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를 읽으면서, 특히 로마서를 비롯한 바울의 서신서를 읽으면서 바울이 예수를 통해서 경험한 ‘하나님’과 유대인들의 ‘야훼’는 같으면서도, 완전히 다르다는 생각을 많이 해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극한으로 배척한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에도 타산지석이 되지 않을까 해서 한 번 조잡한 글을 올려봅니다.    

바울은 지금의 터키의 다소에서 로마시민권자로 태어난 디아스포라 출신의 뛰어난 바리새파 율법학자였던 것 같습니다. 본토 출신이 아닌 해외파 출신이 산헤드린으로 대표되는 유대의 종교정치계에 주류로 편입될 수 있었을지 어땠을지는 모르지만 바울은 그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 싶은 야망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같은 혈통이라고 하지만 재미 교포와 본토 출신의 한국인의 사고방식이 문화적 풍토의 차이 때문에 상당히 달라지는 것처럼 해외파 바울은 본토인들과는 어쩌면 많이 달랐을지도 모릅니다. 말하자면 바울의 사고는 헬레니즘을 통해서 민족적이거나 국수적이지 않고 세계적이고 전우주적일 수 있는 토대가 이미 보이지 않게 마련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본토에 들어와 위대한 율법학자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을 하면서, 본토에서 일어난 예수 사건에 관해서는 소문을 들었거나 어쩌면 스스로 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주류의 길을 가고 있던 바울에게 반대편 대척점에 서있는 “예수”는 참으로 이상한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에게 예수는 화두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다가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러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상에서 천지개벽, 경천동지할 사건과 맞닥드려집니다.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사도행전 내에서도 바울이 예수를 만난 경위가 두 가지로, 서로 완전히 일치된 표현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엄청난 예수의 빛에 눈이 멀어서 사흘간을 식음을 전폐하다가 아나니아라는 예수의 제자에 의해서 눈에 비늘이 떨어지는 체험을 하고나서 세례를 받는 줄거리가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비늘은 바울의 민족적 종교적 폐쇄주의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진실은 무엇이며, 예수를 통해서 만난 하나님은 누구일까요?

유대인들은 “야훼”를 자신들의 틀 속에 가두어서 자신들만의 신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독점은 자기들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겠지만 그 ‘신’으로 인해서 하나의 보이지 않는 “선”(line) - 율법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진 않을 것입니다 - 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그 선은 넘어서는 안되는 그 무엇이었습니다. 선 안에 있는 사람이 선 밖으로 나가는 것도, 선 밖에 있는 사람이 선 안으로 들어오는 것도 똑같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선과 악, 의인과 죄인, 선민과 이방인, 악성 피부병 걸린 사람과 아닌 사람, 병자와 건강인, 남자와 여자, 어른과 어린아이... (그렇게 갈라서 규제를 가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사회를 유지하는 한 방편이었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그 선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애초에 그 ‘사람’에겐 선이란 것이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사회 지배 질서를 문란케 하는 불온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

예수는 전혀 특별하지 않았던 사람이지만 매우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는 보잘 것 없어서 무시당하던 ‘죄인’들, ‘병자’들과 천연덕스럽게 어울리고 식탁에서 빵을 먹으면서 당시의 거룩한 종교인들처럼 그들에게 ‘죄인’임을 각인시키거나 값싼 동정으로 대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이 인간으로서 액면 그대로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존재인지를 자각시켜 주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불꽃을 보듬어 다시 살아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는 민족적으로는 반목과 질시로 대해야 할 로마에서 온 이방인들과 그 끄나풀들이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조차도 자신이 받을 오해와 위험은 아랑곳하지 않고 흔쾌히 응했고 그들조차도 친구로 만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는 유대와 사마리아의 반목 구도를 허물어 버리려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는 위선적인 종교적 권위와 폭력적인 정치 체제의 거센 물결을 자신의 작은 한 몸으로 막으려고 저항하고 버티어 서 있다가 휩쓸려 죽어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는 결코 죽지 않고 다시 부활하여 살아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의 힘의 원천이었고, 자신과 혼연일체가 되어 함께 숨 쉬었으며, 예수를 살려내기까지 한 ‘아버지’ - 바울은 그 당시 통용되던 헬라적 신 개념인 ‘테오스’(하나님)로 표현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버지’를 ‘테오스’의 범주에 가두게 되는 어쩔수 없는 상황을 초래합니다만 - 는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예수가 살았던 당시 유대의 ‘야훼’와 본질적으로 다른 그 무엇이 아님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만, “야훼”와 예수의 아버지 -또한 온 인류의 아버지- “하나님”은 뚜렷한 차이점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자신들의 틀 안에 가두려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소유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야훼”("I am that I am")는 이름이라기보다는 원래부터 이름이 없는 하나님이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표현한 것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명명이 되어버리면서부터 “대상화”(objectified),“개체화”(individualized)되는 과정을 통해 자연히 우상으로 귀결되는 수순을 밟게 되거나, 유대의 민족신으로서 굉장히 편협하고 폐쇄적인 민족의식을 형성하는 촉매로서 작용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이 바로 그 두 가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는 모든 예언자들의 정수(精髓)로서, 완전히 “하나님”의 본질 속을 꿰뚫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렀던 이유는, 그 분이 유대민족만이 아닌 바로 모든 인류와 피조물들의 존재의 근원임을 실제적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와 동떨어진 대상이거나 개체가 아니라 ‘거룩한 기운’을 통해서 우리 속에서 강한 힘으로 활동하면서 우리의 존재를 규정하고 이끌어 가시는 분이라는 자각이 있었고, 또한 예수는 그 것을 자신의 전존재 속에서 가장 뚜렷이 느끼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바울은 그 예수를 만난 것입니다. 그 예수가 말과 몸으로, 자신의 존재로 보여준 그 하나님의 본질을 뚜렷이 보게 된 것입니다. 어느 것에도,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았고, 인간이 만든 어떤 ‘규정’이나 ‘선’이 진리의 본질 - 사랑 -을 훼손할 때엔 거침없이 넘나드는 한없는 자유를 가졌던 예수는 바로 하나님의 본질과 바로 통하는 존재라는 그 깨달음 말입니다.      

예수를 만난 바울은 유대주의에서 하나님이 해방되는 자각을 얻게 됩니다. 아니 사실은 예수를 만나고, 하나님을 만난 바울이 유대주의에서 해방됩니다. 애초에 ‘하나님’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분입니다. 로마서 초반부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율법을 가진자나 율법을 가지지 않은 자,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상관없이 똑같은 잣대로 판단하시는 분입니다. 또한 만물 속에 자신의 신성을 나타내 보인 원초적인 분입니다. 단지 율법을 가지고 안가진 것은, 의식적으로 ‘자각’하느냐 아니냐의 차이점만 있을 뿐 인간은 다 똑같다는 성서의 말씀이 진리라고 고백합니다. (마치 두 사람이 사과를 먹을 때 한 사람은 ‘사과’ 라는 이름을 알고 지식을 가지고 의식하고 먹느냐, 아니면 무엇인지 모르고 먹느냐의 차이일 뿐 그 맛은 똑같은 그런 이치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그런 원초적인 하나님을 만난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곱게 보일 리가 없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배척당하고, 살기(殺氣)어린 죽음의 위협을 받습니다.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저는 현재의 기독교인들에게서도 옛날의 유대인들의 모습과 비슷한 것을 느낍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말이 너무 앞서는 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말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관념의 우상이 되어있기도 합니다.

또한 한없이 열려있고, 또한 절대의 자유와 사랑과 생명으로 가득했던 예수는 이상하게도 현재 성경 구절들 묶음과 함께 폐쇄회로(closed-circuit)화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회로체계를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에 혈안이 되어 있는 기독교의 구원론을 봅니다. ‘예수 구원의 배타성’도 그런 맥락에서 이야기가 되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예수 구원의 ‘질’적인 배타성이라고 해야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를 구원의 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의 존재론적인 패턴과는 영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모습들을 많이 봅니다. 일반인들보다도 더 폐쇄적이고, 더 분파주의적이고, 더 권위적이며 경직된 사고 패턴, 삶의 모습들... 이 이야기는 거꾸로 말하면 예수가 기독교인들에게 ‘실재하시는 생명’으로 다가오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유대주의에서 해방되셨듯이, 기독교라는 ‘새장’에서 똑같이 해방될 때 진짜 하나님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기독교를 해체해야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울도 성서에서 율법의 해체를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우리의 구주로 믿는다는 것이 정말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화두를 한 번 던져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