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 것 같으면서도 느리고, 느린 것 같으면서도 때로는 빠른 게 한국인의 행태다. 이러한
한국적인 행태는 한국 사람들의 피에 새겨진 DNA구조 때문으로, 이러한 행태적 모습은 신앙
생활 측면에 있어서도 역시 예외는 없을 것이다.
이제는 한국 개신교단에서도 (늦게나마) " '교회' 헤쳐모여" 활동이 시작된 것인가...
이번 주 <뉴스앤조이> 기사에, 교회 건물도, 직분도, '감사헌금' 외에 십일조를 포함한 모든 헌금제도도, 목사 사례비 지급제도 모두 폐지키로 하고 서울에서 새로 출범한 새들녘교회에 관한 기사가 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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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벌이는 각자 알아서 하기로 했다. 최헌수 전도사는 전공을 살려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친다. 강병욱 전도사는 컴퓨터 수리점을 하다가 얼마 전 테이크아웃 커피숍을 열었다. 박태순 목사는 지금은 잠시 쉬고 있지만 최근까지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쳤다.
돈을 벌며 목회하기는 쉽지 않다. 목회를 더 잘하기 위해 돈을 벌자 했는데, 때로는 주객이 전도되는 것은 아닌가 고민할 때도 있다. 하지만 돈을 버니 일주일 내내 열심히 일하고 예배하러 나오는 교인들이 위대해 보이기 시작했다. 교회 출석이나 헌금 등의 일률적인 문제로 교인을 판단하지 않게 됐다. 교인과 같은 고통과 아픔을 느끼며 그들의 삶의 무게를 이해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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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적인) 교회"는 곧 하나의 '신앙공동체'일 뿐이다. 초대교회들의 모습이 아마도 그러했을 것이다. 신앙공동체 이상인 "교회"(현재의 대다수 교회들과 같은 모습의 것)는 곧 교회라기 보다는 차라리 사회적으로 널리 통용되고 인정되는, 그래서 사회 구조적인 일원으로서의 모습이 그 정체성인 어떤 "종교기관(사회적 종교 담당처)"일 뿐이다.
순수 신앙공동체와 사회 기관적인 모습, 그 둘 중 어떤 것을 선호하는가 하는 문제는 각자의 해량과, 식견과, 또한 그 시대의 시대적 조류가 사람들의 판단에 큰 몫을 할 것이다.
나는 최근 수년간을 두고 사고한 끝에, 교회에서 본래의 모습의 변질을 초래하는 제일 큰 요인은 목사의 사례비(큰 교회들의 지금 같은 도에 넘은 담임목사 예우는 목사를 곧 일개 기업의 전권적 CEO로 만들어버린다)와 자가 소유 교회당의 건축 그 두가지라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려 놓고 있었다(그에 한 가지를 더하면 '직분제도'이다). 그리고 이를 폐지한 것이 바로 "BRETHREN('형제단' 운동)"이라는 것을 연구 / 조사 끝에 알아냈다.
전에 캐나다에 다녀온 아들 녀석이, 이민 가있는 아이의 사촌이모가 다니고 있는 토론토의 교회에는 한국 교회와는 전혀 다르게, 목사가 따로 없고 예배시에 대표기도도 하고자 하는 수명이서 차례대로 하고 있다는 그런 얘기를 전해 줬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곳도 아마도 "형제단"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목사의 무보수는 일본 교회에서도 그렇게 한다고 들은바 있지만, 그 자세한 실상에 관해서는
들은바도 없고 알지 못한다. 목사가 교회에서 보수를 받지 못하고 돈벌이로 생계를 꾸려야 할 경우에 부닥치게 될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해서는 우리가 굳이 논하지 않아도 쉽게 짐작이 가는 일이다. 다만, 한 알의 밀알이 될 것을 각오하고 (새로운 개혁적 시도를) 하고자 하는 곳에는 '할 수 있는 길'이 있게 마련이다.
'신앙의 길'에는 절대로 "답"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신앙의 난해성'은 옛날도 그랬고 지금도, 그리고 미래도 그럴 것이다. '유보수가 옳은가, 무보수가 맞는가'를 논하는 것은 무용하고도 무의미한 일이다. 각자의 달란트적인 소명과 해량과 식견대로 할 수밖에는, 그 일에 있어서 어떤 "답"은 없다. 다만 한 가지 우리가 사고할 일은, 시대는 크게 다르지만, 예전에 사도 바울도 그렇게 (무보수로) 활동했던 것이다. 맥을 이어서, 목사는 지금과 같은 모습의 "성직자" 노릇(즉 하나의 계급화된 신분이 되어 위에서 군림하며 전권을 행사하는 지위)이 아닌, 동일 위치에 속하여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신앙공동체 리더 역할'이면 족하다. 그 이상은 "너희에게는 선생도 없고 지도자도 없나니, 믿음안에서 너희는 모두 형제니라." 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뜻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일일 뿐으로, 이는 유대교적이거나 혹은 카톨릭적인 모습에 해당되는 일이다(교회 안에서 이처럼 계급화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이러한 체제에 관해서 워치만 니는 이를 "발람의 획책"이라고 정의한바 있다).
이제 막 시작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 한국 교단의 이러한 '해쳐모여' 바람이, 기성의 "교회"들의 해체와 그 결과로서 따라와야만 할 건전한 '신앙공동체'의 육성이라는 바람직스러운 순기능적 모습의 결과로 나타나게 될 것인지에 관한 문제는, 이는 단지 사람의 능력과 뜻으로서 해결될 일은 아닐 것이리라.
끝으로, 일개 교회를 반드시 특정 교단 소속으로 두는 것으로 알고 있는 지금의 국내 종교관련 법규정도 속히 개정되어야만 하겠다는 생각이다(이는 개교회의 재산권 행사에 관한 규제목적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종교적 본질'에 어긋나는 규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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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자료로,
<형제단>의 일종인 국내 "형제교회"에 관한 인터넷 게시문이다)
형제교회에 대해 알고 싶어요. 제가 다니는 곳은 모임이라고도 하는데 이단인지 궁금합니다
크로스맨 2006-06-21 02:25 조회 4701 답변 18
얼마전 제가 아는 동생으로부터 인도를 받아서 형제교회라는 곳을 다니게 되었는데 '모임'이라고도 하더군요. 구원받지않은 사람을 구도자라고 하고 구원받은 사람들을 형제, 자매라고 하는데 저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장로교를 다녔거든요. 근데 구원의 확신이 없어 방황하던중 제가 아는 한 동생으로부터 복음제시를 듣고 너무 기뻐서 동생이 다니는 교회에 가게 되었어요. 근데 예배형식이 장로교와 비교해 너무 틀리고 목사가 없고 목회하는 형제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 곳 형제들이 말하는 것은 성경과 비추어 틀린 것이 없어 보이는데 단지 예배때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외우지 않더군요. 그래서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부정하냐고 했더니 그것은 개인적으로 해도 되고 안해도 되지만 공적인 예배에서는 자유롭게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이단이라는 사람도 있고 대다수 사람들은 무디나 조지뮬러도 형제교회였다는 것을 말하면서 이단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단이고 아니고는 성경에 근거를 두어야 하는 것이 맞지만 제가 장로교 전통에 익숙해서인지, 성경을 잘 몰라서인지 모르지만 정말 헷갈립니다. 저에겐 정말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꼭 답변부탁드려요^^; 이단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괜찮은 모임입니다 1800년대 영국에서 시작된 모임이구요 기원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모라비안 형제단, 후스파 등등 까지 나오구요 현재는 세계 각국에 많이 퍼져있습니다 한국에도 300여개정도 모임들이 있는 것으로 알로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앞서간 그리스도인들중 굉장히 유명하신 분들이 형제회 소속이었던 분들이 많습니다
참고로 F. F. 브루스라는 유명하신 분이 쓰신 글이 있습니다 아래 올려드립니다
그리스도인 형제단은 누구인가? |
저는 갠적으로 한국교회에서 본래의 모습의 변질을 초래한 가장 큰 요인은
'성서해석의 부재' 라고 봅니다.
성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해석이 되지 않는다는 말임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가 마치 교회운영에 편리기구화처럼 되어 있다고나 할까요?
다음은 성서해석이 각 학파의 통전적 해석에 고정되어 있어
페쇄적이고 비효율적인 각 학파교리만을 주장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제 그만 그 중세의 학파들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하고,
어거스틴도 루터도 칼빈....등도 훌훌 벗어 던져야 한다고 봅니다.
21세기에서 현대종교로부터 그들은 가차없이 비판 되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주장하는 교리를 신앙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베타성의 극치를 이룬 한국교회의 모습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서 대안이라면 한국개신교는 초교파 한국식 '성서해석 세미나'를 자주 열어야 한다고 봅니다.
'성서해석 세미나' , 또는 '성서대회' 에서 가장 잘 이해 되어지는 것을 채택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을 세우고 ...또
계속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한국 개신교가 이처럼 변질되게 된 문제의 핵심은 바로 '성서해석의 부재'라는 것이고, 나아가 한국교회는 어거스틴, 루터, 칼빈 등(그들을 크게 '서양 사람들'이라고 지칭하고 싶습니다)에 의해서 과거 비현실적, 배타적으로 형성된, 오직 그러한 인물들이 살아 숨쉬던 그 시대적인 신학적 견해나 또는 그러한 굴레로부터 과감하게 탈피해야 하겠다는 의견, 참으로 옳으신 말씀이라고 느껴지고 아울러 대단히 중요한 논점을 제시하셨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제가 최근에 <딴지일보> '300' 코너를 통하여 접하게된 구약학을 전공하신 어느 분의 연재 글은 저를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 적잖은 충격과 탄사를 불러오기에 충분한 것이었던바, 그 주요 내용은 정경 채택의 과정에 관한 얘기로부터 시작하여 구약의 목록 편재와 구약 기록의 역사성과 그 역사적 배경이 가지는 의미들을 비롯하여, 그간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생동안을 교회를 다녀도 알지 못할(올바른 신앙 정립을 위해서는 그러한 사실들을 꼭 알아야 하는 것임에도 말입니다) 그러한 심층적인 내용들에 관해서 개괄적으로 설명된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과거의 신학(그것들의 대부분이 그대로 현재의 신학이기도 하지만서도)과 그것들의 영향력에서 속히 탈피해야 하겠다는 시각은 제가 가진 시각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입니다. 저는 감히 ' 이 시대 과연 (살아있는) 신학자가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성경 기록이 아닌 이상 다른 어떤 신앙선대들의 그 어떠한 사상들은 우리가 그것들을 참고로만 할 수 있을 뿐이고 지금의 우리가 그것들을 되뇌이고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입니다.
주님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지금 이 시대를 위한 시대적 소명, 그리고 향후를 위한 미래적 소명 그 두 가지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우리에게 과거적인 혹은 과거 지향적인 어떠한 소명을 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소규모의 건강한 모임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