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 <열린 토론실>입니다. 다비안들의 부담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채>와는 달리, 보다 진지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나 주제를 나누고 싶은 분들을 위한 게시판입니다. 가급적 예의를 갖추시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대화는 다비안을 비롯한 여러 네티즌들의 온라인 상에서의 자유로운 것이기에 그 방향과 정체성이 반드시 다비아와 일치하지는 않음을 밝혀둡니다.
글 수 253
피곤한 몸으로 들어와 TV를 켜니
E Land 비정규직 근로자들을 강압적으로 끌어내는 모습이
화면 가득히 가득이나 가난한 가슴팍으로 화락 들려듭니다.
E land .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친숙한 이름입니다.
조금 거리가 멀더라도 찾아가 구입하곤 했습니다.
E land = 기독교인이라는 등식이 있거든요.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E land 사태를 눈여겨 보게 되었습니다.
무엇인가 조금은 다르게 풀어나갈거란 기대를 가지고...
아무렴 기독교인들이 운영하는 기업체인데....
착찹합니다. 이런 기분은 다만 저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대기업들의 노사갈등을 푸는 방법처럼 당연한 일인데 말입니다.
모든 것은 가진 자의 것이다. 세상의 논리가 기독인이라고 예외이겠습니까.
http://www.eland.co.kr 처음으로 방문해 봤습니다.
소갯글과 경영이념을 봤습니다. 그리고 현사태를 봤습니다.
해외미션을 봤습니다. 울부짖는 근로자들을 봤습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이랜드가 도대체 무얼 뜻하는 것인가요?
죄 많은 놈 옆에 있다가 벼락 맞는다고 옆지기만 영문도 모르고 욕 먹었습니다.
E Land 비정규직 근로자들을 강압적으로 끌어내는 모습이
화면 가득히 가득이나 가난한 가슴팍으로 화락 들려듭니다.
E land .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친숙한 이름입니다.
조금 거리가 멀더라도 찾아가 구입하곤 했습니다.
E land = 기독교인이라는 등식이 있거든요.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E land 사태를 눈여겨 보게 되었습니다.
무엇인가 조금은 다르게 풀어나갈거란 기대를 가지고...
아무렴 기독교인들이 운영하는 기업체인데....
착찹합니다. 이런 기분은 다만 저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대기업들의 노사갈등을 푸는 방법처럼 당연한 일인데 말입니다.
모든 것은 가진 자의 것이다. 세상의 논리가 기독인이라고 예외이겠습니까.
http://www.eland.co.kr 처음으로 방문해 봤습니다.
소갯글과 경영이념을 봤습니다. 그리고 현사태를 봤습니다.
해외미션을 봤습니다. 울부짖는 근로자들을 봤습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이랜드가 도대체 무얼 뜻하는 것인가요?
죄 많은 놈 옆에 있다가 벼락 맞는다고 옆지기만 영문도 모르고 욕 먹었습니다.
2007.07.20 22:24:10
기업가 개인의 신앙을 모든 직원들에게 전도라는 명목으로 강요하는 것은 좋은 현상은 아니라고 봅니다.
예컨대, 아침 조회 때마다 예배. QT.휴가중 선교지 방문 등등...
그렇게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은폐된 모습으로
주님을 드러낼 수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경영자 입장에서의 애로사항이 있고,
노동자 입장에서 애로사항은 어디를 가든지 항상 발생하는 문제라고 봅니다.
끌어 안고, 양보하는 문제는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겠지요.
겉으로 드러난 현상이 전부가 아니고,
드러난 일부만을 가지고 바라보는 3자인 우리는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요?
경영진도 만족하고, 노동자도 만족하는 답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예컨대, 아침 조회 때마다 예배. QT.휴가중 선교지 방문 등등...
그렇게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은폐된 모습으로
주님을 드러낼 수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경영자 입장에서의 애로사항이 있고,
노동자 입장에서 애로사항은 어디를 가든지 항상 발생하는 문제라고 봅니다.
끌어 안고, 양보하는 문제는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겠지요.
겉으로 드러난 현상이 전부가 아니고,
드러난 일부만을 가지고 바라보는 3자인 우리는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요?
경영진도 만족하고, 노동자도 만족하는 답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2007.07.20 22:45:25
사실, 임영웅 목사님께서 지적하신 바대로,
제가 대학 시절 한 때 잠깐 공장에서 일하면서, 그런 일을 겪었답니다.
전자제품 조립 업체였는데, 사장님이 장로였지요.
직원들을 모아서 매주 월요일 아침을, 부흥강사님을 초청한 예배로 시작했는데,
제가 그 공장에 취직을 하니, 젊은 사무직 직원 몇 분들께서, 씁쓸한 표정을 지으시더군요.
혹시, 노조 만들려고 위장취업 한 거 아니냐,
일하면서도, 제가 속한 라인에서, 저를 감시하고 있더군요.
(나중에 알았습니다만)
애초에, 병역특례로 들어갔었는데, 워낙에 노동자들에 대한 열악한 처우와,
대우전자의 선풍기, 밥솥 등을 하청하면서, 대목에는, 닭장 같은 방에다 몰아서 잠깐 재우고,
그렇게 일을 시켰지요.
대구의 끝에서 끝까지 출퇴근하는 것도 고역이고 해서,
(새벽 다섯시 첫 차를 타고 출근하면, 여덟 시 출근 시간에 겨우 도달합니다)
그냥, 알바 했다 셈치고, 나와서, 현역으로 입대했었지요.
제 경험을 일반화시켜서는 안 되겠습니다만,
아직도 씁쓸한 게 사실입니다.
이랜드 사태는, 개정 비정규직법의 문제점을, 노동자 편에서도, 사용자 편에서도, 다 드러내고 만,
이미 예견된 표본입니다.
정치권은, 대선에만 정신이 팔릴 게 아니라,
이렇게 당장 시급한 현안에 대하여 노사 양 측에 모두 호소력이 있는, 개선책을 내놓아야 할 것입니다.
(이미 그런 대안을 제시하는 일부 정치인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언급했던, 홍준표 의원도, 일종의 인센티브 제도로 보완하는 방법을 내놓을 준비를 하고 있다네요)
제가 대학 시절 한 때 잠깐 공장에서 일하면서, 그런 일을 겪었답니다.
전자제품 조립 업체였는데, 사장님이 장로였지요.
직원들을 모아서 매주 월요일 아침을, 부흥강사님을 초청한 예배로 시작했는데,
제가 그 공장에 취직을 하니, 젊은 사무직 직원 몇 분들께서, 씁쓸한 표정을 지으시더군요.
혹시, 노조 만들려고 위장취업 한 거 아니냐,
일하면서도, 제가 속한 라인에서, 저를 감시하고 있더군요.
(나중에 알았습니다만)
애초에, 병역특례로 들어갔었는데, 워낙에 노동자들에 대한 열악한 처우와,
대우전자의 선풍기, 밥솥 등을 하청하면서, 대목에는, 닭장 같은 방에다 몰아서 잠깐 재우고,
그렇게 일을 시켰지요.
대구의 끝에서 끝까지 출퇴근하는 것도 고역이고 해서,
(새벽 다섯시 첫 차를 타고 출근하면, 여덟 시 출근 시간에 겨우 도달합니다)
그냥, 알바 했다 셈치고, 나와서, 현역으로 입대했었지요.
제 경험을 일반화시켜서는 안 되겠습니다만,
아직도 씁쓸한 게 사실입니다.
이랜드 사태는, 개정 비정규직법의 문제점을, 노동자 편에서도, 사용자 편에서도, 다 드러내고 만,
이미 예견된 표본입니다.
정치권은, 대선에만 정신이 팔릴 게 아니라,
이렇게 당장 시급한 현안에 대하여 노사 양 측에 모두 호소력이 있는, 개선책을 내놓아야 할 것입니다.
(이미 그런 대안을 제시하는 일부 정치인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언급했던, 홍준표 의원도, 일종의 인센티브 제도로 보완하는 방법을 내놓을 준비를 하고 있다네요)
2007.07.20 23:17:25
새벽을 깨우리로다를 보면 김진홍 목사가 철공소에 위장취업했을때 노동자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감정이 많았다지요. 예배에 나오라면서 30분이나 일찍 나오게 하면서 정작 월급을 깍아버리는 '장로'사장을 보면서 그분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얼마나 악감을 가지셨겠습니까? 비정규직 노동자 해고로 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협하고도 사탄의 유혹이라느니, 주는대로 받아먹으라느니, 성서에는 노조가 없다느니 하면서 떠벌리는 이랜드나 앞에서 말한 철공소나...다를게 뭘까요?물론 수명 2개월짜리 아르바이트 직원에게도 잘하는 진흥문화사나 창고노동자들을 위해서 샤워장을 만든 홍성사처럼 노동자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하는 기독교회사도 있지만,이랜드의 횡포를 보면 대다수는 아닌 모양입니다.
2007.07.21 03:46:45
주님 앞에 가서 빨래판위에 놓고 얻어 맞아야 알 겁니다.
먹거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지를 말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컷는 자들임을 절대로 모르는 횡포에 대한 대답을 주님앞에서...
경영을 다스림으로 생각하는 일반세상방식을 기독실업인들 역시 즐겨합니다.
자신들은 그들과 같은 노동을 하지 아니하면서 노동자들을 실제로는 저주하는 경영주들이지요.
회사의 주가나 올리면 되고 한해의 배당이나 잘 받으면 좋은 자들...
노동의 배당을 줄여서 자기들의 삶의 윤택함을 위해서 취하는 자들임을 세상은 다 알고 있겠지요.
그러기에 세상의 똑같은 방식의 저항을 받는 것이겠지요.
사람을 잘 경영하지 못하는 기업의 마직막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것...
나를 위해서 사랑하는 척 한것을...
빨리 회복되어서 저들도 편안한 가정으로 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갈등이 해소되어 열심히 일하며 삶의 내일을 바라보는 좋은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분노와 갈등을 바닦에 깔고서 그 위에서는 상암월트컵경기장에서는 잔치를...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을 멈추기를 바랍니다.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네요.
먹거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지를 말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컷는 자들임을 절대로 모르는 횡포에 대한 대답을 주님앞에서...
경영을 다스림으로 생각하는 일반세상방식을 기독실업인들 역시 즐겨합니다.
자신들은 그들과 같은 노동을 하지 아니하면서 노동자들을 실제로는 저주하는 경영주들이지요.
회사의 주가나 올리면 되고 한해의 배당이나 잘 받으면 좋은 자들...
노동의 배당을 줄여서 자기들의 삶의 윤택함을 위해서 취하는 자들임을 세상은 다 알고 있겠지요.
그러기에 세상의 똑같은 방식의 저항을 받는 것이겠지요.
사람을 잘 경영하지 못하는 기업의 마직막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것...
나를 위해서 사랑하는 척 한것을...
빨리 회복되어서 저들도 편안한 가정으로 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갈등이 해소되어 열심히 일하며 삶의 내일을 바라보는 좋은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분노와 갈등을 바닦에 깔고서 그 위에서는 상암월트컵경기장에서는 잔치를...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을 멈추기를 바랍니다.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네요.
2007.07.21 04:27:07
이런 사태를 볼 때마다 제일 속 상하는 이론이 있습니다.
그럴듯한 점잖은 이론. 그러나 아무 책임도 질 수 없는 이론.
양비론兩非論 ... 이쪽도 잘못이 있고 저쪽도 잘못이 있다?
양시론兩是論 ... 이쪽도 옳고 저쪽도 옳다?
그럴듯한 점잖은 이론. 그러나 아무 책임도 질 수 없는 이론.
양비론兩非論 ... 이쪽도 잘못이 있고 저쪽도 잘못이 있다?
양시론兩是論 ... 이쪽도 옳고 저쪽도 옳다?
2007.07.21 13:24:01
여기 글 올리는 분들이 참 젊잖구나 생각드는군요. 전, 그 사람 미쳤거나 사기꾼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계를 해결하기위한 경제활동을 제외하고 일체의 '돈을 번다' 하는 일들은 도대체가 기독교, 하나님, 예수의 사상과는 절대 손톱만큼도 교집합되는 부분이 없는 완전 딴나라 얘기입니다. 장사꾼(장사하는 일,또는 장사하는 분들을 폄하하는 것 절대 아닙니다.)의 논리를 예수의 이름으로 희석하는 더러운 수작입니다. 제대로 쓰기위해 번다는 것은 버는 과정의 부당함을 합리화하려는 비겁한 화장술입니다. 이기심과 욕망을 예수의 이름으로 덧칠하면 혹 세상이 달콤한 과실의 분배에 눈이 멀어 옳다 옳다 해 줄런지 모르지만 작은 자의 아픔에 고통하시는 하나님의 멱살을 쥐고 흔드는 바로 그 '참람', 하나님을 욕되게 능멸하는 ________ (최악의 단어를 찾고 있습니다.)입니다.
2007.07.21 17:17:08
미모미모님 말씀이 정말 가슴에 와닿습니다:
"생계를 해결하기위한 경제활동을 제외하고 일체의 '돈을 번다' 하는 일들은 도대체가 기독교, 하나님, 예수의 사상과는 절대 손톱만큼도 교집합되는 부분이 없는 완전 딴나라 얘기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라 기도하라 가르치셨지,
'먹고 남아 풍요를 누릴 재물을 주시고'라 기도할 것을 가르치시지는 않았거든요.
글쎄요.. 자본주의 체제에서, 현실성이 없는 소리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청부론'이란, 성서에 비추어 지지받을 수 없는 주장 같습니다.
열심히 일해 부요해지는 것이, 너를 향한 하느님의 구원의 예정의 증거라는,
모 종교개혁자의 논리도, 설득력이 없어 보이구요.
더욱이, 작금의 후기자본주의-허상을 창출하여 돈이 돈 버는- 시대상 가운데서는.
"생계를 해결하기위한 경제활동을 제외하고 일체의 '돈을 번다' 하는 일들은 도대체가 기독교, 하나님, 예수의 사상과는 절대 손톱만큼도 교집합되는 부분이 없는 완전 딴나라 얘기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라 기도하라 가르치셨지,
'먹고 남아 풍요를 누릴 재물을 주시고'라 기도할 것을 가르치시지는 않았거든요.
글쎄요.. 자본주의 체제에서, 현실성이 없는 소리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청부론'이란, 성서에 비추어 지지받을 수 없는 주장 같습니다.
열심히 일해 부요해지는 것이, 너를 향한 하느님의 구원의 예정의 증거라는,
모 종교개혁자의 논리도, 설득력이 없어 보이구요.
더욱이, 작금의 후기자본주의-허상을 창출하여 돈이 돈 버는- 시대상 가운데서는.
2007.07.21 18:33:48
"생계를 해결하기 위한 경제 활동" 운운에 대한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어느 정도가 생계형 경제활동인가요?
여기 어떤 사람이 작은 생선 가게를 열었다고 합시다.
노모도 있고,
장애 아이도 있고,
백수 동생도 있습니다.
그가 어느 정도 돈을 벌어야만 생계에 해당되고,
또는 어느 정도가 욕심일까요?
그 가족들이 먹고 나서 조금 남는 돈으로
저금, 주식, 부동산 구입한 것은 모두 잘못일까요?
이랜드 사태는 이것이 확대된 것뿐입니다.
박성수 사장 개인에 대해서 나는 아는 게 없어서 할말은 없습니다.
다만 그를 그렇게 매도만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에요.
이랜드를 통해서 박 사장이 개인적으로 돈을 많이 벌었겠지만
다른 사람들도 그 기업체를 통해서 먹고 살았지요.
대기업의 노조가 파업함으로써 하청업체에 속한 노동자들이 당하는 고통도 있지요.
자칭 진보라는 분들이 노무현을 무지하게 욕하더군요.
이라크 파병, 에프티에이, 비정규직법 등등을 거론하지요.
뭘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나는 종잡을 수가 없네요.
북핵 사태로 어려운 시기에 미국과 맞짱을 뜨자는 것인지,
중국과 일본이 미국과 에프티에이를 맺은 다음에 우리가 나서도 괜찮다는 말인지,
1998년 이후 기업 경쟁력 강화 차원의 구조조정을 통해서 대량으로 생산된 비정규직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자는 말인지
노무현 정부의 정책을 일일이 물고 늘어지는 좌파적 진보주의자들의 주장이
나에게는 현실로 다가오지 않네요.
그 중에서 가장 첨예한 문제가 에프티에이 같은데,
그걸 안 하고 버텨낼 자신이 있으면 해보라지요.
위에서 예로 든 생선가게 주인이
다른 가게에서 중국산 수입 생선을 파는 것을 알고도
자기만 고고하게 민족정신 운운하면서
그런 장사를 하지 않는다면
그게 무조건 옳은 걸까요?
노무현이 말했듯이 에프티에이는 '먹고 사는 문제'이지요.
말이 옆으로 나갔는데,
이랜드 문제도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랍니다.
박성수 사장의 부도덕성을 개탄할 자신이 나에게는 없습니다.
비정규직을 그가 끌어안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했다고 해서 그를 죽일놈 하는 건 좀 우습군요.
나는 자본주의를 반기독교적인 체제라고 말할 자신도 없습니다.
나는 지금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 이외에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나
향유하고 있는 게 너무 많군요.
비정규직에 해당되는 분들을 위해서
이 모든 걸 포기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으니
뭐라고 말할 게 있겠습니까?
지금 제가 비장하게 말하는 건 아니에요.
그냥 그렇다는 것이지요.
처음 던진 질문,
생계형 경제활동에 한정되어야 한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대답해주세요.
어느 정도가 생계형 경제활동인가요?
여기 어떤 사람이 작은 생선 가게를 열었다고 합시다.
노모도 있고,
장애 아이도 있고,
백수 동생도 있습니다.
그가 어느 정도 돈을 벌어야만 생계에 해당되고,
또는 어느 정도가 욕심일까요?
그 가족들이 먹고 나서 조금 남는 돈으로
저금, 주식, 부동산 구입한 것은 모두 잘못일까요?
이랜드 사태는 이것이 확대된 것뿐입니다.
박성수 사장 개인에 대해서 나는 아는 게 없어서 할말은 없습니다.
다만 그를 그렇게 매도만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에요.
이랜드를 통해서 박 사장이 개인적으로 돈을 많이 벌었겠지만
다른 사람들도 그 기업체를 통해서 먹고 살았지요.
대기업의 노조가 파업함으로써 하청업체에 속한 노동자들이 당하는 고통도 있지요.
자칭 진보라는 분들이 노무현을 무지하게 욕하더군요.
이라크 파병, 에프티에이, 비정규직법 등등을 거론하지요.
뭘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나는 종잡을 수가 없네요.
북핵 사태로 어려운 시기에 미국과 맞짱을 뜨자는 것인지,
중국과 일본이 미국과 에프티에이를 맺은 다음에 우리가 나서도 괜찮다는 말인지,
1998년 이후 기업 경쟁력 강화 차원의 구조조정을 통해서 대량으로 생산된 비정규직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자는 말인지
노무현 정부의 정책을 일일이 물고 늘어지는 좌파적 진보주의자들의 주장이
나에게는 현실로 다가오지 않네요.
그 중에서 가장 첨예한 문제가 에프티에이 같은데,
그걸 안 하고 버텨낼 자신이 있으면 해보라지요.
위에서 예로 든 생선가게 주인이
다른 가게에서 중국산 수입 생선을 파는 것을 알고도
자기만 고고하게 민족정신 운운하면서
그런 장사를 하지 않는다면
그게 무조건 옳은 걸까요?
노무현이 말했듯이 에프티에이는 '먹고 사는 문제'이지요.
말이 옆으로 나갔는데,
이랜드 문제도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랍니다.
박성수 사장의 부도덕성을 개탄할 자신이 나에게는 없습니다.
비정규직을 그가 끌어안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했다고 해서 그를 죽일놈 하는 건 좀 우습군요.
나는 자본주의를 반기독교적인 체제라고 말할 자신도 없습니다.
나는 지금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 이외에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나
향유하고 있는 게 너무 많군요.
비정규직에 해당되는 분들을 위해서
이 모든 걸 포기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으니
뭐라고 말할 게 있겠습니까?
지금 제가 비장하게 말하는 건 아니에요.
그냥 그렇다는 것이지요.
처음 던진 질문,
생계형 경제활동에 한정되어야 한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대답해주세요.
2007.07.21 20:21:32
자본주의의 현실상,
이윤(잉여 가치) 추구는 용인하고 받아들인다 치더라도,
적어도, "곡식을 밟으면서 타작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는) 마"
(신명 25,4)
ㄹ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윤(잉여 가치) 추구는 용인하고 받아들인다 치더라도,
적어도, "곡식을 밟으면서 타작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는) 마"
(신명 25,4)
ㄹ았으면 좋겠습니다.
2007.07.21 21:02:44
"'욕심 그릇 비우기"로 가정, 나라, 국제사회의 복잡하게 연결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몇몇 개인의 특출한 영성으로 욕심을 극복할 수 있겠지만
그게 현실적인 대안은 되지 못할 겁니다.
산업화 이후의 역사에서 그런 나라가 있으면 한번 알려주세요.
나는 아직 욕심 비운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더 근본적으로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게 좋다는 뜻이 아니라
그게 인간이라는 뜻이지요.
돈에 대한 욕심이 없으면 다른 것에 욕심이 있더군요.
자신이 깨끗하다는 사실에 안주하는 것도 역시 욕심이라면 욕심이지요.
이런 점에서 원죄라는 기독교의 인간론은 옳습니다.
죄의 경향성이 래디칼하고 보편적이라는 뜻입니다.
거기서 벗어나는 인간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지요.
나는 사람들을 그냥 좀 내버려두자는 생각입니다.
술마시는 사람은 마시게 두고,
세리는 세리로 그냥 내버려두자는 거지요.
꿈과 희망은 품어야지요.
새로운 인간적 세계를 향한 투쟁과 연대로 필요하지요.
그것이 또 한 계층을 향한 증오심으로 발전한다면
글쎄요,
그게 과연 기독교의 종말론적 희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몇몇 개인의 특출한 영성으로 욕심을 극복할 수 있겠지만
그게 현실적인 대안은 되지 못할 겁니다.
산업화 이후의 역사에서 그런 나라가 있으면 한번 알려주세요.
나는 아직 욕심 비운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더 근본적으로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게 좋다는 뜻이 아니라
그게 인간이라는 뜻이지요.
돈에 대한 욕심이 없으면 다른 것에 욕심이 있더군요.
자신이 깨끗하다는 사실에 안주하는 것도 역시 욕심이라면 욕심이지요.
이런 점에서 원죄라는 기독교의 인간론은 옳습니다.
죄의 경향성이 래디칼하고 보편적이라는 뜻입니다.
거기서 벗어나는 인간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지요.
나는 사람들을 그냥 좀 내버려두자는 생각입니다.
술마시는 사람은 마시게 두고,
세리는 세리로 그냥 내버려두자는 거지요.
꿈과 희망은 품어야지요.
새로운 인간적 세계를 향한 투쟁과 연대로 필요하지요.
그것이 또 한 계층을 향한 증오심으로 발전한다면
글쎄요,
그게 과연 기독교의 종말론적 희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2007.07.21 21:30:28
얼마전에 전북 부안에 핵폐기장 문제로 시끄러웠던 적이 있습니다.
군민들은 두 폐로 갈렸습니다.
발전을 위해 유치해야 한다.
발전보다 환경을 생각해 반대한다.
급기야 교회도 두 패로 갈렸습니다.
핵폐기장을 반대하는 교회와 찬성하는 교회.
두 진영은 밤마다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서로를 원수보는 듯 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편에 서야할까요?
교회는 예언자의 목소리를 내야하겠지만
어느 편에 일방적으로 치우쳐서 증오하고
투쟁하는 것은 좋은 현상은 아니라고 봅니다.
양쪽 모두가 보호받아야 할 존재들이 아닙니까?
군민들은 두 폐로 갈렸습니다.
발전을 위해 유치해야 한다.
발전보다 환경을 생각해 반대한다.
급기야 교회도 두 패로 갈렸습니다.
핵폐기장을 반대하는 교회와 찬성하는 교회.
두 진영은 밤마다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서로를 원수보는 듯 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편에 서야할까요?
교회는 예언자의 목소리를 내야하겠지만
어느 편에 일방적으로 치우쳐서 증오하고
투쟁하는 것은 좋은 현상은 아니라고 봅니다.
양쪽 모두가 보호받아야 할 존재들이 아닙니까?
2007.07.21 22:08:31
인간이 본질적으로 부패한 존재라는 것에서 출발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힘을 쓰고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경주입니다.
기독교 영성을 저더러 한 단어로 정의하라면 "가난해지기"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존재이든 소유이든...
그렇게 하지 못 하기에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렵지만 노력하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이다하고 포기하는 것(내버려 두다)은 취할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양시론. 양비론?
희면 흰 것이고 검으면 검은 것입니다. 얼음은 얼음이고 불은 불입니다.
잘못 생각인지 모르지만 중도는 기회주의에 다른 말이란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힘을 쓰고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경주입니다.
기독교 영성을 저더러 한 단어로 정의하라면 "가난해지기"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존재이든 소유이든...
그렇게 하지 못 하기에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렵지만 노력하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이다하고 포기하는 것(내버려 두다)은 취할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양시론. 양비론?
희면 흰 것이고 검으면 검은 것입니다. 얼음은 얼음이고 불은 불입니다.
잘못 생각인지 모르지만 중도는 기회주의에 다른 말이란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2007.07.21 22:14:14
세상은 흑백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칼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지개가 아름다운 것은 다양한 색이 모여 하나된 일치가 있어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요?
무지개가 아름다운 것은 다양한 색이 모여 하나된 일치가 있어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요?
2007.07.21 22:18:59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지 않느냐는 의견이 있어 저의 생각을 올립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자기의 소득을 조금만 줄이면 가능한 일입니다. 사업을 확장하는 것(규모의 경제. 소위 말하는 성장우선정책)을 분배를 우선으로 하는 것(복지우선정책)으로 발상의 전환을 하는 것입니다. 확장에 필요한 자본을 분배로 돌리면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입니다. 사주가 떠벌리며 기독교인이라고 말을 하지 않으면 그려러니하고 넘어갈 문제입니다. 이런 사태를 보면서 박성수를 미워할 자신이 없다는 말씀은 듣기에 힘이 듭니다. 꼭 "깨끗한 부자"를 읽은 때처럼. 비정규직 사태로 하청업체가 받는 고통을 얘기합니다. 대형기업이 하청업체들에게 무리하게 요구하는 가격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노동자의 힘이 생길 때 대기업에 대항할 수 있으며 정당한 가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결국 대기업의 횡포를 작은 개미군단이 모여 모여 대항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사는 삶을 포기하고 나의 소득이 높아짐만 생각함은 성숙한 사람이 생각할 자세가 아닙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한이 있더라도 나눔이 성장에 우선합니다.
이라크 파병. FTA, 비정규직법안등을 안 받아들이면 대책이 있느냐라고 말하면 할 말 많습니다. 파병 안하면 되고 조인하지않으면 되고 비정규직법안을 처리하지 않으면 됩니다. 어쩔 수 없는 국제환경이라는 숙명론에 빠지면 왜 희망을 얘기하고 소망을 노래하겠습니까? 아무리 현실이 그렇다손 치다라도 꿈은 그러면 안됩니다. 주권이 없는 속국처럼 질질 끌려다니는 모습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좌우파을 말씀 하시는 것 같은데 우리나라의 좌파들이 추구하는 것은 유럽의 우파보다 더 오른쪽입니다. 경제학적으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끝으로 가정이든 나라이든 국제적이든 최선의 선택은 "욕심그릇 비우기"입니다. 모든 사안의 근본은 만악의 근본인 돈(자본)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 가진 자가 크리스챤이고 크리스챤 국가(?)라면 낙타가 바늘귀를 향하는 무모한 짓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설사 그렇게 못할지라도 꿈은 그렇게 가져야 하고 실천하려고 노력은 해야 합니다. 생계에 필요한 자금? 욕심그릇의 크기 나름입니다. -- 비정규직을 그가 끌어안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했다고 해서 그를 죽일놈 하는 건 좀 우습군요.-- 우스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올려 우스운 꼴을 자청합니다.
이라크 파병. FTA, 비정규직법안등을 안 받아들이면 대책이 있느냐라고 말하면 할 말 많습니다. 파병 안하면 되고 조인하지않으면 되고 비정규직법안을 처리하지 않으면 됩니다. 어쩔 수 없는 국제환경이라는 숙명론에 빠지면 왜 희망을 얘기하고 소망을 노래하겠습니까? 아무리 현실이 그렇다손 치다라도 꿈은 그러면 안됩니다. 주권이 없는 속국처럼 질질 끌려다니는 모습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좌우파을 말씀 하시는 것 같은데 우리나라의 좌파들이 추구하는 것은 유럽의 우파보다 더 오른쪽입니다. 경제학적으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끝으로 가정이든 나라이든 국제적이든 최선의 선택은 "욕심그릇 비우기"입니다. 모든 사안의 근본은 만악의 근본인 돈(자본)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 가진 자가 크리스챤이고 크리스챤 국가(?)라면 낙타가 바늘귀를 향하는 무모한 짓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설사 그렇게 못할지라도 꿈은 그렇게 가져야 하고 실천하려고 노력은 해야 합니다. 생계에 필요한 자금? 욕심그릇의 크기 나름입니다. -- 비정규직을 그가 끌어안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했다고 해서 그를 죽일놈 하는 건 좀 우습군요.-- 우스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올려 우스운 꼴을 자청합니다.
2007.07.21 22:39:05
설마 정 목사님과 임 목사님께서,
모든 게 하느님의 뜻이니, 그냥 그대로 인정하고 포기하자는 뜻에서 말씀하셨겠습니까~
자기 비움을 지향하는 가난의 추구가 그리스도교 영성임은, 두 분 목사님을 비롯하여,
누구라도 긍정할 것입니다.
다만, 현실의 사회 체제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치에 터해, 그 체제를 거부하고, 가난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별도의 문제겠지요.
인간의 소유욕과, 자본주의의 속성을 긍정해야,
그 범위 안에서, 더 선한 쪽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현대의 저명한 윤리신학자 라인홀드 니버가, 유명한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당시 미국의 대선 후보 중, 골드워터는 보수라 싫고,
존슨은 속물이어서 싫다는 냉소주의가 팽배했는데,
그에 대하여, 니버는,
"상대적으로 존슨이 조금 덜 나쁘기 때문에, 존슨을 지지한다"
라 하지 않았던가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중에서 자본주의가 덜 나쁘다라는 뜻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한계 안에서, 차선, 차악을 택해 보자는 것입니다.
순선, 순악만 있는 게 아니라, 차선, 차악이라는, 현실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자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이기에,
회개하고, 좀 더 전향적으로 자신의 경제 활동을 개선해 나가야 할 것이고,
부자 아닌 사람들 역시, 노동의 정당한 댓가를 받고,
시민의 일원으로서, 사회 체제 안에서, 보호받아야 할 것입니다.
작금에 FTA로 본격화될, 세계화,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를,
세계적인 전망에서도, 우리 한국 경제의 현재 도상에서도, 거부할 수도, 거부하지 않을 수도 없는데,
차선 내지 차악을 택한 것이 참여정부의 정책이라 생각되구요,
그 차선 내지 차악마저, 너무나 위험과 손해가 크기에,
다들 반대하는 줄로 압니다.
뭐.. 또 이렇게 주절주절거려 봤습니다만,
역시 결론은 안 나고, 새삼 답답하군요.
모든 게 하느님의 뜻이니, 그냥 그대로 인정하고 포기하자는 뜻에서 말씀하셨겠습니까~
자기 비움을 지향하는 가난의 추구가 그리스도교 영성임은, 두 분 목사님을 비롯하여,
누구라도 긍정할 것입니다.
다만, 현실의 사회 체제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치에 터해, 그 체제를 거부하고, 가난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별도의 문제겠지요.
인간의 소유욕과, 자본주의의 속성을 긍정해야,
그 범위 안에서, 더 선한 쪽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현대의 저명한 윤리신학자 라인홀드 니버가, 유명한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당시 미국의 대선 후보 중, 골드워터는 보수라 싫고,
존슨은 속물이어서 싫다는 냉소주의가 팽배했는데,
그에 대하여, 니버는,
"상대적으로 존슨이 조금 덜 나쁘기 때문에, 존슨을 지지한다"
라 하지 않았던가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중에서 자본주의가 덜 나쁘다라는 뜻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한계 안에서, 차선, 차악을 택해 보자는 것입니다.
순선, 순악만 있는 게 아니라, 차선, 차악이라는, 현실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자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이기에,
회개하고, 좀 더 전향적으로 자신의 경제 활동을 개선해 나가야 할 것이고,
부자 아닌 사람들 역시, 노동의 정당한 댓가를 받고,
시민의 일원으로서, 사회 체제 안에서, 보호받아야 할 것입니다.
작금에 FTA로 본격화될, 세계화,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를,
세계적인 전망에서도, 우리 한국 경제의 현재 도상에서도, 거부할 수도, 거부하지 않을 수도 없는데,
차선 내지 차악을 택한 것이 참여정부의 정책이라 생각되구요,
그 차선 내지 차악마저, 너무나 위험과 손해가 크기에,
다들 반대하는 줄로 압니다.
뭐.. 또 이렇게 주절주절거려 봤습니다만,
역시 결론은 안 나고, 새삼 답답하군요.
2007.07.21 22:43:10
꼭 같은 논리가 성립합니다.
뻘간 것은 빨간 것이지 분홍이 아닙니다.
분홍은 애초부터 분홍입니다.
노랑은 노란 것이지 누런 것이 아닙니다.
누런 것은 애초부터 누런 것입니다.
파랑은 파란색이지 녹색이 아닙니다.
녹색은 애초부터 녹색입니다.
(무엇과 무엇을 섞으면 이것이다라는 것은 과학일 뿐이다.)
제각각 제 색갈을 내기에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제 색갈을 낼 뿐이지 이것 저것 섞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뻘간 것은 빨간 것이지 분홍이 아닙니다.
분홍은 애초부터 분홍입니다.
노랑은 노란 것이지 누런 것이 아닙니다.
누런 것은 애초부터 누런 것입니다.
파랑은 파란색이지 녹색이 아닙니다.
녹색은 애초부터 녹색입니다.
(무엇과 무엇을 섞으면 이것이다라는 것은 과학일 뿐이다.)
제각각 제 색갈을 내기에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제 색갈을 낼 뿐이지 이것 저것 섞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2007.07.21 23:08:55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살자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무명재님은 알고 계신것 같습니다.
무명재님 말씀대로 답은 없습니다.
'긴장하며 살자'는 말인데, 우물가님이 색깔을 말씀하시기에
칼라 이야기를 해본 것입니다.
모두 옳습니다.
'깨어 있으라'는 것은 이런 '의식'을 두고 말하는 것일까요?
일찍 잡니다.
평화(이랜드, 피랍된 형제들이 들으면 욕하겠지만)
무명재님은 알고 계신것 같습니다.
무명재님 말씀대로 답은 없습니다.
'긴장하며 살자'는 말인데, 우물가님이 색깔을 말씀하시기에
칼라 이야기를 해본 것입니다.
모두 옳습니다.
'깨어 있으라'는 것은 이런 '의식'을 두고 말하는 것일까요?
일찍 잡니다.
평화(이랜드, 피랍된 형제들이 들으면 욕하겠지만)
2007.07.22 09:41:01
생계형 경제활동의 범위에 대한 규정은 공동체의 살림에 있습니다. 정목사님께서 예를 드신 생선가게 주인아저씨의 경우에도 그의 일체의 경제활동이 그가 속한 공동체의 살림을 살리는 행위라면 존중받을 수 있습니다. 중국산 생선과 나아가 FTA에 대한 입장과 견해 역시 공동체를 살리는 목적에 부합된다면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제가 말씀드리는 공동체가 민족주의를 지향한다거나 반자본주의를 전제로 하지는 않습니다. 부언하자면 저는 일체의 '주의'를 폐기해야한다는 믿음을 갖고있습니다. 민족이든 자본이든 본래의 개념을 담보하는 정신만이 살아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범위에 대해서 역시 질문하실 것입니다. 그 범위는 각자가 정할 일입니다. 스스로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갈 의미와 연대의 확신을 갖고 살림살이에 기여하기를 기뻐하는 한계가 자연스레 정해지면 그것이 그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에게는 가족이 공동체의 한계가 될 수 있고 또 다른 이는 전인류를 공동체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이랜드의 경우에 있어서 그가 기독교 정신으로 기업을 운영한다는 주장을 대내외적으로 표방하고 있기때문에 기독인 즉, 예수를 믿고 그 정신을 따르자하는 입장에서 그를 도적놈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생선가게 주인아저씨의 경우와는 절대 비교할 수 없는 것이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살림을 살리는 행위로서의 경제활동과 기독교정신을 표방하여 기업활동을 하면서 연약한 구성원들의 생계를 여탈하는 행위를 어찌 대비할 수 있겠습니까?
술마시는 자 술 마시게, 늑탈하는 자 늑탈하게 그냥 내버려 두자 하시면 스스로 죽어가는 자, 남을 죽음으로 몰아 넣는 자, 그러면서 또 너나 없이 죽어가는 현실을 자본주의의 우월적인 지배현상을 용인할 수 밖에 없지않냐는 이유로 정당한 의무마저 회피하자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알래스카의 원주민이 유전개발의 보상으로 대박을 맞아 돈 쓸 곳이 없어 술과 마약으로 파멸하는 일을 쫓아가서 말릴 수 없을 땐 기도해야 겠지요. 아프리카의 독재자가 주민을 억압하고 부당하게 죽음을 강요하는 일을 말릴 수 없을 때도 기도해야겠지요. 그러나 내 옆자리의 누군가가 죽음을 향해 치닫는 현실마저 하나님의 섭리를 대망하며 종말론적 희망에 맡겨둘 수 있습니까?
기독교의 인간론이 인간의 죄성을 설명하고 있고 모든 인간에게 욕심이 실재하므로 욕심을 비우는 일만으로는 인간의 욕망이 초래한 얼키고 설킨 문제들을 해결할 수도 없고, 또한 산업화 이후 이상적인 모델로 내세울 수 있는 국가도 없지 않냐고 물으신다면 기독교 신앙이란 결국 '꿈과 희망'을 말하는 책상공론이란 말씀입니까?
믿음은 비젼입니다. 2007년 7월 15일자 '민중과 예수'편에서 말씀하신 'Here and Now'의 '임박했다'는 의미는 한편 Already but Not Yet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음을 알고 믿고 있기때문에 현실의 부당함을 초월할 수 있는 '실상으로써, 증거로써' 그 안에서 살아가는 실존의 당위인 것입니다.
생계형 경제활동의 연장 내지 확대과정에서 이랜드 사태가 발생했다는 견해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제 밥그릇을 좀 더 채우고자하는 기본적인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와 같은 욕망마저 비우기를 직접 가르치신 기도에서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내게 주어지는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고 감사할 수 없는 자에게는 용서에 대한 청원도 가당치 않습니다. 내 밥그릇에 담긴 내용물에 관심하는 자가 남을 먼저 용서하고 용인할 때에야 가능한 하나님의 용서를 요청할 수 있겠습니까? 이기적인 욕심을 입밖으로 내뱉는다 한들 응답이 있겠습니까?
물론 이랜드 사태는 우리 모두에게 자본주의의 세상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종말론적 희망'을 바라보기 때문에 인간의 죄성을 부정할 수 없으므로 스스로 죄인된 존재임을 각성하고 하나님 나라의 일원으로 살아갈 마땅한 자격을 갖추기 위해 날마다 자기부정, '자기죽이기'를 행하는 것 아닙니까?
목사님께서도 소유와 생활방식에 대한 회의와 자성을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다 벗어 던지고 면벽하는 수도승이라 한들 우리를 옥죄는 현실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요. 처음에 제기하신 '생계형 경제활동'에 대한 질문은 공동체와 하나님의 통치, 그 나라를 소망하는 신앙의 동지들을 향한 연대감, 자기부정을 통한 진실된 '예수드러내기'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랜드의 경우에 있어서 그가 기독교 정신으로 기업을 운영한다는 주장을 대내외적으로 표방하고 있기때문에 기독인 즉, 예수를 믿고 그 정신을 따르자하는 입장에서 그를 도적놈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생선가게 주인아저씨의 경우와는 절대 비교할 수 없는 것이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살림을 살리는 행위로서의 경제활동과 기독교정신을 표방하여 기업활동을 하면서 연약한 구성원들의 생계를 여탈하는 행위를 어찌 대비할 수 있겠습니까?
술마시는 자 술 마시게, 늑탈하는 자 늑탈하게 그냥 내버려 두자 하시면 스스로 죽어가는 자, 남을 죽음으로 몰아 넣는 자, 그러면서 또 너나 없이 죽어가는 현실을 자본주의의 우월적인 지배현상을 용인할 수 밖에 없지않냐는 이유로 정당한 의무마저 회피하자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알래스카의 원주민이 유전개발의 보상으로 대박을 맞아 돈 쓸 곳이 없어 술과 마약으로 파멸하는 일을 쫓아가서 말릴 수 없을 땐 기도해야 겠지요. 아프리카의 독재자가 주민을 억압하고 부당하게 죽음을 강요하는 일을 말릴 수 없을 때도 기도해야겠지요. 그러나 내 옆자리의 누군가가 죽음을 향해 치닫는 현실마저 하나님의 섭리를 대망하며 종말론적 희망에 맡겨둘 수 있습니까?
기독교의 인간론이 인간의 죄성을 설명하고 있고 모든 인간에게 욕심이 실재하므로 욕심을 비우는 일만으로는 인간의 욕망이 초래한 얼키고 설킨 문제들을 해결할 수도 없고, 또한 산업화 이후 이상적인 모델로 내세울 수 있는 국가도 없지 않냐고 물으신다면 기독교 신앙이란 결국 '꿈과 희망'을 말하는 책상공론이란 말씀입니까?
믿음은 비젼입니다. 2007년 7월 15일자 '민중과 예수'편에서 말씀하신 'Here and Now'의 '임박했다'는 의미는 한편 Already but Not Yet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음을 알고 믿고 있기때문에 현실의 부당함을 초월할 수 있는 '실상으로써, 증거로써' 그 안에서 살아가는 실존의 당위인 것입니다.
생계형 경제활동의 연장 내지 확대과정에서 이랜드 사태가 발생했다는 견해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제 밥그릇을 좀 더 채우고자하는 기본적인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와 같은 욕망마저 비우기를 직접 가르치신 기도에서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내게 주어지는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고 감사할 수 없는 자에게는 용서에 대한 청원도 가당치 않습니다. 내 밥그릇에 담긴 내용물에 관심하는 자가 남을 먼저 용서하고 용인할 때에야 가능한 하나님의 용서를 요청할 수 있겠습니까? 이기적인 욕심을 입밖으로 내뱉는다 한들 응답이 있겠습니까?
물론 이랜드 사태는 우리 모두에게 자본주의의 세상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종말론적 희망'을 바라보기 때문에 인간의 죄성을 부정할 수 없으므로 스스로 죄인된 존재임을 각성하고 하나님 나라의 일원으로 살아갈 마땅한 자격을 갖추기 위해 날마다 자기부정, '자기죽이기'를 행하는 것 아닙니까?
목사님께서도 소유와 생활방식에 대한 회의와 자성을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다 벗어 던지고 면벽하는 수도승이라 한들 우리를 옥죄는 현실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요. 처음에 제기하신 '생계형 경제활동'에 대한 질문은 공동체와 하나님의 통치, 그 나라를 소망하는 신앙의 동지들을 향한 연대감, 자기부정을 통한 진실된 '예수드러내기'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07.07.22 14:55:45
.... ... ....
이랜드 사태는 이것이 확대된 것 뿐입니다.
이 적절치 않는 예例들기와 전개되는 본문에 당황하면서도 몇번이나 읽었습니다.
물질관을 보면 그 분의 삶의 지향점을 알 수 있다고 합디다.
인간은 본래 그려러니 생각을 하려고 했지만 실망감을 감출 수 없습니다.
혈연적 관계를 넘어 맺는 공동체적 관계를 이야기하는 복음서의 가족관은 없었습니다.
예수의 삶을 지향한다고 자부하는 삶이 복음서에 나타난 제자도라는 전제를 하면 말입니다.
그러나 내내 기대를 가지고 본문을 살폈습니다.
속 마음은 그럴지라도 말만은 그렇게 말하지 않을 줄로 알았습니다. 다소 위선적이라할지라도....
도둑을 업(?)으로 하는 아비가 있다 합시다.
매일 남의 집 담을 넘는게 직업(?)인 도둑 말입니다.
그 도둑이 제 아이들에게 가르칠 때 도둑이 되라고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너희들은 장래에 판사가 되고 검사가 되라.
도둑을 잡는 경찰이 되고, 도둑질을 다시는 못하게 판단하는 판,검사가 되어라."
그렇게라도 해야 최소한 아비입니다.
필을 놓기는 하는데 기분이 여~ㅇ 꽝입니다.
이랜드 사태는 이것이 확대된 것 뿐입니다.
이 적절치 않는 예例들기와 전개되는 본문에 당황하면서도 몇번이나 읽었습니다.
물질관을 보면 그 분의 삶의 지향점을 알 수 있다고 합디다.
인간은 본래 그려러니 생각을 하려고 했지만 실망감을 감출 수 없습니다.
혈연적 관계를 넘어 맺는 공동체적 관계를 이야기하는 복음서의 가족관은 없었습니다.
예수의 삶을 지향한다고 자부하는 삶이 복음서에 나타난 제자도라는 전제를 하면 말입니다.
그러나 내내 기대를 가지고 본문을 살폈습니다.
속 마음은 그럴지라도 말만은 그렇게 말하지 않을 줄로 알았습니다. 다소 위선적이라할지라도....
도둑을 업(?)으로 하는 아비가 있다 합시다.
매일 남의 집 담을 넘는게 직업(?)인 도둑 말입니다.
그 도둑이 제 아이들에게 가르칠 때 도둑이 되라고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너희들은 장래에 판사가 되고 검사가 되라.
도둑을 잡는 경찰이 되고, 도둑질을 다시는 못하게 판단하는 판,검사가 되어라."
그렇게라도 해야 최소한 아비입니다.
필을 놓기는 하는데 기분이 여~ㅇ 꽝입니다.
2007.07.22 16:54:44
미모미모 님의 글이 아주 좋군요.
진정성이 확실하게 엿보이고
설득력도 있어서
편안하게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저의 다른 글을 혹시 읽으셨는지 모르겠지만
미모 님의 생각은 저와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추구하는 방향도 거의 비슷하구요.
앞으로 좋은 글을 자주 올려주세요.
대화가 쉽지 않지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면 말에 오해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위에 쓴 저의 짧은 글로 어떻게 제 생각을 다 담을 수 있겠어요.
그냥 이 꼭지 글이 담고 있는 그 내용만 스치듯이 말한 것 뿐이지요.
미모 님의 글에서 엿볼 수 있는 그런 영성을
제가 바탕에 놓고 글을 쓴 겁니다.
그래서 알아들을 사람은 대개 알아들은 것 같은데,
그렇지 못한 분들도 있네요.
제가 지금 에큐메니칼하게 참여하고 있는 쪽은
거의 한결같이 민중, 해방, 노동, 생태 등등의 문제를
실제로 붙들고 씨름하는 단체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훨씬 더 상위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민중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려면 길겠지요.
저도 웬만한 해방신학 책을 섭렵했구요,
몰트만의 정치신학을 나름으로 충분히 공부했습니다.
여성신학자 도로테 죌레의 책을 번역하기도 했구요.
지금 나를 변증하려는 게 아닙니다.
미모 님의 글을 읽고 대화가 가능하리라는 걸 느껴서 이렇게 씁니다.
가난과 비움의 영성에 관한 책도 볼만큼은 보았지요.
문제는 그것으로 이 세상의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 세상은 훨씬 심층적이고 중층적으로 연결되어 있더군요.
한쪽 문제를 해결하면 다른 쪽이 엉켜버리더군요.
결국 구원은 하나님에게서만 나올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생각이 아니라 이미 성서기자들의 관점이지요.
일종의 기다림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모 님이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에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공동체와 하나님의 통치, 그 나라를 소망하는 신앙의 동지들을 향한 연대감,
자기부정을 통한 진실된 '예수드러내기'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내가 쓴 글처럼 보이네요.
혹시 내 글을 표절한 거 아닌가요? ㅎㅎㅎ
다만 저는 하나님의 통치를 단정하지 말자는 거지요.
그것은 곧 하나님은 누구냐와 같은 질문에 속합니다.
아직 하나님을 모르지요?
그렇다면 그의 통치도 모르는 겁니다.
다만 우리는 부분적으로 그것에 참여해서 살아갈 뿐이지요.
감사.
진정성이 확실하게 엿보이고
설득력도 있어서
편안하게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저의 다른 글을 혹시 읽으셨는지 모르겠지만
미모 님의 생각은 저와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추구하는 방향도 거의 비슷하구요.
앞으로 좋은 글을 자주 올려주세요.
대화가 쉽지 않지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면 말에 오해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위에 쓴 저의 짧은 글로 어떻게 제 생각을 다 담을 수 있겠어요.
그냥 이 꼭지 글이 담고 있는 그 내용만 스치듯이 말한 것 뿐이지요.
미모 님의 글에서 엿볼 수 있는 그런 영성을
제가 바탕에 놓고 글을 쓴 겁니다.
그래서 알아들을 사람은 대개 알아들은 것 같은데,
그렇지 못한 분들도 있네요.
제가 지금 에큐메니칼하게 참여하고 있는 쪽은
거의 한결같이 민중, 해방, 노동, 생태 등등의 문제를
실제로 붙들고 씨름하는 단체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훨씬 더 상위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민중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려면 길겠지요.
저도 웬만한 해방신학 책을 섭렵했구요,
몰트만의 정치신학을 나름으로 충분히 공부했습니다.
여성신학자 도로테 죌레의 책을 번역하기도 했구요.
지금 나를 변증하려는 게 아닙니다.
미모 님의 글을 읽고 대화가 가능하리라는 걸 느껴서 이렇게 씁니다.
가난과 비움의 영성에 관한 책도 볼만큼은 보았지요.
문제는 그것으로 이 세상의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 세상은 훨씬 심층적이고 중층적으로 연결되어 있더군요.
한쪽 문제를 해결하면 다른 쪽이 엉켜버리더군요.
결국 구원은 하나님에게서만 나올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생각이 아니라 이미 성서기자들의 관점이지요.
일종의 기다림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모 님이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에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공동체와 하나님의 통치, 그 나라를 소망하는 신앙의 동지들을 향한 연대감,
자기부정을 통한 진실된 '예수드러내기'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내가 쓴 글처럼 보이네요.
혹시 내 글을 표절한 거 아닌가요? ㅎㅎㅎ
다만 저는 하나님의 통치를 단정하지 말자는 거지요.
그것은 곧 하나님은 누구냐와 같은 질문에 속합니다.
아직 하나님을 모르지요?
그렇다면 그의 통치도 모르는 겁니다.
다만 우리는 부분적으로 그것에 참여해서 살아갈 뿐이지요.
감사.
사회적 차원에서 기업이란 개인의 것이 아니며,
개인의 재산이라 생각한다 쳐도, 수요-공급의 원리가 지배하는 시장에서,
특정 종교로 윤색하여 시장에서 호소력을 담지하려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다지 정정당당하지 않은 모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랜드는 80년대 말에 창업한 걸로 아는데,
그 당시부터, 노동자 탄압과, 상식 이하의 열악한 근로 조건 등으로 평판(!)이 자자했습니다.
(89년, 90년 쯤의 [말] 지 등을 보십시오. 종업원 통근버스조차 갖추기를 거부했댑니다)
박 사장은, 신실한 개신교인인양 선한 이미지를 심기에 바빴구요.
그렇기에, 터질 만한 곳에서 터졌다는 냉소적인 생각 밖에 안 들더군요.
소유주가, 자신의 기업을 자기 종교로 윤색하여,
종업원들의 종교와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과연 그리스도교 정신에 맞갖은 것인가,
그렇게 하는 게 복음화고 선교라고 생각한다면, 그러한 의식은 결코 수준 높은 것도 못 되고,
기왕에 종교적 기업인양 처세하려면, 윤리 의식과, 약자(노동자)에 대한 정당한 대우와 권리 보장은 기본일텐데,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이 그러더군요. 월급 120만원짜리 노동자들의 피맺힌 함성이라구요.
저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 개탄하더라구요)
하느님의 이름을 모욕스럽게 먹칠하는 짓이 아니냐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