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 <열린 토론실>입니다. 다비안들의 부담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채>와는 달리, 보다 진지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나 주제를 나누고 싶은 분들을 위한 게시판입니다. 가급적 예의를 갖추시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대화는 다비안을 비롯한 여러 네티즌들의 온라인 상에서의 자유로운 것이기에 그 방향과 정체성이 반드시 다비아와 일치하지는 않음을 밝혀둡니다.
글 수 253
***전도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
전도는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성경을 한 눈으로 본다면
평신도를 향하여 전도하라고 강력하게 촉구하는 말씀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가장 가까운 실례를 든다면 편지서가 될 것이다.
바울의 편지 속에서 전도하라는 내용이 있을까.
전도에 대하여 가장 근접한 내용은 엡 6:15이 될 것이나
그러나 현장 투입에 적극성을 엿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내용도 있지만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명령한 내용이다.
사도 바울은 항상 전도에 대한 비상(非常)이었지만
성도들에게는 전도 하라고 닦달거리지 아니하였다.
베드로도 그리하였는데
다만“소망의 이유에 대하여 묻는 자들을 위하여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고만 했을 뿐이다.
사도 요한도 입도 한번 벙긋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이 성도들에게 간곡하게 요구한 것은 평안 소망 감사 사랑 은혜 이단(異端)과 같은 것으로서
교회를 지키기에 급급한 기분만 들 뿐이다.
그러니까 집중적인 관심사는 질(質)적인 문제였다.
그렇게 기쁜 신앙생활만 해 주더라도 감사감사하였다.
머리 숫자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아마 자신들의 몫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전도에까지는 감히 부담을 주려고 한 흔적은 거의 없다.
물론 제자가 제자를 낳는다는 말에서
전도자는 양육해야 된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교회에서 단3장과 행 1:8과 같은 내용을 가지고 어지간이 전도하라고 뽁아 대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가 하는 의문(疑問)을 함 가져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초대교회에서는 왜 부흥했을까?
물론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의 생활을 청산하고 변화된데 대한 세상 사람들의 눈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누구에 의하여 또 어떻게 변화 되었는지에 대한 근본이 교회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몰려들었던 것이다.
그럼 현대교회에 대한 정곡(正鵠)을 찌르는 일이 있다.
이미 다 아시다시피
현대 교회에는 뭐 어떻게 라는 것도 찾기 어렵고 누구라고 하는 사람도 드물다.
물론 프로그램도 많고 목회자도 많지만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 시키는 그 무엇은 너무나 희박한 현실이다.
전도는 인위적(人爲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하여 되는 것이다.
율법에 얽매어서 부담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능가한 변화가 소문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다니는 교회로 데리고 오면 뭐하나?
잔치 집에 데리고 오더라도 굶겨야할 것을 빤히 알고 있는 한
전도에 대한 사명은 또 휴가 시켜야할 것이다.
그러나 맛있는 음식이 잔뜩 차려져 있다면
진짜로 강권해서라도 데리고 오지 않겠는가.
전도는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성경을 한 눈으로 본다면
평신도를 향하여 전도하라고 강력하게 촉구하는 말씀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가장 가까운 실례를 든다면 편지서가 될 것이다.
바울의 편지 속에서 전도하라는 내용이 있을까.
전도에 대하여 가장 근접한 내용은 엡 6:15이 될 것이나
그러나 현장 투입에 적극성을 엿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내용도 있지만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명령한 내용이다.
사도 바울은 항상 전도에 대한 비상(非常)이었지만
성도들에게는 전도 하라고 닦달거리지 아니하였다.
베드로도 그리하였는데
다만“소망의 이유에 대하여 묻는 자들을 위하여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고만 했을 뿐이다.
사도 요한도 입도 한번 벙긋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이 성도들에게 간곡하게 요구한 것은 평안 소망 감사 사랑 은혜 이단(異端)과 같은 것으로서
교회를 지키기에 급급한 기분만 들 뿐이다.
그러니까 집중적인 관심사는 질(質)적인 문제였다.
그렇게 기쁜 신앙생활만 해 주더라도 감사감사하였다.
머리 숫자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아마 자신들의 몫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전도에까지는 감히 부담을 주려고 한 흔적은 거의 없다.
물론 제자가 제자를 낳는다는 말에서
전도자는 양육해야 된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교회에서 단3장과 행 1:8과 같은 내용을 가지고 어지간이 전도하라고 뽁아 대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가 하는 의문(疑問)을 함 가져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초대교회에서는 왜 부흥했을까?
물론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의 생활을 청산하고 변화된데 대한 세상 사람들의 눈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누구에 의하여 또 어떻게 변화 되었는지에 대한 근본이 교회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몰려들었던 것이다.
그럼 현대교회에 대한 정곡(正鵠)을 찌르는 일이 있다.
이미 다 아시다시피
현대 교회에는 뭐 어떻게 라는 것도 찾기 어렵고 누구라고 하는 사람도 드물다.
물론 프로그램도 많고 목회자도 많지만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 시키는 그 무엇은 너무나 희박한 현실이다.
전도는 인위적(人爲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하여 되는 것이다.
율법에 얽매어서 부담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능가한 변화가 소문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다니는 교회로 데리고 오면 뭐하나?
잔치 집에 데리고 오더라도 굶겨야할 것을 빤히 알고 있는 한
전도에 대한 사명은 또 휴가 시켜야할 것이다.
그러나 맛있는 음식이 잔뜩 차려져 있다면
진짜로 강권해서라도 데리고 오지 않겠는가.
2007.07.10 13:27:53
제가 당혹스러운 게 그거예요.
공원에 앉아있으면,
전도지를 나눠주면서 예수 믿으라고 하시는데,,
전도지를 주었다는 것 외에, 뭘 기대할 수 있나요?
어떤 땐, 일회용 물수건을 주거나,
조그만 휴대용 화장지를 주거나,
지압에 대한 설명이 있고, 끼워 팔듯 교회광고가 있는 전도지,, ^^;
제 눈엔, 요새 전도는 ‘삐끼’와 다를 게 없거든요.
저의 어머니도 그렇게 동원되곤 하시는데,,
‘삐끼’할려구, 교회 댕기는 거 아니잖아요?
공원에 앉아있으면,
전도지를 나눠주면서 예수 믿으라고 하시는데,,
전도지를 주었다는 것 외에, 뭘 기대할 수 있나요?
어떤 땐, 일회용 물수건을 주거나,
조그만 휴대용 화장지를 주거나,
지압에 대한 설명이 있고, 끼워 팔듯 교회광고가 있는 전도지,, ^^;
제 눈엔, 요새 전도는 ‘삐끼’와 다를 게 없거든요.
저의 어머니도 그렇게 동원되곤 하시는데,,
‘삐끼’할려구, 교회 댕기는 거 아니잖아요?
2007.07.10 14:08:32
'삐끼'?
늘오늘님은 어떻게 그렇게 적절한 언어를 잘 찾아내시는지?
항상 짧은 글 속에서도 핵심을 건져내는 그 능력은 참으로 보배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삐끼를 따라가면 대부분 만족하는 반면
교회의 삐끼는 줄거 다 주면서 데려가놓고
나중에 욕 먹습니다.
뭐~땜에 그리 데려갔냐구요?
"너~나~ 잘 하세요!!!"
늘오늘님은 어떻게 그렇게 적절한 언어를 잘 찾아내시는지?
항상 짧은 글 속에서도 핵심을 건져내는 그 능력은 참으로 보배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삐끼를 따라가면 대부분 만족하는 반면
교회의 삐끼는 줄거 다 주면서 데려가놓고
나중에 욕 먹습니다.
뭐~땜에 그리 데려갔냐구요?
"너~나~ 잘 하세요!!!"
2007.07.12 14:04:10
전도는 예수님을 전하는 것인데 예수님을 증거하는 데는
여러가지 수단과 방법이 있지요.
물론전도를 위해서는
행실도 본이 되어야 겠지만 동시에 구체적인 언어로 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하기 위해 노력은 해야겠지만
기본적으로 전도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말하는 것이기에
세상이 반기지 않는 것은 분명합니다.
디모데에게 너는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전도에 항상 힘쓰라는 말씀은
바울이 디모데라는 당시 목회자 개인에게 한 말은 분명하지만
우리는 그렇게만 성경을 해석, 적용하지 않고
오늘 교회 공동체에게 주신 말씀으로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그 앞부분에 하나님 앞과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목회자들에게만 임하는게 아니잖아요?
베드로와 사도 요한도 전도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글쎄요, 베드로도 그렇고 사도 요한도 그렇고
속한 공동체가 전도하는 공동체였음을 성경전체가 마구 보여준다고 보여지는데요!
요한복은 전체가 전도를 위해 쓰여진 글로 볼 수도 있습니다.....
(전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또 다시 이야기 해야겠지만!!!)
모든 성도들은 자신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구원받았다고 믿는다면
당연히 아직 믿지않는 사람에게 나아가야겠지요.
그걸 베드로가 말안했다고 또는 사도요한이 말안했다고 하고
전도에 대한 사명을 휴가 보내야 한다면
뭐라 답해야 할지 참 민망합니다.
세상은 전도자를 삐끼라고 조롱하고 꺼리끼고 전도하는 것을 미련하다고 하지만
성경은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 말씀합니다.
바울도 얼마나 많은 조롱을 당했습니까?
교회 사정이 너무 열악해서 전도하기 힘들다면이야
또 다른 면을 생각해야겠지만
기본적으로 전도는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이요.
우리가 그 명령에 순종할지 불순종할지에 대한 선택이 남아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전도해서 나중에 욕먹을 교회라면 저도 선뜻 전도하라고 말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교회는 예수님이 주인이시잖아요. 주실 은혜가 분명히 있을 거예요.
"전도, 우리 함께 잘 해봐요!"
여러가지 수단과 방법이 있지요.
물론전도를 위해서는
행실도 본이 되어야 겠지만 동시에 구체적인 언어로 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하기 위해 노력은 해야겠지만
기본적으로 전도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말하는 것이기에
세상이 반기지 않는 것은 분명합니다.
디모데에게 너는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전도에 항상 힘쓰라는 말씀은
바울이 디모데라는 당시 목회자 개인에게 한 말은 분명하지만
우리는 그렇게만 성경을 해석, 적용하지 않고
오늘 교회 공동체에게 주신 말씀으로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그 앞부분에 하나님 앞과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목회자들에게만 임하는게 아니잖아요?
베드로와 사도 요한도 전도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글쎄요, 베드로도 그렇고 사도 요한도 그렇고
속한 공동체가 전도하는 공동체였음을 성경전체가 마구 보여준다고 보여지는데요!
요한복은 전체가 전도를 위해 쓰여진 글로 볼 수도 있습니다.....
(전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또 다시 이야기 해야겠지만!!!)
모든 성도들은 자신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구원받았다고 믿는다면
당연히 아직 믿지않는 사람에게 나아가야겠지요.
그걸 베드로가 말안했다고 또는 사도요한이 말안했다고 하고
전도에 대한 사명을 휴가 보내야 한다면
뭐라 답해야 할지 참 민망합니다.
세상은 전도자를 삐끼라고 조롱하고 꺼리끼고 전도하는 것을 미련하다고 하지만
성경은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 말씀합니다.
바울도 얼마나 많은 조롱을 당했습니까?
교회 사정이 너무 열악해서 전도하기 힘들다면이야
또 다른 면을 생각해야겠지만
기본적으로 전도는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이요.
우리가 그 명령에 순종할지 불순종할지에 대한 선택이 남아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전도해서 나중에 욕먹을 교회라면 저도 선뜻 전도하라고 말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교회는 예수님이 주인이시잖아요. 주실 은혜가 분명히 있을 거예요.
"전도, 우리 함께 잘 해봐요!"
2007.07.12 18:24:19
경태님의 순전한 그 마음이야 예쁘기 그지없지요.
하지만 바울의 전도여행을 통한 전도와 오늘날 교회에서 행하는 전도를 설마 같이 보는 것은 아니겠지요.
요즘은 예수의 이름때문에 조롱받는 전도자는 구경하기 힘들껍니다.
자신들의 부적절한 신앙생활로 예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세상사람들이 예수의 이름때문에 전도자를 핍박하지는 않거든요.
오해 마시기 진정 바랍니다.
그래도 교회는 예수님이 주인 맞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교회가 아니면 주인도 예수님이 아니라는 사실이 자꾸 간과된다는 것입니다.
간판이 교회라는 이름을 달았다고 교회면 이 세상은 벌써 천국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머리되신 교회가 예수님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그 지체는 심각하지요.
한마디로 장애를 입은 교회이거나 아예 교회가 아니거나...
나무아미타불만 외치면 극락간다고 하는거나
예수 믿으면 천당간다고 하는 거나
둘다 본 뜻을 왜곡해서 사용하기는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바울의 전도여행을 통한 전도와 오늘날 교회에서 행하는 전도를 설마 같이 보는 것은 아니겠지요.
요즘은 예수의 이름때문에 조롱받는 전도자는 구경하기 힘들껍니다.
자신들의 부적절한 신앙생활로 예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세상사람들이 예수의 이름때문에 전도자를 핍박하지는 않거든요.
오해 마시기 진정 바랍니다.
그래도 교회는 예수님이 주인 맞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교회가 아니면 주인도 예수님이 아니라는 사실이 자꾸 간과된다는 것입니다.
간판이 교회라는 이름을 달았다고 교회면 이 세상은 벌써 천국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머리되신 교회가 예수님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그 지체는 심각하지요.
한마디로 장애를 입은 교회이거나 아예 교회가 아니거나...
나무아미타불만 외치면 극락간다고 하는거나
예수 믿으면 천당간다고 하는 거나
둘다 본 뜻을 왜곡해서 사용하기는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2007.07.12 22:27:39
순전하고 이쁘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울의 전도와 오늘날 전도가 다른 점이 무엇인지요?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 믿으라면 싫어합니다.
그 이유를 설마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잘못 행동해서라고만 단순하게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지요?
교회가 예수님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는다고 단정지으면 곤란합니다.
혹시 님께서 보시고 경험하신 교회는 그럴지 모르지요.
장애를 입은 교회는 초대교회부터 있었다는 것도 알고 계시죠?
제 입장은 그래도 교회는 교회라는 입장입니다.
나무아미타불만 외치면 극락간다는 것과
예수 믿으면 천당간다는 말은 다르다는 것도 잘 아실텐데.....
예수 믿으면 천당간다는 말이 어디가 어떻게 왜곡되었는지...
많은 말이 오가야 겠지요?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 케리그마<예수 믿으면 영생 얻는다>는 오늘도 진리 아닙니까?
바울의 전도와 오늘날 전도가 다른 점이 무엇인지요?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 믿으라면 싫어합니다.
그 이유를 설마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잘못 행동해서라고만 단순하게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지요?
교회가 예수님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는다고 단정지으면 곤란합니다.
혹시 님께서 보시고 경험하신 교회는 그럴지 모르지요.
장애를 입은 교회는 초대교회부터 있었다는 것도 알고 계시죠?
제 입장은 그래도 교회는 교회라는 입장입니다.
나무아미타불만 외치면 극락간다는 것과
예수 믿으면 천당간다는 말은 다르다는 것도 잘 아실텐데.....
예수 믿으면 천당간다는 말이 어디가 어떻게 왜곡되었는지...
많은 말이 오가야 겠지요?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 케리그마<예수 믿으면 영생 얻는다>는 오늘도 진리 아닙니까?
2007.07.13 09:44:08
오랫만들입니다. 비난 받지 않을까 생각 했는데 다비아에서도 나쁜 평은 아닌 것 같네요. 두 군데 올렸지요.
건데 김경태님, 너무나 확실한 현실은, 현대 교회는 많이 오염 되었다는 사실에 수긍 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병 들었는데도 병들지 않았다고 자위 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2,000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엄청 오염(타락) 되었음을 왜 인정 하시지 않는지요? 아니, 세월을 두고 타락 했을 것이라는 짐작은 인간적인 생각이니까 취소한다고 칩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염 되어 있습니다. 교회에는 있을 것은 거의 다 있습니다. 그런데 꼭 있어야할 핵심은 빠져 있습니다. 나아가서... 없어야 할 것도 너무나 풍성하게 들어 와서 오염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전도를 할 때는 너무나 성급하게 합니다. 사정권 안에 들어 오기도 전에 마구 쏘아 대는 꼴이지 않습니까? 빨리 문화 영향을 받아서인지 행1:8을 가지고 적진으로 막 달려 가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건 전도에 대한 타이틀이라고 보는 것이 어떨런지요?
전도는 누구에게나 준 것이지만 그러나 준비한 자만 가질 수 있는 특권(?)이 아닐까요? 아이는 아무나 까는 것이 아니라 일단은 몸이 성장 하고 교육도 미리 받은 자가 아도 까는 것이지, 한 달 짜리를 보고 아이를 낳게 하거나 몸만 컸다고 아무 교육도 없이 사람 생산을 하게 하면 그 결과는 누가 책임질까요?
욕심으로 교인들을 닥달거리는 모습은 결코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도 아니고 사도들의 취한 행동도 아닙
위의 글은 교회 전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교회와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그러니 순결한 교회를 두고 한 말이 아닙니다. 샤롬.
건데 김경태님, 너무나 확실한 현실은, 현대 교회는 많이 오염 되었다는 사실에 수긍 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병 들었는데도 병들지 않았다고 자위 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2,000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엄청 오염(타락) 되었음을 왜 인정 하시지 않는지요? 아니, 세월을 두고 타락 했을 것이라는 짐작은 인간적인 생각이니까 취소한다고 칩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염 되어 있습니다. 교회에는 있을 것은 거의 다 있습니다. 그런데 꼭 있어야할 핵심은 빠져 있습니다. 나아가서... 없어야 할 것도 너무나 풍성하게 들어 와서 오염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전도를 할 때는 너무나 성급하게 합니다. 사정권 안에 들어 오기도 전에 마구 쏘아 대는 꼴이지 않습니까? 빨리 문화 영향을 받아서인지 행1:8을 가지고 적진으로 막 달려 가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건 전도에 대한 타이틀이라고 보는 것이 어떨런지요?
전도는 누구에게나 준 것이지만 그러나 준비한 자만 가질 수 있는 특권(?)이 아닐까요? 아이는 아무나 까는 것이 아니라 일단은 몸이 성장 하고 교육도 미리 받은 자가 아도 까는 것이지, 한 달 짜리를 보고 아이를 낳게 하거나 몸만 컸다고 아무 교육도 없이 사람 생산을 하게 하면 그 결과는 누가 책임질까요?
욕심으로 교인들을 닥달거리는 모습은 결코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도 아니고 사도들의 취한 행동도 아닙
위의 글은 교회 전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교회와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그러니 순결한 교회를 두고 한 말이 아닙니다. 샤롬.
2007.07.13 12:14:36
바울의 전도와 오늘날 전도가 다르심을 모르신다면 더 이상 논의의 진행이 힘드시지 않으실까 염려가 살짝 됩니다.
바울은 자신의 생계유지를 제외한 모든 삶을 전도에 내던졌습니다.
전도의 영광을 자신이 가진 적도 없고 그 결과물을 누린 적도 없습니다.
그럼 요즘 전도왕이라는 사람들의 삶은 어떻지요?
강사료 안받고 전도왕 간증하러 가시나요?
책같지도 않은 책 만들어 잘 팔더군요.(순전히 제가 보는 관점에서 하는 말이니 객관적이 않을 수도 있음돠.)
바울도 전도직접하지 말고 이왕이면 전도할 사람들 많이 길렀으면 좀 편했을텐데, 머리가 안따라줘서 죽을 때까지 전도만 하다가 가버리셨네염.
요즘 전도왕들한테 좀 배울 수 있었다면 잘 먹고 잘 살면서 노년도 편하게 사셨을텐데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 믿으라면 싫어하는 이유가 그럼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도 바울은 예수를 믿으라고 전하고 다녔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증인은 증거를 할 수 있어야 증인입니다.
나를 통해서 예수님이 참 진리요 구원자요 하나님이심이 증거되어야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말로서 예수믿으라고 증거하면 그게 증거가 됩니까?
그게 바로 '너나 잘 하세요!'라는 답으로 돌아오는 이유입니다.
오늘날 삶에 지치고 곤해서 그래도 교회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는데 결정적으로 방해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게 바로 목회자와 교인들이 합심하여 그렇게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제 견해입니다.
즉, 전도의 치명적인 결함이 그기에 있다고 보는 것이고요.
교회가 예수님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는다고 단정지으면 곤란하겠지요.
제가 모든 교회를 보고 경험한 것도 아니고, 세상 모든 교회가 그렇다고 할 수도 당연 없겠지요.
혹 제가 그렇게 경험했던 교회들만 그랬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제가 언급하는 교회같지 않은 간판만 교회를 말했고, 그들은 제가 경험하지 않아도 이미 사회에서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 교회라는 곳에 소속되있는 교인들만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경태님은 눈막고 귀막고 사시지 않는다면 어찌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단 말입니까?
세상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이유가 예수님때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때문인것을 어찌 모르신단 말입니까?
제가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즉, 대다수의 교회가 아닌 일부 극소수 몰지각한 교회와 목회자의 잘못을 마치 교회전체로 확대시켜 일반화시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부족한 저의 눈에는 대다수가 그렇다고 보여지기에 일반화를 시켰겠지요.
장애를 입은 교회는 초대교회부터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서신을 통해서 끊임없이 치료하고자 했고, 오늘날에도 교회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을 통해 계속하여 제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머리가 되지 못하고 사람들이 주인된 교회는 다 사라지고 없습니다.
존속 이유가 없잖아요?
그래도 교회는 교회라는 입장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건 님의 생각이거나 대다수의 목회자들 생각이지 그렇지 않게 보는 그리스도인도 꽤 많습니다.
교회의 간판과 건물은 인정하지만, 그 안에 예수님 안계시다는 생각???
나무아미타불만 외치면 극락간다는 것과
예수 믿으면 천당간다는 말은 다르다는 것도 잘 압니다.
정토종이 신라에 도입되기 전에도 당나라에도 있었습니다.
원효는 비록 당나라유학은 포기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그 자신은 많은 저서를 기록했고, 당대의 뛰어난 학자였습니다.
신라의 귀족은 불교를 향유할 수 있었지만, 평민들은 사실 불경을 대할 일도 없었고, 절에 가기도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효는 평민이나 노비나 그 누구나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며 그 정신으로 살아가면 서방정토에 가서 해탈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설파했던 것입니다.
즉, 바로 해탈하는 것이 아니라 이승에서는 그렇게 해서는 해탈할 수 없지만, 서방정토에 가서 그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선종은 참선을 통하여 해탈하는 길을 추구했고, 교종은 불경을 공부하며 깨달음으로 해탈을 추구했으니, 일반 백성이야 그 둘다 불가능하지 않았겠습니까?
예수 믿으면 천당간다고 할 때 예수 믿는 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가 정의되지 않으면 님 말씀대로 참으로 많은 말을 주고 받아도 합의되지 않을 것입니다.
불상을 보고 절을 하듯이, 정한수를 떠놓고 빌듯이, 그렇게 예수님이라는 분을 어떻게 믿으라는 건지???
사도바울은 대놓고 예수믿으면 천당간다고 하지도 않았고, 영생얻는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바로 믿고자 바로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가르치는 내용을 자신들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누구에게 전한다고 나서는지 그것이 미스테리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케리그마<예수 믿으면 영생 얻는다>는 오늘도 진리 맞습니다.
그런데, 달리 해석되는 것은 그 믿는다는 것의 정의입니다.
무엇이 믿는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너무다 다양하기에 다양한 결과들이 전개되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님이 믿는 다고 생각하는 것과 제가 믿는 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기에 이렇게 다르게 논의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도, 주님은 저 보다는 님을 더 사랑하실 것 같습니다.
저는 아직은 말뿐이거든요.(머리만 움직이지 몸은 따라가지 않고 있기에...)
경태님에게 언제나 우리 주 몌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바울은 자신의 생계유지를 제외한 모든 삶을 전도에 내던졌습니다.
전도의 영광을 자신이 가진 적도 없고 그 결과물을 누린 적도 없습니다.
그럼 요즘 전도왕이라는 사람들의 삶은 어떻지요?
강사료 안받고 전도왕 간증하러 가시나요?
책같지도 않은 책 만들어 잘 팔더군요.(순전히 제가 보는 관점에서 하는 말이니 객관적이 않을 수도 있음돠.)
바울도 전도직접하지 말고 이왕이면 전도할 사람들 많이 길렀으면 좀 편했을텐데, 머리가 안따라줘서 죽을 때까지 전도만 하다가 가버리셨네염.
요즘 전도왕들한테 좀 배울 수 있었다면 잘 먹고 잘 살면서 노년도 편하게 사셨을텐데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 믿으라면 싫어하는 이유가 그럼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도 바울은 예수를 믿으라고 전하고 다녔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증인은 증거를 할 수 있어야 증인입니다.
나를 통해서 예수님이 참 진리요 구원자요 하나님이심이 증거되어야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말로서 예수믿으라고 증거하면 그게 증거가 됩니까?
그게 바로 '너나 잘 하세요!'라는 답으로 돌아오는 이유입니다.
오늘날 삶에 지치고 곤해서 그래도 교회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는데 결정적으로 방해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게 바로 목회자와 교인들이 합심하여 그렇게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제 견해입니다.
즉, 전도의 치명적인 결함이 그기에 있다고 보는 것이고요.
교회가 예수님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는다고 단정지으면 곤란하겠지요.
제가 모든 교회를 보고 경험한 것도 아니고, 세상 모든 교회가 그렇다고 할 수도 당연 없겠지요.
혹 제가 그렇게 경험했던 교회들만 그랬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제가 언급하는 교회같지 않은 간판만 교회를 말했고, 그들은 제가 경험하지 않아도 이미 사회에서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 교회라는 곳에 소속되있는 교인들만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경태님은 눈막고 귀막고 사시지 않는다면 어찌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단 말입니까?
세상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이유가 예수님때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때문인것을 어찌 모르신단 말입니까?
제가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즉, 대다수의 교회가 아닌 일부 극소수 몰지각한 교회와 목회자의 잘못을 마치 교회전체로 확대시켜 일반화시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부족한 저의 눈에는 대다수가 그렇다고 보여지기에 일반화를 시켰겠지요.
장애를 입은 교회는 초대교회부터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서신을 통해서 끊임없이 치료하고자 했고, 오늘날에도 교회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을 통해 계속하여 제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머리가 되지 못하고 사람들이 주인된 교회는 다 사라지고 없습니다.
존속 이유가 없잖아요?
그래도 교회는 교회라는 입장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건 님의 생각이거나 대다수의 목회자들 생각이지 그렇지 않게 보는 그리스도인도 꽤 많습니다.
교회의 간판과 건물은 인정하지만, 그 안에 예수님 안계시다는 생각???
나무아미타불만 외치면 극락간다는 것과
예수 믿으면 천당간다는 말은 다르다는 것도 잘 압니다.
정토종이 신라에 도입되기 전에도 당나라에도 있었습니다.
원효는 비록 당나라유학은 포기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그 자신은 많은 저서를 기록했고, 당대의 뛰어난 학자였습니다.
신라의 귀족은 불교를 향유할 수 있었지만, 평민들은 사실 불경을 대할 일도 없었고, 절에 가기도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효는 평민이나 노비나 그 누구나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며 그 정신으로 살아가면 서방정토에 가서 해탈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설파했던 것입니다.
즉, 바로 해탈하는 것이 아니라 이승에서는 그렇게 해서는 해탈할 수 없지만, 서방정토에 가서 그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선종은 참선을 통하여 해탈하는 길을 추구했고, 교종은 불경을 공부하며 깨달음으로 해탈을 추구했으니, 일반 백성이야 그 둘다 불가능하지 않았겠습니까?
예수 믿으면 천당간다고 할 때 예수 믿는 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가 정의되지 않으면 님 말씀대로 참으로 많은 말을 주고 받아도 합의되지 않을 것입니다.
불상을 보고 절을 하듯이, 정한수를 떠놓고 빌듯이, 그렇게 예수님이라는 분을 어떻게 믿으라는 건지???
사도바울은 대놓고 예수믿으면 천당간다고 하지도 않았고, 영생얻는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바로 믿고자 바로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가르치는 내용을 자신들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누구에게 전한다고 나서는지 그것이 미스테리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케리그마<예수 믿으면 영생 얻는다>는 오늘도 진리 맞습니다.
그런데, 달리 해석되는 것은 그 믿는다는 것의 정의입니다.
무엇이 믿는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너무다 다양하기에 다양한 결과들이 전개되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님이 믿는 다고 생각하는 것과 제가 믿는 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기에 이렇게 다르게 논의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도, 주님은 저 보다는 님을 더 사랑하실 것 같습니다.
저는 아직은 말뿐이거든요.(머리만 움직이지 몸은 따라가지 않고 있기에...)
경태님에게 언제나 우리 주 몌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2007.07.13 12:50:38
휴~
번호를 좀 매겨야겠네요.
1. 바울의 전도와 오늘날 전도의 다른 점이
바울은 생계외에 다 전도했고 오늘날 전도왕은 강의하고 다닌다는 점이란 주장이신건가요?
바울은 전도자를 안길렀다는 점도.....이거 참 어디부터 이야기 해야 할지....
2. 사도바울은 예수님 믿으라고 전하고 다녔을 것 같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당연히 '예'이지요. 이 말씀을 왜 하셨는지....바울이 예수님 믿으라고
말했다는 걸 몰라서 그러시는지.....
제가 제기한 문제는 믿는자의 행실도 중요하지만(제가 언제 안 중요하다고 했나요?)
전도는 결국 구체적인 말로 전해져야 한다는 것이 전도의 기본입니다. 이걸 부정하시면 곤란하죠.
강조점의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 말보다 행실이라든지....그러나 전도는 행실로만이 아니라
말과 함께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행실이라는 것이 여러가지 한계(인간의 연약함, 본능 등)
로 인해 완전하게 되지 못하기에 불완전한 상태일지라도 말은 해야 한다고 보는 거죠.
3. 교회의 문제점은 제가 눈과 귀를 막은 상태로 안보고 안듣는 게 아니구요.
이것도 역시 제가 언제 문제가 없다고 했나요? 단지 '교회가 교회가 아니라면'이라는 님의 가정이
너무 막연하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교회가 교회가 아니라면 예수님도 주인이 아니시죠.
그런데 그 교회가 교회가 아니라면이라고 할때 그 판단 기준이 무엇인지 기독교 역사 가운데
계속 논쟁된 것인데 쉽게 정의하고 단정지으며 내가 속한 교회가 교회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전도를 거부하는 것은 믿는 자의 행실의 문제도 분명있지만
사실 세상은 예수님도 거부했는데....따라서 믿는 자의 행실이 핵심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고
믿는 자의 행실이 혹시 핵심 문제라고 해도 제가 2번에서 말했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게 제 입장입니다.
4. 예수님 믿고 천당간다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신뢰하고 내 삶의 미래를 예수님께 내어맡긴다고
결단하는 것으로 봐도 되겠지요?
번호를 좀 매겨야겠네요.
1. 바울의 전도와 오늘날 전도의 다른 점이
바울은 생계외에 다 전도했고 오늘날 전도왕은 강의하고 다닌다는 점이란 주장이신건가요?
바울은 전도자를 안길렀다는 점도.....이거 참 어디부터 이야기 해야 할지....
2. 사도바울은 예수님 믿으라고 전하고 다녔을 것 같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당연히 '예'이지요. 이 말씀을 왜 하셨는지....바울이 예수님 믿으라고
말했다는 걸 몰라서 그러시는지.....
제가 제기한 문제는 믿는자의 행실도 중요하지만(제가 언제 안 중요하다고 했나요?)
전도는 결국 구체적인 말로 전해져야 한다는 것이 전도의 기본입니다. 이걸 부정하시면 곤란하죠.
강조점의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 말보다 행실이라든지....그러나 전도는 행실로만이 아니라
말과 함께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행실이라는 것이 여러가지 한계(인간의 연약함, 본능 등)
로 인해 완전하게 되지 못하기에 불완전한 상태일지라도 말은 해야 한다고 보는 거죠.
3. 교회의 문제점은 제가 눈과 귀를 막은 상태로 안보고 안듣는 게 아니구요.
이것도 역시 제가 언제 문제가 없다고 했나요? 단지 '교회가 교회가 아니라면'이라는 님의 가정이
너무 막연하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교회가 교회가 아니라면 예수님도 주인이 아니시죠.
그런데 그 교회가 교회가 아니라면이라고 할때 그 판단 기준이 무엇인지 기독교 역사 가운데
계속 논쟁된 것인데 쉽게 정의하고 단정지으며 내가 속한 교회가 교회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전도를 거부하는 것은 믿는 자의 행실의 문제도 분명있지만
사실 세상은 예수님도 거부했는데....따라서 믿는 자의 행실이 핵심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고
믿는 자의 행실이 혹시 핵심 문제라고 해도 제가 2번에서 말했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게 제 입장입니다.
4. 예수님 믿고 천당간다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신뢰하고 내 삶의 미래를 예수님께 내어맡긴다고
결단하는 것으로 봐도 되겠지요?
2007.07.13 13:05:57
컴퓨터를 잘못 건드려서 계속할께요...
4번이어서, 그리고 그렇게 결단하는 - 회개하는 사람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지요?
5. 사도바울이 대놓고 말하지 않았다는 천당(천당이라는 단어는 없긴하죠. 천당은 님이 쓰신 단어이니...
그러나 구원과 진노, 심판, 영생 등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바울 뿐만 아니라 요한문서에도 많이 나오는 것
아실텐데요. 혹시 모르시면 나중에 성구들을 제시해 드릴께요.
님이 바로 밑에 쓰신 문장도 여전히 막연한 추측아닌가요?
가르치는 자신들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라고 표현하셨는데 그것은
현재 전도하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같은데...맞나요?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죠. 그러나 다는 아니죠.
따라서 전도하는 사람은 가르치는 자신들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겠죠? 일부라고 표현하신다면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리고 전 솔직히 그렇게 전도하는 것이 침묵하고 있는 자들보다 더 훌륭하다고 봅니다.
감히 사도바울의 말씀을 인용해 보죠(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6. 주님은 저나 님을 똑같이 사랑하시는 차별없는 사랑(절대적인 사랑?)을 베푸실 것입니다.
2007.07.13 16:12:55
전도의 당위. 실태와 실효성. 그리고 대안...
머, 이렇게 글을 전개할 수 있다면,
월매나 좋겠습니까만,,, 제 방식대로 다짜고짜,,
먼저, 한가지, 짚고 넘어갑시다.
“‘전도’란 우리교회 신도수를 늘리는 일이다.”
저는 이런 전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전도 아닌 다른 전도도 있나요?
“그리고 그 방법은 강권하여, 데리고 나오는 일이다.”
“전도할 대상을 정해 놓고 늘 기도하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기회 있는 대로 예수를 전하라.”
숫자불리기가 초미의 관심사입니다.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하는 지, 그건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자기 처지가 어떤지, 그건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앵무새처럼 외워대는 성경구절들,
어줍잖은 간증과 감언이설, 어설픈 변증.
그리고, 이러한 전도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비기독교인.
아울러, 이러한 전도에 대한 회의로 떡칠이 된 기독교인.
“야, 나 요즘 힘들다. 교회 어디 나갈만한 데 없냐?”
“별로 권하고 싶지 않아. 차라리 스님들 쓰신 좋은 책을 읽어봐!”
“그러는 너는 왜 교회 나가냐?”
“나는 원체 세뇌돼서 다른 방식이 힘들어!”
저도 숫자가 불어나길 내심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나 관심 끊기로 했습니다. ㅋㅋ^^
머, 이렇게 글을 전개할 수 있다면,
월매나 좋겠습니까만,,, 제 방식대로 다짜고짜,,
먼저, 한가지, 짚고 넘어갑시다.
“‘전도’란 우리교회 신도수를 늘리는 일이다.”
저는 이런 전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전도 아닌 다른 전도도 있나요?
“그리고 그 방법은 강권하여, 데리고 나오는 일이다.”
“전도할 대상을 정해 놓고 늘 기도하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기회 있는 대로 예수를 전하라.”
숫자불리기가 초미의 관심사입니다.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하는 지, 그건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자기 처지가 어떤지, 그건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앵무새처럼 외워대는 성경구절들,
어줍잖은 간증과 감언이설, 어설픈 변증.
그리고, 이러한 전도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비기독교인.
아울러, 이러한 전도에 대한 회의로 떡칠이 된 기독교인.
“야, 나 요즘 힘들다. 교회 어디 나갈만한 데 없냐?”
“별로 권하고 싶지 않아. 차라리 스님들 쓰신 좋은 책을 읽어봐!”
“그러는 너는 왜 교회 나가냐?”
“나는 원체 세뇌돼서 다른 방식이 힘들어!”
저도 숫자가 불어나길 내심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나 관심 끊기로 했습니다. ㅋㅋ^^
2007.07.13 16:32:52
김경태님의 글을 읽고나서 다시 제 글을 읽으니 제가 쓴 글들을 다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많은 허점을 가지고 있군요.
글을 길게 쓴다고 해서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쓸만한 글이 아니라는 것을 제 글이 여실히 보여주는군요.
아무래도 경태님이 핵심을 건드리지 못하시는 걸로 봐서는 제가 말을 잘 못 한다고 결론되어지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두드려는 봐야 할 듯 합니다.
1. 바울과 오늘날의 전도자와의 차이점을 제가 그렇게 말하는 걸로 이해하셨다면 다시 한 번 이야기 하겠습니다.
전임전도자냐 그렇지 않느냐 그 차이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전임전도자가 아니면 전하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늘날의 전도자는 그 영광을 자기가 다 이 세상에서 받고 있습니다.(적어도 제 눈에는 그리 보이니 제 눈이 잘못일 수도 있겠지요.-이 역시 일반화를 시켜서 죄송합니다.)
전도 간증자 들만이 아닙니다. 총동원주일시상이나 연말전도시상 수 없이 봐 왔습니다.
하다못해 성경통독상도 있습니다.
‘상 받아서 나쁜 사람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전 ‘네’ 라고 대답하겠습니다.
한 번도 기쁘게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철든 이후로)
제가 아무리 말을 잘 못하더라도 사도바울과 오늘의 전도자를 비교한 이유는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 여기서도 일반화시켜서 모두가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제 눈에 보이는 부분만을 이야기하기에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2. 2번의 핵심도 역시 전달되지 못했습니다.
말하지 말고 전도하는 것은 사실 전도도 아니고 뭣도 아니지요.
그건 그냥 삶인 겁니다.
전도라고 하면 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어 구원에 이르는 도를 전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사도바울의 전도는 이방민족에게 구원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가르치는 것이지 단순히 예수 믿으라고 교회에 나오라고 말하고 다니는 것이 아니란 말이었죠.
사도바울은 전하지 않는 자에게는 화가 있다고 말할 정도로 전하는 데 온 생애를 걸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바로 그 증거였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철저한 유대교 지도자가 될 사람이 예수라는 분은 믿고 난 후 그의 삶이 완전히 바뀐 증거 그 자체입니다.
예수 믿으라고 말하고 다녔다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죠.(물론 직접 본 것이 아니지만 성서를 통해서 보면 그가 예수에 대해 가르치고 그 도를 전한 것이었지요.)
3. 저의 단정이 문제라고 말한다면 제가 가진 관점도 물론 문제가 되겠지만, 교회에 대한 세상의 평가가 이미 그렇다고 말하는데 굳이 저의 말을 가지고 문제 삼을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교회에서 발행해주는 기부금내역서(증명서)도 이미 국가에서는 믿어주지 않을 정도로 도덕적으로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종교인과 종교법인에게 세금을 부과하자는 주장이 교회 때문에 나왔다는 사실도 부정하실 건지요?
교회냐 아니냐는 인간이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런 주장에 대해 겸허하게 자신을 돌아보아 그렇지 않도록 노력하는 게 중요한 것이지 교회들이 교회가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사람이 개개의 교회가 예수님이 머리로 계시는 교회인지 사람이(삯군이) 머리로 있는지 판단하겠습니까?
다만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알 수 있다는 전제하에 짐작할 수만 있지만, 잘못된 열매를 지적하면 그에 대해 회개하고 돌이키면 그래도 예수가 머리된 교회일 수 있지만, 우리는 원래부터 부족한 죄인들이기에 당연한 것이라며 돌이키지 않는 다면 그 곳은 분명 삯군이 주인된 모임이지 않겠나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요.
제가 판단한다고 교회가 교회이고 아니고 되는 것이 아니기에,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내가 판단된다는 그 말씀이 얼마나 무서운데 제가 함부로 판단하겠습니까?
저는 단지 제가 그런 사람이 되지 않고, 제가 속한 교회가 그렇게 빠지지 않기 위해서 타산지석으로 삼고 끊임없이 건강한 교회를 지향해 나가는 것뿐입니다.
4. 개인적으로 저는 천당이라는 협의의 말은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을 주로 쓰고, 그도 아니면 적어도 ‘천국’이란 단어를 선택해서 쓰는 편입니다.
대체로 믿는 다는 의미는 동의를 해도 괜찮겠습니다.
5. 제가 천당이란 말을 사용한 이유는 제가 주로 쓰는 말이 아니라 교회에서 주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으로 대변되는 말 아닙니까?
4복음서에서 구원이 어떠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가와, 바울서신에서 구원을 얻는다, 이룬다는 의미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 지 그 의미를 바로 이해하면 오늘날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단순한 구호나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가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전도하지 말라고 하는 말이 아님을 아시기 바랍니다.
님이 동의하시다시피 일부라는 범위가 얼마나 될는지는 조사를 해도 나오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소수가 아닐 것은 자명하다고 봅니다.
침묵하고 있는 것보다 말이라도 하는 것이 더 낫다고 보는 것은 어디까지나 님의 견해일 것입니다.
말로 외치는 것이 오히려 주님의 영광가리는 것이 분명해 보일 때(누가 봐도 그렇게 보일 때) 그래도 그렇다고 말하실 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때로는 웅변보다 침묵이 훨씬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 웅변이 전혀 신뢰되지 않고 믿음이 가지 않는데 아무리 좋은 내용을 웅변한다고 해서 전혀 와 닿지 않듯이, 그 입에 아무리 좋은 예수의 이름이 불려진대도 그 자신이 전혀 신뢰되지 못하고 믿음이 안가는 사람인데 어찌 예수의 이름이 전파되겠습니까?
때로는 자신을 전혀 모르는 갈급한 심령에게 그 말이 전달되어 예수를 믿어보고 싶어 질 수 있습니다.
때로는 흥미를 느낀 사람이 교회로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게 더 큰 문제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제가 지금까지 한 전도의 치명적인 함정이라는 것입니다.
작년 한 해 동안 어떤 교회는 등록자가 몇 천 명을 헤아리더군요.
전국적으로는 작년에 새로 교회에 등록된 신자가 얼마인지 통계도 낼 수 없을 만큼 많더군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기독교 신도의 수는 갈수록 줄어듭니다.
그것이 전도를 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하시렵니까?
6. 주님은 예수를 믿는 다고 고백하는 사람이나 모른다고 고백하는 사람이나 동일하게 사랑하십니다.
아니 오히려 모른다고 하는 사람을 더 사랑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객관적인 글을 전개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점이 많아서 대부분 추측성의 글이거나 저의 독단적인 판단이 많을 수 있음(주관적)을 인정합니다.
해서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 않느냐’ 식의 답은 무의미 합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로 알고 있으니 말이지요.
글을 길게 쓴다고 해서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쓸만한 글이 아니라는 것을 제 글이 여실히 보여주는군요.
아무래도 경태님이 핵심을 건드리지 못하시는 걸로 봐서는 제가 말을 잘 못 한다고 결론되어지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두드려는 봐야 할 듯 합니다.
1. 바울과 오늘날의 전도자와의 차이점을 제가 그렇게 말하는 걸로 이해하셨다면 다시 한 번 이야기 하겠습니다.
전임전도자냐 그렇지 않느냐 그 차이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전임전도자가 아니면 전하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늘날의 전도자는 그 영광을 자기가 다 이 세상에서 받고 있습니다.(적어도 제 눈에는 그리 보이니 제 눈이 잘못일 수도 있겠지요.-이 역시 일반화를 시켜서 죄송합니다.)
전도 간증자 들만이 아닙니다. 총동원주일시상이나 연말전도시상 수 없이 봐 왔습니다.
하다못해 성경통독상도 있습니다.
‘상 받아서 나쁜 사람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전 ‘네’ 라고 대답하겠습니다.
한 번도 기쁘게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철든 이후로)
제가 아무리 말을 잘 못하더라도 사도바울과 오늘의 전도자를 비교한 이유는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 여기서도 일반화시켜서 모두가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제 눈에 보이는 부분만을 이야기하기에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2. 2번의 핵심도 역시 전달되지 못했습니다.
말하지 말고 전도하는 것은 사실 전도도 아니고 뭣도 아니지요.
그건 그냥 삶인 겁니다.
전도라고 하면 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어 구원에 이르는 도를 전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사도바울의 전도는 이방민족에게 구원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가르치는 것이지 단순히 예수 믿으라고 교회에 나오라고 말하고 다니는 것이 아니란 말이었죠.
사도바울은 전하지 않는 자에게는 화가 있다고 말할 정도로 전하는 데 온 생애를 걸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바로 그 증거였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철저한 유대교 지도자가 될 사람이 예수라는 분은 믿고 난 후 그의 삶이 완전히 바뀐 증거 그 자체입니다.
예수 믿으라고 말하고 다녔다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죠.(물론 직접 본 것이 아니지만 성서를 통해서 보면 그가 예수에 대해 가르치고 그 도를 전한 것이었지요.)
3. 저의 단정이 문제라고 말한다면 제가 가진 관점도 물론 문제가 되겠지만, 교회에 대한 세상의 평가가 이미 그렇다고 말하는데 굳이 저의 말을 가지고 문제 삼을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교회에서 발행해주는 기부금내역서(증명서)도 이미 국가에서는 믿어주지 않을 정도로 도덕적으로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종교인과 종교법인에게 세금을 부과하자는 주장이 교회 때문에 나왔다는 사실도 부정하실 건지요?
교회냐 아니냐는 인간이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런 주장에 대해 겸허하게 자신을 돌아보아 그렇지 않도록 노력하는 게 중요한 것이지 교회들이 교회가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사람이 개개의 교회가 예수님이 머리로 계시는 교회인지 사람이(삯군이) 머리로 있는지 판단하겠습니까?
다만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알 수 있다는 전제하에 짐작할 수만 있지만, 잘못된 열매를 지적하면 그에 대해 회개하고 돌이키면 그래도 예수가 머리된 교회일 수 있지만, 우리는 원래부터 부족한 죄인들이기에 당연한 것이라며 돌이키지 않는 다면 그 곳은 분명 삯군이 주인된 모임이지 않겠나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요.
제가 판단한다고 교회가 교회이고 아니고 되는 것이 아니기에,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내가 판단된다는 그 말씀이 얼마나 무서운데 제가 함부로 판단하겠습니까?
저는 단지 제가 그런 사람이 되지 않고, 제가 속한 교회가 그렇게 빠지지 않기 위해서 타산지석으로 삼고 끊임없이 건강한 교회를 지향해 나가는 것뿐입니다.
4. 개인적으로 저는 천당이라는 협의의 말은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을 주로 쓰고, 그도 아니면 적어도 ‘천국’이란 단어를 선택해서 쓰는 편입니다.
대체로 믿는 다는 의미는 동의를 해도 괜찮겠습니다.
5. 제가 천당이란 말을 사용한 이유는 제가 주로 쓰는 말이 아니라 교회에서 주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으로 대변되는 말 아닙니까?
4복음서에서 구원이 어떠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가와, 바울서신에서 구원을 얻는다, 이룬다는 의미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 지 그 의미를 바로 이해하면 오늘날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단순한 구호나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가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전도하지 말라고 하는 말이 아님을 아시기 바랍니다.
님이 동의하시다시피 일부라는 범위가 얼마나 될는지는 조사를 해도 나오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소수가 아닐 것은 자명하다고 봅니다.
침묵하고 있는 것보다 말이라도 하는 것이 더 낫다고 보는 것은 어디까지나 님의 견해일 것입니다.
말로 외치는 것이 오히려 주님의 영광가리는 것이 분명해 보일 때(누가 봐도 그렇게 보일 때) 그래도 그렇다고 말하실 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때로는 웅변보다 침묵이 훨씬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 웅변이 전혀 신뢰되지 않고 믿음이 가지 않는데 아무리 좋은 내용을 웅변한다고 해서 전혀 와 닿지 않듯이, 그 입에 아무리 좋은 예수의 이름이 불려진대도 그 자신이 전혀 신뢰되지 못하고 믿음이 안가는 사람인데 어찌 예수의 이름이 전파되겠습니까?
때로는 자신을 전혀 모르는 갈급한 심령에게 그 말이 전달되어 예수를 믿어보고 싶어 질 수 있습니다.
때로는 흥미를 느낀 사람이 교회로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게 더 큰 문제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제가 지금까지 한 전도의 치명적인 함정이라는 것입니다.
작년 한 해 동안 어떤 교회는 등록자가 몇 천 명을 헤아리더군요.
전국적으로는 작년에 새로 교회에 등록된 신자가 얼마인지 통계도 낼 수 없을 만큼 많더군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기독교 신도의 수는 갈수록 줄어듭니다.
그것이 전도를 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하시렵니까?
6. 주님은 예수를 믿는 다고 고백하는 사람이나 모른다고 고백하는 사람이나 동일하게 사랑하십니다.
아니 오히려 모른다고 하는 사람을 더 사랑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객관적인 글을 전개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점이 많아서 대부분 추측성의 글이거나 저의 독단적인 판단이 많을 수 있음(주관적)을 인정합니다.
해서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 않느냐’ 식의 답은 무의미 합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로 알고 있으니 말이지요.
지난 7월 1일이 초청잔치라는 예배를 가졌다.
년초부터 태신자를 작정하고 노방전도도 하고, 전도 훈련도 하고...
회집목표 200명을 목표로 정말 간절히 기도도 하고...(물론 다는 아니겠지만 일부는 그렇게 기도하는데...)
나는 참 삐딱선을 탔다.
한 번도 동참을 해 본 적이 없다.
기도회도 안나가고, 노방전도도 안나가고, 그냥 그 잔치날 예배만 드리고 점심도 안먹고 집으로 왔다.
7월 8일 주보에 보니 회집인원이 98명으로 기록되었다. 그날 참석한 새로운 인물이 한 30여명 되었나보다.
그래서 7/8 예배시간에 괜히(?) 인원을 세어보았더니 채 70명이 되지 않았다.
6개월동안 생난리부루스를 치면서 초청잔치를 끝내고 나니 원위치???
목사님이 예배후에 제직수련회를 가지겠다고 한다.
너희들이 하는 일이 잘 되나 안되나 지켜보자면서 교회의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은 참 교인이 아니란다.
그들은 귀족교인이란다.
몸은 움직이지 않고 머리만 가지고 판단한는 귀족같은 교인...
바로 나같은 인간을 말한다.
드뎌 울 교회에서도 귀족교인에 대한 저주가 시작되나보다.
주여!
제가 머리로만 판단하고 몸이 움직이는데는 인색한 귀족이고 싶지 않습니다.
비록 교회의 방향이 저와 맞지 않아서 참여치 못할 지언정 삶에서는 치열하게 예수님의 삶을 살아내고 싶습니다.
오직 주의 사랑에만 매여 주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주님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주님의 발이 세상을 향하는 그 발로 세상을 향하게 하시고
주님이 세상을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세상을 사랑하게 하시옵소서
비록 이것이 욕심일지라도 할 수 있는 만큼이라도 할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을 덧입어서 그리 할 수 있도록 성령하나님이여 나에게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내 안에서 끊임없이 일깨워주셔서 나태해지고 게을러질 때마다 깨우치시고 채찍질하셔서 능히 나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케 도와주시옵소서.
내가 소망하는 영의 삶을 사는 것 보다는 육신의 안일함과 편안함에 취하지 아니하도록 나의 모든 소유를 빼앗아가셔서라도 하나님나라를 살아내게 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