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신앙은 만날 수가 없다. 마치 철길이 선로변환기 부근에서 잠시 만나는듯하다가 또다시 서로 떨어져 둘이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내달리듯, 그 둘 사이에는 영원한 간극이 존재하게 된다. 바램 같아서는 신학에 언제나 “현실 신앙” 개념이 붙어 다녀야 옳을 것이지만 그건 부질없는 내 생각일 뿐이다.


“신학”은 그것과 관계된 이들의 삶의 방식이겠지만, 현실신앙은 위대한 실재(實在)이고 한편 처절한 실존이다.


생각이 또 다른 생각을 낳는다고, 이처럼 신학이 신앙현실을 뒤로한 채 끝없이 사유하는데 머무른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뭔가 석연치 못할 일이다.


신학이, 무슨 신학, 무슨 신학(예, ’조직신학‘ ‘ ’해방신학‘ ’실천신학‘ 등등) 운운하면서 유형별로 세분화되고 다양한 양상으로 각기 나타나는 일도, 알고 보면 사람 각자마다의 외길(각자가 가고 싶은 길)이 따로 있기 때문인데, 그 길은 예수 본연의 총체적이고도, 오직 하나이며 둘일 수 없는 “정도”로부터 얼마씩이라도 항상 어긋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믿음”에는 보편성이 보장되어 있으며, 그게 어떤 종류의 학문이 됐든지 간에, 공부를 많이 한 사람에게 특별히 믿음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비록 기독교신앙의 본질인 성서가 다소 난해한 것이기는 하더라도, 믿고자 뜻하는 사람에게는 어렵기만 한 게 아니다. 예를 들어 구약성서를 읽으면서 거기에 기록된 유대교적인 제사법을 이해하면서 제대로 머릿속으로 연상할 수 없다고 해서 그러한 무지가(혹은 무식이) 믿음을 얻는데 지장을 초래한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어떤 목사가 구약의 특정부분을 해석하고 가르치는데 목숨을 걸다시피 하는 일이 있으니 그 뜻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또한 4복음서 상호간에 줄거리 나열의 순서나 사실 표현이 조금씩 다른 그점에 관해서 조리 있게 설명할 수 있는 지식이나 논리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고 해서 기독교신앙이 정립될 수 없다거나 혹은 그로 인해 믿음이 손상을 입는 것으로는 볼 수 없을 것이다(예수님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나는 차라리 이 말씀을 ‘...자들에게는’ 이 아니라,  '스스로 지혜롭거나 슬기로운 척하는 자들에게는’으로 의역하여 해석하고 싶다).


그리스도는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지향하며 오셨고, 예수의 가르침이나 그분의 행적은 지극히 일반적이고도 보편적인 지각으로써 능히 인식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또한 나아가 믿는데는 그렇게 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지식 혹은 사고 능력에 관건이 걸려있지 않고, ‘믿고자하는 순수한 열망’이 그에 관한 관건인 것이다.


믿음은 그에 관해서 누군가에 의해 설명되고 가르쳐진다기보다는, 그리스도 예수에 관해서 대강을 소개받은 연후에 성경 숙독과 지속적인 묵상 등 스스로의 노력과 각자에 대한 성령의 도우심에 의해서 얻어진다(체득)고 봄이 바람직한 사고로 여겨진다.


믿고자 하면 믿어질 것이요, 만약에 안 믿고자 한다면 어떠한 기적을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다 하더라도, 잠시 잠깐의 망설임은 생기겠지만 결국은 믿지 않고 말 것이다. 예수 행하신 기적을 보고 구름떼 같은 사람들이 몰려다녔지만 그렇도록 넘치는 숫자가 제자화(기독교인화) 된 것은 아니었다.


일반론적으로 생각해 볼 때, 자식이 다섯이면 그 자식들이 돌아가신 부모를 연상하는 것도 다 똑같을 수가 없는 일이듯이,
이왕 믿음의 세계에서도 萬人萬色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몸소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사도들도 훗날 각자 다른 관점과 다른 느낌의 저술들을 남겼다.
만약 지구상에 20억 명이 기독교인이라면 신앙의 모습도 20억 개일 수밖에 없다. 그 20억이라는 숫자에서 하나라도 줄여보겠다는 시도는 헛된 발상일 뿐이다. 그렇게 하고자 할 때 ‘종교적 독선’ 과 “불관용”이 나타난다.
이러한 맥락에서, 종교에서의 교조적인 양태는 “위선적 모습”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중세 교회음악사적 관점에서 한 예를 들자면, 당시는 모든 교회음악에서 3박자 체계 이외에는 작곡과 사용을 엄격히 금지했는데, 그 이유는 "3"이라는 숫자는 <성부.성자.성령>의 개념에 부합하는 것으로서 온전한 것이고 그 외의 음악적 리듬(2박 체계)은 불미스럽고 저속한 것이라는 게 그 이유였으니 음악적 식견을 갖추고서 지금 생각해본다면 참으로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닐 수가 없다(유감스럽고도 끔찍하게도 이게 종교의 편협한 한 모습이다). 만약에 그게 맞다면 우선 베토벤 작품들 중에서도 많은 것들을 무슨 수를 동원해서라도 폐기처분 해야만 마땅할 일이다.


   이렇듯 믿음의 밖으로 나타나는 양상이 조금씩 다르다 하더라도, 조금씩 다른 그 모습 그대로 믿음은 유효하고 가치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통일된 혹은 일체화된 믿음’은 인간의 과욕에 기인한 허상일 것이다.
과거 '보편적 교회'를 지향했던  Catholic Church가 그 신성하고 고매한 원어적 의미처럼 진정성을 견지하며 아름답게 존립하는데 성공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고할 때, 교회일체화를 꿈꾸는 소위 <에큐메니즘> 이 지나치게 이성주의 적이거나 인본주의 적이거나  혹은 이벤트적인 발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