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 <열린 토론실>입니다. 다비안들의 부담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채>와는 달리, 보다 진지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나 주제를 나누고 싶은 분들을 위한 게시판입니다. 가급적 예의를 갖추시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대화는 다비안을 비롯한 여러 네티즌들의 온라인 상에서의 자유로운 것이기에 그 방향과 정체성이 반드시 다비아와 일치하지는 않음을 밝혀둡니다.
글 수 253
제가 다비아에 글을 올리는 경우는
물론 다른 회원님들도 그런마음이겠지만
함께 나누면 좋겠다 생각해서 올리는 글이 대부분 입니다.
사랑채에 직접 올리는 글은 제가 쓴것이고
배낀글에 올리는 것은 글쓴이가 다른분이기에 올린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함께 도움이 될것이라 생각해서 올립니다
물론 다른 이견이 있을수 있습니다
같은 글도 읽는이의 상태나 가치관에 의하여 다르게 읽혀 질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제가 사랑채에 올린글은 역시 제가 쓴글이 아니지만
다른 회원님들과 나누면 좋겠다 싶어서 올렸습니다
다만 꼭지글의 내용을 링크로 연결을 한것입니다.
“난 모르겠다” 라는 글에 링크를 걸었습니다.
그 이유는 궁금하신분들이 글을 클릭하면 제 홈에 원글을 볼수 있도록
태그를 걸었던 것입니다.
첫날처럼님께서 그 의미를 잘 모른상태로 보시니
댓글에 화두를 던지신 것인지 라고 다셨고
제가 다시 링크를 걸었다고 답글 달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꼭지글을 올렸습니다.
(갈1:22-24) 기독교가 정말 바로 서려면?
이것도 링크태그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잠시후에 야생초님께서 댓글에
더이상 글 올리지 말라고 하셨구요
순간 저는 자라보고 놀란가슴 뭐 보고 놀란다고
제글을 삭제해 버렸습니다.
그냥 놔둘까 하다가 제가올린글을 그렇게 싫어하시는 회원님이 계신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여러분들도 제가 다비아에 무슨 악감을 품었다고 느끼십니까?
그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마치 저를 제발 이곳에서 없어졌으면 하는
야생초님같은 분이 계시다는게 갑자기 서글퍼집니다.
해서 저는 혹시 다비아 운영진께서 차마 말을 안하시니까
야생초님께서 대신 의견을 피력하는걸로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우려는 지워졌습니다.
제가 운영참여 게시판에 불만을 호소했더니
이길용 박사님께서 답글을 달아주셨습니다.
“전 작은자님의 글을 보지 못해서 어떤 상황인지 잘 모르겠네요. 그리고 야생초님과 다비아는 동일시할 필요는 없지않을까요? 지금까지 작은자님께서 다비아에 글을 올리실 때 운영자들에 의해 제재 받지는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순전히 야생초님 개인적으로 나름 의견을 그렇게 표현하신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다만 제가 느끼기에는 ‘악플’로 받아들여져서
조금 맘이 상했습니다.
이번기회에 혹시 저에게 꼭 하고싶은 말씀이 있으신 분들은
가감없이 댓글로 달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사랑채를 어지럽힐까봐서 쟁토방으로 올립니다
물론 다른 회원님들도 그런마음이겠지만
함께 나누면 좋겠다 생각해서 올리는 글이 대부분 입니다.
사랑채에 직접 올리는 글은 제가 쓴것이고
배낀글에 올리는 것은 글쓴이가 다른분이기에 올린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함께 도움이 될것이라 생각해서 올립니다
물론 다른 이견이 있을수 있습니다
같은 글도 읽는이의 상태나 가치관에 의하여 다르게 읽혀 질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제가 사랑채에 올린글은 역시 제가 쓴글이 아니지만
다른 회원님들과 나누면 좋겠다 싶어서 올렸습니다
다만 꼭지글의 내용을 링크로 연결을 한것입니다.
“난 모르겠다” 라는 글에 링크를 걸었습니다.
그 이유는 궁금하신분들이 글을 클릭하면 제 홈에 원글을 볼수 있도록
태그를 걸었던 것입니다.
첫날처럼님께서 그 의미를 잘 모른상태로 보시니
댓글에 화두를 던지신 것인지 라고 다셨고
제가 다시 링크를 걸었다고 답글 달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꼭지글을 올렸습니다.
(갈1:22-24) 기독교가 정말 바로 서려면?
이것도 링크태그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잠시후에 야생초님께서 댓글에
더이상 글 올리지 말라고 하셨구요
순간 저는 자라보고 놀란가슴 뭐 보고 놀란다고
제글을 삭제해 버렸습니다.
그냥 놔둘까 하다가 제가올린글을 그렇게 싫어하시는 회원님이 계신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여러분들도 제가 다비아에 무슨 악감을 품었다고 느끼십니까?
그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마치 저를 제발 이곳에서 없어졌으면 하는
야생초님같은 분이 계시다는게 갑자기 서글퍼집니다.
해서 저는 혹시 다비아 운영진께서 차마 말을 안하시니까
야생초님께서 대신 의견을 피력하는걸로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우려는 지워졌습니다.
제가 운영참여 게시판에 불만을 호소했더니
이길용 박사님께서 답글을 달아주셨습니다.
“전 작은자님의 글을 보지 못해서 어떤 상황인지 잘 모르겠네요. 그리고 야생초님과 다비아는 동일시할 필요는 없지않을까요? 지금까지 작은자님께서 다비아에 글을 올리실 때 운영자들에 의해 제재 받지는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순전히 야생초님 개인적으로 나름 의견을 그렇게 표현하신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다만 제가 느끼기에는 ‘악플’로 받아들여져서
조금 맘이 상했습니다.
이번기회에 혹시 저에게 꼭 하고싶은 말씀이 있으신 분들은
가감없이 댓글로 달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사랑채를 어지럽힐까봐서 쟁토방으로 올립니다
2008.04.30 09:49:36
아... 그랬었구나... 저는 링크를 달았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그게 제목이라는 생각을요... 참 이렇게 어리합니다... 사람이... 글은 읽어보지도 못했네요... 죄송함다... 작은자님...
2008.04.30 09:55:09
작은 자님께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저는 원글 자체를 못 보았습니다... 그냥 그 큰 색깔 글씨가 글 내용의 전부인 줄 알았어요... 사랑채에 제 댓글은 내릴께요... 제 댓글은 꼭 그 글을 다 읽어보고 쓴 것 같은 착각을 들게 하네요...
2008.04.30 10:08:21
작은자님, 글을 올리실 때 링크만 달랑 쓰시는 것은 네티켓 상 좋지 않습니다.
링크를 거는 것은 저작권 상에 문제가 있다거나 특정 사이트를 소개할 때 정도가 적당하며
그런 경우에도 관련 링크를 자세히 소개해 주시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글 전체를 가져다 올리시는 게 기본이구요.
링크만 있을 경우 광고글이나 피싱글로 오인받기 쉽습니다.
링크를 시험하신다고 쓰신 것 같으니 앞으로는 글 전체를 올려주세요~.
링크를 거는 것은 저작권 상에 문제가 있다거나 특정 사이트를 소개할 때 정도가 적당하며
그런 경우에도 관련 링크를 자세히 소개해 주시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글 전체를 가져다 올리시는 게 기본이구요.
링크만 있을 경우 광고글이나 피싱글로 오인받기 쉽습니다.
링크를 시험하신다고 쓰신 것 같으니 앞으로는 글 전체를 올려주세요~.
2008.05.01 00:52:55
캔디님~
그렇습니다 저는 다비아를 마치 제 홈처럼
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그리고
제 홈역시 모든분들이 그렇게 편하게
내집이려니 드나들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내맘같지는 않다는걸
익히 알면서도 제가 착각을 하는군요^^
그리고 솔직하게
캔디님이 옳게 보셨습니다
제 홈을 홍보하려는 발칙함이 전혀 없다면
거짓입니다
그렇다고해도
만일 제 홈에 방문하셔서 둘러보시고서
신앙이 위험하다든지
이단성이 있다든지
별로 도움될게 없다면 아무리 홍보한들 신경이나 쓸까요^^
어짜피 회원정보를 통해서 공개하신분들은 이미
자유롭게 교제하며 블로그라든지
카페나 홈피를 서로 알리는 기능이 전혀 없다고 할수 있을까요?
물론 어느 사이트에서는 원칙적으로 회원정보를 비공개로 운영하는 곳도
있습니다
무슨말이냐 하면 캔디님께서 지적하신게 맞다는 것이지요^^
첫날처럼님~
사과는 오히려 작은자가 해야지요^^
자유의 꿈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원글을 올려보겠습니다
이글은 제가 작성한것이 아니라 제 홈에 글을 올려주시는 목사님의 글입니다
링크를 걸었던것은 혹시라도 작은자를 탐탁치 않게 보시는 분들을 위한 나름의 배려였습니다
보기싫으시면 안보는게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거든요^^
“난 모르겠다”
한자리(글쓴이)
대부분 예수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제일 많은 이야기가 병자를 고친 내용이고, 한 번은 배고픈 사람들을 먹였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죽은 나사로를 살렸다가 한번 나오고,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씀을 주어
생수를 먹여 주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과정을 지나오면서 사람들은 예수를 많이 따라왔다. 베스다 광야에 왔을 때는 5000명이 모였다고 한다. 그 시대에 사람이 5000명이 모였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5000명이라는 숫자에 남자와 여자를 다 합쳐서 5000명인지 아니면 남자만 5000명인지는 모른다. 왜냐하면 유태인들은 민수기 같은 곳에 보면 여자는 숫자를 안센다. 애굽에서 60만이 나왔다 할 때도 어린아이들과 여자들은 빼 놓고
장정만 60만을 말하는 것이다. 그가 행하는 놀라운 기적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따라 왔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이 이 때까지는 다 좋았다. 다 유익하고 다 도움이 되고 우리 인생의 문제를 다 해결해 주니까 따라 왔다. 어느 날부터인가 차차 사람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에는 한 명도 남지 않고 다 떨어지게 되었다. 왜 그랬는가? 십자가의 도’ 때문에 완전하게 다 떨어지게 되었다. 병자를 고치는 자리에도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음식을 먹는 자리에도 많이 있었고, 다 많이 있었는데 십자가의 길에서는 다 떨어져 나간 것이다. 상식으로는 그것을 전통적으로 생각하기를 고난의 길이니까 사람들이 고난의 길을 싫어하여
떨어져 나간 것으로 생각해서 고난을 참자’를 역설해 왔다. 우리가 갖가지 고난을 이기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주장해 왔다. 그런데 베드로 같은 경우에는 고난이기 때문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죽는 곳에도 같이 가고 옥에도 같이 가겠다고 했지 나는 어려우면 안하겠습니다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도 떨어져 나갔다. 왜 떨어졌나? “난 모르겠다” 그래서 떨어졌다. 어렵다’해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너무너무 괴롭다, 힘들다 해서 떠나간 것이 아니고, “난 모르겠다” 였기 때문에 떨어져 간 것이다. 지금까지 상식 안에서 전통적으로 가르쳐온 말이 잘못된 말이다.
어려워서 예수를 떠난다,
고난이 싫어서 예수를 떠난다는 말은 잘못된 말이다. 예수를 떠난 것은 ‘몰라서’ 떠나는 것이다. 베드로는 우리의 대표자이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따라갔던 사람이다. 그런데 끝까지 따라간 사람의 마지막 말은 “난 모르겠다” 였다. 그렇다면 중간에 떨어진 사람도 왜 떨어졌나?
몰라서 떨어진 것이다. 아는데 예수를 따라가는 길이 너무 어렵다 해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나는 예수를 따라가는 길이 절대로 어려운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어려운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잘못된 길을 가면 어렵다. 예수를 따라가는 것은 어려운 길이 아니고 ‘모르는 길’이지 어려운 길이 절대로 아니다. 병자를 고쳤으면 너무너무 좋은데 뭐가 어려운가. 걸음도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나 걸어서 갔다, 눈을 못보던 사람이 눈을 떴다면
이 얼마나 좋은 일인데 무엇이 어려운가. 장님으로 있던 사람이 눈을 떴는데 어딘들 못가겠는가.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났는데 어디든 못가겠는가. 어려워서 그런 것이 절대로 아니다. 그것은 몰라서 그런 것이다. 다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서 모르는데, 베드로가 분명하게 그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마지막에 한 말은 “난 저 사람을 모른다” 그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의 도’를 모른다는 말이다. 병 고치는 것은 알겠는데 ‘십자가의 도’는 모르겠다는 것이다. 십자가로 가는 예수는 모르겠다하여 떨어진 것이다.
원글게시주소: target=_blank>http://pray119.ohpy.com/334688/98
기독교가 정말 바로 서려면?“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핍박(逼迫)하던 자가 전에 잔해(殘害)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갈1:22-24)작금 한국에선 개독교로까지 불릴 정도로 세상에서 신망을 잃은 개신교가 다시 부흥할 수 있는 대책을 다각도로 모색하고 있습니다. 지금껏 제시된 수많은 의견을 따져보면 결국은 두 가지 큰 줄기로 모아지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 특별히 개신교가 그간 위선적 행위와 풍요와 출세를 지향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준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와 성도 공히 사회봉사에 적극 참여하고 현실적 성장 대신 내면의 성숙을 지향해야 한다고 합니다.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할 너무나 지당한 대책 같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으로 개신교가 그간의 문제를 모두 해소하고 제 자리를 찾아 바로 서겠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물질에 투명해지고 선행을 많이 하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으니 하지 말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기독교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아니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현재 원인으로 분석되고 세워진 대책은 전부 사람들의 비방을 잠재우려는 시도일 뿐입니다. 기독교의 대외적 이미지를 개선하는 작업에 불과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서두에 강조한 대로 “사람들에게 좋게 하고 그들의 기쁨을 구하고자”(1:10) 하는 시도일 뿐입니다. 그는 심지어 그렇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까지 단언했습니다. 기독교는 반드시 하나님께 좋게 하고 그분의 기쁨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확실하게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반발과 비방에 너무 일희일비해선 안 됩니다. 오히려 바로 선 기독교는 필연적으로 세상의 핍박과 잔해를 받게 됩니다. 단 위선적 행동과 성공을 지향해서가 아니라 그 전하는 믿음으로 말입니다. 바울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현재 기독교가 저지르고 있는 잘못도 잘못이지만, 그 원인 분석과 대책 수립조차 잘못되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유대교에 열심이었을 때에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가 예수 믿는 신자들이 뒤로 호박씨 까고 돈을 밝혔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그 믿음이 너무나 마음에 안 들어 잔해, 즉 완전히 파괴해 없애버리려 했습니다. 자기가 믿었던 믿음과 완전 반대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인간의 선행과 내면적 성숙을 강조했는데 반해 교인들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그간 기독교 부흥의 길로 제시된 방안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조금 감이 잡힙니까?)그랬던 그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거듭난 이후로는 완전히 사태는 역전되었습니다. 이전에 지구상에서 없어져야 한다고 잔해했던 바로 그 믿음이 진짜로 올바르고도 유일한 믿음이라고 바로 예전의 자기 같은 자들에게 가장 앞서서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와 일면식도 없는 자들마저 바울의 그 변화된, 정확하게는 완전히 뒤집어진 모습을 인정해 주고 심지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절대 간과해선 안 될 중요한 사실은 유대교에 머물러 남아 있던 자들은 절대 바울을 인정해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어떻게 증언합니까?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만 그를 인정해주었습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 모두 그가 개종했다는 사실은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그가 바른 결정을 내렸다고는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감을 가지며 지켜보고 있다가 전혀 엉터리 죄목으로 체포 투옥시켰고 결국은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매달았지 않습니까?기독교가, 성경과 십자가에 계시된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절대적 진리로서의 기독교는 어떠한 오류도 없으므로 실제적으로는 신자와 교회가, 지향해야할 모습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모두 바울 같아져야 합니다. 교회는 십자가 복음으로 그 존재와 인생이 완전히 뒤집어진 사람들로 채워져야 합니다. 선포되고 전해지는 복음은 세상 사람들이 완전히 잔해하고 싶어질 정도로 그들 철학과 종교와는 정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오히려 세상의 핍박을 항상 또 마땅히 받아야 합니다. 신자의 믿음이 드러나면 잔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몰려야 합니다. 나아가 교회 안에서도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바울이 회심하게 된 것이 자신의 노력, 결심, 능력, 지성, 도덕성, 종교성, 영성 등에 전혀 기인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만 되었듯이, 교인의 믿음도 예수님과의 인격적 대면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자신의 존재와 인생이 완전히 거듭나게 된 것이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생생한 체험으로 증거 되어져야 합니다. 신자의 신자된 것이 오직 그리스도로 인해야 하며 살아도 그분을 위해 살고 죽어도 그분을 위해 죽어야 합니다. 그야말로 복음이 하나님의 구원을 주시는 능력임을 모두가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바울 당시 바울을 보는 교회 안팎에서 그가 그렇게 변한 것이 그 자신을 비롯해 사람으로 인함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인정했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바울 같은 사람들만의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숫자가 얼마나 되었든 말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오는 것까지 말릴 수는 없지만, 그 사람들도 복음으로 뒤집어지든지 아니면 도저히 그것이 싫어서 저절로 나가든지 둘 중 하나가 되도록 교회와 성도 전체의 분위기가 그래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바울 같은 교회 지도자들이야말로 정말 그리스도만 전파하고 그를 닮은 종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 그랬듯이 다른 종교의 지도자들이 목사의 가르침을 잔해(Destroy)하고픈 마음이 저절로 들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만 성경대로 온전하게 전하면 자연히 그렇게 됩니다. 목사는 하나님께 받은 계시만으로 하나님의 권능에 사로잡혀 선포하고 가르치며 자기 삶에서부터 생명을 걸고 실천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목사는 절대로 자신의 의나 이름을 앞세우지 말고 자신부터 오직 그리스도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또 목사를 곁에서 바라보는 교인들이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목사가 교인들로부터 받을 인정은 완전히 거듭나서 그리스도만 바르게 전하고 있다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반면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받을 평가는 잔해하고 싶은 믿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이기에 그들로부터 받을 보상도 핍박뿐이어야 합니다. 기독교가 선행을 많이 하고 내면의 성숙을 지향해야 한다는 대책은 너무 ABC 같은 수준 아닙니까? 신자라면, 아니 세상 모든 불신자도 그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초대교회 신자들은 그 부분은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고 사람들도 교인에 대해 전혀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신자들의 삶을 보고 그 공동체에 들어오고 싶어 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인 예수님이 인간 지도자라도 쉽게 가르칠 수 있고 아니 조금 깨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착하게 살고 물질보다는 내면의 성숙을 도모하라는 단순한 가르침을 주려고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겠습니까? 겨우 그런 뜻으로 십자가에 죽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새삼 강조하지만 기독교가 선행과 자체 정화 노력을 등한히 하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비방이 두려워 그들의 마음에 맞게 바꾸려는 대책은 절대로 근본해결책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좋게 하려는 것은 반드시 하나님께 안 좋게 됩니다. 심지어 선행과 성숙조차 하나님 즉 예수님의 십자가가 배제된 채는 그렇게 됩니다. 인간은 십자가 구원 없이는 절대로 그 죄악 된 본성을 스스로 씻을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설령 선행과 자체 정화 노력이 성공을 거두어 세상 사람들로부터 개신교가 올바르게 탈바꿈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해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실종되면 세상 여느 종교의 하나가 될 뿐입니다. 여전히 유일한 진리와 길과 생명이 된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우선 교회 안에서부터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려져야 합니다. 복음은 이미 믿음 안에 들어온 신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의 신비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에서부터 인간이 믿음으로 이르는 것이지 인간의 노력으로 믿음이 출발하고 자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가 나서서 세상이 이해하고 누구나 노력하여 얻을 수 있는 믿음으로 변질 시키려 들어선 절대로 복음이 복음으로서 구실을 못합니다. 기독교가 절대 잊어선 안 될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선행과 성숙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되돌려 받을 것은 비방이 없어진다는 것 단 하나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다고 그들이 교회 안으로 저절로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비방거리가 하나 없어진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지금 기독교 부흥의 대책으로 제안된 것들 모두는 세상의 비방을 면하자는 수준에 불과한 것이지 진정으로 교회가 교회로서 바로 서는 대책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가 교회로 바로 서는 대책을 세우면 오히려 세상의 핍박과 사람들의 잔해를 각오해야 합니다. 가장 먼저 현재 세상으로부터 비방 받고 있는 내용이 진정한 기독교의 본질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실체부터 정확히 깨달아야 합니다. 뒤로 호박씨 까지 말아야 하고 돈을 밝히지 말아야 하는 것과 십자가 복음과는 직접적 연관성은 없습니다. 요컨대 교회들이 정작 해야 할 일은 안 하고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 더 큰, 아니 근본적 문제임을 직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기쁨을 구해야 하므로 사람의 비방을 받아야 합니다. 두 곳에서 동시에 기쁨을 구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기독교가 바로 서려면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길뿐입니다. 교회는 복음을 복음답게 선포하고 신자도 오직 복음 안에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선행과 돈 문제는 목청을 크게 돋우지 않아도 자연히 해결 됩니다. 교회개혁을 위한 세미나, 결의대회 같은 것, 나아가 더더욱 교회 성장 대책으로는 근원적인 문제 해결책이 되지 않습니다. 이미 정답은 성경에, 아니 이천년 전 골고다 언덕에 간단명료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제시되었습니다. 그것도 교회뿐만 아니라 예수 믿지 않는 만천하도 볼 수 있게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을 때에는 교회와 목사 아니 제대로 예수 믿는 신자조차 아직 한 명도 없었음에도 하나님은 십자가만을 해결책으로 제시했다는 엄연한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과거나 현재나 앞으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절대로 어떤 대책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죄와 사단과 사망의 사슬에 묶여 신음하고 있는 병자이자 죄인입니다. 영혼이 타락하여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과 원수로 사단의 종이 된 상태입니다.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더러운 죄악뿐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치료방법이 아니라 치료자 당신입니다. 예수님은 병자와 죄인을 구하기 위해 이 땅에 왔을 뿐입니다. 성한 자와 의인에게 복 주기 위해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허물과 실패와 죄를 씻고 치료하는 대책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당신께서 직접 구원을 베풀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교회마저 구원자 되시는 그분은 따로 모셔두고 인간이, 아무리 믿음과 인격이 훌륭해도, 나서서 대책을 수립하고 실천해선 일시적으로 조금 나아지긴 하겠지만 결코 항구적으로는 바로 서지 않습니다. 교계 지도자들마저 십자가 복음 하나만 전하자고 하는 대신 수많은 현실적 대책을 마련해 우리 노력으로 기독교를 바로 세우자고 주장합니다. 기독교는 이미 바로 서 있습니다. 혹시 그들도 세상 핍박과 잔해가 두려워 십자가를 살짝 감추려는 내심은 아닌지요? 아니면 교회조차 참 진리에 갈급해 향방을 모르고 달리며 허공을 치고 있다는 반증은 아닐까요?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두려움과 떨림으로 대하는 자는 결코 사람들을 기쁘게 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개신교가 바로 서는 길은 교회에 진정한 교인들로 채워 교회 안에서부터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바로 예수님을 예수님답게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가 아닌 방식으로는 절대 영광을 받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4/28/08
게시글주소: target=_blank>http://pray119.ohpy.com/128935/67
이상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다비아를 마치 제 홈처럼
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그리고
제 홈역시 모든분들이 그렇게 편하게
내집이려니 드나들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내맘같지는 않다는걸
익히 알면서도 제가 착각을 하는군요^^
그리고 솔직하게
캔디님이 옳게 보셨습니다
제 홈을 홍보하려는 발칙함이 전혀 없다면
거짓입니다
그렇다고해도
만일 제 홈에 방문하셔서 둘러보시고서
신앙이 위험하다든지
이단성이 있다든지
별로 도움될게 없다면 아무리 홍보한들 신경이나 쓸까요^^
어짜피 회원정보를 통해서 공개하신분들은 이미
자유롭게 교제하며 블로그라든지
카페나 홈피를 서로 알리는 기능이 전혀 없다고 할수 있을까요?
물론 어느 사이트에서는 원칙적으로 회원정보를 비공개로 운영하는 곳도
있습니다
무슨말이냐 하면 캔디님께서 지적하신게 맞다는 것이지요^^
첫날처럼님~
사과는 오히려 작은자가 해야지요^^
자유의 꿈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원글을 올려보겠습니다
이글은 제가 작성한것이 아니라 제 홈에 글을 올려주시는 목사님의 글입니다
링크를 걸었던것은 혹시라도 작은자를 탐탁치 않게 보시는 분들을 위한 나름의 배려였습니다
보기싫으시면 안보는게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거든요^^
“난 모르겠다”
한자리(글쓴이)
대부분 예수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제일 많은 이야기가 병자를 고친 내용이고, 한 번은 배고픈 사람들을 먹였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죽은 나사로를 살렸다가 한번 나오고,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씀을 주어
생수를 먹여 주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과정을 지나오면서 사람들은 예수를 많이 따라왔다. 베스다 광야에 왔을 때는 5000명이 모였다고 한다. 그 시대에 사람이 5000명이 모였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5000명이라는 숫자에 남자와 여자를 다 합쳐서 5000명인지 아니면 남자만 5000명인지는 모른다. 왜냐하면 유태인들은 민수기 같은 곳에 보면 여자는 숫자를 안센다. 애굽에서 60만이 나왔다 할 때도 어린아이들과 여자들은 빼 놓고
장정만 60만을 말하는 것이다. 그가 행하는 놀라운 기적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따라 왔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이 이 때까지는 다 좋았다. 다 유익하고 다 도움이 되고 우리 인생의 문제를 다 해결해 주니까 따라 왔다. 어느 날부터인가 차차 사람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에는 한 명도 남지 않고 다 떨어지게 되었다. 왜 그랬는가? 십자가의 도’ 때문에 완전하게 다 떨어지게 되었다. 병자를 고치는 자리에도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음식을 먹는 자리에도 많이 있었고, 다 많이 있었는데 십자가의 길에서는 다 떨어져 나간 것이다. 상식으로는 그것을 전통적으로 생각하기를 고난의 길이니까 사람들이 고난의 길을 싫어하여
떨어져 나간 것으로 생각해서 고난을 참자’를 역설해 왔다. 우리가 갖가지 고난을 이기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주장해 왔다. 그런데 베드로 같은 경우에는 고난이기 때문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죽는 곳에도 같이 가고 옥에도 같이 가겠다고 했지 나는 어려우면 안하겠습니다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도 떨어져 나갔다. 왜 떨어졌나? “난 모르겠다” 그래서 떨어졌다. 어렵다’해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너무너무 괴롭다, 힘들다 해서 떠나간 것이 아니고, “난 모르겠다” 였기 때문에 떨어져 간 것이다. 지금까지 상식 안에서 전통적으로 가르쳐온 말이 잘못된 말이다.
어려워서 예수를 떠난다,
고난이 싫어서 예수를 떠난다는 말은 잘못된 말이다. 예수를 떠난 것은 ‘몰라서’ 떠나는 것이다. 베드로는 우리의 대표자이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따라갔던 사람이다. 그런데 끝까지 따라간 사람의 마지막 말은 “난 모르겠다” 였다. 그렇다면 중간에 떨어진 사람도 왜 떨어졌나?
몰라서 떨어진 것이다. 아는데 예수를 따라가는 길이 너무 어렵다 해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나는 예수를 따라가는 길이 절대로 어려운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어려운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잘못된 길을 가면 어렵다. 예수를 따라가는 것은 어려운 길이 아니고 ‘모르는 길’이지 어려운 길이 절대로 아니다. 병자를 고쳤으면 너무너무 좋은데 뭐가 어려운가. 걸음도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나 걸어서 갔다, 눈을 못보던 사람이 눈을 떴다면
이 얼마나 좋은 일인데 무엇이 어려운가. 장님으로 있던 사람이 눈을 떴는데 어딘들 못가겠는가.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났는데 어디든 못가겠는가. 어려워서 그런 것이 절대로 아니다. 그것은 몰라서 그런 것이다. 다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서 모르는데, 베드로가 분명하게 그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마지막에 한 말은 “난 저 사람을 모른다” 그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의 도’를 모른다는 말이다. 병 고치는 것은 알겠는데 ‘십자가의 도’는 모르겠다는 것이다. 십자가로 가는 예수는 모르겠다하여 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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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정말 바로 서려면?“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핍박(逼迫)하던 자가 전에 잔해(殘害)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갈1:22-24)작금 한국에선 개독교로까지 불릴 정도로 세상에서 신망을 잃은 개신교가 다시 부흥할 수 있는 대책을 다각도로 모색하고 있습니다. 지금껏 제시된 수많은 의견을 따져보면 결국은 두 가지 큰 줄기로 모아지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 특별히 개신교가 그간 위선적 행위와 풍요와 출세를 지향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준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와 성도 공히 사회봉사에 적극 참여하고 현실적 성장 대신 내면의 성숙을 지향해야 한다고 합니다.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할 너무나 지당한 대책 같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으로 개신교가 그간의 문제를 모두 해소하고 제 자리를 찾아 바로 서겠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물질에 투명해지고 선행을 많이 하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으니 하지 말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기독교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아니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현재 원인으로 분석되고 세워진 대책은 전부 사람들의 비방을 잠재우려는 시도일 뿐입니다. 기독교의 대외적 이미지를 개선하는 작업에 불과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서두에 강조한 대로 “사람들에게 좋게 하고 그들의 기쁨을 구하고자”(1:10) 하는 시도일 뿐입니다. 그는 심지어 그렇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까지 단언했습니다. 기독교는 반드시 하나님께 좋게 하고 그분의 기쁨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확실하게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반발과 비방에 너무 일희일비해선 안 됩니다. 오히려 바로 선 기독교는 필연적으로 세상의 핍박과 잔해를 받게 됩니다. 단 위선적 행동과 성공을 지향해서가 아니라 그 전하는 믿음으로 말입니다. 바울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현재 기독교가 저지르고 있는 잘못도 잘못이지만, 그 원인 분석과 대책 수립조차 잘못되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유대교에 열심이었을 때에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가 예수 믿는 신자들이 뒤로 호박씨 까고 돈을 밝혔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그 믿음이 너무나 마음에 안 들어 잔해, 즉 완전히 파괴해 없애버리려 했습니다. 자기가 믿었던 믿음과 완전 반대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인간의 선행과 내면적 성숙을 강조했는데 반해 교인들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그간 기독교 부흥의 길로 제시된 방안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조금 감이 잡힙니까?)그랬던 그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거듭난 이후로는 완전히 사태는 역전되었습니다. 이전에 지구상에서 없어져야 한다고 잔해했던 바로 그 믿음이 진짜로 올바르고도 유일한 믿음이라고 바로 예전의 자기 같은 자들에게 가장 앞서서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와 일면식도 없는 자들마저 바울의 그 변화된, 정확하게는 완전히 뒤집어진 모습을 인정해 주고 심지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절대 간과해선 안 될 중요한 사실은 유대교에 머물러 남아 있던 자들은 절대 바울을 인정해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어떻게 증언합니까?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만 그를 인정해주었습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 모두 그가 개종했다는 사실은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그가 바른 결정을 내렸다고는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감을 가지며 지켜보고 있다가 전혀 엉터리 죄목으로 체포 투옥시켰고 결국은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매달았지 않습니까?기독교가, 성경과 십자가에 계시된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절대적 진리로서의 기독교는 어떠한 오류도 없으므로 실제적으로는 신자와 교회가, 지향해야할 모습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모두 바울 같아져야 합니다. 교회는 십자가 복음으로 그 존재와 인생이 완전히 뒤집어진 사람들로 채워져야 합니다. 선포되고 전해지는 복음은 세상 사람들이 완전히 잔해하고 싶어질 정도로 그들 철학과 종교와는 정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오히려 세상의 핍박을 항상 또 마땅히 받아야 합니다. 신자의 믿음이 드러나면 잔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몰려야 합니다. 나아가 교회 안에서도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바울이 회심하게 된 것이 자신의 노력, 결심, 능력, 지성, 도덕성, 종교성, 영성 등에 전혀 기인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만 되었듯이, 교인의 믿음도 예수님과의 인격적 대면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자신의 존재와 인생이 완전히 거듭나게 된 것이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생생한 체험으로 증거 되어져야 합니다. 신자의 신자된 것이 오직 그리스도로 인해야 하며 살아도 그분을 위해 살고 죽어도 그분을 위해 죽어야 합니다. 그야말로 복음이 하나님의 구원을 주시는 능력임을 모두가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바울 당시 바울을 보는 교회 안팎에서 그가 그렇게 변한 것이 그 자신을 비롯해 사람으로 인함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인정했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바울 같은 사람들만의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숫자가 얼마나 되었든 말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오는 것까지 말릴 수는 없지만, 그 사람들도 복음으로 뒤집어지든지 아니면 도저히 그것이 싫어서 저절로 나가든지 둘 중 하나가 되도록 교회와 성도 전체의 분위기가 그래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바울 같은 교회 지도자들이야말로 정말 그리스도만 전파하고 그를 닮은 종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 그랬듯이 다른 종교의 지도자들이 목사의 가르침을 잔해(Destroy)하고픈 마음이 저절로 들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만 성경대로 온전하게 전하면 자연히 그렇게 됩니다. 목사는 하나님께 받은 계시만으로 하나님의 권능에 사로잡혀 선포하고 가르치며 자기 삶에서부터 생명을 걸고 실천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목사는 절대로 자신의 의나 이름을 앞세우지 말고 자신부터 오직 그리스도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또 목사를 곁에서 바라보는 교인들이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목사가 교인들로부터 받을 인정은 완전히 거듭나서 그리스도만 바르게 전하고 있다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반면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받을 평가는 잔해하고 싶은 믿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이기에 그들로부터 받을 보상도 핍박뿐이어야 합니다. 기독교가 선행을 많이 하고 내면의 성숙을 지향해야 한다는 대책은 너무 ABC 같은 수준 아닙니까? 신자라면, 아니 세상 모든 불신자도 그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초대교회 신자들은 그 부분은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고 사람들도 교인에 대해 전혀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신자들의 삶을 보고 그 공동체에 들어오고 싶어 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인 예수님이 인간 지도자라도 쉽게 가르칠 수 있고 아니 조금 깨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착하게 살고 물질보다는 내면의 성숙을 도모하라는 단순한 가르침을 주려고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겠습니까? 겨우 그런 뜻으로 십자가에 죽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새삼 강조하지만 기독교가 선행과 자체 정화 노력을 등한히 하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비방이 두려워 그들의 마음에 맞게 바꾸려는 대책은 절대로 근본해결책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좋게 하려는 것은 반드시 하나님께 안 좋게 됩니다. 심지어 선행과 성숙조차 하나님 즉 예수님의 십자가가 배제된 채는 그렇게 됩니다. 인간은 십자가 구원 없이는 절대로 그 죄악 된 본성을 스스로 씻을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설령 선행과 자체 정화 노력이 성공을 거두어 세상 사람들로부터 개신교가 올바르게 탈바꿈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해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실종되면 세상 여느 종교의 하나가 될 뿐입니다. 여전히 유일한 진리와 길과 생명이 된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우선 교회 안에서부터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려져야 합니다. 복음은 이미 믿음 안에 들어온 신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의 신비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에서부터 인간이 믿음으로 이르는 것이지 인간의 노력으로 믿음이 출발하고 자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가 나서서 세상이 이해하고 누구나 노력하여 얻을 수 있는 믿음으로 변질 시키려 들어선 절대로 복음이 복음으로서 구실을 못합니다. 기독교가 절대 잊어선 안 될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선행과 성숙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되돌려 받을 것은 비방이 없어진다는 것 단 하나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다고 그들이 교회 안으로 저절로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비방거리가 하나 없어진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지금 기독교 부흥의 대책으로 제안된 것들 모두는 세상의 비방을 면하자는 수준에 불과한 것이지 진정으로 교회가 교회로서 바로 서는 대책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가 교회로 바로 서는 대책을 세우면 오히려 세상의 핍박과 사람들의 잔해를 각오해야 합니다. 가장 먼저 현재 세상으로부터 비방 받고 있는 내용이 진정한 기독교의 본질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실체부터 정확히 깨달아야 합니다. 뒤로 호박씨 까지 말아야 하고 돈을 밝히지 말아야 하는 것과 십자가 복음과는 직접적 연관성은 없습니다. 요컨대 교회들이 정작 해야 할 일은 안 하고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 더 큰, 아니 근본적 문제임을 직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기쁨을 구해야 하므로 사람의 비방을 받아야 합니다. 두 곳에서 동시에 기쁨을 구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기독교가 바로 서려면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길뿐입니다. 교회는 복음을 복음답게 선포하고 신자도 오직 복음 안에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선행과 돈 문제는 목청을 크게 돋우지 않아도 자연히 해결 됩니다. 교회개혁을 위한 세미나, 결의대회 같은 것, 나아가 더더욱 교회 성장 대책으로는 근원적인 문제 해결책이 되지 않습니다. 이미 정답은 성경에, 아니 이천년 전 골고다 언덕에 간단명료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제시되었습니다. 그것도 교회뿐만 아니라 예수 믿지 않는 만천하도 볼 수 있게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을 때에는 교회와 목사 아니 제대로 예수 믿는 신자조차 아직 한 명도 없었음에도 하나님은 십자가만을 해결책으로 제시했다는 엄연한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과거나 현재나 앞으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절대로 어떤 대책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죄와 사단과 사망의 사슬에 묶여 신음하고 있는 병자이자 죄인입니다. 영혼이 타락하여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과 원수로 사단의 종이 된 상태입니다.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더러운 죄악뿐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치료방법이 아니라 치료자 당신입니다. 예수님은 병자와 죄인을 구하기 위해 이 땅에 왔을 뿐입니다. 성한 자와 의인에게 복 주기 위해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허물과 실패와 죄를 씻고 치료하는 대책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당신께서 직접 구원을 베풀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교회마저 구원자 되시는 그분은 따로 모셔두고 인간이, 아무리 믿음과 인격이 훌륭해도, 나서서 대책을 수립하고 실천해선 일시적으로 조금 나아지긴 하겠지만 결코 항구적으로는 바로 서지 않습니다. 교계 지도자들마저 십자가 복음 하나만 전하자고 하는 대신 수많은 현실적 대책을 마련해 우리 노력으로 기독교를 바로 세우자고 주장합니다. 기독교는 이미 바로 서 있습니다. 혹시 그들도 세상 핍박과 잔해가 두려워 십자가를 살짝 감추려는 내심은 아닌지요? 아니면 교회조차 참 진리에 갈급해 향방을 모르고 달리며 허공을 치고 있다는 반증은 아닐까요?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두려움과 떨림으로 대하는 자는 결코 사람들을 기쁘게 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개신교가 바로 서는 길은 교회에 진정한 교인들로 채워 교회 안에서부터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바로 예수님을 예수님답게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가 아닌 방식으로는 절대 영광을 받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4/2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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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입니다^^
2008.05.01 10:26:44
작은자 님 글 잘 읽었습니다... 선행과 이미지 개선... 이 것으로 기독교의 본질이 바로서고 제대로 된 교회가 되는 것 아니라는 요지에 적극 공감합니다... 지금 교회는 그런 것으로 떼우려고 하고 있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세상과의 불화" 가 소종파들, 이를테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 여호와의 증인들 등등의 사람들이 보이는 분파주의적(sectarian)인 그 무엇과 같은 패턴은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상식을 부정하고 반상식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그리스도교적이라고 용납하는 그런 류가 되어서는 안되어야 할텐데, 글의 분위기에서는 그런 위험 요소도 보이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의 진리가 세상의 일반적인 상식과 다르다는 것은, 세상의 상식과 반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상식을 포용하고, 또한 그 상식을 넘어서 있다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초상식적이라는 이야기죠...
이를테면 불상의 목을 쳐서 세상 사람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을 "십자가의 고난"으로 생각하는 그런 류는 아니어야 한다는 이야기죠... 방금 이야기는 너무 극단적인 예이지만 기독교에는 그런 패턴이 너무 많습니다...
베드로서신에도 그런 말씀이 있죠... 자기가 스스로 초래한 고난과 그리스도로 인해 당하는 고난은 질적으로 틀리다는 것...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세상과의 불화" 가 소종파들, 이를테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 여호와의 증인들 등등의 사람들이 보이는 분파주의적(sectarian)인 그 무엇과 같은 패턴은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상식을 부정하고 반상식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그리스도교적이라고 용납하는 그런 류가 되어서는 안되어야 할텐데, 글의 분위기에서는 그런 위험 요소도 보이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의 진리가 세상의 일반적인 상식과 다르다는 것은, 세상의 상식과 반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상식을 포용하고, 또한 그 상식을 넘어서 있다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초상식적이라는 이야기죠...
이를테면 불상의 목을 쳐서 세상 사람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을 "십자가의 고난"으로 생각하는 그런 류는 아니어야 한다는 이야기죠... 방금 이야기는 너무 극단적인 예이지만 기독교에는 그런 패턴이 너무 많습니다...
베드로서신에도 그런 말씀이 있죠... 자기가 스스로 초래한 고난과 그리스도로 인해 당하는 고난은 질적으로 틀리다는 것...
2008.05.02 02:26:21
첫날처럼님 감사합니다 ^^
긴 글을 읽어주셨네요^^
첫날처럼님께서 우려하시는 것을 저도 동감합니다
극단적인 요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은 강조이지 촛점은 아닙니다
상식이 전혀 없다면 몰라도 지극히 상식을 인식한다면 말씀하신 것처럼 불상을 훼손하거나 따위는 안하겠지요 그보다는 본질을 추구하고 지키려 하고 쫒아가는것에 힘을 기울이겠지요.
그렇지만 때로는 극단적인 마음 자세는 각자가 느끼고는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약간 경직되거나 근본주의 적이고 폐쇄적이고 답답할수는 있지만 신앙속에서 조금 거칠더라도
중요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부드러운것이 모두에게 좋기는 하겠지만 그것만, 이라고 하기에는
삶이 너무 다양하잖아요^^
지금 뭔 소릴 하는지 헷갈립니다 ^^
죄송~ ㅎㅎㅎ
긴 글을 읽어주셨네요^^
첫날처럼님께서 우려하시는 것을 저도 동감합니다
극단적인 요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은 강조이지 촛점은 아닙니다
상식이 전혀 없다면 몰라도 지극히 상식을 인식한다면 말씀하신 것처럼 불상을 훼손하거나 따위는 안하겠지요 그보다는 본질을 추구하고 지키려 하고 쫒아가는것에 힘을 기울이겠지요.
그렇지만 때로는 극단적인 마음 자세는 각자가 느끼고는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약간 경직되거나 근본주의 적이고 폐쇄적이고 답답할수는 있지만 신앙속에서 조금 거칠더라도
중요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부드러운것이 모두에게 좋기는 하겠지만 그것만, 이라고 하기에는
삶이 너무 다양하잖아요^^
지금 뭔 소릴 하는지 헷갈립니다 ^^
죄송~ ㅎㅎㅎ
2008.05.02 10:55:37
우리 기독교인들은 시내에서 "도"를 전하는 사람들의 집요함과 막무가내식의 태도를 불편해 합니다... 또한 우리 기독교인들은 종교 근본주의에 영향을 받아서 자살테러나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그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이전에 인간의 기본적 통념이 그 것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기독교인들은 위에서 보이는 똑같은 그런 패턴의 태도를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입니다... 복음이라는 명목으로...
"극단적인 마음 자세" 라는 말을 보면 작은자님께서 허투루 하신 말씀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극단적 마음 자세, 경직되거나 근본주의적이고 폐쇄적인 태도... 이런 것들은 지금 기독교 주류가 취하고 있는 태도인데요...
그렇다면 무엇에 대해서 그런 태도를 취하느냐? 문화적이고 피상적인 겉 껍데기의 측면에서만 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타종교나 다른 문화에 속한 사람에게는 그 이야기도 듣기 전에, 그 사람의 진실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첨부터 보안모드로 들어간단 말입니다... 그러고는 아예 들을 마음의 자세도 안되어 있단 말입니다... 듣더라도 듣는 척, 이해해주는 척 하다가 기회만 보이면 내 이야기 꺼낼 준비만 하고 있단 말입니다...
결국 이런 태도 때문에 기독교라는 위대한 생명의 종교가 고만 고만한 소종파들 중의 하나로 전락해버리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인간의 common notion 이라는 것이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그 최소한의 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종교적 진리"는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고요...
그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이전에 인간의 기본적 통념이 그 것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기독교인들은 위에서 보이는 똑같은 그런 패턴의 태도를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입니다... 복음이라는 명목으로...
"극단적인 마음 자세" 라는 말을 보면 작은자님께서 허투루 하신 말씀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극단적 마음 자세, 경직되거나 근본주의적이고 폐쇄적인 태도... 이런 것들은 지금 기독교 주류가 취하고 있는 태도인데요...
그렇다면 무엇에 대해서 그런 태도를 취하느냐? 문화적이고 피상적인 겉 껍데기의 측면에서만 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타종교나 다른 문화에 속한 사람에게는 그 이야기도 듣기 전에, 그 사람의 진실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첨부터 보안모드로 들어간단 말입니다... 그러고는 아예 들을 마음의 자세도 안되어 있단 말입니다... 듣더라도 듣는 척, 이해해주는 척 하다가 기회만 보이면 내 이야기 꺼낼 준비만 하고 있단 말입니다...
결국 이런 태도 때문에 기독교라는 위대한 생명의 종교가 고만 고만한 소종파들 중의 하나로 전락해버리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인간의 common notion 이라는 것이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그 최소한의 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종교적 진리"는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고요...
2008.05.03 01:56:06
첫날처럼님의 생각에 동의 합니다^^
제가 뭐 어떤 대표자가 되는것도 아니고 ~ㅎㅎㅎ
개인적인 생각이오니 너무 염려 하시지 마세요^^
기독교 주류...에 제가 포함 되는지는 모르겠어요^^
아마도 그런 영향을 받기는 했겠지요
저도 거리에서 소란스럽게 전도라는 미명하에 벌어지는걸 솔직히
낮이 뜨거운것으로 느껴집니다
이율배반적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종교적 진리에 갇히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제 생각이 죽을때까지 간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언젠가 성령께서 제 마음을 새롬게 열어주신다면
그동안의 제 생각을 사로잡은것이
마치 바울이 배설물로 여겼던것처럼 그렇게 돌변할수 있다고 봅니다
제가 의지적으로 그런다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성령께서 저를 그렇게 바꿔주실것을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겠지요^^
샬롬~
제가 뭐 어떤 대표자가 되는것도 아니고 ~ㅎㅎㅎ
개인적인 생각이오니 너무 염려 하시지 마세요^^
기독교 주류...에 제가 포함 되는지는 모르겠어요^^
아마도 그런 영향을 받기는 했겠지요
저도 거리에서 소란스럽게 전도라는 미명하에 벌어지는걸 솔직히
낮이 뜨거운것으로 느껴집니다
이율배반적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종교적 진리에 갇히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제 생각이 죽을때까지 간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언젠가 성령께서 제 마음을 새롬게 열어주신다면
그동안의 제 생각을 사로잡은것이
마치 바울이 배설물로 여겼던것처럼 그렇게 돌변할수 있다고 봅니다
제가 의지적으로 그런다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성령께서 저를 그렇게 바꿔주실것을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겠지요^^
샬롬~
라고 생각이 들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홈피를 홍보하는것 같은 느낌도 들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