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 <열린 토론실>입니다. 다비안들의 부담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채>와는 달리, 보다 진지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나 주제를 나누고 싶은 분들을 위한 게시판입니다. 가급적 예의를 갖추시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대화는 다비안을 비롯한 여러 네티즌들의 온라인 상에서의 자유로운 것이기에 그 방향과 정체성이 반드시 다비아와 일치하지는 않음을 밝혀둡니다.
글 수 253
우리의 지식은 항상 전형화(典型化)의 오류를 범하기 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리새인" 이라고 하면 그렇게 단순하게 규정할 수 없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냥 "위선자, 율법주의자" 라는 정답이 나오는 것처럼... 저는 칼빈을 신학적으로는 “법리적 원리주의자”, 정치적으로는 “신정정치주의자”로만 보아왔죠...
칼빈의 경우에도 그냥 단선적으로 이야기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칼빈의 말" 도 어떤 한 사람이 처한 각기 다른 상황, 다른 사고체계 속에서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칼빈이 의도한 원뜻은 아무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단지 해석할 수 있을 뿐...
그런 의미에서 칼빈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생겨났습니다.
1.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누미노제” 로서보다는 “징벌적 공포의 측면”으로 많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볼때 칼빈에게는 두 가지 다 보이지만. 후자에 더 무게가 실리는 느낌이다. 누미노제는 시적 감성적 감정이라면, 징벌적 공포는 법리적 감정이다.)
2. 칼빈은 하나님을 창조주와 구속주로서 확연히 나누는데, 그게 온당한 것일까? (내가 볼 때엔 창조와 구속은 동전의 양면일 뿐인 것 같은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시간성을 초월해 계시기 때문에, 창세기의 창조는 먼 옛날의 일회적인 사건이라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인간의 부패와 타락을 전적 타락이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그 것은 인간의 리얼리티에 대한 전형화한 과장이 아닌가? (로마서에 나오는 바울의 이야기는 마치 우리가 국회의원들을 향해서 “다 도둑놈 같은 놈들, 다 썩었어” 라고 이야기하는 그런 맥락으로 보이는데...)
4. 하나님은 심판하시고 벌하시는 분이신가? 윗 글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한 따뜻함을 느끼기가 힘들다
5. 윗 글에서 칼빈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간 본유적인(innate) 것이라고 했는데, 이 것은 일반계시에 대해 적극적으로 말해야 하는 근거가 되는 것 아닐까? 다시 말하면, 칼빈은 일반계시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는가? 윗 글에서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데... 칼빈이 자연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이 드러나 있어서 핑계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또한 자연계시는 불완전하여 그 것을 통하여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모순 아닌가?
6. 칼빈은 “신앙적 관념의 지적인 수용”과 “참된 믿음”을 같은 것으로 보지는 않았는가?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는 심증은 글을 통해서 알 수가 있었지만...
7. 칼빈은 위에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적 방임” - 하나님을 모르고 스스로 육욕에 빠져서 짐승생활을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형벌이라는 견해 -을 이야기 하는데,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을 이야기하는 것과는 배치되지 않는가?
8. 위의 글에 따르면 칼빈은 권선징악적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한 신관이 바른 신관일까?
9. 칼빈이 말하는 미신, 자신의 욕망을 투영한 우상적 종교는 동양의 고등종교, 이를테면 불교나 도교같은 경우에도 해당되는 말일 수 있는가? 또한 칼빈은 이런 종교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게 된다면 어떤 이야기를 할까?
10. 칼빈의 견해는 과연 현실에 만연한 “기독교배타주의”를 지지할 수 있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칼빈의 경우에도 그냥 단선적으로 이야기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칼빈의 말" 도 어떤 한 사람이 처한 각기 다른 상황, 다른 사고체계 속에서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칼빈이 의도한 원뜻은 아무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단지 해석할 수 있을 뿐...
그런 의미에서 칼빈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생겨났습니다.
1.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누미노제” 로서보다는 “징벌적 공포의 측면”으로 많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볼때 칼빈에게는 두 가지 다 보이지만. 후자에 더 무게가 실리는 느낌이다. 누미노제는 시적 감성적 감정이라면, 징벌적 공포는 법리적 감정이다.)
2. 칼빈은 하나님을 창조주와 구속주로서 확연히 나누는데, 그게 온당한 것일까? (내가 볼 때엔 창조와 구속은 동전의 양면일 뿐인 것 같은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시간성을 초월해 계시기 때문에, 창세기의 창조는 먼 옛날의 일회적인 사건이라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인간의 부패와 타락을 전적 타락이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그 것은 인간의 리얼리티에 대한 전형화한 과장이 아닌가? (로마서에 나오는 바울의 이야기는 마치 우리가 국회의원들을 향해서 “다 도둑놈 같은 놈들, 다 썩었어” 라고 이야기하는 그런 맥락으로 보이는데...)
4. 하나님은 심판하시고 벌하시는 분이신가? 윗 글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한 따뜻함을 느끼기가 힘들다
5. 윗 글에서 칼빈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간 본유적인(innate) 것이라고 했는데, 이 것은 일반계시에 대해 적극적으로 말해야 하는 근거가 되는 것 아닐까? 다시 말하면, 칼빈은 일반계시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는가? 윗 글에서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데... 칼빈이 자연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이 드러나 있어서 핑계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또한 자연계시는 불완전하여 그 것을 통하여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모순 아닌가?
6. 칼빈은 “신앙적 관념의 지적인 수용”과 “참된 믿음”을 같은 것으로 보지는 않았는가?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는 심증은 글을 통해서 알 수가 있었지만...
7. 칼빈은 위에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적 방임” - 하나님을 모르고 스스로 육욕에 빠져서 짐승생활을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형벌이라는 견해 -을 이야기 하는데,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을 이야기하는 것과는 배치되지 않는가?
8. 위의 글에 따르면 칼빈은 권선징악적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한 신관이 바른 신관일까?
9. 칼빈이 말하는 미신, 자신의 욕망을 투영한 우상적 종교는 동양의 고등종교, 이를테면 불교나 도교같은 경우에도 해당되는 말일 수 있는가? 또한 칼빈은 이런 종교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게 된다면 어떤 이야기를 할까?
10. 칼빈의 견해는 과연 현실에 만연한 “기독교배타주의”를 지지할 수 있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2008.10.02 10:53:39
칼빈의 기독교 강요 초록을 읽으면서 저는 칼빈이 외형적, 표면적 크리스찬보다는 내면적, 내용적 크리스찬에 더 집중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갑자기 뜬금없이 이런 생각이 드는군요... 칼빈이 이명박 대통령을 보면 뭐라할까? 김홍도 목사를 보면 뭐라할까? 법정스님을 보면 뭐라할까? 수경스님을 보면 뭐라할까?
2008.10.02 15:21:51
유니스 님,
퀴의 그 문제작품을 읽기로 작정했군요.
만약 다비아를 통해서 그런 충동을 받았다면
다비아가 나름으로 한국교회를 위해서 공헌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겠군요.
그런데 소화불량에 걸리지나 않을는지.
약사이시니 설사를 만났을 때 어떤 처방을 해야 하는지는
잘 알겠지요?
아자.
퀴의 그 문제작품을 읽기로 작정했군요.
만약 다비아를 통해서 그런 충동을 받았다면
다비아가 나름으로 한국교회를 위해서 공헌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겠군요.
그런데 소화불량에 걸리지나 않을는지.
약사이시니 설사를 만났을 때 어떤 처방을 해야 하는지는
잘 알겠지요?
아자.
2008.10.03 17:26:41
2. 칼빈은 하나님을 창조주와 구속주로서 확연히 나누는데, 그게 온당한 것일까?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은 총4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권-하나님 말씀론, 2권-신론, 3권-창조론, 4권-화해론. 기독교강요도 마찬가지겠지만, 각권의 제목과 주제구분은 지극히 신학적인 문제인것같네요,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은 총4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권-하나님 말씀론, 2권-신론, 3권-창조론, 4권-화해론. 기독교강요도 마찬가지겠지만, 각권의 제목과 주제구분은 지극히 신학적인 문제인것같네요,
2008.10.03 17:29:07
"루터도 별수 없이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세계상을 성서와 상충된다 하여 배척했던 반면, 칼뱅은 성서를 글자 그대로 믿는 태도에서 벗어나 있었다. 성서의 참된 주제는 구원이지 세계질서가 아니며, 또한 성서 메시지는 어디까지나 그때그때 사람들에게 적합한 언어로 선포된다는 것이었다"
(한스 큉, 그리스도교, 분도출판사, 717쪽)
(한스 큉, 그리스도교, 분도출판사, 717쪽)
2008.10.04 07:45:54
722쪽 이하
칼뱅의 예정론이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에 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듯이, 칼뱅의 교회제도 역시 간접적으로 근대 민주주의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종교개혁에 있어서 루터의 결정적 의의는 조금도 훼손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깊은 신심, 엄정한 논리, 강철같은 의지, 꿰뚫듯 명료하고 포괄적인 신학적 종합, 교회를 질서짓고 조직하는 재능, 국제적 차원의 교회 확장을 통해 "개신교를 세계적 세력"으로 만든 사람은 두말할 것 없이 칼뱅.
종교개혁가들 중에서 결코 국가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유럽적으로" 사고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칼뱅이다. 과연 칼뱅은 "국제적인 교회 네트워크"를 창출해낼 수 있었다.
칼뱅은 최소한 개신교에 한해 말한다면, "일치운동 정신"을 지닌 그리스도계의 스승이었다. 터무니없이 엄격하긴 했지만 일치운동을 위해 열성을 다했던 그는, 바로 저 성찬례로 인한 분쟁에서 개혁 교회들의 일치를 굳건히 일구어냈다.
우리 세기초 일치운동에서 세계적으로 사고하던 적극적 주도인물들 또한 주로 칼뱅의 정신을 따르는 교회들 출신이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세계교회협의회 본부가 제네바에 있다는 사실 또한 우연이 아니다.
칼뱅의 예정론이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에 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듯이, 칼뱅의 교회제도 역시 간접적으로 근대 민주주의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종교개혁에 있어서 루터의 결정적 의의는 조금도 훼손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깊은 신심, 엄정한 논리, 강철같은 의지, 꿰뚫듯 명료하고 포괄적인 신학적 종합, 교회를 질서짓고 조직하는 재능, 국제적 차원의 교회 확장을 통해 "개신교를 세계적 세력"으로 만든 사람은 두말할 것 없이 칼뱅.
종교개혁가들 중에서 결코 국가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유럽적으로" 사고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칼뱅이다. 과연 칼뱅은 "국제적인 교회 네트워크"를 창출해낼 수 있었다.
칼뱅은 최소한 개신교에 한해 말한다면, "일치운동 정신"을 지닌 그리스도계의 스승이었다. 터무니없이 엄격하긴 했지만 일치운동을 위해 열성을 다했던 그는, 바로 저 성찬례로 인한 분쟁에서 개혁 교회들의 일치를 굳건히 일구어냈다.
우리 세기초 일치운동에서 세계적으로 사고하던 적극적 주도인물들 또한 주로 칼뱅의 정신을 따르는 교회들 출신이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세계교회협의회 본부가 제네바에 있다는 사실 또한 우연이 아니다.
2008.10.04 10:47:24
목사님,
그러지않아도 제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큉은 내용을 잘 쓰고, 번역가는 국어를 정말 잘한다고 생각했는데요.
이제 머리말 겨우 넘긴 상황입니다만...^^
그러지않아도 제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큉은 내용을 잘 쓰고, 번역가는 국어를 정말 잘한다고 생각했는데요.
이제 머리말 겨우 넘긴 상황입니다만...^^
2008.10.04 13:05:23
우리 나라는 참 재밌는 나라입니다... 유학이 들어와도 일본처럼 "我不欲勿施於人"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들도 싫어하는 것이니 하지 말라") 의 정신보다 "장유유서"의 겉멋만을 취하더니, 칼빈주의도 그 정신보다는 그 겉멋만을 취한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드네요...
요새 저는 축농증이 다시 도져서 해롱 해롱하고 있습니다... 세균성 질환에 있어서는 한방은 속수무책임을 이 번에도 절실히 느끼면서 이비인후과에 꾸준히 다니고 있습니다... 고름같은 누런 코는 많이 좋아졌는데, 식은 땀이 줄줄 흐르는 것이 몸이 말이 아닙니다... 휴... 일터에 와서 일하고 있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니네요...
그래도 아플 때는 참 신기한게, 평상시에는 모르던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더 깊이 느껴진단 말입니다... 치유의 힘으로요... 내 안에서 나를 치유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느낍니다...
요새 저는 축농증이 다시 도져서 해롱 해롱하고 있습니다... 세균성 질환에 있어서는 한방은 속수무책임을 이 번에도 절실히 느끼면서 이비인후과에 꾸준히 다니고 있습니다... 고름같은 누런 코는 많이 좋아졌는데, 식은 땀이 줄줄 흐르는 것이 몸이 말이 아닙니다... 휴... 일터에 와서 일하고 있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니네요...
그래도 아플 때는 참 신기한게, 평상시에는 모르던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더 깊이 느껴진단 말입니다... 치유의 힘으로요... 내 안에서 나를 치유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느낍니다...
2008.10.09 14:00:39
저 역시 정목사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 합니다. 처음 에드윈 팔머의 칼빈의 5대 강령을 읽고 너무나 혼란스러워서 정목사님께 귀찮게 트집만 잡는 질문만 드렸었습니다. 처음 칼빈을 읽었을때는 너무나 혼란스럽고 너무 모순스러웠지만 개신교가 칼빈에 바탕을 둔 만큼 성경을 개신교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칼빈을 다음과 같이 받아들였습니다. 칼빈의 글은 성경이 아니다. 즉 그 또한 틀릴 수도 있지 하나님의 말씀처럼 절대 진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이해하는데 가장 나은 방법 중 하나이다라고.
저는 칼빈을 다음과 같이 받아들였습니다. 칼빈의 글은 성경이 아니다. 즉 그 또한 틀릴 수도 있지 하나님의 말씀처럼 절대 진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이해하는데 가장 나은 방법 중 하나이다라고.
수고 많았습니다.
완전히 신학대학원 세미나 발제 초안 같군요.
지금 내가 콤멘트 할 입장은 못 되는군요.
다만 한국의 일부 개혁주의자들은 칼빈을 교조적으로 추종하니까
너무 그들의 눈에 비친 칼빈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 게 좋겠지요.
칼빈은 분명히 아주 뛰어난 기독교 변증가임에 틀림 없어요.
바르트와 몰트만도 큰 틀에서 칼빈신학을 물려 받는 인물들이랍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대구오프에서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읽어볼까요?
그것보다는 동영상 강의에서 다루는 게 효율적이겠군요.
하여큰 첫날처럼 님의 구도정진의 모습이 멋지군요.
한국의 평신도들이 기둑교 진리에 대한 그런 치열성을 확보해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