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 <열린 토론실>입니다. 다비안들의 부담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채>와는 달리, 보다 진지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나 주제를 나누고 싶은 분들을 위한 게시판입니다. 가급적 예의를 갖추시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대화는 다비안을 비롯한 여러 네티즌들의 온라인 상에서의 자유로운 것이기에 그 방향과 정체성이 반드시 다비아와 일치하지는 않음을 밝혀둡니다.
글 수 253
(# 어제 제가 올렸던 글에 대해 정용섭 목사님이 장문의 댓글을 다시면서 실수로 제 글 본문이 지워지는 바람에 원문을 저장해 둔 것은 없고 하여, 지나간 기억을 더듬어서 새로 글을 적었습니다. 원래대로 쓴다고 써봤는데 아무래도 처음 글과는 다른 점이 많습니다.... 이 점 다비안 여러분께서 양해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아, 그리고, 정 목사님께서 달아주신 댓글도 제 꼭지글 아래부분에 첨부하여 두겠으니 함께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저별과 달님께서 사랑채 게시판 글(3006번)에 댓글로 남기신 부분들 중에 약간의 오해가 있으신 부분에 대해 제 의견을 적고자 합니다.
저별과 달님께서는 다비아의 운영진의 신학적 경향이 "극 진보" 적이라고 하셨는데, 제가 볼때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교회는 보수적이거나 근본주의적인 분위기가 팽배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다비아의 입장이 과격한 진보적인 것으로 느껴질수도 있으나, 객관적인 입장에서 차분하게 비교평가를 해보면 다비아의 스펙트럼은 오히려 중도보수적이거나 많이 양보하더라도 중도개혁 + 약간의 진보성 정도에 위치한다고 봅니다.
제가 볼때는 저별과 달님께서는 매우 보수적인 교회에서 성장해오신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비아가 급진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애매한 신앙관이나 혹은 위험한 신앙관을 가지고 있다고 느껴지시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로 급진적이고 극 진보적인 사람들의 글들을 접해보신다면 다비아의 입장이 매우 중도적이고 온건함을 쉽게 아실 수 있을것입니다.
같은 교파안에서도 보수적인 입장과 진보적인 입장으로 갈라져 있는 상태에서 양측간에 많은 의견차이를 보이고 있슴을 이해하셨으면 좋겠습니다만, 저별과 달님께서는 보수적인 교회의 입장만이 한국교회 전체를 대변하는 것처럼 편협하게 생각하신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군요. 심지어는 정용섭 목사님의 견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성결교회 목사님이 맞나 의심이 들때도 있다" 고 까지 말씀하셨는데, 이는 지나친 편견에 근거한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저별과 달님께서는 한국교회의 모든 목사님들이 저별과 달님께서 중시하는 몇가지 사안들에 대해 100이면 100 모두 똑같은 말을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정목사님을 공격하셨는데, 제가 볼때는 보수적인 목회자나 신학자만 한국교회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씀하실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자면, 저별과 달님께서 하신 말씀중에 "다른 것은 100번 양보해도 동정녀 탄생, 구약의 오실 메시아로서의 예언, 필연적인 대속의 죽으심, 성서가 가르키는 부활,내세의 보장 이런 것은 양보 할수가 없습니다." .. 저도 이 중 대부분을 동의하지만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는 조금 생각이 다릅니다.
동정녀 탄생에 관한 저의 견해는, 이것이 문자 그대로 역사적 사실이냐고 묻는다면 현재까지의 연구결과를 참고할때 그 대답은 상당히 회의적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고 봅니다. 물론, 이렇게 말씀드리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흠없는 어린양의 대속적 희생" 으로 파악하는 입장에서는 발끈하실 것이 예상되지만, 교리적 선입관을 떠나 성경 자체를 되돌아볼때 이에 관해 아래와 같은 몇가지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에 동정녀 탄생이 그토록 중요한 교리적 뒷받침이 된다면,
왜 사도 바울의 서신서에는 동정녀 탄생에 관해 한마디도 언급이 없는가?
(2) 왜 두개의 복음서에는 동정녀 탄생에 관한 기사나 그에 관한 암시가 조금도 발견되지
않는가? (하나는 최초의 복음서이고, 다른 하나는 세개의 복음서와는 전혀 다른 공동체
로부터 기인하는 문서임)
사실, 신구약 성경을 통털어서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관한 기록은 마태와 누가의 복음서 두권 뿐입니다. 그러나, 이 두개의 복음서는 초대교회 1세대가 기록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사도행전이나 바울 서신 및 베드로서신, 유다서신, 야고보 서신 등에서도 동정녀 탄생에 관한 어떠한 암시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동정녀 탄생이라는 개념이 최소한 1세대 초대교회에는 공유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에서도 메시아의 탄생이 동정녀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개념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이라는 개념이 수면위로 부상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러한 사실이 역사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그랬다기 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초대교회 교인들이 가졌던 신앙고백이 점차 구체적으로 형상화 되면서 그 당시에 흔하게 통용되던 위대한 인물의 신비적 탄생이라는 형태의 사건보도로 정착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신학자들은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다비아에 신학마당 온라인 강의실에 정용섭 목사님이 쓰신 69번 글을 참조하십시오. 이른바 "가현설"과의 투쟁과정을 이해하여야 동정녀 탄생교리의 출현에 대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동정녀 탄생이 역사적 사실이었다면 예수님의 가족들과 함께 생활했던 사도들이 이를 모를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으로 있었으니 더욱 그러했겠지요.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의 교리에 동정녀 탄생이 중요한 밑받침이 되는 사건으로 생각했다면 당연히 이를 복음서든 서신서든 중요하게 다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이 초대교회 1세대에 통용되었다는 증거는 성경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사도들은 동정녀 탄생이라는 개념 없이도 복음을 충실히 전했고 각지에 수많은 지역교회를 설립하는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이라는 명제는 상징적인 언어로 해석을 해야지, 그것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교리화하려 하면 수많은 문제점들을 파생하게 됩니다. 이미 가톨릭 교회에서 그러한 폐해가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단적인 예를 들자면, 중세도 아닌 20세기에 교황청에서 믿을 교리로 반포한 "성모의 무염시태" 이론 같은 것이지요. 이는 성모께서도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태어날때부터 원죄가 없는 몸으로 태어났다는 이론인데, 이것은 원죄없는 깨끗한 어린양 그리스도가 완전하게 깨끗하려면 그를 잉태한 자궁 또한 원죄에 오염되지 않아야 온전히 깨끗해질 것이라는 그런 발상에서 나온 것입니다만, 솔직히 말해 지나치게 문자적이고 교조적인 데에 집착함으로써 벌어진 결과물이라고 밖에는 평가할 수 없군요...
물론, 동정녀 탄생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잘못되었다, 당신의 생각을 뜯어 고쳐야 한다, 이렇게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동정녀 탄생이 역사적 사실이냐 상징적 표현이냐 이러한 문제는 복음의 핵심도 아니고 복음의 완전성을 훼파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에 지나치게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따라서, 동정녀 탄생 전승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는 것도 순수하고 순진한 신앙으로서 충분히 존중받을 만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시각의 해석이 존재한다는 것 역시 이해하시고 그에 대해 동의하지는 못하시더라도 열린 마음으로 가능성을 포용하여 주신다면 좋겠다는 것이 저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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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는 정용섭 목사님께서 제 글에 댓글로 달아주신 내용입니다)
닥터케이 님,
한국교회 평신도들이 닥터케이 님 정도로만
신학적 소양이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위에서 짧막하게 진술한 내용들은 아주 건강한 기독교 신앙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꿰뚫고 있다는 뜻이에요.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개론에 충실하다는 말씀이지요.
공부를 많이 하시는군요.
다른 길이 없어요.
바둑을 잘 두려며
정수공부와 고수들의 기보를 반복 학습해야 하는 것처럼
기독교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려면
신학공부와 인문학 학습을 꾸준히 해야 합니다.
동정녀 탄생 문제는 이미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 강해>와
저의 <여성신학> 강의 노트에서 자세하게 설명해 놓았는데,
여기 다비안들은 그런 글은 전혀 읽지 않는가봐요.
동정녀 탄생교리는 예수의 인성을 부정하는 가현설과의 투쟁에서
그들을 이단으로 배격한 교부들의 신앙고백에서 나온 것이지요.
말하자면 예수가 참된 신일 뿐만 아니라 참된 인간이라는,
<vere Deus, vere homo>라는 가장 중요한 도그마의 기초랍니다.
'교리'(dogma)는 어떤 진리를 말하기 위한 틀이에요.
첫날처럼 님은 창문이라고 했는데, 좋은 표현이군요.
위에서 전개되는 논쟁은 무의미하답니다.
천동설을 믿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지동성을 설명해도 결코 받아들이지 않거든요.
본인의 사유 틀이 그렇게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건 어쩔 수 없어요.
그 사람이 인격적이냐, 아니냐 하는 것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진리를 못보는 것이지요.
플라톤 방식으로 말하면
동굴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은 동굴 밖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제가 어떤 쪽의 사람들을 무시하려고 이렇게 글을 쓰는 게 아니에요.
신학의 기초를 인정하지 않는데,
무슨 대화를 할 수 있겠어요.
이건 극단적 진보 쪽의 분들에게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제가 민중신학에 대한 비판글에서 밝혔지만
그들도 아주 교조적이거든요.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처럼
한국의 극단적인 보수와 극단적인 진보는 똑같아 보입니다.
말이 옆으로 흘렀군요.
제 말은 기독교의 진리에 대해서 열린 마음으로 대하지 않는다면
그가 보수냐, 진보냐 할 것 없이 결국 독단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니다.
동정녀 문제에서 하나 만 지적할께요.
예수가 동정녀에서 출생했다는 말과
다윗의 혈통이라는 말은 서로 모순되는 거에요.
남자 없이 마리아라는 여자 혼자 아이를 낳았는데,
어떻게 요셉의 조상인 다윗의 혈통이 될 수 있을까요?
동정녀만을 주장하든지,
아니면 다윗의 혈통만을 주장해야 하는데,
이런 모순을 마태가 알고 있었지만 함께 주장하는 이유는,
거기에 어떤 사연이 숨어 있는 거지요.
그걸 아는 게 바로 신학이랍니다.
그건 바로 앞에서 지적한 가현설과의 투쟁인 거지요.
이런 모든 것을 무조건 제쳐놓고
"너 이 사실을 믿어, 안 믿어?" 하고 따지고 든다면
그건 진리 논쟁이 아니라 우격다짐에 불과한 거에요.
2천년 기독교 신학은 우격다짐이 아니라 진리논쟁을 거쳐왔답니다.
그런 전통이 언젠부터인가,
특히 한국에서 사라지고 말았답니다.
불행한 일이지요.
닥터케이 님,
천천히 여유를 갖고 길을 가세요.
당장 누구를 설득시킬 수는 없어요.
다비안들 중에서도 다비아를 통해서 배우겠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고,
자기가 알고 있는 걸 무조건 계몽시키려고 하는 분들이 있어요.
이런 일들은 보수나 진보 양쪽에서 그대로 나타난답니다.
작년에도 이런 비슷한 해프닝이 있었어요.
돌아가는 양상이 아주 비슷하답니다.
그때는 진보 연 하는 쪽이었고,
이번에는 보수 연 하는 쪽이었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지요.
제가 보기에 다비아에 목회자 운동과 평신도 운동의 두 흐름이 있는데,
물론 그것을 완전히 구분하는 건 아니고 편의상 그렇게 말한 것뿐이구요,
닥터케이 님 같은 분들이 다비아에서 한쪽을 받치고 있어야 합니다.
사족으로 한 마디 하면,
역사적 예수로 편향된 책들,
특히 <예수 세미나> 유의 책들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답니다.
그냥 한번 쯤 스치고 지나갈 뿐이지
신학의 메인 스트림이 아니니까 너무 크게 비중을 두지는 마세요.
그런 유의 책을 읽을 바에야
신비주의자들의 책이 훨씬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신학의 메인 스트림을 따라가는 거지요.
그게 왜 중요한지 알겠지요?
좋은 주일 하오.
(정용섭, 실수로 닥터케이 님의 꼭지글을 잃어버렸어요.)
저별과 달님께서 사랑채 게시판 글(3006번)에 댓글로 남기신 부분들 중에 약간의 오해가 있으신 부분에 대해 제 의견을 적고자 합니다.
저별과 달님께서는 다비아의 운영진의 신학적 경향이 "극 진보" 적이라고 하셨는데, 제가 볼때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교회는 보수적이거나 근본주의적인 분위기가 팽배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다비아의 입장이 과격한 진보적인 것으로 느껴질수도 있으나, 객관적인 입장에서 차분하게 비교평가를 해보면 다비아의 스펙트럼은 오히려 중도보수적이거나 많이 양보하더라도 중도개혁 + 약간의 진보성 정도에 위치한다고 봅니다.
제가 볼때는 저별과 달님께서는 매우 보수적인 교회에서 성장해오신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비아가 급진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애매한 신앙관이나 혹은 위험한 신앙관을 가지고 있다고 느껴지시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로 급진적이고 극 진보적인 사람들의 글들을 접해보신다면 다비아의 입장이 매우 중도적이고 온건함을 쉽게 아실 수 있을것입니다.
같은 교파안에서도 보수적인 입장과 진보적인 입장으로 갈라져 있는 상태에서 양측간에 많은 의견차이를 보이고 있슴을 이해하셨으면 좋겠습니다만, 저별과 달님께서는 보수적인 교회의 입장만이 한국교회 전체를 대변하는 것처럼 편협하게 생각하신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군요. 심지어는 정용섭 목사님의 견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성결교회 목사님이 맞나 의심이 들때도 있다" 고 까지 말씀하셨는데, 이는 지나친 편견에 근거한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저별과 달님께서는 한국교회의 모든 목사님들이 저별과 달님께서 중시하는 몇가지 사안들에 대해 100이면 100 모두 똑같은 말을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정목사님을 공격하셨는데, 제가 볼때는 보수적인 목회자나 신학자만 한국교회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씀하실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자면, 저별과 달님께서 하신 말씀중에 "다른 것은 100번 양보해도 동정녀 탄생, 구약의 오실 메시아로서의 예언, 필연적인 대속의 죽으심, 성서가 가르키는 부활,내세의 보장 이런 것은 양보 할수가 없습니다." .. 저도 이 중 대부분을 동의하지만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는 조금 생각이 다릅니다.
동정녀 탄생에 관한 저의 견해는, 이것이 문자 그대로 역사적 사실이냐고 묻는다면 현재까지의 연구결과를 참고할때 그 대답은 상당히 회의적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고 봅니다. 물론, 이렇게 말씀드리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흠없는 어린양의 대속적 희생" 으로 파악하는 입장에서는 발끈하실 것이 예상되지만, 교리적 선입관을 떠나 성경 자체를 되돌아볼때 이에 관해 아래와 같은 몇가지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에 동정녀 탄생이 그토록 중요한 교리적 뒷받침이 된다면,
왜 사도 바울의 서신서에는 동정녀 탄생에 관해 한마디도 언급이 없는가?
(2) 왜 두개의 복음서에는 동정녀 탄생에 관한 기사나 그에 관한 암시가 조금도 발견되지
않는가? (하나는 최초의 복음서이고, 다른 하나는 세개의 복음서와는 전혀 다른 공동체
로부터 기인하는 문서임)
사실, 신구약 성경을 통털어서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관한 기록은 마태와 누가의 복음서 두권 뿐입니다. 그러나, 이 두개의 복음서는 초대교회 1세대가 기록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사도행전이나 바울 서신 및 베드로서신, 유다서신, 야고보 서신 등에서도 동정녀 탄생에 관한 어떠한 암시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동정녀 탄생이라는 개념이 최소한 1세대 초대교회에는 공유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에서도 메시아의 탄생이 동정녀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개념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이라는 개념이 수면위로 부상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러한 사실이 역사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그랬다기 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초대교회 교인들이 가졌던 신앙고백이 점차 구체적으로 형상화 되면서 그 당시에 흔하게 통용되던 위대한 인물의 신비적 탄생이라는 형태의 사건보도로 정착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신학자들은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다비아에 신학마당 온라인 강의실에 정용섭 목사님이 쓰신 69번 글을 참조하십시오. 이른바 "가현설"과의 투쟁과정을 이해하여야 동정녀 탄생교리의 출현에 대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동정녀 탄생이 역사적 사실이었다면 예수님의 가족들과 함께 생활했던 사도들이 이를 모를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으로 있었으니 더욱 그러했겠지요.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의 교리에 동정녀 탄생이 중요한 밑받침이 되는 사건으로 생각했다면 당연히 이를 복음서든 서신서든 중요하게 다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이 초대교회 1세대에 통용되었다는 증거는 성경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사도들은 동정녀 탄생이라는 개념 없이도 복음을 충실히 전했고 각지에 수많은 지역교회를 설립하는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이라는 명제는 상징적인 언어로 해석을 해야지, 그것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교리화하려 하면 수많은 문제점들을 파생하게 됩니다. 이미 가톨릭 교회에서 그러한 폐해가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단적인 예를 들자면, 중세도 아닌 20세기에 교황청에서 믿을 교리로 반포한 "성모의 무염시태" 이론 같은 것이지요. 이는 성모께서도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태어날때부터 원죄가 없는 몸으로 태어났다는 이론인데, 이것은 원죄없는 깨끗한 어린양 그리스도가 완전하게 깨끗하려면 그를 잉태한 자궁 또한 원죄에 오염되지 않아야 온전히 깨끗해질 것이라는 그런 발상에서 나온 것입니다만, 솔직히 말해 지나치게 문자적이고 교조적인 데에 집착함으로써 벌어진 결과물이라고 밖에는 평가할 수 없군요...
물론, 동정녀 탄생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잘못되었다, 당신의 생각을 뜯어 고쳐야 한다, 이렇게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동정녀 탄생이 역사적 사실이냐 상징적 표현이냐 이러한 문제는 복음의 핵심도 아니고 복음의 완전성을 훼파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에 지나치게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따라서, 동정녀 탄생 전승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는 것도 순수하고 순진한 신앙으로서 충분히 존중받을 만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시각의 해석이 존재한다는 것 역시 이해하시고 그에 대해 동의하지는 못하시더라도 열린 마음으로 가능성을 포용하여 주신다면 좋겠다는 것이 저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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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는 정용섭 목사님께서 제 글에 댓글로 달아주신 내용입니다)
닥터케이 님,
한국교회 평신도들이 닥터케이 님 정도로만
신학적 소양이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위에서 짧막하게 진술한 내용들은 아주 건강한 기독교 신앙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꿰뚫고 있다는 뜻이에요.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개론에 충실하다는 말씀이지요.
공부를 많이 하시는군요.
다른 길이 없어요.
바둑을 잘 두려며
정수공부와 고수들의 기보를 반복 학습해야 하는 것처럼
기독교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려면
신학공부와 인문학 학습을 꾸준히 해야 합니다.
동정녀 탄생 문제는 이미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 강해>와
저의 <여성신학> 강의 노트에서 자세하게 설명해 놓았는데,
여기 다비안들은 그런 글은 전혀 읽지 않는가봐요.
동정녀 탄생교리는 예수의 인성을 부정하는 가현설과의 투쟁에서
그들을 이단으로 배격한 교부들의 신앙고백에서 나온 것이지요.
말하자면 예수가 참된 신일 뿐만 아니라 참된 인간이라는,
<vere Deus, vere homo>라는 가장 중요한 도그마의 기초랍니다.
'교리'(dogma)는 어떤 진리를 말하기 위한 틀이에요.
첫날처럼 님은 창문이라고 했는데, 좋은 표현이군요.
위에서 전개되는 논쟁은 무의미하답니다.
천동설을 믿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지동성을 설명해도 결코 받아들이지 않거든요.
본인의 사유 틀이 그렇게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건 어쩔 수 없어요.
그 사람이 인격적이냐, 아니냐 하는 것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진리를 못보는 것이지요.
플라톤 방식으로 말하면
동굴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은 동굴 밖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제가 어떤 쪽의 사람들을 무시하려고 이렇게 글을 쓰는 게 아니에요.
신학의 기초를 인정하지 않는데,
무슨 대화를 할 수 있겠어요.
이건 극단적 진보 쪽의 분들에게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제가 민중신학에 대한 비판글에서 밝혔지만
그들도 아주 교조적이거든요.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처럼
한국의 극단적인 보수와 극단적인 진보는 똑같아 보입니다.
말이 옆으로 흘렀군요.
제 말은 기독교의 진리에 대해서 열린 마음으로 대하지 않는다면
그가 보수냐, 진보냐 할 것 없이 결국 독단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니다.
동정녀 문제에서 하나 만 지적할께요.
예수가 동정녀에서 출생했다는 말과
다윗의 혈통이라는 말은 서로 모순되는 거에요.
남자 없이 마리아라는 여자 혼자 아이를 낳았는데,
어떻게 요셉의 조상인 다윗의 혈통이 될 수 있을까요?
동정녀만을 주장하든지,
아니면 다윗의 혈통만을 주장해야 하는데,
이런 모순을 마태가 알고 있었지만 함께 주장하는 이유는,
거기에 어떤 사연이 숨어 있는 거지요.
그걸 아는 게 바로 신학이랍니다.
그건 바로 앞에서 지적한 가현설과의 투쟁인 거지요.
이런 모든 것을 무조건 제쳐놓고
"너 이 사실을 믿어, 안 믿어?" 하고 따지고 든다면
그건 진리 논쟁이 아니라 우격다짐에 불과한 거에요.
2천년 기독교 신학은 우격다짐이 아니라 진리논쟁을 거쳐왔답니다.
그런 전통이 언젠부터인가,
특히 한국에서 사라지고 말았답니다.
불행한 일이지요.
닥터케이 님,
천천히 여유를 갖고 길을 가세요.
당장 누구를 설득시킬 수는 없어요.
다비안들 중에서도 다비아를 통해서 배우겠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고,
자기가 알고 있는 걸 무조건 계몽시키려고 하는 분들이 있어요.
이런 일들은 보수나 진보 양쪽에서 그대로 나타난답니다.
작년에도 이런 비슷한 해프닝이 있었어요.
돌아가는 양상이 아주 비슷하답니다.
그때는 진보 연 하는 쪽이었고,
이번에는 보수 연 하는 쪽이었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지요.
제가 보기에 다비아에 목회자 운동과 평신도 운동의 두 흐름이 있는데,
물론 그것을 완전히 구분하는 건 아니고 편의상 그렇게 말한 것뿐이구요,
닥터케이 님 같은 분들이 다비아에서 한쪽을 받치고 있어야 합니다.
사족으로 한 마디 하면,
역사적 예수로 편향된 책들,
특히 <예수 세미나> 유의 책들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답니다.
그냥 한번 쯤 스치고 지나갈 뿐이지
신학의 메인 스트림이 아니니까 너무 크게 비중을 두지는 마세요.
그런 유의 책을 읽을 바에야
신비주의자들의 책이 훨씬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신학의 메인 스트림을 따라가는 거지요.
그게 왜 중요한지 알겠지요?
좋은 주일 하오.
(정용섭, 실수로 닥터케이 님의 꼭지글을 잃어버렸어요.)
2008.07.12 13:35:36
여기서도 색깔론인가요?
참으로 다비아는 동네북입니다.
진보연 하는 이들로부터는 정통 보수라..
보수연 하는 분들로부터는 '극' 진보다..
도시 신앙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편가르고 색깔 칠하는 작업인 것 같습니다.
참으로 다비아는 동네북입니다.
진보연 하는 이들로부터는 정통 보수라..
보수연 하는 분들로부터는 '극' 진보다..
도시 신앙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편가르고 색깔 칠하는 작업인 것 같습니다.
2008.07.12 13:45:20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이라는 명제는 상징적인 언어로 해석을 해야지, 그것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교리화하려 하면 수많은 문제점들을 파생하게 됩니다"
님께서 하신 말씀이지요?
지금 한국교회 내에서 동정녀 탄생 교리를 받아들이고 있지 않는곳이 있습니까? 상징적인 언어로 해석해야 한다고요? 이건 도대체 어디서 누가 주장하는 이야기 입니까?
점점 큰일 날 소리를 하고 계시네요. 언젠가 여기서 정목사님께서도 사도신경의 고백이 교회의 역사적 산물이기에 대단히 중요하다고 하셨던 기억이 나는데 그 때도 사실은 동정녀 탄생 교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언어로 해석하는 차원에서 교회에서 고백해야 한다는 말이었습니까? 물론 님과 정목사님과의 의견이 다를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님의 소속은 도대체 어디입니까? 대단히 궁금해지네요.
님께서 하신 말씀이지요?
지금 한국교회 내에서 동정녀 탄생 교리를 받아들이고 있지 않는곳이 있습니까? 상징적인 언어로 해석해야 한다고요? 이건 도대체 어디서 누가 주장하는 이야기 입니까?
점점 큰일 날 소리를 하고 계시네요. 언젠가 여기서 정목사님께서도 사도신경의 고백이 교회의 역사적 산물이기에 대단히 중요하다고 하셨던 기억이 나는데 그 때도 사실은 동정녀 탄생 교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언어로 해석하는 차원에서 교회에서 고백해야 한다는 말이었습니까? 물론 님과 정목사님과의 의견이 다를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님의 소속은 도대체 어디입니까? 대단히 궁금해지네요.
2008.07.12 14:24:31
흠.. 이스턴님께서는 왜 그렇게 흥분하시는지..
근본주의적 신학이 대세인 한국에서야 이런 주장을 하면 대부분이 거부감을 드러낼 것은 충분히 짐작하고 있습니다만, 역시나 그렇군요.
어디서 누가 주장하느냐고 물으셨나요? 제 개인적인 주장이 아니라 성서신학자들의 주장을 요약정리했습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동정녀 탄생" 전승이 실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고 주장해야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역사적 사건으로 믿어도 되고 상징으로 받아들여도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상징으로 해석해도 복음의 완전성은 손상받지 않습니다. 동정녀 탄생이 복음의 핵심은 아니거든요.
제 소속을 물으셨나요? 제 소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소속인데요...(^^;)
아마도 어느 교단 소속이냐 물으신것 같은데, 저는 소속 교단을 중요시하지 않는 평신도랍니다.
거주하는 지역에 따라 통합측 교회에 가기도 하고 합동측 교회에 가기도 하고 그래요... 20여년째 장로교회 위주로 다니지만 특정교단에 소속감은 없습니다.
근본주의적 신학이 대세인 한국에서야 이런 주장을 하면 대부분이 거부감을 드러낼 것은 충분히 짐작하고 있습니다만, 역시나 그렇군요.
어디서 누가 주장하느냐고 물으셨나요? 제 개인적인 주장이 아니라 성서신학자들의 주장을 요약정리했습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동정녀 탄생" 전승이 실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고 주장해야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역사적 사건으로 믿어도 되고 상징으로 받아들여도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상징으로 해석해도 복음의 완전성은 손상받지 않습니다. 동정녀 탄생이 복음의 핵심은 아니거든요.
제 소속을 물으셨나요? 제 소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소속인데요...(^^;)
아마도 어느 교단 소속이냐 물으신것 같은데, 저는 소속 교단을 중요시하지 않는 평신도랍니다.
거주하는 지역에 따라 통합측 교회에 가기도 하고 합동측 교회에 가기도 하고 그래요... 20여년째 장로교회 위주로 다니지만 특정교단에 소속감은 없습니다.
2008.07.12 14:53:40
닥터게이님!
대단하십니다.
다비안에 그렇게 열정적으로 참여하시는 걸 보니...
개인정보를 클릭해보니 의사신것 같은데.
환자가 별로 없으신가요?
그렇다면 이해가 가지만
환자가 많다면 이렇게 한가하게 인터넷 해도 돼나요^^'
좋은 뜻으로 드린 말씀이니까
기분 나쁘게 생각지는 마십시요.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그 열정이 부러버서 한 번 해 본 소립니다.
대단하십니다.
다비안에 그렇게 열정적으로 참여하시는 걸 보니...
개인정보를 클릭해보니 의사신것 같은데.
환자가 별로 없으신가요?
그렇다면 이해가 가지만
환자가 많다면 이렇게 한가하게 인터넷 해도 돼나요^^'
좋은 뜻으로 드린 말씀이니까
기분 나쁘게 생각지는 마십시요.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그 열정이 부러버서 한 번 해 본 소립니다.
2008.07.12 15:10:06
닥터 케이님. 첫날처럼님. 그리고 바우로님. 제가 다비아에서 꼭 읽는 제가 평소 궁금했던 점을 속시원히 질문하시고 항상 어느 목사님이나 장로님 못지않는 답변을 주신 제가 참 즐겨 읽는 글을 쓰시는 분들이죠. 항상 존경하고 감사드립니다.
저 역시 닥터 케이님과 비슷한 질문을 가졌고 아직도 답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제가 알고 있기로는 기독교에서는 성삼위 일체설처럼 동정녀 탄생설을 정설로 믿고 있습니다. 바로 닥터 케이님께서 반바하셨던 성경에 근거해서.
예수님이 과연 하나님이실까? 과연 여호와가 진짜 신이고 부처나 알라는 우상일까? 논쟁으로써는 누가 옳다고 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누구나 증거없이 자신일 옳다고 우길테니깐요. 기독교인이 절대적으로 믿는 성경도 증거로 채택은 될 수 없죠. 이슬람교는 코란이 옳다고 우길테니깐요.
성삼위 일체를 않 믿으면 일단 기독교가 아니죠 -- 옳고 그름을 떠나서. 여호와의 증인은 예수님은 신이 아니시라고 하는데 그들이 틀리다고 증명할 순 없죠. 단지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죠. 그처럼 제가 알고 있기로는 성모 탄생설을 기독교에서는 정설로 받아 들이죠.
단 닥터 케이님 말씀대로 이해는 안갈 수 있지만 이해가 안간다고 믿지 않으면 더이상 기독교 신자가 아니겠죠.
저 역시 닥터 케이님과 비슷한 질문을 가졌고 아직도 답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제가 알고 있기로는 기독교에서는 성삼위 일체설처럼 동정녀 탄생설을 정설로 믿고 있습니다. 바로 닥터 케이님께서 반바하셨던 성경에 근거해서.
예수님이 과연 하나님이실까? 과연 여호와가 진짜 신이고 부처나 알라는 우상일까? 논쟁으로써는 누가 옳다고 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누구나 증거없이 자신일 옳다고 우길테니깐요. 기독교인이 절대적으로 믿는 성경도 증거로 채택은 될 수 없죠. 이슬람교는 코란이 옳다고 우길테니깐요.
성삼위 일체를 않 믿으면 일단 기독교가 아니죠 -- 옳고 그름을 떠나서. 여호와의 증인은 예수님은 신이 아니시라고 하는데 그들이 틀리다고 증명할 순 없죠. 단지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죠. 그처럼 제가 알고 있기로는 성모 탄생설을 기독교에서는 정설로 받아 들이죠.
단 닥터 케이님 말씀대로 이해는 안갈 수 있지만 이해가 안간다고 믿지 않으면 더이상 기독교 신자가 아니겠죠.
2008.07.12 16:42:41
닥터케이 님 처럼 말씀하시면 기독교의 전통으로 고백되어 오는 수 많은 교리들을 다 까부수어 버릴수도 있겠습니다. 이런 식인거지요? "전통적인 해석도 옳고 내가 이야기 하는것도 기독교의 근간을 흔들어 버릴 일은 아니다" 닥터케이 님 전통과 보편성이 진리는 아니지만 굉장히 소중한 것이고 어떤 사안을 평가하고 정리할 때는 큰 비중을 차지해야할 것들 아닌가요? 님께서 여러 신학자들이 주장했다고 하는데 그 신학자가 누굽니까? 한번 밝혀보시지요? 저는 적어도 다비아가 기독교의 전통적 신앙고백에 동의하는 곳으로 알고 있는데(물론 닥터케이 님이 대표는 아니지만) 점점 조금 심하다고 느낄정도의 방향으로 가는것 아닌가요?
2008.07.12 17:18:56
이제 여기는 "동정녀 탄생 " 론이 불붙엇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역사적 사실이나 생리적일로는 맏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믿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에 나오는 "처녀탄생" 예언에서 "처녀" 란 단어가 희브리어로 그냥 "여인 " 이란 (성숙한 여인) 말이라고 한답니다(희브리어는 잘 모르니 ...) 그러니 기독교 입장에서 "동정녀" 로 강조하는 것은 역사적인 현실 보다는 신앙적인 면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런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신앙적이거나 교리적인 것이 때로는 그 당시의 교회 혹은 교단 정치적인 이해에 의해서 결정되는 수가 많다고 합니다. 어느 저명한 신학자가 말하는데 '삼위일체" 교리가 그당시의 황제와 교회의 정치적인 결정이 많이 작용했다고 하는 강의를 들은적이 잇습니다. 결국 인간이 하는 일이니요...그래서 좀더 정직한 연구가 필요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초록새"님 무얼 하시는 분인지 모르지만 "남의 개인 정보를 이용해서 인신공격적인 말은 옳지 않은것 같습니다. 케이님이 의사이시던, 한가하시던 무슨 상관입니가? 그런 시비는 좋은 것 같지 않습니다...공연히 기어들었습니다. "흥정은 붙이고 싸움은 말리라"는 속담도 있지요 ...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믿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에 나오는 "처녀탄생" 예언에서 "처녀" 란 단어가 희브리어로 그냥 "여인 " 이란 (성숙한 여인) 말이라고 한답니다(희브리어는 잘 모르니 ...) 그러니 기독교 입장에서 "동정녀" 로 강조하는 것은 역사적인 현실 보다는 신앙적인 면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런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신앙적이거나 교리적인 것이 때로는 그 당시의 교회 혹은 교단 정치적인 이해에 의해서 결정되는 수가 많다고 합니다. 어느 저명한 신학자가 말하는데 '삼위일체" 교리가 그당시의 황제와 교회의 정치적인 결정이 많이 작용했다고 하는 강의를 들은적이 잇습니다. 결국 인간이 하는 일이니요...그래서 좀더 정직한 연구가 필요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초록새"님 무얼 하시는 분인지 모르지만 "남의 개인 정보를 이용해서 인신공격적인 말은 옳지 않은것 같습니다. 케이님이 의사이시던, 한가하시던 무슨 상관입니가? 그런 시비는 좋은 것 같지 않습니다...공연히 기어들었습니다. "흥정은 붙이고 싸움은 말리라"는 속담도 있지요 ...
2008.07.12 19:35:04
동정녀 탄생의 핵심은 기독론에 있습니다.
예수를 어찌 봐야 하는지에 대한 신학적 담론이 맺은 결론이라고 봐야 겠지요.
즉 예수의 정체에 대한 초기 교회의 열렬한 논의가 정리된 것이 동정녀 탄생으로 봐야 겠지요.
예수를 어찌 봐야 하는지에 대한 신학적 담론이 맺은 결론이라고 봐야 겠지요.
즉 예수의 정체에 대한 초기 교회의 열렬한 논의가 정리된 것이 동정녀 탄생으로 봐야 겠지요.
2008.07.12 22:22:17
성경이외의 기독교 신앙전통도 무척이나 소중하고 중요합니다. 장구한 세월을 거쳐 형성된 의미를 우리시대의 시각으로 자꾸 변형 시키려고 하는것은 전통적 신앙고백에 대한 중대한 도전입니다.
2008.07.12 22:47:20
이스턴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교리, 예전적 예배, 교회력과 성서정과에 따른 신앙생활등의 교회 전통은 비록 성서에 나오지는 않지만, 우리의 영성을 촉촉하고 풍성하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참, 제가 무책임한 말을 한다고 비판해주셨는데, 지적하신대로 말을 주의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2008.07.12 23:55:25
초록새님 : 비록 오해할 여지도 있기는 하지만 칭찬의 의미로 받아들이겠습니다 (^^)
이스턴님: 제 말을 오해하고 있으신 것 같습니다. 제가 주장하는 것은 아무 이야기나 자기 마음대로 주장하면서 "전통적인 신앙도 맞고 내 생각도 맞으니 간섭하지 말라" 는 식의 무책임한 이야기를 해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비록 전통적인 교리로 전해 내려오는 내용들이라 하더라도 오늘날의 시각에서 새로운 해석을 해볼만한 충분한 근거들이 발견된다면 도전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도그마는 절대로 건드리거나 의심해서는 안되는 신성한 것들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축자영감설과 같은 근본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가 바람직하지 않은것은 이미 사도행전에서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 라는 평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자기가 받은 말씀이 진짜로 그러한가 늘 상고해보는 자세가 바람직한 것이라는 말씀을 이미 성경이 스스로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을 파괴하고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사악한 목적이 아닌 정당한 의문제기는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의문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신학과 신앙이 발전하고 새로운 비전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장구한 세월을 거쳐 형성된 의미를 우리시대의 시각으로 자꾸 변형 시키려고 하는것은 전통적 신앙고백에 대한 중대한 도전입니다" 라고 하셨는데, 신앙의 고백은 우리가 살고있는 "지금 이곳에서 (now and here)" 최종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전통의 현대적 계승 발전이 있을때 비로서 전통이 참된 의미를 가지는 것이지, 교조적으로 과거의 신조를 문자적으로 되뇌이는 것은 살아있는 신앙고백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턴님: 제 말을 오해하고 있으신 것 같습니다. 제가 주장하는 것은 아무 이야기나 자기 마음대로 주장하면서 "전통적인 신앙도 맞고 내 생각도 맞으니 간섭하지 말라" 는 식의 무책임한 이야기를 해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비록 전통적인 교리로 전해 내려오는 내용들이라 하더라도 오늘날의 시각에서 새로운 해석을 해볼만한 충분한 근거들이 발견된다면 도전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도그마는 절대로 건드리거나 의심해서는 안되는 신성한 것들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축자영감설과 같은 근본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가 바람직하지 않은것은 이미 사도행전에서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 라는 평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자기가 받은 말씀이 진짜로 그러한가 늘 상고해보는 자세가 바람직한 것이라는 말씀을 이미 성경이 스스로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을 파괴하고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사악한 목적이 아닌 정당한 의문제기는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의문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신학과 신앙이 발전하고 새로운 비전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장구한 세월을 거쳐 형성된 의미를 우리시대의 시각으로 자꾸 변형 시키려고 하는것은 전통적 신앙고백에 대한 중대한 도전입니다" 라고 하셨는데, 신앙의 고백은 우리가 살고있는 "지금 이곳에서 (now and here)" 최종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전통의 현대적 계승 발전이 있을때 비로서 전통이 참된 의미를 가지는 것이지, 교조적으로 과거의 신조를 문자적으로 되뇌이는 것은 살아있는 신앙고백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008.07.13 00:23:21
제가 꼭지글에서 언급하였던 동정녀 탄생 전승의 역사성에 관한 의문은 이미 수십년 전부터 신학계에서 "역사적 예수" 라는 테마를 연구하면서 함께 다루어져 왔던 것인데, 이와 관련된 학자들만 해도 너무 많아서 도저히 일일이 다 거론할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관심이 있으시다면 "역사적 예수 연구" 라는 테마와 관련된 신학 서적을 몇권 구하셔서 직접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도저히 게시판에서 그 내용들을 다 언급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굳이 관련된 유명한 몇몇 신학자들의 이름을 거론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마커스 보그, 도미닉 크로산, 에른스트 케제만, 귄터 보른캄, 톰 라이트, 로버트 펑크, 정승우, 김준우 교수 등)
물론, 이러한 "역사적 예수" 연구들의 내용이 다 옳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이미 20세기 초반에 신학계의 거장 루돌프 불트만은 사료의 제한으로 인해 신뢰할만한 역사적 예수 연구가 불가능함을 주장했으며, 케리그마의 예수로서 신앙에 충분하기 때문에 구태여 가능하지도 않은 역사적 예수 연구를 진행할 이유가 없다고까지 말했었습니다. 비록, 그의 제자들에 의해 불트만의 주장이 거부되기는 했습니다만, 그만큼 역사적 예수의 본모습을 온전하게 찾아낸다는 것이 어려운 명제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따라서,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주장을 모두 신뢰할 수 없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성경을 접근해보는 시도를 하는 것에는 충분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시도를 통해 새로운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고 더 깊은 신학적 사유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릴 가능성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역사적 예수" 연구들의 내용이 다 옳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이미 20세기 초반에 신학계의 거장 루돌프 불트만은 사료의 제한으로 인해 신뢰할만한 역사적 예수 연구가 불가능함을 주장했으며, 케리그마의 예수로서 신앙에 충분하기 때문에 구태여 가능하지도 않은 역사적 예수 연구를 진행할 이유가 없다고까지 말했었습니다. 비록, 그의 제자들에 의해 불트만의 주장이 거부되기는 했습니다만, 그만큼 역사적 예수의 본모습을 온전하게 찾아낸다는 것이 어려운 명제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따라서,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주장을 모두 신뢰할 수 없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성경을 접근해보는 시도를 하는 것에는 충분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시도를 통해 새로운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고 더 깊은 신학적 사유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릴 가능성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2008.07.13 01:47:29
사실, 이러한 이야기를 꺼내기가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근본주의적 신앙교육에 뼛속깊이 젖어있는 신자들에게 동정녀 탄생과 같은 중요한 교리가 역사적으로는 사실이 아닐수도 있다는 말을 함으로써 자칫 그분들에게 소위 말하는 "시험들게 하여 신앙을 떠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까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가 이런 괴로움을 오랫동안 겪어봤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럽습니다).
한국의 신자들은 순수한 신앙과 열정을 가지고 있는 훌륭한 면이 있지만, 동시에 조금만 깊은 신학적인 테마를 제시하면 이해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어떤분들은 이런 내용들을 어설프게 이해함으로써 오히려 신앙에서 멀어지는 부작용을 겪는 경우도 주변에서 자주 봅니다. 그래서, 저도 다른 곳에서는 가급적이면 통상적인 신앙상담만 해주고 맙니다. 신앙의 성숙을 위한 신학적 토론이 상대방을 회의와 불신의 세계로 밀어낸다면 굳이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 생각하니까요. 단지, 다비아와 같은 그래도 약간은 성숙한(?) 사이트에서만 이런 이야기들을 꺼내는 것입니다. 다비아를 찾아 오시는 분들이라면 그래도 어느 정도 딱딱한 음식들을 씹어서 소화시킬 수 있는 자질이 있는 분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고싶은 말의 핵심은, 중요한 교리라고 해서 의문조차 가지지 말고 믿으라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세뇌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나의 신앙고백은 충분한 신학적 사유와 신앙적 고민을 거친 뒤에 최종적으로 내 삶을 바꾸어 놓는 힘을 발휘하는 나의 것이라야 합니다. 고민하지 않고 세뇌된 신앙은 삶을 변혁시킬 능력이 없습니다.
한국의 신자들은 순수한 신앙과 열정을 가지고 있는 훌륭한 면이 있지만, 동시에 조금만 깊은 신학적인 테마를 제시하면 이해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어떤분들은 이런 내용들을 어설프게 이해함으로써 오히려 신앙에서 멀어지는 부작용을 겪는 경우도 주변에서 자주 봅니다. 그래서, 저도 다른 곳에서는 가급적이면 통상적인 신앙상담만 해주고 맙니다. 신앙의 성숙을 위한 신학적 토론이 상대방을 회의와 불신의 세계로 밀어낸다면 굳이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 생각하니까요. 단지, 다비아와 같은 그래도 약간은 성숙한(?) 사이트에서만 이런 이야기들을 꺼내는 것입니다. 다비아를 찾아 오시는 분들이라면 그래도 어느 정도 딱딱한 음식들을 씹어서 소화시킬 수 있는 자질이 있는 분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고싶은 말의 핵심은, 중요한 교리라고 해서 의문조차 가지지 말고 믿으라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세뇌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나의 신앙고백은 충분한 신학적 사유와 신앙적 고민을 거친 뒤에 최종적으로 내 삶을 바꾸어 놓는 힘을 발휘하는 나의 것이라야 합니다. 고민하지 않고 세뇌된 신앙은 삶을 변혁시킬 능력이 없습니다.
2008.07.13 02:21:38
닥터케이님의 글을 읽으니 작년 성서공부시간에 역사적예수와 신앙으로서의 그리스도를 공부하며 겪었던 마음고생이 기억납니다. 또 다시 가슴이 두근거리네요.^^ 한달 정도 공부하고 일년정도 시험들고...그러는 중 하느님으로 고백되어질 수 밖에 없는 그분! 예수그리스도와 새롭게 다시 만나게 되었던것 같습니다.
진정한 신앙의 힘은 미화(?)된 내용이 아닌 진실..혹은 진실에 더 가까운 것을 알아가면서 생기게 된다. 라고
그때 공부한 교재 귀퉁이에 제가 적어놓았네요. 아마 신부님의 맺음말 이었던것 같습니다.
교리..신조 ...전통....그러한 것들은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갇히는 감옥 같은 것이 아닌 그것을 통해 하느님을 보는 렌즈로 기능하는 것 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회 성서공부에서 신부님이 이런 주제로 강의하셨는데 결론은 매우 유익했다 입니다.
그러다 제가 오버를 좀해서 새로운 이단이 나왔다며 함께 크게 웃기도 했지요.(다빈치코드 들먹이며 예수님이 결혼을 했으면 또 어떠냐고....그랬거든요)
닥터케이님은 통합교회나 합동보다는 우리 성공회쪽이 더 편안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진정한 신앙의 힘은 미화(?)된 내용이 아닌 진실..혹은 진실에 더 가까운 것을 알아가면서 생기게 된다. 라고
그때 공부한 교재 귀퉁이에 제가 적어놓았네요. 아마 신부님의 맺음말 이었던것 같습니다.
교리..신조 ...전통....그러한 것들은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갇히는 감옥 같은 것이 아닌 그것을 통해 하느님을 보는 렌즈로 기능하는 것 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회 성서공부에서 신부님이 이런 주제로 강의하셨는데 결론은 매우 유익했다 입니다.
그러다 제가 오버를 좀해서 새로운 이단이 나왔다며 함께 크게 웃기도 했지요.(다빈치코드 들먹이며 예수님이 결혼을 했으면 또 어떠냐고....그랬거든요)
닥터케이님은 통합교회나 합동보다는 우리 성공회쪽이 더 편안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2008.07.13 07:08:19
닥터케이 님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들의 신앙과 신학이 최종적으로 완성되어진다면 기독교 신앙에는 그 어떤 확실한것도 없다고 할수 있겠네요? 죽음이후의 심판, 하나님의 존재 여부, 동정녀 탄생, 대속적 교리의 전면적 재해석, 예수 부활의 확실성등등 앞으로 이 모든 사안들에 대해서 시대가 요구하는 대로 그리고 특정 신학의 방향대로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겠네요? 그러면 우리가 전통적으로 고백해오는 사도신경과 같은 것들 무엇하러 고백합니까? 그것을 고백할 떄의 목적이 여러가지가 있지만 우리가 동일한 신앙 고백을 하는 자들이라는 하나됨의 의미가 그 가운데 있다고 저는 믿는데... 알고보니 서로가 전혀 다른 차원에서 그 의미를 받아들이고 있으니 말입니다. 자꾸 근본주의라고 하시는데요. 저 근본주의자 아닙니다. 동정녀 탄생의 문자적 의미를 인정하면 근본주의자 입니까? 동정녀 탄생의 문맥적 의미를 자꾸 이상한 쪽으로 몰고 가지 마십시오. 세상 어떤 기독교 집단중에 이 의미를 그 자체로 믿지않고 다르게 믿는다 말입니까? 도대체 그곳이 어디입니까?
2008.07.13 07:49:00
이스턴 님... "동정녀 탄생"을 문자적으로 믿는다는 것을, 틀림없는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도 될는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동정녀 탄생" 에 대해서는 믿는다고도, 안믿는다고도 못하겠습니다. 믿고 안 믿고는 저의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으로, 판단보류로 남겨두는 것이 더 정당하지 않을까요?
저는 "동정녀 탄생" 이 원래적으로 말하려고 하는 의도는 "예수의 성령 잉태" 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성령 잉태가 신앙고백에 있어서는 실은 더 중요한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유를 하자면 아주 뛰어난 작품 - 예수의 성령 잉태 -이 하나 있는데 그 작품을 멋지게 장식하는 "액자"가 바로 "동정녀 탄생" 이라는 액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보수적이라고 하는 신앙인들을 보면 그 액자에 담긴 작품은 뒤로한채, 액자에만 매달리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동정녀 탄생" 에 대해서는 믿는다고도, 안믿는다고도 못하겠습니다. 믿고 안 믿고는 저의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으로, 판단보류로 남겨두는 것이 더 정당하지 않을까요?
저는 "동정녀 탄생" 이 원래적으로 말하려고 하는 의도는 "예수의 성령 잉태" 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성령 잉태가 신앙고백에 있어서는 실은 더 중요한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유를 하자면 아주 뛰어난 작품 - 예수의 성령 잉태 -이 하나 있는데 그 작품을 멋지게 장식하는 "액자"가 바로 "동정녀 탄생" 이라는 액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보수적이라고 하는 신앙인들을 보면 그 액자에 담긴 작품은 뒤로한채, 액자에만 매달리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2008.07.13 16:48:50
닥터게이 님,
이거 어쩌지요?
닥터케이 님의 꼭지글을 실수로 지웠네요.
원래는 대글로 제 글을 달았다가
영문자가 나오지 않기에 다시 수정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꼭지글로 대체되고 말았어요.
혹시 원본이 살아 있으면 그걸 다시 여기 꼭지로 올려주세요.
그러면 제 글을 대글로 옮기겠어요.
어제 속리산에 다녀오고,
오늘 주일예배 마치고,
조금 정신이 없었나보네요.
닥터케이 님,
죄송!
이거 어쩌지요?
닥터케이 님의 꼭지글을 실수로 지웠네요.
원래는 대글로 제 글을 달았다가
영문자가 나오지 않기에 다시 수정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꼭지글로 대체되고 말았어요.
혹시 원본이 살아 있으면 그걸 다시 여기 꼭지로 올려주세요.
그러면 제 글을 대글로 옮기겠어요.
어제 속리산에 다녀오고,
오늘 주일예배 마치고,
조금 정신이 없었나보네요.
닥터케이 님,
죄송!
2008.07.13 22:10:06
닥터케이 님이 기억을 더듬어 꼭지글을 다시 올려주셨군요.
기억력이 좋군요.
이런 건 기억력이라기보다는
자기의 정신세계가 일정한 관점을 이루었다는 의미이겠지요.
사유도 독특한 길과 색깔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혼란하면서 칙칙한 길이고,
어떤 사람은 고유한 경향성을 보이면서 투명하지요.
그 사유의 길이 깊어질 수록,
그 사람은 어디에 갖다 놓아도 길을 잃지 않고 다시 길을 찾지요.
닥터케이 님에게 없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평신도 신학자가 나올 수고 있어요.
물론 이제 첫걸음이겠지만요.
아자.
기억력이 좋군요.
이런 건 기억력이라기보다는
자기의 정신세계가 일정한 관점을 이루었다는 의미이겠지요.
사유도 독특한 길과 색깔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혼란하면서 칙칙한 길이고,
어떤 사람은 고유한 경향성을 보이면서 투명하지요.
그 사유의 길이 깊어질 수록,
그 사람은 어디에 갖다 놓아도 길을 잃지 않고 다시 길을 찾지요.
닥터케이 님에게 없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평신도 신학자가 나올 수고 있어요.
물론 이제 첫걸음이겠지만요.
아자.
2008.07.14 11:26:00
정목사님 : 장문의 댓글로 논쟁의 핵심을 찔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깜빡 놓칠뻔한 중요한 부분을
지적해주신 날카로움에 감탄하였습니다.
이스턴님 : 사도신경과 같은 공동의 신조를 고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신조는 어디까지나 신학적 해석의 압축판이지 그 자체가 만고불변의 존재는 아닙
니다. 즉, 신조는 신학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지요.
텍스트와 컨텍스트간의 긴장을 해소하는 것이 신학의 기능이라면, 텍스트는 변하지 않으나
텍스트를 둘러싼 컨텍스트(신자들이 살아가는 오늘의 환경)는 변하기 마련이므로 시대가 바뀌
면 신학적 사유 역시 새롭게 시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조의 현대적 해석
또한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며, 실제로도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 새로운 해석과 적용들이 시도되
고 있습니다.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사도신경 해설서가 두가지 있는데, 하나는 칼 바르트의
사도신경 해설이고 (문장이 좀 어렵습니다..), 다른 하나는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 해설입니다.
기회되시면 한번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두분의 현대적 해석이 과거의 전통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잘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턴님이 그토록 중시하는 사도신경이 모든 기독교회가 공동으로 고백하는 신조가
아니라는 것도 이 기회에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단적인 예로, 대부분의 침례교회는 사도신경
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당연히 예배중에 공동으로 고백하지도 않습니다. 사도신경의 거부,
유아세례 거부, 세례받은 자라도 진정으로 회개할때 다시 침례받아야 한다는 교리들 때문에
200-300년전에는 장로교도들로부터 이단으로 몰려 수많은 박해를 받고 순교당하기까지 했던
어두운 역사가 개신교 내에도 존재합니다. 침례교도들은 지금도 그런 순교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행위를 아주 경멸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침례교회가 이단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렇듯, 같은 그리스도안의 형제 교회라 할지라도 그 안에는 다양한 신앙관과 신학관이 존재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용납하시는 것이 더 넓고 깊은 신앙의 사유로 들어가는 지름길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적해주신 날카로움에 감탄하였습니다.
이스턴님 : 사도신경과 같은 공동의 신조를 고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신조는 어디까지나 신학적 해석의 압축판이지 그 자체가 만고불변의 존재는 아닙
니다. 즉, 신조는 신학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지요.
텍스트와 컨텍스트간의 긴장을 해소하는 것이 신학의 기능이라면, 텍스트는 변하지 않으나
텍스트를 둘러싼 컨텍스트(신자들이 살아가는 오늘의 환경)는 변하기 마련이므로 시대가 바뀌
면 신학적 사유 역시 새롭게 시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조의 현대적 해석
또한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며, 실제로도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 새로운 해석과 적용들이 시도되
고 있습니다.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사도신경 해설서가 두가지 있는데, 하나는 칼 바르트의
사도신경 해설이고 (문장이 좀 어렵습니다..), 다른 하나는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 해설입니다.
기회되시면 한번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두분의 현대적 해석이 과거의 전통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잘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턴님이 그토록 중시하는 사도신경이 모든 기독교회가 공동으로 고백하는 신조가
아니라는 것도 이 기회에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단적인 예로, 대부분의 침례교회는 사도신경
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당연히 예배중에 공동으로 고백하지도 않습니다. 사도신경의 거부,
유아세례 거부, 세례받은 자라도 진정으로 회개할때 다시 침례받아야 한다는 교리들 때문에
200-300년전에는 장로교도들로부터 이단으로 몰려 수많은 박해를 받고 순교당하기까지 했던
어두운 역사가 개신교 내에도 존재합니다. 침례교도들은 지금도 그런 순교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행위를 아주 경멸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침례교회가 이단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렇듯, 같은 그리스도안의 형제 교회라 할지라도 그 안에는 다양한 신앙관과 신학관이 존재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용납하시는 것이 더 넓고 깊은 신앙의 사유로 들어가는 지름길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2008.07.14 13:26:38
닥터케이 님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셨습니다.
"이스턴님이 그토록 중시하는 사도신경이 모든 기독교회가 공동으로 고백하는 신조가
아니라는 것도 이 기회에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단적인 예로, 대부분의 침례교회는 사도신경
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당연히 예배중에 공동으로 고백하지도 않습니다. 사도신경의 거부,
유아세례 거부, 세례받은 자라도 진정으로 회개할때 다시 침례받아야 한다는 교리들 때문에
200-300년전에는 장로교도들로부터 이단으로 몰려 수많은 박해를 받고 순교당하기까지 했던
어두운 역사가 개신교 내에도 존재합니다. 침례교도들은 지금도 그런 순교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행위를 아주 경멸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침례교회가 이단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지요?
침례교회가 사도신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요? 누가 그런 소리를 합니까? 침례교인들이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것이 아니라 그 내용과 중요성을 다 인정하지만 신조나 신경을 공식화해서 사용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리고 작금의 침례교회에서는 사도신경을 사용하는 교회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리고 세례받은 자라도 진정으로 회개할 때 다시 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교리 같은 것은 침례교회에는 없습니다. 신자의 침례를 주장할 뿐이지 지금 현재 어느 침례교회에서 그런 짓을 한다 말입니까? 그것은 침례교회의 공식 입장이라기 보다는 각 목사들의 취향입니다. 절대로 침례교회의 공식입장이 아닙니다. 그리고 침례교회가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행위를 경멸한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사실 관계 자체를 극단적으로 왜곡하신것입니다. 대한민국에 있는 침례교회 중에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교회가 아주 많습니다. 그리고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그 누구도 경멸하지 않습니다.
"이스턴님이 그토록 중시하는 사도신경이 모든 기독교회가 공동으로 고백하는 신조가
아니라는 것도 이 기회에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단적인 예로, 대부분의 침례교회는 사도신경
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당연히 예배중에 공동으로 고백하지도 않습니다. 사도신경의 거부,
유아세례 거부, 세례받은 자라도 진정으로 회개할때 다시 침례받아야 한다는 교리들 때문에
200-300년전에는 장로교도들로부터 이단으로 몰려 수많은 박해를 받고 순교당하기까지 했던
어두운 역사가 개신교 내에도 존재합니다. 침례교도들은 지금도 그런 순교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행위를 아주 경멸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침례교회가 이단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지요?
침례교회가 사도신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요? 누가 그런 소리를 합니까? 침례교인들이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것이 아니라 그 내용과 중요성을 다 인정하지만 신조나 신경을 공식화해서 사용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리고 작금의 침례교회에서는 사도신경을 사용하는 교회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리고 세례받은 자라도 진정으로 회개할 때 다시 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교리 같은 것은 침례교회에는 없습니다. 신자의 침례를 주장할 뿐이지 지금 현재 어느 침례교회에서 그런 짓을 한다 말입니까? 그것은 침례교회의 공식 입장이라기 보다는 각 목사들의 취향입니다. 절대로 침례교회의 공식입장이 아닙니다. 그리고 침례교회가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행위를 경멸한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사실 관계 자체를 극단적으로 왜곡하신것입니다. 대한민국에 있는 침례교회 중에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교회가 아주 많습니다. 그리고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그 누구도 경멸하지 않습니다.
2008.07.14 13:55:17
님이 몸 담았던 침례교회가 "기독교 한국 침례회" 아닌가요? 저는 적어도 침례교회의 현 상황에 대해서는 님보다 정보적인 차원에서는 훨씬 깊은 내용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임을 자부합니다.(결코 저의 자랑이나 내세움이 아니라는것 밝혀둡니다.) 침례교가 단일한 교리를 주장하는 교단이 아니라는 말씀은 구원론에 해당하는 이야기이지 다른 부분은 굉장히 통일성 있는 주장들을 교단과 지방회 차원에서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침례교 내에 다양한 분파가 있다는 말도 정확한 팩트에 근거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침례교 내에는 다양한 분파가 없습니다. 무슨 분파가 있는지 알고 계시다면 소개해주세요. 어찌되었던 결론은 이렇습니다. 침례교회도 성령으로 동정녀에게(문자적의미) 나셨다는 사도신경의 고백을 존중하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고백한다는 것입니다.(어떤교회는 사도신경의 형식으로 다른교회는 사도신경을 하지 않더라도 다른 형식으로) 님께서 침례교회의 예를 들면서 침례교회는 사도신경을 존중하지 않고 오히려 경멸한다고 하신 내용은 전혀 사실관계와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2008.07.14 14:21:42
"침례교회라는 자체가 단일한 교리나 제도를 갖춘 교파가 아니기 때문에 침례교회 안에서도 각 분파별로 주장하는 내용이나 신학적 색채나 분위기가 조금식 다르기는 합니다"
님이 계속해서 위와 같은 주장을 하시는데요. 침례교 내에는 분파가 없습니다. 무슨 분파가 있습니까? 있다면 소개를 좀 해주세요. 침례교회가 단일한 교단으로 지금까지 유지대고 있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침례교 내에서 어떤 분파가 있어 신학적 색채나 분위기가 조금식 다른것은 전혀없습니다. 오히려 장로교나 타교단이 그런 부분이 더 강하지요. 침례교는 사실은 굉장히 통일성 있는 주장들을 가지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교단입니다. 민주적 회중정체를 표방하는 침례교회의 큰 강점입니다. 그리고 침례교에서 거의 30년 넘는 세월을 보내고 있지만 그 어떤 목사님이나 성도들도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사람은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타 교단 사람들은 예배시간에 사도신경을 통해서 믿음을 고백하고 우리는 하는 곳도 있고 하지 않는 교회도 있다 정도의 분위기지 무슨 경멸을 한다 말입니까?
"이스턴님이 참고하셔야 할 것은, 한국의 교단화한 침례교회의 분위기는 세계적인 침례교회 (특히 미국의 침례교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와는 좀 다르다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미국의 남침례교단에 유학하고 있는 한국학생들이 1000명도 넘습니다. 한국의 침례교회 미국의 남침례교회는 거의 똑같은 시스템 안에서 움직이고 있고 차이점은 거의 없습니다. 신학대학의 교수님들의 90프로 이상이 미국남침례교 신학교 출신들입니다. 그 아래에서 배우는 학생들이 미국과 다른 나라의 침례교회와 다른 이상과 주장을 가지고 있다는것은 전혀 사실에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님이 계속해서 위와 같은 주장을 하시는데요. 침례교 내에는 분파가 없습니다. 무슨 분파가 있습니까? 있다면 소개를 좀 해주세요. 침례교회가 단일한 교단으로 지금까지 유지대고 있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침례교 내에서 어떤 분파가 있어 신학적 색채나 분위기가 조금식 다른것은 전혀없습니다. 오히려 장로교나 타교단이 그런 부분이 더 강하지요. 침례교는 사실은 굉장히 통일성 있는 주장들을 가지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교단입니다. 민주적 회중정체를 표방하는 침례교회의 큰 강점입니다. 그리고 침례교에서 거의 30년 넘는 세월을 보내고 있지만 그 어떤 목사님이나 성도들도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사람은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타 교단 사람들은 예배시간에 사도신경을 통해서 믿음을 고백하고 우리는 하는 곳도 있고 하지 않는 교회도 있다 정도의 분위기지 무슨 경멸을 한다 말입니까?
"이스턴님이 참고하셔야 할 것은, 한국의 교단화한 침례교회의 분위기는 세계적인 침례교회 (특히 미국의 침례교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와는 좀 다르다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미국의 남침례교단에 유학하고 있는 한국학생들이 1000명도 넘습니다. 한국의 침례교회 미국의 남침례교회는 거의 똑같은 시스템 안에서 움직이고 있고 차이점은 거의 없습니다. 신학대학의 교수님들의 90프로 이상이 미국남침례교 신학교 출신들입니다. 그 아래에서 배우는 학생들이 미국과 다른 나라의 침례교회와 다른 이상과 주장을 가지고 있다는것은 전혀 사실에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2008.07.14 15:02:21
음... 이거 점점 글이 삼천포로 빠지는 느낌입니다... 뜬금없이 침례교회로 주제가 옮겨지다니...
어쨌든, 말 나온 김에 한두마디만 더 하고 그만하겠습니다.
이스턴님은 침례교회가 분파가 없다고 하셨는데, 미국만 해도 신학적인 입장 차이로 인해 북침례교단과 남침례교단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또한, 침례교회 중에서도 비교적 근본주의적 성향이 강한 성서침례교회 (구원파 계열의 성경침례교회와는 다름) 가 한국에 전파되어 기타 침례교회와는 또 조금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일반적인 침례교회와는 다른 계열의 그룹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서침례교회는 침례신학대학교와는 다른 신학교를 자체적으로 운영할 정도로 일반적인 침례교회들과는 색채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제가 다녔던 교회는 성서침례교회였는데, 역시 일반적인 한국의 침례교회들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긴 달랐나 봅니다. 거기서는 실제로 사도신경 암송이나 심지어는 주기도문 암송도 극히 터부시하였거든요. 이스턴님이 그토록 제 의견에 동의하기 힘드시다면, 위에서 제가 언급했던 침례교회에 관한 모든 이야기들을 "성서침례교회"에 국한된 이야기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말 나온 김에 한두마디만 더 하고 그만하겠습니다.
이스턴님은 침례교회가 분파가 없다고 하셨는데, 미국만 해도 신학적인 입장 차이로 인해 북침례교단과 남침례교단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또한, 침례교회 중에서도 비교적 근본주의적 성향이 강한 성서침례교회 (구원파 계열의 성경침례교회와는 다름) 가 한국에 전파되어 기타 침례교회와는 또 조금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일반적인 침례교회와는 다른 계열의 그룹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서침례교회는 침례신학대학교와는 다른 신학교를 자체적으로 운영할 정도로 일반적인 침례교회들과는 색채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제가 다녔던 교회는 성서침례교회였는데, 역시 일반적인 한국의 침례교회들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긴 달랐나 봅니다. 거기서는 실제로 사도신경 암송이나 심지어는 주기도문 암송도 극히 터부시하였거든요. 이스턴님이 그토록 제 의견에 동의하기 힘드시다면, 위에서 제가 언급했던 침례교회에 관한 모든 이야기들을 "성서침례교회"에 국한된 이야기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2008.07.14 15:08:32
이스턴님: 제가 말씀드린 재침례 관련 이야기는 200-300년전에 있었던 사건을 말씀드린 것이거든요.
그리고, 지금도 대부분의 침례교회에서는 "구원받기 전에 받은" 유아세례나 일반세례에 대해 신자들
에게 다시 침례받을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물론, 정상적인 믿음을 가지고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들
에게까지 새로 침례받으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 부분은 이스턴님이 약간 오해하신 것 같군요.
사도신경에 관해서도 오해하신 부분이 있는데, "사도신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적었
습니다. 내용까지 틀렸다고 말한다는 그런 뜻이 아니거든요... 이 부분 역시 오해가 없으시길....
그리고, 사도신경에 관련된 이야기는 제가 3년간 몸담았던 침례교회에서 직접 겪은 일을 적었습니다.
이스턴님은 제가 사실관계를 극단적으로 왜곡시켰다고 하셨는데, 제가 직접 겪은 일들은 위에 언급한
내용에서 한 글자도 벗어나지 않는 분위기였다는걸 말씀드리고 싶군요. 너무 폐쇄적이고 약간은 독선
적인 느낌도 들고 해서 결국은 그 교회를 나와서 장로교회로 옮겼습니다만, 아무튼 그랬습니다.
또한, 이스턴님이 참고하셔야 할 것은, 한국의 교단화한 침례교회의 분위기는 세계적인 침례교회 (특히
미국의 침례교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와는 좀 다르다는 것입니다. 침례교회라는 자체가 단일한 교리나
제도를 갖춘 교파가 아니기 때문에 침례교회 안에서도 각 분파별로 주장하는 내용이나 신학적 색채나
분위기가 조금식 다르기는 합니다만, 이스턴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침례교회내에서도 사도신경을 공식
적으로 사용하는 교회가 늘고 있다는 것은 한국의 교단화된 거대 침례교회분파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전세계의 침례교회 전체를 놓고 볼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의 침례교단은 이상하게 장로교회의 분
위기에 동화되어 가는 느낌을 줍니다. 어떤 글에서 보니 침례교회내에 장로제도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
하는 침례교회 신자들도 있다고 하더군요...
어쨌든, 이스턴님은 침례교회가 사도신경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고백하는 행위를 경멸한다는 말에
동의하기 힘드신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일부 침례교회에서는 사도신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그러한
신조를 공석에서 암송하는 행위를 경멸하는 그룹도 있다" 라고 표현을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대부분의 침례교회에서는 "구원받기 전에 받은" 유아세례나 일반세례에 대해 신자들
에게 다시 침례받을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물론, 정상적인 믿음을 가지고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들
에게까지 새로 침례받으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 부분은 이스턴님이 약간 오해하신 것 같군요.
사도신경에 관해서도 오해하신 부분이 있는데, "사도신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적었
습니다. 내용까지 틀렸다고 말한다는 그런 뜻이 아니거든요... 이 부분 역시 오해가 없으시길....
그리고, 사도신경에 관련된 이야기는 제가 3년간 몸담았던 침례교회에서 직접 겪은 일을 적었습니다.
이스턴님은 제가 사실관계를 극단적으로 왜곡시켰다고 하셨는데, 제가 직접 겪은 일들은 위에 언급한
내용에서 한 글자도 벗어나지 않는 분위기였다는걸 말씀드리고 싶군요. 너무 폐쇄적이고 약간은 독선
적인 느낌도 들고 해서 결국은 그 교회를 나와서 장로교회로 옮겼습니다만, 아무튼 그랬습니다.
또한, 이스턴님이 참고하셔야 할 것은, 한국의 교단화한 침례교회의 분위기는 세계적인 침례교회 (특히
미국의 침례교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와는 좀 다르다는 것입니다. 침례교회라는 자체가 단일한 교리나
제도를 갖춘 교파가 아니기 때문에 침례교회 안에서도 각 분파별로 주장하는 내용이나 신학적 색채나
분위기가 조금식 다르기는 합니다만, 이스턴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침례교회내에서도 사도신경을 공식
적으로 사용하는 교회가 늘고 있다는 것은 한국의 교단화된 거대 침례교회분파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전세계의 침례교회 전체를 놓고 볼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의 침례교단은 이상하게 장로교회의 분
위기에 동화되어 가는 느낌을 줍니다. 어떤 글에서 보니 침례교회내에 장로제도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
하는 침례교회 신자들도 있다고 하더군요...
어쨌든, 이스턴님은 침례교회가 사도신경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고백하는 행위를 경멸한다는 말에
동의하기 힘드신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일부 침례교회에서는 사도신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그러한
신조를 공석에서 암송하는 행위를 경멸하는 그룹도 있다" 라고 표현을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2008.07.14 15:33:35
이스턴님의 말씀은 한국에서 말하는 침례교회는 "기독교 한국 침례회" 연합을 의미한다는 것이고
거기서 성서 침례교회는 제외된다는 것이지요...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위에 언급한 침례교회
와 관련된 모든 이야기들은 "성서 침례교회"에 국한된 이야기로 수정하기로 하겠습니다. 저는 성서 침례
교회도 침례회의 일부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군요.. (이렇게 말하니 꼭 성서침례교회가
무슨 이단교파처럼 느껴질수도 있겠는데, 전혀 그렇지는 않습니다. 미국에서는 남침례교단 다음으로
많은 교회이고 기본적인 교리도 매우 성경적입니다.)
아, 그리고, 지금은 성서침례교회 안 다닙니다. 너무 근본주의적이고 지나치게 외곬수적인 면이 강해서
저와 안맞는 면이 많다고 생각되어 옮긴지 오래입니다. 거기서는 제가 위에서 적은 그대로의 분위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어쨌든, 제게는 성서침례교회에서 받은 이미지가 너무 강했던 모양입니다. 긍정적
이든 부정적이든...
거기서 성서 침례교회는 제외된다는 것이지요...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위에 언급한 침례교회
와 관련된 모든 이야기들은 "성서 침례교회"에 국한된 이야기로 수정하기로 하겠습니다. 저는 성서 침례
교회도 침례회의 일부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군요.. (이렇게 말하니 꼭 성서침례교회가
무슨 이단교파처럼 느껴질수도 있겠는데, 전혀 그렇지는 않습니다. 미국에서는 남침례교단 다음으로
많은 교회이고 기본적인 교리도 매우 성경적입니다.)
아, 그리고, 지금은 성서침례교회 안 다닙니다. 너무 근본주의적이고 지나치게 외곬수적인 면이 강해서
저와 안맞는 면이 많다고 생각되어 옮긴지 오래입니다. 거기서는 제가 위에서 적은 그대로의 분위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어쨌든, 제게는 성서침례교회에서 받은 이미지가 너무 강했던 모양입니다. 긍정적
이든 부정적이든...
2008.07.14 15:45:18
역시.. 이야기가 왜 자꾸 이렇게 되는가 했더니만 님이 다니신 교회가 성서침례교회 셨군요. 엄밀히 말해서 성서침례교회는 기독교 한국 침례회에 소속된 교회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곳입니다. 침례라는 단어만 같이 사용할 뿐이지 전혀 상관이 없는곳입니다. 미국의 북침례교회를 언급하셨는데요 그 곳은 더욱이 상관이 없는 곳이고요. 님께서 그런 교회들도 제가 몸 담고 있는 침례교회와 동일한 교단으로 보신다면 제가 어쩔수 없겠지만 사실 저희들과는 아무런 커넥션이 없는곳입니다. 저는 미국 남침례교회와 한국의 기독교 한국 침례회를 말하는것이엇습니다. 그리고 한국적 상황에서 성서 침례교회를 다니신 경험을 침례교회에 다니셨다는 경험으로 생각하셔서 침례교회의 분위기를 설명하신것은 조금 넘어가신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성서 침례교회는 미국남침례교화 기독교 한국침례회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곳일 뿐만 아니라 한국내에서는 일반적으로 기독교 한국 침례회를 침례교회라고 보편적으로 이야기를 하지 성서 침례교회를 일반적인 의미에서 침례교회라고 말하지는 않거든요.
2008.07.14 15:52:36
그래서 말이지요. 닥터케이 님 원점으로 돌아가서 전세계 기독교 교단들중 성령으로 동정녀의 몸에서 나신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곳은 없다는 것입니다. 각 교단들 안에서 소수의견 형식으로 신학자나 평신도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것은 교단 전체의 의견으로 확정지어 줄수는 없는것 아니겠습니까? 옳은것도 아니고요. 그리고 닥터 케이님께서 소개해주신 신학자들은(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대부분 굉장히 치우쳐 계신 분들입니다. 인정하십니까? 그 분들 중에는 단순히 동정녀 탄생의 문자적 의미만을 부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대속적 속죄와 부활도 인정치 않는 자들도 제법 있습니다. 한마디로 굉장히 위험스러운 부분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방법론적으로 보면 뉴에이지 성향을 보이는 사람도 있고요. 우리의 신앙적 관점을 이런 자들로 부터 취한다고 하는것은 조금...... 어째든 동정녀 탄생의 문자적 의미 그대로를 믿지 않는 그룹은 기독교 내에서 극히 소수임을 밝혀두는 바입니다.
2008.07.14 17:15:33
동정녀: 남자와 성적 관계가 한 번도 없는 여자(국어사전)
동정녀 마리아의 잉태 : 남자와 성적 관계가 한 번도 없었던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함.
마리아는 동정녀였다 : 남자와 한번도 성적 관계가 없었다. 이것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는 말이라고 봅니다.
동정녀 탄생을 믿냐 못믿냐는 다른 말로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것을 믿냐 못믿냐가 되겠군요.
(다른 관점에서 동정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셩령으로 잉태할 수도 있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저는 성령으로 잉태하셨음을 믿습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면 아무 흠도 없다는 것을 부인해야 하고, 예수님께서 아무 흠도 없는 하나님이라는 것도 부인해야 하고, 그러면 저는 믿을 것이 없어질 것 같아서요.(자세히는 모릅니다.^^)
동정녀 마리아는 아무 흠도 없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흠이 있는 부모 사이에서 나온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성령으로 인하여 잉태를 하고 그리스도를 낳을 만큼 순수하고 하나님께 순종적이었다는 것은 사실일 것 같습니다. 그 순종(처녀(시집 안간 사람으로 일단 정의하고) 잉태하는 것이 그 시대에는 아주 심한 정죄를 당할때이니까요)이 마리아를 높이 볼 수 있는 조건이 아닐까요. 아브라함처럼..
그런데 성령으로 잉태했음을 믿으면서도 왠지 동정녀였냐 아니었느냐는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숫처녀가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성령으로 잉태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나 장애가 없었을 것이고
어차피 마리아는 우리처럼 흠이 있었기 때문에..(설령 성모의 무염시태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할지라도)
그런데 이미 남자와 잔 적이 있었다고 한다면 혹시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신 것이 아니고 그냥 그렇게 그 과정에서 잉태되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기에 동정녀라고 못박아 두는 것이 좋았었을 것 같습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여기 저기서 말씀해놓으신 것을 읽고 제 생각을 적어보았습니다.
횡설수설 했지만 제 생각의 결론은
"동정녀 탄생이 역사적 사실이냐 상징적 표현이냐 이러한 문제는 복음의 핵심도 아니고 복음의 완전성을 훼파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에 지나치게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라는 닥터케이님의 말씀과 같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의 잉태 : 남자와 성적 관계가 한 번도 없었던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함.
마리아는 동정녀였다 : 남자와 한번도 성적 관계가 없었다. 이것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는 말이라고 봅니다.
동정녀 탄생을 믿냐 못믿냐는 다른 말로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것을 믿냐 못믿냐가 되겠군요.
(다른 관점에서 동정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셩령으로 잉태할 수도 있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저는 성령으로 잉태하셨음을 믿습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면 아무 흠도 없다는 것을 부인해야 하고, 예수님께서 아무 흠도 없는 하나님이라는 것도 부인해야 하고, 그러면 저는 믿을 것이 없어질 것 같아서요.(자세히는 모릅니다.^^)
동정녀 마리아는 아무 흠도 없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흠이 있는 부모 사이에서 나온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성령으로 인하여 잉태를 하고 그리스도를 낳을 만큼 순수하고 하나님께 순종적이었다는 것은 사실일 것 같습니다. 그 순종(처녀(시집 안간 사람으로 일단 정의하고) 잉태하는 것이 그 시대에는 아주 심한 정죄를 당할때이니까요)이 마리아를 높이 볼 수 있는 조건이 아닐까요. 아브라함처럼..
그런데 성령으로 잉태했음을 믿으면서도 왠지 동정녀였냐 아니었느냐는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숫처녀가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성령으로 잉태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나 장애가 없었을 것이고
어차피 마리아는 우리처럼 흠이 있었기 때문에..(설령 성모의 무염시태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할지라도)
그런데 이미 남자와 잔 적이 있었다고 한다면 혹시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신 것이 아니고 그냥 그렇게 그 과정에서 잉태되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기에 동정녀라고 못박아 두는 것이 좋았었을 것 같습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여기 저기서 말씀해놓으신 것을 읽고 제 생각을 적어보았습니다.
횡설수설 했지만 제 생각의 결론은
"동정녀 탄생이 역사적 사실이냐 상징적 표현이냐 이러한 문제는 복음의 핵심도 아니고 복음의 완전성을 훼파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에 지나치게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라는 닥터케이님의 말씀과 같습니다.
2008.07.14 17:16:43
그건 이스턴님 말씀이 맞습니다. 어느 교단도 동정녀 탄생 교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요. 제가 꼭지글에서 제안한 것도 동정녀 탄생 교리를 부정하겠다는 의도는 아니었거든요... 다만, 역사적 사실일까?? 하는 의문을 제기한 것이고 (이런 의문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요?), 만약 역사성을 배제한다면 상징적 의미의 해석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다양한 신학자들의 의견을 제시한 것입니다 (이들의 견해가 100% 옳다는 뜻은 절대 아니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정목사님도 역사적 예수 세미나의 비효용성을 지적하셨구요).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냐?"고 야단치실수도 있는데, 자연스러운 의문이 드는것조차 새싹부터 잘라내는 것은 올바른 신앙의 자세가 아니라고 봅니다. 여러가지 가능성에 대해 폭넓게 탐구해보고 토론하는 과정을 거쳐 신앙도 성숙하고 신학도 심화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일부 연약한 사람들은 이 과정에서 시험들고 방황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다비아에 오시는 분들 정도면 그 단계는 넘어서신 분들이라 생각해서 이야기를 꺼냈던 것입니다. (엇, 아닌가요?? 혹시 저 때문에 시험든 분이 계신지???? (-.-;;) )
아무튼, 다른건 제쳐두고 이스턴님께 저도 질문드리고 싶은게 있는데, 꼭지글에 제가 제시한 두가지 의문점에 대해 나름대로의 답변을 해주시면 제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보수적인 시각에서의 해석을 부탁드립니다 (진짜로 궁금해서 여쭙는 것입니다).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냐?"고 야단치실수도 있는데, 자연스러운 의문이 드는것조차 새싹부터 잘라내는 것은 올바른 신앙의 자세가 아니라고 봅니다. 여러가지 가능성에 대해 폭넓게 탐구해보고 토론하는 과정을 거쳐 신앙도 성숙하고 신학도 심화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일부 연약한 사람들은 이 과정에서 시험들고 방황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다비아에 오시는 분들 정도면 그 단계는 넘어서신 분들이라 생각해서 이야기를 꺼냈던 것입니다. (엇, 아닌가요?? 혹시 저 때문에 시험든 분이 계신지???? (-.-;;) )
아무튼, 다른건 제쳐두고 이스턴님께 저도 질문드리고 싶은게 있는데, 꼭지글에 제가 제시한 두가지 의문점에 대해 나름대로의 답변을 해주시면 제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보수적인 시각에서의 해석을 부탁드립니다 (진짜로 궁금해서 여쭙는 것입니다).
2008.07.14 20:36:41
눈사람 님이 꼬불꼬불 걷다가
정확한 목적지에 잘 도착했네요.
그것 참 신기하단 말이에요.
눈사람 님의 신앙적 노선은 꼴보수에 가까운데
그런 길을 통해서 어찌 저렇게 유연한 대답을 얻는지가요.
형식은 조금 경직되어 있으니
그 내용이 살아 있다는 말이겠지요.
이스턴 님,
사도신경은 정말 중요한 신조에요.
비록 고대인의 세계관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말하려는 세계는 궁극적인 생명이랍니다.
그것을 교정하려는 시도는 무모한 겁니다.
잘 지켜야지요.
다만 문제는 해석이에요.
성서도 해석이고, 사도신경도 해석이고,
그걸을 읽고 받아들이는 우리도 역시
그것을 해석해야 한답니다.
이 말은 곧 성서와 기독교 신조를 단순한 사실의 차원(fact)이 아니라
유기적 현실(organic, dynamic reality)로 받아들인다는 뜻이에요.
이스턴 님은 무엇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생각할 줄 알고
그렇게 글쓰기도 하는 분인 것 같네요.
그리고 열정도 있구요.
그런데요.
자기의 생각을 절대화하지 말고
조금만 더 열어보세요.
이런 말이 훈계 조로 들렸다면 못 들은 걸로 생각하세요.
저는 한국교회에 아까운 분들이 많다고 봅니다.
조금만 생각을 열어주면 기독교 신앙의 깊이로 들어갈 수 있는
그런 재원들이 많은데, 그게 안 되는 거지요.
그 이유가 뭘까요?
기독교 신앙을 단지 실용적 차원으로만 받아들이기 때문이에요.
이스턴 님,
사랑채에서 논쟁에 몰두하지 말고
우선 저의 신학강의를 읽어보실래요?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 강해>도 있구요,
저의 <기독교를 말한다>를 비롯해서 여러가지 책과 아티클을 찾을 수 있을 거에요.
자기가 알고 있는 그 범주로 모든 대상을 재단한 채 논쟁하는 것보다는
우선 배우는 과정이 더 중요하지 않을는지요.
자칫하면 우리는 신앙의 차원에서도 천동설의 세계관으로 살아갈 수 있거든요.
좋은 밤.
정확한 목적지에 잘 도착했네요.
그것 참 신기하단 말이에요.
눈사람 님의 신앙적 노선은 꼴보수에 가까운데
그런 길을 통해서 어찌 저렇게 유연한 대답을 얻는지가요.
형식은 조금 경직되어 있으니
그 내용이 살아 있다는 말이겠지요.
이스턴 님,
사도신경은 정말 중요한 신조에요.
비록 고대인의 세계관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말하려는 세계는 궁극적인 생명이랍니다.
그것을 교정하려는 시도는 무모한 겁니다.
잘 지켜야지요.
다만 문제는 해석이에요.
성서도 해석이고, 사도신경도 해석이고,
그걸을 읽고 받아들이는 우리도 역시
그것을 해석해야 한답니다.
이 말은 곧 성서와 기독교 신조를 단순한 사실의 차원(fact)이 아니라
유기적 현실(organic, dynamic reality)로 받아들인다는 뜻이에요.
이스턴 님은 무엇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생각할 줄 알고
그렇게 글쓰기도 하는 분인 것 같네요.
그리고 열정도 있구요.
그런데요.
자기의 생각을 절대화하지 말고
조금만 더 열어보세요.
이런 말이 훈계 조로 들렸다면 못 들은 걸로 생각하세요.
저는 한국교회에 아까운 분들이 많다고 봅니다.
조금만 생각을 열어주면 기독교 신앙의 깊이로 들어갈 수 있는
그런 재원들이 많은데, 그게 안 되는 거지요.
그 이유가 뭘까요?
기독교 신앙을 단지 실용적 차원으로만 받아들이기 때문이에요.
이스턴 님,
사랑채에서 논쟁에 몰두하지 말고
우선 저의 신학강의를 읽어보실래요?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 강해>도 있구요,
저의 <기독교를 말한다>를 비롯해서 여러가지 책과 아티클을 찾을 수 있을 거에요.
자기가 알고 있는 그 범주로 모든 대상을 재단한 채 논쟁하는 것보다는
우선 배우는 과정이 더 중요하지 않을는지요.
자칫하면 우리는 신앙의 차원에서도 천동설의 세계관으로 살아갈 수 있거든요.
좋은 밤.
2008.07.14 22:20:55
저를 위해서 좋은 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정 목사님! 저는 솔직히 동정녀 탄생의 교리를 죽어도 포기가 되질 않습니다. 솔직히 이것의 문자적인 내용 그대로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조금은 우려스럽고 걱정이 됩니다. 너무 나가는것 아닌가 싶어서 말이지요.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취향이나 흐름 그리고 어떤 곳으로 부터의 영향을 받고 살수 밖에 없는 존재인데 저에게 있서 고향은 보수적인 풍토의 신학적 배경을 가진 침례교가 바로 그곳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죽었다 깨어나도 지금의 생각에 변화를 주기란 어려울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일방적인 비판을 가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논쟁하고 이야기 할 때는 원수같이 싸우다가 그것의 마무리가 되는 시점에서는 다 털어버리는 스타일입니다. 사실 어떤 논쟁점에 대해서 예의를 지켜준다고 정곡을 치고 들어가지 못하는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비겁한 것이고 그 사람에 대한 진정한 존중을 하지 않는것으로 보입니다.
여기 들어와서 이야기를 하다보니 사고의 폭과 신학적 고민들이 더 깊어져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한번도 상상하지 못한 이슈나 주제들에 대해서 제법 진지한 고민들을 하고 있는곳으로 보입니다. 저에게 아직은 낮설고 거북한것이 사실이지만 죽 한번 살펴보고 저의 생각을 들이밀어 볼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형님들 만나서 박살도 나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배우고 성숙해 가려구요.
목사님께서 소개해주신 판넨베르그의 사도신경 강해와 기독교를 말한다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관심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정 목사님! 저는 솔직히 동정녀 탄생의 교리를 죽어도 포기가 되질 않습니다. 솔직히 이것의 문자적인 내용 그대로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조금은 우려스럽고 걱정이 됩니다. 너무 나가는것 아닌가 싶어서 말이지요.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취향이나 흐름 그리고 어떤 곳으로 부터의 영향을 받고 살수 밖에 없는 존재인데 저에게 있서 고향은 보수적인 풍토의 신학적 배경을 가진 침례교가 바로 그곳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죽었다 깨어나도 지금의 생각에 변화를 주기란 어려울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일방적인 비판을 가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논쟁하고 이야기 할 때는 원수같이 싸우다가 그것의 마무리가 되는 시점에서는 다 털어버리는 스타일입니다. 사실 어떤 논쟁점에 대해서 예의를 지켜준다고 정곡을 치고 들어가지 못하는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비겁한 것이고 그 사람에 대한 진정한 존중을 하지 않는것으로 보입니다.
여기 들어와서 이야기를 하다보니 사고의 폭과 신학적 고민들이 더 깊어져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한번도 상상하지 못한 이슈나 주제들에 대해서 제법 진지한 고민들을 하고 있는곳으로 보입니다. 저에게 아직은 낮설고 거북한것이 사실이지만 죽 한번 살펴보고 저의 생각을 들이밀어 볼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형님들 만나서 박살도 나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배우고 성숙해 가려구요.
목사님께서 소개해주신 판넨베르그의 사도신경 강해와 기독교를 말한다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관심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2008.07.15 09:47:06
아... 이거.. 글이 쟁토방으로 옮겨지면서 이스턴님과 제가 나누었던 댓글들이 순서가 이상하게 뒤바뀌어 버렸네요... (ㅠㅠ) 침례교회 관련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이스턴님의 댓글은 한군데로 모이고 저의 댓글도 또한 한군데로 모여버려서 처음 읽으시는 분들은 내용 이해가 조금 헷갈릴듯 합니다... 그래도 차근차근 읽으시면 줄거리가 파악은 되실것 같기는 합니다만...(ㅠㅠ)
2008.07.15 09:48:14
만약 어떤 교리를 포기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조금이라도 줄어들 우려가 있다면
포기하지 않고 가져가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하나님이 보실 때 어떤 것이 맞는지는 우리는 온전하게 알 수 없으니까요.
가장 좋은 것은 많은 토론과 성경 공부를 통해서 더 진리에 가깝게 다가가고
그랬더니 잘못안 것이 있었다면 과감히 고치면서
오히려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더 견고해질 수 있다면 과감히 포기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목사님들께 질문을 해도 시원하게 대답을 못해주시는 것들도 많았고
의문은 그냥 구석에 밀어넣어두고 무조건 달려오고 보니
누군가가 제가 가졌던 의문에 질문을 하면 당연히 아무런 말도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주 옛날에..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란을 이루고, XY 와 XX 가 교차로 만나 아들 딸이 만들어지고
유전자가 사람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을 모르던 때에는
동정녀라는 것을 말해야만 예수님의 무오하심과 신성이 증명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전자에 대한 개념이 확실히 확립된 이때에(머리카락 하나만 있어도 친자 감별이 되는 시대)
굳이 동정녀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무오함에는 어떠한 영향도 끼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의 정자와 마리아의 난자가 결합해서 만들어진 사람이 아니라
수정란 자체로 마리아의 자궁에 심어졌기 때문입니다. (성령 잉태설을 저는 믿기에 단정적으로 추정합니다. 제 의견은 그냥 의견일 뿐입니다만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이와 관련된 얘기는 단정적인 표현을 써볼랍니다. 이해해주세요.)
이 수정란에는 요셉의 정자도 마리아의 난자도 없습니다.
그냥 족보적으로 요셉의 족보에 있을 뿐이지 유전자로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으신 하나님이시라는 말이지요.
예수님의 유전자에는 원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유전자가 전혀 섞여있지 않기 때문에 무오하신 것이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났기 때문에 무오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러한 것을 모르던 옛날에는 절실히 필요했던 동정녀라는 단어가
사실은 인간의 신비를 모르던 사람들이 가져다가 붙인 것이라는 의혹이 드는 것도 이때문입니다.
동정녀가 기냐 아니냐가 별 의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글을 적은 이유는
저도 그랬듯이 많은 분들이 동정녀여야만 한다고, 그래야 믿음이 존속된다고 생각하시고 있기에
이미 어떤 분이 이러한 말씀을 하셨을 수도 있지만
한 번 생각해보고 싶어서 어젯밤 내내 온갖 부족한 지식을 다 동원하여 위의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의 지식으로 얻은 결론이 얼마나 진리에 가까울지는 전혀 자신이 없습니다.
그냥 참조만 해주세요.^^
진리는 예외가 없어야 하고, 반대되는 말들은 당연히 거짓이 되어버리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진리를 향하여 열심히 달려가고자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고 있는 나그네랍니다.^^
포기하지 않고 가져가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하나님이 보실 때 어떤 것이 맞는지는 우리는 온전하게 알 수 없으니까요.
가장 좋은 것은 많은 토론과 성경 공부를 통해서 더 진리에 가깝게 다가가고
그랬더니 잘못안 것이 있었다면 과감히 고치면서
오히려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더 견고해질 수 있다면 과감히 포기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목사님들께 질문을 해도 시원하게 대답을 못해주시는 것들도 많았고
의문은 그냥 구석에 밀어넣어두고 무조건 달려오고 보니
누군가가 제가 가졌던 의문에 질문을 하면 당연히 아무런 말도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주 옛날에..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란을 이루고, XY 와 XX 가 교차로 만나 아들 딸이 만들어지고
유전자가 사람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을 모르던 때에는
동정녀라는 것을 말해야만 예수님의 무오하심과 신성이 증명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전자에 대한 개념이 확실히 확립된 이때에(머리카락 하나만 있어도 친자 감별이 되는 시대)
굳이 동정녀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무오함에는 어떠한 영향도 끼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의 정자와 마리아의 난자가 결합해서 만들어진 사람이 아니라
수정란 자체로 마리아의 자궁에 심어졌기 때문입니다. (성령 잉태설을 저는 믿기에 단정적으로 추정합니다. 제 의견은 그냥 의견일 뿐입니다만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이와 관련된 얘기는 단정적인 표현을 써볼랍니다. 이해해주세요.)
이 수정란에는 요셉의 정자도 마리아의 난자도 없습니다.
그냥 족보적으로 요셉의 족보에 있을 뿐이지 유전자로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으신 하나님이시라는 말이지요.
예수님의 유전자에는 원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유전자가 전혀 섞여있지 않기 때문에 무오하신 것이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났기 때문에 무오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러한 것을 모르던 옛날에는 절실히 필요했던 동정녀라는 단어가
사실은 인간의 신비를 모르던 사람들이 가져다가 붙인 것이라는 의혹이 드는 것도 이때문입니다.
동정녀가 기냐 아니냐가 별 의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글을 적은 이유는
저도 그랬듯이 많은 분들이 동정녀여야만 한다고, 그래야 믿음이 존속된다고 생각하시고 있기에
이미 어떤 분이 이러한 말씀을 하셨을 수도 있지만
한 번 생각해보고 싶어서 어젯밤 내내 온갖 부족한 지식을 다 동원하여 위의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의 지식으로 얻은 결론이 얼마나 진리에 가까울지는 전혀 자신이 없습니다.
그냥 참조만 해주세요.^^
진리는 예외가 없어야 하고, 반대되는 말들은 당연히 거짓이 되어버리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진리를 향하여 열심히 달려가고자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고 있는 나그네랍니다.^^
제가 한발 늦었네요.
그리구 동정녀 탄생에 대한 해석도 케이님의 주장과 정 목사님이 주장하시고자 하는 하는점이
또 다르다고 봐야 할것 입니다
다만 동정녀 탄생론이 기독교 토대를 이루는 중요한 교리임에는 분명 하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