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 <열린 토론실>입니다. 다비안들의 부담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채>와는 달리, 보다 진지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나 주제를 나누고 싶은 분들을 위한 게시판입니다. 가급적 예의를 갖추시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대화는 다비안을 비롯한 여러 네티즌들의 온라인 상에서의 자유로운 것이기에 그 방향과 정체성이 반드시 다비아와 일치하지는 않음을 밝혀둡니다.
글 수 253
나는 예수그리스도를 만났러 갔다.
바쁜 인파 가운데 분주하고 복잡한 그 들녘에 거리로 ......
부담스러울 정도의 투명하고 맑은 눈은
이미 나를 향하고 있었으며 그는 말하고 있었다.
내가 듣고자 했던 천국의 비밀스러움과 기쁨을
시간이 흘러도 끊이지 않는 진실들의 향연을...
이제 지는 태양의 뒤편에 그림자처럼 번져 가는
어두움 가운데 지쳐 버린 육신은 배고픔을 느꼈다.
내 손에 쥐어진 작은 도시락을 열어보았다.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 ....
어린 나의 끼니 조차 해결하지 못할 적은 것이지만
나는 아무 망설임없이 예수님의 제자분께 그것을 건넸다.
(나는 이런 현실을 계산하는데 익숙치 않다
나는 아직 숫자를 모르기 때문에 )
예수님은 무리를 바라보시며 축복의 기도를 드렸다.
나는 이미 포만감을 느꼈고 넘치는 보리떡과
물고기로 모든 사람이 나누고도 남았을 법하다.
나는 기뻣다. 하늘나라 잔치에 참여한다는 사실이...
그러나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나'를 아무도
알아 보지 못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5000명이라는 숫자였으니까
나는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건네 준
익명의 소년이 되어 버린 것이다.
사람은 사람을 모르는 것 같다.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당연한 것일테지만 중요한건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인격과 정서는
외면한 채 단편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준만을
가지려 하기 때문에 정작 사람들은 소외되는 것 같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자칭 '크리스천'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말이다.
교회는 몇년됬어? 성도는 몇명이야? 헌금은 얼마나 되지?
교회의 크기는 얼마인가? 세례는 몇명줬어? 신앙생활은
얼마나 했지? 성경은 몇장 읽었어?
너는 어떤 교회에 다니니?라고 묻는다면
나는 예수그리스도의 향기가 은은한 교회에 다니고 있어
라고 대답할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이해를 하지 못할 것 같다.
700억짜리 교회에 다녀요라고 말을 해야 어른들은 이제야
좋은 교회구나 라는 반응을 보인다.
천국은 얼마일까? 얼마를 주면 갈 수 있을까?
나는 현기증이 날법한 질문을 등뒤로
네온십자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교회 밖으로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오늘도 예수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잊혀져 버린 오병이어
기적의 도시락을 건넨 그 아이 교회 밖으로 힘없이 걸어가야
했던 그소년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05-10 19:46)
바쁜 인파 가운데 분주하고 복잡한 그 들녘에 거리로 ......
부담스러울 정도의 투명하고 맑은 눈은
이미 나를 향하고 있었으며 그는 말하고 있었다.
내가 듣고자 했던 천국의 비밀스러움과 기쁨을
시간이 흘러도 끊이지 않는 진실들의 향연을...
이제 지는 태양의 뒤편에 그림자처럼 번져 가는
어두움 가운데 지쳐 버린 육신은 배고픔을 느꼈다.
내 손에 쥐어진 작은 도시락을 열어보았다.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 ....
어린 나의 끼니 조차 해결하지 못할 적은 것이지만
나는 아무 망설임없이 예수님의 제자분께 그것을 건넸다.
(나는 이런 현실을 계산하는데 익숙치 않다
나는 아직 숫자를 모르기 때문에 )
예수님은 무리를 바라보시며 축복의 기도를 드렸다.
나는 이미 포만감을 느꼈고 넘치는 보리떡과
물고기로 모든 사람이 나누고도 남았을 법하다.
나는 기뻣다. 하늘나라 잔치에 참여한다는 사실이...
그러나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나'를 아무도
알아 보지 못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5000명이라는 숫자였으니까
나는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건네 준
익명의 소년이 되어 버린 것이다.
사람은 사람을 모르는 것 같다.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당연한 것일테지만 중요한건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인격과 정서는
외면한 채 단편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준만을
가지려 하기 때문에 정작 사람들은 소외되는 것 같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자칭 '크리스천'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말이다.
교회는 몇년됬어? 성도는 몇명이야? 헌금은 얼마나 되지?
교회의 크기는 얼마인가? 세례는 몇명줬어? 신앙생활은
얼마나 했지? 성경은 몇장 읽었어?
너는 어떤 교회에 다니니?라고 묻는다면
나는 예수그리스도의 향기가 은은한 교회에 다니고 있어
라고 대답할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이해를 하지 못할 것 같다.
700억짜리 교회에 다녀요라고 말을 해야 어른들은 이제야
좋은 교회구나 라는 반응을 보인다.
천국은 얼마일까? 얼마를 주면 갈 수 있을까?
나는 현기증이 날법한 질문을 등뒤로
네온십자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교회 밖으로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오늘도 예수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잊혀져 버린 오병이어
기적의 도시락을 건넨 그 아이 교회 밖으로 힘없이 걸어가야
했던 그소년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05-10 19:46)
2007.05.09 07:55:33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순수지상주의자도 아니구 순수를 파는 장사꾼도 아닙니다.
단지 순수성을 그저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 건 아닌지 ...
일종의 기우였습니다.
단지 순수성을 그저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 건 아닌지 ...
일종의 기우였습니다.
2007.05.09 08:01:07
가을 소풍님 님의 주장대로라면 믿음도 사랑도 모두 헛것이지요 믿음도 상품으로 팔리고 사랑도 상품으로 팔립니다. 어쩌면 믿음 , 사랑 의 강박에 벗어냐야 신앙인으로서의 사유가 좀더 성숙하는게 아닐까요?
자본과 성장 논리가 믿음 사랑을 이미 상품으로 팔아 먹고 있는 현실을 ....
그리고 대중가요가 순수한 사랑을 소제로 한다고 해서 그것이 순수하다고 말할 수 있나요?
동일선상에서 비교할 수 없는 것들을 단지 단어 자체에서 오는 기계적 공통성에 의해
동일 성질의 것으로 취급하고 계시는군요.
자본과 성장 논리가 믿음 사랑을 이미 상품으로 팔아 먹고 있는 현실을 ....
그리고 대중가요가 순수한 사랑을 소제로 한다고 해서 그것이 순수하다고 말할 수 있나요?
동일선상에서 비교할 수 없는 것들을 단지 단어 자체에서 오는 기계적 공통성에 의해
동일 성질의 것으로 취급하고 계시는군요.
2007.05.09 14:25:45
콰미님 말씀처럼 현실을 배제한 관념적 믿음, 관념적 사랑의 강박에서 벗어나야
더욱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생각이 바로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입니다.
100% 공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이 어떻게 '믿음도 사랑도 모두 헛것이지요'라는 지적과 연결되는지요?
좀 생뚱맞습니다.
'순수한 내용을 담았다고 해서 대중가요 자체가 순수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것 역시 콰미님께 제가 먼저 제기한 질문의 반복이네요. 답은 당연히 아니올씨다, 지요.
제 글의 핵심은 그것에 열광하는 '아이들의 마음' 은 순수인가 아닌가 이거였습니다.
순수에 대한 사유는 이처럼 단순하지 않더라... 뭐 그 정도로 이해해 주세요.
'기계적 공통성에 의한 동일시의 오류' 라고 지적하시면 저도 받아치고싶은 말은 많지만 그만두겠습니다.
콰미님을 순수지상주의자, 또는 순수를 파는 장사꾼으로 의심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제 글에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면 너그러이 용서하세요.
다만 균형을 맞추고 싶은 이놈의 습관 때문에....
더욱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생각이 바로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입니다.
100% 공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이 어떻게 '믿음도 사랑도 모두 헛것이지요'라는 지적과 연결되는지요?
좀 생뚱맞습니다.
'순수한 내용을 담았다고 해서 대중가요 자체가 순수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것 역시 콰미님께 제가 먼저 제기한 질문의 반복이네요. 답은 당연히 아니올씨다, 지요.
제 글의 핵심은 그것에 열광하는 '아이들의 마음' 은 순수인가 아닌가 이거였습니다.
순수에 대한 사유는 이처럼 단순하지 않더라... 뭐 그 정도로 이해해 주세요.
'기계적 공통성에 의한 동일시의 오류' 라고 지적하시면 저도 받아치고싶은 말은 많지만 그만두겠습니다.
콰미님을 순수지상주의자, 또는 순수를 파는 장사꾼으로 의심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제 글에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면 너그러이 용서하세요.
다만 균형을 맞추고 싶은 이놈의 습관 때문에....
2007.05.10 18:27:59
콰미님 님의 순수하신 마음과 신앙에 딴지를 걸고자 쓰는 글이 아닙니다.
저는 님의 글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과 열정을 봅니다. 그러나
님의 사랑과 열정이 지식에 근거 하지 않는 다면 버림 받았던 유대인들의
종교적 열씸과 순수함과 그리 다를 바가 없을 것 입니다..
올바른 지식에 기반하지않은 그들의 종교적 열정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원인이 되었고, 올바른 말씀을 깨닫지 못한 바울의 순수함과 열정은 스데반
을 돌로치는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여러차례에 결쳐서 오병이어 사건에 관하여 말씀 드렸습니다만.
요한 복음 6장 말씀을 찬찬히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님께서 천국잔치로 비유했던 오병 이어의 기적의 현장은 그 본질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 주님께서 생명의 떡에 관한 말씀을 전파할때 오히려 주님을 배척
하는 배반의 자리가 되었음을 잘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병이어의 올바른 의미를 가르친사건이후 많은 제자들은 떠나가고
또한 가롯유다가 예수를 팔자로 지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시대 도한 그때와 다르지 않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많은 크리스쳔 단 한끼 식사인 떡먹은 사건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그 기적의
현장이 자신의 삶속에서 날마다 이루어져 육신의 삶이 복을 얻길 바라고들
있지요..
그러나 그러한 신앙인들모두 "생명의 떡"이신 육신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양식이신 주님의 말씀과 가르침에는 모두 어렵다하고 떠나버리고 그후
골고다에서 주님을 못박는 자리로 나아갈군중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병이어의 아름다운 천국잔치로 시작했던 요한복음 6장은 아래와 같이 막을 내립니다.
(요 6: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요 6: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요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요 6: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요 6: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요 6: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저는 님의 글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과 열정을 봅니다. 그러나
님의 사랑과 열정이 지식에 근거 하지 않는 다면 버림 받았던 유대인들의
종교적 열씸과 순수함과 그리 다를 바가 없을 것 입니다..
올바른 지식에 기반하지않은 그들의 종교적 열정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원인이 되었고, 올바른 말씀을 깨닫지 못한 바울의 순수함과 열정은 스데반
을 돌로치는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여러차례에 결쳐서 오병이어 사건에 관하여 말씀 드렸습니다만.
요한 복음 6장 말씀을 찬찬히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님께서 천국잔치로 비유했던 오병 이어의 기적의 현장은 그 본질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 주님께서 생명의 떡에 관한 말씀을 전파할때 오히려 주님을 배척
하는 배반의 자리가 되었음을 잘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병이어의 올바른 의미를 가르친사건이후 많은 제자들은 떠나가고
또한 가롯유다가 예수를 팔자로 지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시대 도한 그때와 다르지 않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많은 크리스쳔 단 한끼 식사인 떡먹은 사건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그 기적의
현장이 자신의 삶속에서 날마다 이루어져 육신의 삶이 복을 얻길 바라고들
있지요..
그러나 그러한 신앙인들모두 "생명의 떡"이신 육신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양식이신 주님의 말씀과 가르침에는 모두 어렵다하고 떠나버리고 그후
골고다에서 주님을 못박는 자리로 나아갈군중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병이어의 아름다운 천국잔치로 시작했던 요한복음 6장은 아래와 같이 막을 내립니다.
(요 6: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요 6: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요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요 6: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요 6: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요 6: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신앙인 치고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신앙'에 대한 갈망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위의 글 역시 그러한 마음을 아름답게 표현하신 글이구요.
그러나 '순수'라는 개념이 현실속에서 실제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생각거리는 많아집니다.
저는 교회에서 학생들과 지냅니다.
그들과 소통하기 위해 갸들이 좋아하는 노래도 듣곤 합니다.
많은 노래들이 소위 '순수한 사랑'의 감정을 어떻게 더 맛나게 표현하는가 경쟁하고 있지요.
문제는 그런 순수함을 갈망하는 노랠 들을수록 나는 마음이 착해지기는 커녕 짜증이 샘솟더라 이겁니다.
왜 그럴까요? 내가 순수함을 잃어버려서?
순수한 가사와 멜로디로 포장된 노래 속에는 순수하지 않은 자본의 논리가 숨어있기 때문이지요.
50이 넘은 노땅들(이수만이나 서세원을 생각하시면 됩니다)이 프로듀서가 되어
작사가, 작곡가들을 닥달하여 10대 아이들의 감성을 쥐어짜며 '순수상품' 을 만들어내는 장면을 상상하면 냉수 마시다가도 속이 울렁거립니다.
순수함을 갈망하는 노래들이 내게 끔찍한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런 류의 노래와 문화 상품들에 중독되었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아이들의 상태가 심히 걱정스럽고, 이러는 내가 벌써 노땅이라 그런가 심히 자괴스럽고... 하여간 깝깝합니다.
우리 아이들, 순수한 건가요?
순수함에도 거룩한 순수가 있고 천박한 순수가 있는건가요?
그게 구분되면 그걸 순수라 말할 수 있나요?
질문은 꼬리를 잇고....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에 대한 사유의 한계점도 이와 유사하지요.
현실의 구도 안에서 살펴야 비로소 균형있게 보이지요.
교회에서의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 이라는 명제도 종종, 위의 경우와 유사하게 감추어진 의도(그게 뭔지는 설명 안해도...)에 의해, 누군가의 손(이 역시 설명 안해도...) 에 의해상품으로 팔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그 상품에 입맛 들인 다수의 교인(신앙 소비 대중?)이 자신도 모르는 새 교회의 건강성을 가로막는 행태에 순진한(순수함과 구별해주셈) 동참자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어쩌면 순수함의 강박에서 벗어나야
신앙인으로서의 사유가 좀 더 성숙하는 게 아닐까요?
들(삶의 토대)을 빼앗겨 봄(순수한 이상)조차 빼앗긴 광야 앞에 선 시인의 심정으로,
자본과 성장 논리가 순수와 동심을 이미 상품으로 팔아먹고 있는 현실을
그리고 동일한 현실이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당연하다는 듯 반복되는 교회의 모습을
좀 더 비장하게, 좀 더 비판적으로....
(뭐야, 이거 내가 싫어하는 연설조?
에고, 이슬 맞고 헤매다 너무 멀리 왔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