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 <열린 토론실>입니다. 다비안들의 부담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채>와는 달리, 보다 진지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나 주제를 나누고 싶은 분들을 위한 게시판입니다. 가급적 예의를 갖추시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대화는 다비안을 비롯한 여러 네티즌들의 온라인 상에서의 자유로운 것이기에 그 방향과 정체성이 반드시 다비아와 일치하지는 않음을 밝혀둡니다.
글 수 253
역동성이 부족하다는 아쉬움이 다비아를 보수로 규정할 만한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진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역동성과 민주주의와 개방을 미덕으로 하고는 있지만 이것이 항상적으로 진보의 내용을 담보해 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보수가 단순히 폐쇄와 독단과 침묵의 정숙함으로 무장하고 있지는 않은 것과 상대적으로 등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하기에 다비아에서 느껴지는 반론의 부족 등이 역동성의 범주에 대한 이야기로 적당할 지는 모르겠지만 보수나 진보의 프레임을 여기에 맞추어 평가하려는 것은 그리 타당하다고 보여지지는 않습니다.
보수나 진보의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다비아에 글을 싣고 있는 필진들의 글을 평가하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만 그것조차 쉬운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프랑스혁명 이후로 이루어진 좌익과 우익의 문제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이후 진보의 문제를 학문적이거나 역사적으로 규정했던 고전적 구분방법은 사회주의의 몰락 등으로 그 의미의 힘을 잃어버린지 오래입니다.
오히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구분이 최근 진보와 보수의 딱지를 붙이는데 의미를 더하고 있습니다만 문제는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든 현실적으로 항상 변화하는 그 구분의 선상에서 명확히 벗어나 있지 못하다는데에서 발생하곤 합니다.
또한 그 선을 적용하고자하는 개인이나 단체가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는 중세 카톨릭적 오류에서 이러한 문제의 우려는 가중되어버립니다.
그것은 한나라당이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을 좌익이니 진보주의자니 하고 몰아붙이는 것에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진보신당이나 민주노동당, 나아가 사회당 등 좀 더 좌측에 있는 분들에게는 참으로 어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어느 지점에서 이러한 구분의 선을 그어놓고 다비아나 정용섭목사님을 단정하고자 하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무력해 지기는 했지만 고전적으로 명확히 학문적이고 역사적으로 그어진 진보의 규정을 적용하지 않을 것이라면 보수와 진보의 구분은 그 현실적 가변성으로 인해 무의미하다고 여겨집니다.
오늘의 진보가 내일의 보수가 되는 그러한 혼란과 아니면 자신이 놓여진 위치에 따라 주관적으로 놓여지는 이러한 틀은 세상의 발전과는 동떨어져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평가하고자 한다면 자신의 잣대를 좀더 분명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즉 자신이 가지는 이러 이러한 평가의 기준에서 어떻게 벗아나 있음을 가능한한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 좀더 의미있는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세상을 존속.유지.발전 시키고자 하는 것이 진보의 출발이기는 합니다만 이러한 출발선의 기준만으로 현실의 구체적 상황을 모두 무마하기에는 턱없이 빈약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저는 여전히 고전적 구분의 틀을 잣대의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변해버린 세상에 대한 세밀한 눈금이 그어진 잣대를 아직까지는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들고는 있는데 눈금이 희미하게 그어진 자라고나 할까 뭐 그런 상태인 것 같습니다.
눈금은 하나하나 채워나가면 될 것이기도합니다.
이것은 저의 고민의 화두이기도 하며 삶의 과제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다비아의 역동성 부족에 대한 느낌은 괴리와 아쉬움 으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정목사님과 그 외 필진들의 글들은 매우 학문적이고 구체적이며 충분히 현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참여하는 우리들의 글과 문장의 빈약함과 짧음이 아쉬움을 남김니다.
하지만 이러한 글들조차 양으로 모아진다면 나름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상대적으로 고민과 노력과 공부가 부족한 글들이 많은 노력과 심혈을 기울인 글들에 필적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모이기에 의미는 충분히 전달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또한 세월은 짧았던 글들을 길게 만들어 줄 것이며 지식에 대한 투자는 빈약해던 문장을 풍부하게 해줄 것입니다.
다비아 초기의 반발세력들(?)은 떨어져 나가고 목사님의 입장에 동의하는 분들이 많이 남게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것은 인터넷이 아니더라도 어떠한 조직에서나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몇 개의 글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혼재되고 타협되어 있는 저의 기준에서 정목사님의 글은 현실에 대하여 충실히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며 충분히 진취적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아쉬운 것은 목사님의 세밀한 입장에 대하여 이야기할 준비가 시간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되어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글들을 꼼꼼히 읽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기를 바랍니다.
너무 오랜만에 들려서 글을 남기게 된 것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목사님 생각은 아주 자주 하고있습니다.
정용섭목사님, 김종두 목사님 저와 인연을 가져던 귀한 분들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하지 못하는데 대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나의 원죄(?)의 굴레로 인하여 의미없이 교회를 다니고 있는 저 자신에 대해 이제 초탈해 가고 있습니다.
몇 가지 타협의 이유가 그야말로 핑계이기도 합니다만 원죄의 한계는 너무나 강력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종교적으로 좌절하지 않고 초탈했다고 위로삼으로 그 타협과 한계의 종말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자주들러서 이야기도하고 듣기도 하도록 하겠습니다.
전염병이 우려되는 이 때 다비아의 모든 분들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진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역동성과 민주주의와 개방을 미덕으로 하고는 있지만 이것이 항상적으로 진보의 내용을 담보해 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보수가 단순히 폐쇄와 독단과 침묵의 정숙함으로 무장하고 있지는 않은 것과 상대적으로 등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하기에 다비아에서 느껴지는 반론의 부족 등이 역동성의 범주에 대한 이야기로 적당할 지는 모르겠지만 보수나 진보의 프레임을 여기에 맞추어 평가하려는 것은 그리 타당하다고 보여지지는 않습니다.
보수나 진보의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다비아에 글을 싣고 있는 필진들의 글을 평가하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만 그것조차 쉬운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프랑스혁명 이후로 이루어진 좌익과 우익의 문제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이후 진보의 문제를 학문적이거나 역사적으로 규정했던 고전적 구분방법은 사회주의의 몰락 등으로 그 의미의 힘을 잃어버린지 오래입니다.
오히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구분이 최근 진보와 보수의 딱지를 붙이는데 의미를 더하고 있습니다만 문제는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든 현실적으로 항상 변화하는 그 구분의 선상에서 명확히 벗어나 있지 못하다는데에서 발생하곤 합니다.
또한 그 선을 적용하고자하는 개인이나 단체가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는 중세 카톨릭적 오류에서 이러한 문제의 우려는 가중되어버립니다.
그것은 한나라당이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을 좌익이니 진보주의자니 하고 몰아붙이는 것에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진보신당이나 민주노동당, 나아가 사회당 등 좀 더 좌측에 있는 분들에게는 참으로 어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어느 지점에서 이러한 구분의 선을 그어놓고 다비아나 정용섭목사님을 단정하고자 하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무력해 지기는 했지만 고전적으로 명확히 학문적이고 역사적으로 그어진 진보의 규정을 적용하지 않을 것이라면 보수와 진보의 구분은 그 현실적 가변성으로 인해 무의미하다고 여겨집니다.
오늘의 진보가 내일의 보수가 되는 그러한 혼란과 아니면 자신이 놓여진 위치에 따라 주관적으로 놓여지는 이러한 틀은 세상의 발전과는 동떨어져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평가하고자 한다면 자신의 잣대를 좀더 분명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즉 자신이 가지는 이러 이러한 평가의 기준에서 어떻게 벗아나 있음을 가능한한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 좀더 의미있는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세상을 존속.유지.발전 시키고자 하는 것이 진보의 출발이기는 합니다만 이러한 출발선의 기준만으로 현실의 구체적 상황을 모두 무마하기에는 턱없이 빈약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저는 여전히 고전적 구분의 틀을 잣대의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변해버린 세상에 대한 세밀한 눈금이 그어진 잣대를 아직까지는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들고는 있는데 눈금이 희미하게 그어진 자라고나 할까 뭐 그런 상태인 것 같습니다.
눈금은 하나하나 채워나가면 될 것이기도합니다.
이것은 저의 고민의 화두이기도 하며 삶의 과제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다비아의 역동성 부족에 대한 느낌은 괴리와 아쉬움 으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정목사님과 그 외 필진들의 글들은 매우 학문적이고 구체적이며 충분히 현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참여하는 우리들의 글과 문장의 빈약함과 짧음이 아쉬움을 남김니다.
하지만 이러한 글들조차 양으로 모아진다면 나름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상대적으로 고민과 노력과 공부가 부족한 글들이 많은 노력과 심혈을 기울인 글들에 필적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모이기에 의미는 충분히 전달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또한 세월은 짧았던 글들을 길게 만들어 줄 것이며 지식에 대한 투자는 빈약해던 문장을 풍부하게 해줄 것입니다.
다비아 초기의 반발세력들(?)은 떨어져 나가고 목사님의 입장에 동의하는 분들이 많이 남게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것은 인터넷이 아니더라도 어떠한 조직에서나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몇 개의 글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혼재되고 타협되어 있는 저의 기준에서 정목사님의 글은 현실에 대하여 충실히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며 충분히 진취적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아쉬운 것은 목사님의 세밀한 입장에 대하여 이야기할 준비가 시간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되어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글들을 꼼꼼히 읽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기를 바랍니다.
너무 오랜만에 들려서 글을 남기게 된 것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목사님 생각은 아주 자주 하고있습니다.
정용섭목사님, 김종두 목사님 저와 인연을 가져던 귀한 분들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하지 못하는데 대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나의 원죄(?)의 굴레로 인하여 의미없이 교회를 다니고 있는 저 자신에 대해 이제 초탈해 가고 있습니다.
몇 가지 타협의 이유가 그야말로 핑계이기도 합니다만 원죄의 한계는 너무나 강력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종교적으로 좌절하지 않고 초탈했다고 위로삼으로 그 타협과 한계의 종말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자주들러서 이야기도하고 듣기도 하도록 하겠습니다.
전염병이 우려되는 이 때 다비아의 모든 분들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2009.09.24 12:41:27

떡진머리님, 글이 사라졌다가 다시 올라 왔네요..
그런데 처음에 올리신 글과는 의미가 많이 달라진 글이 되어 돌아와서
제가 쓴 댓글이 이 글을 처음 본 분들은 조금 헷갈리기도 하겠네요..
처음 글에는 분명 다비아와 칼럼들을 향하여 나름 대로의 의견을 피력하신것이라 생각하였는데
다시 고쳐진 꼭지글을 보니 이건 처음 글을 뒤집어 버린 상황이 된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글의 촛점이 정용섭 목사님께 던지는 말투에서 .. 갑자기 다비아 회원들 수준, 문제제기로 선회하는것 같아
좀당황 스럽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올리신 글과는 의미가 많이 달라진 글이 되어 돌아와서
제가 쓴 댓글이 이 글을 처음 본 분들은 조금 헷갈리기도 하겠네요..
처음 글에는 분명 다비아와 칼럼들을 향하여 나름 대로의 의견을 피력하신것이라 생각하였는데
다시 고쳐진 꼭지글을 보니 이건 처음 글을 뒤집어 버린 상황이 된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글의 촛점이 정용섭 목사님께 던지는 말투에서 .. 갑자기 다비아 회원들 수준, 문제제기로 선회하는것 같아
좀당황 스럽습니다!
2009.09.24 12:51:51

아~ 그리구 본인의 글에 댓글이 달렸는데 꼭지글을 확 바꾸어 버리는건 글쓰는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보충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시 댓글로 하는게 맞지 않나 싶습니다!
보충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시 댓글로 하는게 맞지 않나 싶습니다!
2009.09.24 13:17:54

그렇게 이해하셨다면 저의 글을 오해해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의 생각을 이해하시려면 사고의 범주를 전환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수준을 문제시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저는 인간들간에 수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그런 상태에 있을 뿐입니다.
우주와 자연이 항상 무위자연한 상태에 있듯이 인간도 그러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글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준비가 잘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이것이 수준이 낮다거나 높다거나 하는 문제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사고의 다름이나 상황의 다름에 처해있는 것이지 정목사님의 글에 충분히 이야기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해서 수준낮은 사람으로 치부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고 그것이 서로간의 소통을 하고 관계를 형성하기에 아쉬움이 있다는 의미로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역동성의 문제가 진보나 보수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것과 그것을 이야기 하자면 필진들의 글에 대한 내용의 평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수와 진보의 논쟁이 많은데 서로간의 다른 카테고리에서 이야기하는 허망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명확하지 않는 기준에서 진보와 보수의 틀을 들이대지 말라는 말을 하고있는 것입니다.
역동성의 문제는 기획과 구체성의 문제며 생각하시는 참여자의 수준에 기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단순하고 명쾌한 사고는 나름의 의미가 있으며 복잡하고 학문적이고 과학적인 생각은 또한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것은 어떤 이가 마치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란 것으로 평가되는 것이 부당한 것 처럼 사람은 매우 복합적인 상태에 처해있는 것이지 단순하게 도식화해 평가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표현하는 상태를 수준이라고 굳이 이야기 하더라도 사람은 다양한 면에서 아주 여러가지의 수준에 있다는 점을 저는 간과하지 않습니다.
글을 확 바꾸어 버렸다고 하는데 어느 부분이 어떻게 그렇도록 바뀌어 버렸는지 이야기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글을 제가 미리 등록해 버렸는데 이는 처음에 글을 쓰다가 지워져 버려서 임시저장을 사용하지 않고 등록을 눌러버려서 그런 것입니다.
저의 생각을 이해하시려면 사고의 범주를 전환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수준을 문제시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저는 인간들간에 수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그런 상태에 있을 뿐입니다.
우주와 자연이 항상 무위자연한 상태에 있듯이 인간도 그러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글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준비가 잘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이것이 수준이 낮다거나 높다거나 하는 문제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사고의 다름이나 상황의 다름에 처해있는 것이지 정목사님의 글에 충분히 이야기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해서 수준낮은 사람으로 치부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고 그것이 서로간의 소통을 하고 관계를 형성하기에 아쉬움이 있다는 의미로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역동성의 문제가 진보나 보수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것과 그것을 이야기 하자면 필진들의 글에 대한 내용의 평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수와 진보의 논쟁이 많은데 서로간의 다른 카테고리에서 이야기하는 허망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명확하지 않는 기준에서 진보와 보수의 틀을 들이대지 말라는 말을 하고있는 것입니다.
역동성의 문제는 기획과 구체성의 문제며 생각하시는 참여자의 수준에 기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단순하고 명쾌한 사고는 나름의 의미가 있으며 복잡하고 학문적이고 과학적인 생각은 또한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것은 어떤 이가 마치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란 것으로 평가되는 것이 부당한 것 처럼 사람은 매우 복합적인 상태에 처해있는 것이지 단순하게 도식화해 평가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표현하는 상태를 수준이라고 굳이 이야기 하더라도 사람은 다양한 면에서 아주 여러가지의 수준에 있다는 점을 저는 간과하지 않습니다.
글을 확 바꾸어 버렸다고 하는데 어느 부분이 어떻게 그렇도록 바뀌어 버렸는지 이야기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글을 제가 미리 등록해 버렸는데 이는 처음에 글을 쓰다가 지워져 버려서 임시저장을 사용하지 않고 등록을 눌러버려서 그런 것입니다.
2009.09.24 17:48:19

떡진 머리님! 처음 뵙겠습니다. 저보다 더 가입을 먼저 하셨는데 제가 미처 뵙지 못했네요 ^^
님의 말씀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
누가 누구를 어떻게 무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뿐이지..
누가 누구에게 맞다 틀리다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틀릴 수도 있는데..
그냥 편하게 각자의 생각을 말하고 토론하고 또 각자 생각할 여유를 주는
다비아를 전 좋아합니다.
정용섭 목사님이 하나님이 아닌 이상
어떻게 성경말씀을 딱 부러지게 이거다 라고 하실 수 있겠습니까.
어쩔 수 없이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두루뭉실하게 넘어가고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있게 말하고
그럴 수 밖에 없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데, 전 그 두루뭉실이 좋고 그 자신감이 좋습니다.
굳이 어떤 부분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더라도 이상하게 하나님께 조금 더 가까이 가고 있는 느낌을 받거든요.
이건 순전히 저의 생각입니다.
결코 저별과달님께 반기를 든 것 아니오니 저별과달님님 ! 오해 안하실거죠? ^^
님의 말씀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
누가 누구를 어떻게 무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뿐이지..
누가 누구에게 맞다 틀리다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틀릴 수도 있는데..
그냥 편하게 각자의 생각을 말하고 토론하고 또 각자 생각할 여유를 주는
다비아를 전 좋아합니다.
정용섭 목사님이 하나님이 아닌 이상
어떻게 성경말씀을 딱 부러지게 이거다 라고 하실 수 있겠습니까.
어쩔 수 없이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두루뭉실하게 넘어가고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있게 말하고
그럴 수 밖에 없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데, 전 그 두루뭉실이 좋고 그 자신감이 좋습니다.
굳이 어떤 부분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더라도 이상하게 하나님께 조금 더 가까이 가고 있는 느낌을 받거든요.
이건 순전히 저의 생각입니다.
결코 저별과달님께 반기를 든 것 아니오니 저별과달님님 ! 오해 안하실거죠? ^^
2009.09.24 13:48:52

ㅎㅎ 떡진 머리님, 처음에는 닉네임도 본명으로 글을 올리셨고
글도 많은 부분이 첨가 되어져서 서로 대화가 좀 꼬여 지는것 같습니다.
처음 글에는 다비아 회원들에 대한 언급은 일체 없었습니다.
처음 글의 끝을 제가 적어 볼께요!
지금 수정하신 글은
다비아의 역동성 부족에 대한 느낌은 괴리와 아쉬움 으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로 되어있는데
처음 초본 글은 끝이
다비아는 역동성이 부족하다 는 괴리감이 생겨 납니다 로 글이 마무리 되었고
중간과, 뒷부분에 회원들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었기에
글이 다른 방향으로 선회했다고 저는생각 합니다.
왜 그렇게 글이 바꾸어 졌는지 해명 하셨는데요..
처음 글에 저의 댓글이 달리고 처음 올리신 꼭지글이 삭제 되었다
다시 올라 왔던데요.. 그럼 저의 처음 댓글도 사라져야 하는 걸로 저는 알고 있는데요..
다시 두번재 올리신 글에도 저의 댓글이 어떻게 따라 올수 있는지 모르겠군요..
하여튼 님의 글의 논지 입장이 전환 되었다 하더라도
제가 처음 올린 댓글은 정목사님께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하오니 별 큰 상관은없습니다!
글도 많은 부분이 첨가 되어져서 서로 대화가 좀 꼬여 지는것 같습니다.
처음 글에는 다비아 회원들에 대한 언급은 일체 없었습니다.
처음 글의 끝을 제가 적어 볼께요!
지금 수정하신 글은
다비아의 역동성 부족에 대한 느낌은 괴리와 아쉬움 으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로 되어있는데
처음 초본 글은 끝이
다비아는 역동성이 부족하다 는 괴리감이 생겨 납니다 로 글이 마무리 되었고
중간과, 뒷부분에 회원들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었기에
글이 다른 방향으로 선회했다고 저는생각 합니다.
왜 그렇게 글이 바꾸어 졌는지 해명 하셨는데요..
처음 글에 저의 댓글이 달리고 처음 올리신 꼭지글이 삭제 되었다
다시 올라 왔던데요.. 그럼 저의 처음 댓글도 사라져야 하는 걸로 저는 알고 있는데요..
다시 두번재 올리신 글에도 저의 댓글이 어떻게 따라 올수 있는지 모르겠군요..
하여튼 님의 글의 논지 입장이 전환 되었다 하더라도
제가 처음 올린 댓글은 정목사님께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하오니 별 큰 상관은없습니다!
2009.09.25 16:00:57

아, 누군가 했더니 내가 잘 알고 있는 류동인 씨군요.
반가웠습니다.
시간이 되면 대구샘터교회 예배에 한번 참석해보세요.
교회를 옮기는 뜻이 아니니 걱정 마시구요. ㅎㅎ
대구샘터교회의 예배 처소는 수성구 상동에 있는 <공간울림>이에요.
네비게이션에 뜰 겁니다.
류 목사님께 안부도 전해주세요.
주의 은총이.
반가웠습니다.
시간이 되면 대구샘터교회 예배에 한번 참석해보세요.
교회를 옮기는 뜻이 아니니 걱정 마시구요. ㅎㅎ
대구샘터교회의 예배 처소는 수성구 상동에 있는 <공간울림>이에요.
네비게이션에 뜰 겁니다.
류 목사님께 안부도 전해주세요.
주의 은총이.
2009.09.26 04:28:56
성경말씀의 정확, 무오성을 강조하는 근본주의 목사님들은 - 난 보수주의의 구분이 잘 안서고 실제 보수라고 생각했던 나의
40여년의 교육과 바탕이 근본주의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 세월이 갈수록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본질보다는 우리의 행위, 노력, 헌신의 마음을 더 강조하여 새로운 규범을 만들며 성공, 번영, 승리를 믿음의 결과로 결부시켜 전혀 성서적이지 않은
말씀을 선포, 선동하고, 성경이 시대적 상황과 문화적,정치적 이해로 인해 성경기자들의 의도가 개입되어 기록과 편집되었음을 이야기하는 진보적인 목사님은 오히려 성경 말씀(텍스트)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강조한다. 몇해동안 이곳에서 뜬눈으로 새벽을 맞은 날이 얼마나 많은 지 모른다.
이젠 제법 이곳에서 주워 들은, 귀 동냥으로 얻은 이해를 가지고 내 아내와 목사님들 그리고 친한 형제들과 나눈다.
물론 남들을 다 이해시키려 하거나 따라오라고 요구하진 않는다. 하지만 지금껏 해왔던 노력과 나눔으로는 내 안에서 반복 되어지는 질문을 해결 할 수 없었던 걸 안다. 그러기에 나와 같은 고민을 가지고 말씀을 대하는 누구라도 만나면 조금도 망설임 없이 다비아를 소개한다. 때론 따라가기 어렵고, 낯설다. 깊은 생각을 요구하기도 한다. 힘에 부치기도 하지만,
컴퓨터를 켜면 제일 먼저 이곳에 들어 온다. 월요일 아침, 주일 설교가 가장 궁금하다. 전에와 같이 치열한 논쟁이 없어도
아니 전에는 은근 싸움을 호기심으로 즐기곤 했다. 그 많은 댓글들을 읽다보니 날이 새고 이러한 생활이 여러날 반복 되다보니 주치의로부터 잠을 더 많이 자라는 처방을 받기도 했다. 날마다 새롭게 알게된다. 알고 있던 본문에서 새로운 이해가 은혜로 튀어 나온다. 그것은 놀라움이고, 그 놀라움이 기쁨이 된다. 눈이 조금씩 트이는 것 같다.
최근에 한국에 있을 때 다니던 교회에 새로이 젊은 목사님이 부임하셨는데 그분의 설교와 글을 통해 정용섭목사님의 글과
이곳에서 누리는 말씀 사유의 많은 부분이 비슷하여 서로 다른 지역과 공간에서 다른 모습으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지만 닮아가는 것 아닌 가 하여 한편 놀랍고 기뻤다. 내게 이곳은, 정용섭목사님의 가르침은 생수를 얻는 샘과 같다.
40여년의 교육과 바탕이 근본주의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 세월이 갈수록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본질보다는 우리의 행위, 노력, 헌신의 마음을 더 강조하여 새로운 규범을 만들며 성공, 번영, 승리를 믿음의 결과로 결부시켜 전혀 성서적이지 않은
말씀을 선포, 선동하고, 성경이 시대적 상황과 문화적,정치적 이해로 인해 성경기자들의 의도가 개입되어 기록과 편집되었음을 이야기하는 진보적인 목사님은 오히려 성경 말씀(텍스트)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강조한다. 몇해동안 이곳에서 뜬눈으로 새벽을 맞은 날이 얼마나 많은 지 모른다.
이젠 제법 이곳에서 주워 들은, 귀 동냥으로 얻은 이해를 가지고 내 아내와 목사님들 그리고 친한 형제들과 나눈다.
물론 남들을 다 이해시키려 하거나 따라오라고 요구하진 않는다. 하지만 지금껏 해왔던 노력과 나눔으로는 내 안에서 반복 되어지는 질문을 해결 할 수 없었던 걸 안다. 그러기에 나와 같은 고민을 가지고 말씀을 대하는 누구라도 만나면 조금도 망설임 없이 다비아를 소개한다. 때론 따라가기 어렵고, 낯설다. 깊은 생각을 요구하기도 한다. 힘에 부치기도 하지만,
컴퓨터를 켜면 제일 먼저 이곳에 들어 온다. 월요일 아침, 주일 설교가 가장 궁금하다. 전에와 같이 치열한 논쟁이 없어도
아니 전에는 은근 싸움을 호기심으로 즐기곤 했다. 그 많은 댓글들을 읽다보니 날이 새고 이러한 생활이 여러날 반복 되다보니 주치의로부터 잠을 더 많이 자라는 처방을 받기도 했다. 날마다 새롭게 알게된다. 알고 있던 본문에서 새로운 이해가 은혜로 튀어 나온다. 그것은 놀라움이고, 그 놀라움이 기쁨이 된다. 눈이 조금씩 트이는 것 같다.
최근에 한국에 있을 때 다니던 교회에 새로이 젊은 목사님이 부임하셨는데 그분의 설교와 글을 통해 정용섭목사님의 글과
이곳에서 누리는 말씀 사유의 많은 부분이 비슷하여 서로 다른 지역과 공간에서 다른 모습으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지만 닮아가는 것 아닌 가 하여 한편 놀랍고 기뻤다. 내게 이곳은, 정용섭목사님의 가르침은 생수를 얻는 샘과 같다.
2009.09.28 12:19:13
동인형
살다보니 이런 공간에서 만나는 군요
가끔씩 형 생각을 해봅니다. 그렇게 치열하게 시대를 살았던 그가 현재 무얼 하고 있을까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지금 그의 생각은 어떤 스탠스를 취하고 있을까
떡진머리의 필명도 독특했지만 예의 그날카로움은 아직도 그시대를 살고 있는 열혈청년 같소이다.
언젠가 대구서구을 선거에서의 치열했던 단편들
장사 앞바다서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나눴던 추억이 사무치듯 그립기도
합니다.
그바다는 그모습으로 그대로 있겠지요.
귀밑머리에 히끗히끗 삐져나오는 세월은 우리도 모르게 저만치 달려가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선 건강 하신지...
또 뵐수 있으면 좋겠네요.
이땅이 이어진 어느 곳에서 같이 호흡할수 있음에 감사하고..
반도 남쪽은 여전히 패역과 역사의 뒷걸음에 가슴아파할수 밖에 없음이 그때나 지금이나 ...
엔케이는 여전히 이해할수 없고..
살다보니 이런 공간에서 만나는 군요
가끔씩 형 생각을 해봅니다. 그렇게 치열하게 시대를 살았던 그가 현재 무얼 하고 있을까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지금 그의 생각은 어떤 스탠스를 취하고 있을까
떡진머리의 필명도 독특했지만 예의 그날카로움은 아직도 그시대를 살고 있는 열혈청년 같소이다.
언젠가 대구서구을 선거에서의 치열했던 단편들
장사 앞바다서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나눴던 추억이 사무치듯 그립기도
합니다.
그바다는 그모습으로 그대로 있겠지요.
귀밑머리에 히끗히끗 삐져나오는 세월은 우리도 모르게 저만치 달려가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선 건강 하신지...
또 뵐수 있으면 좋겠네요.
이땅이 이어진 어느 곳에서 같이 호흡할수 있음에 감사하고..
반도 남쪽은 여전히 패역과 역사의 뒷걸음에 가슴아파할수 밖에 없음이 그때나 지금이나 ...
엔케이는 여전히 이해할수 없고..
2009.10.04 20:39:05

사랑하는 남석씨 정말로 반갑습니다.
참으로 청년시절 열혈의 벗을 이 공간에서 만나다니 정목사님의 노고가 더욱 돋보입니다.
얼마전 준호를 만났습니다.
저는 경북 성주의 농장에서 돼지를 키우고 있습니다.
돼지는 약 12,000마리 정도 되고 종업원은 나를 포함하여 15명 정도 됩니다.
젊은 시절 가졌던 꿈을 농장이라는 좁은 공간에서나마 실현해 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주5일 근무, 종업원지주제 등 몇가지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만 워낙 부침이 있는 사업이다 보니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래도 직원들은 직장에 대한 만족도는 매우 높은 것 같습니다.
들어오면 나가지 않아 10년 이상된 직원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나름으로 이런 생활에 만족하고 살고있습니다.
세상의 변화를 향한 꿈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지만 어디서 풀어가야 될것인지는 여전히 찾지 못하고 헤메고 있는 상태입니다.
지금 처해있는 상태에서 성실히 살아가면서 꿈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위로가 되고있습니다
아버님은 여전히 건강하십니다.
하루에 운동량도 매우 많으시고 요번 추석에는 직접 차를 몰고 안강 기계에 있는 큰집에 다녀오시기 까지 하셨습니다.
.나의 회원정보에 연락처 있습니다.
연락 바랍니다. 건강하세요.
참으로 청년시절 열혈의 벗을 이 공간에서 만나다니 정목사님의 노고가 더욱 돋보입니다.
얼마전 준호를 만났습니다.
저는 경북 성주의 농장에서 돼지를 키우고 있습니다.
돼지는 약 12,000마리 정도 되고 종업원은 나를 포함하여 15명 정도 됩니다.
젊은 시절 가졌던 꿈을 농장이라는 좁은 공간에서나마 실현해 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주5일 근무, 종업원지주제 등 몇가지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만 워낙 부침이 있는 사업이다 보니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래도 직원들은 직장에 대한 만족도는 매우 높은 것 같습니다.
들어오면 나가지 않아 10년 이상된 직원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나름으로 이런 생활에 만족하고 살고있습니다.
세상의 변화를 향한 꿈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지만 어디서 풀어가야 될것인지는 여전히 찾지 못하고 헤메고 있는 상태입니다.
지금 처해있는 상태에서 성실히 살아가면서 꿈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위로가 되고있습니다
아버님은 여전히 건강하십니다.
하루에 운동량도 매우 많으시고 요번 추석에는 직접 차를 몰고 안강 기계에 있는 큰집에 다녀오시기 까지 하셨습니다.
.나의 회원정보에 연락처 있습니다.
연락 바랍니다. 건강하세요.
2009.11.09 10:00:11
우선, 인사말 생략하고 간단히 내용만 적습니다.
보수/진보를 구분하는 게 어떠한 소용이 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원초적으로 보수, 진보가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그거 소위 정치판 주변에서 먹고 사는 사람들(그 사람들이 비교적 선량한 모습이건 그 반대건간에)이 직업의식에서 시시때때 편리한 대로 적당히 사용하는 용어 아닌지요.) 그보다는 어떤 것이든 그에 관한 정체성을 판별하는 게 중요한 문제이겠습니다. 보수/진보는 너무 세속적인 양분법인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보수일까요 진보일까요? 그걸 논한다는데에 무슨 합목적성이 부여될까요?
보수/진보를 구분하는 게 어떠한 소용이 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원초적으로 보수, 진보가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그거 소위 정치판 주변에서 먹고 사는 사람들(그 사람들이 비교적 선량한 모습이건 그 반대건간에)이 직업의식에서 시시때때 편리한 대로 적당히 사용하는 용어 아닌지요.) 그보다는 어떤 것이든 그에 관한 정체성을 판별하는 게 중요한 문제이겠습니다. 보수/진보는 너무 세속적인 양분법인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보수일까요 진보일까요? 그걸 논한다는데에 무슨 합목적성이 부여될까요?
2009.11.20 18:46:37
아직도 진보 보수..ㅋㅋ 저는 꼴통보수수구우익입니다.
신학에 있어서 정치에 있어서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바라봄에 있어서 좌, 우, 진보, 보수 구분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때 그때 다르죠.. 사안에 따라 다르고..복합적이고 포스트모더니즘적이죠..ㅋ
미국에서는 진보니 보수니 뒤에서는 다 한편이고 앞에서는 쇼를 하지요.. 어쨌든 세상사람들이 볼땐 우리는 다같이 욕먹는 기독교인들이고... 예수님과 그리스도님이 싸울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요즘 음모론에 심취해서 이런 저런 다큐를 보고 있는데... 내부의 적이 무섭다고 생각합니다. 적은 외부에 있지 않고 항상 치명적인 적은 내부에 있고 주로 지도자급들이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랬고 종교지도자들, 정치지도자들...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하는 지도자들인데 저들이 마귀짓 하고 있고...
아무튼 진보든 보수든...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안거스르고 마귀짓 안하려면... 진리안에서 서로 잘 연합해서 우리같이 무식한 백성들을 잘 지도해야 겠죠...이상~
신학에 있어서 정치에 있어서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바라봄에 있어서 좌, 우, 진보, 보수 구분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때 그때 다르죠.. 사안에 따라 다르고..복합적이고 포스트모더니즘적이죠..ㅋ
미국에서는 진보니 보수니 뒤에서는 다 한편이고 앞에서는 쇼를 하지요.. 어쨌든 세상사람들이 볼땐 우리는 다같이 욕먹는 기독교인들이고... 예수님과 그리스도님이 싸울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요즘 음모론에 심취해서 이런 저런 다큐를 보고 있는데... 내부의 적이 무섭다고 생각합니다. 적은 외부에 있지 않고 항상 치명적인 적은 내부에 있고 주로 지도자급들이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랬고 종교지도자들, 정치지도자들...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하는 지도자들인데 저들이 마귀짓 하고 있고...
아무튼 진보든 보수든...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안거스르고 마귀짓 안하려면... 진리안에서 서로 잘 연합해서 우리같이 무식한 백성들을 잘 지도해야 겠죠...이상~
2009.11.20 23:37:42

그들은 권력을 잡는 순간 부터 마귀짓을 한다기 보다는 실제 마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님이 이야기 하는 진리라는 것도 잘 생각해 보면 그들이 자신들의 세상을 유지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러할 것입니다.
그들이 이야기 하는 진리는 '이데아'고, '주체'이며, '이성'이고, '무의식'입니다.
실재하지 않는 초월이고, 존재하지 않는 '나'이며, 극악한 야만이고,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나 삼각의 감옥입니다.
그것은 중세의 '마녀사냥'으로 프랑스에선 '대감금 사건'으로 박정희의 '유신헌법'으로 이명박의 '4대강 살리기'로 나타납니다.
진리란 회유고 억압이며 강제입니다.
진리란 고정되어 강요되는 것이고 그것은 무위의 흐름을 만들지 못합니다.
무위의 흐름은 진실에 내재합니다.
진실이 드러나는 찰라만 의미를 가집니다. 찰라의 진실이 무수한 연결을 생성하고 이것은 흐름이 되어 끝을 알 수 없는 우주로 흐름니다.
음모의 진실은 음모론이 구성하고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음모를 진리로 만들고자 하는 구성에 있습니다.
그러한 구성이 음모론의 바닥을 흐르고 있는 진리로의 포섭이고 권력으로의 접속입니다.
그리고 님이 이야기 하는 진리라는 것도 잘 생각해 보면 그들이 자신들의 세상을 유지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러할 것입니다.
그들이 이야기 하는 진리는 '이데아'고, '주체'이며, '이성'이고, '무의식'입니다.
실재하지 않는 초월이고, 존재하지 않는 '나'이며, 극악한 야만이고,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나 삼각의 감옥입니다.
그것은 중세의 '마녀사냥'으로 프랑스에선 '대감금 사건'으로 박정희의 '유신헌법'으로 이명박의 '4대강 살리기'로 나타납니다.
진리란 회유고 억압이며 강제입니다.
진리란 고정되어 강요되는 것이고 그것은 무위의 흐름을 만들지 못합니다.
무위의 흐름은 진실에 내재합니다.
진실이 드러나는 찰라만 의미를 가집니다. 찰라의 진실이 무수한 연결을 생성하고 이것은 흐름이 되어 끝을 알 수 없는 우주로 흐름니다.
음모의 진실은 음모론이 구성하고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음모를 진리로 만들고자 하는 구성에 있습니다.
그러한 구성이 음모론의 바닥을 흐르고 있는 진리로의 포섭이고 권력으로의 접속입니다.
2009.11.21 01:51:45
글과 댓글 잘 보았습니다.
예전에 떡진머리님의 사유가 궁금해서, 혼자 넘겨짚고 들뢰즈와 푸코 얘기로 잠깐 댓글을 남겨봤는데,
제가 고민하는 부분들이나 관심있어하는 부분들을 좀더 깊이 있게 파고 들어가셔 있었던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궁금한 것이 있어 간단히 배움을 얻고자 합니다.
갠적으로는 진보-보수-중도 단어자체가 주는 색깔론적 느낌을 지울수가 없어서,
좀 다른 표현은 없는가 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ㅎㅎ
( 그냥 진보적 성향인 제가 가끔 빨갱이로 몰리는 이유는 진보-보수의 구분 때문이 아닌가 라는 느낌 때문에.. ㅎ)
다비아를 자주오는 것은 아니지만, 다비아는 그저 '다비아'다운 것이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거기에 진보-보수의 구획을 나누는 것에 의미를 부여할라면 못할 것은 없지만,
다비아는 다비아의 모습으로 깊게 발전하게 된다면, '진보-보수-중도 그리고 다비아' 라는 특정성향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마치, 락에서 하드락, 팝락, 데쓰, 스래쉬 등이 있지만, 메탈리카 같이 훌룡한 그룹은 따로 떼어내어 메탈리카풍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ㅎㅎ 이게 탈영토화, 탈주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예전에 종교가 사회참여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말은 여전히 회의적입니다.
( 이런의미셨죠? 사회참여에 대한 정확한 정의나 범위 설정도 문제겠지만,일단 단어자체가 주는 통상적 개념을 받아들여봅니다. ) 만일 유토피아가 실제로 도래하고,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해방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남는 것은 인간의 고뇌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것이 다시 실존의 문제로 귀결되던지, 혹은 어떤 다른 형이상학적인 문제로 흘러가등지간에 ... 아무튼, 고뇌하는 인간이 남는다고 봅니다.
그런의미에서, 마지막 리플은 갠적으로 굉장히 선불교적인 사상과도 깊게 연관되어있다고 느낍니다. 현대를 대표하는 프랑스사상들이나 포스트 모던에서도 함께 느끼는 부분이기도 하지만요. 그래서, 저는 되려 요즘 틈나는대로 금강경같은 선불교적인 글들을 찾아서봅니다. 그중에서 요즘에 관심있는 부분은 '조견'인데요. '나'와 '현실'을 잘 관찰해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신발 닦다가 득도하신 분들도 있는 것 처럼, 우선 나를 관찰하는 일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글을 쓰거나, 타인과 소통하는 과정을 편견 없이 특정 성향에 사로잡힙 없이 그냥 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정목사님의 말씀처럼 기독교 전통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미리 선취할 수 있다는 믿음도 있습니다.
에고 ~ 글이 약간 엉뚱하게 흐른 듯 한데, 아무튼, 사회적 참여에 대해서도 조금더 설명해주시겠어요. ^^
그리고, 그 당시 뇌과학과 관련돼서 살짜쿵 풀어본 푸코의 거대 담론에 대해서는
양자역학(저는 하나두 모릅니다. ㅠ) 을 말씀으로 풀어 주셨는데요,
양자역학의 20세기 업적이 뉴턴에서 아인슈타인으로 전회하듯이
21세기 혹은 22세기에서 뒤집힐 수 있는 것 아닌가요? 누군가 뇌과학 지식을 가지고 우려하시는
권력의 강화를 도모한다면 과연 과학을 거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 태도는 위험한 것 아닌가요?
바로 위 리플에서 진리는 '이성' 이다라고 비판적으로 말씀하신 것과는 상반된 태도 같으신데 ...
아 - 이거 사실 '떡진머리'님 보고 인사만 남기려다가 길어졌습니다. ㅠ
좀 두서가 없습니다. 좋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꾸벅 ~ (__)
예전에 떡진머리님의 사유가 궁금해서, 혼자 넘겨짚고 들뢰즈와 푸코 얘기로 잠깐 댓글을 남겨봤는데,
제가 고민하는 부분들이나 관심있어하는 부분들을 좀더 깊이 있게 파고 들어가셔 있었던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궁금한 것이 있어 간단히 배움을 얻고자 합니다.
갠적으로는 진보-보수-중도 단어자체가 주는 색깔론적 느낌을 지울수가 없어서,
좀 다른 표현은 없는가 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ㅎㅎ
( 그냥 진보적 성향인 제가 가끔 빨갱이로 몰리는 이유는 진보-보수의 구분 때문이 아닌가 라는 느낌 때문에.. ㅎ)
다비아를 자주오는 것은 아니지만, 다비아는 그저 '다비아'다운 것이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거기에 진보-보수의 구획을 나누는 것에 의미를 부여할라면 못할 것은 없지만,
다비아는 다비아의 모습으로 깊게 발전하게 된다면, '진보-보수-중도 그리고 다비아' 라는 특정성향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마치, 락에서 하드락, 팝락, 데쓰, 스래쉬 등이 있지만, 메탈리카 같이 훌룡한 그룹은 따로 떼어내어 메탈리카풍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ㅎㅎ 이게 탈영토화, 탈주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예전에 종교가 사회참여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말은 여전히 회의적입니다.
( 이런의미셨죠? 사회참여에 대한 정확한 정의나 범위 설정도 문제겠지만,일단 단어자체가 주는 통상적 개념을 받아들여봅니다. ) 만일 유토피아가 실제로 도래하고,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해방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남는 것은 인간의 고뇌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것이 다시 실존의 문제로 귀결되던지, 혹은 어떤 다른 형이상학적인 문제로 흘러가등지간에 ... 아무튼, 고뇌하는 인간이 남는다고 봅니다.
그런의미에서, 마지막 리플은 갠적으로 굉장히 선불교적인 사상과도 깊게 연관되어있다고 느낍니다. 현대를 대표하는 프랑스사상들이나 포스트 모던에서도 함께 느끼는 부분이기도 하지만요. 그래서, 저는 되려 요즘 틈나는대로 금강경같은 선불교적인 글들을 찾아서봅니다. 그중에서 요즘에 관심있는 부분은 '조견'인데요. '나'와 '현실'을 잘 관찰해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신발 닦다가 득도하신 분들도 있는 것 처럼, 우선 나를 관찰하는 일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글을 쓰거나, 타인과 소통하는 과정을 편견 없이 특정 성향에 사로잡힙 없이 그냥 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정목사님의 말씀처럼 기독교 전통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미리 선취할 수 있다는 믿음도 있습니다.
에고 ~ 글이 약간 엉뚱하게 흐른 듯 한데, 아무튼, 사회적 참여에 대해서도 조금더 설명해주시겠어요. ^^
그리고, 그 당시 뇌과학과 관련돼서 살짜쿵 풀어본 푸코의 거대 담론에 대해서는
양자역학(저는 하나두 모릅니다. ㅠ) 을 말씀으로 풀어 주셨는데요,
양자역학의 20세기 업적이 뉴턴에서 아인슈타인으로 전회하듯이
21세기 혹은 22세기에서 뒤집힐 수 있는 것 아닌가요? 누군가 뇌과학 지식을 가지고 우려하시는
권력의 강화를 도모한다면 과연 과학을 거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 태도는 위험한 것 아닌가요?
바로 위 리플에서 진리는 '이성' 이다라고 비판적으로 말씀하신 것과는 상반된 태도 같으신데 ...
아 - 이거 사실 '떡진머리'님 보고 인사만 남기려다가 길어졌습니다. ㅠ
좀 두서가 없습니다. 좋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꾸벅 ~ (__)
2009.11.23 00:32:28

그렇지요?
진보.보수.중도니 하는 것들이 사실은 동일화 속에서 이루어지는 편집증적 과정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권력화의 과정과 진보를 찰라의 무한한 연속인 흐름으로 보지 않고 원인에 대한 결과로 의미짓고자 하는 동일화의 욕망이 전체주의와 관료주의를 생성시켰을 것입니다.
진보를 흐름으로 파악하는 것, 즉 진보의 내재적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타자-되기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현재가 현재화 되는 것을 찰라로 파악하는 것과 등치되지는 않지만 찰라의 무수한 연속으로서의 집합체는 이 흐름을 형성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찰라에 머물르고 그것에 포섭된 진보는 보수에 반하는 새로운 동일자의 생성과정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통속적 진보주의에 반하여 새로운 진보주의를 내세운 다는 것이 다소 옹색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통속적 진보가 그러한 접속을 이루어낸 찰라의 순간에서 조차 통속적이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진보주의자임을 폐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찰라에서는 '타자'였지만 찰라의 순간을 지나면서 권력의 편집증적 과정속에서 '동일자'로 전환한 것이기에, 찰라와 흐름을 내재화 시키면서 분자적 운동을 지속시킨다면 n-1의 진보적 흐름을 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락에 대한 상식은 락의 정신이 무엇인가 정도를 알고 있을 뿐입니다만 고전음악인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같은 음악을 보면 박자는 그대로 둔채 리듬적 요소인 박의 변화로 박자를 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현대음악에서 박자를 해체하게되는 계기가 됩니다.
고전음악의 예를 들었다고 제가 클래식에는 유식하다는 오해는 절대 하시지 말기를 바랍니다. 오다가다, 책읽다 주어담은 것들 입니다.ㅎㅎ
님의 말씀대로 이러한 것들이 '탈영토화' '탈주선' 이란 것이겠지요.
지금은 통속적 진보에서의 탈영토화가 요구되는 지점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사회참여'라는 단어는 7~80년대 참으로 많이 회자되었던 문구입니다.
사회에 대하여 담을 쌓고 있는 기독교 덕분에 지금도 여전히 의미를 잃어버리지 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찰라의 순간에 놓여 있는 접속점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사회참여'라는 의미는 성립될 수 없는 개념입니다.
그것은 이미 종교가 사회에 참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참여되어 있다기 보다는 사회적 부분이라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종교는 다양하게 사회와 접속을 이루고 배치되어 있습니다.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종교의 교단이나 개개의 교회들 또는 교인들, 즉 교회의 공간적 또는 공간내 신체는 사회의 다양한 부분과 접속된 관계에 있다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것은 시공간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권력에서 이미 다양하게 접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접속을 은폐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은폐는 종교권력의 편집증적 과정을 감추고 종교를 사회적 관계와 동떨어진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영역으로 오해하게 하려는 종교권력과 접속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오해는 종교의 탈영토화로서의 사회참여, 즉 교회가 인권의 문제나 환경의 문제 아니면 노동자들의 운동과 접속을 이루어내는 등 그 배치의 변환에 대한 시도를 불온한 것으로의 몰아가려는 욕망과 이중분절을 이룹니다.
종교가 사회참여로 환원될 필요는 없지만 이것이 공간적 또는공간내 신체가 외적인 사회와 접속되어 있음을 부정할 수 있는 근거는 아닐 것입니다.
또한 실존적 문제 역시 '신 앞에 서있는 순수한 나'라는 존재는 없다는 의미에서, 즉 이미 '나'라는 존재는 어떠한 형태로든지 사회와 깊게 접속되어 있는 '나'라는 의미에서 실존적 고뇌조차 사실은 사회의 접속과 함께 행해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사회참여는 기독교의 공간적 신체와 사회적 요소와의 배치의 변환에서 의미를 획득할 것 같습니다.
사실 저도 사회참여라는 개념에 대해서 관성적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퀄리아님의 지적을 통해서 좀더 깊게 생각해볼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상호간의 토론속에서 학습되어지는 것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열린토론방 만세!!"ㅎㅎㅎ
그리고 다비아는 한국기독교의 수목(樹木)적 체계의 가지를 가로지르는 몇 개의 선을 그어줌으로 하나의 중심으로 결집되는 양상을 전혀 다른 것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탈주선 일 것 같습니다.
이러한 실천적 과정에서도 '존재론'적 질문은 계속될 수 밖에 없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마치 핵무기를 만들고 우주선을 타고 우주로 나가지만 양자의 세계와 우주의 탄생을 탐구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우주의 탄생의 비밀은 존재론과 접속되어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종교적 사회활동'을 지속하고 있지만 그것은 형이상학적 고민을 포기하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이와함께 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님의 말씀대로 유토피아에 도달하지 않은 이상 실천적 문제를 포기할 필요도 없으며 존재론적 고뇌도 상실할 이유는 없습니다. 아마 그것은 유토피아에 도달한 다음에 할 고민일 것입니다.
또한 자본으로 부터의 해방이 영원한 해방은 아닐 것입니다. 새로운 탈주선이 우리를 기다릴 것입니다. 희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ㅎㅎㅎ
기독교사이트에서 금강경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좀 그렇습니다만 종교가 아닌 사유의 형식으로 이해했으면 합니다.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는 금강경에 나오는 글의 의미는 "모든 상(相)있는 것에서 상 없는 것을 본다면 여래를 볼 수 있다"는 의미는 모든 형식화된 것에서 어떤 형식도 가지지 않는 내재된 흐름을 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한 도덕경에 나오는 '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해석해 보면 "학문을 하면 날마다 얻게되고 도를 하면 날마다 잃게된다. 잃고 또 잃어 더 이상 하지 않을 때 무위에 의하여 안되는 것이 없다"는 역설적 의미도 위의 금강경에 나오는 의미와 일치되는 접점을 지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무위자연'이란 말을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물(物)을 그 자체로 관조하는 것, 물의 내재된 흐름을 읽어내는 것이란 의미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조견'이란 것이 "나'와 '물'(님의 표현으로는 '현실')의 관계에서 설정되지만 나를 우선적으로 관찰해야 한다는 의미인지는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유럽사상의 고질병 중 하나가 나로 부터 즉, 주체나 초월자로 부터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근원으로 환원되는 질병입니다.
만약 '조견'을 나로부터 시작하여 나를 버릴 방법이 있으면 모르되 그렇지 않다면 '무아'의 의미를 간과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민을 하는데 꼭 동양적 사상만이 유의미한 것은 아닌듯 합니다.
동양사상에서도 주자학처럼 초월적 사유를 담고있는 것이 있고 스피노자 처럼 서양에서도 내재성을 통해 사유하는 사상이 있음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내재성과 초월성은 동양과 서양의 지리적.문화적 특성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 복잡하고 어리럼증을 일으키지만 유럽의 현대철학에도 좀더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사유의 탈영토화를 위한 접속일 수 있을 것입니다. 들뢰즈의 '천의 고원'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다 보면 얻는게 꽤 많은 것 같습니다.
저 역시도 이리저리 열심히 굴리고 있는 중입니다.
도덕경의 말과는 달리 채우고 채우다 보면 더 이상 채우기 힘든 지점에서 채우기 위하여 비우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또 열심히 꾸역꾸역 채우다 보면 그릇이 늘어나 커질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ㅎㅎㅎ
저 역시도 님에게 한수 배우고 가르쳐주기 보다는 서로간에 탈주선을 그리는 과정으로 토론을 전개해나가면 좋겠습니다.
누가 누구의 스승이 아니라 토론자체가 좋은 스승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에도 좋은 댓글 부탁드리고 종종 대화를 나누기를 바랍니다.
참, 그리고 과학과 이성은 등치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이성은 과학을 지나쳐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세의 이성은 천동설이고 과학은 지동설이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다루었던 프랑스의 '대감금사건'도 이성에 대한 분석으로 의미있겠습니다.
진보.보수.중도니 하는 것들이 사실은 동일화 속에서 이루어지는 편집증적 과정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권력화의 과정과 진보를 찰라의 무한한 연속인 흐름으로 보지 않고 원인에 대한 결과로 의미짓고자 하는 동일화의 욕망이 전체주의와 관료주의를 생성시켰을 것입니다.
진보를 흐름으로 파악하는 것, 즉 진보의 내재적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타자-되기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현재가 현재화 되는 것을 찰라로 파악하는 것과 등치되지는 않지만 찰라의 무수한 연속으로서의 집합체는 이 흐름을 형성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찰라에 머물르고 그것에 포섭된 진보는 보수에 반하는 새로운 동일자의 생성과정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통속적 진보주의에 반하여 새로운 진보주의를 내세운 다는 것이 다소 옹색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통속적 진보가 그러한 접속을 이루어낸 찰라의 순간에서 조차 통속적이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진보주의자임을 폐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찰라에서는 '타자'였지만 찰라의 순간을 지나면서 권력의 편집증적 과정속에서 '동일자'로 전환한 것이기에, 찰라와 흐름을 내재화 시키면서 분자적 운동을 지속시킨다면 n-1의 진보적 흐름을 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락에 대한 상식은 락의 정신이 무엇인가 정도를 알고 있을 뿐입니다만 고전음악인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같은 음악을 보면 박자는 그대로 둔채 리듬적 요소인 박의 변화로 박자를 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현대음악에서 박자를 해체하게되는 계기가 됩니다.
고전음악의 예를 들었다고 제가 클래식에는 유식하다는 오해는 절대 하시지 말기를 바랍니다. 오다가다, 책읽다 주어담은 것들 입니다.ㅎㅎ
님의 말씀대로 이러한 것들이 '탈영토화' '탈주선' 이란 것이겠지요.
지금은 통속적 진보에서의 탈영토화가 요구되는 지점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사회참여'라는 단어는 7~80년대 참으로 많이 회자되었던 문구입니다.
사회에 대하여 담을 쌓고 있는 기독교 덕분에 지금도 여전히 의미를 잃어버리지 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찰라의 순간에 놓여 있는 접속점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사회참여'라는 의미는 성립될 수 없는 개념입니다.
그것은 이미 종교가 사회에 참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참여되어 있다기 보다는 사회적 부분이라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종교는 다양하게 사회와 접속을 이루고 배치되어 있습니다.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종교의 교단이나 개개의 교회들 또는 교인들, 즉 교회의 공간적 또는 공간내 신체는 사회의 다양한 부분과 접속된 관계에 있다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것은 시공간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권력에서 이미 다양하게 접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접속을 은폐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은폐는 종교권력의 편집증적 과정을 감추고 종교를 사회적 관계와 동떨어진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영역으로 오해하게 하려는 종교권력과 접속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오해는 종교의 탈영토화로서의 사회참여, 즉 교회가 인권의 문제나 환경의 문제 아니면 노동자들의 운동과 접속을 이루어내는 등 그 배치의 변환에 대한 시도를 불온한 것으로의 몰아가려는 욕망과 이중분절을 이룹니다.
종교가 사회참여로 환원될 필요는 없지만 이것이 공간적 또는공간내 신체가 외적인 사회와 접속되어 있음을 부정할 수 있는 근거는 아닐 것입니다.
또한 실존적 문제 역시 '신 앞에 서있는 순수한 나'라는 존재는 없다는 의미에서, 즉 이미 '나'라는 존재는 어떠한 형태로든지 사회와 깊게 접속되어 있는 '나'라는 의미에서 실존적 고뇌조차 사실은 사회의 접속과 함께 행해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사회참여는 기독교의 공간적 신체와 사회적 요소와의 배치의 변환에서 의미를 획득할 것 같습니다.
사실 저도 사회참여라는 개념에 대해서 관성적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퀄리아님의 지적을 통해서 좀더 깊게 생각해볼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상호간의 토론속에서 학습되어지는 것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열린토론방 만세!!"ㅎㅎㅎ
그리고 다비아는 한국기독교의 수목(樹木)적 체계의 가지를 가로지르는 몇 개의 선을 그어줌으로 하나의 중심으로 결집되는 양상을 전혀 다른 것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탈주선 일 것 같습니다.
이러한 실천적 과정에서도 '존재론'적 질문은 계속될 수 밖에 없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마치 핵무기를 만들고 우주선을 타고 우주로 나가지만 양자의 세계와 우주의 탄생을 탐구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우주의 탄생의 비밀은 존재론과 접속되어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종교적 사회활동'을 지속하고 있지만 그것은 형이상학적 고민을 포기하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이와함께 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님의 말씀대로 유토피아에 도달하지 않은 이상 실천적 문제를 포기할 필요도 없으며 존재론적 고뇌도 상실할 이유는 없습니다. 아마 그것은 유토피아에 도달한 다음에 할 고민일 것입니다.
또한 자본으로 부터의 해방이 영원한 해방은 아닐 것입니다. 새로운 탈주선이 우리를 기다릴 것입니다. 희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ㅎㅎㅎ
기독교사이트에서 금강경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좀 그렇습니다만 종교가 아닌 사유의 형식으로 이해했으면 합니다.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는 금강경에 나오는 글의 의미는 "모든 상(相)있는 것에서 상 없는 것을 본다면 여래를 볼 수 있다"는 의미는 모든 형식화된 것에서 어떤 형식도 가지지 않는 내재된 흐름을 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한 도덕경에 나오는 '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해석해 보면 "학문을 하면 날마다 얻게되고 도를 하면 날마다 잃게된다. 잃고 또 잃어 더 이상 하지 않을 때 무위에 의하여 안되는 것이 없다"는 역설적 의미도 위의 금강경에 나오는 의미와 일치되는 접점을 지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무위자연'이란 말을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물(物)을 그 자체로 관조하는 것, 물의 내재된 흐름을 읽어내는 것이란 의미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조견'이란 것이 "나'와 '물'(님의 표현으로는 '현실')의 관계에서 설정되지만 나를 우선적으로 관찰해야 한다는 의미인지는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유럽사상의 고질병 중 하나가 나로 부터 즉, 주체나 초월자로 부터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근원으로 환원되는 질병입니다.
만약 '조견'을 나로부터 시작하여 나를 버릴 방법이 있으면 모르되 그렇지 않다면 '무아'의 의미를 간과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민을 하는데 꼭 동양적 사상만이 유의미한 것은 아닌듯 합니다.
동양사상에서도 주자학처럼 초월적 사유를 담고있는 것이 있고 스피노자 처럼 서양에서도 내재성을 통해 사유하는 사상이 있음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내재성과 초월성은 동양과 서양의 지리적.문화적 특성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 복잡하고 어리럼증을 일으키지만 유럽의 현대철학에도 좀더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사유의 탈영토화를 위한 접속일 수 있을 것입니다. 들뢰즈의 '천의 고원'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다 보면 얻는게 꽤 많은 것 같습니다.
저 역시도 이리저리 열심히 굴리고 있는 중입니다.
도덕경의 말과는 달리 채우고 채우다 보면 더 이상 채우기 힘든 지점에서 채우기 위하여 비우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또 열심히 꾸역꾸역 채우다 보면 그릇이 늘어나 커질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ㅎㅎㅎ
저 역시도 님에게 한수 배우고 가르쳐주기 보다는 서로간에 탈주선을 그리는 과정으로 토론을 전개해나가면 좋겠습니다.
누가 누구의 스승이 아니라 토론자체가 좋은 스승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에도 좋은 댓글 부탁드리고 종종 대화를 나누기를 바랍니다.
참, 그리고 과학과 이성은 등치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이성은 과학을 지나쳐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세의 이성은 천동설이고 과학은 지동설이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다루었던 프랑스의 '대감금사건'도 이성에 대한 분석으로 의미있겠습니다.
2009.11.23 13:29:38
와~ 제 어쭙잖은 리플에 이렇게 성실하신 답리플을 달아주시니 감격입니다. ^^*
너무 많은 부분들을 말씀해주셔서, 짧은 리플로는 어떻게 손대 볼 엄두가 안납니다.
다른 좋은글 또 올려주시면, 좁혀진 범위내에서 대화(?)를 나눴으면 합니다.
대화 ...
철학은 진정한 의미의 대화의 산물이라고 누군가 말했던 거 같은데 ...
사실 저는 대화에서 역량 부족을 많이 느낍니다. ㅎㅎㅎ
친구가 될수 없는 스승은 진정한 스승이 아니고, 스승이 될 수 없는 친구는 진정한 친구가 아니라고 하던데 ...
저는 이 말이 감은 오는데 피부로 와닿지가 않아서 ... ㅠ
무튼, 리플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좋은글 많이 기대하겠습니다. 즐거운 한주 되세욤 ^^*
너무 많은 부분들을 말씀해주셔서, 짧은 리플로는 어떻게 손대 볼 엄두가 안납니다.
다른 좋은글 또 올려주시면, 좁혀진 범위내에서 대화(?)를 나눴으면 합니다.
대화 ...
철학은 진정한 의미의 대화의 산물이라고 누군가 말했던 거 같은데 ...
사실 저는 대화에서 역량 부족을 많이 느낍니다. ㅎㅎㅎ
친구가 될수 없는 스승은 진정한 스승이 아니고, 스승이 될 수 없는 친구는 진정한 친구가 아니라고 하던데 ...
저는 이 말이 감은 오는데 피부로 와닿지가 않아서 ... ㅠ
무튼, 리플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좋은글 많이 기대하겠습니다. 즐거운 한주 되세욤 ^^*
사회관을 보면 진보 성향의 목사님이 확실한것 같은데
목사님이 이곳 다비아에 올리시는 설교나, 가르침들을 보면 종종 난해 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에 관하여, 구원에 관하여, 회개에 관하여, 성령에 관하여 ,
설명 하실때는 항상 2% 부족한그 무언가의 답답함이 느껴 집니다.
설교나, 여러 가르침에서 때로는 누군가의 또다른 시선을 의식하는것과 같이 말씀의 색깔이 분명하지 않아서
혼란을 겪을때가 많습니다.
정목사님이 가르키고자 하는 것을.. 이곳 다비아에서 목사님이 가지고 계신 신앙관 내지는
성경 해석을 돌려서 말하지 마시고 하고 싶으신 말씀을 똑바로 전달해 주셔야 설교나 가르침을 듣는
우둔한 저와 같은 자들이 아 ~그런구로구나 하고 빨리 깨달을수 있을텐데
자주, 뱅뱅 돌려서 뭔가를 설명 하려하시니 저와 같이 우둔한 자들은 빠른 깨달음이 없습니다.
실례로 좋은 설교자란 유식한 자나, 무식한 자에게나 동일하게 자신의 말씀을 빨리 깨우칠수 있도록
의미 전달을 확실히 해 주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