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 <열린 토론실>입니다. 다비안들의 부담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채>와는 달리, 보다 진지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나 주제를 나누고 싶은 분들을 위한 게시판입니다. 가급적 예의를 갖추시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대화는 다비안을 비롯한 여러 네티즌들의 온라인 상에서의 자유로운 것이기에 그 방향과 정체성이 반드시 다비아와 일치하지는 않음을 밝혀둡니다.
글 수 253
십자가에 있어서 보속과 화목제물의 관점은 그 누구도 흔들 수 없는 십자가의 의미의 정수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것에 대해 이의를 다는 것은 불신앙으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제가 한의사 게시판에서 신앙적인 글을 많이 올리던 중에 - 워낙에 기독교가 심하게 비판당하고, 비판을 넘어서서 억울하게 모욕당하는 것이 참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글을 올리면서 교인 비교인들 사이에서도 많인 공감을 얻었습니다. - 한 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상당히 신심 깊으신 선배뻘 되시는 분이었는데, 합동신학대학원을 졸업하신 정규 코스를 밟은 분이었습니다. 역시나 이해도가 깊으신데다가, 저에게 던지는 문제 제기도 상당히 날카로웠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서 그 분이 나의 아킬레스건을 잡듯이 하시는 말씀은, 아무리 은혜를 말하고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말해도 - 그 분은 저의 글과 생각에 대해서 내용적으로 적극 공감하셨습니다. -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빠져버리면 완전히 헛 것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예수의 십자가를 그냥 대수롭지않게 취급한 적은 없는데, 그 분은 그렇게 느끼셨던가 봅니다.
"선생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에 의해서 선생님의 죄가 완전히 씻겨서 의롭게 되신 것을 믿습니까?"
저는 무작정 믿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나서도 저는 상당히 당황스러웠습니다... 왜 저 선배님께서는 나에 대해서 저런 의심을 품으셨던 것일까? 제 글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죄를 사함, 의롭게 됨의 이야기가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아서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아주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것에 대해서는 저도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십자가의 의미가 단지 고전적인 해석에만 고정되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은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저도 잘은 모르지만, 바울의 유대종교의 제의적 의미인, 화목제물 유비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해석되어오다가, 초대 교부들 사이에서도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배상 만족설" 같은그런 견해들이 압도적이었는데, 칼빈에 이르러서 "penal substitution" (형벌 대체론, 왕의 아들이 무엇인가 잘못을 했는데 그 나라 법에 따르면 두 눈을 뽑아야 하는데, 왕이 자기 눈 하나 뽑고 아들 눈 하나 뽑아서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인다는 그런 비슷한 레파토리입니다)인가 해서 형법적인 해석으로 급변하게 되는데, 그 것이 더 많은 공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도 보이듯이 십자가의 구원론적 해석 방식은 시대에 따라서 더 명확한 형태로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구원의 관계에 있어서 그냥 그러한 해석적인 관점만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 의미가 담보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십자가를 보면서, 십자가가 나의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믿기가 쉽기는 쉬운 것일까 회의가 들었습니다. 그 것은 앞에서도 말한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나의 죄 씻음, 의롭게 됨을 그냥 머리로 이해하고 그 관념을 지적으로 수용하는 선에서 끝날 수 있는 문제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나의 삶의 방식과 행동 생각 등등이 실제로 십자가를 구원의 길로 인정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더 큰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저의 삶은 십자가를 부인하기가 일쑤입니다... 윤동주 시인이 "십자가" 라는 시에서 쓴 것처럼 나에게도 십자가는 너무나도 요원하기만 합니다.
예수의 삶과 존재가 결국 그 쪽으로 수렴될 수 밖에 없었던 바로 그 십자가... 그 십자가가 나에게 무엇이냐는 물음을 항상 자신에게 던져봐야하지 않을까 합니다...
제가 한의사 게시판에서 신앙적인 글을 많이 올리던 중에 - 워낙에 기독교가 심하게 비판당하고, 비판을 넘어서서 억울하게 모욕당하는 것이 참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글을 올리면서 교인 비교인들 사이에서도 많인 공감을 얻었습니다. - 한 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상당히 신심 깊으신 선배뻘 되시는 분이었는데, 합동신학대학원을 졸업하신 정규 코스를 밟은 분이었습니다. 역시나 이해도가 깊으신데다가, 저에게 던지는 문제 제기도 상당히 날카로웠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서 그 분이 나의 아킬레스건을 잡듯이 하시는 말씀은, 아무리 은혜를 말하고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말해도 - 그 분은 저의 글과 생각에 대해서 내용적으로 적극 공감하셨습니다. -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빠져버리면 완전히 헛 것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예수의 십자가를 그냥 대수롭지않게 취급한 적은 없는데, 그 분은 그렇게 느끼셨던가 봅니다.
"선생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에 의해서 선생님의 죄가 완전히 씻겨서 의롭게 되신 것을 믿습니까?"
저는 무작정 믿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나서도 저는 상당히 당황스러웠습니다... 왜 저 선배님께서는 나에 대해서 저런 의심을 품으셨던 것일까? 제 글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죄를 사함, 의롭게 됨의 이야기가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아서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아주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것에 대해서는 저도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십자가의 의미가 단지 고전적인 해석에만 고정되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은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저도 잘은 모르지만, 바울의 유대종교의 제의적 의미인, 화목제물 유비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해석되어오다가, 초대 교부들 사이에서도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배상 만족설" 같은그런 견해들이 압도적이었는데, 칼빈에 이르러서 "penal substitution" (형벌 대체론, 왕의 아들이 무엇인가 잘못을 했는데 그 나라 법에 따르면 두 눈을 뽑아야 하는데, 왕이 자기 눈 하나 뽑고 아들 눈 하나 뽑아서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인다는 그런 비슷한 레파토리입니다)인가 해서 형법적인 해석으로 급변하게 되는데, 그 것이 더 많은 공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도 보이듯이 십자가의 구원론적 해석 방식은 시대에 따라서 더 명확한 형태로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구원의 관계에 있어서 그냥 그러한 해석적인 관점만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 의미가 담보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십자가를 보면서, 십자가가 나의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믿기가 쉽기는 쉬운 것일까 회의가 들었습니다. 그 것은 앞에서도 말한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나의 죄 씻음, 의롭게 됨을 그냥 머리로 이해하고 그 관념을 지적으로 수용하는 선에서 끝날 수 있는 문제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나의 삶의 방식과 행동 생각 등등이 실제로 십자가를 구원의 길로 인정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더 큰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저의 삶은 십자가를 부인하기가 일쑤입니다... 윤동주 시인이 "십자가" 라는 시에서 쓴 것처럼 나에게도 십자가는 너무나도 요원하기만 합니다.
예수의 삶과 존재가 결국 그 쪽으로 수렴될 수 밖에 없었던 바로 그 십자가... 그 십자가가 나에게 무엇이냐는 물음을 항상 자신에게 던져봐야하지 않을까 합니다...
2008.10.06 16:02:08
청개구리님 말씀대로 예수께서는 세상 속으로 너무 깊숙히 들어오셔서, 너무 깊히 관여하시다가, 너무 깊이 사랑하시다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십자가라는 영적, 진리적 상징은 우리에게 아주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정말 십자가가 의미하는 바가 뚜렷이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 십자가 앞으로 더 가까이 가면 갈수록 또한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해주겠죠...
2008.10.10 16:18:23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본심을 아는 것입니다. 속마음을 알았을 때 진정으로 그 사람을 안다고 할수았는 것이죠. 십자가는 바로 하나님의 본심 속마음을 알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과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자리 그냥 장소적인 의미가 아니라 마음이, 본심이 만나게하는 자리 그래서 소중한 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는 자의 아픔을 감수하고 또 다른 이 나를 안아가는 것을 마음으로 받아드린다면 그냥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삶이 되고 신뢰가 되지 않겠습니까?
청개구리님의 말처럼 값싼은혜 혹은 자신을 버리는 십자가 없이 살아가는 것은 분명 잘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보이신 마음과 그 이루신 일을 모르는 것도 십자가를 모르는 것이 아닐까요.
우찌무라 간조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사랑이고 그 사랑을 믿는 것이 믿음이고 그믿음이 소망을 만들어낸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자신을 지은 이를 가장 선명하게 만나고 신뢰하게 되고 소망을 가지게 되는 자리가 바로 십자가라고 저는 믿습니다.
청개구리님의 말처럼 값싼은혜 혹은 자신을 버리는 십자가 없이 살아가는 것은 분명 잘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보이신 마음과 그 이루신 일을 모르는 것도 십자가를 모르는 것이 아닐까요.
우찌무라 간조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사랑이고 그 사랑을 믿는 것이 믿음이고 그믿음이 소망을 만들어낸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자신을 지은 이를 가장 선명하게 만나고 신뢰하게 되고 소망을 가지게 되는 자리가 바로 십자가라고 저는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본질이 능력의 하나님이시나 만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시는 치욕을 당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석가도 고귀한 신분을 버리고 고행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만,중생을 구한다기보다 '진리'를 깨치기 위한 개인적인 수행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만인을 위한 자기희생이 예수가 석가나 공자,마호메트와 뚜렷이 대별되는 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수의 제자이기를 원하는 우리도 그러한 예수의 본을 따라야겠으나, 저도 첫날처럼님처럼 자신의 십자가를 지기를 꺼려합니다 그러면서 말로만 '사회의 정의'를 부르짖고 다른 사람들이 십자가를 져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나의 십자가를 포함하여... 언젠가 베드로처럼 믿음의 분량이 장성하기를 원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