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 <열린 토론실>입니다. 다비안들의 부담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채>와는 달리, 보다 진지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나 주제를 나누고 싶은 분들을 위한 게시판입니다. 가급적 예의를 갖추시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대화는 다비안을 비롯한 여러 네티즌들의 온라인 상에서의 자유로운 것이기에 그 방향과 정체성이 반드시 다비아와 일치하지는 않음을 밝혀둡니다.
글 수 253
학회 첫 날을 여러분의 기도와 성원 덕택에 잘 마친 후,
맛 없는 저녁먹고 호텔로 일찍 돌아 왔습니다.
제가 지금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창조과학에 관해선 일단 이 선에서 마무리하고 싶어서 입니다.
(‘다시는 하지 말자’가 아닙니다.
창조과학은 계속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을테니,
또 다른 기회가 많이 있겠지요)
지금까지의 글을 통해 제가 일관되게 주장해왔고
또 여러분들께 알려드리고 싶었던 것은
‘창조과학은 과학이 아니다’라는 사실입니다.
뭐, ‘아닌건 아니다’라는 단순한 내용입니다.
이런 이유로 애초부터(신완식 목사님께 정말 감사!)
저는 창조/진화 논쟁은 하지 않겠다고 거절한 것입니다.
그전에 창조과학이 과연 ‘진정한 과학을 추구하느냐’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미 조폐국내 위조지폐 감식단의
훈련 방법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위조지폐를 가리는 훈련 과정 동안,
감식단에게 매일 매일 진짜 지폐만을 계속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가짜 찾아내는데는 진짜를 보여주는 방법 밖엔 없다는 것이죠.
실제 이 이야기는
기독교내 이단들에 관한 질문과 답변 과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즉, 그사람의 결론은
정통 교단들이 진짜를 보여주면,
신자들이 이리 저리 쏠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지요.
이 교훈을 염두에 두고
창조과학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저 역시 과학의 정의가 무엇이고,
과학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설명해 드리고자
나름대로 노력 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창조과학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만한
조언들을 주셨더군요.
그런데 그 분들 그렇게 못합니다.
제가 편견을 가지고 있어서 일까요?
한 예를 들어 모리스님께서 (그런데 님의 닉 네임이
이미 작고한 미국 창조과학계의 1세대 책임자였던
Henry Morris와 같은 건 우연인가요?)
“창조과학하는 사람들도 결과에 대해 열린마음을 가지고서
가설을 세우고 실험하기를” 부탁하셨는데,
이 얼마나 좋은 의견입니까?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설’이라는 게 뭡니까?
‘이러 이러 할 것이다’라는 전제입니다.
이 말 속엔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라는 후렴구가 반드시 따라 옵니다.
그런데 창조과학자는 그 어떤 경우에도 가설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ㅇㅇ를 만드셨을 것이다’란 가설과 이 가설 뒤에
필연적으로 내제해 있는 ‘어쩜 아닐 수도 있다’를 상상해 보세요.
이미 이런 가정을 한다는 자체가 창세기를 의심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불신의 증거가 되버리는 겁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창세기 1장은 문자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절대 옳다’라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ㅇㅇ할 것이다’는 들어갈 여지가 없는 겁니다.
하물며 ‘ㅇㅇ가 아닐 수도 있다’는 두말할 나위가 없구요.
그런 분들에게 가설을 세우고 결과에 대해 열린마음으로
실험을 하라고 부탁하는 건,
그냥 ‘자살하세요’하고 부탁하는 거나 매한가지 입니다.
그들도 자신들의 사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과학으로 인정 받으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과학을 할 수는 없고-----.’
그래서 나온 해결책이 그냥 우기는 겁니다.
스스로가 친 덫에 빠져 못나옵니다.
그래서 놀 박사도 모순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했던 것이구요.
저는 이번 토론이 많은 분들에게
‘진실된 과학 (genuine science)’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저에겐 그것으로 이미 충분합니다.
제가 하고싶은 이야기만 일방적으로 늘어놓은 후,
이제 그만 하겠다는게 어색하긴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주제로 너무 늘어지는 것은
저나 다비안 여러분 모두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게 제 판단입니다.
균형님을 비롯해 그간 관심을 보여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저 역시 많이 생각하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정 목사님,
번역글을 <기독교 사상>에 올리는 것은
저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단지 번역 자체가 충실한지의 여부가 계속 걸립니다.
마지막으로
제 글들이 그 주제때문에 항상 딱딱하기만 하였는데,
사과하는 의미로
저에게 일어났던 이야기 하나 해드릴께요.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과학자에겐 연구비 확보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제 분야에선 미 국립보건연구소 (NIH)가 가장 규모가 큰
연구비 제공 기관입니다.
규모가 크면서도 연구비 따기는 가장 힘든 곳에 속합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지원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엔 부시가 전쟁하는 바람에 예산이 깎여
더 난리들이죠. (그 전엔 전체 지원자의 10%는 받았는데,
근래엔 7% 선이니 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제가 처음으로 NIH에 연구비 신청을 하면서 생긴 일입니다.
연구계획서를 쓰고 기한 날짜에 맞춰 보낸 후
아내가 저에게 같이 기도를 시작하자고 권유하는 겁니다.
물론 ‘연구비를 받게 해주세요’하는 기도지요.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우리가 기도하여 제가 연구비를 받는 것은 좋은데
누군가 한 명은 그 댓가를 감당해야 하는 겁니다.
제가 나중에 하나님께 감사드리더라도,
감사를 받으시는 하나님께서도 참 거시기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아내에게 그랬죠.
“우리 이번 만은 범 세계적인 기도를 드려보자.”
그래서 저희 부부는 그 후 어언 4개월 동안
“하나님 꼭 필요한 프로젝트들이 연구비를
받을 수 있게 해주세요”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4개월 후 결과가 나왔는데 저는 연구비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
과연 그 때 하나님께서는 저희의 기도에
응답을 하신 걸까요, 안 하신 걸까요?
여러분의 가차없는 의견 제시 바랍니다.
컴퓨터 자판을 사정없이 두들기시는 여러분,
잘~~ 생각하셔야 됩니다. (은근한 협박)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3-17 19:31)
맛 없는 저녁먹고 호텔로 일찍 돌아 왔습니다.
제가 지금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창조과학에 관해선 일단 이 선에서 마무리하고 싶어서 입니다.
(‘다시는 하지 말자’가 아닙니다.
창조과학은 계속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을테니,
또 다른 기회가 많이 있겠지요)
지금까지의 글을 통해 제가 일관되게 주장해왔고
또 여러분들께 알려드리고 싶었던 것은
‘창조과학은 과학이 아니다’라는 사실입니다.
뭐, ‘아닌건 아니다’라는 단순한 내용입니다.
이런 이유로 애초부터(신완식 목사님께 정말 감사!)
저는 창조/진화 논쟁은 하지 않겠다고 거절한 것입니다.
그전에 창조과학이 과연 ‘진정한 과학을 추구하느냐’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미 조폐국내 위조지폐 감식단의
훈련 방법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위조지폐를 가리는 훈련 과정 동안,
감식단에게 매일 매일 진짜 지폐만을 계속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가짜 찾아내는데는 진짜를 보여주는 방법 밖엔 없다는 것이죠.
실제 이 이야기는
기독교내 이단들에 관한 질문과 답변 과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즉, 그사람의 결론은
정통 교단들이 진짜를 보여주면,
신자들이 이리 저리 쏠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지요.
이 교훈을 염두에 두고
창조과학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저 역시 과학의 정의가 무엇이고,
과학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설명해 드리고자
나름대로 노력 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창조과학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만한
조언들을 주셨더군요.
그런데 그 분들 그렇게 못합니다.
제가 편견을 가지고 있어서 일까요?
한 예를 들어 모리스님께서 (그런데 님의 닉 네임이
이미 작고한 미국 창조과학계의 1세대 책임자였던
Henry Morris와 같은 건 우연인가요?)
“창조과학하는 사람들도 결과에 대해 열린마음을 가지고서
가설을 세우고 실험하기를” 부탁하셨는데,
이 얼마나 좋은 의견입니까?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설’이라는 게 뭡니까?
‘이러 이러 할 것이다’라는 전제입니다.
이 말 속엔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라는 후렴구가 반드시 따라 옵니다.
그런데 창조과학자는 그 어떤 경우에도 가설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ㅇㅇ를 만드셨을 것이다’란 가설과 이 가설 뒤에
필연적으로 내제해 있는 ‘어쩜 아닐 수도 있다’를 상상해 보세요.
이미 이런 가정을 한다는 자체가 창세기를 의심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불신의 증거가 되버리는 겁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창세기 1장은 문자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절대 옳다’라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ㅇㅇ할 것이다’는 들어갈 여지가 없는 겁니다.
하물며 ‘ㅇㅇ가 아닐 수도 있다’는 두말할 나위가 없구요.
그런 분들에게 가설을 세우고 결과에 대해 열린마음으로
실험을 하라고 부탁하는 건,
그냥 ‘자살하세요’하고 부탁하는 거나 매한가지 입니다.
그들도 자신들의 사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과학으로 인정 받으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과학을 할 수는 없고-----.’
그래서 나온 해결책이 그냥 우기는 겁니다.
스스로가 친 덫에 빠져 못나옵니다.
그래서 놀 박사도 모순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했던 것이구요.
저는 이번 토론이 많은 분들에게
‘진실된 과학 (genuine science)’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저에겐 그것으로 이미 충분합니다.
제가 하고싶은 이야기만 일방적으로 늘어놓은 후,
이제 그만 하겠다는게 어색하긴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주제로 너무 늘어지는 것은
저나 다비안 여러분 모두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게 제 판단입니다.
균형님을 비롯해 그간 관심을 보여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저 역시 많이 생각하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정 목사님,
번역글을 <기독교 사상>에 올리는 것은
저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단지 번역 자체가 충실한지의 여부가 계속 걸립니다.
마지막으로
제 글들이 그 주제때문에 항상 딱딱하기만 하였는데,
사과하는 의미로
저에게 일어났던 이야기 하나 해드릴께요.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과학자에겐 연구비 확보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제 분야에선 미 국립보건연구소 (NIH)가 가장 규모가 큰
연구비 제공 기관입니다.
규모가 크면서도 연구비 따기는 가장 힘든 곳에 속합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지원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엔 부시가 전쟁하는 바람에 예산이 깎여
더 난리들이죠. (그 전엔 전체 지원자의 10%는 받았는데,
근래엔 7% 선이니 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제가 처음으로 NIH에 연구비 신청을 하면서 생긴 일입니다.
연구계획서를 쓰고 기한 날짜에 맞춰 보낸 후
아내가 저에게 같이 기도를 시작하자고 권유하는 겁니다.
물론 ‘연구비를 받게 해주세요’하는 기도지요.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우리가 기도하여 제가 연구비를 받는 것은 좋은데
누군가 한 명은 그 댓가를 감당해야 하는 겁니다.
제가 나중에 하나님께 감사드리더라도,
감사를 받으시는 하나님께서도 참 거시기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아내에게 그랬죠.
“우리 이번 만은 범 세계적인 기도를 드려보자.”
그래서 저희 부부는 그 후 어언 4개월 동안
“하나님 꼭 필요한 프로젝트들이 연구비를
받을 수 있게 해주세요”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4개월 후 결과가 나왔는데 저는 연구비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
과연 그 때 하나님께서는 저희의 기도에
응답을 하신 걸까요, 안 하신 걸까요?
여러분의 가차없는 의견 제시 바랍니다.
컴퓨터 자판을 사정없이 두들기시는 여러분,
잘~~ 생각하셔야 됩니다. (은근한 협박)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3-17 19:31)
2007.03.13 12:43:43
님의 글에 100% 공감합니다... 저는 과학이란 것을 잘 몰랐는데, 과학이란 것이 어떠해야 하는지 알 수 있게 되었구요.. 그리고 님의 기도 이야기는 저에게 너무 은혜가 됩니다...
2007.03.13 13:27:39
과학적 가설이란, 가설이 틀렸다는 오류가능성을 열어놓아야지요.
맞는지 틀렸는지 이론적/실험적 방법으로 검증이 가능해야 하구요.
물론, 좀 흠이 있어도 유용한 가설은, 오류 발견시 다시 수정.보완 하겠지요.
그런데, 오류가능성을 인정치도 않고,
객관적인 방법으로 맞는지 틀리는지 검증할 수도 없다면
그걸 어떤 과학자가 과학적이라고 할지..
breeze 님의 글은 이런 논점들을 잘 풀어주신 것 같네요.
지금까지도 많은 시간을 들이셨을 터인데,
이제 그만 이 주제을 내려놓고 쉬셔도 될 듯 합니다.
근대, 그분께서 응답 안 한 기도도 있을까요?
바라던 대로/바라지 않는 쪽으로/제 3의 길들../(기도가 아닌 기도~)
-텍사스에서
맞는지 틀렸는지 이론적/실험적 방법으로 검증이 가능해야 하구요.
물론, 좀 흠이 있어도 유용한 가설은, 오류 발견시 다시 수정.보완 하겠지요.
그런데, 오류가능성을 인정치도 않고,
객관적인 방법으로 맞는지 틀리는지 검증할 수도 없다면
그걸 어떤 과학자가 과학적이라고 할지..
breeze 님의 글은 이런 논점들을 잘 풀어주신 것 같네요.
지금까지도 많은 시간을 들이셨을 터인데,
이제 그만 이 주제을 내려놓고 쉬셔도 될 듯 합니다.
근대, 그분께서 응답 안 한 기도도 있을까요?
바라던 대로/바라지 않는 쪽으로/제 3의 길들../(기도가 아닌 기도~)
-텍사스에서
2007.03.13 22:48:28
헨리 모리스라는 과학자가 있었나보군요. 또 한가지 지식이 ^^; 일전에 저희 동네에 모리스 베자르 발레단이 온 적이 있는데 그냥 맘에 들어서 그 때부터 닉넴을 모리스로 하고 있습니다. 헨리 모리스와는 아무 관련이 없고요...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이 가설에 대한 유연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은 불행하면서도 위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날조, 변조, 표절은 과학계에 항상 있어왔지만 이 모든게 자신의 잘못된 가설을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못한 비겁함 (혹은 자기합리화? 혹은 자존심? 혹은?)에 기인하는 것 같네요. 사실 연구비와 실적이 걸려 있는데 자기가 잘못 생각했다고 혹은 자기 가설에 따른 예측된 결과를 얻을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 분들은 별로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창조과학을 하시는 분들도 (그게 전공분야인지 아니면 무슨 펀드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세운 가설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는 방향으로 데이터를 해석하고 주장하시겠지요. 왠지 그분들 마음이 이해가 되네요...
이건 좀 다른 얘기지만 예전에 오움 진리교라는 종교단체가 동경시내에서 사린가스를 뿌린 사건이 있었는데 무서웠던 것은 제 주위에서 화학 전공하는 애들이 돈만 준다면 자신도 그런 가스를 만들 용의가 있다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돈 때문만은 아니고 자신도 그런 걸 만들 수 있다는 자기 실력 과시도 있었지만요.
도덕성이 결여된 오로지 자신의 이익 혹은 학문적 흥미 혹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 과학을 이용할 수 있다는 요즘의 과학자들이 무섭다는 생각이 듭니다. 종교적 신념에만 근거해서 과학적 결과를 해석하려고 하는 과학자들이 창조과학을 하는 분들이라면... 안그런 분이 더 많으리라 믿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음번엔 NIH에서 연구비 꼭 따시고 원하는 연구 마음껏 하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breeze님의 기도에 응답하셨는지 아닌지는 저는 잘 모르지만 제가 그런 경우라면 기도에 응답하셨다고 믿겠습니다. 그 편이 마음이 더 편할테니까요...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이 가설에 대한 유연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은 불행하면서도 위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날조, 변조, 표절은 과학계에 항상 있어왔지만 이 모든게 자신의 잘못된 가설을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못한 비겁함 (혹은 자기합리화? 혹은 자존심? 혹은?)에 기인하는 것 같네요. 사실 연구비와 실적이 걸려 있는데 자기가 잘못 생각했다고 혹은 자기 가설에 따른 예측된 결과를 얻을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 분들은 별로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창조과학을 하시는 분들도 (그게 전공분야인지 아니면 무슨 펀드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세운 가설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는 방향으로 데이터를 해석하고 주장하시겠지요. 왠지 그분들 마음이 이해가 되네요...
이건 좀 다른 얘기지만 예전에 오움 진리교라는 종교단체가 동경시내에서 사린가스를 뿌린 사건이 있었는데 무서웠던 것은 제 주위에서 화학 전공하는 애들이 돈만 준다면 자신도 그런 가스를 만들 용의가 있다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돈 때문만은 아니고 자신도 그런 걸 만들 수 있다는 자기 실력 과시도 있었지만요.
도덕성이 결여된 오로지 자신의 이익 혹은 학문적 흥미 혹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 과학을 이용할 수 있다는 요즘의 과학자들이 무섭다는 생각이 듭니다. 종교적 신념에만 근거해서 과학적 결과를 해석하려고 하는 과학자들이 창조과학을 하는 분들이라면... 안그런 분이 더 많으리라 믿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음번엔 NIH에서 연구비 꼭 따시고 원하는 연구 마음껏 하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breeze님의 기도에 응답하셨는지 아닌지는 저는 잘 모르지만 제가 그런 경우라면 기도에 응답하셨다고 믿겠습니다. 그 편이 마음이 더 편할테니까요...
2007.03.13 22:58:40
모리스 베자르는 20세기 발레의 총수 격의 분이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모리스 선생님 말씀 듣고 보니, 수년 전,
저희 학교를 졸업하고, 자급 전도사로 봉사하시는
의사 선생님과 말씀을 나눈 기억이 떠오릅니다.
이러저러하게 말을 나누면서, 제가,
왜 의학과에서는 의료윤리를 거의 가르치지 않고,
정보통신 전공 학과에서는 정보통신윤리는 아예 학과목으로 다루지도 않느냐,
당사자인 의사, 과학자, 공학자, 기술자들에게 필요한 것인데,
신학, 철학에서는 이런 걸로 머리를 싸매는데,
왜 정작 당사자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가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가치'의 문제는 잇속없는 걸로 천시되는 유물론적 사회지요.
그런데, 우리 다비아 회원이신 젊은 판사 김동현님께서,
법학도 해석학이며, 이 때문에 늘 고뇌한다는 말씀 참으로 인상깊었습니다.
(사실, 법학과 신학은 쌍으로 따라다니던 학문이었지요.
서양 대학의 출발을 함께 했고)
해석, 가치의 문제가 아닌 게 세상에 있겠습니까?
이럴진대, 종교마저도, 가치의 문제가 아닌, 물화(物化)시켜버리는,
근본주의자들의 열정은 그릇되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세속의 몰가치적인 기술이 돈 되는 거라면 사람도 능히 잡듯,
근본주의적 맹목성 역시,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라면,
비과학을 과학인양 둔갑시키는 궤변과 억지는 물론이고,
보편적 인륜과 도덕률까지 헌신짝처럼 내팽개칩니다.
마치, [장미의 이름]의 살인자 호르헤 수사처럼 말이지요.
'가치'가 하릴없는 천덕꾸리기 취급을 받는 이 세태 속에서,
종교가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될텐데,
지금 교회의 많은 모습들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물론, 전부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Text를 원형대로 붙드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믿는 모양이지만,
도리어, Text를 물화시키는, 반복음적 행태인 게지요.
모리스 선생님 말씀 듣고 보니, 수년 전,
저희 학교를 졸업하고, 자급 전도사로 봉사하시는
의사 선생님과 말씀을 나눈 기억이 떠오릅니다.
이러저러하게 말을 나누면서, 제가,
왜 의학과에서는 의료윤리를 거의 가르치지 않고,
정보통신 전공 학과에서는 정보통신윤리는 아예 학과목으로 다루지도 않느냐,
당사자인 의사, 과학자, 공학자, 기술자들에게 필요한 것인데,
신학, 철학에서는 이런 걸로 머리를 싸매는데,
왜 정작 당사자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가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가치'의 문제는 잇속없는 걸로 천시되는 유물론적 사회지요.
그런데, 우리 다비아 회원이신 젊은 판사 김동현님께서,
법학도 해석학이며, 이 때문에 늘 고뇌한다는 말씀 참으로 인상깊었습니다.
(사실, 법학과 신학은 쌍으로 따라다니던 학문이었지요.
서양 대학의 출발을 함께 했고)
해석, 가치의 문제가 아닌 게 세상에 있겠습니까?
이럴진대, 종교마저도, 가치의 문제가 아닌, 물화(物化)시켜버리는,
근본주의자들의 열정은 그릇되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세속의 몰가치적인 기술이 돈 되는 거라면 사람도 능히 잡듯,
근본주의적 맹목성 역시,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라면,
비과학을 과학인양 둔갑시키는 궤변과 억지는 물론이고,
보편적 인륜과 도덕률까지 헌신짝처럼 내팽개칩니다.
마치, [장미의 이름]의 살인자 호르헤 수사처럼 말이지요.
'가치'가 하릴없는 천덕꾸리기 취급을 받는 이 세태 속에서,
종교가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될텐데,
지금 교회의 많은 모습들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물론, 전부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Text를 원형대로 붙드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믿는 모양이지만,
도리어, Text를 물화시키는, 반복음적 행태인 게지요.
2007.03.13 23:54:13
자연과학자들(브리쯔, 모리스)께서 이렇게 글을
멋있게 쓰시니 보기에 좋습니다.
이미 오래 된 말이지만
학제간의 벽을 허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리, 화학과 신학, 철학의 벽을 말이지요.
간학문을 소통할 수 있는 길이 분명히 있을 텐데요.
신학 안에서도 분과별로 소통이 안 되는 실정이니
이런 길이 요원하기는 하겠지요.
감사.
멋있게 쓰시니 보기에 좋습니다.
이미 오래 된 말이지만
학제간의 벽을 허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리, 화학과 신학, 철학의 벽을 말이지요.
간학문을 소통할 수 있는 길이 분명히 있을 텐데요.
신학 안에서도 분과별로 소통이 안 되는 실정이니
이런 길이 요원하기는 하겠지요.
감사.
2007.03.13 23:58:31
breeze님,
실상 답을 드리려고 아래 제 글 댓글에 포함시키는데에 (연관되는 일이 있어서) 그만 글이 날라가 버렸습니다(“크게는” 두 번째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에 참 재미있는 것은 그 두 글에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제 작업을 해야하기에 일단 짧은 답:
“과연 그 때 하나님께서는 저희의 기도에
응답을 하신 걸까요, 안 하신 걸까요?”
“역시 “성공한” 과학자라서 어쩔 수 없네요”가 가장 짧은 답인데
이러면 또 오해가 날라올 것이니 부연설명 하자니 그렇고 안하자니(제 본 글이면 안합니다):
과학적 방법내지는 태도(scientific method or even attitude; the only method of science, by the way)는 “타자화(이 말에 참 적당한 영어단어가 없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영어권 동지들을 위해서는 말입니다)”입니다. 즉, 관찰자와 관찰대상의 분리(the separation of the observer and the observed)입니다. 그러한 과학을 파서 “그 자리(아래 제글의 돌구름님에 대한 답글에서 “가치”에 관한 글 참조)”까지 가려면 할 수 없이 과학자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 “타자화”라는 가치가 내부화되어 버립니다.
“과연 그 때 하나님께서는 저희의 기도에
응답을 하신 걸까요, 안 하신 걸까요?”이라는 질문은 하나님을 타자화하고 나서야 가능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이 순수하게(innocent) 보이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엄청나게 위험한 “태도”이고 이 태도가 허용되는 교회나 신학(종교토론은 두말 할 것도 없고)은 무섭기까지 합니다: 어떨 때는 이러한 태도 청중을 감동시키는 성공하건 아니 성공한 목사의 얘기를 듣고 있자면 한 번은 자리를 박차고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일어나서 소리치고 싶은 것을 참아야했을 때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왜 이리 위험한가하면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을 물어야하기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뀌어 있는 것이 바로 세상이 말도 안되게 (absurd)하게 된 원천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구화는 이미 여기서 제도적으로 허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에 양자론은 하나님이 구원의 선물로 이미 준비해둔 것입니다(참고로 양자론 아직 이해하는 양자론자 없습니다(Richard Feynman이라는 신물리학의 실상 거두가 얘기를 직접하기도 했었고, 아직도 유용한 얘기라고 The Elegant Universe라는 bestseller쓴 Brian Greene도 인용도 했었음: 정말 그렇다는 얘기). 여기 아침 10시 46분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는 데에 과학에 관한 글 다비아에 올린 “믿음”에 찬사를 보냅니다.
"날라간 답"은 이미 답이 되었습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실상 답을 드리려고 아래 제 글 댓글에 포함시키는데에 (연관되는 일이 있어서) 그만 글이 날라가 버렸습니다(“크게는” 두 번째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에 참 재미있는 것은 그 두 글에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제 작업을 해야하기에 일단 짧은 답:
“과연 그 때 하나님께서는 저희의 기도에
응답을 하신 걸까요, 안 하신 걸까요?”
“역시 “성공한” 과학자라서 어쩔 수 없네요”가 가장 짧은 답인데
이러면 또 오해가 날라올 것이니 부연설명 하자니 그렇고 안하자니(제 본 글이면 안합니다):
과학적 방법내지는 태도(scientific method or even attitude; the only method of science, by the way)는 “타자화(이 말에 참 적당한 영어단어가 없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영어권 동지들을 위해서는 말입니다)”입니다. 즉, 관찰자와 관찰대상의 분리(the separation of the observer and the observed)입니다. 그러한 과학을 파서 “그 자리(아래 제글의 돌구름님에 대한 답글에서 “가치”에 관한 글 참조)”까지 가려면 할 수 없이 과학자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 “타자화”라는 가치가 내부화되어 버립니다.
“과연 그 때 하나님께서는 저희의 기도에
응답을 하신 걸까요, 안 하신 걸까요?”이라는 질문은 하나님을 타자화하고 나서야 가능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이 순수하게(innocent) 보이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엄청나게 위험한 “태도”이고 이 태도가 허용되는 교회나 신학(종교토론은 두말 할 것도 없고)은 무섭기까지 합니다: 어떨 때는 이러한 태도 청중을 감동시키는 성공하건 아니 성공한 목사의 얘기를 듣고 있자면 한 번은 자리를 박차고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일어나서 소리치고 싶은 것을 참아야했을 때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왜 이리 위험한가하면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을 물어야하기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뀌어 있는 것이 바로 세상이 말도 안되게 (absurd)하게 된 원천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구화는 이미 여기서 제도적으로 허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에 양자론은 하나님이 구원의 선물로 이미 준비해둔 것입니다(참고로 양자론 아직 이해하는 양자론자 없습니다(Richard Feynman이라는 신물리학의 실상 거두가 얘기를 직접하기도 했었고, 아직도 유용한 얘기라고 The Elegant Universe라는 bestseller쓴 Brian Greene도 인용도 했었음: 정말 그렇다는 얘기). 여기 아침 10시 46분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는 데에 과학에 관한 글 다비아에 올린 “믿음”에 찬사를 보냅니다.
"날라간 답"은 이미 답이 되었습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2007.03.14 10:09:51
응답 하신거다 - 그럼 내 연구가 꼭 필요한게 아니란 말이어?
응답 안하신거다 - 왜 나를 모르시나-- (최성수).
이렇게 단순하게 시작한 여론 조사였는데,
참, 거시기하게들 잘 빠져 가시네요. 모리스님만 빼고 (모리스님은 찍혔음).
그 후, 다른 재단으로부터 연구비를 받게 되어
하고싶은 연구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곳 대학에서의 자리 보전(?)엔
역시 NIH 연구비만큼 든든한게 없는 법이죠.
녜, 올 가을에 재도전합니다.
그땐 간구하는 기도보단 그저 "최선을 다 했습니다"라는
고백의 기도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New York 님,
타자화란 말은 원래 영어의 Otherization을 번역한 거 아닌가요?
님의 글에 대한 저의 어설픈 이해로는
'우리가 하나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물어야 한다'가
님 글의 요지가 아닌가 싶군요.
저는 기도란 그 내용에 관계없이
(설사 그 기도가 "나만 잘되게 해주세요" "누구를 해꼬지 해 주세요" 일지라도)
기도란 행위 그 자체에
하나님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가하는 질문도
이미 내포되어 있다고 봅니다.
내일은 집에 돌아갈 수 있어 기쁩니다.
그저 국에 밥 말아 먹고 싶은 생각밖엔------.
(너무 먹는거 밝힌다고 흉보지 마세요.
이미 자진 신고 했으니까)
응답 안하신거다 - 왜 나를 모르시나-- (최성수).
이렇게 단순하게 시작한 여론 조사였는데,
참, 거시기하게들 잘 빠져 가시네요. 모리스님만 빼고 (모리스님은 찍혔음).
그 후, 다른 재단으로부터 연구비를 받게 되어
하고싶은 연구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곳 대학에서의 자리 보전(?)엔
역시 NIH 연구비만큼 든든한게 없는 법이죠.
녜, 올 가을에 재도전합니다.
그땐 간구하는 기도보단 그저 "최선을 다 했습니다"라는
고백의 기도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New York 님,
타자화란 말은 원래 영어의 Otherization을 번역한 거 아닌가요?
님의 글에 대한 저의 어설픈 이해로는
'우리가 하나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물어야 한다'가
님 글의 요지가 아닌가 싶군요.
저는 기도란 그 내용에 관계없이
(설사 그 기도가 "나만 잘되게 해주세요" "누구를 해꼬지 해 주세요" 일지라도)
기도란 행위 그 자체에
하나님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가하는 질문도
이미 내포되어 있다고 봅니다.
내일은 집에 돌아갈 수 있어 기쁩니다.
그저 국에 밥 말아 먹고 싶은 생각밖엔------.
(너무 먹는거 밝힌다고 흉보지 마세요.
이미 자진 신고 했으니까)
2007.03.14 10:51:45
찍혔다고 하시니 무서워지네요 T.T 저는 단지 연구비가 누구에게 가든 과학이 발전할 수 있으니 좋은 것 아닌가 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맘도 편해지지 않을까 해서요...
제가 breeze님의 하시는 일을 잘 모르니 그 연구가 NIH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제가 판단할 수는 없는데요 다만 연구비가 연구 내용만으로 결정되는 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주요 요소로 인간관계, 트랜드, 운 등등이 있지요.) 그러니까 연구비 못받으신 것이 하나님이 breeze님 연구 내용이 나쁘다고 안주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한번 미역국 먹고 다시 도전해서 받으면 그 기쁨이 더 커지지 않겠습니까? 올해는 꼭 NIH 따시길 기도합니다.
제가 breeze님의 하시는 일을 잘 모르니 그 연구가 NIH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제가 판단할 수는 없는데요 다만 연구비가 연구 내용만으로 결정되는 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주요 요소로 인간관계, 트랜드, 운 등등이 있지요.) 그러니까 연구비 못받으신 것이 하나님이 breeze님 연구 내용이 나쁘다고 안주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한번 미역국 먹고 다시 도전해서 받으면 그 기쁨이 더 커지지 않겠습니까? 올해는 꼭 NIH 따시길 기도합니다.
2007.03.14 20:53:50
"New York 님,
타자화란 말은 원래 영어의 Otherization을 번역한 거 아닌가요?"
한국말(한문말), 타자화의 어감은 영어의 어감으로는 "alienation”과 “otherization”의 중간이라고 “일단은” 보시면 됩니다(즉 영문화권 생활에 상용화 일상화되어 투영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나게 중요한 차이(예수님을 섬기는 데에 있어서)인지라 여기서 아직은 다루기가 그렇고 원래의 얘기: 하나님의 타자화; 즉 '우리가 하나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물어야 한다'는 이렇습니다. 예를 들어 몇십년전에 미국에서 나온 기독교서 초대형 베스트셀러 그 제목이 “좋은 사람들한테 나쁜 일이 일어날 때에..”인가 뭐 그랬죠. 바로 그런 예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물어보는 흔하지만 엄청난 예이지요. 잘 생각해보십시요. 예를 들어 목사님들의 감동적인 설교에서도 아주 자주 발견되는 예입니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우리가” 물을 수 있게 허용한 오류입니다. 님의 과학에 관한 글을 읽고 님의 믿음을 믿고 드리는 말이였고 감성적으로 아주 안정된 분 같아서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즈음에 꼭 첨부하고 싶은 얘기는 “균형님” 얘기입니다. 균형님은 글을 균형있게 쓸 줄 아는 분입니다. 그런데 “과학”과 종교 얘기를 하면서는 그 균형이 깨졌습니다. 이는 균형님의 문제가 아니라 과학과 종교 얘기를 과학적으로 풀었기에 그렇습니다.
타자화란 말은 원래 영어의 Otherization을 번역한 거 아닌가요?"
한국말(한문말), 타자화의 어감은 영어의 어감으로는 "alienation”과 “otherization”의 중간이라고 “일단은” 보시면 됩니다(즉 영문화권 생활에 상용화 일상화되어 투영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나게 중요한 차이(예수님을 섬기는 데에 있어서)인지라 여기서 아직은 다루기가 그렇고 원래의 얘기: 하나님의 타자화; 즉 '우리가 하나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물어야 한다'는 이렇습니다. 예를 들어 몇십년전에 미국에서 나온 기독교서 초대형 베스트셀러 그 제목이 “좋은 사람들한테 나쁜 일이 일어날 때에..”인가 뭐 그랬죠. 바로 그런 예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물어보는 흔하지만 엄청난 예이지요. 잘 생각해보십시요. 예를 들어 목사님들의 감동적인 설교에서도 아주 자주 발견되는 예입니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우리가” 물을 수 있게 허용한 오류입니다. 님의 과학에 관한 글을 읽고 님의 믿음을 믿고 드리는 말이였고 감성적으로 아주 안정된 분 같아서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즈음에 꼭 첨부하고 싶은 얘기는 “균형님” 얘기입니다. 균형님은 글을 균형있게 쓸 줄 아는 분입니다. 그런데 “과학”과 종교 얘기를 하면서는 그 균형이 깨졌습니다. 이는 균형님의 문제가 아니라 과학과 종교 얘기를 과학적으로 풀었기에 그렇습니다.
2007.03.15 09:51:58
님의 글이 좀 더 또렸하게 읽혀집니다
(제가 아직 부족한 관계로, 이해했다고는 말씀 못드리구요).
어떤 것에 대해 내 자신의 생각이 정립되지 않았거나
모를 때는 침묵하는게 최고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럼에도,
다른 이의 것을 통해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고
또 그걸 시작으로 내 것을 만들어 나가는게
인간으로서 전혀 부끄럽지 않다고 믿기에,
님의 글을 읽고서 드는 나의 막연한 느낌을
다른 이의 말로 대신합니다.
“하느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분을 우리 마음 속의 어떤 대상으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것” - 마틴 부버
계속 좋은 글 (또박 또박하게) 부탁드립니다.
(제가 아직 부족한 관계로, 이해했다고는 말씀 못드리구요).
어떤 것에 대해 내 자신의 생각이 정립되지 않았거나
모를 때는 침묵하는게 최고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럼에도,
다른 이의 것을 통해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고
또 그걸 시작으로 내 것을 만들어 나가는게
인간으로서 전혀 부끄럽지 않다고 믿기에,
님의 글을 읽고서 드는 나의 막연한 느낌을
다른 이의 말로 대신합니다.
“하느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분을 우리 마음 속의 어떤 대상으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것” - 마틴 부버
계속 좋은 글 (또박 또박하게) 부탁드립니다.
2007.03.15 14:20:05
breeze님, 학회는 잘 다녀오셨나요?
2박3일의 수련회 일정을 마치고, 수요예배 참석하고 이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장소가 기도원이다 보니, 인터넷을 접속할 수도 없었구요.
긴장하고 열심히 구르다(?) 보니, 고단 하네요.
이렇게 두 편의 글을 올려주셨으니, 저도 무언가 한마디 해야 겠지요.
이제 정신차리고 차분히 두편의 글을 읽어 보겠습니다.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질문하도록 하겠습니다.
반응이 늦어져서 미안합니다.
New York님의 글은
늘 새로운 생각거리를 만들어 주시는군요.
제글의 동기 이면을 집으시네요.
'창조과학도 과학' 이라는 언급을 말씀하시는 군요.
제가 이해하는 범위 안에서 이유를 설명하려 합니다.
관심에 감사 드립니다.
* 이제 막 프린트해서 출력 했습니다.
님과 제가 그간 주고 받은 글 (Noll 박사 포함)만 A4 37장 이네요.
'날로 먹지 않기'위해 저도 노력하겠습니다.
여건이 허럭하는 대로 다시 읽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곳은 벌써 새벽 1:25입니다.
그럼 준비되는 대로 글 올리도록 하지요.
(내용의 부실함을 성의로 나마 때우려는 심산입니다~~)
2박3일의 수련회 일정을 마치고, 수요예배 참석하고 이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장소가 기도원이다 보니, 인터넷을 접속할 수도 없었구요.
긴장하고 열심히 구르다(?) 보니, 고단 하네요.
이렇게 두 편의 글을 올려주셨으니, 저도 무언가 한마디 해야 겠지요.
이제 정신차리고 차분히 두편의 글을 읽어 보겠습니다.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질문하도록 하겠습니다.
반응이 늦어져서 미안합니다.
New York님의 글은
늘 새로운 생각거리를 만들어 주시는군요.
제글의 동기 이면을 집으시네요.
'창조과학도 과학' 이라는 언급을 말씀하시는 군요.
제가 이해하는 범위 안에서 이유를 설명하려 합니다.
관심에 감사 드립니다.
* 이제 막 프린트해서 출력 했습니다.
님과 제가 그간 주고 받은 글 (Noll 박사 포함)만 A4 37장 이네요.
'날로 먹지 않기'위해 저도 노력하겠습니다.
여건이 허럭하는 대로 다시 읽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곳은 벌써 새벽 1:25입니다.
그럼 준비되는 대로 글 올리도록 하지요.
(내용의 부실함을 성의로 나마 때우려는 심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