에 신앙이 있느냐? 하는 거지,
         소망이 없으면,   신앙이 없는 것이다.
인간은 영원한 것인데, 영원한 것이 없으면 신앙이 없는 것이다.
영원한 것이 없으면 소망이 없는 것이다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복음 자체는 영원한 것이다.

우리가 아침에 밥을 먹는 것은 몇 시간 동안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이다.
옛날 석탄 기차가 갈 때,
기차에다가 석탄을 자꾸 집어넣어서 불을 때어야 가는 것같이,
그저... 우리 몸도 몇 시간 살기 위해서 밥 집어넣고,
점심 되면 닭 잡아넣고, 저녁 되면 또 오징어 집어넣어야 되고...... 계속 집어넣어야 된다.
이렇게 하듯, 이것은 자기 육신이 잠간 사는 동안만 집어넣는 것이다.

이 양식이란 것은 잠시,
이 육체를 위한 것뿐이지만 하나님 말씀은 영원한 것이다.
그런데 영원하다는 그것을 참, 인식 안한다.
이 양식은 소멸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이 하나님 말씀은 세세 무궁토록 있도다’
어떤 사람이 신앙생활 하다가 타락하는 이유가- - - - -  
예수를 믿다가 금방 예수를 버리는 이유가 무엇이냐?
말씀이 제대로 떨어지면 절대로 버릴 수가 없다.
                              버릴 수가 없게 되어 있다.
교회당이 없어서 일평생 교회당에 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혼자 살았다 할지라도, 신앙은 버리지 않는다.
                               신앙은 버려지지 않는다.
여러분을 사막에다 혼자 갖다 두었다 하자.
거기서 평생을 살았다고 해도 거기서 하나님을 버릴 수 있겠는가?
버리지 못할 것이다. 혼자 사는데 무슨 의미로 기도하겠나?
사는 데는 의미 없을지라도
그러나 기도 할 거다.

그런데 금방 타락하는 것은 길가에 떨어진 씨나,
돌짝 가운데 떨어진 씨나,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 마냥,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마음에 박히지 못했다는 거다.
진실로 옥토에 떨어진 자는 깨닫는 자니---했다.
<마음의 옥토>라는 것은 마음이 착하다는 뜻이 아니다.
깨닫는 자라 했다.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인 마음이다.

마 13장에 <옥토에 떨어진 씨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했다.
그러니까 깨닫는 자는 절대로 그를 버릴 수가 없다.
이건, 그 속에 영원한 양식이 된 것이다.
그건, 완전히 자기 재산이 된 것이다.
완전히 자기 소유로 들어온 것이다.
그 사람은 절대로 타락하지 않는다. 버릴 수가 없다.

그러니까 성경에도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가 주님을 배신할 수 없다는 것이지,
말씀을 듣고 깨닫지 않는 자들은 배신을 천번 만번 할 수가 있다.


그러니까 인간은 참사람을 위하여 만들어서,
                참사람과 동행하기 위해서,
                참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서
                참사람을 따르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거다.
그러니까 우리는 참사람의 생사에 함께 동참함으로써
자연인이 아닌 참사람이 된 것이지,
                참사람과 생사를 함께 하지 않으면 자연인이고 짐승 수준의 삶이다.
짐승은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흙에서 태어나서 흙으로 가는 것이다.
그러나 <참사람>은 죽기 위하여 사람으로 오셨다.
<인간 >도 죽기 위하여 사람으로 왔다. 이거다.

★  그러니까 오늘 여러분과 나는 죽기 위하여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죽기 위하여 사람으로 오셨는데- - -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심을 입은 것은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이것이 목적이다.
그러니까 주님은 죽기 위하여 사람으로 오셨고
         믿는 자도 주님처럼 죽기 위하여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죽음에 대하여 소망이 있느냐? 믿음이 있느냐? 그것이 다르게 나타난다.

뱃속에 있는 아이가 생각할 때,
이 세상이 있을까?
   역사가 있을까?
   우리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가 있을까?
   기와집이 있고, 전철이 있을까?
뱃속에서 별생각 다 할 거다.
아마 쌍둥이가 생각한다면,
‘이 바보야 정신 차려, 무슨 놈의 세상이 있고, 전철이 있느냐? 이놈아!’
‘전철 타봤어?’
자기 어머니 뱃속에서 그럴 것이다.
그러나 뱃속에 있던 아이가 열 달 후에 나오면, 백년을 살지만
뱃속에 있을 때 미리 유산되어 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면 이 세상을 보지 못한다.
아버지 어머니 얼굴을 보지 못하고  문화를 보지 못한다.
그러나 뱃속에 있는 아이가 열 달 동안 잘 길러 나오면,
그 다음에 문화를 볼 수 있고 세상에서 백년을 살 수 있는 것같이 - -
우리의 영혼이 여기서 백년을 사는 동안에,
뱃속에 있는 아이가 잘 태어나는 것처럼 우리 영혼도 잘 태어나면,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살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이다.
이치가 똑같다.

그러니까 인간은 죽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죽고 살기 위하여 만들어졌는데,
주님이 인간을 위하여 죽었다고 자꾸 생각하니까 문제다.
인간은 주님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지,
주님이 인간을 위하여 육신 입은 것이 아니다는 말이다.
인간이 주님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적어도 이렇게 까지는 생각해야 철들은 신앙인이 아닌가!!

주님이 인간 위해서 죽음 맛본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죽음을 맛보려고 오셨는데,
우리를 부르신 것은 죽음을 맛보라고 부르신 것이다.


생각들이 너무 응고 되어 버렸기 때문에 탈피를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 보고 예수 믿지 못한다고.... 생각이나 마음이 응고 되어 있다고 원망할 것 없다.
자신부터 성경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한거다.
******************************
교리나 주석이나 신학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사람들 너무 따지는 것 보면 한심하다.
배웠으면 그렇게 알고 잘 활용하면 되지 그게 생명인양 붙잡고 늘어지는 사람 수두룩하다.
집에다 담 만들고 대문 만들고 비디오카메라 까지 설치했으면 - - - 그러면 된 거다.
그런 건 잊고 행복하게 살면 된다.
그런 것은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질은 가족이다.
그런데 그런 쓸데없는 것 때문에 본질인 가정을 망치는 사람 많다.
남편이 가정을 위하여 뼈 빠지게 일하는 것만으로는 본질을 잃어버리는 거다.

그런 지식 같은 것이 우리 신앙생활에 굉장한 저해 요소가 되고 말았다.
공로도 있었지만 저해 요소도 있다.
주석은 해석을 잘못 내림으로서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걸 믿어서 얼마나 저해가 많은지 모른다.
사람들이 성경을 더 믿어야 하는데,
성경보다 주석을 더 믿어 버리기 때문에 그만- - - - -  
특히 한국 사람들은 학벌에 벌벌 떤다.
무슨 학교 등등 몇 줄 내려가면 정신 못 차리고 뿅 하고 넘어 간다.
입신 저리가라 한다.
요새 가짜 박사사건만 보아도 사람들이 학벌을 얼마나 중하게 여기고 그 앞에서 신주 모시듯 하고 또 하고 하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실력 있는 사람들은 희생 되지 않으려고 가짜가 되는 거다.
불합리한 사회병리 현상에 도전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돈 주고 또 빽으로 교수 되지 않았다면 욕할 것 하나 없다.
자기 실력으로 된 것을 왜 욕하나?

학벌 속인 것은- - - -  내 개인적인 생각은, 그건 아무 문제 삼을 일이 아니다.
그들은 당연히 실력으로 된 것이니까 사람들의 요구 사항을 벗어난 일이 아니다.
어리석은 사람이나 학생들은 메스컴을 따라서 덩달아 욕 하겠지만, 그게 휩쓸리는거다. 자기를 위하여 좋은 내용을 전수 받았으면 학생들은 그걸로서 된 거다.
본질이 무엇이고 가면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
성경도 마찬가지다.

내 경험으로는- - -  가짜 박사가 교회 안에 엄청 많을 거다.
다른 일반 대학과는 비교도 안 될 거다.
그만큼 교인들의 요구사항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것 다 검부락지다. 아무 소용없다.
믿음이 눈에 보이나?
제대로 얘기하자면- - - -
성경에 대한 학위는 믿음에 의하여 수여 되어야 하지만 그게 불가능하니까 신학박사 나오고- -  성경을 중심으로 하여 박사 종류도 많다.
그러나 그러한 표면상의 박사는 참고로 알고 있으면 되는데- -  그게 믿음까지 얻어 줘 버린다. 그게 문제다.
집사는 물론이고 장로나 심지어 목사도 그 박사라고 하는 큰 권위에 쪼라들고 묻혀서 믿음까지도 보너스로 인정 해 주고 마는 세상이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 진리가 있는 줄 알고 목사들은 가짜박사 따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내가 어찌 아느냐?
목사가 아니고 구경꾼이니까 더 잘 수도 있지.
내가 왜 이런 말을 하지?
그러나 틀린 말은 아니다.
여러분 박사가 부럽나?
제대로 된 실력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실력자가 되어야 한다.
세상에서 딴 박사 100개도 죽을 때 못 간다.
그러나 믿음박사는 1개라 해도 죽을 때 간다.
죽을 때 아무 것도 가져가는 것이 없지만
믿음만은 가져갈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백수들- - -  -인터넷에서 1년 동안만 눈 안 떼고 읽어 보라.
집중적으로 해 보라. 이미 성경은 좀 아니까, 해 보라. 박사 부러울 것 하나 없다.
검부락지에 목숨 걸 것 없다.
오직 성경에 목숨 걸고 목숨을 걸고 읽고 믿어야 한다.
신학이나 주석이나 감투 계급장은 참고서도 아니고 그냥 참고삼을 뿐이다.
성경을 그대로 믿자.
성경은 우리의 상상과 세계를 넘은 소망을 준다. 그러니까 소망이 아닌가!
소망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선,
오직 창조자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소망이다.
그래서 생각 좀 리모델링 하자.
하나님은 나를 위하여 존재 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죽고 살기 위하여 오셨고
***사람은 죽고 살라 하신다.
항상 묵상하여 묵은 생각을 밀어내자.

교리*****교리는 체계화시키는 것이다.
교리가 없다면 미신처럼 되어버리는 것이다.
또 교리가 있으면, 미신이 하나의 종교라는 형태를 갖추고 살아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리가 없으면, 종교가 안 된다.
       교리가 없으면, 하나의 미신이 되어 버린다.
미신을  교리화하여 체계화 되면 종교가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다른 체계가 필요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온 것은, --- 하면은 이미 체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항상 하는 얘기이지만 성경은 문제를 제시 하는 것이 아니라 해답이다.
이 말은 그냥 흘러가면서 한 말이 아니다. 어슬픈 말이 아니다.

믿음만이 보이지 않는 실력이다.
우리는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다.
아무나 믿을 수 있는 것을 믿는다면 그건 하나님의 믿음이 아니다.
우리는 정말로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성도들이다. 아멘!? 아멘!!
성경은 해답이니 그냥 믿자.

그렇다고 해서 해석이 다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좋은 것이다.
그러나 해석할 것을 해석해야지
다 완성된 것을 또다시 다 뜯는 모습들을 보면, 참 - - - 기도 막혀서 입도 다물지 못하겠다.
믿을 것이 못된다고 이리 뜯고 저리 뜯고..... 싸우고 비난하고 야단이다.
그냥 믿으면 아무 머리 탈이나 마음 탈도 안날 텐데!
믿음이 없으니까 자꾸 뜯는 거다. 뜯으니까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먼저 믿음이 없으니까 뜯고 보는 거다.
자동차를 샀으면, 타고 다니면 되는데,  왜 멀쩡한 새 자동치를 뜯고 야단인가!!
그런 사람을 보고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나?
“이 사람아, 그냥 타고 다니면 되지 왜 뜯나?”하지 않겠나!
성경을 분해하면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믿음이 없다”라고 하실 것이다.
하여튼 사람들은 고집이 세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과 변론하시나?
하나님도 이론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이해시키지 않으신다.
하나님도 그런 사람들에게는 할 말이 없는 거다.
하나님도 할 말이 없으니끼(?) “어리석다”고 해 버린다.
멀쩡한 성경을 다시 뜯지 말고 믿는 사람이 되자.

내가 정말- - - - - 이스라엘의 배경을 잘 알고, 역사도 잘 알고 원어도 잘 안다면 성경을 엄청 설명할 텐데- - - - -
내가 국민학교 4학년 때, 담임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시험을 칠 때는 국어와 산수만 한다는 것이 국가의 방칩이다. 고 말햇거든 - -  - 그러니까 역사와 자연은 빼고 국어와 산수만 해질 때까지 죽도록 시킨거다.
그 당시 나와 같은 동갑내기는 마찬가지 일 것이다.
우리학교만 그랬겠는가? 전국적으로 다 그랬을거니까.
그래서 그런지 나는 역사나 화학이나 생물 같은 것은 계속 빵점이다. 중학교 입학 할 때 양 쪽 다리 삐어서 몇 개월 동안 학교 못가고- - -  고등학교 들어가서도 계속 공부하고는 인연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가족 모두는 잘 나가는데.....
건데 내 한테는 잡사도 아깝다.
집안에서 이런 넘이 하나씩 있다고 하는데- -  - 내가 걸려 버린 것 같다.
하여튼 지금 생각하면 역사에서 관심을 끊게 한 고넘의 담임이나 교육부가 원수 같다.
그렇게 생각하지만 ,,, 참자.
다 내가 못난 탓이요!  

성경은 답인데 무슨 꼬리가 붙나!!
해답의 결론은 정답이니까 듣고 믿으면 되는 것이다.
무슨 변명이 많고 무슨 해석이 그렇게도 많은지, 그게 다 인간적인 생각을 가미 시켜서 만든 짬뽕의 결론이다.

교리 싸움하는 것 보라. 교리 때문에 교파는 자꾸 갈라지는 것이다.
성서는 하나도 없다.
성령의 역사는 하나도 없다.
순전히 교리와 거기에다 법을 하나 더 하여, 갈라진다.

그러니까 우리는 교리보다, 예수!
예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하셨다. 완전하시다.
예수는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의 뜻이요,
                       길, 진리, 생명이시다. 이렇게 답이다.

그러니까 기름의 원액과 같은 이 말씀을 그대로 믿고서- - -  - 금을 캐듯이 뒤지는 것이다.
그 다음에 자기에게 적용시키면 되는 거다.
자기의 모든 환경과 조건에 맞도록 적용시켜서 따르며 살고- - -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교리는 인간이 어떤 미신을 체계화하는 것같이,
기독교를 교리화 한다면,
엉뚱하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체계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체계에 부족하지 않다.
그는 진리시다. 부족하지 않다.

신학***** 신학은 신앙을 학문화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을 체계화한 것이 신학이다.
학문화한 것이고 과학화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러한 학문으로서의 신앙으로 자꾸 인정받으려니 예수는 온데 간데 없이 보이지 않게 되더라.

성경에는 성령이 오신다고 했다.
성령이 오시면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을 알게 하고,
                                      생각나게 하신다고 했다.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고 했다. (요 14:26, 16:13)
그러니 우리는 주석보다 성경에 좀 더 권위 주시고,
              교리보다 예수에 대해 좀 더 깊이 아시라.
              신학보다 성령에 좀 더 감동되시라.
예수가 없고 성령이 없어도 주석이나 교리나 신학만 가지고 존재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믿음 없이도 성경을 논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우린 설교에서
‘신학적으로 이렇고’보다는 ‘성령이 이렇게 말씀하시고!’또,          
‘교리적으로 이렇고’보다는 ‘인자가 온 것은 이런 뜻이고!’
하는 설교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또,
‘어떤 주석에 보면.... 철학가에 의하면......,
  어떤 유명한 박사!  어떤 주석자!’에 의하면......, 보다는....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시고!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온전하다 이거다.

여러분이 성경을 제대로 안다면, 성경이 얼마나 완벽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성경을 믿지 못하니까 주석을 따르게 되고,
예수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니까, 교리에 얽매여 버리는 것이고,
성령에 대한 절대적 감동이 없기 때문에 ‘신학적, 신학적’한다.
신학 때문에 얼마나 많은 지장이 오는 줄 아는가?
여러분 그런데서 위안 받을려고 하니까 여러분의 영혼은 피폐해지고 망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가?

이것 참... 원래는 박사가 된 사람이 이런 말을 해야 하는 건데- -  누가 이런 말 듣기라도 하겠나?
거지같은 사람이 부자 보고 예수 믿으라 하면 “너나 잘 믿으라” 하는 것 같이,
너나 성경 잘 읽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외형을 초월하여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생각 한다.

되돌아가서,
예수님은
죽은 다음, 다시 살기 위하여 오셨고
우리도 그 분의 뜻을 따라
죽고 살려고 한다.
우리가 성경을 살펴 볼 때, 이렇게 선지자 입장에서 살펴보는 눈과 대제사장 입장에서 살펴보는 눈이 필요한거다.

인간은 죽음을 맛보기 위하려고, 천사보다 못하게 지으심을 받았다.
지음을 받은 피조물 중에 천사보다 못하게 지음 받은 것은
죽음을 맛보게 하려 함이라.
우리 주님이 죽음을 맛보려고, 인자로 나타나신 것같이,
사람은 죽음을 맛보려고 지음을 받았다 이거다.

그런데,
인간이 천사와 다른 것은 육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 = 몸 + 혼,  
지정의(인격) = 지성과 감정과 의지.
하나님처럼 영원한 존재로 만드실 때, 지성. 감성. 의지를 주셨다.
사람이나, 천사 등이 영원함.
영적인 존재에게는 지정의를 주셨다.
말을 잘해야 한다.

짐승의 경우,
몸 + 혼 (각혼) (각혼은 느낌이다) 이렇게 해서 짐승이 된 것이다.
짐승은 몸이 죽든지, 혼이 죽든지,
       둘중에 뭐가 하나 깨어지면 없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사람도 이와 같이 몸과 혼. 이를 인격이라 한다.
여기서 몸 + 혼 = 인격이니까, 그러니까 함께 몸! 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인격을 <사람>이라 말한다.
그러니까 사람이란 곧,
혼, 혹은 몸 : 이 둘 중에서 하나만 빠지면 사람 될 수가 없다.


몸, 혹은 혼.  혼, 혹은 몸. 이것을 합쳐서 인격이라 한다.
인격 곧 사람이라 한다.

그리고
사람 + 영 = 항구적인 존재
사람(인격) + 영 = 항구적인 존재, 영원한 사람이 되는 거다.
그러나 만약
사람(몸 + 혼 )은 인격인데, 여기에 영원한 존재가 없다면,
즉, 사람 + 영에서 영을 빼버린다면, 이는 짐승과 같이 동물과 같이
그냥 얼마의 기한 동안 있다가 사라져 버리는 하나의 동물적이 되고 만다.

그러나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어서 <생령>이 되게 했다.
생령은 하나님의 숨결이다. 하나님의 생명이다.
사람 + 생기 = 생령.
영원히 사는 영이란 말이다.
영원히 사는 항구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원래가 이 생기라는 것은 (생) =살음, 산다는 뜻이다.
<사람>은 <살음>에서 나왔다.
<생>이란 말은 <사람>이란 말이다.
어떤 사람?
영적인 사람.
이 <영>이란 말은 영원한 존재다. 항구적인 존재,
인격에다가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니까 영원한 존재의 사람이 되었다. 이런 말이다.

혼과 몸은 지금 우리가 정신적인 것과
                      보이는 물체를 구분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사람은 물체만이 사람이 되는 것 아니고,
       정신적인 것 즉, 인격이 있어야 사람이다.

그러니까 여기에 별개의 <영>이 있다면, 영은 항구적인,
그 때부터는 하나님같이 영원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 + 영 = 영원한 사람. 이렇게 된다.

인간이 영이 없이 그냥 사람이라면..... 짐승 수준의 삶이다.
       그러다가 몸이 깨어진다면, 그냥 없어지고 마는 거다.
그런데, 인간에게 영이 가입되었을 때 문제는 달라진다.

영은 태어날 때는 백지 상태다.
죄의 속성을 가지고 육체 속에서 창조된 영이다.
거기서 육체의 경험에 의하여 이 세상을 맛보면서 죄도 짓고, 하나님도 배우고.... 여러 가지를 배우기도 하고 하나님을 떠난 생활도 한다.
다시 말하면, 만들어지는 것이다.
말씀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지든지 마귀에 의하여 지옥의 자식이 되는지 한다. 자신의 인격이 막 나타나는 신나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 자랄 만큼 자라고 익으면 하나님이 거두신다.
생명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하나님이 영혼을 부르시면 육은 흙으로 돌아가는데
이 때의 영은 인격이 나타나지 않는다. 몸도 없는데 어떻게 인격이 나타나겠는가.
영은 중지 상태가 된다.
몸이 있을 때에 인격이 나타나는데, 만약
몸이 없으면 인격이 나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영이 없다면,
몸이 깨어질 때는 존재 자체가 없어지고 말지만,
영이 몸에 가입되어 있다가 몸이 소멸 되면  
인격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영은 중지상태가 된다.  

사람이 죽는다고 하는 것은 몸이 없어진 것이다.
흙으로 돌아가 버린 거다.
따라서 인격이 나타날 수 없다.
왜?
몸이 있어야 나타나는 것이니까!

몸은 없어져도 영은 영원한 존재 때문에- - -  
               사람의 몸은 죽어도 인격은 이미 영 안에 잠재해 버렸다. 이 말이다.
죽은 사람들은 인격이 안 나타난다.
사람이 죽으면, 살아생전에 스스로 만들었던 인격이 영 안에 잠재해 버린다 이 말이다.

죽은 사람의 인격은 안 나타난다.
죽은 사람은 아무리 기다려도, 죽은 사람에게 ----<어머니!>하면,
왜그래?하고 대답하는 일은 없다.
죽은 사람은 인격이 없기 때문에 감정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 이거다.
몸은 이미 흙으로 돌아갔다.  
그러니까 예수님도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마10:28)”
라는 말씀처럼 영이 생명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몸하고는 상관없는 영역 속으로 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낙원에 가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낙원은 인격이 영안에 잠재되어진.....  
살아생전의 인격이 영에 각인되어진 사람들이 거하는 곳이 낙원이다.
잠잔다고 한다.

불신자도 똑 같이, 인격이 그 영에 잠재된다.
그러나 그들은 약속 받지 못한 자들이니까 낙원에 들어가지 못한다.
대신 그들은 어디로 가느냐?

그들은 부활하기 전까지, - 부활은 몸이 부활하는 것이다.
몸이 생겨나면 인격이 부활하는 것이다. 인격이 나타난다.
그런즉, 부활이란 것은 인격 자체가 부활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불신자의 죽음은 제 길로 가는 것이다.

이 다음에 부활한 다음, 천년 동안은 신자들이 그 때, 다스린다.
그 전에는 부활이 있기 전에는,
즉 주님의 재림이 있기 전에는 불신앙이 왕 노릇 하고,
부활이 있은 다음에는 신자들이 왕 노릇 한다.
지금은 불신자들이 왕 노릇 한다.
그러나 그들은 불못으로 간다고 기록 되어 있다.
그래서 심판의 부활과, 생명의 부활이다.
이 다음에 부활 때는 영이 육체가 되기에 더 말짱한 정신이 된다.

이 썩어지는 것(육체)는 흙에서   온 것이고,
이  ( 부활한 육체 ) 는 말씀에서 온 것이고,
                    ---하늘에서 온 것이고,
그러니까 부활 때는 하늘에서 온 이 신령한 것이 몸으로 변하는 것이다.

이 육, 썩어질 것은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한다.
이 몸이 부활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흙으로 돌아갔다.
이미 에덴에서 정해진 이치다.
이미 흙이니 흙으로 가버렸다.
과거에 있던 몸이 다시 생겨날  때는 바로,
이 하늘에서 온 이 영이, 성령이란 말이 아니다.
본래 인간은 영을 부여받았다. 그것이 아담이다.
그 아담이 부활하는 거다.
이것이 다시 몸이 되어 버리면, 인격이 다시 살아난다.

롬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영이란 무엇인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이 약속을 믿는 믿음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실 새로운 생명이다.
우리가 받은 이 말씀은 우리 안에서 성령님과 함께 살아 있는 말씀이며 보증하신다.
빌 3:21에 우리의 낮은 몸을 예수님의 영광의 몸과 같은 형체로 변하게 해 주시는 거다.
“그리스도를 살리셨다”는 영 즉 이 말씀을 믿는 믿음이 마음에 있는 자에게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몸이 아니라,
영원히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죽지 않고
아프지 않고
피곤하지 않는 예수님의 몸과 똑같은 몸을 주시는 거다.
  
아담에다가 그리스도의 영이 하나 더 가입됐다 이거다.
그러나 불신자는 그리스도의 영이 없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이 죽고 사는 사람의 비참함은 참 어마어마할 것이다.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사..... 다시 세상에 보내서 인생을 함 더 살게 하실까?
그러나 인생은 단 한번이다. 윤회 찾으려면 절간에서나 찾고.....

그래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것이다.
                                                   그의 영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나 불신자는 그리스도의 영이 없기 때문에
그냥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자는 부활해서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죽을 때도 부활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갖고 죽어야 한다. 아니라면 죽을 때 당황한다.
우리의 공로 즉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로를 확실히 알고,
확실히 믿어서 죽을 때도 세상 확실히 끝내고 확실히 죽을 수 있어야 한다.
어제도 참 비참한 뉴스를 들었지만,
세상에서 아무리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세상 모든 사람들의 흠모를 받고 세상 최고의 상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부활관이나 구원관이 확립 안 된다. 일단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먼저 있어야한다.
그러고 나서 구제를 하든 무엇을 하든,
하나님을 바라는 우리의 행위는 계속 될 수 있는 거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게 귀한 시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영원한 인격을 얻었으니,
이 인격을 말씀으로 잘 성장 시킬 수 있도록 주여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이름에 의지하여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