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 <열린 토론실>입니다. 다비안들의 부담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채>와는 달리, 보다 진지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나 주제를 나누고 싶은 분들을 위한 게시판입니다. 가급적 예의를 갖추시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대화는 다비안을 비롯한 여러 네티즌들의 온라인 상에서의 자유로운 것이기에 그 방향과 정체성이 반드시 다비아와 일치하지는 않음을 밝혀둡니다.
글 수 253
통일에 대한 질문과 세계화의 의미
남북의 통일에 대하여 사람등에게 묻는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그리고 그 당위성에 대해서 질문한다면 아마도 몇 가지의 답변들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남북이 통일되어 인구가 늘어나야 내수 등의 진작으로 한국경제가 탄탄해 질 수 있다는 말도 들을 수 있을 것이고 대립의 해소를 통한 국방비의 감소 등으로 경제가 윤택해 질 것이라는 대답 또한 한 자리를 차지할 만한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개인적으로는 가장 공감이 가는 내용인데 그것은 남북한이 통일되어 전쟁의 위협이 사라지고 평화가 정착되어 생명의 안전함이 보장될 수 있을 것이라는 답변입니다.
여기서 가지는 의문은 지구가 세계화하고 있는데 민족의 통합이 과연 어떠한 의미를 가지느냐 하는 것이고 경제적으로도 과연 만족할 만한 것일까라는 것과 평화라는 것이 남북간의 정전협정과 평화선언 및 상호간의 활발한 교류를 통하여서도 확보가 가능한 조건들이 아닌가 생각되어진 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계화에 반대하는 입장들도 적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그러한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또한 아닙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초기의 러다이트(luddite)운동에서 보듯이 기계를 파괴하는 사람들의 심정은 이해되는 것이고 그러한 행동이 기계를 없애는 의미가 아니라 초기 자본주의의 가혹한 근로에 저항하는 의미를 부여 받았듯이 세계화에 반대하는 것 또한 세계화가 무력화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세계화 자체를 반대한다면 그것은 새로운 즉자적 기계파괴운동에 다름 아닌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세상의 발전은 기본적으로 생산력의 발전을 전제로 하고 있고 이것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흐름입니다.
기계화나 세계화나 이것 속의 근본적 흐름은 생산력의 극대화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누군가에 의하여 의도하고 기획된 것이 아닌 마치 우주가 진화하는 과정과 흡사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문제는 발전된 기계가 얼마만큼의 생산력을 올리는데 대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인간을 여유롭고 자유롭게 하는가의 과제일 것입니다.
세계화 또한 그것이 가지는 물류의 원활성 자본의 집중과 분산 이를 통한 생산력의 고도화는 여전히 극복되지 못한 일개국주의의 착취를 동반하고 그로부터 가진 국가로부터 그렇지 못한 국가에 대한 수탈을 여전히 잔재로 남겨 부의 흐름을 형성하고 가난의 고착을 의도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생산력을 향상시켜나가는 그리하여 절대적 재화의 양을 확장시키는 진보적 측면의 단초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극복되지 못한 역사의 찌꺼기
한국사람들이 통일을 너무도 당연시하는 현실은 해방이후 극복되지 못한 민족주의에 대한 향수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특히 민족주의에 대하여 부정적이어야 할 진보적세력의 한 측면들에 의하여 강하게 추동되고 있음은 이러한 경향에 대한 혐의를 더욱 짙게 만듭니다.
극복되지 못한 역사는 항상 찌꺼기를 남깁니다.
단순하게 이야기 하면 부정적 측면과 긍정적 측면의 잔류물을 남기는데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모두 다 부정적 측면으로 전화되어 버리는 것 같습니다.
우선 박정희 정권의 종말을 예로 들고자 합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의 죽음은 아버지의 큰 목소리로 아침일찍 나에게 찾아왔습니다.
"박정희가 죽었단다."
사람의 죽음 앞에서 조금은 이상할 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조금 들뜬 목소리였습니다.
아버지는 당신이 바라던 민주주의 세상에 대한 설레임이 한 인간의 죽음보다 더욱 강하게 찾아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몰론 이러한 저격사건 조차 유신말기의 국민들의 저항에 의한 지배세력 내부의 갈등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박정희 정권에 대한 민중들의 평가가 충분히 이루어 지기도 전에 죽음으로 인한 종결은 찌꺼기를 남겼습니다. 여전히 새마을의 유령은 지자체 국기봉 위에서 미친듯이 머리를 휘날리며 춤추고 있으며 독재자의 추악함 또한 국가발전이란 업적의 휘장에 뒤덮이어 있습니다.
전두환의 경우는 조금은 다른 것 같습니다.
물론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때로 그때가 좋았다는 이야기도 하지만 그래도 일반적으론 충분히 독재자로 평가되고 이것이 역사발전의 걸림돌이 되었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6월 항쟁이란 민주적 저항에 의하여 축출된 것 때문이라고 보아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러가지 다른 의미들을 부여하지만 그리고 부여할 수 있지만 부인하기 어렵게 열강들의 다툼속에서 해방을 맞이한 것은 스스로의 충분한 힘으로 극복하지 못한 역사의 과제를 남겨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친일세력을 등에 업은 이승만 정부의 모습은 바로 여전히 극복하지 못한 박정희라는 인물을 낳아고 경제제일주의의 이명박 정부의 탄생으로 여전히 건재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참으로 질긴 반역의 역사입니다.
이는 아마도 극복되지 못한 민족주의적 과제에 해소하지 못한 민주주의적 숙제가 더해졌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이것이 역사의 부정적 모습이라면 긍정적 측면에서는 통일운동과 민족주의적 흐름들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아집니다.
민족국가 시설 극복하지 못한 민족적 과제가 낳아놓은 분단과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은 어쩌면 당연한 자발적 흐름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이 항상 정당성을 쟁취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동전의 양면과 야누스의 두 얼굴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당연히 통일되어야 한다는 것이 민족국가시대가 끝나가고 있는 시점에서 과연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논리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만약 여전히 그러하다면 세계의 모든 분할되어 있는 민족들이 통일되어야 한다는 논리도 당연시 되어야 할 것이고 역으로 같은 민족이 아니면 통일의 울타리에서 배척되어야 한다는 역의 논리도 성립되어야 할 것입니다.
역사속에서 우려하는 것은 민족통합논리가 바로 이(異)민족에 대한 배척의 사고와 동면의 양면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시오니즘과 팔레스타인 억압, 게르만주의와 유대인 학살, 황민사상과 약소국가 침탈, 중화사상과 소소민족의 억압 등 민족주의와 쇼비니즘은 야누스의 두얼굴 일 뿐입니다.
그것이 강대국에 대한 약속국의 저항에서는 역사적으로 당위성을 가졌지만 다른 면으로 진화했을 때는 쉽게 다른 얼굴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러한 것을 매우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최근 지상에서 회자가가 되고 있는 애국적 민주주의 또한 이러한 민족주의에 대한 아쉬움이 남긴 기형아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학문의 가장 기본된 자세는 의심이라고 합니다.
특히 철학적 사유는 이것에 철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통일도 민족주의도 애국적 민주주의도 모두 의심해볼 여지가 있다고 여겨지고 또한 그것의 변절의 혐의를 예의주시하여야 할 것입니다.
변절은 사물이 변해서 그런것도 있지만 그것은 가만히 있어도 세월이 변해서 그런것도 있습니다.
세월의 변화와 발전이 가만히 있는 나를 지나쳐 가버린 것입니다.
기독교 내 사회참여에 관심있는 분들 중 통일운동을 중시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성결교회의 역사중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역사가 민족주의적 선행으로 자랑거리가 되곤 합니다.
물론 당시에 그것이 종교적 원리주의에 기인해서 그런 것인지 아지면 나름 민족주의적 의식에 기초해서 그런 것인지는 불분명합니다만 어찌되었건 다른 교단들에게 얼굴을 점더 높이 들수 있는 것중 하나기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민족주의적 전통이든 아니면 그것으로 포장되었던지 간에 그러한 입장은 여전히 동일한 내용으로 의미있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목사님의 글 속에서의 통일과 민족주의 그리고 교회의 과제
정목사님의 신학적 입장에서도 민족적이거나 통일에 대한 글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통일운동이나 민족주의적 입장의 견지가 의미를 상실해 가고 있다고 생각할 뿐 아직까지는 반동적이지는 않다고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발전을 이제 막 그 지점에 있는 우리들을 지나쳐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고민해야 할 때 인것 같습니다.
물론 목사님의 말씀처럼 분단상항은 멸망의 질서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질서의 극복이 반드시 통일이어야 한다는 답이 정답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대전제는 평화의 정착이라고 보아집니다.
통일이 반드시 행복한 세상을 가져다 준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통일은 평화의 정착이라는 대전제의 한 가지 방법일 수 있을 것입니다.
통일의 문제는 민족통합의 문제가 아니라 전쟁의 종결과 평화의 도래라는 좀 더 발전된 문제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남과 북을 국가간으로 본다면 반드시 국가간에 통합이 필요한 이유는 없습니다.
민족간의 문제로 본다면 민족통합은 이제 지나쳐간 가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통일은 오히려 새로운 매우 어려운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의 국가내 두 등급의 국민을 만들어낼 수 있으며 안정된 경제체제를 파괴시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북으로 부터 유입되는 값싼 노동력은 남쪽의 노동조건을 악화시킬 것이며 남쪽의 흥청거림은 북측에 통합된 국가의 일원으로서의 괴리감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이것은 갈등과 대립의 출발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서로간의 교류와 지속적인 평화정착의 노력과 교섭을 통하여 상호의 발전을 도모해야 할 것이며 그 이후 생산력의 발전이란 측면에서 서로가 통합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EU가 국가 간에 행하고 있는 통합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생산력 발전에 저해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행하는 통일은 앞서 말한 민족주의의 향수를 달래는 것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상당한 시간이 걸려서야 진행될 아시아지역의 경제블럭과 통합의 과정과 별반 다를바 없는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가져야 할 선교적 책임은 환경, 인권, 반전, 반핵 등 인류가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에 평화의 정착이라는 가치가 추가될 수 있다고 보아집니다.
이후 다른 글에서 다루고 싶습니다만 한국교회의 위기는 아마도 이러한 진취적 가치들을 지향하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조선시대 부터 전래된 기독교가 봉건체제의 붕괴와 민족국가 형성의 미숙함에 일조하였지만 발전한 자본주의적 문화의 전래로 인하여 발전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당시 기독교는 신앙의 행태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문화적으로는 충분히 발전적이고 진취적이었습니다.
7~80년대를 거처면서도 KNCC의 활동을 통하여 그나마 기독교의 대표적 모습은 진보적인 모양새를 갖추었으며 그러한 그늘아래 사회적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젊은 청년들이 모여들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사회의 발전은 지금의 내가 변하여 이룩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지향하는 이후의 어린 세대들이 지금의 나까지 커올라와 발전하는 것이다.'라고 했던 생각이 납니다.
지금의 기독교가 한기총 등으로 대표되는 보수적 모습들은 새로운 가치를 지향하는 젊은 세대의 영입을 차단하고 있으며 떠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교회 구성원의 고령화는 한국사회가 노령사회로 접어든 것으로 부터 기인한 측면도 있지만 이로인하여 가속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남아있는 청년들이야 있겠지만 더 이상 이후 세대의 발전된 사회를 이끌어나갈 가치를 가진 젊은이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향후 2~30년 후 사회의 트랜드를 이끌어나갈 젊은이들이 과연 교회내에 존재하고 있고 그들이 영입되고 있는가 하고 물음을 던진다면 그렇다고 답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처지에 한국교회는 놓여 있습니다.
이런의미에서 매우 근본적으로 보수적이라고 생각되지만 포용의 폭이 상당히 넓은 카톨릭의 환경운동 등 진보적 운동에 대한 관심은 한국카톨릭을 성장시키는 동력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고 있음은 개신교들에게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다시금 한국교회의 위기는 보수화로 부터 오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통일이나 민족 등의 화두는 더 이상 이를 발전하고 있는 사회를 이끌고 갈만한 가치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요원하기는 하지만 새로운 가치,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한국교회의 발전에 기저를 차지하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우리들의 특수한 가치 즉 정전과 평화가 자리잡기를 바랍니다.
통일과 진보의 문제에서 다비아 회원님들의 고민의 단초가 되기를 바랍니다.
남북의 통일에 대하여 사람등에게 묻는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그리고 그 당위성에 대해서 질문한다면 아마도 몇 가지의 답변들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남북이 통일되어 인구가 늘어나야 내수 등의 진작으로 한국경제가 탄탄해 질 수 있다는 말도 들을 수 있을 것이고 대립의 해소를 통한 국방비의 감소 등으로 경제가 윤택해 질 것이라는 대답 또한 한 자리를 차지할 만한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개인적으로는 가장 공감이 가는 내용인데 그것은 남북한이 통일되어 전쟁의 위협이 사라지고 평화가 정착되어 생명의 안전함이 보장될 수 있을 것이라는 답변입니다.
여기서 가지는 의문은 지구가 세계화하고 있는데 민족의 통합이 과연 어떠한 의미를 가지느냐 하는 것이고 경제적으로도 과연 만족할 만한 것일까라는 것과 평화라는 것이 남북간의 정전협정과 평화선언 및 상호간의 활발한 교류를 통하여서도 확보가 가능한 조건들이 아닌가 생각되어진 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계화에 반대하는 입장들도 적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그러한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또한 아닙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초기의 러다이트(luddite)운동에서 보듯이 기계를 파괴하는 사람들의 심정은 이해되는 것이고 그러한 행동이 기계를 없애는 의미가 아니라 초기 자본주의의 가혹한 근로에 저항하는 의미를 부여 받았듯이 세계화에 반대하는 것 또한 세계화가 무력화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세계화 자체를 반대한다면 그것은 새로운 즉자적 기계파괴운동에 다름 아닌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세상의 발전은 기본적으로 생산력의 발전을 전제로 하고 있고 이것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흐름입니다.
기계화나 세계화나 이것 속의 근본적 흐름은 생산력의 극대화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누군가에 의하여 의도하고 기획된 것이 아닌 마치 우주가 진화하는 과정과 흡사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문제는 발전된 기계가 얼마만큼의 생산력을 올리는데 대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인간을 여유롭고 자유롭게 하는가의 과제일 것입니다.
세계화 또한 그것이 가지는 물류의 원활성 자본의 집중과 분산 이를 통한 생산력의 고도화는 여전히 극복되지 못한 일개국주의의 착취를 동반하고 그로부터 가진 국가로부터 그렇지 못한 국가에 대한 수탈을 여전히 잔재로 남겨 부의 흐름을 형성하고 가난의 고착을 의도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생산력을 향상시켜나가는 그리하여 절대적 재화의 양을 확장시키는 진보적 측면의 단초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극복되지 못한 역사의 찌꺼기
한국사람들이 통일을 너무도 당연시하는 현실은 해방이후 극복되지 못한 민족주의에 대한 향수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특히 민족주의에 대하여 부정적이어야 할 진보적세력의 한 측면들에 의하여 강하게 추동되고 있음은 이러한 경향에 대한 혐의를 더욱 짙게 만듭니다.
극복되지 못한 역사는 항상 찌꺼기를 남깁니다.
단순하게 이야기 하면 부정적 측면과 긍정적 측면의 잔류물을 남기는데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모두 다 부정적 측면으로 전화되어 버리는 것 같습니다.
우선 박정희 정권의 종말을 예로 들고자 합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의 죽음은 아버지의 큰 목소리로 아침일찍 나에게 찾아왔습니다.
"박정희가 죽었단다."
사람의 죽음 앞에서 조금은 이상할 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조금 들뜬 목소리였습니다.
아버지는 당신이 바라던 민주주의 세상에 대한 설레임이 한 인간의 죽음보다 더욱 강하게 찾아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몰론 이러한 저격사건 조차 유신말기의 국민들의 저항에 의한 지배세력 내부의 갈등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박정희 정권에 대한 민중들의 평가가 충분히 이루어 지기도 전에 죽음으로 인한 종결은 찌꺼기를 남겼습니다. 여전히 새마을의 유령은 지자체 국기봉 위에서 미친듯이 머리를 휘날리며 춤추고 있으며 독재자의 추악함 또한 국가발전이란 업적의 휘장에 뒤덮이어 있습니다.
전두환의 경우는 조금은 다른 것 같습니다.
물론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때로 그때가 좋았다는 이야기도 하지만 그래도 일반적으론 충분히 독재자로 평가되고 이것이 역사발전의 걸림돌이 되었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6월 항쟁이란 민주적 저항에 의하여 축출된 것 때문이라고 보아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러가지 다른 의미들을 부여하지만 그리고 부여할 수 있지만 부인하기 어렵게 열강들의 다툼속에서 해방을 맞이한 것은 스스로의 충분한 힘으로 극복하지 못한 역사의 과제를 남겨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친일세력을 등에 업은 이승만 정부의 모습은 바로 여전히 극복하지 못한 박정희라는 인물을 낳아고 경제제일주의의 이명박 정부의 탄생으로 여전히 건재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참으로 질긴 반역의 역사입니다.
이는 아마도 극복되지 못한 민족주의적 과제에 해소하지 못한 민주주의적 숙제가 더해졌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이것이 역사의 부정적 모습이라면 긍정적 측면에서는 통일운동과 민족주의적 흐름들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아집니다.
민족국가 시설 극복하지 못한 민족적 과제가 낳아놓은 분단과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은 어쩌면 당연한 자발적 흐름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이 항상 정당성을 쟁취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동전의 양면과 야누스의 두 얼굴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당연히 통일되어야 한다는 것이 민족국가시대가 끝나가고 있는 시점에서 과연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논리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만약 여전히 그러하다면 세계의 모든 분할되어 있는 민족들이 통일되어야 한다는 논리도 당연시 되어야 할 것이고 역으로 같은 민족이 아니면 통일의 울타리에서 배척되어야 한다는 역의 논리도 성립되어야 할 것입니다.
역사속에서 우려하는 것은 민족통합논리가 바로 이(異)민족에 대한 배척의 사고와 동면의 양면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시오니즘과 팔레스타인 억압, 게르만주의와 유대인 학살, 황민사상과 약소국가 침탈, 중화사상과 소소민족의 억압 등 민족주의와 쇼비니즘은 야누스의 두얼굴 일 뿐입니다.
그것이 강대국에 대한 약속국의 저항에서는 역사적으로 당위성을 가졌지만 다른 면으로 진화했을 때는 쉽게 다른 얼굴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러한 것을 매우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최근 지상에서 회자가가 되고 있는 애국적 민주주의 또한 이러한 민족주의에 대한 아쉬움이 남긴 기형아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학문의 가장 기본된 자세는 의심이라고 합니다.
특히 철학적 사유는 이것에 철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통일도 민족주의도 애국적 민주주의도 모두 의심해볼 여지가 있다고 여겨지고 또한 그것의 변절의 혐의를 예의주시하여야 할 것입니다.
변절은 사물이 변해서 그런것도 있지만 그것은 가만히 있어도 세월이 변해서 그런것도 있습니다.
세월의 변화와 발전이 가만히 있는 나를 지나쳐 가버린 것입니다.
기독교 내 사회참여에 관심있는 분들 중 통일운동을 중시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성결교회의 역사중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역사가 민족주의적 선행으로 자랑거리가 되곤 합니다.
물론 당시에 그것이 종교적 원리주의에 기인해서 그런 것인지 아지면 나름 민족주의적 의식에 기초해서 그런 것인지는 불분명합니다만 어찌되었건 다른 교단들에게 얼굴을 점더 높이 들수 있는 것중 하나기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민족주의적 전통이든 아니면 그것으로 포장되었던지 간에 그러한 입장은 여전히 동일한 내용으로 의미있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목사님의 글 속에서의 통일과 민족주의 그리고 교회의 과제
정목사님의 신학적 입장에서도 민족적이거나 통일에 대한 글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통일운동이나 민족주의적 입장의 견지가 의미를 상실해 가고 있다고 생각할 뿐 아직까지는 반동적이지는 않다고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발전을 이제 막 그 지점에 있는 우리들을 지나쳐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고민해야 할 때 인것 같습니다.
물론 목사님의 말씀처럼 분단상항은 멸망의 질서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질서의 극복이 반드시 통일이어야 한다는 답이 정답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대전제는 평화의 정착이라고 보아집니다.
통일이 반드시 행복한 세상을 가져다 준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통일은 평화의 정착이라는 대전제의 한 가지 방법일 수 있을 것입니다.
통일의 문제는 민족통합의 문제가 아니라 전쟁의 종결과 평화의 도래라는 좀 더 발전된 문제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남과 북을 국가간으로 본다면 반드시 국가간에 통합이 필요한 이유는 없습니다.
민족간의 문제로 본다면 민족통합은 이제 지나쳐간 가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통일은 오히려 새로운 매우 어려운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의 국가내 두 등급의 국민을 만들어낼 수 있으며 안정된 경제체제를 파괴시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북으로 부터 유입되는 값싼 노동력은 남쪽의 노동조건을 악화시킬 것이며 남쪽의 흥청거림은 북측에 통합된 국가의 일원으로서의 괴리감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이것은 갈등과 대립의 출발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서로간의 교류와 지속적인 평화정착의 노력과 교섭을 통하여 상호의 발전을 도모해야 할 것이며 그 이후 생산력의 발전이란 측면에서 서로가 통합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EU가 국가 간에 행하고 있는 통합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생산력 발전에 저해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행하는 통일은 앞서 말한 민족주의의 향수를 달래는 것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상당한 시간이 걸려서야 진행될 아시아지역의 경제블럭과 통합의 과정과 별반 다를바 없는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가져야 할 선교적 책임은 환경, 인권, 반전, 반핵 등 인류가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에 평화의 정착이라는 가치가 추가될 수 있다고 보아집니다.
이후 다른 글에서 다루고 싶습니다만 한국교회의 위기는 아마도 이러한 진취적 가치들을 지향하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조선시대 부터 전래된 기독교가 봉건체제의 붕괴와 민족국가 형성의 미숙함에 일조하였지만 발전한 자본주의적 문화의 전래로 인하여 발전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당시 기독교는 신앙의 행태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문화적으로는 충분히 발전적이고 진취적이었습니다.
7~80년대를 거처면서도 KNCC의 활동을 통하여 그나마 기독교의 대표적 모습은 진보적인 모양새를 갖추었으며 그러한 그늘아래 사회적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젊은 청년들이 모여들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사회의 발전은 지금의 내가 변하여 이룩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지향하는 이후의 어린 세대들이 지금의 나까지 커올라와 발전하는 것이다.'라고 했던 생각이 납니다.
지금의 기독교가 한기총 등으로 대표되는 보수적 모습들은 새로운 가치를 지향하는 젊은 세대의 영입을 차단하고 있으며 떠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교회 구성원의 고령화는 한국사회가 노령사회로 접어든 것으로 부터 기인한 측면도 있지만 이로인하여 가속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남아있는 청년들이야 있겠지만 더 이상 이후 세대의 발전된 사회를 이끌어나갈 가치를 가진 젊은이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향후 2~30년 후 사회의 트랜드를 이끌어나갈 젊은이들이 과연 교회내에 존재하고 있고 그들이 영입되고 있는가 하고 물음을 던진다면 그렇다고 답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처지에 한국교회는 놓여 있습니다.
이런의미에서 매우 근본적으로 보수적이라고 생각되지만 포용의 폭이 상당히 넓은 카톨릭의 환경운동 등 진보적 운동에 대한 관심은 한국카톨릭을 성장시키는 동력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고 있음은 개신교들에게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다시금 한국교회의 위기는 보수화로 부터 오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통일이나 민족 등의 화두는 더 이상 이를 발전하고 있는 사회를 이끌고 갈만한 가치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요원하기는 하지만 새로운 가치,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한국교회의 발전에 기저를 차지하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우리들의 특수한 가치 즉 정전과 평화가 자리잡기를 바랍니다.
통일과 진보의 문제에서 다비아 회원님들의 고민의 단초가 되기를 바랍니다.
2009.10.05 20:04:00

안녕하세요 광토님 댓글을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생산성과 생산력의 개념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생산력은 역사발전의 원동력입니다.
원시시대에서 고대국가 사회로 넘어오는 지점에서 국가가 가능했던 것은 대규모의 공동노동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공동의 노동을 담당하는 계급은 물론 전쟁에 의하여 확보된 노예였지만 노예노동은 대규모 토목공사와 잉여재화를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부족간의 전쟁을 통한 점령부족민에 대한 노예화는 계급사회를 본격적으로 양산하였지만 이는 국가의 성립을 가능하게 하는 기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고대노예제사회가 봉건사회로 넘어오게 되고 또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로 진화되어온 것입니다.
이 속에는 노예들의 투쟁이 있었고 농노들과 부르조아의 투쟁과 혁명이 있었습니다.
기계의 발달은 공장노동자와 부르조아를 만들어냈고 이것은 바로 봉건사회를 혁파하는 시민혁명으로 나타납니다. 프랑스대혁명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노예로부터 농노로 그리고 조금더 자유로운 임노동자로 인간의 권리가 확대되는 과정이 바로 생산력의 발전이라는 부분과 맞물려 있습니다.
생산력은 생산성과 같이 시간이나 노동의 강도를 통한 착취의 개념이 포함된 것이 아니라 생산도구의 발달에 따른 생산되는 재화의 질과 양의 증대를 가능케하는 힘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고대국가의 성립과 봉건국가,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을 근본적으로 가능하게 했던 힘이 된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인간이 개인적으로 누릴 수 있는 재화의 양과 시공간을 확장시켜 주는 근간인 것입니다.
아마도 더욱 발전되는 생산력은 인간을 좀더 다른 차원의 세계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통일에 대한 의미 또한 돈이 들기에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내가 사는데 필요없어서가 아니라 통일지상주의가 내재하고 있는 민족주의의 위험성을 우선시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통일이 가능하려면 단계적 방법을 통하든 아니면 다른 방식을 동원하든지 간에 결과적으로는 북한의 사회체제를 붕괴시킬 수 밖에 없으며 이는 아주 부담스러운 흡수통일로 귀결되어 버릴 것입니다.
남북간의 평화의 정착 그리고 교류가 오히려 현실적으로 가능하고 안정적인 길일 것이며 먼 미래에 통일을 가능하게 만들어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통일 역시 경제와 정치블럭의 국가간 통합이라는 보다 발전적 틀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입다.
생산성과 생산력의 개념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생산력은 역사발전의 원동력입니다.
원시시대에서 고대국가 사회로 넘어오는 지점에서 국가가 가능했던 것은 대규모의 공동노동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공동의 노동을 담당하는 계급은 물론 전쟁에 의하여 확보된 노예였지만 노예노동은 대규모 토목공사와 잉여재화를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부족간의 전쟁을 통한 점령부족민에 대한 노예화는 계급사회를 본격적으로 양산하였지만 이는 국가의 성립을 가능하게 하는 기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고대노예제사회가 봉건사회로 넘어오게 되고 또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로 진화되어온 것입니다.
이 속에는 노예들의 투쟁이 있었고 농노들과 부르조아의 투쟁과 혁명이 있었습니다.
기계의 발달은 공장노동자와 부르조아를 만들어냈고 이것은 바로 봉건사회를 혁파하는 시민혁명으로 나타납니다. 프랑스대혁명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노예로부터 농노로 그리고 조금더 자유로운 임노동자로 인간의 권리가 확대되는 과정이 바로 생산력의 발전이라는 부분과 맞물려 있습니다.
생산력은 생산성과 같이 시간이나 노동의 강도를 통한 착취의 개념이 포함된 것이 아니라 생산도구의 발달에 따른 생산되는 재화의 질과 양의 증대를 가능케하는 힘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고대국가의 성립과 봉건국가,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을 근본적으로 가능하게 했던 힘이 된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인간이 개인적으로 누릴 수 있는 재화의 양과 시공간을 확장시켜 주는 근간인 것입니다.
아마도 더욱 발전되는 생산력은 인간을 좀더 다른 차원의 세계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통일에 대한 의미 또한 돈이 들기에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내가 사는데 필요없어서가 아니라 통일지상주의가 내재하고 있는 민족주의의 위험성을 우선시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통일이 가능하려면 단계적 방법을 통하든 아니면 다른 방식을 동원하든지 간에 결과적으로는 북한의 사회체제를 붕괴시킬 수 밖에 없으며 이는 아주 부담스러운 흡수통일로 귀결되어 버릴 것입니다.
남북간의 평화의 정착 그리고 교류가 오히려 현실적으로 가능하고 안정적인 길일 것이며 먼 미래에 통일을 가능하게 만들어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통일 역시 경제와 정치블럭의 국가간 통합이라는 보다 발전적 틀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입다.
2009.10.05 22:26:13

떡진머리님께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
거의 관용구가 되다시피한 것에 대하여 재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군요.
저도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더라구요.
먼저 통일을 지향해야할 이유부터 생각해보니
첫째는 이 시점에서는 우리의 분단 한반도의 세월이 너무 짧다는 것입니다.
60년이면 아직 이산가족의 생존율도 집계가 되는 때이고
통일을 세계화의 추세에 발맞추어 손놓기에는 시기상조입니다.
앞으로 분단 현실이 100년, 150년 쯤 지속이 된다면 통일에 대한 화두가 희석이 되리라 봅니다.
둘째는 자의적 분단이 아닌 강대국에 의한 결정이 시작이었기에
우리의 의지의 결과물을 보고자하는 열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반드시 민족주의적 관점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덩어리를 축소시켜 체감할 수 있는 설명으로 보자면
강제 이혼 당한거면 재결합의 의지를 불태워야 한다는 거...
인도와 파키스탄 같은 합의 이혼은 아니잖아요.
세째는 통일 한국이 되었을 시에 생길지도 모르는 여러 숫자적인 장점들이 있겠지요.
네째로 북한 주민들을 향한 마음들이 있지만 실재 상황이 되면
어느 만큼 이 부분에 대하여 남한 국민 개개인이 직접적인 도움이 될까 미지수입니다만...
다음은 통일의 걸림돌이나 의외성에 대하여 생각해보면
첫째, 정치지도자들의 통일에 대한 태도들이 단순한 재스츄어로 보일 때가 많다는 것.
둘째, 떡진머리님께서 언급하신 평화의 정착, 교류를 통한 안정, 미래의 통일에 대한 가능성으로의 연결...
이 시나리오가 제일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이 너무나 어렵게 보입니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나 구독일의 통일등을 볼 때도 이건 너무나 갑작스러웠습니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는 그런 식이 아니었는데 말이지요.
어느 정도 평화가 전재된 국가와의 소통이 바늘 구멍만하게 열리기 시작하면
그것을 누리지 못하던 쪽에서는 질풍노도와 같이 그 수요를 충족하기위한
폭발적인 힘을 분출하는 것 같습니다. 옆에서 컨트롤이 안됩니다.
북한의 경우도 위의 두 선례를 참고하여 체제 유지를 위해 그 통로 조절을 잘 하는 것 같고,
그래서 이성적으로는 점진적인 것을 원하지만 엉뚱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떡진머리님의 의견에대하여
아직은 통일을 손놓을 때는 아니다.
세계화의 표어가 있으나 지구상의 국가의 수준은 천차만별이다.
생산력의 선진화로만 달려갈 필요는 없다.
지금의 세대는 민족주의에 골몰하기에는 이미 집중력이 떨어진다.
겉모습이 멀쩡한 거 보다는 오히려 민족적, 국가적 장애요인을 염두에 두는 것도 건강하다.
관용적 의례적이다시피한 통일논의를 이러한 반대적 논의를 통하여 생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거의 관용구가 되다시피한 것에 대하여 재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군요.
저도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더라구요.
먼저 통일을 지향해야할 이유부터 생각해보니
첫째는 이 시점에서는 우리의 분단 한반도의 세월이 너무 짧다는 것입니다.
60년이면 아직 이산가족의 생존율도 집계가 되는 때이고
통일을 세계화의 추세에 발맞추어 손놓기에는 시기상조입니다.
앞으로 분단 현실이 100년, 150년 쯤 지속이 된다면 통일에 대한 화두가 희석이 되리라 봅니다.
둘째는 자의적 분단이 아닌 강대국에 의한 결정이 시작이었기에
우리의 의지의 결과물을 보고자하는 열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반드시 민족주의적 관점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덩어리를 축소시켜 체감할 수 있는 설명으로 보자면
강제 이혼 당한거면 재결합의 의지를 불태워야 한다는 거...
인도와 파키스탄 같은 합의 이혼은 아니잖아요.
세째는 통일 한국이 되었을 시에 생길지도 모르는 여러 숫자적인 장점들이 있겠지요.
네째로 북한 주민들을 향한 마음들이 있지만 실재 상황이 되면
어느 만큼 이 부분에 대하여 남한 국민 개개인이 직접적인 도움이 될까 미지수입니다만...
다음은 통일의 걸림돌이나 의외성에 대하여 생각해보면
첫째, 정치지도자들의 통일에 대한 태도들이 단순한 재스츄어로 보일 때가 많다는 것.
둘째, 떡진머리님께서 언급하신 평화의 정착, 교류를 통한 안정, 미래의 통일에 대한 가능성으로의 연결...
이 시나리오가 제일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이 너무나 어렵게 보입니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나 구독일의 통일등을 볼 때도 이건 너무나 갑작스러웠습니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는 그런 식이 아니었는데 말이지요.
어느 정도 평화가 전재된 국가와의 소통이 바늘 구멍만하게 열리기 시작하면
그것을 누리지 못하던 쪽에서는 질풍노도와 같이 그 수요를 충족하기위한
폭발적인 힘을 분출하는 것 같습니다. 옆에서 컨트롤이 안됩니다.
북한의 경우도 위의 두 선례를 참고하여 체제 유지를 위해 그 통로 조절을 잘 하는 것 같고,
그래서 이성적으로는 점진적인 것을 원하지만 엉뚱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떡진머리님의 의견에대하여
아직은 통일을 손놓을 때는 아니다.
세계화의 표어가 있으나 지구상의 국가의 수준은 천차만별이다.
생산력의 선진화로만 달려갈 필요는 없다.
지금의 세대는 민족주의에 골몰하기에는 이미 집중력이 떨어진다.
겉모습이 멀쩡한 거 보다는 오히려 민족적, 국가적 장애요인을 염두에 두는 것도 건강하다.
관용적 의례적이다시피한 통일논의를 이러한 반대적 논의를 통하여 생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2009.10.06 09:57:40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사회주의적 국가들의 붕괴는 기본적으로 생산력의 한계로 부터 발생합니다.
생산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주의국가 건설의 취지에 비추어 볼 때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이 선도적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농업생산이 지배적인 국가에서의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많은 모순을 노정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딜램마였습니다.
마르크스의 말을 차용하더라도 자본주의적 생산이 한계에 다다를 때 공산주의로으 이행을 예견했으니 말입니다.
더구나 레닌의 신경제정책처럼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지속적 발전을 유지했을 경우 자본주의적 경쟁을 일정수준 이상으로용인하기 어려운 상부구조와의 모순이 발생해 버리고 생산을 공산주의적 방식으로 유지했을 경우 더 이상 자본주의적 경쟁력에 의한 발전을 상실하는 부분으로 부터 모순은 강화되어버렸던 것 같습니다.
정체되어버린 자본주의적 발전이 자본주의 국가와의 교류나 내부의 자본주의적 개혁에 의하여 급격하게 무너져 버리는 경우를 우리는 목격해 왔습니다.
북한이 본격적으로 자본주의적 발전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만 권력구조의 폐쇄성과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북한인민의 의식은 아마도 이를 더욱 어렵게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폐쇄적 권력은 자본주의적 개방에 무척이나 허약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중국의 자본주의적 개방과 발전이 괄목할만 합니다만 이 또한 기본적으로 상부구조와 토대의 모순이라는 한계에 봉착하리라 여겨집니다.
30년 이후 중국이 미국의 경제를 앞설 것이라 이야기하지만 아마도 20년을 넘지못해 이러한 모순이 노정될 것입니다.
지금은 중국의 사회주의 권력이 한국의 개발독제를 진행해온 박정희 정권의 역할을 담당할 수도 있겠지만 그 한계는 분명히 드러나리라 보아집니다. 아마도 그 이후에는 권력의 공백기가 찾아돌 것이며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세력과 자본주의를 열망하는 집단간의 갈등이 매우 크게 증폭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중국의 국가구성의 구조상 소수민족의 저항 등에 의한 내전상황으로 치달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통일문제로 돌아가서 이야기 해보면 통일이 평화적이며 원만하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북한의 경제구조가 남한의 경제구조를 어느정도 따라잡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할 것이며 정치권력 또한 지금보다는 훨씬 민주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태로의 진행은 북한의 사회주의적 체제가 스스로 붕괴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아니면 현재의 상황에서 급격히 이루어진 남한과의 개방과 교류로 인하여 붕괴되는 북한을 보게될 것입니다.
우리가 매우 추상적으로 통일의 초기단계를 1국가 2체제라는 것을 이야기 하지만 이것이 현실에서 얼마나 가능할 지에 대해서는 고민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연방제가 엄청난 차이를 드러내는 경제구조를 해결하지 않고 가능할 것인지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개성공단 북한 근로자의 임금이 6만원입니다.
남한과 비교해봤을 경우 20배의 차이가 납니다. 그것도 6만원은 북한에서는 매우 높은 임금입니다.
물론 임노동체제가 아닌 북한과 수평적으로 비교한 다는 것이 그리고 기본적인 사회보장이 존재하는 국가와의 단순한 비교가 의미를 감소시키지만 경제력의 차이는 이외의 비교에서도 충분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매우 구체적으로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전제하지 않고 통일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북한의 붕괴를 바라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닐 것입니다. 평화적 유지가 아닌 붕괴로 부터 오는 상호간의 고통은 더욱 클 것입니다.
평화정착은 남북한의 필수적 요건이며 북한의 경제적 문제는 북한 스스로 해결할 문제입니다. 물론 가능한한 남한이 도움을 주고 필요한 부분에서 경제와 문화적 부분의 교류가 있어야 겠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세계국가간의 수준은 천차만별이 맞습니다.
아마도 세계화는 매우 오랜 시간을 가지고 진행될 것입니다.
자본주의 최후의 발전적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물꼬는 트이고 있습니다. 유럽이 통합되었습니다. 화폐가 통합되고 의회가 구성되었습니다.
국가간에 평등하게 통합되는 바람직한 모양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메리카나 아시아의 경제통합이 꼭 이렇듯 평등한 형태로 이행될지에 대해서는 미지수 입니다.
또한 경제수준의 격차를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세계적 통합의 길은 자본주의 마지막 발전의 방법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거스를수 없는 추세로 우리들 곁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바로WTO, FTA 등이 아주 낮은 수준의 세계적 결합의 다양한 단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세계화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민중의 고통에 반대할 뿐입니다.
저는 안정적이며 평화적인 통일의 불가능성을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통일론속에 숨어있는 민족주의적 경향의 야성에 주목하고 있는 것입이다.
좋은 의견에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사회주의적 국가들의 붕괴는 기본적으로 생산력의 한계로 부터 발생합니다.
생산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주의국가 건설의 취지에 비추어 볼 때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이 선도적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농업생산이 지배적인 국가에서의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많은 모순을 노정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딜램마였습니다.
마르크스의 말을 차용하더라도 자본주의적 생산이 한계에 다다를 때 공산주의로으 이행을 예견했으니 말입니다.
더구나 레닌의 신경제정책처럼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지속적 발전을 유지했을 경우 자본주의적 경쟁을 일정수준 이상으로용인하기 어려운 상부구조와의 모순이 발생해 버리고 생산을 공산주의적 방식으로 유지했을 경우 더 이상 자본주의적 경쟁력에 의한 발전을 상실하는 부분으로 부터 모순은 강화되어버렸던 것 같습니다.
정체되어버린 자본주의적 발전이 자본주의 국가와의 교류나 내부의 자본주의적 개혁에 의하여 급격하게 무너져 버리는 경우를 우리는 목격해 왔습니다.
북한이 본격적으로 자본주의적 발전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만 권력구조의 폐쇄성과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북한인민의 의식은 아마도 이를 더욱 어렵게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폐쇄적 권력은 자본주의적 개방에 무척이나 허약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중국의 자본주의적 개방과 발전이 괄목할만 합니다만 이 또한 기본적으로 상부구조와 토대의 모순이라는 한계에 봉착하리라 여겨집니다.
30년 이후 중국이 미국의 경제를 앞설 것이라 이야기하지만 아마도 20년을 넘지못해 이러한 모순이 노정될 것입니다.
지금은 중국의 사회주의 권력이 한국의 개발독제를 진행해온 박정희 정권의 역할을 담당할 수도 있겠지만 그 한계는 분명히 드러나리라 보아집니다. 아마도 그 이후에는 권력의 공백기가 찾아돌 것이며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세력과 자본주의를 열망하는 집단간의 갈등이 매우 크게 증폭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중국의 국가구성의 구조상 소수민족의 저항 등에 의한 내전상황으로 치달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통일문제로 돌아가서 이야기 해보면 통일이 평화적이며 원만하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북한의 경제구조가 남한의 경제구조를 어느정도 따라잡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할 것이며 정치권력 또한 지금보다는 훨씬 민주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태로의 진행은 북한의 사회주의적 체제가 스스로 붕괴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아니면 현재의 상황에서 급격히 이루어진 남한과의 개방과 교류로 인하여 붕괴되는 북한을 보게될 것입니다.
우리가 매우 추상적으로 통일의 초기단계를 1국가 2체제라는 것을 이야기 하지만 이것이 현실에서 얼마나 가능할 지에 대해서는 고민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연방제가 엄청난 차이를 드러내는 경제구조를 해결하지 않고 가능할 것인지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개성공단 북한 근로자의 임금이 6만원입니다.
남한과 비교해봤을 경우 20배의 차이가 납니다. 그것도 6만원은 북한에서는 매우 높은 임금입니다.
물론 임노동체제가 아닌 북한과 수평적으로 비교한 다는 것이 그리고 기본적인 사회보장이 존재하는 국가와의 단순한 비교가 의미를 감소시키지만 경제력의 차이는 이외의 비교에서도 충분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매우 구체적으로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전제하지 않고 통일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북한의 붕괴를 바라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닐 것입니다. 평화적 유지가 아닌 붕괴로 부터 오는 상호간의 고통은 더욱 클 것입니다.
평화정착은 남북한의 필수적 요건이며 북한의 경제적 문제는 북한 스스로 해결할 문제입니다. 물론 가능한한 남한이 도움을 주고 필요한 부분에서 경제와 문화적 부분의 교류가 있어야 겠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세계국가간의 수준은 천차만별이 맞습니다.
아마도 세계화는 매우 오랜 시간을 가지고 진행될 것입니다.
자본주의 최후의 발전적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물꼬는 트이고 있습니다. 유럽이 통합되었습니다. 화폐가 통합되고 의회가 구성되었습니다.
국가간에 평등하게 통합되는 바람직한 모양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메리카나 아시아의 경제통합이 꼭 이렇듯 평등한 형태로 이행될지에 대해서는 미지수 입니다.
또한 경제수준의 격차를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세계적 통합의 길은 자본주의 마지막 발전의 방법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거스를수 없는 추세로 우리들 곁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바로WTO, FTA 등이 아주 낮은 수준의 세계적 결합의 다양한 단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세계화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민중의 고통에 반대할 뿐입니다.
저는 안정적이며 평화적인 통일의 불가능성을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통일론속에 숨어있는 민족주의적 경향의 야성에 주목하고 있는 것입이다.
좋은 의견에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2009.10.10 03:21:38
이번달 복상(복음과 상황, 10월호)에 김회권님이 쓰신 'DJ의 햇볕정책에 대한 포펌'이라는 아티클이 있는데요, 그 중에서 도입부에 왜 통일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언급이 인상깊더군요. 결국 민족주의나, 실용주의나, 제국주의적 접근이 아닌, (기독교인은 당연히) 신학적인 접근을 해야한다는 것이지요.(떡진머리님과 비슷한 관점에서) 사실 전후 50년 세대인 저나 제 또래에겐 통일 담론이 그다지 피부에 와닿지는 않기때문에 그 당위성에 대해서는 좀 거리를 두는 편이었지만,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라는 신학적인 접근 방식이라면 그 당위성에 동의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2009.10.12 00:56:14

통일을 신학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부분에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통일이나 평화를 바라보는데 있어 신학적 입장과 일반적 입장이 기본적인 차이를 드러낸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창조의 섭리'라는 의미를 세상일을 바라보는 지표점으로 삼곤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을 파괴하지 않고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방식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로 채택될 수 있는 것들이라고 보아집니다.
저는 이것이 진화론적 입장에서 보더라도 인류사회를 유지하고 진화시킨다는 점에서 적대적이지 않은 것들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나라의 실현이라는 의미의 한 부분으로 통일이라는 부분을 바라볼 수는 있겠지만 50년간의 분단은 통일조차도 어려울 정도로의 골을 형성시켜 버렸습니다.
감성적으로 생각하는 단순한 민족간의 통합이 아니라 좀더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되는 경제력의 차이가 크게나는 국가간의 통합으로 바라본다면 문제의 심각성은 분명해 지리라 생각합니다.
정서적으로는 민족간 문제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국가간의 통합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실적 문제를 해결할 방안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통일론은 매우 추상적 꿈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허구적인 이데올로기일도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가 남북민족의 통일을 포함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세계민중를 향한 해방의 담론이라고는 분명히 생각합니다.
저는 '창조의 섭리'라는 의미를 세상일을 바라보는 지표점으로 삼곤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을 파괴하지 않고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방식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로 채택될 수 있는 것들이라고 보아집니다.
저는 이것이 진화론적 입장에서 보더라도 인류사회를 유지하고 진화시킨다는 점에서 적대적이지 않은 것들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나라의 실현이라는 의미의 한 부분으로 통일이라는 부분을 바라볼 수는 있겠지만 50년간의 분단은 통일조차도 어려울 정도로의 골을 형성시켜 버렸습니다.
감성적으로 생각하는 단순한 민족간의 통합이 아니라 좀더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되는 경제력의 차이가 크게나는 국가간의 통합으로 바라본다면 문제의 심각성은 분명해 지리라 생각합니다.
정서적으로는 민족간 문제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국가간의 통합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실적 문제를 해결할 방안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통일론은 매우 추상적 꿈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허구적인 이데올로기일도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가 남북민족의 통일을 포함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세계민중를 향한 해방의 담론이라고는 분명히 생각합니다.
2009.10.19 12:31:32

저는 떡진머리님의 "한국사람들이 통일을 너무도 당연시하는 현실은 해방이후 극복되지 못한 민족주의에 대한 향수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에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저는 유니스님의 "첫째는 이 시점에서는 우리의 분단 한반도의 세월이 너무 짧다는 것입니다."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떠진머리님은 가족이 있으신지요? 그 가족 중 누군가가 죽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가슴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보고 싶지 않겠습니까? 오래전 텔레비에서 이산가족 찾기를 방송한 적있지요. 비록 이제는 소수분이라하더라도 아직도 분단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한국의 통일은 두 나라가 합치자는 게 아닙니다. 만주 땅 처럼 고토 회복도 아닙니다. 아직은 감정적으로 정서적으로 가족이 찢어지는 아픔의 상처가 큰 분단입니다.
언론에서 얼마전 조두준 사건 때문에 떠들석 했었죠. 많은 분들이 그 어린이와 부모님께서 아파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같이 분개 했었죠. 단지 사회적으로 강간은 나쁘고 바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고치자고 분개했었던 건가요? 아직도 사람은 이웃이 아파하면 같이 정서적으로 아픕니다.
우리 집에는 이산가족이 없으니 몇몇 분들을 위해서 내가 경제적으로 희생해 가면서 통일해야 하는가? 통일 했을때의 이익이 무언가 주판을 튀기기에는 비단 한국 사람의 정서만 아니라 인간으로써 너무 척박한것 같네요.
비록 내가 이산가족으로 피해를 보지 않았어도 한민족의 분단은 우리 민족에게 너무나도 큰 상처입니다. 이 상처를 치유하는데 당장은 경제적 부담이 되더라도 아프지 않은 건강한 국가가 더욱 더 멀리 뛰지 않을까요?
저는 믿습니다. 통일 한국이 더욱 발전할 거라고. 더욱 세계에 이바지 할 수 있을것이라고.
아직도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저는 유니스님의 "첫째는 이 시점에서는 우리의 분단 한반도의 세월이 너무 짧다는 것입니다."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떠진머리님은 가족이 있으신지요? 그 가족 중 누군가가 죽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가슴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보고 싶지 않겠습니까? 오래전 텔레비에서 이산가족 찾기를 방송한 적있지요. 비록 이제는 소수분이라하더라도 아직도 분단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한국의 통일은 두 나라가 합치자는 게 아닙니다. 만주 땅 처럼 고토 회복도 아닙니다. 아직은 감정적으로 정서적으로 가족이 찢어지는 아픔의 상처가 큰 분단입니다.
언론에서 얼마전 조두준 사건 때문에 떠들석 했었죠. 많은 분들이 그 어린이와 부모님께서 아파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같이 분개 했었죠. 단지 사회적으로 강간은 나쁘고 바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고치자고 분개했었던 건가요? 아직도 사람은 이웃이 아파하면 같이 정서적으로 아픕니다.
우리 집에는 이산가족이 없으니 몇몇 분들을 위해서 내가 경제적으로 희생해 가면서 통일해야 하는가? 통일 했을때의 이익이 무언가 주판을 튀기기에는 비단 한국 사람의 정서만 아니라 인간으로써 너무 척박한것 같네요.
비록 내가 이산가족으로 피해를 보지 않았어도 한민족의 분단은 우리 민족에게 너무나도 큰 상처입니다. 이 상처를 치유하는데 당장은 경제적 부담이 되더라도 아프지 않은 건강한 국가가 더욱 더 멀리 뛰지 않을까요?
저는 믿습니다. 통일 한국이 더욱 발전할 거라고. 더욱 세계에 이바지 할 수 있을것이라고.
아직도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2009.10.22 23:21:22

헤어진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저에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리움과 아픔, 상처는 치유될 수 있다면 그렇게 되는 것 또한 당연합니다.
헤어진 가족의 문제라면 만날 수 있으면 만나면 되고 합칠 수 있으면 합치면 됩니다.
그것이 분단속에서 만들어진 이산가족의 문제라면 평화적 교류 또한 그들의 만남을 가능하게 해 줄 것입니다.
그것은 국가의 통일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꼭 통일만이 가족의 상처를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쉽게 생각하는 것 하나는 통일의 문제를 이와같이 감정적이거나 정서적 문제로 부터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문제를 해결할 열쇠가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성적이거나 현실적 해결은 경제적 주판을 튀기는 문제가 아니며 또한 남한이 부담해야 할 통일의 부담금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황에서라면 상호가 불행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남한의 국민이나 북한의 인민이 모두 말입니다.
현대사에서 분단이후 통일된 국가들을 우리들은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베트남, 독일, 예멘 입니다.
이들의 통일의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베트남의 경우 오랜 전쟁끝에 미국의 철수로 인해 북쪽이 남쪽을 점령한 형식입니다.
독일은 비폭력적이지만 동독의 붕괴로 급속이 통일이 이루어 졌습니다.
예멘은 북예멘과 영국령으로 부터 독립한 남예멘이 평화적 통일 후 갈등으로 인하여 전쟁을 거치고 북예멘에 의하여 통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전쟁이나 붕괴를 통하여 현실적 통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한반도의 경우 어떤 모습으로 통일되기를 바랍니까?
가장 합리적이라고 주장되는 대안은 아마도 연방제통일일 것입니다.
두개의 체제를 그대로 두고 하나의 국가를 이루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하나의 국가속에서 두개의 체제가 경제적으로나 인적으로 쏠림현상 없이 한쪽이 공동화되지 않고 지속적인 발전이 가능할 것이라는 물음에는 아니라고 답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통일에 대한 바램이 헤어진 가족에 대한 그리움의 발로라면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통일의 동력이 되기에는 너무나 협소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분단된 민족에 대한 그리움이라면 당신에게 그러한 민족애가 존재하는지 묻고 싶으며 만약 그렇다고 답한다면 그것은 현재와 미래의 추세인 세계화의 변화와 동떨어진 민족주의의 향수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분단된지 얼마되지 않았다는 것이 통일을 해야만 한는 근거는 되지 못합니다.
그것이 일년이 되었건 백년이 되었건 말입니다.
또한 한반도가 당연히 통일국가로 있어야 한다는 것도 찬동하지 못합니다.
한반도가 서로 나뉘어진 국가로 존재했던 기간 또한 통일된 형태로 있었던 것만큼 오래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통일된 국가가 발전적이라는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삼국시대와 고려, 조선시대를 살펴보면 조금은 보일 것입니다.
백제나 신라 문물의 발전이나 고구려의 중국 등과의 독립성을 생각해 본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에 비하면 통일국가인 조선의 경우는 국가적 독립성에서 상대적으로 어떠했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도 통일을 절대로 하지 말하야 된다는 통일반대론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통일지상주의자는 더더욱 아닙니다.
가능한 평화의 정착이 우선이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통일의 과정이 진행된다면 그렇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이 과정이 여러가지 면에서 평화적으로 이루어지기에는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할 정도의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히려 세계화 과정에서 특히 남한에서 더욱 급속히 이루어지고 있는 양극화문제가 한국교회가 천착해야 문제라고 봅니다.
세계화의 과정속에서 발생하고 있는 이웃들에 대한 사랑이 지금 한국교회가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세계화와 양극화 그리고 한국교회의 과제에 대한 생각은 별도의 글에서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리움과 아픔, 상처는 치유될 수 있다면 그렇게 되는 것 또한 당연합니다.
헤어진 가족의 문제라면 만날 수 있으면 만나면 되고 합칠 수 있으면 합치면 됩니다.
그것이 분단속에서 만들어진 이산가족의 문제라면 평화적 교류 또한 그들의 만남을 가능하게 해 줄 것입니다.
그것은 국가의 통일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꼭 통일만이 가족의 상처를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쉽게 생각하는 것 하나는 통일의 문제를 이와같이 감정적이거나 정서적 문제로 부터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문제를 해결할 열쇠가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성적이거나 현실적 해결은 경제적 주판을 튀기는 문제가 아니며 또한 남한이 부담해야 할 통일의 부담금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황에서라면 상호가 불행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남한의 국민이나 북한의 인민이 모두 말입니다.
현대사에서 분단이후 통일된 국가들을 우리들은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베트남, 독일, 예멘 입니다.
이들의 통일의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베트남의 경우 오랜 전쟁끝에 미국의 철수로 인해 북쪽이 남쪽을 점령한 형식입니다.
독일은 비폭력적이지만 동독의 붕괴로 급속이 통일이 이루어 졌습니다.
예멘은 북예멘과 영국령으로 부터 독립한 남예멘이 평화적 통일 후 갈등으로 인하여 전쟁을 거치고 북예멘에 의하여 통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전쟁이나 붕괴를 통하여 현실적 통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한반도의 경우 어떤 모습으로 통일되기를 바랍니까?
가장 합리적이라고 주장되는 대안은 아마도 연방제통일일 것입니다.
두개의 체제를 그대로 두고 하나의 국가를 이루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하나의 국가속에서 두개의 체제가 경제적으로나 인적으로 쏠림현상 없이 한쪽이 공동화되지 않고 지속적인 발전이 가능할 것이라는 물음에는 아니라고 답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통일에 대한 바램이 헤어진 가족에 대한 그리움의 발로라면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통일의 동력이 되기에는 너무나 협소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분단된 민족에 대한 그리움이라면 당신에게 그러한 민족애가 존재하는지 묻고 싶으며 만약 그렇다고 답한다면 그것은 현재와 미래의 추세인 세계화의 변화와 동떨어진 민족주의의 향수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분단된지 얼마되지 않았다는 것이 통일을 해야만 한는 근거는 되지 못합니다.
그것이 일년이 되었건 백년이 되었건 말입니다.
또한 한반도가 당연히 통일국가로 있어야 한다는 것도 찬동하지 못합니다.
한반도가 서로 나뉘어진 국가로 존재했던 기간 또한 통일된 형태로 있었던 것만큼 오래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통일된 국가가 발전적이라는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삼국시대와 고려, 조선시대를 살펴보면 조금은 보일 것입니다.
백제나 신라 문물의 발전이나 고구려의 중국 등과의 독립성을 생각해 본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에 비하면 통일국가인 조선의 경우는 국가적 독립성에서 상대적으로 어떠했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도 통일을 절대로 하지 말하야 된다는 통일반대론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통일지상주의자는 더더욱 아닙니다.
가능한 평화의 정착이 우선이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통일의 과정이 진행된다면 그렇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이 과정이 여러가지 면에서 평화적으로 이루어지기에는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할 정도의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히려 세계화 과정에서 특히 남한에서 더욱 급속히 이루어지고 있는 양극화문제가 한국교회가 천착해야 문제라고 봅니다.
세계화의 과정속에서 발생하고 있는 이웃들에 대한 사랑이 지금 한국교회가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세계화와 양극화 그리고 한국교회의 과제에 대한 생각은 별도의 글에서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2009.11.12 13:35:28
주제로 선정하신 <통일의 당위성 여부>는 이를 제목 그대로 하여 논제로 삼기에는 다소 난해한 듯한 감도 없지않아
있는 듯하여, 대신에 통일에 관한 평소(근래) 생각했던바 소견을 다음과 같이 말씀드리고자 하여 간단히 기술합니다.
우선, "통일"이라는 말은 역사 / 사회학적인 개념의 용어일 것입니다.
한편 생각하면, 인류사가 항상 유기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민족이나 국가의 구분도 고착된 개념의 것이거나
혹은 어떻게든 한번 고착된 그런 상태로 계속해서 나아가야만 한다고 사고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사고할 때, 남.북도 한 때 한 국가, 한 민족이었다가 또 다시 반영구적으로 분리돼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고, 그런 상태가 역사상 어느정도 긴 기간이 될 것으로 가상한다면 아예 영구히 그렇게 되고 말 수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전제 하에서, 북한 동포들이 처해 있는 삶의 고통과 신앙적인 부자유상태를 생각할 때 통일이 소망스러운 일임에는 틀림 없을 것이고, 또한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 현재의 제한된 판단과 시각 하에서 본다면 통일된 한반도의 모습이 보다 자연스러운 상태가 될 것임에는 두드러진 이론이 없을 것이라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통일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북한 동포들의 현재의 그러한 어려움들이 통일이 아닌 다른 방법들에 의해서 해결될 그러한 가능성마저 전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도 조금은 무리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 구약시대와 같은 선지자가 나타나서 남북문제 해결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직접 선포하기라고 한다면 몰라도,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것이고 인간의 판단과는 언제나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상이 저의 대략적인 통일관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있는 듯하여, 대신에 통일에 관한 평소(근래) 생각했던바 소견을 다음과 같이 말씀드리고자 하여 간단히 기술합니다.
우선, "통일"이라는 말은 역사 / 사회학적인 개념의 용어일 것입니다.
한편 생각하면, 인류사가 항상 유기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민족이나 국가의 구분도 고착된 개념의 것이거나
혹은 어떻게든 한번 고착된 그런 상태로 계속해서 나아가야만 한다고 사고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사고할 때, 남.북도 한 때 한 국가, 한 민족이었다가 또 다시 반영구적으로 분리돼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고, 그런 상태가 역사상 어느정도 긴 기간이 될 것으로 가상한다면 아예 영구히 그렇게 되고 말 수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전제 하에서, 북한 동포들이 처해 있는 삶의 고통과 신앙적인 부자유상태를 생각할 때 통일이 소망스러운 일임에는 틀림 없을 것이고, 또한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 현재의 제한된 판단과 시각 하에서 본다면 통일된 한반도의 모습이 보다 자연스러운 상태가 될 것임에는 두드러진 이론이 없을 것이라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통일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북한 동포들의 현재의 그러한 어려움들이 통일이 아닌 다른 방법들에 의해서 해결될 그러한 가능성마저 전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도 조금은 무리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 구약시대와 같은 선지자가 나타나서 남북문제 해결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직접 선포하기라고 한다면 몰라도,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것이고 인간의 판단과는 언제나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상이 저의 대략적인 통일관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2009.11.12 18:56:39

깊으신 생각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분단이 남북한의 전체주의와 강대국의 사회.군사적 개입을 가져오고 있으며 이것이 남북한 민중의 고통의 한 부분을 규정하고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 통일을 통하여 또 다른 강력한 국가를 목표로 한다면, 더군다나 시대적 유령인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측면에서 배타적인 민족성을 강화하는 경향으로 나타난다면 이것은 억압과 고통의 전이일 뿐이지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길은 아닙니다.
통일의식은 혼재되어 있습니다.
통일운동을 주도하는 세력의 통일관과 자본주의 사회로 북한을 흡수하고자 하는 세력의 통일의지, 이러한 구체적 통일의 과정을 귀납의 과정없이 추상화 시켜버린 감성적인 통일주의, 같은 통일을 말하고 있지만 서로가 만나는 지점은 한반도라는 물리적 땅 말고는 없습니다. 이때는 휴전선이 아닌 새로운 전선이 형성될 것입니다.
마치 발톱을 숨긴채 어깨동무 하고 있는 이들과 같습니다. 이들 중 하나는 발톱조차 없습니다. 감성적 통일론자들 말입니다.
이들은 승자의 숨겨진 발톱이 드러나 그들의 목에서 어른거릴 때야 비굴한 웃움을 지으며 원래 나는 너희들 편이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통일된 자본주의 한국은 아마도 만만한 북한의 위협이 아닌 세계의 거대국이 되어버린 그리고 중화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드러내며 광적으로 내달리는 '폭주기관차'와 같은 중국의 위협을 이야기 하며 다른 고통으로 우리들을 안내하게 될 것입니다.
분단으로 만들어진 가족의 고통을 이야기 하지만 이 속에서 우리들은 용산참사와 같은 새로운 가족의 헤어짐을 목도할 지도 모릅니다.
통일은 우리들이 쫒겨난 '에덴의 동쪽'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선과 악의 의미를 알아버린 이상 그 곳에 돌아간다 하더라도 예전의 에덴은 없을 것입니다.
고통스럽지만 우리가 가야할 땅은 카인이 갔던 고통의 놋일 지도 모릅니다.
쫒겨났지만 이 땅이 우리들이 기거해야 할 곳일 것입니다. 그속에서 에녹과 셋을 낳고 그 자손들로 하여금 번성케 하여야 할 것입니다.
자본의 편집증적 과정인 세계화 속에서 소위 민족의 통일이 무슨 의미일까를 분열증 적으로 생각해 보면 좋을 듯 합니다.
통일과 분단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고 분열-되기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분단이 남북한의 전체주의와 강대국의 사회.군사적 개입을 가져오고 있으며 이것이 남북한 민중의 고통의 한 부분을 규정하고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 통일을 통하여 또 다른 강력한 국가를 목표로 한다면, 더군다나 시대적 유령인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측면에서 배타적인 민족성을 강화하는 경향으로 나타난다면 이것은 억압과 고통의 전이일 뿐이지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길은 아닙니다.
통일의식은 혼재되어 있습니다.
통일운동을 주도하는 세력의 통일관과 자본주의 사회로 북한을 흡수하고자 하는 세력의 통일의지, 이러한 구체적 통일의 과정을 귀납의 과정없이 추상화 시켜버린 감성적인 통일주의, 같은 통일을 말하고 있지만 서로가 만나는 지점은 한반도라는 물리적 땅 말고는 없습니다. 이때는 휴전선이 아닌 새로운 전선이 형성될 것입니다.
마치 발톱을 숨긴채 어깨동무 하고 있는 이들과 같습니다. 이들 중 하나는 발톱조차 없습니다. 감성적 통일론자들 말입니다.
이들은 승자의 숨겨진 발톱이 드러나 그들의 목에서 어른거릴 때야 비굴한 웃움을 지으며 원래 나는 너희들 편이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통일된 자본주의 한국은 아마도 만만한 북한의 위협이 아닌 세계의 거대국이 되어버린 그리고 중화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드러내며 광적으로 내달리는 '폭주기관차'와 같은 중국의 위협을 이야기 하며 다른 고통으로 우리들을 안내하게 될 것입니다.
분단으로 만들어진 가족의 고통을 이야기 하지만 이 속에서 우리들은 용산참사와 같은 새로운 가족의 헤어짐을 목도할 지도 모릅니다.
통일은 우리들이 쫒겨난 '에덴의 동쪽'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선과 악의 의미를 알아버린 이상 그 곳에 돌아간다 하더라도 예전의 에덴은 없을 것입니다.
고통스럽지만 우리가 가야할 땅은 카인이 갔던 고통의 놋일 지도 모릅니다.
쫒겨났지만 이 땅이 우리들이 기거해야 할 곳일 것입니다. 그속에서 에녹과 셋을 낳고 그 자손들로 하여금 번성케 하여야 할 것입니다.
자본의 편집증적 과정인 세계화 속에서 소위 민족의 통일이 무슨 의미일까를 분열증 적으로 생각해 보면 좋을 듯 합니다.
통일과 분단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고 분열-되기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2009.11.12 23:35:48
첨언하면, 남북한 사람들을 통털어서 과연 온전한 목적에서의 통일을 소망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정치인은 정치판을 생각할 것입니다. 기업가와 장사꾼은 이해타산적으로 사업과 돈벌이를 먼저 떠올릴 것입니다. 이산가족이 되신 이들은 불과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생애 마지막 소원을 풀어보기를 꿈꾸고 있을 것입니다(그러나 잠깐의 감격 뒤에는 곧 그 분들은 모두 세상을 뜨게 될 것이고 혼란과 부담이 흔적처럼 남겨지겠지요). 또한 윗 글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민족주의자와 국가주의자는 더 크고 강하게 되는 것을 기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과연 얼마나 우리에게 궁극적인 가치로 승화될 것인지에 관한 의구심은, 적어도 예수님의 크신 가르침을 깨달은 기독교 지성이라면 그러한 종류의 희망과 바램들이 우리에게 절대로 궁극적인 가치로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파악한바 복음서 어느 곳에도 예수님께서 앞의 이러한 관점으로 말씀하셨던 적이 없는 것 같으니까요.
통일의 진정한 합목적성은, 다름아니라 "북한 민중들의 고통에서의 구제" 오로지 그거 하나에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유적인 말씀을 원용하면, "그 때와 그 시는 아무도 모를 것이니..."
저는 90년대 초에 주변 사람들을 향해 감히 철없는 헛소리를 하고 다닌 적이 있었으니, 바로 "아마도 향후 10년 내에 통일이 될 것 같다"라는,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가소로운 헛소리였습니다. 지금 저 스스로가 "그 때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내가 그토록 헛소리를 했다니, 내가 무슨 계시라도 받은 선지자라고..."라고 (신앙 양심상으로)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물론 다른 혹자가 그걸 가지고 지금 저를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말입니다.)
한 때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통일문제에 관한 유일무이한 판단력과 소양을 가진 사람이라고 믿고 김대중 씨에게 기대를 걸기도 했지만 (하나님이 하시지 않는데)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결론으로, 남.북 통일은 그게 언제 어느 때가 되었든 간에,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필요하다고 느끼실 때, 그 어떤 누그를 움직이시든 혹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어떠한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이루어지도록 만들어 주실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렇게 여기고 기도하면서 기다려야 하지 않을런지, 아마도 그게 신앙인의 올바른 사고 자세가 아닐런지 생각됩니다.
정치인은 정치판을 생각할 것입니다. 기업가와 장사꾼은 이해타산적으로 사업과 돈벌이를 먼저 떠올릴 것입니다. 이산가족이 되신 이들은 불과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생애 마지막 소원을 풀어보기를 꿈꾸고 있을 것입니다(그러나 잠깐의 감격 뒤에는 곧 그 분들은 모두 세상을 뜨게 될 것이고 혼란과 부담이 흔적처럼 남겨지겠지요). 또한 윗 글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민족주의자와 국가주의자는 더 크고 강하게 되는 것을 기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과연 얼마나 우리에게 궁극적인 가치로 승화될 것인지에 관한 의구심은, 적어도 예수님의 크신 가르침을 깨달은 기독교 지성이라면 그러한 종류의 희망과 바램들이 우리에게 절대로 궁극적인 가치로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파악한바 복음서 어느 곳에도 예수님께서 앞의 이러한 관점으로 말씀하셨던 적이 없는 것 같으니까요.
통일의 진정한 합목적성은, 다름아니라 "북한 민중들의 고통에서의 구제" 오로지 그거 하나에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유적인 말씀을 원용하면, "그 때와 그 시는 아무도 모를 것이니..."
저는 90년대 초에 주변 사람들을 향해 감히 철없는 헛소리를 하고 다닌 적이 있었으니, 바로 "아마도 향후 10년 내에 통일이 될 것 같다"라는,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가소로운 헛소리였습니다. 지금 저 스스로가 "그 때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내가 그토록 헛소리를 했다니, 내가 무슨 계시라도 받은 선지자라고..."라고 (신앙 양심상으로)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물론 다른 혹자가 그걸 가지고 지금 저를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말입니다.)
한 때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통일문제에 관한 유일무이한 판단력과 소양을 가진 사람이라고 믿고 김대중 씨에게 기대를 걸기도 했지만 (하나님이 하시지 않는데)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결론으로, 남.북 통일은 그게 언제 어느 때가 되었든 간에,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필요하다고 느끼실 때, 그 어떤 누그를 움직이시든 혹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어떠한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이루어지도록 만들어 주실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렇게 여기고 기도하면서 기다려야 하지 않을런지, 아마도 그게 신앙인의 올바른 사고 자세가 아닐런지 생각됩니다.
2009.11.14 00:37:04

음~
'북한 민중들의 고통에서의 구제'
저는 이 의미를 남한사람들의 외부적 관점이 아니라 북한민중의 의지 내부에서 사고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러한 '고통'으로 벗어나려는 내재적 의지는 그들-북한민중-속에서 생성되는 것만이 미래의 시간적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그들을 위하여 그들의 비난을 감수하며 십자가를 질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외부의 억압적 힘을 통하여 체제를 붕괴시키는 것은 남한의 파괴적 자본주의에 북한을 동일화 시키는 과정일 뿐입니다.
북의 민중을 고통에서 해방시키려는 '숭고한 의지'와는 무관하게 북한의 민중은 이러한 의도를 자신들의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반동적 행위'로 여길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대중들이 히틀러를 지지했던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그것은 나치에 의해 대중들이 속은 것이 아니라 대중들이 그것을 지지하고 열광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정신분석가인 '라이히'가 <파시즘의 대중심리>라는 책에서 고민했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역시 북한 민중들과 북한 권력의 관계는 속고 속이는 것이 아니라 지지하고 지배하는 사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억압에 길든 '욕망'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체주의적인 북한식 사회주의를 통하여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마 그것은 '지구상 유일하게 미국에 맞서는 국가' '이러한 국가의 구성원인 세상을 뒤바꿀 주체'에 대한 '욕망'일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주체사회의 자긍심으로 현재화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욕망'과 내재적 의미에서 동일하지만 이 '욕망'은 다른 '배치'를 통하여 자본주의에 사는 우리들의 욕망과는 다르게 '계열화'되어 있습니다.
이 '욕망'속에서 우리들은 '아밀리아'의 가족을 파괴시키는 <성>의 주민들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기에 스스로 이러한 '욕망의 배치' 의 변환을 통해서만 벗어나는 '인내하는 고통'이 미래의 시간적 의미를 지닐 것입니다..
미션의 '가브리엘'신부 이전의 선교사가 되지 말고 십자가를 지는 예수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북한 민중들의 고통에서의 구제'
저는 이 의미를 남한사람들의 외부적 관점이 아니라 북한민중의 의지 내부에서 사고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러한 '고통'으로 벗어나려는 내재적 의지는 그들-북한민중-속에서 생성되는 것만이 미래의 시간적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그들을 위하여 그들의 비난을 감수하며 십자가를 질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외부의 억압적 힘을 통하여 체제를 붕괴시키는 것은 남한의 파괴적 자본주의에 북한을 동일화 시키는 과정일 뿐입니다.
북의 민중을 고통에서 해방시키려는 '숭고한 의지'와는 무관하게 북한의 민중은 이러한 의도를 자신들의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반동적 행위'로 여길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대중들이 히틀러를 지지했던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그것은 나치에 의해 대중들이 속은 것이 아니라 대중들이 그것을 지지하고 열광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정신분석가인 '라이히'가 <파시즘의 대중심리>라는 책에서 고민했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역시 북한 민중들과 북한 권력의 관계는 속고 속이는 것이 아니라 지지하고 지배하는 사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억압에 길든 '욕망'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체주의적인 북한식 사회주의를 통하여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마 그것은 '지구상 유일하게 미국에 맞서는 국가' '이러한 국가의 구성원인 세상을 뒤바꿀 주체'에 대한 '욕망'일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주체사회의 자긍심으로 현재화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욕망'과 내재적 의미에서 동일하지만 이 '욕망'은 다른 '배치'를 통하여 자본주의에 사는 우리들의 욕망과는 다르게 '계열화'되어 있습니다.
이 '욕망'속에서 우리들은 '아밀리아'의 가족을 파괴시키는 <성>의 주민들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기에 스스로 이러한 '욕망의 배치' 의 변환을 통해서만 벗어나는 '인내하는 고통'이 미래의 시간적 의미를 지닐 것입니다..
미션의 '가브리엘'신부 이전의 선교사가 되지 말고 십자가를 지는 예수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언급하신 생산성 위주의 발전으로 야기된 수많은 문제들과
자본주의의 궁극적인 결과에 대해서 겪어보지는 않았지만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잘 모르지만 그게 바로 지옥일까요.. 겁나네요 ㅎㅎ
통일의 문제는 잘못된 것을 올바로 돌려놓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래에 들어서 모든것이 예전보다도 더욱 심하게 돈위주로 생각하게 되다보니
언급하신대로 통일이 도대체 내가 사는데 무슨 필요냐 돈만 더들지 않겠냐 하시지만
저는 스스로 인식하나 벗을 수 없는 내재된 폭력들이
분단된 조국이라는 현실에서 더욱 강화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