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일 내게 이웃 사랑이 없다면..

일반적으로 우리의 신앙이 날로 성숙하고 있는가에 대한 뚜렷한 징조는 자신의 이기적이던 애정이 점차 질 좋고 순수한 이타적 사랑으로 변화되는 것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남이 잘 되기를 기뻐하는 것이 주님 가르침의 주요 핵심일진대 그동안 우리의 모든 신앙 경주는 혹 남보다 자기 영혼의 아름다움만을 가꾸고 보전하는 것에 열심을 내지 않았던가요? 나 자신의 기쁨과 평화보다는 진실로 다른 사람들이 더 잘되고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마음이 우리 신앙의 명암을 좌우하는 관건이건만 이를 잘못 인식하여 내 영혼의 구원에만 신앙의 모든 초점을 맞춘 채 거기 부어지는 은혜의 감격에 취해있지는 않았던가요?

신구약을 막론하고 성경 전체를 두루 비추고 있는 두 큰 광명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계명입니다. 생각건대 이 계명들이야말로 너무나 존귀한 것이어서 우리 마음 속 거룩한 지성소에 모셔진 채 영원토록 높임을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이라는 실제적 형태로 나타나는 만큼 이웃 사랑 없는 하나님 사랑은 생각할 수조차 없겠지요.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은 영혼의 구원이 교리나 지식 등 이론의 정립을 통해 머릿속 거래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의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는 점에서 참으로 중요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럼에도 만일 우리의 구원이 이 계명을 지키는 것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주님의 가르침을 곡해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사실 이웃 사랑은 장차 우리가 들어가 살게될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로서 우리 눈앞에 놓여져 있는 까닭에 우리 영혼의 구원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생명과도 같이 소중한 계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사정이 있는 고로 주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 라는 새 계명을 마치 마지막 유언을 하듯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당부하신 것입니다.(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그러므로 주님이 주신 서로 사랑하라! 라는 새 계명은 이기적인 자아 사랑에 물든 우리의 옛 사람을 구원하여 능히 새롭게 변화시켜 줄 수 있는 충분한 힘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아버지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삶 속에서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는 그때에 바야흐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은 우리를 저 하나님 나라로 이끌어줄 선지자요 율법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하나님 나라는 모든 이의 기쁨과 행복을 추구하는 나라입니다. 내 옆에 선 사람이 누구이건 그저 그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만족해하는 모습을 보고 이를 함께 즐거워하는 그런 마음 안에 하나님 나라는 깃들어 있습니다. 또 보잘 것 없는 나 자신이지만 이웃의 기쁨과 평화와 행복이 되어주기 위해 작은 노력이나마 기울이는 그곳에 하나님 나라는 찾아듭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에게 희락과 기쁨을 나누어주고 그것을 함께 즐거워하는데 하나님 나라가 건설되는 것은 그곳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사랑의 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기쁨을 서로 나누는 성질이 있는 바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의 행복을 염원하여 자기의 기쁨을 한량없이 그들에게 나누어줍니다. 그 사랑으로부터 기쁨과 희락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흔히 잘못된 생각을 지니고 있듯 성경에 대한 머릿속 지식으로만 하나님께 드려지는 모든 예배 행위들 속에는 하나님 나라가 있지 아니합니다. 다시 말해 말이나 생각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지적 고백이나 시인들 곧 그 안에서 아무리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하나님을 까마득히 높여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할지라도 만일 이웃 사랑의 삶이 그 속에 없다면 그곳은 아직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때로 그곳에 눈물 줄기가 폭포수처럼 흐르고 아무리 은혜와 감격이 넘치더라도 말입니다.

그것은 실제 활동적인 생활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에 형체가 없는 사랑과 믿음에 불과하고 신은 그러한 데서 나오는 찬미나 영광을 받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신은 다만 사람들이 씀씀이(선용) 즉 사랑에서 나온 선 안에서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지요.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에는 마음을 기울이지 않은 채 필요 이상의 몸짓과 과장된 생각으로 뜨거워진 예배는 오히려 주님을 속이는 외식이요 위선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진정한 고향인 하나님 나라는 거기 이웃을 사랑하는 그런 마음 상태를 벗어나 다른 곳에 건설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주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인간의 마음 위에 그 기초가 건설되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이웃 앞에 겸손하여 가장 보잘 것 없고 작은 자로 처신하는 자가 가장 큰 자입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힘도 없고 지혜도 없으며 가지려고도 하지 않는 자가 도리어 이 모두를 얻어 소유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가장 작은 자는 가장 큰 자요 가장 행복한 자입니다.

그러나 최대자가 되려는 목적으로 최소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이상형이 아닙니다. 그것은 최대를 바라는 욕심에 불과하기 때문이지요. 하나님 나라는 다만 다른 사람의 선을 원하고 남의 행복을 위해 봉사하며 또 보수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순수 사랑으로 이웃을 위하는 자들이 모여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세상과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자는 이와 반대입니다. 자기 사랑은 자기만 잘되기 위하여 남의 기쁨을 빼앗아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 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욕심은 이웃에 속한 것을 빼앗아 내 것 삼으려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랑은 남의 즐거움을 깨뜨리거나 설혹 나누어주려는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남을 위하여서가 아니고 자기를 위하여 그리하는 것입니다. 이 악한 사랑의 성질은 다른 사람의 즐거움이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않을 때에는 남에게 주지 않는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자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선한 삶을 사는 자들! 만일 이들이 하나님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다면 하늘 아래 인생을 살다간 수많은 사람 중 그 누구도 하나님 나라에 속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그 주인의 성품을 따라 사랑과 진리로 통치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세상 수많은 신들과 그들의 왕국 중에서 오직 주님과 그의 나라만을 우리가 높이 받들어 경배하는 까닭은 그분의 통치 방식이 참으로 의롭고 선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신이요 참 하나님이 되시고 오직 그분만이 참 사랑과 참 진리로 그 나라 백성을 다스리십니다.

이 세상은 남의 고통에는 관심 없이 오직 내 기쁨만을 우선 순위로 삼는, 소위 자기 사랑이라는 무섭고 잔인한 임금 아래 지배를 받고 있는데 반하여 주님이 건설하신 하나님 나라는 다른 이의 행복으로부터 기쁨이 나에게 전달되어지는 까닭에 이 세상 여느 왕국과 전연 다른 통치를 받습니다. 거기서는 다른 이가 행복하면 할수록 내 기쁨 또한 그만큼 더 증대되어 궁극에 모든 사람이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참으로 사랑에서 나온 선에 의해 질서가 유지되는 나라입니다.

아직 이 세상에 살아있는 가운데 우리 마음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든지 아니면 우리가 죽어서 맞게될 하나님 나라든지 간에 아마 이웃 사랑의 선이 없는 하나님 나라를 우리는 도대체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더불어 우리 신앙을 떠받쳐주는 두 큰 기둥 중의 하나인 것이지요. 하나님 나라가 여기 이웃 사랑 안에 건설된다는 사실은 우리의 구원이 바로 저와 같은 이웃 사랑의 선한 삶 위에서만 이룩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에 대한 우리의 전반적인 생각들은 이웃 사랑보다 자기 영혼의 구원이라는 관점으로만 그것을 바라보며 자기 영혼을 잘되게 하려는 목적 하에 신앙의 모든 노력을 투자하는 수준이기 때문에 성경의 각 구절도 그런 생각을 뒤받침 하는 식으로 읽힐 수밖에 없습니다. 이로 인해 자기 영혼의 구원만을 위한 모든 몸부림이 마치 주님의 순수하고 참된 신앙인양 거꾸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지요.

마음의 땅이 이렇게 메마른데 어찌 주님의 역사가 있겠습니까? 이는 우리가 자기 사랑에 이끌려 주님의 가르침인 인애(이웃 사랑)를 소홀히 다룬 탓입니다. 신앙의 방법과 목적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고 이래서는 궁극에 자기 영혼의 욕심만을 채우는 세속적 종교로 전락할 뿐입니다. 이러한 신앙 형태는 눈 먼 것과 병든 제물 등으로 주님께 드리는 헛된 제사에 불과한 것이어서 그것은 거룩한 신을 섬기는 자세가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는 자세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껏 자기 영혼이 잘되게 하기 위하여 애를 써왔으나 결과적으로 자기 사랑의 염려만 더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자신을 위한 신앙의 노력은 자신을 망하게 하지만 남에게 행복을 주려는 신앙의 노력은 도리어 나 자신을 잘 되게 하는 법입니다. 자신에게 좋은 것을 채우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신을 위하지 아니하고 남을 위하는 것으로부터 유익한 것이 자신에게 돌아오도록 하는 이 한 가지 천국의 질서를 우리는 잊고 있었던 것이지요.

진실한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리 내면에 거하는 많은 악들이 먼저 버려져야 할 것입니다. 악이 제거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우리의 애정이 온통 자기 사랑에 둘러싸여 있게 되고 설령 여기서 선한 생각과 행위가 나온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외관만 선으로 금박 입혀진 것일 뿐 그 내면의 진실은 궁극에 자기를 위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른 바 자기 사랑이 주님과 이웃 사랑이라는 빛으로 위장되어 나타난 것이지요.

그럼에도 이를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성벽 저 너머 적들을 경계해야할 우리의 이해성이 악에 물든 애정에 영향을 받아 눈이 멀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랑이라는 악에 지배를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의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깊은 영적 세계의 빛에는 눈이 감기고 보다 외적이고 감각적인 빛에만 눈이 열리게 됩니다. 이 상태에서는 사물의 본질보다는 그 겉모습만을 진실인양 간주하게 되고 자기 마음의 본질, 그 속을 들여다보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이렇듯 신앙이 위장된 선으로 감싸져 있을 때 우리의 신앙은 열심히 주를 좇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와 정반대로 자기 사랑의 욕심을 키우고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우리는 특별히 경계해야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기본 원리는 악을 버리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 내면에 거하는 악으로 인해 우리의 사상까지 거기 물들어버리면 자칫 우리의 신앙 생활 그 모두가 온통 나를 위한 것 투성이로 변질되어 마침내 하나님 나라의 기초까지 흔들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주님을 믿고 사랑하며, 성경 또한 나를 위하여 읽고, 말씀 속 진리도 내 기쁨을 위하여 묵상하며,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것도 나를 위하여 하며, 기도와 예배도 나를 위하고, 멸시 천대를 받으려는 것도 낮아지려는 것도 또 겸손하고 온유하려는 것도, 분을 내지 않고 이웃을 미워않으며 그들을 사랑하려는 것도 이 모두가 나를 위함을 최우선적으로 목표 삼고 있다면 그 자체가 벌써 주님 말씀을 그 근본부터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웃을 위함보다도 그리고 주님을 위함보다도 나를 위함이 가장 강한 힘으로 내 마음을 지배하는 상태에서는 우리의 생각과 애정의 열심에서 우러난 모든 것들이 진실로 주님을 향해있는 듯 해도 실상은 그 열심의 최종 목표는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 자신의 행복과 기쁨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신앙 형태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자기 사랑의 악만 몸과 영혼에 축적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히려 이런 신앙에 더 큰불을 짚이지 못해 몸부림치고 있지나 않는지요? 혹 그런 신앙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장받을 꿈에 부풀어 있지나 않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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