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 <열린 토론실>입니다. 다비안들의 부담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채>와는 달리, 보다 진지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나 주제를 나누고 싶은 분들을 위한 게시판입니다. 가급적 예의를 갖추시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대화는 다비안을 비롯한 여러 네티즌들의 온라인 상에서의 자유로운 것이기에 그 방향과 정체성이 반드시 다비아와 일치하지는 않음을 밝혀둡니다.
글 수 253
기독교라고 불리우는 이름의 종교안에는 참으로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천주교라고 불리우는 구교와 개신교라고 불리는 신교, 그 중간에 위치하는 성공회(?) 등 등
구교도 바티칸 공회를 중심한 서방교회와 그리스정교회와 러시아정교회의 동방교회 등으로 나누어 볼 수도 있고,
개신교에는 너무 많이 나누어져 있어 다 헤아릴 수도 없는데다, 이단으로 분류되는 것만도 많이 있다.
도대체 내가 믿는 하나님은 유대교의 야훼, 이슬람교의 알라, 천주교의 하느님과 어떻게 다르고, 또 예수는 어느 기독교에 속하신 분이신가? 어디에 속하신 분이길래 서로 자기가 맞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믿는 다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정말 궁금하다.
내가 믿기는 믿는건가???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6-05 08:23)
천주교라고 불리우는 구교와 개신교라고 불리는 신교, 그 중간에 위치하는 성공회(?) 등 등
구교도 바티칸 공회를 중심한 서방교회와 그리스정교회와 러시아정교회의 동방교회 등으로 나누어 볼 수도 있고,
개신교에는 너무 많이 나누어져 있어 다 헤아릴 수도 없는데다, 이단으로 분류되는 것만도 많이 있다.
도대체 내가 믿는 하나님은 유대교의 야훼, 이슬람교의 알라, 천주교의 하느님과 어떻게 다르고, 또 예수는 어느 기독교에 속하신 분이신가? 어디에 속하신 분이길래 서로 자기가 맞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믿는 다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정말 궁금하다.
내가 믿기는 믿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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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04 17:22:07
참으로 친절한 설명 감사합니다.
제가 던진 질문은 화두입니다.
일독이 아니라 이미 수독을 했거든요.
제가 던진 질문이 어떠한 의미에서 던진 화두인지 음미해서 봐 주시면...
제가 던진 질문은 화두입니다.
일독이 아니라 이미 수독을 했거든요.
제가 던진 질문이 어떠한 의미에서 던진 화두인지 음미해서 봐 주시면...
2007.06.04 17:34:55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고민이 담긴 글 감사한 마음으로 잘 읽었습니다.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간의 중간에 위치하는 성공회라고 하셨는데, 성공회는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간의 장점을 포용하는 중용의 입장을 취합니다. 하지만 전례는 가톨릭이고, 교리는 개신교이거나 심지어는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때문에 널리 알려진 오해인 가톨릭과 큰 차이가 없고 헨리 8세가 결혼하려고 만든 종교라는 인식은 분명한 오햅니다. 성공회는 영국교회 고유의 전례와 신앙 그리고 영국 종교개혁의 역사적인 신앙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혁된 가톨릭교회(Reformed Catholoic Church, 개혁된 보편적인 교회), 거룩한 공교회(聖公會), 개혁적이면서도 가톨릭적인(보편적인) 교회라고 부릅니다.
하느님이라는 호칭을 언급하셨는데, 하느님은 로마 가톨릭외에도 성공회와 정교회에서도 신의 호칭으로 사용합니다. 이길용 선생님이 전에 언급하신 것처럼 하느님과 하나님은 하늘님에서 파생된 단어라는 점에서 같은 분입니다. 이 호칭문제로 개신교 형제들과 논쟁을 벌일때가 있어서 답답할때가 있는데, 절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느님처럼 하늘+님입니다. 단지 평안도에서 하늘님을 하나님라고 불러서 호칭으로 굳어진 것 뿐이죠.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간의 중간에 위치하는 성공회라고 하셨는데, 성공회는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간의 장점을 포용하는 중용의 입장을 취합니다. 하지만 전례는 가톨릭이고, 교리는 개신교이거나 심지어는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때문에 널리 알려진 오해인 가톨릭과 큰 차이가 없고 헨리 8세가 결혼하려고 만든 종교라는 인식은 분명한 오햅니다. 성공회는 영국교회 고유의 전례와 신앙 그리고 영국 종교개혁의 역사적인 신앙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혁된 가톨릭교회(Reformed Catholoic Church, 개혁된 보편적인 교회), 거룩한 공교회(聖公會), 개혁적이면서도 가톨릭적인(보편적인) 교회라고 부릅니다.
하느님이라는 호칭을 언급하셨는데, 하느님은 로마 가톨릭외에도 성공회와 정교회에서도 신의 호칭으로 사용합니다. 이길용 선생님이 전에 언급하신 것처럼 하느님과 하나님은 하늘님에서 파생된 단어라는 점에서 같은 분입니다. 이 호칭문제로 개신교 형제들과 논쟁을 벌일때가 있어서 답답할때가 있는데, 절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느님처럼 하늘+님입니다. 단지 평안도에서 하늘님을 하나님라고 불러서 호칭으로 굳어진 것 뿐이죠.
2007.06.04 17:49:14
바우로님 감솨!
하느님과 하나님의 호칭으로서의 차이를 말하는게 아니라는 것은 아시죠?
대상으로서의 차이를 말하는 겁니다. 본질적 차이의 有無를 묻는 질문이지요.
사실 저는 카톨릭이나 성공회 등에 대해서는 잘 모름을 고백합니다. (상식수준에 머무름을 안타깝게 생각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이 질문이 시작된 이유는
제가 무명재님의 역사적 예수관을 꺼집어내고 싶어서 시작된 것일껄요???
하느님과 하나님의 호칭으로서의 차이를 말하는게 아니라는 것은 아시죠?
대상으로서의 차이를 말하는 겁니다. 본질적 차이의 有無를 묻는 질문이지요.
사실 저는 카톨릭이나 성공회 등에 대해서는 잘 모름을 고백합니다. (상식수준에 머무름을 안타깝게 생각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이 질문이 시작된 이유는
제가 무명재님의 역사적 예수관을 꺼집어내고 싶어서 시작된 것일껄요???
2007.06.04 17:50:32
올리브나무님, 물론 저도 호칭가지고 말하는게 아니에요..그냥 하느님과 하나님은 다르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어서 저도 모르게 장광설을 늘어놓은 겁니다.^^;;; 저도 가톨릭은 잘 몰라요. 단지 삼촌과 이모가 가톨릭 신자라서 그분들에게 조금씩 배우는 거죠..제가 신앙생활하는 성공회도 신자 맞나 싶을 정도로 잘 모르는 부분이 더 많은 걸요.
2007.06.04 18:23:24
위에서 무명재님이 거론하신 현대신학의 거장인 칼 라아너에 대해 한 번 살펴볼까요?
(연세대학교 교목이신 한인철교수님의 종교다원주의에서 인용한 내용입니다.)
칼 라아너의 "익명의 기독교인 이론"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타 종교와의 대화의 유형은 포괄주의로 칭할 수 있다.
라아너는 바르트의 계시/종교의 이분법이 불가피하게 배타주의를 도출한다는 점에 유념하였고, 이를 극복하려는 라아너의 기본 구상은 계시의 보편화이다.
라아너는 우선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자기계시라는 점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기계시는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 속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고 그 가능성의 폭을 넓힌다.
다른 종교 안에서의 이러한 계시의 가능성을 라아너는 "시원적 계시"(primeval!! revelation)라고 칭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라아너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느님의 계시와 타종교 안에서의 하느님의 계시를 이름만 다른 동일한 계시로 간주하는 것은 아니다.
라아너에 따르면, 동일한 계시의 가능성이 각 종교의 창시자들을 통해 "명시화되고(explicit) 개념화되고(conceptualize) 주제화(thematize)"되는 정도는 서로 다르다.
문제는 어느 종교에서 동일한 가능성으로서의 계시가 가장 완전하게 명시화되고 개념화되고 주제화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라아너는, "실질적이고도 참된, 그리고 초자연적인 계시의 역사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분,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완성"될 수 있으며, 이러한 그리스도는 사실상 "절대적인 구원자"로 불리워 마땅하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보면, 계시를 보편화한 라아너의 구상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느님의 계시의 절대성을 타종교와의 비교를 통해 더욱 강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라아너는 계시/종교의 이분법에서 계시의 보편화로 나아감으로써 배타주의를 극복하긴 했지만, 계시의 가능성이 현실화한 정도에 있어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를 완성으로 이해함으로써, 결국은 계시의 완성/미완성이라는 새로운 진화론적 이분법을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다수 한국의 개신교는 바로 포괄(포용)적인 입장마저도 수용하지 못하고 배타주의를 고수하고 있다.
(연세대학교 교목이신 한인철교수님의 종교다원주의에서 인용한 내용입니다.)
칼 라아너의 "익명의 기독교인 이론"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타 종교와의 대화의 유형은 포괄주의로 칭할 수 있다.
라아너는 바르트의 계시/종교의 이분법이 불가피하게 배타주의를 도출한다는 점에 유념하였고, 이를 극복하려는 라아너의 기본 구상은 계시의 보편화이다.
라아너는 우선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자기계시라는 점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기계시는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 속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고 그 가능성의 폭을 넓힌다.
다른 종교 안에서의 이러한 계시의 가능성을 라아너는 "시원적 계시"(primeval!! revelation)라고 칭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라아너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느님의 계시와 타종교 안에서의 하느님의 계시를 이름만 다른 동일한 계시로 간주하는 것은 아니다.
라아너에 따르면, 동일한 계시의 가능성이 각 종교의 창시자들을 통해 "명시화되고(explicit) 개념화되고(conceptualize) 주제화(thematize)"되는 정도는 서로 다르다.
문제는 어느 종교에서 동일한 가능성으로서의 계시가 가장 완전하게 명시화되고 개념화되고 주제화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라아너는, "실질적이고도 참된, 그리고 초자연적인 계시의 역사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분,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완성"될 수 있으며, 이러한 그리스도는 사실상 "절대적인 구원자"로 불리워 마땅하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보면, 계시를 보편화한 라아너의 구상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느님의 계시의 절대성을 타종교와의 비교를 통해 더욱 강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라아너는 계시/종교의 이분법에서 계시의 보편화로 나아감으로써 배타주의를 극복하긴 했지만, 계시의 가능성이 현실화한 정도에 있어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를 완성으로 이해함으로써, 결국은 계시의 완성/미완성이라는 새로운 진화론적 이분법을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다수 한국의 개신교는 바로 포괄(포용)적인 입장마저도 수용하지 못하고 배타주의를 고수하고 있다.
2007.06.04 19:03:05
그리스도교 안에서의 정통 교파들 간의 문제는,
그 교파들이 공유하는, 신조(사도신경과 니체아신경 등)를 필두로 하는,
그리스도교 보편 신앙과,
역시 공유하는 그리스도교 전통,
각자 차이가 나는 개별 교리와 신학, 전통 등을 고찰하고, 경험, 이해하면서 진도를 나갈 바이지,
종교다원주의 내지 종교신학과는 전혀 다른 사안입니다.
라너니, 캅이니, 니터니, 여기서는 언급할 필요가 없지요.
종교신학의 입장들 가운데, 계시의 보편성을 타 종교에까지 확장시켜 보는 시각과,
그리스도교 안에서, 그리스도교 계시의 보편성은,
별개 선상에서 취급해야 옳다고 봅니다.
똑같이 예수를 구주로 믿고, 사도신경과 니체아신경에 준해, 사도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을 고백하는데,
이 대목에서, 왜, 종교를 초월한 계시의 보편성이니를 굳이 얘기해야겠습니까?
신학교의 교육 과정에서도, 종교신학과 에큐메닉스는 전혀 별개의 과목입니다.
그 교파들이 공유하는, 신조(사도신경과 니체아신경 등)를 필두로 하는,
그리스도교 보편 신앙과,
역시 공유하는 그리스도교 전통,
각자 차이가 나는 개별 교리와 신학, 전통 등을 고찰하고, 경험, 이해하면서 진도를 나갈 바이지,
종교다원주의 내지 종교신학과는 전혀 다른 사안입니다.
라너니, 캅이니, 니터니, 여기서는 언급할 필요가 없지요.
종교신학의 입장들 가운데, 계시의 보편성을 타 종교에까지 확장시켜 보는 시각과,
그리스도교 안에서, 그리스도교 계시의 보편성은,
별개 선상에서 취급해야 옳다고 봅니다.
똑같이 예수를 구주로 믿고, 사도신경과 니체아신경에 준해, 사도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을 고백하는데,
이 대목에서, 왜, 종교를 초월한 계시의 보편성이니를 굳이 얘기해야겠습니까?
신학교의 교육 과정에서도, 종교신학과 에큐메닉스는 전혀 별개의 과목입니다.
2007.06.04 19:39:34
물론 제가 칼 라아너의 입장을 따른 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똑같이 예수를 구주로 믿고, 사도신경과 니체아신경에 준해, 사도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을 고백하는데,
이 대목에서, 왜, 종교를 초월한 계시의 보편성이니를 굳이 얘기해야겠습니까?"
⇒ 분명 똑같지 않은 기독교가 엄연히 존재하기에 하는 이야기입니다.
무명재님의 그간 글(찾아보지를 못해서 따오기를 못했습니다.)에서 사도계승권과 사도적 전승을 강조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사도신경과 니체아신경, 사도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을 고백하지 않으면 기독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즉 역사적 예수는 알 수가 없으므로 사도적 전승을 따라야한다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비록 주류 기독교는 아닐찌라도 역시 역사적예수를 통해 기독교를 회복해야한다는 입장도 분명히 존재하는데 님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것처럼 알고 있는 지식을 전개해 나가더군요.(이건 저의 느낌이므로 아닐 수도 있음)
1919년 칼 바르트가 로마서 제 2판을 낸 이후 지금까지의 서구 기독교계는 크게 보아 신정통주의의 영향권 속에 있고, 신정통주의가 영향을 미친 가장 중요한 점은, 기독교의 기초는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라는 주장입니다.
신정통주의는 19세기 역사적 예수 연구를 학문적으로는 실패한 것이요, 신학적으로는 부당한 것으로 판단 내렸고, 그에 따라 초대교회의 그리스도 케리그마에 기독교의 기초를 두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기독교의 기초를 역사적 예수에 두지않고 그리스도 케리그마에 둘 수 밖에 없었는가?
기독교의 기초를 역사적 예수에 두고 타종교와 대화하게 되면, 기독교가 상대주의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게 된 점입니다.
19세기 유럽의 기독교는 그리스도 케리그마를 포기하고 역사적 예수--도덕적으로 탁월한 모범적인 스승--에 기초하여 새로운 기독교를 확립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기독교는 지금까지 정통주의를 통해 고수해온 배타적인 절대성을 포기해야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배타성은 그리스도 케리그마, 혹은 그의 보다 발전된 니케아-칼케돈의 기독론에 기초를 둘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된 것이지요..
20세기 초 바르트를 중심한 신정통주의가 다시 그리스도 케리그마와 니케아-칼케돈의 기독론을 기독교의 기초로 재확립하려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상대주의의 위험으로부터 기독교를 구출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제가 왜 자꾸 이 이야기를 하느냐하면(천주교는 잘 모르니까 논외로 합니다.)
조헌정 목사님의 설교비평이후에 논의된 글들을 읽으면서
두 입장이 여기에서 갈라진다고 나름대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절대성을 지키기위한 신정통주의는 결국 역사적 예수의 모형을 버리고, 케리그마의 예수그리스도를 선택했고, 속칭 진보라고 불리는 기독교의 한 부류는 역사적 예수를 삶의 모형으로 선택한 데서 오는 차이가 아닐까 생각한 것입니다.
단순한 성서비평적 입장에서만이 아니라
그들이 믿는 하나님, 그들이 믿는 예수님이 과연 같을까? 하는 생각으로 시작하다 보니, 그 끝을 나름대로 신앙의 기초가 어디에 있는가가 다르다고 판단되었기에 화두를 던진 것이지요.
이만 줄임...
"똑같이 예수를 구주로 믿고, 사도신경과 니체아신경에 준해, 사도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을 고백하는데,
이 대목에서, 왜, 종교를 초월한 계시의 보편성이니를 굳이 얘기해야겠습니까?"
⇒ 분명 똑같지 않은 기독교가 엄연히 존재하기에 하는 이야기입니다.
무명재님의 그간 글(찾아보지를 못해서 따오기를 못했습니다.)에서 사도계승권과 사도적 전승을 강조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사도신경과 니체아신경, 사도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을 고백하지 않으면 기독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즉 역사적 예수는 알 수가 없으므로 사도적 전승을 따라야한다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비록 주류 기독교는 아닐찌라도 역시 역사적예수를 통해 기독교를 회복해야한다는 입장도 분명히 존재하는데 님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것처럼 알고 있는 지식을 전개해 나가더군요.(이건 저의 느낌이므로 아닐 수도 있음)
1919년 칼 바르트가 로마서 제 2판을 낸 이후 지금까지의 서구 기독교계는 크게 보아 신정통주의의 영향권 속에 있고, 신정통주의가 영향을 미친 가장 중요한 점은, 기독교의 기초는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라는 주장입니다.
신정통주의는 19세기 역사적 예수 연구를 학문적으로는 실패한 것이요, 신학적으로는 부당한 것으로 판단 내렸고, 그에 따라 초대교회의 그리스도 케리그마에 기독교의 기초를 두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기독교의 기초를 역사적 예수에 두지않고 그리스도 케리그마에 둘 수 밖에 없었는가?
기독교의 기초를 역사적 예수에 두고 타종교와 대화하게 되면, 기독교가 상대주의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게 된 점입니다.
19세기 유럽의 기독교는 그리스도 케리그마를 포기하고 역사적 예수--도덕적으로 탁월한 모범적인 스승--에 기초하여 새로운 기독교를 확립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기독교는 지금까지 정통주의를 통해 고수해온 배타적인 절대성을 포기해야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배타성은 그리스도 케리그마, 혹은 그의 보다 발전된 니케아-칼케돈의 기독론에 기초를 둘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된 것이지요..
20세기 초 바르트를 중심한 신정통주의가 다시 그리스도 케리그마와 니케아-칼케돈의 기독론을 기독교의 기초로 재확립하려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상대주의의 위험으로부터 기독교를 구출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제가 왜 자꾸 이 이야기를 하느냐하면(천주교는 잘 모르니까 논외로 합니다.)
조헌정 목사님의 설교비평이후에 논의된 글들을 읽으면서
두 입장이 여기에서 갈라진다고 나름대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절대성을 지키기위한 신정통주의는 결국 역사적 예수의 모형을 버리고, 케리그마의 예수그리스도를 선택했고, 속칭 진보라고 불리는 기독교의 한 부류는 역사적 예수를 삶의 모형으로 선택한 데서 오는 차이가 아닐까 생각한 것입니다.
단순한 성서비평적 입장에서만이 아니라
그들이 믿는 하나님, 그들이 믿는 예수님이 과연 같을까? 하는 생각으로 시작하다 보니, 그 끝을 나름대로 신앙의 기초가 어디에 있는가가 다르다고 판단되었기에 화두를 던진 것이지요.
이만 줄임...
2007.06.04 19:55:02
사도신경이 애초 무엇인지 아십니까?
세례 문답입니다.
올리브나무님께서는, 사도신경의 열두 조항에 따라 세례를 받지 않으셨나요?
그냥 건성으로 세례 문답을 하셨습니까?
이단이 아니라면, 어느 교파건, 예외가 없습니다.
그래서, 공통분모에 있어서는 같다고 말씀드리는 건데,
공유하는 신앙의 핵심과, 개별 전통을 구분지어 설명드렸는데도, 혼동하시는 건지요?
저는 가톨릭 모델의 핵심 특징인 사도계승권에 관한 설명을 드렸을 뿐이지,
사도계승권이 교회 및 그리스도교의 본질이라고, 개신교에까지 강요한 적이 없습니다.
(오독하지 마십시오)
제가 모든 것을 안다고 말씀드린 적도 없고,
그렇게 오만한 태도를 지은 적도 없습니다.
올리브나무님의 느낌 맞으십니다. 따라서, 아닙니다.
저는 다만, 역사적 예수에 주목하고, 그것을 준거로 삼으려는 실증주의가,
실은, 오히려 주관성에 함몰되기 십상이며,
그리스도교란 역사적 예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증언자인 사도들의 증언에서부터, 그 신앙을 계승해 온,
전통적 측면이 크므로,
이 역사성과 보편성을 간과하고 역사적 예수에만 치중할 때,
도리어 그리스도교를 훼손하는 측면이 오히려 크다고 지적해 왔는데,
제 말씀의 본의가 여태껏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건지요?
그리고, 정 목사님의 설교 비평에 대하여,
조 목사님은 동문서답하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세례 문답입니다.
올리브나무님께서는, 사도신경의 열두 조항에 따라 세례를 받지 않으셨나요?
그냥 건성으로 세례 문답을 하셨습니까?
이단이 아니라면, 어느 교파건, 예외가 없습니다.
그래서, 공통분모에 있어서는 같다고 말씀드리는 건데,
공유하는 신앙의 핵심과, 개별 전통을 구분지어 설명드렸는데도, 혼동하시는 건지요?
저는 가톨릭 모델의 핵심 특징인 사도계승권에 관한 설명을 드렸을 뿐이지,
사도계승권이 교회 및 그리스도교의 본질이라고, 개신교에까지 강요한 적이 없습니다.
(오독하지 마십시오)
제가 모든 것을 안다고 말씀드린 적도 없고,
그렇게 오만한 태도를 지은 적도 없습니다.
올리브나무님의 느낌 맞으십니다. 따라서, 아닙니다.
저는 다만, 역사적 예수에 주목하고, 그것을 준거로 삼으려는 실증주의가,
실은, 오히려 주관성에 함몰되기 십상이며,
그리스도교란 역사적 예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증언자인 사도들의 증언에서부터, 그 신앙을 계승해 온,
전통적 측면이 크므로,
이 역사성과 보편성을 간과하고 역사적 예수에만 치중할 때,
도리어 그리스도교를 훼손하는 측면이 오히려 크다고 지적해 왔는데,
제 말씀의 본의가 여태껏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건지요?
그리고, 정 목사님의 설교 비평에 대하여,
조 목사님은 동문서답하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2007.06.04 21:29:53
인사도 제대로 나눗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대화에 끼어드는것이 예의가 아닌줄은 알겠지만
믿음의 형제가 서로의 마음을 열고 교재를 하는데 굳이 세속의 예 에 따를필요가 있겠는가? 라는
생각으로 저도 한 말씀 올려 보겠습니다....
우선 제목에서 언급한 말씀을 보면 분명히 "내가 믿는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었는데
그래서 저도 그 질문을 보고 어떤 좋은 댓글이 있을까 하고 들어와봤는데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언급은 별로 없고 다른 말만 많아서 조금은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목의 질문인 "내가 믿는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것을 중심에 두고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우선 저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왜 궁금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먼저 해보겠습니다..
인류에는 위대한 스승이 많습니다
소크라테스.플라톤.노자.부처.공자.마호멧.....
이분들에 대해 전부를 안다 할수 없고 어찌 보면 조금도 안다 할수 없겠지만
그러나 그분들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속성을 말했다는 것입니다
즉 진리는 "이런것이다"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는 이런것인데 진리안에 있으면 이렇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곧 진리에 대한 설명과 함께 진리를 통해서 어떻게 된다까지를 설명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은 누구길래 진리를 이처럼 완벽하게 설명할수 있단말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그래서 저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궁금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은 누구인가?
내가 믿는 예수님은 진리의 처음이요 끝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직 진리만 믿을 뿐입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성경을 통해 하루하루 깨달으면서....
그렇다면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오겠습니다
진리란 무엇일까? 진리란 무엇일까? 그것이 저도 궁금합니다
다만
진리란 찬송하면서 울고 불고 하는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은 앎니다
진리란 통성기도하면서 고함치는 곳에 있지 않다는 것도 앎니다
진리란 대중을 모아놓고 설교하는 목사의말에 있지 않다는 것도 앎니다
진리란 조금이라도 육의 생각에는 있지 않다는 것도 앎니다
진리란 위대한 교부의 이름을 외우고 ....즘....주의...론....사상...파.....교 등으로
선별하는 자리에 있지 않음도 앎니다
진리란 오직 철저히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때
그 곳으로 부터 나오는 영감의 소리를 들을수 있을때
비로써 진리를 안다 할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곳이 바로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곳이며
곧 내가 예수님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내안에 거하는 곳
바로 그곳에 진리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믿음의 형제가 서로의 마음을 열고 교재를 하는데 굳이 세속의 예 에 따를필요가 있겠는가? 라는
생각으로 저도 한 말씀 올려 보겠습니다....
우선 제목에서 언급한 말씀을 보면 분명히 "내가 믿는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었는데
그래서 저도 그 질문을 보고 어떤 좋은 댓글이 있을까 하고 들어와봤는데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언급은 별로 없고 다른 말만 많아서 조금은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목의 질문인 "내가 믿는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것을 중심에 두고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우선 저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왜 궁금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먼저 해보겠습니다..
인류에는 위대한 스승이 많습니다
소크라테스.플라톤.노자.부처.공자.마호멧.....
이분들에 대해 전부를 안다 할수 없고 어찌 보면 조금도 안다 할수 없겠지만
그러나 그분들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속성을 말했다는 것입니다
즉 진리는 "이런것이다"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는 이런것인데 진리안에 있으면 이렇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곧 진리에 대한 설명과 함께 진리를 통해서 어떻게 된다까지를 설명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은 누구길래 진리를 이처럼 완벽하게 설명할수 있단말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그래서 저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궁금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은 누구인가?
내가 믿는 예수님은 진리의 처음이요 끝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직 진리만 믿을 뿐입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성경을 통해 하루하루 깨달으면서....
그렇다면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오겠습니다
진리란 무엇일까? 진리란 무엇일까? 그것이 저도 궁금합니다
다만
진리란 찬송하면서 울고 불고 하는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은 앎니다
진리란 통성기도하면서 고함치는 곳에 있지 않다는 것도 앎니다
진리란 대중을 모아놓고 설교하는 목사의말에 있지 않다는 것도 앎니다
진리란 조금이라도 육의 생각에는 있지 않다는 것도 앎니다
진리란 위대한 교부의 이름을 외우고 ....즘....주의...론....사상...파.....교 등으로
선별하는 자리에 있지 않음도 앎니다
진리란 오직 철저히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때
그 곳으로 부터 나오는 영감의 소리를 들을수 있을때
비로써 진리를 안다 할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곳이 바로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곳이며
곧 내가 예수님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내안에 거하는 곳
바로 그곳에 진리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2007.06.04 21:41:09
머리도 하나고 몸도 하나이나, 몸이 여럿된 신세니 머리가 좀 아프겠습니다..
교회일치 , 에큐메니칼정신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입니다.
윗글 무심님께 한표 던집니다.
교회일치 , 에큐메니칼정신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입니다.
윗글 무심님께 한표 던집니다.
2007.06.04 21:51:34
과정이라는 개념은 분명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과정에 너무 많이 불필요한 사람의 지식을 넣으므로
지식을 많이 가진자의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권위를 뽐내는 경우가 많음이 걱정이 되고
아울려 과정이라는 명분으로 봉사가 봉사를 이끄는 오류를 범하지 않을까 염려 될뿐입니다..
다만 과정에 너무 많이 불필요한 사람의 지식을 넣으므로
지식을 많이 가진자의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권위를 뽐내는 경우가 많음이 걱정이 되고
아울려 과정이라는 명분으로 봉사가 봉사를 이끄는 오류를 범하지 않을까 염려 될뿐입니다..
2007.06.04 21:52:02
무심님,
마음이 간절하고 갈급하다고,
바늘 허리에 실 매어 쓸 수는 없잖습니까?
과정이 다 있는 겁니다.
누군 무심님 같은 심정이 없어서, 무심님처럼 통감하지 못해서,
구구한 소리 늘어놓았겠습니까?
자기 하느님은 자기가 만나는 겁니다.
제가 아무리, 사도로부터 전하는 예수 증언과,
2천년 동안의 그리스도교 전통이니, 강조한다 쳐도,
그들이 예수님 만나게 해 주는 건 아니거든요?
제가, 또는 다른 분들께서, 이 게시판의 문답에서,
굳이 설교를 할 필요까지는 없잖습니까?
설교를 할 수도 있겠고, 무심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사안을 주고받을 수도 있겠으나,
늘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니며,
예수님과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서는, 무심님 본인께서 직접 발견하셔야 되는 겁니다.
실망하고 자시고 하실 것 없다고 보는데,
실망 운운하시니, 대단히 어리둥절합니다.
마음이 간절하고 갈급하다고,
바늘 허리에 실 매어 쓸 수는 없잖습니까?
과정이 다 있는 겁니다.
누군 무심님 같은 심정이 없어서, 무심님처럼 통감하지 못해서,
구구한 소리 늘어놓았겠습니까?
자기 하느님은 자기가 만나는 겁니다.
제가 아무리, 사도로부터 전하는 예수 증언과,
2천년 동안의 그리스도교 전통이니, 강조한다 쳐도,
그들이 예수님 만나게 해 주는 건 아니거든요?
제가, 또는 다른 분들께서, 이 게시판의 문답에서,
굳이 설교를 할 필요까지는 없잖습니까?
설교를 할 수도 있겠고, 무심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사안을 주고받을 수도 있겠으나,
늘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니며,
예수님과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서는, 무심님 본인께서 직접 발견하셔야 되는 겁니다.
실망하고 자시고 하실 것 없다고 보는데,
실망 운운하시니, 대단히 어리둥절합니다.
2007.06.04 21:53:31
뜬금없는 소리 한 마디.
종교관련 서적이나 사이트에서 논의되는 글들을 보면
진리, 영혼 등등의 추상적 개념들은 참으로 도그마틱하게 표현되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이 가지는 어떠한 개념에 대한 공준이나, 공리가 다르면 (또한 다른만큼이나 확고하면)
귀머거리 낚시 대화가 되죠.
"자네 낚시하러 가나?"
"아니, 난 낚시하러 가네."
"아, 난 또 자네가 낚시하러 가는 줄알았지 뭔가."
진리가 어느 사상이나 책이나, 연구나 지식에 없다는 걸 안 것도 일종의 지식입니다.
지성사는 인류가 진리를 파악하기 위한 위대한 노정이죠.
우리가 고전을 읽는 이유는 (혹은 다른 지성인들의 노작을 읽는 이유는)
내가 어느 순간에 파악한 어떤 종류의 지식이나 개념이
이미 다른 시대, 다른 곳에서 어떤 사람이 이미 생각했고 얘기했으며
그것이 어떻게 논박당하고 비판되었으며
다시 수정되어서 어떠한 방법으로 극복하게되었는지 알려주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유치하다'라는 표현은 (고전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지적 성과물들에서 이미 다듬어지고 정제된,
다시말해 극복되거나 수정된 개념들을 정당하거나 합리적 비판없이
수정전의, 비판되기 전의 개념들을 그대로 답습하는 경우에 적용이 가능한 표현입니다.
다시말해 사고의 무의미한, 쓸데없는 재생산 정도의 의미겠네요.
(여기서 무의미한은 무가치하다라는 표현이 아니라, meaningless의 뜻입니다)
진리라고하는 거창하고 심오한 주제를 말하려면
먼저 진리라는 '것'에 대한, 그리고 진리라는 '말'에 대한 분석과 개념화가 필요합니다.
최소한 목적에 맞는 토론을 위한 범주설정 정도는 먼저 해야하지 않나 하는 말씀입니다.
진리라는 것을 말하면서
자신의 개인적 체험이나, 신념을 얘기만 하고
좀 더 정교한 개념으로 다듬어진 정합설, 대응설, 실용설 등의 기본적 개념조차 말하지 않는다면
조금 곤란하지 않을까 합니다.
종교관련 서적이나 사이트에서 논의되는 글들을 보면
진리, 영혼 등등의 추상적 개념들은 참으로 도그마틱하게 표현되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이 가지는 어떠한 개념에 대한 공준이나, 공리가 다르면 (또한 다른만큼이나 확고하면)
귀머거리 낚시 대화가 되죠.
"자네 낚시하러 가나?"
"아니, 난 낚시하러 가네."
"아, 난 또 자네가 낚시하러 가는 줄알았지 뭔가."
진리가 어느 사상이나 책이나, 연구나 지식에 없다는 걸 안 것도 일종의 지식입니다.
지성사는 인류가 진리를 파악하기 위한 위대한 노정이죠.
우리가 고전을 읽는 이유는 (혹은 다른 지성인들의 노작을 읽는 이유는)
내가 어느 순간에 파악한 어떤 종류의 지식이나 개념이
이미 다른 시대, 다른 곳에서 어떤 사람이 이미 생각했고 얘기했으며
그것이 어떻게 논박당하고 비판되었으며
다시 수정되어서 어떠한 방법으로 극복하게되었는지 알려주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유치하다'라는 표현은 (고전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지적 성과물들에서 이미 다듬어지고 정제된,
다시말해 극복되거나 수정된 개념들을 정당하거나 합리적 비판없이
수정전의, 비판되기 전의 개념들을 그대로 답습하는 경우에 적용이 가능한 표현입니다.
다시말해 사고의 무의미한, 쓸데없는 재생산 정도의 의미겠네요.
(여기서 무의미한은 무가치하다라는 표현이 아니라, meaningless의 뜻입니다)
진리라고하는 거창하고 심오한 주제를 말하려면
먼저 진리라는 '것'에 대한, 그리고 진리라는 '말'에 대한 분석과 개념화가 필요합니다.
최소한 목적에 맞는 토론을 위한 범주설정 정도는 먼저 해야하지 않나 하는 말씀입니다.
진리라는 것을 말하면서
자신의 개인적 체험이나, 신념을 얘기만 하고
좀 더 정교한 개념으로 다듬어진 정합설, 대응설, 실용설 등의 기본적 개념조차 말하지 않는다면
조금 곤란하지 않을까 합니다.
2007.06.04 21:54:04
"불필요"라고 폄하하시는데,
신학 무용론을 말씀하십니까?
저도 비재천학합니다만, 직접 배워 보시고, 사유해 보시면,
그런 말씀 못 하십니다.
감히 고언 드리건대, 경험 없이 함부로 말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식의 나열에서 받는 위화감에 지나지 않는 반응 정도로 생각하겠습니다.
신학 무용론을 말씀하십니까?
저도 비재천학합니다만, 직접 배워 보시고, 사유해 보시면,
그런 말씀 못 하십니다.
감히 고언 드리건대, 경험 없이 함부로 말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식의 나열에서 받는 위화감에 지나지 않는 반응 정도로 생각하겠습니다.
2007.06.04 22:27:13
우리가 로마 귀족이나 그리스 귀족자제들은 아니지만 변론술이라던가, 수사학 정도는 좀 배워야 하지않는가 해서 드린 말씀입니다. 무심님이 하신 말씀은 일종의 소피스트 시대에 횡행했던 회의주의같은데 어차피 변증학이라면 (제가 말씀드린 바의) 유치한 수준에서 '진리'라는 것을 논할 필요는 없지않은가 해서 말이죠.
2007.06.04 22:27:25
야고보 형제여,
나 또한, 가능한한 무신론적이고, 전제의 선입견을 배제한,
엄밀하고 순정한, 치밀한 사유의 자세를,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도 가져야 한다고 믿고 바라지만,
언젠가 이길용 목사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신학 내지 신앙은, 엄밀히 말해서 응용 학문입니다.
순정한 절대 사유, 철학과는 구분할 필요가 있지요.
이미 전제된 계시로서의 준거와, 그것을 수납하는 신앙이라는 전제 아래,
사유를 진행하는, 일종의 변증학입니다.
내가 그대를 사랑해 마지 않는 것은(-.- 닭살~),
바로 이같은 그대의 탈신앙적인(나쁜 의미로서가 아닌) 사유 또한 큰 이유이지만,
그 지적이 과도하게(설명드린, 신학이라는 학문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부적절하다는 겁니다)
가해지는 것도 온당치 않아 보여요.
어쨌든 간에, 야고보님께서 줄곧 제기하시는 문제점은,
그리스도인과 신학도들이 경청하고, 보충해 나가야 되리라 생각합니다.
나 또한, 가능한한 무신론적이고, 전제의 선입견을 배제한,
엄밀하고 순정한, 치밀한 사유의 자세를,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도 가져야 한다고 믿고 바라지만,
언젠가 이길용 목사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신학 내지 신앙은, 엄밀히 말해서 응용 학문입니다.
순정한 절대 사유, 철학과는 구분할 필요가 있지요.
이미 전제된 계시로서의 준거와, 그것을 수납하는 신앙이라는 전제 아래,
사유를 진행하는, 일종의 변증학입니다.
내가 그대를 사랑해 마지 않는 것은(-.- 닭살~),
바로 이같은 그대의 탈신앙적인(나쁜 의미로서가 아닌) 사유 또한 큰 이유이지만,
그 지적이 과도하게(설명드린, 신학이라는 학문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부적절하다는 겁니다)
가해지는 것도 온당치 않아 보여요.
어쨌든 간에, 야고보님께서 줄곧 제기하시는 문제점은,
그리스도인과 신학도들이 경청하고, 보충해 나가야 되리라 생각합니다.
2007.06.04 22:36:42
야고보님!
뜬금 없는 소리 아닙니다.
무심님은 이곳에 오신지 며칠 안 되고
따라서 분위기 파악도 아직 못하신 상태인 것 같네요.
사랑채에 1597번 글 같은 내용을 올리신걸 보면...^^
하실 말씀도 많을테니 지금 좌충우돌 하시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요.
기존 검객들께선 너무 날 세우지 마시고
좀 더 여유있게 노니시기를~^^
운영자님!
일단 이 글은 '쟁토방'으로 모셔야 하지 않을까요?
뜬금 없는 소리 아닙니다.
무심님은 이곳에 오신지 며칠 안 되고
따라서 분위기 파악도 아직 못하신 상태인 것 같네요.
사랑채에 1597번 글 같은 내용을 올리신걸 보면...^^
하실 말씀도 많을테니 지금 좌충우돌 하시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요.
기존 검객들께선 너무 날 세우지 마시고
좀 더 여유있게 노니시기를~^^
운영자님!
일단 이 글은 '쟁토방'으로 모셔야 하지 않을까요?
2007.06.05 04:31:41
저에게 호주에서 가장 좋은 일은 이 세계의 모든 종교들을 직접 볼수 있다는 것 입니다.
64개 민족이 산다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내가 평생 믿어온 기독교 중에도 듣도 보도 못한 것,
교회사 속에만 존재하는 기독교가 있더라는 겁니다.
시리안 정교회에 갔더니 아랍어로 미사를 드리는데
십자가 있는 것만 빼면 기독교인지 아닌지(내 기준에서) 전혀 모르겠더군여.
우리는 200년이지만 그들은 2000년 된 교회입니다.
로마의 기독교 박해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2000년 동안 박해 받으면서 생존한
애급의 콥틱교도 있습니다. 그들의 교황도(가난한) 있고요.
'하나님, 예수' 함부로 내가 잘 아는 사이라고 주장 하지 맙시다.
그 쪽에서 '나는 제를 잘 모르는데..' 하면 쪽 팔리지잖아요.
언제나 "누구신지요?" 하는 자세로 갔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강단에서 목에 힘주고 '이런 것이 하나님, 예수의 뜻이다"고 핏대 세우는
목사님들을 보면 '어쩌면 저렇게 자신이 있을까?'고 불안해집니다.
올리브나무 님이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닐 겁니다.
괜히 올리부 나무 탱자 만들지 말고
예수가 누구인지 같이 고민해 봅시다.
64개 민족이 산다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내가 평생 믿어온 기독교 중에도 듣도 보도 못한 것,
교회사 속에만 존재하는 기독교가 있더라는 겁니다.
시리안 정교회에 갔더니 아랍어로 미사를 드리는데
십자가 있는 것만 빼면 기독교인지 아닌지(내 기준에서) 전혀 모르겠더군여.
우리는 200년이지만 그들은 2000년 된 교회입니다.
로마의 기독교 박해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2000년 동안 박해 받으면서 생존한
애급의 콥틱교도 있습니다. 그들의 교황도(가난한) 있고요.
'하나님, 예수' 함부로 내가 잘 아는 사이라고 주장 하지 맙시다.
그 쪽에서 '나는 제를 잘 모르는데..' 하면 쪽 팔리지잖아요.
언제나 "누구신지요?" 하는 자세로 갔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강단에서 목에 힘주고 '이런 것이 하나님, 예수의 뜻이다"고 핏대 세우는
목사님들을 보면 '어쩌면 저렇게 자신이 있을까?'고 불안해집니다.
올리브나무 님이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닐 겁니다.
괜히 올리부 나무 탱자 만들지 말고
예수가 누구인지 같이 고민해 봅시다.
2007.06.05 06:39:25
예 다들 전부 한 지식 합니다...
하지만 부정할수 없는 전제는 "내가 믿는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에 대한 물음을 요구하고
있는 장소입니다...
이물음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고 남의 말을 교묘하게 학술적으로 역어서 몰아부치기만 하고
있으니 ....
무가치의 소리를 어찌 면하시겠습니까?
단독직입적으로 다시 한번 묻습니다
님들께서 믿는 예수님은 누군가요?
이물음에 대답하기 싫으면 이 페이지에 적당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저는 분명 이 물음에 대한 다른 님들의 대답이 듣고 싶고
또한 솔직한 저의 생각을 표현하고 싶을뿐입니다
지식적.학술적 구분이 그렇게 하고 싶으시면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른 장소>에서 얼마든지 할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님들께서 믿는 예수님은 누구세요?
이점이 정말 궁금할뿐입니다...
하지만 부정할수 없는 전제는 "내가 믿는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에 대한 물음을 요구하고
있는 장소입니다...
이물음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고 남의 말을 교묘하게 학술적으로 역어서 몰아부치기만 하고
있으니 ....
무가치의 소리를 어찌 면하시겠습니까?
단독직입적으로 다시 한번 묻습니다
님들께서 믿는 예수님은 누군가요?
이물음에 대답하기 싫으면 이 페이지에 적당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저는 분명 이 물음에 대한 다른 님들의 대답이 듣고 싶고
또한 솔직한 저의 생각을 표현하고 싶을뿐입니다
지식적.학술적 구분이 그렇게 하고 싶으시면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른 장소>에서 얼마든지 할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님들께서 믿는 예수님은 누구세요?
이점이 정말 궁금할뿐입니다...
2007.06.05 06:43:50
sydney님의 글을 보고도 아직도 깨달지 못하고 아무 소리가 없길래
저가 한마디 더 올려 봤습니다..
따지는 것은 미룻고 예수님이 누구인지 말좀해 주세요
지식이 풍부한 분들께 묻습니다...
저가 한마디 더 올려 봤습니다..
따지는 것은 미룻고 예수님이 누구인지 말좀해 주세요
지식이 풍부한 분들께 묻습니다...
2007.06.05 10:17:42
무심님, 자신이 이미 답을 가지고 남에게 묻는 것은 "어떤 의도"가 있는 행위로 밖에 보이질 않습니다.
지식에 대한 회의론을 펼치시다가 왜 다시 지식많은 분들께 예수님이 누구이길 묻습니까?
지식을 버려두고 예수를 직관적이고 실존적으로 느껴야 한다는 무심님의 의중을
은연 중에 다른 분들의 입을 통해 듣고 싶으신 것은 아닌지요?
물론 신앙공동체는 비슷한 심리를 가지고 모인 군집입니다.
자신이 믿는 바의 것을 다른 사람을 통해 공유하고, 그 공유에서오는 교제와 집단소속감에 안락감을 누리죠.
하지만 거기서 나오는,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은, 신앙간증의 형태 정도로 밖에 구현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집단의 결속력을 더욱 강화해주고, 유대의 끈을 더욱 조여줄 수는 있지만
메타적 성찰이나, 객관적 사유의 길은 보장 못합니다.
따라서 저는 올리브 나무님의 예수가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저의 신관에 대한 대답보다는
그런 것을 논의하기에 앞서 필요한 어떤 틀을 마련해야하지 않나하는 의도에서 글을 올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개인적으로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무심님과 같은 답변을 가진 글들로서 얻는 긍정적인 효과는 상기한 정도 밖에 되질 않는다고 생각하구요.
혹여라도 다른 관점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긍정적 생산을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무심님이 다른 분들께 요구하는 대답은 무심님이 이미 상정해 놓으셨기 때문이죠.
어떤 근거로 대답이 상정되어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냐라고 물으신다면
지식론에 관한 저나 무명재님의 글에 대해 쓰신 무심님의 댓글에서 찾을 수 있다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도그마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확인 받고, 공유하고 싶은 것이 종교적 심리입니다.
어찌보면 신학이 변증술이란 것도 다 그런 맥락이죠.
무심님이 믿는 예수는 무심님의 예수고, 저 야고보가 믿는 예수는 야고보의 예수입니다.
분명히 다르지만 공통부분도 많을 겝니다.
그것을 서로 살펴보기 위해서 메타신학적 논의와 성찰, 객관적 사유가 필요한 거죠.
허나, (무심님의 의중에서 소위, 지식많은 이들에게 던진)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공통부분이나 다른부분을 되짚어보는데 별무소용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최소한 올리브 나무님의 원문에서 말하는 것이 "공통부분이나 다른부분에 대한 것"이라고 상정가능하다면 말이죠.
지식에 대한 회의론을 펼치시다가 왜 다시 지식많은 분들께 예수님이 누구이길 묻습니까?
지식을 버려두고 예수를 직관적이고 실존적으로 느껴야 한다는 무심님의 의중을
은연 중에 다른 분들의 입을 통해 듣고 싶으신 것은 아닌지요?
물론 신앙공동체는 비슷한 심리를 가지고 모인 군집입니다.
자신이 믿는 바의 것을 다른 사람을 통해 공유하고, 그 공유에서오는 교제와 집단소속감에 안락감을 누리죠.
하지만 거기서 나오는,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은, 신앙간증의 형태 정도로 밖에 구현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집단의 결속력을 더욱 강화해주고, 유대의 끈을 더욱 조여줄 수는 있지만
메타적 성찰이나, 객관적 사유의 길은 보장 못합니다.
따라서 저는 올리브 나무님의 예수가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저의 신관에 대한 대답보다는
그런 것을 논의하기에 앞서 필요한 어떤 틀을 마련해야하지 않나하는 의도에서 글을 올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개인적으로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무심님과 같은 답변을 가진 글들로서 얻는 긍정적인 효과는 상기한 정도 밖에 되질 않는다고 생각하구요.
혹여라도 다른 관점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긍정적 생산을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무심님이 다른 분들께 요구하는 대답은 무심님이 이미 상정해 놓으셨기 때문이죠.
어떤 근거로 대답이 상정되어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냐라고 물으신다면
지식론에 관한 저나 무명재님의 글에 대해 쓰신 무심님의 댓글에서 찾을 수 있다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도그마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확인 받고, 공유하고 싶은 것이 종교적 심리입니다.
어찌보면 신학이 변증술이란 것도 다 그런 맥락이죠.
무심님이 믿는 예수는 무심님의 예수고, 저 야고보가 믿는 예수는 야고보의 예수입니다.
분명히 다르지만 공통부분도 많을 겝니다.
그것을 서로 살펴보기 위해서 메타신학적 논의와 성찰, 객관적 사유가 필요한 거죠.
허나, (무심님의 의중에서 소위, 지식많은 이들에게 던진)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공통부분이나 다른부분을 되짚어보는데 별무소용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최소한 올리브 나무님의 원문에서 말하는 것이 "공통부분이나 다른부분에 대한 것"이라고 상정가능하다면 말이죠.
2007.06.05 11:17:40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거나 하나님과의 동질성, 또는 참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고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분명 사도들의 전승을 통해 기록된 복음서를 통해 볼 때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자리에 까지 가지는 않았스니까요.
하지만 제가 믿는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동질성을 가진다.(니케아) 예수는 참 하나님이시다.(칼케톤)"의 케리그마인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나의 신앙의 대상은 케리그마의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을 믿게 되니 그가 인간으로서 살아간 세월이 중요해지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그분의 어록이라고 기록된 말들이 내가 그 분을 신앙하는 자가 마땅히 지켜야만 될 것이었던 것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지켜도 그만, 못지켜도 그만이 아니라 그 분을 믿는 다는 것은 바로 지켜행함에 다름아닌 것이었기에 무조건 회개하고 믿는 다고 고백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은 내 안에 모시고, 그 분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내셨듯이 나도 살아내야 하는 것으로 된 것이지요.
다만 내가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 분을 통해서 내가 적극적으로 쓰임을 받는 것이 되겠지만...
문제는 그 당시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과 구약의 많은 언어들이
도대체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는 무슨 말로 읽혀져야 하는가가 중요해졌습니다.
역사적 예수가 그 시대상황에서 어떤 뜻으로 누구에게 왜 말씀하셨는가가 해석되지 아니하면 나에게(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없는 말일 수도 있기에.
복음서에 나오는 역사적 사건들(신화이거나 말거나 기록되어진 사건들)을 기록한 저자들은 그 기록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를 해석해내지 못하면 전혀 다르게 의미가 느껴집니다.
바로 오늘날 많은 문자주의자 들처럼...
내가 이 주제를 끄집어내어서 화두로 던진 것은
"내가 믿는 예수가 누구인가?"를 끝임없이 고민하며
하나님의 뜻을 더 잘 분별할 수 있기를 바라기에 시작한 일이다.
결코 알고 있는 지식을 자랑하는 자리가 아니고 바로 더 잘 믿기 위한 시작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위에서 조헌정목사님과 정용섭 목사님의 글 뿐만아니라 많은 댓글들을 읽어면서
내가 느낀 점 때문에 시작한 글인 것이다.
오늘날 예수님이 보듬어안으시고자 하시는
잃어버린 양은 누구이며?
죄인은 누구이며?
병든자는 누구인가?
나의 이웃은 누구?
형제는 누구?
원수는 누구???
구약의 아모스나 호세아, 이사야 등의 선지서를 보면
적극적 악을 행하지 않았고, 악을 행하는 자를 방치하고 그 결과물을 같이 누리는 것도 악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즉, 오늘날로 예를 들어보면 자신은 부동산투기를 하지 않았지만, 가지고 있는 부당산의 가격이 폭등해서 많은 이익을 보게되었다면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더 힘들게 된 결과이기 때문에 감사한 일이 아니라 아파해야 할 일이지만 케리그마의 예수를 잘 믿으나 예수의 삶을 통해 현실화시키지 못하면 바로 주님의 축복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단 것입니다.
FTA문제를 또 예로 들어보면
반대자들은 국익을 말하지 않습니다.
국익에는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인정합니다.(아니 그러니 체결할려고 하겠지요.)
그러나 FTA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를 확고히하는 세계화를 통해 자본의 우위를 더욱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기때문에 자본을 가지지 못하고 자신의 몸으로 가지고 사는 자들은 더욱 힘들 수 밖에 없어집니다.
이것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자본주의? 아마도 오늘의 맘몬인 자본을 통해 세계를 지배하려는 것이 사탄의 음모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그 증거도 허다하지만 여기서는 생략...)
조금 곁길로 간 것 같지만
강단에서 케리그마의 예수그리스도가 선포되지 않고
역사적 예수의 삶을 따르고자 그것을 오늘의 삶으로 해석된 말씀이 선포된다고 해서
그것이 어찌 비난될 일이며 틀렸다고 하겠습니까?
즉 케리그마의 예수그리스도의 전통을 지키는 자들에게 너희들은 많은 오류를 포함하는 신조들을 받들고
오히려 역사적 예수의 삶은 버린다고 평한다면 그것도 온당치는 못할 것입니다.
자신이 자각/체험한(물론 자각케 인도하신 성령님) 예수님, 하나님!
그 분을 신뢰하고 그 뜻대로 살고자 하면 되는 것이지 그 방향이 좀 다르면 어떻습니까?
문제는 방향이 아니라 오류에 있습니다.
자신이 맘몬과 사탄의 지배하에서 살고 있슴에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축복이라 여기는 바로 그런 오류 말입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그렇게 신실했지만 예수님의 책망을 받은 이유처럼
오늘날에도 자신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예수의 제자라고 믿고 있지만 주님으로부터 책망받을 사람이 많다는 것이지요.(저도 포함해서)
보수에는 신실한 크리스챤이 없습니까? 정말 존경받으실 분이 많이 계십니다.
진보들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까? 높은 영성을 가진 분이 꽤 많습니다.
그러니, 저는 어떤 예수를 믿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예수의 삶을 어떻게 따를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하시길... 아멘!
분명 사도들의 전승을 통해 기록된 복음서를 통해 볼 때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자리에 까지 가지는 않았스니까요.
하지만 제가 믿는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동질성을 가진다.(니케아) 예수는 참 하나님이시다.(칼케톤)"의 케리그마인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나의 신앙의 대상은 케리그마의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을 믿게 되니 그가 인간으로서 살아간 세월이 중요해지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그분의 어록이라고 기록된 말들이 내가 그 분을 신앙하는 자가 마땅히 지켜야만 될 것이었던 것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지켜도 그만, 못지켜도 그만이 아니라 그 분을 믿는 다는 것은 바로 지켜행함에 다름아닌 것이었기에 무조건 회개하고 믿는 다고 고백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은 내 안에 모시고, 그 분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내셨듯이 나도 살아내야 하는 것으로 된 것이지요.
다만 내가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 분을 통해서 내가 적극적으로 쓰임을 받는 것이 되겠지만...
문제는 그 당시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과 구약의 많은 언어들이
도대체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는 무슨 말로 읽혀져야 하는가가 중요해졌습니다.
역사적 예수가 그 시대상황에서 어떤 뜻으로 누구에게 왜 말씀하셨는가가 해석되지 아니하면 나에게(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없는 말일 수도 있기에.
복음서에 나오는 역사적 사건들(신화이거나 말거나 기록되어진 사건들)을 기록한 저자들은 그 기록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를 해석해내지 못하면 전혀 다르게 의미가 느껴집니다.
바로 오늘날 많은 문자주의자 들처럼...
내가 이 주제를 끄집어내어서 화두로 던진 것은
"내가 믿는 예수가 누구인가?"를 끝임없이 고민하며
하나님의 뜻을 더 잘 분별할 수 있기를 바라기에 시작한 일이다.
결코 알고 있는 지식을 자랑하는 자리가 아니고 바로 더 잘 믿기 위한 시작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위에서 조헌정목사님과 정용섭 목사님의 글 뿐만아니라 많은 댓글들을 읽어면서
내가 느낀 점 때문에 시작한 글인 것이다.
오늘날 예수님이 보듬어안으시고자 하시는
잃어버린 양은 누구이며?
죄인은 누구이며?
병든자는 누구인가?
나의 이웃은 누구?
형제는 누구?
원수는 누구???
구약의 아모스나 호세아, 이사야 등의 선지서를 보면
적극적 악을 행하지 않았고, 악을 행하는 자를 방치하고 그 결과물을 같이 누리는 것도 악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즉, 오늘날로 예를 들어보면 자신은 부동산투기를 하지 않았지만, 가지고 있는 부당산의 가격이 폭등해서 많은 이익을 보게되었다면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더 힘들게 된 결과이기 때문에 감사한 일이 아니라 아파해야 할 일이지만 케리그마의 예수를 잘 믿으나 예수의 삶을 통해 현실화시키지 못하면 바로 주님의 축복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단 것입니다.
FTA문제를 또 예로 들어보면
반대자들은 국익을 말하지 않습니다.
국익에는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인정합니다.(아니 그러니 체결할려고 하겠지요.)
그러나 FTA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를 확고히하는 세계화를 통해 자본의 우위를 더욱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기때문에 자본을 가지지 못하고 자신의 몸으로 가지고 사는 자들은 더욱 힘들 수 밖에 없어집니다.
이것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자본주의? 아마도 오늘의 맘몬인 자본을 통해 세계를 지배하려는 것이 사탄의 음모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그 증거도 허다하지만 여기서는 생략...)
조금 곁길로 간 것 같지만
강단에서 케리그마의 예수그리스도가 선포되지 않고
역사적 예수의 삶을 따르고자 그것을 오늘의 삶으로 해석된 말씀이 선포된다고 해서
그것이 어찌 비난될 일이며 틀렸다고 하겠습니까?
즉 케리그마의 예수그리스도의 전통을 지키는 자들에게 너희들은 많은 오류를 포함하는 신조들을 받들고
오히려 역사적 예수의 삶은 버린다고 평한다면 그것도 온당치는 못할 것입니다.
자신이 자각/체험한(물론 자각케 인도하신 성령님) 예수님, 하나님!
그 분을 신뢰하고 그 뜻대로 살고자 하면 되는 것이지 그 방향이 좀 다르면 어떻습니까?
문제는 방향이 아니라 오류에 있습니다.
자신이 맘몬과 사탄의 지배하에서 살고 있슴에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축복이라 여기는 바로 그런 오류 말입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그렇게 신실했지만 예수님의 책망을 받은 이유처럼
오늘날에도 자신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예수의 제자라고 믿고 있지만 주님으로부터 책망받을 사람이 많다는 것이지요.(저도 포함해서)
보수에는 신실한 크리스챤이 없습니까? 정말 존경받으실 분이 많이 계십니다.
진보들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까? 높은 영성을 가진 분이 꽤 많습니다.
그러니, 저는 어떤 예수를 믿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예수의 삶을 어떻게 따를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하시길... 아멘!
2007.06.05 11:41:17
‘역사적 예수’에 대한 문제를 예로 들자면,
신학적으로 이미 정리된 문제라고 말씀들을 하십니다만,
아직 정리되지 않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 절실한 주제를 스스로 공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많은 성찰의 기회를 갖구요.
예수를 따르는, 따를 수밖에 없는 각자의 실존에서,
그 여정의 다양성을 존중해야함을 환기하고 싶습니다.
개인적인 체험, 역사와 전례에 대한 이해,
현실 교회에서의 역동성, 등등,,
수많은 관심 영역에, 때를 따라 무게중심이 이동을 하겠지만,
저마다의 진정성이, 타인을 재단하는 방식으로는
작동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올리브나무님의 접근방식은, 저의 경우와 참 많이 닮았습니다. ^^
신학적으로 이미 정리된 문제라고 말씀들을 하십니다만,
아직 정리되지 않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 절실한 주제를 스스로 공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많은 성찰의 기회를 갖구요.
예수를 따르는, 따를 수밖에 없는 각자의 실존에서,
그 여정의 다양성을 존중해야함을 환기하고 싶습니다.
개인적인 체험, 역사와 전례에 대한 이해,
현실 교회에서의 역동성, 등등,,
수많은 관심 영역에, 때를 따라 무게중심이 이동을 하겠지만,
저마다의 진정성이, 타인을 재단하는 방식으로는
작동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올리브나무님의 접근방식은, 저의 경우와 참 많이 닮았습니다. ^^
2007.06.05 11:51:05
암튼, 이래서 화두니 비유니 하는 것들이 혼란을 가져다 준다니까요.
메타포를 비롯한 여러 문학적 장치들이 해석과 의미를 풍부하게 해주지만 단점도 있죠.
올리브나무님의 의도가 이제야 잡힙니다만 (그리고 저도 그런 탈신비주의적 칸트식의 실천이성강조에 많은 부분 공감합니다, 물론 자본에 관한 견해라던가, 예수인식과 예수섬김의 관계방식에 관한 디테일한 부분은 좀 차이가 나지만) 제시방식으로선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충분했습니다.
실제로 그러했구요.
뭐, 의중을 간파하지 못한 독자들 독해수준이 절망적이다라면 할말은 없겠지만서도....
메타포를 비롯한 여러 문학적 장치들이 해석과 의미를 풍부하게 해주지만 단점도 있죠.
올리브나무님의 의도가 이제야 잡힙니다만 (그리고 저도 그런 탈신비주의적 칸트식의 실천이성강조에 많은 부분 공감합니다, 물론 자본에 관한 견해라던가, 예수인식과 예수섬김의 관계방식에 관한 디테일한 부분은 좀 차이가 나지만) 제시방식으로선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충분했습니다.
실제로 그러했구요.
뭐, 의중을 간파하지 못한 독자들 독해수준이 절망적이다라면 할말은 없겠지만서도....
2007.06.05 12:03:04
야고보님
저가 지식이 필요없다라는 것은 지식전체를 싸잡아 드리는 말이 아닙니다
앞글에서 언급했지만 인류의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에 "진리란 무엇이다"라는 것이 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넘어 진리란 무엇이고 어떻게 된다 라고 했다
그래서 예수님에 관해서 다른 분들과 다른 처음과 끝을 볼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의 말을 배우지(지식) 않고 어찌 그러한 결론을 내렸겠습니까?
하지만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의 가르침(지식)을 배울생각은 않하고
그위대한 스승들의 말을 본질주의니....이데아론이니....어쩌구 저쩌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지식(불필요한 지식)이라 생각합니다
이와같이 지식도 쓸데있는 것과 쓸데없는 것이 있다고 분명
언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식전체에 대한 시각으로 저를 판단하시는 것은
성급한 부분이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지식의 불필요함중에,,, 야고보님께서 몇가지의 단편적인 저의 글을 토대로
전체를 상정해내는 표현도 극히 조심해야할 지식의 부정적인 측면이지 않을까 우려해봅니다
바로 위글 첫 부분에 저를 조심스럽게 판단(저가 어떤의도가 있지 않을까?)하시는 글을 볼때
그러한 판단이 지식에서 비롯됌을 부정하시진 못할것 같습니다..
순수한 사람(믿음의 자녀들끼리 세속의 예는 필요없지 않겠는가)의 시각으로 본다면
다만 저의 글이 자신이 볼때 일리 있는 것은 일리 있고, 일리 없는 것은 일리 없다
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
제목이 묻는 질문에 님께선 님의 말씀처럼 "신앙간증의 형태 정도로 밖에 구현될수 없습니다"
라고 끝을 내어 버리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저는 그 대답을 듣고 "아!!!예수님에 대한 저러한 시각도 있구나"라고
배우게 될것이고
그러면 이 논쟁은 끝이나고 다른 부분으로 이야기가 옮길수 있을텐데
자꾸 자꾸 다른 말을 붙이시는 것은 소모적 논쟁밖에 될수 없지 않을까 우려해 봅니다....
저가 지식이 필요없다라는 것은 지식전체를 싸잡아 드리는 말이 아닙니다
앞글에서 언급했지만 인류의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에 "진리란 무엇이다"라는 것이 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넘어 진리란 무엇이고 어떻게 된다 라고 했다
그래서 예수님에 관해서 다른 분들과 다른 처음과 끝을 볼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의 말을 배우지(지식) 않고 어찌 그러한 결론을 내렸겠습니까?
하지만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의 가르침(지식)을 배울생각은 않하고
그위대한 스승들의 말을 본질주의니....이데아론이니....어쩌구 저쩌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지식(불필요한 지식)이라 생각합니다
이와같이 지식도 쓸데있는 것과 쓸데없는 것이 있다고 분명
언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식전체에 대한 시각으로 저를 판단하시는 것은
성급한 부분이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지식의 불필요함중에,,, 야고보님께서 몇가지의 단편적인 저의 글을 토대로
전체를 상정해내는 표현도 극히 조심해야할 지식의 부정적인 측면이지 않을까 우려해봅니다
바로 위글 첫 부분에 저를 조심스럽게 판단(저가 어떤의도가 있지 않을까?)하시는 글을 볼때
그러한 판단이 지식에서 비롯됌을 부정하시진 못할것 같습니다..
순수한 사람(믿음의 자녀들끼리 세속의 예는 필요없지 않겠는가)의 시각으로 본다면
다만 저의 글이 자신이 볼때 일리 있는 것은 일리 있고, 일리 없는 것은 일리 없다
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
제목이 묻는 질문에 님께선 님의 말씀처럼 "신앙간증의 형태 정도로 밖에 구현될수 없습니다"
라고 끝을 내어 버리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저는 그 대답을 듣고 "아!!!예수님에 대한 저러한 시각도 있구나"라고
배우게 될것이고
그러면 이 논쟁은 끝이나고 다른 부분으로 이야기가 옮길수 있을텐데
자꾸 자꾸 다른 말을 붙이시는 것은 소모적 논쟁밖에 될수 없지 않을까 우려해 봅니다....
2007.06.05 13:05:38
이미 올리브 나무님이 화두를 풀어주셨고, 저또한 상당 부분 공감하는지라 더 이상의 말은 사족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무심님께서 자기 변호를 하셨으니 저도 답변의 형태로 화두와는 벗어난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무심님은 우선 지식의 유용성 유무의 논의를 떠나서 제대로 지식을 습득하지 못하신 것 같습니다.
1. 예수님이 다른 분들과 달리 "진리란 무엇이고 어떻게 된다"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다른 성인들과 차별되는 정당한 근거가 되지못합니다. 다른 성인들도 "진리란 무엇이고 어떻게 된다"라고 말한바가 있고, "진리가 어떠한 것이다" 라고 말한 것을 경계한 성인도 계십니다. 붓다, 공자, 노자 등등 이루헤아릴 수가 없네요.
2. "위대한 스승들의 말을 본질주의니....이데아론이니....어쩌구 저쩌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지식(불필요한 지식)이라 생각합니다" 라는 말에 대해서도 마찬가집니다. 대체 어떤 근거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근거가 빈약해도 한참 빈약합니다. 유용한 지식과 무용한 지식의 구분이 자의적이라고 생각하진 않으신지요? 불행하게도 예로 드신 이데아론도 억견과 실재 (유용한 지식과 무용한 지식)에 관한 플라톤의 상세한 구분입니다. 플라톤은 적어도 일관성있게 나름의 논리성을 가졌기에 오늘날까지도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무심님은 그러한 지식의 구분에 어떤 논리와 잣대를 가지고 계신지요. 자신이 주장하려는 바에 정반대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는 무지에서 먼저 벗어나셔야 하는 것 아닐까요?
3. 또한 제가 부분과 전체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오류가 아님을 무심님이 제가 상기한 윗글에서의 예와 같이 스스로 드러내고 계시기에 여기에 대한 답변은 따로 드리지않겠습니다. 그저 무심님이 무의식중이든, 의식을 하셨든 (무명재님의 논변에 대해) 주장하시려고 하는바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짜장면을 먹고선 짬뽕을 먹었다고 하시는데 제가 짜장면을 산 것이 아닌이상에야 추궁까지 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짬뽕을 먹었다고 말하시려면 입가에 묻은 짜장이라도 닦으시라는거죠.
무심님은 우선 지식의 유용성 유무의 논의를 떠나서 제대로 지식을 습득하지 못하신 것 같습니다.
1. 예수님이 다른 분들과 달리 "진리란 무엇이고 어떻게 된다"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다른 성인들과 차별되는 정당한 근거가 되지못합니다. 다른 성인들도 "진리란 무엇이고 어떻게 된다"라고 말한바가 있고, "진리가 어떠한 것이다" 라고 말한 것을 경계한 성인도 계십니다. 붓다, 공자, 노자 등등 이루헤아릴 수가 없네요.
2. "위대한 스승들의 말을 본질주의니....이데아론이니....어쩌구 저쩌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지식(불필요한 지식)이라 생각합니다" 라는 말에 대해서도 마찬가집니다. 대체 어떤 근거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근거가 빈약해도 한참 빈약합니다. 유용한 지식과 무용한 지식의 구분이 자의적이라고 생각하진 않으신지요? 불행하게도 예로 드신 이데아론도 억견과 실재 (유용한 지식과 무용한 지식)에 관한 플라톤의 상세한 구분입니다. 플라톤은 적어도 일관성있게 나름의 논리성을 가졌기에 오늘날까지도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무심님은 그러한 지식의 구분에 어떤 논리와 잣대를 가지고 계신지요. 자신이 주장하려는 바에 정반대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는 무지에서 먼저 벗어나셔야 하는 것 아닐까요?
3. 또한 제가 부분과 전체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오류가 아님을 무심님이 제가 상기한 윗글에서의 예와 같이 스스로 드러내고 계시기에 여기에 대한 답변은 따로 드리지않겠습니다. 그저 무심님이 무의식중이든, 의식을 하셨든 (무명재님의 논변에 대해) 주장하시려고 하는바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짜장면을 먹고선 짬뽕을 먹었다고 하시는데 제가 짜장면을 산 것이 아닌이상에야 추궁까지 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짬뽕을 먹었다고 말하시려면 입가에 묻은 짜장이라도 닦으시라는거죠.
2007.06.05 16:22:27
위에서 올리브나무님의 긴 댓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중략........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하시길... 아멘! >
상당부분 공감합니다.
그리고 저도 아멘!으로 화답 하렵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중략........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하시길... 아멘! >
상당부분 공감합니다.
그리고 저도 아멘!으로 화답 하렵니다.
2007.06.05 22:12:43
논점이 많이 흐려져서 애초 의도하던 뜻도 못이루신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 가지 사안이 뒤섞이면, 꼭 이렇게 쫑을 치더라구요.
올리브나무님의 문제제기는 타당하다고 봅니다.
소위 진보와 보수가 갈라지는 점을 잘 본 것일 수도 있구요.
그래서 일단,
케리그마로 선포된 예수와 역사적 예수가 갈림길이자 길라잡이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역사적 예수가 어떤 분인가 알고자 하는 것이 작금의 상황를 보면,
거의 실증주의적 예수로 흘러가다, 결국 애초에 알고자 했던, 의도하던 그 예수마저 못보고,
허무하게 끝날 것이라는 것을 알 겁니다.
그럼 다시 역사가 무엇인가하는 지리한 논쟁이 계속되겠지요.
랑케식 역사관는 이미 소멸된 것으로 본다면, -적어도 그렇다고 올리브나무님이 인식한다면- 생산적 토론의 여지가 있구요.
그럼 문제는, 사실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구요.
선포된 예수가 곧 역사적 예수인가하는데 있을 겁니다.
다시말하면,
소수의 증인에 의존하는 케리그마의 예수가 바로 역사적으로 확인 가능한 예수인가 하는 문제이겠지요.
요 문제를 다르게 표현하면,
주관적 믿음의 예수가 객관적 역사적 예수인가 하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한 쪽은 너무 주관적 예수에 함몰되서, 역사적 예수에 대해 -그 증명 가능성에 좀 자신이 없어서 겠지만- 비판적이게 되고, 예수를 단지 초월적 감정의 수준으로 내려버립니다.
‘믿고 체험해 봐 다 알게 돼’ 수준으로 내려버리지요. 또 다른 극단으로 흐를 것으로 봅니다.
반면에 다른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예수의 신성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단지 2000년 전의 십자가에 달린 한 청년의 죽음 밖에 남는 것이 없게 됩니다.
기실 예수는 그 주객 또는 믿음과 이성의 가운데 어디쯤 있을 겁니다.
양 극단을 배제해야 하는 이유이지요.
믿음으로 검증해야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럼 조목사님과 정목사님의 차이는 어디일까요?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어디서 멈추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인가 하는데 있다고 봅니다.
참 어려운 일이지요.
우리의 삶이 어디까지가 종교이고 어디까지가 정치인지 구별하기가 애당초 어렵거든요.
다층적 다면적 상황에 노출되는 삶을 사는 까닭입니다.
다만, 두 분다 자신의 영역에서 열린 마음으로 충실한 삶을 살아가다보면, 만나게 된다고 말하고 싶네요.
서로 양끝에서 수평선을 달려서 만나는 지점에 아마 보다 ‘온전한 예수의 가르침’이 있을 것으로 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예수 가르침의 정수입니다.
두 분이 만나게 될 수 밖에 없는 지점입니다.
제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인데요.
예수 안믿는 친구가 불쌍히 보여서, 예수 전하다 보니, 그의 빈궁한 삶이 눈에 들어옵니다. 하룻 밤 같이 이야기하다보니, 낼 모래면 집이 헐리네요. 아침에 일어나서 밥 좀 얻어먹고 나오려다 보니,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한쪽에서는 집을 허물고, 다른 한쪽은 그걸 막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말리는 것이 도리다 싶어서 말리다, 철장 신세를 집니다. 철장에서나와서 친구들 좀 더 데리고 가서 데모하다 보니 텔레비전에 나오네요. 고민이 깊어집니다.
어떻게 하면 이 부조리한 상황을 좀 개선해볼까 하다가 모임도 만들고 공부도하고, 체제를 갖추지요. 그러다 보니, 어느새 체제가 덧칠한 좌경이나 극렬분자가 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단지, 예수의 가르침에 -적어도 자신의 삶에- 충실하게 살아보려고 한 자신이 어느 덧 여기까지 오게 된 거죠.
애초 시작할 때, 거창하게 해방신학이니 민중신학이니 이런 거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웃 사랑에 충실한 것이 죄가 된다면 죄가 되겠지요.
자 여기서, 어디서 멈추고 돌아서야 예수의 가르침에 충실한 삶이 될까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자신의 주어진 상황 속에서, 충실히 살면 그게 곧 가야할 길이고 멈출 길이라고 봅니다.
유일한 나침반은,
보편적 성령 또는 역사의 부름에 열린 마음이 있어야 될 것으로 봅니다.
옳고 그름은,
역사가 평할 겁니다.
더 논의를 할 주제도 못되고 능력도 없어서 여기서 줄입니다.
즐거운 휴일되시길
여러 가지 사안이 뒤섞이면, 꼭 이렇게 쫑을 치더라구요.
올리브나무님의 문제제기는 타당하다고 봅니다.
소위 진보와 보수가 갈라지는 점을 잘 본 것일 수도 있구요.
그래서 일단,
케리그마로 선포된 예수와 역사적 예수가 갈림길이자 길라잡이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역사적 예수가 어떤 분인가 알고자 하는 것이 작금의 상황를 보면,
거의 실증주의적 예수로 흘러가다, 결국 애초에 알고자 했던, 의도하던 그 예수마저 못보고,
허무하게 끝날 것이라는 것을 알 겁니다.
그럼 다시 역사가 무엇인가하는 지리한 논쟁이 계속되겠지요.
랑케식 역사관는 이미 소멸된 것으로 본다면, -적어도 그렇다고 올리브나무님이 인식한다면- 생산적 토론의 여지가 있구요.
그럼 문제는, 사실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구요.
선포된 예수가 곧 역사적 예수인가하는데 있을 겁니다.
다시말하면,
소수의 증인에 의존하는 케리그마의 예수가 바로 역사적으로 확인 가능한 예수인가 하는 문제이겠지요.
요 문제를 다르게 표현하면,
주관적 믿음의 예수가 객관적 역사적 예수인가 하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한 쪽은 너무 주관적 예수에 함몰되서, 역사적 예수에 대해 -그 증명 가능성에 좀 자신이 없어서 겠지만- 비판적이게 되고, 예수를 단지 초월적 감정의 수준으로 내려버립니다.
‘믿고 체험해 봐 다 알게 돼’ 수준으로 내려버리지요. 또 다른 극단으로 흐를 것으로 봅니다.
반면에 다른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예수의 신성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단지 2000년 전의 십자가에 달린 한 청년의 죽음 밖에 남는 것이 없게 됩니다.
기실 예수는 그 주객 또는 믿음과 이성의 가운데 어디쯤 있을 겁니다.
양 극단을 배제해야 하는 이유이지요.
믿음으로 검증해야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럼 조목사님과 정목사님의 차이는 어디일까요?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어디서 멈추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인가 하는데 있다고 봅니다.
참 어려운 일이지요.
우리의 삶이 어디까지가 종교이고 어디까지가 정치인지 구별하기가 애당초 어렵거든요.
다층적 다면적 상황에 노출되는 삶을 사는 까닭입니다.
다만, 두 분다 자신의 영역에서 열린 마음으로 충실한 삶을 살아가다보면, 만나게 된다고 말하고 싶네요.
서로 양끝에서 수평선을 달려서 만나는 지점에 아마 보다 ‘온전한 예수의 가르침’이 있을 것으로 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예수 가르침의 정수입니다.
두 분이 만나게 될 수 밖에 없는 지점입니다.
제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인데요.
예수 안믿는 친구가 불쌍히 보여서, 예수 전하다 보니, 그의 빈궁한 삶이 눈에 들어옵니다. 하룻 밤 같이 이야기하다보니, 낼 모래면 집이 헐리네요. 아침에 일어나서 밥 좀 얻어먹고 나오려다 보니,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한쪽에서는 집을 허물고, 다른 한쪽은 그걸 막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말리는 것이 도리다 싶어서 말리다, 철장 신세를 집니다. 철장에서나와서 친구들 좀 더 데리고 가서 데모하다 보니 텔레비전에 나오네요. 고민이 깊어집니다.
어떻게 하면 이 부조리한 상황을 좀 개선해볼까 하다가 모임도 만들고 공부도하고, 체제를 갖추지요. 그러다 보니, 어느새 체제가 덧칠한 좌경이나 극렬분자가 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단지, 예수의 가르침에 -적어도 자신의 삶에- 충실하게 살아보려고 한 자신이 어느 덧 여기까지 오게 된 거죠.
애초 시작할 때, 거창하게 해방신학이니 민중신학이니 이런 거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웃 사랑에 충실한 것이 죄가 된다면 죄가 되겠지요.
자 여기서, 어디서 멈추고 돌아서야 예수의 가르침에 충실한 삶이 될까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자신의 주어진 상황 속에서, 충실히 살면 그게 곧 가야할 길이고 멈출 길이라고 봅니다.
유일한 나침반은,
보편적 성령 또는 역사의 부름에 열린 마음이 있어야 될 것으로 봅니다.
옳고 그름은,
역사가 평할 겁니다.
더 논의를 할 주제도 못되고 능력도 없어서 여기서 줄입니다.
즐거운 휴일되시길
2007.06.07 05:05:34
엉켜 있을수록 기초로 돌아갈 필요가 있을 겁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을 봅시다.
그리스도교 신앙 및 교회의 표준 가운데 하나인 '사도성'이,
바로,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의 양 측면을 포괄하는 종합입니다.
그리스도교가 왜 애초부터 사도계승이니, 사도로부터 전해온 신앙이니 강조한 줄 아십니까?
바로 사도들이, 역사적 예수 그 분과 함께 살며, 그 분을 겪었으며, 직접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역사적 예수란 2천년 전 예수 본인 밖에는 모르는 거지요.
그래서, 가장 직접적으로 그 분을 겪고, 가르침을 받은 사도들의 예수 증언 위에,
그리스도교와 교회가 성립한 겁니다.
그 사도들이 예수를 겪고, 그 분께 배워 본즉, 그 분이 구세주, 그리스도더라는 겁니다.
즉, 이 '사도성'이란,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종합한 개념이 되는 거지요.
올리브나무님께서, 그리스도교의 정경에 대한 의문에 대해서도 글을 올리셨던데,
신약성서 정경 확정의 기준 역시 사도성입니다.
사도성이란, 곧 그리스도교의 역사성이고,
역사성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보편성이 되는 것이지요.
저는 이 사도성이라는 준거로 만족합니다.
역사적 예수니, 신앙의 그리스도니, 구분하는 것, 지나치다고 봅니다.
물론, 역사적 예수 연구의 유익성과 공헌은 저도 인정해 마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을 봅시다.
그리스도교 신앙 및 교회의 표준 가운데 하나인 '사도성'이,
바로,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의 양 측면을 포괄하는 종합입니다.
그리스도교가 왜 애초부터 사도계승이니, 사도로부터 전해온 신앙이니 강조한 줄 아십니까?
바로 사도들이, 역사적 예수 그 분과 함께 살며, 그 분을 겪었으며, 직접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역사적 예수란 2천년 전 예수 본인 밖에는 모르는 거지요.
그래서, 가장 직접적으로 그 분을 겪고, 가르침을 받은 사도들의 예수 증언 위에,
그리스도교와 교회가 성립한 겁니다.
그 사도들이 예수를 겪고, 그 분께 배워 본즉, 그 분이 구세주, 그리스도더라는 겁니다.
즉, 이 '사도성'이란,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종합한 개념이 되는 거지요.
올리브나무님께서, 그리스도교의 정경에 대한 의문에 대해서도 글을 올리셨던데,
신약성서 정경 확정의 기준 역시 사도성입니다.
사도성이란, 곧 그리스도교의 역사성이고,
역사성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보편성이 되는 것이지요.
저는 이 사도성이라는 준거로 만족합니다.
역사적 예수니, 신앙의 그리스도니, 구분하는 것, 지나치다고 봅니다.
물론, 역사적 예수 연구의 유익성과 공헌은 저도 인정해 마지 않습니다.
2007.06.07 09:51:49
올리브나무님의 글은 역사적 예수이건, 개인의 실존적 예수이건 중요한 것은 그 분의 메세지를 따르는 실천적 자세를 강조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데요. 섬돌님의 말씀이나 무명재님의 말씀은 올리브님의 의도와 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조금 희미한 것이 아닌가 싶네요.
올리브나무님의 말씀은 제가 해석하기로는 실천이성을 강조한 칸트식의 종교를 대하는 자세같습니다. 칸트는 역사적 예수이건, 실존적 예수이건 모두가 다 인식론적 문제이므로 순수이성으로는 파악이 불가능하다라고 얘기하고 있죠. 파악하기 어려운, 함부로 말하지 못할 그런 것보다는 요청되는 하느님의 개념으로서 우리의 도덕률의 기준이 되는 예수님을 삶의 구체적 상황에서 바라보고, 실천적 삶으로 그분을 따르는 모습이 바람직하다라고 얘기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물론 역사적 예수와 실존적예수, 그리고 실천적 지평에서 나타나는 예수신앙간의 관계가
그 연결강도와 연결방식에 있어서는 많은 고찰이 필요하겠지만
어쨌든 실천적 지평에서 드러나는 예수를 보자라는 점은 (제가 해석한 것이 맞다면) 저도 동의합니다.
예수의 메시지는 역사적 예수의 연구결과가 어떻든, 개인실존적 문제로 다가오는 성찰의 경험이야 어떻든
실천적 방식으로 따르기에 너무나 선명하고도 간결한 메세지로서 우리에게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기독교를 세계종교로 만든 힘이기도 하구요.
올리브나무님의 말씀은 제가 해석하기로는 실천이성을 강조한 칸트식의 종교를 대하는 자세같습니다. 칸트는 역사적 예수이건, 실존적 예수이건 모두가 다 인식론적 문제이므로 순수이성으로는 파악이 불가능하다라고 얘기하고 있죠. 파악하기 어려운, 함부로 말하지 못할 그런 것보다는 요청되는 하느님의 개념으로서 우리의 도덕률의 기준이 되는 예수님을 삶의 구체적 상황에서 바라보고, 실천적 삶으로 그분을 따르는 모습이 바람직하다라고 얘기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물론 역사적 예수와 실존적예수, 그리고 실천적 지평에서 나타나는 예수신앙간의 관계가
그 연결강도와 연결방식에 있어서는 많은 고찰이 필요하겠지만
어쨌든 실천적 지평에서 드러나는 예수를 보자라는 점은 (제가 해석한 것이 맞다면) 저도 동의합니다.
예수의 메시지는 역사적 예수의 연구결과가 어떻든, 개인실존적 문제로 다가오는 성찰의 경험이야 어떻든
실천적 방식으로 따르기에 너무나 선명하고도 간결한 메세지로서 우리에게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기독교를 세계종교로 만든 힘이기도 하구요.
2007.06.07 10:33:44
흐미 또 칸트?
올리브나무님 이제 자수하시죠!^^;;
하고 싶은 말 솔직히 해봐요. 전 님의 글 쭉 보면서 대충 얼개는 잡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여서 또 칸트 나오니....
데미님 볼테르님 다 소환해야 될 듯하네요.
그 분들 오시기 전에...
톡 까놓고 - 늘오늘님 표현- 말씀 좀 해보시죠.
나누고 싶은 말씀이 뭐지요?
올리브나무님 이제 자수하시죠!^^;;
하고 싶은 말 솔직히 해봐요. 전 님의 글 쭉 보면서 대충 얼개는 잡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여서 또 칸트 나오니....
데미님 볼테르님 다 소환해야 될 듯하네요.
그 분들 오시기 전에...
톡 까놓고 - 늘오늘님 표현- 말씀 좀 해보시죠.
나누고 싶은 말씀이 뭐지요?
2007.06.09 02:43:48
예수님을 인격적 으로 만남을갖고 있다면 신앙고백이 낯 간지러운게 아닌데 너무 형이상학적인
글들만 오고 가는디..어차피 이천년전 예수님이 믿어 진다는것은 ..은혜 아닌가요..
나는 매 순간 나의 부족 나의죄성이 그분을 통하여 느껴지니 나만 느끼는은혜인가
또그분의구원으로 인도해 주시는 일상성이 이토록 절실함은 ..그분을 이세상과 또저세상 에서도
함께 할수있으니...감사..
글들만 오고 가는디..어차피 이천년전 예수님이 믿어 진다는것은 ..은혜 아닌가요..
나는 매 순간 나의 부족 나의죄성이 그분을 통하여 느껴지니 나만 느끼는은혜인가
또그분의구원으로 인도해 주시는 일상성이 이토록 절실함은 ..그분을 이세상과 또저세상 에서도
함께 할수있으니...감사..
2007.06.09 09:57:24
성서를 보면 구약과 신약의 시간개념이 좀 다르게 느껴집니다. 히브리적인 사고와 헬라적인 사고체계의 차이라고나 할까?
나에게 있어서 예수사건은 2000년 전이라는 시간의 의미가 없이 그냥 사실로 다가옵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으로 역사하시는 것이지요.
물론 구원에 대한 개념이 어느정도 다르겠지만
"나는 매 순간 나의 부족 나의죄성이 그분을 통하여 느껴지니 나만 느끼는은혜인가
또그분의구원으로 인도해 주시는 일상성이 이토록 절실함은 ..그분을 이세상과 또저세상 에서도
함께 할수있으니...감사.. " ⇒ 이런 과정을 겪어보지 않고는 아마 신앙고백이 나오기 힘들거예요.
여기에서 형이상학적인 글로 도배하시는 분들도 직접 듣고 보지는 못했지만, 님과같은 그 신앙고백은 기본으로 깔고 있을거라 생각드네요.
언제나 주님의 은혜안에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살아가는 못난 자아가...
나에게 있어서 예수사건은 2000년 전이라는 시간의 의미가 없이 그냥 사실로 다가옵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으로 역사하시는 것이지요.
물론 구원에 대한 개념이 어느정도 다르겠지만
"나는 매 순간 나의 부족 나의죄성이 그분을 통하여 느껴지니 나만 느끼는은혜인가
또그분의구원으로 인도해 주시는 일상성이 이토록 절실함은 ..그분을 이세상과 또저세상 에서도
함께 할수있으니...감사.. " ⇒ 이런 과정을 겪어보지 않고는 아마 신앙고백이 나오기 힘들거예요.
여기에서 형이상학적인 글로 도배하시는 분들도 직접 듣고 보지는 못했지만, 님과같은 그 신앙고백은 기본으로 깔고 있을거라 생각드네요.
언제나 주님의 은혜안에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살아가는 못난 자아가...
2007.06.28 07:22:13
우연히 들어왔다가 한참 읽었네요.
한마디로 지적인 향연이군요.
말씀 한구절이 생각납니다.
"내 아들아 또 경계를 받으라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12:12-13)
올리브나무님의 올린 글들은 결국 위의 말씀에 대한 무의식적인 해석이라 생각되네요^^
그리고 한마디 사족을 붙인다면
예수는 쉽게 믿는 것이 좋습니다.
쉽게 믿는다는 것이 곧 가볍다는 것과 동의어는 아닙니다.
물론 쉽게 믿기 위해서 오랜 사색의 기간들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한마디로 지적인 향연이군요.
말씀 한구절이 생각납니다.
"내 아들아 또 경계를 받으라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12:12-13)
올리브나무님의 올린 글들은 결국 위의 말씀에 대한 무의식적인 해석이라 생각되네요^^
그리고 한마디 사족을 붙인다면
예수는 쉽게 믿는 것이 좋습니다.
쉽게 믿는다는 것이 곧 가볍다는 것과 동의어는 아닙니다.
물론 쉽게 믿기 위해서 오랜 사색의 기간들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16세기 종교개혁의 타격을 입은 천주교회가,
트렌트 공의회를 통한, 반동종교개혁의 내부 쇄신을 거치는 과정에서,
예수회는 커다란 공헌을 했습니다.
특히, 근현대 천주교회사와 천주교의 판도, 영성과 신학 등에서,
예수회는 절대 빠질 수 없는 지대한 의의를 갖습니다.
예수회는, 반개신교적 및 보수적 열심으로 천주교 내부를 쇄신한 측면도 있으며,
반면에, 테야르 드 샤르댕, 칼 라너 등 무수한 현대 신학의 거장들과,
마테오 리치 등, 동아시아 선교에 있어 토착화의 선구자들을 배출했을 정도로 진보적인 면모도 있지요.
아무튼, 저는 대단히 매력적인 수도회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궁금해 하시는 점에 대하여,
한스 큉, [그리스도교] (분도출판사)
를 일독해 보시면 대단히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2천년과 전 세계의 판도를 조망하는 데 1순위로 추천할 만한 책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사시는 동네 성당 평일 미사라도,
몇 차례 참석해 보시면 그것이 지식 이상일 것입니다.
저 또한, 어느 겨울 밤, 부석사의 밤 예불에,
친구와, 그 절의 신도 몇 분과 함께, 적막 속에서 참석했던 것을,
잊을 수 없는 종교적 체험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종교에 있어 체험이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