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 <열린 토론실>입니다. 다비안들의 부담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채>와는 달리, 보다 진지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나 주제를 나누고 싶은 분들을 위한 게시판입니다. 가급적 예의를 갖추시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대화는 다비안을 비롯한 여러 네티즌들의 온라인 상에서의 자유로운 것이기에 그 방향과 정체성이 반드시 다비아와 일치하지는 않음을 밝혀둡니다.
글 수 253
30년전, '이기적 유전자'의 도킨스가 말했다.
"양자물리학은 아무나 함부로 말할 수 없지만,
진화론은 아무나 아는양 떠들어댄다. 그것이 진화론의 약점이다"
나도 말하고 싶다.
"심리학은 누구나 안다고 생각하고, 이미 알았다고 떠드는 학문이다.
그것이 심리학의 피곤함이다."
오도된 상식들이 대중심리학과 연계되어 하나의 유사과학으로서 일반인들에게 '철저히'
잘못 인식되어 있는 사실은 신경과학도로서 분노를 넘어선 참담함을 일으킨다.
갈릴레오 당시 '천구에 관한 학'은 자연신학의 일부였다.
그러나 천체물리학이 전문가들이 손에 넘어간 지금, 어떤 정신나간 인간도 그것이 신학이나 교회에서 다루는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판넨베르그같은 자연신학자들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과학'의 반열에 속하지 않는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나, 칼 융, 자끄 라깡의 정신분석이론들이 문학과 연계된지는 꽤 오래된 얘기이다. 신학의 상담목회학이나 요새 트렌드로 자리잡은 영성수련에 '그들의' 심리학이 상당히 깊게 연루(?)된 것도 '신비주의'의 재발흥과 관련이 깊은 것 같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들이 과학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말해 심리학이 50년 이내로 공중분해되어 완벽히 자연과학(신경과학)에 통섭될 때,
어떤 얼빠진 인간도 '정신분석'이나 '무의식'같은 검증되지 않은 용어를 들먹이며
신학을 논하진 않으리라는 것이다. 갈릴레오 당시처럼 밀이다.
티코 브라헤나 지오다노 브루노가 지동설을 주장했을 때, 신학자들도 저마다 책을 내고 반론하며 안티테제를 형성했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에 관한 책을 출판했을 때 루터의 비평은 짤막했다.
"얼토당토 않은 가설들은 쓰는 종이가 아깝다."
그러나 뉴튼을 지나 계몽주의 시대가 지난 후
어떤 신학자나 목사도 지동설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다.
20세기를 들어서며 언어학과 심리학은 이제 자연과학으로 입양될 '마지막 아이들'로 지목되어
대중과 교회 손에서 멀어지고 있다.
목사와 신부들은 '마음'이나 '영혼'을 '뇌'를 같이 말하지 않으면 조롱받는 시대가 온 것이다.
물론 깊은 '영성'훈련이 언젠간 뇌를 스캔하는 fMRI로 모두 분석된다 할지라도 구구한 그 전통이 사라질리는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아직까지 자연신학을 말하는 신부들은 있다. 다만 자연신학이란 것이 신부들이 주도권을 쥐고, 새로운 자연과학적 사실들을 발견해내며 해석까지 하는 중세와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변형되어 남았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심리학과 관련있는 영성부분이나 상담목회도 과학사의 예외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영성이나 상담목회의 기초가 되는 심리학이 자연과학(신경과학)으로 거의 환원이 이루어지면 신부나 목사들은 다른 텃밭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의사 겸 주술사 겸 상담사 겸 사회복지사가 아닌 새로운 역할 모델을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과학사는 그들의 겸업을 분화시키고 있는 연표라고도 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환원주의가 우리의 정서를 피폐하게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저녁 노을이 빨간색인 이유가 공기입자들이 적색가시광선 파장에 충돌해 산란되는 현상에서 비롯된 사실을 밝혀냈다하더라도 화가는 여전히 그림을 아름답게 그릴 수 있고 우리는 그것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온도가 분자들의 평균운동에너지라는 사실이 "따뜻함"과 "포근함"을 연결시키는 우리의 "마음"을 얼어붙게 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최후의 한조각까지 신비로운 것을 없애는 노력을 경주한 뒤, 남은 몇조각 형이상학적 파편들이 우리를 더욱 위대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그 파편들이 적으면 적을수록 우리의 시작은 점점 초라해지는 동시에 우리가 그려온 궤적은 점점 위대해지기 때문이다)
ID가 어떻고, EGO가 어떻고, 구조적 무의식이 어떻고, 영혼이 어떻고 하는 것들은 우리가 상승하기 위한 것들로서 작용하진 않았다. 검증된 적이 없는 그런 개념들이 만든 신비적 경외감은 인간에게 두려움 즉, 알아서는 안되거나 혹은 영원히 모를 것으로 남겨져 있어야 할 어떤 세계를 상정해왔기 때문이다.
"기계에 의한 영혼의 위대한 상승" 이 말은 어느 프랑스 철학자가 영국의 산업혁명 이 후 기계로 대체된 노동생산력에서 떨어져 나간 실업상태의 '인간' 육체노동자들에게 던진 희망의 메시지이다. 단순노동을 기계가 하는 대신, 인간들은 산업이 발전하면서 지식가치적 생산활동이나 창의적 생산활동에 더욱 힘을 쏟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과학이 신앙에서도 같은 일을 해줄 것이라 믿는다.
인간은 신비의 영역을 계속 파헤치고 깎아내야 한다.
도려내야 할 것이 없어지면 없어질 수록, 생채기가 나서 아프면 아플 수록
내가 믿는 하느님과 '사랑'이란 개념은 위대한 상승을 계속 할 것이다.
루터가 하느님을 믿는데에는 지동설이 그리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지 모른다.
예수믿고 천국에 가는데 지구가 태양을 돌던, 태양이 지구를 돌던 그게 대수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에는 주소가 없다)
오히려 영혼, 마음 이런 개념들이 천국과 더 직접적인 관련이 있어 보인다.
적어도 문자이래 몇천년간 이런 개념들은 사후세계를 다루는 종교적 영역안에 있었으므로
천국에 가는 문제에 있어 지동설보다는 훨씬 연관있어 보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어쩌면 영혼, 마음 이런 개념들은 우리의 마지막 보루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진화 결과의 최정점에 있는 뇌(영혼,마음이라고 불리는).
이 마지막 요새로 보이는 곳까지 우리의 지식이 점령했을 때, 교회는 새로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전혀 다른 개념의 신앙세계가 정립될 수도 있다.
지식과 신앙이 화해하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조화로운 세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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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제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신경과학을 전공하고 있는 대학원생입니다.
2006년에는 운좋게 시간강사로 대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구요,
대학 연구소 연구원으로 잠시 재직한 뒤 현재 군 복무 중인 젊은 과학도입니다.
신경과학을 전공하긴 하지만 전공을 안가리고 배움 자체를 좋아하는 천학비재로서
신학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여기는 지인의 소개로 들어왔구요...
현재 교적은 대한성공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무슨 글을 올릴까하다가
제가 속한 학교 학회에서 새내기 과학도라면 많이 겪는
학부생들의 신앙-과학 간의 내적갈등에 관해 조언을 주는...
(지금 다시 읽어보니 일침을 놓는 글이 되고 말았군요^^;)
예전 글을 올려보았습니다.
좋은 가르침과 소통이 있길 바라면서.
"양자물리학은 아무나 함부로 말할 수 없지만,
진화론은 아무나 아는양 떠들어댄다. 그것이 진화론의 약점이다"
나도 말하고 싶다.
"심리학은 누구나 안다고 생각하고, 이미 알았다고 떠드는 학문이다.
그것이 심리학의 피곤함이다."
오도된 상식들이 대중심리학과 연계되어 하나의 유사과학으로서 일반인들에게 '철저히'
잘못 인식되어 있는 사실은 신경과학도로서 분노를 넘어선 참담함을 일으킨다.
갈릴레오 당시 '천구에 관한 학'은 자연신학의 일부였다.
그러나 천체물리학이 전문가들이 손에 넘어간 지금, 어떤 정신나간 인간도 그것이 신학이나 교회에서 다루는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판넨베르그같은 자연신학자들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과학'의 반열에 속하지 않는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나, 칼 융, 자끄 라깡의 정신분석이론들이 문학과 연계된지는 꽤 오래된 얘기이다. 신학의 상담목회학이나 요새 트렌드로 자리잡은 영성수련에 '그들의' 심리학이 상당히 깊게 연루(?)된 것도 '신비주의'의 재발흥과 관련이 깊은 것 같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들이 과학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말해 심리학이 50년 이내로 공중분해되어 완벽히 자연과학(신경과학)에 통섭될 때,
어떤 얼빠진 인간도 '정신분석'이나 '무의식'같은 검증되지 않은 용어를 들먹이며
신학을 논하진 않으리라는 것이다. 갈릴레오 당시처럼 밀이다.
티코 브라헤나 지오다노 브루노가 지동설을 주장했을 때, 신학자들도 저마다 책을 내고 반론하며 안티테제를 형성했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에 관한 책을 출판했을 때 루터의 비평은 짤막했다.
"얼토당토 않은 가설들은 쓰는 종이가 아깝다."
그러나 뉴튼을 지나 계몽주의 시대가 지난 후
어떤 신학자나 목사도 지동설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다.
20세기를 들어서며 언어학과 심리학은 이제 자연과학으로 입양될 '마지막 아이들'로 지목되어
대중과 교회 손에서 멀어지고 있다.
목사와 신부들은 '마음'이나 '영혼'을 '뇌'를 같이 말하지 않으면 조롱받는 시대가 온 것이다.
물론 깊은 '영성'훈련이 언젠간 뇌를 스캔하는 fMRI로 모두 분석된다 할지라도 구구한 그 전통이 사라질리는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아직까지 자연신학을 말하는 신부들은 있다. 다만 자연신학이란 것이 신부들이 주도권을 쥐고, 새로운 자연과학적 사실들을 발견해내며 해석까지 하는 중세와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변형되어 남았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심리학과 관련있는 영성부분이나 상담목회도 과학사의 예외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영성이나 상담목회의 기초가 되는 심리학이 자연과학(신경과학)으로 거의 환원이 이루어지면 신부나 목사들은 다른 텃밭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의사 겸 주술사 겸 상담사 겸 사회복지사가 아닌 새로운 역할 모델을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과학사는 그들의 겸업을 분화시키고 있는 연표라고도 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환원주의가 우리의 정서를 피폐하게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저녁 노을이 빨간색인 이유가 공기입자들이 적색가시광선 파장에 충돌해 산란되는 현상에서 비롯된 사실을 밝혀냈다하더라도 화가는 여전히 그림을 아름답게 그릴 수 있고 우리는 그것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온도가 분자들의 평균운동에너지라는 사실이 "따뜻함"과 "포근함"을 연결시키는 우리의 "마음"을 얼어붙게 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최후의 한조각까지 신비로운 것을 없애는 노력을 경주한 뒤, 남은 몇조각 형이상학적 파편들이 우리를 더욱 위대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그 파편들이 적으면 적을수록 우리의 시작은 점점 초라해지는 동시에 우리가 그려온 궤적은 점점 위대해지기 때문이다)
ID가 어떻고, EGO가 어떻고, 구조적 무의식이 어떻고, 영혼이 어떻고 하는 것들은 우리가 상승하기 위한 것들로서 작용하진 않았다. 검증된 적이 없는 그런 개념들이 만든 신비적 경외감은 인간에게 두려움 즉, 알아서는 안되거나 혹은 영원히 모를 것으로 남겨져 있어야 할 어떤 세계를 상정해왔기 때문이다.
"기계에 의한 영혼의 위대한 상승" 이 말은 어느 프랑스 철학자가 영국의 산업혁명 이 후 기계로 대체된 노동생산력에서 떨어져 나간 실업상태의 '인간' 육체노동자들에게 던진 희망의 메시지이다. 단순노동을 기계가 하는 대신, 인간들은 산업이 발전하면서 지식가치적 생산활동이나 창의적 생산활동에 더욱 힘을 쏟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과학이 신앙에서도 같은 일을 해줄 것이라 믿는다.
인간은 신비의 영역을 계속 파헤치고 깎아내야 한다.
도려내야 할 것이 없어지면 없어질 수록, 생채기가 나서 아프면 아플 수록
내가 믿는 하느님과 '사랑'이란 개념은 위대한 상승을 계속 할 것이다.
루터가 하느님을 믿는데에는 지동설이 그리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지 모른다.
예수믿고 천국에 가는데 지구가 태양을 돌던, 태양이 지구를 돌던 그게 대수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에는 주소가 없다)
오히려 영혼, 마음 이런 개념들이 천국과 더 직접적인 관련이 있어 보인다.
적어도 문자이래 몇천년간 이런 개념들은 사후세계를 다루는 종교적 영역안에 있었으므로
천국에 가는 문제에 있어 지동설보다는 훨씬 연관있어 보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어쩌면 영혼, 마음 이런 개념들은 우리의 마지막 보루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진화 결과의 최정점에 있는 뇌(영혼,마음이라고 불리는).
이 마지막 요새로 보이는 곳까지 우리의 지식이 점령했을 때, 교회는 새로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전혀 다른 개념의 신앙세계가 정립될 수도 있다.
지식과 신앙이 화해하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조화로운 세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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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제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신경과학을 전공하고 있는 대학원생입니다.
2006년에는 운좋게 시간강사로 대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구요,
대학 연구소 연구원으로 잠시 재직한 뒤 현재 군 복무 중인 젊은 과학도입니다.
신경과학을 전공하긴 하지만 전공을 안가리고 배움 자체를 좋아하는 천학비재로서
신학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여기는 지인의 소개로 들어왔구요...
현재 교적은 대한성공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무슨 글을 올릴까하다가
제가 속한 학교 학회에서 새내기 과학도라면 많이 겪는
학부생들의 신앙-과학 간의 내적갈등에 관해 조언을 주는...
(지금 다시 읽어보니 일침을 놓는 글이 되고 말았군요^^;)
예전 글을 올려보았습니다.
좋은 가르침과 소통이 있길 바라면서.
2007.04.13 13:08:01
예, 제가 그 '님' 맞구요...이렇게 웹상에서나마 다시 뵙게 되어서 반갑네요. 형님...ㅋㅋㅋ
음...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제가 올린 글은 원래 의도가 학문적 세부영역에서 신앙과 과학사이에서 갈피를 잘못 잡고있는 후배들에게 쓰는 내용이었습니다. 뭐 엄밀한 논증이나 그런건 아니구요...그냥 권면의 글이라고나 할까...;; 그런 의미에서 '기계에 의한 영혼의 위대한 상승'의 표현은 그냥 말 그대로 레토릭이라고 보셔도 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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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사족을 달자면 노동사회학자들의 결론은 그게 그렇게 순진한 낙관이 아니라는 겁니다. 산업혁명 당시 증기관이 발명되고 많은 사회학자들은 노동의 종식으로 인한 대량의 실업사태를 예고했지만 인간은 결국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노동의 형태가 다른 것으로 변형되었을 뿐이죠. 물론 그것이 영혼의 상승이라는 표현에 합당한 변형태인가에 대해서는 문제의 소지가 있습니다만 그것은 문제의 핵심이 아니기에 이쯤에서 끝내고 다음 기회에 다뤄보면 좋을 듯 합니다. ^^
하나 더 재미로 말씀드리자면, 심리학의 공학적 응용 중에 하나가 바로 인공지능(이하 A.I)인데 -인공지능이야 말로 산업혁명 때 나온 기계개념에서 보았을 때 이상적인 기계이죠- KAIST에 현재 국가정책의 일환이 된 어떤 사업의 캐치 프레이즈가 바로 이겁니다.
"기계에게 지능을! 인간에게 자유를!"
뭐, 많은 존재-인식론적 사유가 필요한 방대한 주제이니만큼 다음에 얘기했으면 하구요...(아마 얘기할 때 환원이라는 단어에 대해 깊이 통찰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서울대학교 최재천 교수님 말대로, 우리나라에서는 환원이라는 단어가 너무 한 쪽 방향으로만 소개가 되는 것 같아서말이죠...)
인간 내면과 개별인간에만 시선이 묶인다는 말씀은 잘 모르겠습니다. 심리학이 그런 성향의 학문이라고 생각하신다면 그건 20세기 초반부터 유지되어온 사회학자들의 고정관념이구요. (주로 유럽의 대륙쪽 학파성향을 지니신 분들이 그렇게 생각하시는 듯) 현재 심리학은 개별인간이 아닌 사회집단을 다루고 있는 사회과학 중에 가장 견고한 학문이구요(경제학과 함께) 1950년대 이후로 더이상 심리학은 인간내면을 연구하진 않습니다. 50년대 이후 심리학은 행동과학으로 발전했죠. 이거 더이상 쓰면 심리학사가 될 것 같아서 그만 쓰겠습니다만, 여하튼 심리학이 미국과 영국에서는 굉장히 계량적이면서 자연과학화 된 (우리나라식으로 따지면 문이과 중에사 이과겠죠) 분야입니다. 저만해도 의과대학에서 신경과학을 하고 있으니까요. (기초의학에 속하는 신경생물학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절대 정신과니 상담이니 이런 분야가 아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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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보다 제가 예전에 쓴 글을 여기에 처음 등장하면서 올린 이유는 제목에서처럼 상담목회학이라는 분야가 과연 얼마나 우리나라 신학적 풍토에서 합목적적이며, 만약 충분히 합리적 성격을 띄고 있다하더라도 상담목회학 분야 자체에 학문적 탁월성이라던가, 엄밀성이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데에 의문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담심리학의 학문적 원리를 가지고 목회현장에서 신학적 적용을 시킨다는 것이 주 목적일텐데...
아무래도 목회학이나 신학에 일가견이 있으신 분들의 모임이니 만큼 많은 의견을 들었으면 해서 글을 올려보았습니다. 논의가 확장되면 이전에 나왔던 주제들에 관해서도 광범위하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겠죠...
여튼, 이곳이 지루한 군생활에 작은 즐거움이길 바랍니다. ^^
음...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제가 올린 글은 원래 의도가 학문적 세부영역에서 신앙과 과학사이에서 갈피를 잘못 잡고있는 후배들에게 쓰는 내용이었습니다. 뭐 엄밀한 논증이나 그런건 아니구요...그냥 권면의 글이라고나 할까...;; 그런 의미에서 '기계에 의한 영혼의 위대한 상승'의 표현은 그냥 말 그대로 레토릭이라고 보셔도 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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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사족을 달자면 노동사회학자들의 결론은 그게 그렇게 순진한 낙관이 아니라는 겁니다. 산업혁명 당시 증기관이 발명되고 많은 사회학자들은 노동의 종식으로 인한 대량의 실업사태를 예고했지만 인간은 결국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노동의 형태가 다른 것으로 변형되었을 뿐이죠. 물론 그것이 영혼의 상승이라는 표현에 합당한 변형태인가에 대해서는 문제의 소지가 있습니다만 그것은 문제의 핵심이 아니기에 이쯤에서 끝내고 다음 기회에 다뤄보면 좋을 듯 합니다. ^^
하나 더 재미로 말씀드리자면, 심리학의 공학적 응용 중에 하나가 바로 인공지능(이하 A.I)인데 -인공지능이야 말로 산업혁명 때 나온 기계개념에서 보았을 때 이상적인 기계이죠- KAIST에 현재 국가정책의 일환이 된 어떤 사업의 캐치 프레이즈가 바로 이겁니다.
"기계에게 지능을! 인간에게 자유를!"
뭐, 많은 존재-인식론적 사유가 필요한 방대한 주제이니만큼 다음에 얘기했으면 하구요...(아마 얘기할 때 환원이라는 단어에 대해 깊이 통찰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서울대학교 최재천 교수님 말대로, 우리나라에서는 환원이라는 단어가 너무 한 쪽 방향으로만 소개가 되는 것 같아서말이죠...)
인간 내면과 개별인간에만 시선이 묶인다는 말씀은 잘 모르겠습니다. 심리학이 그런 성향의 학문이라고 생각하신다면 그건 20세기 초반부터 유지되어온 사회학자들의 고정관념이구요. (주로 유럽의 대륙쪽 학파성향을 지니신 분들이 그렇게 생각하시는 듯) 현재 심리학은 개별인간이 아닌 사회집단을 다루고 있는 사회과학 중에 가장 견고한 학문이구요(경제학과 함께) 1950년대 이후로 더이상 심리학은 인간내면을 연구하진 않습니다. 50년대 이후 심리학은 행동과학으로 발전했죠. 이거 더이상 쓰면 심리학사가 될 것 같아서 그만 쓰겠습니다만, 여하튼 심리학이 미국과 영국에서는 굉장히 계량적이면서 자연과학화 된 (우리나라식으로 따지면 문이과 중에사 이과겠죠) 분야입니다. 저만해도 의과대학에서 신경과학을 하고 있으니까요. (기초의학에 속하는 신경생물학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절대 정신과니 상담이니 이런 분야가 아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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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보다 제가 예전에 쓴 글을 여기에 처음 등장하면서 올린 이유는 제목에서처럼 상담목회학이라는 분야가 과연 얼마나 우리나라 신학적 풍토에서 합목적적이며, 만약 충분히 합리적 성격을 띄고 있다하더라도 상담목회학 분야 자체에 학문적 탁월성이라던가, 엄밀성이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데에 의문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담심리학의 학문적 원리를 가지고 목회현장에서 신학적 적용을 시킨다는 것이 주 목적일텐데...
아무래도 목회학이나 신학에 일가견이 있으신 분들의 모임이니 만큼 많은 의견을 들었으면 해서 글을 올려보았습니다. 논의가 확장되면 이전에 나왔던 주제들에 관해서도 광범위하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겠죠...
여튼, 이곳이 지루한 군생활에 작은 즐거움이길 바랍니다. ^^
2007.04.14 04:35:12
여기서는 존대하는 것이 옳겠으므로, 형제님, 또는 볼테르님이라고 부르지요^^
예의 그 드라이한 기질은 여전하세요^^ 그래서 형제님을 더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앞으로도, 그리스도교 신학이 빠지기 쉬운 함정을 끈덕지게 물고 늘어져 주기를 바랍니다.
후배 새내기들을 위해 썼던 글인만치, 일부러 대립각을 세웠다고 이해하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형제님이 세운 대립각의 의도는 저도 동의합니다.
댓글로 제게 답변하신 바와 같이, 각론을 붙들고 따지고 들어갈 계제는 아닌 것 같고^^
비록 군생활 중이지만, 시간 날 때마다 자주 들어오세요.
이미 본 사이트의 됨됨이와 양상은 파악하셨을테고,,,
제가 주제넘게 이 형제님을 소개하자면, 대단히 멋진 청년입니다.
지성적으로 아주 명석하고, 대화하다 보면, 심하다 싶을 정도로
탈신앙적 자세를 견지하는 것 같아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결국은 저 또한, 그런 태도에 동감하게 되더군요.
많은 경우, 신앙을 짐짓 괄호 안에 묶어둘 필요가 있다고 저도 보거든요.
그렇지만, 군 입대 전까지, 대단히 바쁠텐데도,
교회(성공회 성당) 봉사에도 아주 헌신적이었던지라,
참 괴물같은 녀석이라고 신기한 생각도 들었지요^^
이 소개가 형제님께 누가 되었다면, 지울께요^^
비록 자주 들어오지는 못하시겠지만, 좋은 교류 기대합니다^^*
신앙으로도, 지성으로도, 서로 배우고 가르쳐 주는 나눔을 말이지요.
예의 그 드라이한 기질은 여전하세요^^ 그래서 형제님을 더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앞으로도, 그리스도교 신학이 빠지기 쉬운 함정을 끈덕지게 물고 늘어져 주기를 바랍니다.
후배 새내기들을 위해 썼던 글인만치, 일부러 대립각을 세웠다고 이해하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형제님이 세운 대립각의 의도는 저도 동의합니다.
댓글로 제게 답변하신 바와 같이, 각론을 붙들고 따지고 들어갈 계제는 아닌 것 같고^^
비록 군생활 중이지만, 시간 날 때마다 자주 들어오세요.
이미 본 사이트의 됨됨이와 양상은 파악하셨을테고,,,
제가 주제넘게 이 형제님을 소개하자면, 대단히 멋진 청년입니다.
지성적으로 아주 명석하고, 대화하다 보면, 심하다 싶을 정도로
탈신앙적 자세를 견지하는 것 같아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결국은 저 또한, 그런 태도에 동감하게 되더군요.
많은 경우, 신앙을 짐짓 괄호 안에 묶어둘 필요가 있다고 저도 보거든요.
그렇지만, 군 입대 전까지, 대단히 바쁠텐데도,
교회(성공회 성당) 봉사에도 아주 헌신적이었던지라,
참 괴물같은 녀석이라고 신기한 생각도 들었지요^^
이 소개가 형제님께 누가 되었다면, 지울께요^^
비록 자주 들어오지는 못하시겠지만, 좋은 교류 기대합니다^^*
신앙으로도, 지성으로도, 서로 배우고 가르쳐 주는 나눔을 말이지요.
많은 가르침 주셨으면 합니다.
본회퍼가 꼬집었던 '작업가설로서의 하느님' 개념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그 반대로서의, 과학환원주의도 피차 일반으로 경계해야 할 바이겠지요.
"기계에 의한 영혼의 위대한 상승"이라는 인용도 하셨습니다만,
그것이 철저히 순진한 낙관이었음은 명백히 드러나고 있구요.
심리학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래서, 선생님께 더욱 많이 배워야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내면과, 개별 인간에만 시선이 묶여,
예의 순진한 낙관에 빠져버리는 그런 위험은 없을런지요?
마침, 제 고향 성당의 직전 신부님이셨던 윤종모 주교님,
아실테지만, 사목상담학자시지요.
주교품에 오르신 이후에도, 신학 교육과, 강좌, 영성 모임 등,
바쁘게 활동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