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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 500주년을 바라보며 - 칼뱅과 하나님 뜻의 남발
2009년은 종교개혁가로 유명한 장 칼뱅의 탄생 500주년입니다. 따라서 교계에서는 유행처럼 장 칼뱅의 신학과 사상을 되돌아보며 알맞게 적용해 교회를 부흥시키자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장 칼뱅의 유산을 되새기며-21세기 동북아시아의 상황속에서란 주제로 열리는 협의회는 오는 12일부터 14일까지 서울 응암동 서문교회와 경기도 광주 소망교회수양관 등에서 진행된다. ... 동북 아시아의 현 상황 속에서 칼뱅의 신앙 유산을 어떻게 적용하며, 또 아시아 교회의 부흥을 이끌 수 있을지 모색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대한기독신문)
그러나 칼뱅의 영향을 많이 받은 대다수의 한국 장로교에서 칼뱅에 대한 균형잡힌 평가가 과연 얼마나 가능할까요? 우리는 일방적인 교회의 가르침에 힘입어 칼뱅의 한쪽 면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칼뱅 500주년을 <기념>하여 칼뱅이라는 인물을 파헤쳐봅니다.
칼뱅의 두 얼굴
은은한 미소에서는 따뜻함이, 날카롭고 총명한 눈매에서는 지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이 그림은 스위스의 종교개혁가로 잘 알려진 장 칼뱅(Jean Calvin)의 초상입니다. 그는 이 초상화처럼 지적인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었습니다. 스물네 살의 젊은 칼뱅은 개신교의 교리를 체계적이고 논리적이며 창조적으로 정리한 《기독교 강요Institutio religionis Christianae》를 내 놓았고 수많은 신학적, 논쟁적인 책을 써냈습니다. 오랜 전통의 카톨릭에 비해 갓 태어난 아기와도 같았던 개신교에는 교리의 방향과 중심을 잡아줄 무언가가 절실히 필요했고, 칼뱅은 이러한 요구에 완벽하게 부응한 것입니다.
칼뱅의 신학적 업적은 실로 대단한 것이어서 불후의 명작으로 자리매김한 《기독교 강요》는 오늘 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며 수많은 추종자들을 양산해내고 있습니다. 정성구는 “칼뱅은 성경에 대한 경외심을 심어 주고, 그는 장로 교회의 정치 틀을 세웠고 또한 칼뱅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을 강조했으며 개혁주의 신학 체계를 바로 세웠다. 칼뱅의 사상은 그의 후학들로 통해서 성경적 기독교, 즉 개혁주의 교회의 틀을 바로 세웠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칼뱅에게는 또 하나의 초상화가 있습니다. 따뜻함과 지적인 분위기는커녕 자비심이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눈초리, 잿빛 피부, 바짝 마른 얼굴, 딱딱한 손만 보일 뿐인 피에르 보에리오(Pierre Woeiriot)가 그린 초상화입니다. 그의 얼굴은 고압적이고 완고하며 기쁨이나 은혜로움, 사랑 따위와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이 초상화는 칼뱅의 어두운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놀랍게도 작은 도시인 제네바에서 5년 동안 무려 60여명을 죽이고 76명을 추방했습니다. 그들은 대개 칼뱅이 보기에 이단자나 마녀로 보이는 자들이었습니다. 칼뱅은 그의 예정설을 반대하거나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심지어는 아가서와 복음서의 해석이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을 처형해 나갔습니다. 13명이 교수대에 매달리고, 10명의 목이 잘렸으며, 35명이 화형 당했습니다.1)
뿐만 아니라 그는 〈교회 계율〉을 만들어서 온갖 하찮은 일들에 대해서 금지하고 벌을 주었습니다. 그 당시 의회의 기록에는 〈교회 계율〉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이 받았던 형벌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어떤 시민이 세례식에서 웃음 지었다 : 사흘간 감방 신세. 어떤 사람은 여름철 더위에 지쳐서 설교 시간에 잠들었다 : 감방. 노동자들이 아침식사에 파이를 먹었다 : 사흘간 물과 빵만 먹을 것. … 어떤 남자가 자기 아들에게 아브라함이라는 이름붙이기를 거절하였다 : 감방. 눈먼 바이올린 연주자가 춤곡을 연주하였다 : 도시에서 추방. 어떤 사람이 카스텔리오의 성서번역을 칭찬하였다 : 도시에서 추방. 어떤 소녀는 스케이트를 타다가 잡혔다. 어떤 부인이 남편의 무덤에 몸을 던졌다. 어떤 시민이 예배 도중에 옆 사람에게 한 줌의 담배를 주었다 : 종교국에 출두하여 경고를 받고 참회할 것. 동방박사 축제일(1월6일)에 즐거워진 사람들이 케이크에 콩을 박았다 : 24시간 동안 물과 빵만 먹을 것. 어떤 시민이 ‘칼뱅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칼뱅 씨’라고 불렀다. 몇 명의 농부들은 오래된 관습대로 예배가 끝난 다음에 사업 이야기를 했다 : 감방. 감방, 감방으로!"2)
스스로 가장 명석하다고 여겼던 칼뱅은 자신의 신학과 법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는 그의 가르침이 하나님에게로부터 온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가르치는 것을 나는 하나님께 얻는다. 이 사실이 나의 양심에 힘이 된다.” 그리고 신이 자신에게 무조건 옳은 판단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주었다고 감히 선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판단할 은총을 내리셨다.” 따라서 <교회 계율>은 하나님의 계율이었고 그로인한 형벌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칼뱅은 하나님의 권위를 그 자신과 교회에 온전히 넘겼습니다. 《기독교 강요》에서 그 정당성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교회의 설교자들이 가져야 할 권한을 여기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관리하고 알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모든 일을 감행할 권한이 있고, 이 세계의 위인이나 모든 권력자를 강요하여 하나님의 권위 앞에 머리 숙여 자기에게 봉사하도록 만들 권한을 가진다. 그들은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에게 명령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법령을 세울 수 있고 사탄의 왕국을 쳐부술 권한을 가진다. 그들은 양들을 보살피고 늑대를 절멸시켜야 하며, 복종하는 자들을 격려하고 가르치고, 반항하는 자들을 고소하고 절멸시킬 권한을 가진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람들은 <교회 계율>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날 아침 식사로 파이를 먹거나 예배가 끝나고 사업 이야기를 한다고 감방으로 보내는 교회는 아무데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칼뱅의 <교회 계율>을 엄격히 요구하는 교회가 나타난다면 따가운 이단의 눈총을 받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가 주장한 예정설을 따르지 않아도 신앙생활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그가 철석같이 진리로 여겼던 주장들은 건드릴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기보다는 비판과 논의의 대상인 <칼뱅의 신학>으로 남아있습니다.
칼뱅의 오류와 러셀의 패러독스
‘나의 판단이 곧 하나님의 판단’이라는 칼뱅의 생각 어딘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그러한 생각의 모순은 20세기의 뛰어난 수학자이자 논리학자이며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러셀이 찾아낸 패러독스를 통해 논리적으로 지적할 수 있습니다. 러셀은 이해하기 쉽도록 시골의 이발사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탈리아의 가파른 외딴 지역에 시실리아라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는 스스로 면도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면도를 할 줄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의 면도를 해 주는 이발사는 없어서 스스로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수염을 기르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마을 촌장은 주민 가운데 딱 한 명을 이발사로 지명했고, 그는 촌장의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그 유일한 이발사는 다음과 같은 광고를 냈습니다. '자기 스스로 면도를 하지 않는 마을 주민들의 면도는 제가 최선을 다하여 책임지겠습니다. 단, 스스로 면도를 하는 사람의 면도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그 이발사는 마을의 한 주민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면도는 누가 하나요?'"
이 말을 들은 이발사는 대답하기가 난처해졌습니다. 이발사는 자기 스스로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만일 이발사가 스스로 면도를 한다면 광고의 뒷부분에 의해, 자기 자신은 면도를 해 주지 말아야 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 면도를 하지 않는다면 광고의 앞부분에 의해 자기 자신은 면도를 해 주어야 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발사는 자신의 면도에 관한 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순된 입장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1)
이 이야기는 <자기 자신>이 만든 법에 <자기 자신>을 포함시키면 모순에 빠진다는 러셀의 패러독스입니다. 잘 알려진 “크레타 인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다.”라는 말도 이와 같은 경우입니다. <자신을 제외하고 생각했을 때> 문장이 참인지 거짓인지 조사하기는 쉽습니다. 모든 크레타 인을 조사했을 때 한 명이라도 거짓말쟁이가 아니라면 이 문장은 거짓이고, 모두 거짓말쟁이였다면 참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자기 자신>을 이 문장에 적용했을 때입니다.
크레타 인 이야기는 자기 자신이 거짓이라 말하는 명제의 문제를 다루었지만 거짓말이 아닌 참말에도 마찬가지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 문장은 진실이다.”라는 문장은 모순은 생기지 않지만 자기 언급의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말의 진위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문제가 생깁니다. 만일 참이라면 참인 것이고, 거짓이라면 거짓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장사꾼이 “이건 정말 손해보고 드립니다.”라고 할 때 그 말의 진위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말이 진실이면 진실이고 거짓이면 거짓입니다. 다만 말하는 사람의 양심을 믿는 수밖에 없습니다.1)
칼뱅은 “오직 기독교인은 사람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따라야 한다.”며 그의 신학과 규범을 통해 끝없이 하나님의 뜻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자기언급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칼뱅은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선포에 순종하기를 원했지만 자신의 언급만큼은 예외가 됩니다. 결국, 그의 말은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라는 말과 다름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내가 가르치는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얻는다.”고 말했지만 이 말의 진위를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이건 정말 손해보고 드립니다.”라는 말처럼 알맹이 없는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칼뱅의 말에 반박할 수 없다면, 어떤 누군가가 “칼뱅이 가르치는 것은 마귀로부터 얻는다.”고 말해도 역시 반박할 수 없습니다. 결국 칼뱅의 선포는 자연스럽게 자기모순에 빠집니다.
오스트리아의 전기 작가 슈테반 츠바이크는 칼뱅을 다음과 같이 평합니다. “이 특별히 명석한 정신의 소유자는 일생 동안 단 한순간도 자기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할 권리, 자기만이 진리를 알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바로 이 위대한 편집증,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완고한 믿음과 예언자처럼 자기 안에 사로잡힌 상태 덕분에 칼뱅은 현실에서 견뎌낼 수 있었다. 그의 돌 같은 확고함, 강철같이 비인간적인 완고함이 그가 거둔 정치적 승리의 비밀이었다. 그토록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히고, 그토록 위대하게 편협한 자기 확신이 한 남자를 세계역사상의 지도자로 만들어내었다.”
이처럼 칼뱅은 자신의 신학과 판단이 하나님의 계시와 같아 절대로 틀리지 않는다는 강한 신념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칼뱅의 신념은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돼 수많은 사람들에게 죽음의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칼뱅의 법에 접촉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제네바의 시민들은 사소한 일로 죄책감에 시달리거나 외출을 극도로 삼갔으며 온종일 공포에 떨었습니다. 발자크(Balzac)는 칼뱅의 폭력적인 모습이 제네바에만 머무른 것에 대해 안도합니다. “칼뱅에게 제네바보다 더 큰 활동 공간이 맡겨졌더라면 그는 정치적 평등의 사도(로베스피에르)보다 훨씬 더 많은 피를 흘렸을 것이다.” 결국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지적인 종교개혁가로 기록될 뻔했던 제네바의 종교 개혁가는 자신의 굳건한 믿음으로 인해 오히려 불명예스러운 초상화를 남기고 말았습니다.
칼뱅의 유산 - 부시와 하나님의 뜻
칼뱅처럼 사람의 입에서 일방적으로 선포되는 하나님의 계시는 오늘날에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 조지 부시는 2000년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대통령 출마를 원한다는 사실을”(조지 부시, 2000년 9월 선거 전 월간<조지>와의 인터뷰에서)
신의 계시를 받는 또 다른 사람인 팻 로버트슨은 2004년 미국의 대선에서 크리스천들이 부시에게 투표해야 한다며 언론매체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조지 부시가 쉽게 승리할 것이다. 2004년 대선이 압승으로 끝날 거라는 주님의 음성이 분명히 들려온다. 주님은 방금 그를 축복하셨다. … 그가 좋은 행동을 하든 나쁜 행동을 하든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팻 로버트슨, 2004년 1월 2일 AP/폭스뉴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계시 선포에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선포는 성경과도 무관하며 밑도 끝도 없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계시 덕분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부시는 복음주의자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그리고 그는 칼뱅이 <교회 계율>을 일방적으로 강요했듯이, 북한 및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규정해 버립니다. 그에게 이라크 침공과 북한 압박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로서의 ‘의무’이며 ‘책임’이었습니다.
칼뱅의 유산 - 촛불집회와 하나님의 뜻
국내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쇠고기 수입 문제로 거리의 촛불 시위 열기가 뜨거워지자 과격불법촛불시위반대 시민연대 인터넷 카페에 다음과 같은 글이 올라왔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지금의 촛불집회를 절대로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진보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시지만 진보의 가면을 쓰고 있는 저 유물론 세력(주사파를 비롯하여 거기에 복무하는 세력)은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으로 그들이 회개를 하고 주님께 돌아올 그날을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에 아무 말씀도 없으신 것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지한 것'도 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운동권의 본질에 대해서 몰랐다면 이제부터 그 근본주장이 뭔지 관찰해보세요. 예수님 앞에서 심판받으실 때 “나는 몰랐거든요” 하실 겁니까? '무지한 것도 하나님께는 죄'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제 촛불을 접고 나라와 국가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1)
이 글은 촛불집회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일방적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와 같이 주장했는데 유명한 어떤 목사는 촛불집회 세력을 마귀에 비유하면서 “한국의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의 어려움과 공포는 마귀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촛불집회를 중단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 촛불집회는 자연스럽게 <마귀의 뜻>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다른 많은 기독교인들은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면서 개인적인 양심에 따라 촛불집회에 참여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마귀들일까요? 그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이러한 말하기 방식이 칼뱅이 그랬던 것처럼 러셀의 패러독스의 오류에 빠져있다는 것만은 자명합니다.
하나님 뜻의 남발은 이제 그만
하나님이 우파를 지지하는지, 아니면 좌파를 지지하는지, 그리고 촛불집회에 찬성해야 하는지 반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정확하게 알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개인적이지만 사적이지는 않으며2),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결정은 ‘각자의 신앙에 근거한 양심과 이성’에 따라 이루어진다면 충분하며, 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짐 월리스는 《하나님의 정치》에서 “하나님의 정치를 아는 것보다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정당화하는 편이 훨씬 수월하다.”면서 일부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나님을 거들먹거리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하나님은 공화당이나 민주당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어느 당이든 하나님을 정치화하거나 종교계를 정치적 도구로 사용하려는 것은 크나큰 잘못이다.”
오늘날 칼뱅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지만 그의 긍정적인 부분만을 부풀리려는 시도만이 홍수를 이루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공정한 비판도 마땅히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침없이 하나님의 뜻을 남발했던 칼뱅의 유산이 칼뱅 500주년을 맞는 2009년에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끊임없이 이어질 것입니다.
1),2) 슈테반 츠바이크 《폭력에 대항한 양심》자작나무 80쪽 1)오채환 《러셀이 들려주는 패러독스 이야기》자음과 모음 2)짐 월리스 《하나님의 정치》청림출판 1)과격불법촛불시위반대 시민연대 작성자ID blue9man
<하랑> http://blog.naver.com/jaharangk
촛불시위때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서 시국미사를 열어 이명박정권의 실정을 비판한 일만 가지고, 당시 언론들은 이를 천주교의 정식입장인 것처럼 보도했는데,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입장을 천주교회의 공식입장으로 보면 안 된다. 왜냐면 가톨릭 교회에서 교회의 정식입장을 발표하려면 교회에서 인정한 정당한 권위, 공식적이고 합법적인 절차, 인준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서도 말 그대로 촛불시위에 참여한 민중들과 같이 행동한 진보적 견해를 교회의 정식입장인 것처럼 주장하지 않았다. 가톨릭교회에서도 정치적 견해가 통일되어 있지는 않다. 우파와 좌파, 친일과 항일, 친미와 반미까지 다양한 입장이 있으며, 민중들의 민주화운동이 활발하던 시절에도 민주화운동파와 민주화운동 반대파간의 갈등이 있었다. 이렇듯 다양한 교회안의 의견들은 존중되어야 한다. 진짜 사악한 것은 서로 의견을 달리 할 수 있는 교회내 다양성을 갈등과 대립인양 과장하고 이간질하는 것이다.
사실 박영호 기자가 지적한 한국교회내의 다양한 견해는 세계교회에서도 흔하게 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당시 가톨릭교회내에서는 종교적 기득권을 형성하던 고위 성직자들은 사회개혁에 반대했지만, 가난한 신자들을 대상으로 목회하던 젊은 성직자들은 사회개혁에 찬성했습니다. 근대 영국성공회에서도 근대 노예제도문제를 둘러싸고 윌리엄 윌버포스처럼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진보파와 노예제에 찬성하는 보수파간의 갈등이 있었고(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근대 영국 성공회에서는 노예제에 찬성했으며, 일부 사제들은 흑인노예들을 농장 노동자로 부리기도 했습니다.), 근대 독일 개신교회에서는 근대 독일 노동자들의 노동운동에 대해 자본주의가 인간을 이문을 내기 위한 도구로 여기는 비인간적 체제임을 꿰뚤어보고 노동운동에 동참하는 진보적 기독교인들과 내가 바뀌면 사회가 바뀐다는 논리를 주장하며 교회의 노동운동 동참에 반대하는 보수적 기독교인들간의 이념갈등이 있었습니다. 일본 개신교회에서도 부라쿠민들의 신분차별폐지운동에 대해서 근본주의교회들은 영혼구원이 중요하다면서, 복음주의교회들은 내가 바뀌면 사회도 바뀐다며 신분차별폐지운동참여에 소극적이었지만, 신분차별이 얼마나 인간의 마음을 좌절감과 울분으로 병들게 할 수 있는지, 그리스도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인지를 잘 아는 부라쿠민 기독교인들은 1922년 수평사를 결성하여 신분차별폐지운동을 조직화합니다.
신학은 뭐 안 그런가요? 성서비평학에 대한 견해도 요즘은 보수적인 믿음을 가진 분들도 기꺼이 존중하시지만, 혹시 성서의 권위를 훼손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우려때문에 반대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이렇듯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는데, 이를 존중하기는 커녕 자신의 뜻은 하느님의 뜻이라고 정당화하며 고집하는게 과연 하느님의 뜻일 수 있는지 생각해봐야할 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