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 <열린 토론실>입니다. 다비안들의 부담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채>와는 달리, 보다 진지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나 주제를 나누고 싶은 분들을 위한 게시판입니다. 가급적 예의를 갖추시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대화는 다비안을 비롯한 여러 네티즌들의 온라인 상에서의 자유로운 것이기에 그 방향과 정체성이 반드시 다비아와 일치하지는 않음을 밝혀둡니다.
글 수 253
기독교인과 제사(祭祀)
1.서론
명절만 돌아오면 제사와의 전쟁(戰爭)이 시작 됩니다.
제사를 둘러싼 전쟁은 급기야 가족간의 분열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형제나 부모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하는 일도 비일비재(非一非再)합니다.
제사 문제에 있어서의 해결책을 성경에서는 얻을 수 없을까.
어느 종교인들의 토론회에서 뒹굴기 시작한 5여 년 전, 마침 추석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제사 지내러 고향 간다는 타종교인들의 말에 “성경적인 제사는 없을까?” 라는 의문(疑問)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농담과 더불어 비아냥거리는 글을 그 사이트에 올리게 되었는데 명절이 될 때마다 그 글 생각이 나서 몇 개의 사이트에 올리곤 했지요.
그러나 명절이 지나가면서 글을 올렸으니 싱거운 내용일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가 글로 표현 하는 솜씨도 없고 또 기독교인이 볼 때도 너무 의외의 내용이었기 때문에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한 글을 올린 목적은 제사를 완전히 뿌리 뽑는데 함 사용해 보자는 의도였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이번 명절 때는 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서 미리 함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잘못된 글이면 비판해 주시고 합당한 글이면 널리 사용하시는 것이 선한 일이라고 봅니다.
일개(一介) 집사(執事)가 무슨 연구를 할 수 있겠습니까 만은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도통(道通)해야 함이 정상적(正常的)이라고 판단하기에 오늘도 내일도 죽을 때까지 묵상하고 또 묵상하는 것입니다.
2. 이름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이름”에 대한 의미를 좀 고찰(考察)해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름이라는 단어가 성경에는 1,000여 번이나 있으니 생각 보다 많습니다. 물론 숫자상의 의미가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만은 일단은 우리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만은 분명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무심코 넘겨 버리고 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항상 기도하면서도 이름의 의미는 무심코 넘어 갑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입니까!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요14:26)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요16:24)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요5:43)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10:20)
이처럼 신약에서만 “이름”이라는 단어가 170여 번이나 등장합니다.
(이름이란?)
***모든 생물이나 사물에게는 이름이 있습니다.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모든 것에도 이름이 있습니다.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이름하고는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이름이 없다면 도무지 아무 표현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름은 곧 복이었습니다. 아담이 이름을 지어 준 것은 복을 나누어 준 것입니다.
(지금 작명(作名) 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이름을 짓는 축복권을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오래 전에 끝난 일입니다. 이제 축복 받을 수 있는 이름은 새롭게 주신 예수라는 이름 하나 뿐입니다. 다른 것에 이름을 줄 때는 그냥 부르기 좋을 대로 붙여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가시적인 이름, 특히 사람의 이름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건축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름 안에는 그에 해당하는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인격과 명예와 재산과 경력과 업적과 자존심과 모양과 성질 등 모든 것이 그의 이름 안에 담겨집니다.
행3:16에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에서의 “이름”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사랑과 기쁨 등 예수님의 모든 것이 포괄(包括)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름은 시공(時空)을 초월합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나타내십니다.
지금도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 받고(요12:12)
지금도 그의 이름이 영광을 얻고(살후1:12)
지금도 그의 이름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물론 일반 사람들에게도 해당됩니다. 한국에 있으면서도 미국에 있는 사람(이름)에 대하여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이름이란 어디로 가든지 항상 따라 다닙니다.
***사람들마다 이름을 바라보는 각도가 다 다릅니다.
감사와 기쁨과 비난과 마음의 상태 등의 경중(輕重)에 따라서 모든 이름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의 시각은 제각각입니다.
***이름은 시시때때로 변합니다. 특히 사람의 이름은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은 더 변하고 있습니다.
사이트에 무슨 글을 적었다가도 다음 날 살며시 열어 보는 것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이 어떻게 변했나 하고 열어 보는 것입니다.
모든 언동(言動)이나 표정도 이름으로 나타내는 현상입니다.
***이름은 영원합니다.
아무도 자신의 이름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름을 바꾼다 해도 그 본질적인 이미지는 영원히 남습니다)
구원 받은 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계22:4)
이외에도 이름에 대한 연구를 해 보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3. 이름과 제사
그럼 이름과 제사와의 관계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는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 건데 여기서 뚝!!
전 제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거든요. 전문적으로 배운 것도 없고 또 모태신앙이라서 제사상 차린 것을 제대로 본 적이 함 없으니.......
조상 섬기는 제사가 불교에 짬뽕된 것이 한국의 제사라는 정도만 알고 있죠.
또 숭배하는 차원에서 제사지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공경한다는 차원에서 제사를 지내는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설마 제삿밥 얻어먹으려고 하는 사람은 없을거고.....
아뭏튼 아마 개판인 것이 제사인 것 같습니다.
제사 하는 방식도 잘 바뀌는 것 같고, 지역에 따라 다르고 또 집안마다 다 다르니까요.
이게 제가 제사에 대하여 알고 있는 전부입니다만 단 한 가지는
조상의 얼(정신)을 기억하는데 의미를 두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왜 제사의 중심이 조상을 기억하는 것이냐 하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니까!
조상의 생전을 기억하고 추억하는 것이 제사의 핵심이 될 것입니다.
그러하다면 조상을 기억한다는 이 점이 기독교의 제사와 이방인의 제사가 만날 수 있는 접촉점이 될 것이고 서로 간에 타협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기독교의 제사
기독교의 “믿음”을 어떻게 해서 “제사”라고 하는 위치까지 끌어 올 수 있는냐가 관건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가능합니다.
물론 기독교의 제사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잘 생각 해 보십시오.
성경에는 하나님을 믿은 믿음의 선배들을 많이 소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은 믿음의 선배들의 이름을 거론(擧論)하듯이 조상의 이름을 예배 시간에도 거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조상의 이름은 성경에만 기록 안 되었다 뿐이지 다 같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기록된 그들은 믿음의 본보기이며 믿음의 완성이 아닙니다)
성경의 믿음들이나 조상의 믿음들이나 예수 안에서 같은 믿음이기 때문에,
성경 인물의 믿음들을 들추어내듯이 조상의 믿음을 들추어내어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한다는 것은 아무 이상이 없을 것입니다.
삭개오를 등장시켰든 야곱을 등장시켰든 다윗을 등장시켰든 김 아무개를 등장시켰든 박 아무개를 등장시켰든 간에 그들을 사용하여 예수님을 부각시켰다면 그 설교는 성공한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이 안 된 순교한 사람들의 믿음은 강조하면서 조상의 믿음은 강조하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예배 방법을 사용하여 이방제사를 대체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5. 불신자와의 해결방안
그래서 문제는 믿지 않는 가족과의 관계입니다.
집안 식구가 다 믿는다면 안 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가족에게는 제사의 현장에서 어떻게 이해(理解)시키느냐가 본격적인 관건(關鍵)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조상을 기억한다는 의미에서 “이름”이라는 제물을 부각시키는 것입니다.
불신자 형제에게 “나도 돌아가신 부모님을 잊지 못하고 존경한다. 너는 너 방식대로 제사 지내라.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까 내 방식대로 제사를 지내겠다”라고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방식”부터는 집안 분위기가 험악해 질 것입니다.
“내 방식”이란 제사 순서나 내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충돌은 “음식을 차리지 않는다”는 것과 “절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게 제사냐 하면서 당최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꼭 불리한 것만은 아닙니다.
제사 순서를 주보처럼 제법 그럴듯하게 만들어서 보여 주는 것입니다. 특히 고인의 업적(業績)을 적은 순서와 업적내용을 보면 잃어버린 상대방의 이성(理性)을 좀 얌전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조직을 갖춘 체계(體系)가 있으면 좀 이해해 줄 것이고 그러한 준비는 일단 유리한 조건(條件)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음식 문제와 절하기)
원래 제사제물을 준비 하는 것은 타인이 준비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것을 가지고 자기에게 제사 지내도록 하는 것이 제사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것을 우리에게 제물로 주셨습니다.
아브라함도 자신의 것을 제물로 바쳤습니다(하나님이 이삭을 현실적으로 받지 아니하신 것은 무의미한 제사이며 모순이기 때문)
그런데 이방인의 제사는 타인이나 자손이 제물을 준비하는데 이것은 참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후손들에게 물려 준 것이 무엇입니까?
찢어지게 가난한 후손에게 물려 준 것이란 푸짐한 제사상입니다. 자신은 땅 속에서 먹지도 못할......자손을 아주 말려 죽이려고 작정하고 떠난 겁니다.ㅋㅋ
자신이 제사 받고 싶으면 당연히 자신의 것(업적;이름)을 준비 해 놓고 죽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듯이 자손도 조상이 남겨 준 이름을 가지고 제사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당한 제사가 될 것입니다.
반대하는 가족이 차례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막 달려든다면
“조상이 제사 지내라고 남겨 주신 것은 그 음식이 아니라 그 분의 일생(이름)이다”라고 하면서 막 어거지를 부리는 겁니다.
그러면서
“니는 그 방에서 제사지내라 나는 이방에서 제사 지낸다” 하면서 각각 따로 제사 지내는 겁니다.
그래도 방해 하면
“나도 너를 귀찮게 하지 않을테니까 너도 나를 귀찮게 하지마라”하면서 떽깔 부릴 수밖에 없죠.
“니가 조상을 극진히 모신다고 하기 때문에 나도 너를 괴롭히지 않는다. 그러니 너도 조상을 잘 모시겠다는 나를 괴롭히지 마라” 라고 말하면 사실 싸움은 끝낼 수 있는 겁니다.
“원칙은 우리가 했던 과거의 제사를 다 무효화 시키고 내가 하는 방식으로 바꿔야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서로가 좋아 하는 제사 하는 방식으로 서로 조금씩 양보 하자”라고 말하는 것이 막무가내로 막 말하는 것 같지만,
막무가내로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는 것 보다는 이런 어거지 말이라도 준비 하면 상대방으로 하여금 무언가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주는 것입니다.
무턱대고 “제사 지내지 않겠다”하면 바로 전쟁선포가 되지만,
이러저러한 말로 다독거리는 것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를 이해시킬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절을 하는 문제는 변명(辨明)이 궁색(窮色)하군요.
“돌아가신 분에게 절을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라든지
“조상의 정신을 항상 기억하는 제사다”라는 말로 억지 부리는 것은 좀 밀릴 것입니다.
지혜로우신 분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6. 포괄적인 작전구상
작전1 : 추석 몇 개월 전에 선물 공세를 한다.
작전2 : 한 달 쯤 전에 편지를 보내되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고생과 연민과 같은 내용도 적지만, 제사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첨가 하고 작성한 제사예식도 함께 보낸다.
이렇게만 한다면 최소한 다툼의 대부분은 넘어갈 것입니다.
이상, 제사현실을 모르는 사람이지만 소견(所見)을 펼쳐 보았습니다.
************** 정리 **********************
이름은 그에게 있어서의 모든 것이다.
제사란 기억케 해 주는 것이므로 이방제사와 타협할 수 있는 접촉점은 이름이다.
이름은 제물이다. 제물은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
사전(事前)에 미리 준비 한다(벧전3:15)
1.서론
명절만 돌아오면 제사와의 전쟁(戰爭)이 시작 됩니다.
제사를 둘러싼 전쟁은 급기야 가족간의 분열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형제나 부모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하는 일도 비일비재(非一非再)합니다.
제사 문제에 있어서의 해결책을 성경에서는 얻을 수 없을까.
어느 종교인들의 토론회에서 뒹굴기 시작한 5여 년 전, 마침 추석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제사 지내러 고향 간다는 타종교인들의 말에 “성경적인 제사는 없을까?” 라는 의문(疑問)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농담과 더불어 비아냥거리는 글을 그 사이트에 올리게 되었는데 명절이 될 때마다 그 글 생각이 나서 몇 개의 사이트에 올리곤 했지요.
그러나 명절이 지나가면서 글을 올렸으니 싱거운 내용일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가 글로 표현 하는 솜씨도 없고 또 기독교인이 볼 때도 너무 의외의 내용이었기 때문에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한 글을 올린 목적은 제사를 완전히 뿌리 뽑는데 함 사용해 보자는 의도였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이번 명절 때는 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서 미리 함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잘못된 글이면 비판해 주시고 합당한 글이면 널리 사용하시는 것이 선한 일이라고 봅니다.
일개(一介) 집사(執事)가 무슨 연구를 할 수 있겠습니까 만은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도통(道通)해야 함이 정상적(正常的)이라고 판단하기에 오늘도 내일도 죽을 때까지 묵상하고 또 묵상하는 것입니다.
2. 이름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이름”에 대한 의미를 좀 고찰(考察)해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름이라는 단어가 성경에는 1,000여 번이나 있으니 생각 보다 많습니다. 물론 숫자상의 의미가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만은 일단은 우리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만은 분명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무심코 넘겨 버리고 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항상 기도하면서도 이름의 의미는 무심코 넘어 갑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입니까!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요14:26)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요16:24)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요5:43)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10:20)
이처럼 신약에서만 “이름”이라는 단어가 170여 번이나 등장합니다.
(이름이란?)
***모든 생물이나 사물에게는 이름이 있습니다.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모든 것에도 이름이 있습니다.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이름하고는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이름이 없다면 도무지 아무 표현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름은 곧 복이었습니다. 아담이 이름을 지어 준 것은 복을 나누어 준 것입니다.
(지금 작명(作名) 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이름을 짓는 축복권을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오래 전에 끝난 일입니다. 이제 축복 받을 수 있는 이름은 새롭게 주신 예수라는 이름 하나 뿐입니다. 다른 것에 이름을 줄 때는 그냥 부르기 좋을 대로 붙여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가시적인 이름, 특히 사람의 이름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건축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름 안에는 그에 해당하는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인격과 명예와 재산과 경력과 업적과 자존심과 모양과 성질 등 모든 것이 그의 이름 안에 담겨집니다.
행3:16에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에서의 “이름”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사랑과 기쁨 등 예수님의 모든 것이 포괄(包括)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름은 시공(時空)을 초월합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나타내십니다.
지금도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 받고(요12:12)
지금도 그의 이름이 영광을 얻고(살후1:12)
지금도 그의 이름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물론 일반 사람들에게도 해당됩니다. 한국에 있으면서도 미국에 있는 사람(이름)에 대하여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이름이란 어디로 가든지 항상 따라 다닙니다.
***사람들마다 이름을 바라보는 각도가 다 다릅니다.
감사와 기쁨과 비난과 마음의 상태 등의 경중(輕重)에 따라서 모든 이름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의 시각은 제각각입니다.
***이름은 시시때때로 변합니다. 특히 사람의 이름은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은 더 변하고 있습니다.
사이트에 무슨 글을 적었다가도 다음 날 살며시 열어 보는 것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이 어떻게 변했나 하고 열어 보는 것입니다.
모든 언동(言動)이나 표정도 이름으로 나타내는 현상입니다.
***이름은 영원합니다.
아무도 자신의 이름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름을 바꾼다 해도 그 본질적인 이미지는 영원히 남습니다)
구원 받은 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계22:4)
이외에도 이름에 대한 연구를 해 보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3. 이름과 제사
그럼 이름과 제사와의 관계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는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 건데 여기서 뚝!!
전 제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거든요. 전문적으로 배운 것도 없고 또 모태신앙이라서 제사상 차린 것을 제대로 본 적이 함 없으니.......
조상 섬기는 제사가 불교에 짬뽕된 것이 한국의 제사라는 정도만 알고 있죠.
또 숭배하는 차원에서 제사지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공경한다는 차원에서 제사를 지내는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설마 제삿밥 얻어먹으려고 하는 사람은 없을거고.....
아뭏튼 아마 개판인 것이 제사인 것 같습니다.
제사 하는 방식도 잘 바뀌는 것 같고, 지역에 따라 다르고 또 집안마다 다 다르니까요.
이게 제가 제사에 대하여 알고 있는 전부입니다만 단 한 가지는
조상의 얼(정신)을 기억하는데 의미를 두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왜 제사의 중심이 조상을 기억하는 것이냐 하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니까!
조상의 생전을 기억하고 추억하는 것이 제사의 핵심이 될 것입니다.
그러하다면 조상을 기억한다는 이 점이 기독교의 제사와 이방인의 제사가 만날 수 있는 접촉점이 될 것이고 서로 간에 타협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기독교의 제사
기독교의 “믿음”을 어떻게 해서 “제사”라고 하는 위치까지 끌어 올 수 있는냐가 관건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가능합니다.
물론 기독교의 제사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잘 생각 해 보십시오.
성경에는 하나님을 믿은 믿음의 선배들을 많이 소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은 믿음의 선배들의 이름을 거론(擧論)하듯이 조상의 이름을 예배 시간에도 거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조상의 이름은 성경에만 기록 안 되었다 뿐이지 다 같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기록된 그들은 믿음의 본보기이며 믿음의 완성이 아닙니다)
성경의 믿음들이나 조상의 믿음들이나 예수 안에서 같은 믿음이기 때문에,
성경 인물의 믿음들을 들추어내듯이 조상의 믿음을 들추어내어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한다는 것은 아무 이상이 없을 것입니다.
삭개오를 등장시켰든 야곱을 등장시켰든 다윗을 등장시켰든 김 아무개를 등장시켰든 박 아무개를 등장시켰든 간에 그들을 사용하여 예수님을 부각시켰다면 그 설교는 성공한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이 안 된 순교한 사람들의 믿음은 강조하면서 조상의 믿음은 강조하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예배 방법을 사용하여 이방제사를 대체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5. 불신자와의 해결방안
그래서 문제는 믿지 않는 가족과의 관계입니다.
집안 식구가 다 믿는다면 안 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가족에게는 제사의 현장에서 어떻게 이해(理解)시키느냐가 본격적인 관건(關鍵)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조상을 기억한다는 의미에서 “이름”이라는 제물을 부각시키는 것입니다.
불신자 형제에게 “나도 돌아가신 부모님을 잊지 못하고 존경한다. 너는 너 방식대로 제사 지내라.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까 내 방식대로 제사를 지내겠다”라고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방식”부터는 집안 분위기가 험악해 질 것입니다.
“내 방식”이란 제사 순서나 내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충돌은 “음식을 차리지 않는다”는 것과 “절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게 제사냐 하면서 당최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꼭 불리한 것만은 아닙니다.
제사 순서를 주보처럼 제법 그럴듯하게 만들어서 보여 주는 것입니다. 특히 고인의 업적(業績)을 적은 순서와 업적내용을 보면 잃어버린 상대방의 이성(理性)을 좀 얌전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조직을 갖춘 체계(體系)가 있으면 좀 이해해 줄 것이고 그러한 준비는 일단 유리한 조건(條件)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음식 문제와 절하기)
원래 제사제물을 준비 하는 것은 타인이 준비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것을 가지고 자기에게 제사 지내도록 하는 것이 제사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것을 우리에게 제물로 주셨습니다.
아브라함도 자신의 것을 제물로 바쳤습니다(하나님이 이삭을 현실적으로 받지 아니하신 것은 무의미한 제사이며 모순이기 때문)
그런데 이방인의 제사는 타인이나 자손이 제물을 준비하는데 이것은 참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후손들에게 물려 준 것이 무엇입니까?
찢어지게 가난한 후손에게 물려 준 것이란 푸짐한 제사상입니다. 자신은 땅 속에서 먹지도 못할......자손을 아주 말려 죽이려고 작정하고 떠난 겁니다.ㅋㅋ
자신이 제사 받고 싶으면 당연히 자신의 것(업적;이름)을 준비 해 놓고 죽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듯이 자손도 조상이 남겨 준 이름을 가지고 제사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당한 제사가 될 것입니다.
반대하는 가족이 차례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막 달려든다면
“조상이 제사 지내라고 남겨 주신 것은 그 음식이 아니라 그 분의 일생(이름)이다”라고 하면서 막 어거지를 부리는 겁니다.
그러면서
“니는 그 방에서 제사지내라 나는 이방에서 제사 지낸다” 하면서 각각 따로 제사 지내는 겁니다.
그래도 방해 하면
“나도 너를 귀찮게 하지 않을테니까 너도 나를 귀찮게 하지마라”하면서 떽깔 부릴 수밖에 없죠.
“니가 조상을 극진히 모신다고 하기 때문에 나도 너를 괴롭히지 않는다. 그러니 너도 조상을 잘 모시겠다는 나를 괴롭히지 마라” 라고 말하면 사실 싸움은 끝낼 수 있는 겁니다.
“원칙은 우리가 했던 과거의 제사를 다 무효화 시키고 내가 하는 방식으로 바꿔야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서로가 좋아 하는 제사 하는 방식으로 서로 조금씩 양보 하자”라고 말하는 것이 막무가내로 막 말하는 것 같지만,
막무가내로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는 것 보다는 이런 어거지 말이라도 준비 하면 상대방으로 하여금 무언가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주는 것입니다.
무턱대고 “제사 지내지 않겠다”하면 바로 전쟁선포가 되지만,
이러저러한 말로 다독거리는 것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를 이해시킬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절을 하는 문제는 변명(辨明)이 궁색(窮色)하군요.
“돌아가신 분에게 절을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라든지
“조상의 정신을 항상 기억하는 제사다”라는 말로 억지 부리는 것은 좀 밀릴 것입니다.
지혜로우신 분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6. 포괄적인 작전구상
작전1 : 추석 몇 개월 전에 선물 공세를 한다.
작전2 : 한 달 쯤 전에 편지를 보내되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고생과 연민과 같은 내용도 적지만, 제사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첨가 하고 작성한 제사예식도 함께 보낸다.
이렇게만 한다면 최소한 다툼의 대부분은 넘어갈 것입니다.
이상, 제사현실을 모르는 사람이지만 소견(所見)을 펼쳐 보았습니다.
************** 정리 **********************
이름은 그에게 있어서의 모든 것이다.
제사란 기억케 해 주는 것이므로 이방제사와 타협할 수 있는 접촉점은 이름이다.
이름은 제물이다. 제물은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
사전(事前)에 미리 준비 한다(벧전3:15)
2007.06.24 21:12:06
담석은 벌써 지쳐서 다운 되었답니다. 또 언젠가 회복 되면 도전 하겠지만 설마 이 체구를 이길 수 있을까요? ㅎㅎㅎ 글구 두 군데를 다 보았습니다. 포석식으로 일독 했는데 이유는 당최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안이 없는 문제는 불필요한 것입니다. 모여라 해서 모였더니 , 해결은 없고 딴 얘기나 잔뜩 하고 헤어지는 모임...... 얼마나 허탈한 지 .... 아마 구도자님은 그런 허탈은 맛본 경험이 없는가 봅니다. 전 사실 제사상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지만 명절 때만 되면 제사 문제를 해결 해 보겠다고 지상이나 라디오나 심지어 텔레비에서도 한숨소리만 나오니 성경적인 입장에서 줄타기 해결 방안을 발굴 해 본 것입니다. 현장에 접근 해서 적용될 수 있는 대안을 제시 해 본 것입니다. 그래서 명절 때마다 두 세군데씩 글을 올렸지요. 그런데 시큰둥 하더군요. 아마 연탄장수가 말하니까 그런가 부다 하면서 자괴감에 빠져 보려다가 참았답니다. 우리 좀 잘 해 봅시다.
2007.06.24 22:15:03
인생해답 선생님, 좋은, 귀한 글인데 왜 필요 이상의 겸손이십니까^^
연탄장수 분께서 말씀하셔서 다들 시큰둥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이 웬만하면 머리 싸매는 토론, 논리적인 얘기,
나아가 논쟁 등은 하지 않으려 들고, 별 관심도 없어서 그렇습니다.
선생님 이상으로 말씀하실 분이 안 계셨던 거겠지요.
게다가, 말씀하셨다시피, 한국 개신교회의 상황 속에서는,
현실적으로 뾰족한 특효 방안이 나오기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구요.
조상 제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대할 것인가는,
결국, 신앙관이라는 본질적인 차원으로 귀결되는데,
대다수 한국 개신교의 보수근본주의 신앙에 있어,
조상 제사란, 타협이 아예 불가능하다시피 한 문제거든요.
사고의 신축성(변통하는 융통성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이 존재하지 않고,
한국의 효 문화와 조상 숭배 내지 공경 전통에 대한 다각도의 연구와 고찰도,
보수 진영의 교단들 및 신학계에서는 아예 얘기를 꺼내는 것조차 자유주의다, 배교적이다,
그렇게 정죄하고 나와버리니,
해결 방법이 없고, 해결의 길도 차단하고 있는 겁니다.
종교를 포함한 문화란, 이성과 논리 이전에 정서와 감성의 문제인데,
비보수 신학계에서 내놓는 대안들이라든지,
인생해답 선생님께서 올리신 글은, 논리적이거든요.
보수 신앙에 터해 계신 분들, 더욱이 목회자와 신학자, 교단의 지도층 분들께서는,
이런 '논리'에 절대로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이름'에 착안하신 것은, 언어와 의미에 주목하셨다는 건데,
그런 거, 사람들 골치아파하고, 심지어 불신앙적이라 하지 않으면 다행일 겁니다.
(실상 전혀 불신앙적이지 않은데도)
저도 갑갑합니다.
연탄장수 분께서 말씀하셔서 다들 시큰둥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이 웬만하면 머리 싸매는 토론, 논리적인 얘기,
나아가 논쟁 등은 하지 않으려 들고, 별 관심도 없어서 그렇습니다.
선생님 이상으로 말씀하실 분이 안 계셨던 거겠지요.
게다가, 말씀하셨다시피, 한국 개신교회의 상황 속에서는,
현실적으로 뾰족한 특효 방안이 나오기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구요.
조상 제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대할 것인가는,
결국, 신앙관이라는 본질적인 차원으로 귀결되는데,
대다수 한국 개신교의 보수근본주의 신앙에 있어,
조상 제사란, 타협이 아예 불가능하다시피 한 문제거든요.
사고의 신축성(변통하는 융통성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이 존재하지 않고,
한국의 효 문화와 조상 숭배 내지 공경 전통에 대한 다각도의 연구와 고찰도,
보수 진영의 교단들 및 신학계에서는 아예 얘기를 꺼내는 것조차 자유주의다, 배교적이다,
그렇게 정죄하고 나와버리니,
해결 방법이 없고, 해결의 길도 차단하고 있는 겁니다.
종교를 포함한 문화란, 이성과 논리 이전에 정서와 감성의 문제인데,
비보수 신학계에서 내놓는 대안들이라든지,
인생해답 선생님께서 올리신 글은, 논리적이거든요.
보수 신앙에 터해 계신 분들, 더욱이 목회자와 신학자, 교단의 지도층 분들께서는,
이런 '논리'에 절대로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이름'에 착안하신 것은, 언어와 의미에 주목하셨다는 건데,
그런 거, 사람들 골치아파하고, 심지어 불신앙적이라 하지 않으면 다행일 겁니다.
(실상 전혀 불신앙적이지 않은데도)
저도 갑갑합니다.
2007.06.24 22:45:19
ㅎㅎ...인생해답 님!
담석이란 친구도 그런 여유를 부릴줄 아는군요.
아주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저도 아직 제사문제에 대해선 똑 부러진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수준이지만,
그러한 글들을 읽고 결코 '허탈'하지 않았답니다.
여러 관점에서 배우고 느낀 바가 있으니까요.
이왕 훑어 보신김에 사랑채 712번글과 384번 글을 한번만 더 읽어 보시면
위의 무명재님의 갑갑하신 심정....충분히 이해가 가실겁니다.
특히 384번 글에는 정목사님의 견해도 있으신데,
저는 거기서 일차적인 답안을 찾았거든요.
'우리 좀 잘해보자'는 님의 말씀에 화답하자면
'우리 함께 공부해 봅시다!'가 되겠네요.
편안한 밤 되시길~^^*
담석이란 친구도 그런 여유를 부릴줄 아는군요.
아주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저도 아직 제사문제에 대해선 똑 부러진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수준이지만,
그러한 글들을 읽고 결코 '허탈'하지 않았답니다.
여러 관점에서 배우고 느낀 바가 있으니까요.
이왕 훑어 보신김에 사랑채 712번글과 384번 글을 한번만 더 읽어 보시면
위의 무명재님의 갑갑하신 심정....충분히 이해가 가실겁니다.
특히 384번 글에는 정목사님의 견해도 있으신데,
저는 거기서 일차적인 답안을 찾았거든요.
'우리 좀 잘해보자'는 님의 말씀에 화답하자면
'우리 함께 공부해 봅시다!'가 되겠네요.
편안한 밤 되시길~^^*
2007.06.26 01:34:50
아! 오늘 기분은 붕 뜨다가 마음이 탁해졌습니다. 졸지에 후배 두 사람도 생기고 논리적이고 어쩌구저쩌구 춤을 추다가.... 느닷없이 한 밤중에 경기도 방면 어느 시골 교회 쪽에서 건축업자가 왔는데.... 목사님한테 막 욕 하는거 있죠. 첨엔 사체업자인줄 알았지요. 이전에 계시던 교회에서의 건축비 땜에 싸우는겁니다.
온갖 욕거리는 다하는데 집사들은 촌사람들이라 찌그러지고.... 이 사람들은 아마 일부러 창피 주려고 온 모양입니다.
전 이 교회에 온지도 1년 조금 되었을 뿐이죠. 그것도 마누라 땜시 가 주는거죠. 교회들이 뭐 그저 그렇고 그러니까요. 전 무교회주의자는 절대 아니지만 이 부근에는 갈만한 교회가 없어서 잘 안가죠.... 건데 마누라를 비롯하여 여자들은 분위기에 약하니까 내 여자 잘 믿으라고 가 주는거죠.
목사님도 신경 돋구는 얘기를 하시니 그 사람들은 더 열 올라서 욕이 계속 나오고..... 교인들은 말 못하고 인생해답도 닉네임 답게 얘기를 잘해 줄끼라고 입 열었지만 그 사람들은 막무가네였죠. 그래서 가만 두었죠. 두 사람 다 지치라고 .....목이 쉬었는지 제 풀에 꺽어져서 결국에는 갔습니다. 어느 쪽 말이 맞는지는 이전에 있던 재정부장을 만나면 좀 더 알아지겠지만......그래서 아무 생각도 안나고 마음이 탁탁해 져서 마음 좀 달래는 중입니다. #@$! 요새 교회 왜 그렇습니까? 누구 말마따나 "이거 말이 됩니까?!"
온갖 욕거리는 다하는데 집사들은 촌사람들이라 찌그러지고.... 이 사람들은 아마 일부러 창피 주려고 온 모양입니다.
전 이 교회에 온지도 1년 조금 되었을 뿐이죠. 그것도 마누라 땜시 가 주는거죠. 교회들이 뭐 그저 그렇고 그러니까요. 전 무교회주의자는 절대 아니지만 이 부근에는 갈만한 교회가 없어서 잘 안가죠.... 건데 마누라를 비롯하여 여자들은 분위기에 약하니까 내 여자 잘 믿으라고 가 주는거죠.
목사님도 신경 돋구는 얘기를 하시니 그 사람들은 더 열 올라서 욕이 계속 나오고..... 교인들은 말 못하고 인생해답도 닉네임 답게 얘기를 잘해 줄끼라고 입 열었지만 그 사람들은 막무가네였죠. 그래서 가만 두었죠. 두 사람 다 지치라고 .....목이 쉬었는지 제 풀에 꺽어져서 결국에는 갔습니다. 어느 쪽 말이 맞는지는 이전에 있던 재정부장을 만나면 좀 더 알아지겠지만......그래서 아무 생각도 안나고 마음이 탁탁해 져서 마음 좀 달래는 중입니다. #@$! 요새 교회 왜 그렇습니까? 누구 말마따나 "이거 말이 됩니까?!"
안녕하세요? 요즈음 건강(담석)은 좀 어떠신지요?
장마철이라 생업에도 지장이 많으실텐데....
정성들여 쓰신 글 잘 읽어 보았고, 님의 진지하신 제안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제사 문제'는 전에 이 곳에서 몇 번 훑어 본 내용이기에
(우선 사랑채 1045번/1431번 참조)
토론에 앞서 님께서도 한번 읽어 보시면 도움이 되실 것 같네요.
그럼,
생산적이고 즐거운 토론을 기대하며 물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