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을 한다면서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또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실히 느끼지 못하는 분들이 있는것 같습니다.
먼저 기독교 신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이야기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확실히 알고 느끼고 싶다면 의외로 방법은 그리 어렵지 만은 않습니다.
첫째,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믿음으로 온전히 받아 들이면
하나님이 당신에게 찾아오실 문이 열릴 것입니다.
일단 학교에서 배운 진화론이나, 유신 진화론 따위는 지워 버려야 합니다.
이런 이론들이 당신의 머리속을 주관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발 삐집고 들어올 가능성이 거의 희박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찾아오기 가장 힘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조를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확실히 믿어 보십시오..
그러면 놀라운 새로운 변화와 믿음이 찾아올 것입니다
둘째, 성경에 나오는 말씀들과, 비유들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건들을 다 진실로 받아 들여 보십시오.
그리고 기도 할때 하나님을 어떤 추상적인 존재로 생각지 마시고
나를 이 땅에 보내신 나의 토기장이 이자
나의 아바 아버지 임을 믿고, 나는 하나님 앞에서 정말 보잘것없는
허물 많은 죄인임을, 하나님 앞에 고백함으로
회개의 시간을 가져 보십시요..
회개가 선행 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결코 만날 수가 없습니다.
구원은 어떤 감성이나 느낌, 학문적 소양위에 기초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로 주시는 선물을 받으려는 의지에 기초해 있습니다.
구원은 나의 회개와 죄 사함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때 너는“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 하노라“는 소리가 하늘로부터 들렸다고 합니다.
이 말을 다시 해석하자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나님이 예수님께 응답하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 하노라” 는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음성을
예수는 마음으로 듣고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하나님 아버지의 소리를 들으셨습니까?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부재를 느끼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떠난 것이 아니라
당신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에게 다가갈수 있는 일을 먼저 찾아서 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계시한 말씀을 사모하며 읽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은 학식과 지식만으로는 만나기는 힘듭니다.
여러분을 유혹하는 세상에 있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것들이 아닙니다.
비록 여러분이 세례를 받았고,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했으며, 신앙의 경력이 많다 할지라도
만약 여러분 마음속에 구원 받았다는 확신이 없거나, 하나님의 부재를 느끼신다면
지금 당장 그 문제를 놓고 기도에 전념 하십시오.
인생에 있어 이것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문제는 없습니다.
이 문제가 해결 되지 않으면 신앙생활의 모든 면에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백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당신의 죄를 위해서 하나님이 행하신 사건임을 믿으십시오.
날마다, 매시간 마다 성령의 인도 하심을 느끼고 자신이 걸어가는 길에 주님이 동행 하심을
즐거워 하십시오
성경의 가르침을 믿으십시오.
회개의 기도를 하시고 그 분의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하나님은 결단코 당신을 홀로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직접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놀라운 은혜가 찾아 들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약속 하셨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기도 하십시요..
말씀을 믿고 사모 하십시요..
이 두가지 충실히 행하지 않고는 절대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을 선물로 받을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성령으로 깨닫기를 기도 합니다
믿음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게 아니라
저별과 달님의 불편한 마음때문에 이렇게 글을 쓰는 것 같군요.
저별과 달님이 생각하기에 "하느님을 확신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그래서 저별과 달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누군가(?)에게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겠다는 사명감으로 쓴 것 같군요.
그 진정성은 이해가 가지만
님의 글은 마음을 너무 불편하게 합니다.
교회를 다니다보면 저별과 달님과 같은 분들을 자주 봅니다.
쉽게 남의 신앙을 판단하고 열의에 차서 조언이라는 간섭을 하는 분들을 말입니다.
조언보다는 올바른 신앙인으로,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기도해주세요.
확신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하면 고등 종교에 머무름니다.
믿음이 만약 믿고 싶어 믿어진 결과라면
신학을 전공하고 똑똑한 사람의 전유물이 됨니다.
하지만 믿은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 성경에서 예수님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 말씀하실까요...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는 이가 있고
들을 능력이 있는 자들에게 들린다는 차원이 아니라...
믿음을 선물로 주시고 이끄시고 주관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는 검니다.
이런 저런 할 말이 많지만...
회계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만날수 없다는 부분은 좀...
성경을 읽음 이라는 말씀을 듣는 것으로 믿음이 생겨서...
이것도 예수님이 주관하시는 부분임니다...
회계의 선행 과정 이전에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게 먼저 되는게 먼저 아닐까요?...
예수님을 믿어 갈수록 죄의 깊이를 더 알게 되고...
예수님을 믿어 갈수록 은혜가 어떤 것인지 좀더 알아 가고...
표현대로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회계란 인간의 반성에 머무름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은 인과율의 법칙을 따르지만
믿음의 세계는 그렇지 않다고 봄니다.
믿고 나서 보니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예수님의 제자로 불러 주셨구나 믿게 되는 검니다.
인간의 주도권이 없는 식이죠.
인간의 애씀과 노력...개입이 필연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면
신인합일??? 그런 식으로 구원이 어떤 합작품 으로...
종교적인 시스템에 따라 오기만 하면 구원 받는 꼴...이 되어 버림니다.
바울의 고백중에 죄인중의 괴수...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고 난 후의 그의 인생 후반부에 나옴니다.
무엇을 확신한다...
무엇을 믿는다...
나는 무엇을 받았다...
그리고 평소 어떤 것을 붙잡고 고백되는지
조금만 이야기 해봐도 알수있더군요...
인간으로 부터 나온것에 반응한 것이라면
하나님이 주신것이 아닐수 있습니다.
신념과 신앙의 차이...
자신이 만든 믿음과 받은 믿음의 차이...
바울은 믿음전에 예수님을 만나고 철저한 회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물론 예수님을 만나는 환상을 보고요
며칠을 앞을 못보고 식음을 전폐하는 경험이 성경에 나오죠,믿음이 먼저야 회개가 먼저냐의 의미보단
믿음에 따라오는 행위가 바로 회개라 봅니다 둘은 분리 될수 없구요
이글에서 말하는 회개는 인간이 억지로 짜내는 회개가 아니라
마음에서 뱉어내지 않고는 못견디는 그런 회개를 말하는 것 아닐까요? 주님이 알려주시는...
진정한 회개가 없다면 그건 그냥 믿어지는 것정도 이겠죠..
자신의 믿음이 진정한 믿음인지 우리가 어떻게 분별 할수 있겠어요? 성경에는 그런 예화가 아주 많이 나옵니다
욥기에서 욥이 하나님에게 원망할때 그믿음에 대해 판단하고 질타한 세친구에게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던 행위는
바로 그 욥에게 물질을 가져가고 기도를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들은 그렇게 했고 욥이 그친구들을 진심으로 기도해 주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욥의 시험과 환란을 거두셨죠
이 넷의 행위가 진정한 회개를 나타내는 것 아닐까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요
저별과 달님의 글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이글 혹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책의 글이 맞나요?)
자신이 믿는 믿음과 받은 믿음의 차이..흔히들 타력종교와 자력종교로 비교하던데..
그둘은 서로 다른게 아니라 서로 보완해주는거라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완전한 타력종교라 보여지지 않는게...첨과 끝은 그분에 의한 완전한 타력이지만
첨과 끝사이에 힘겨운 자력의 과정이 분명 존재한다는 걸 느끼거든요
그 "하나님이 주시는 거다"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깊히 생각해야 할 문제라 보여지네요
일전에 청교도적인 신앙서적서 비슷한 글을 읽은 기억이 있어서요
전... 진화론의 과학적 사고방식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설화를 문자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아니구요
그치만 제 신앙경험이 별과 달님과 많이 다르지 않는것 같다는 느낌이 드네요
과학적,이성적 사고와 종교적,기독교적 사고방식이 서로 다른 길을 가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궁극의 목표점은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고 과정의 길이 다른거겠죠
별과달님도 다른 다비아님들은 어떤 방식과 경험으로 예수님과 소통하는지 주목하는 것도 나쁠것 같지않네요
그럼 장사 잘되시길 바래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구원의 대 명제 안에서 구원의 서정에 의해 나눈다면 회개는 성화와 관련된 과제요, 이 역시 믿음 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은혜 안에서 믿음에 의해 회개하고 믿음에 의해 성화한다는 표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근 우리 교회에서 레마 선교회의 침투로 많은 물의를 이르키는 중에 이명범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성육해 오신 목적이 "마귀를 멸하시고자 오셨다" 설교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던데, 이 역시 성화의 과정과 관계된 것이거든요.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일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신앙하게 하셔서야 가능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순종하여 좆아 영접하고 믿는 우리 의지의 결단을 배제하는 구원의 은혜란 향유할 수 없지요.
중생이 하나님의 일방적 작업의 은혜라면 회개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강력히 촉구하시고 우리들이 응답하는 바로서의 회개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배제한 인간만의 일로서는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임이 명백하니까요.
회개를 "회계"로 표기하는 실수도, 우리의 고유한 국자인 한자어를 제대로 배우지 않은 데서 오는 실수가 아닐까요?
설교할때 목사들이 이런 실수를 너무 자주 너무 많이 해서 아쉬운 마음을 가진 때가 수 없이 많았습니다.
신학교가 설교준비를 할때 설교 원고에서 우리 말 어법에 맞는 원고가 작성되도록 "우리 말 어법 교육"이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비록 여러분이 세례를 받았고,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했으며, 신앙의 경력이 많다 할지라도
만약 여러분 마음속에 구원 받았다는 확신이 없거나, 하나님의 부재를 느끼신다면
지금 당장 그 문제를 놓고 기도에 전념 하십시오.
인생에 있어 이것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문제는 없습니다. "
전 저별과 달님께서 순수한 신앙의 소유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대목은 왠지 구원파의 주장과 너무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시나요?
하나님의 구원은 믿는 자에게 거저 주시는 은혜로 알고 있습니다.
WEZARD 님께서 하신 말씀에 공감하는 바입니다.
성경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하신일과 연관성을 맺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옴니다.
모든 것을 인간편에서 해석하고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주목하게 되면 안된다고 봄니다.
짧게 말해서 베드로를 세번 부인하게 만든 것은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의 사건임니다.
절대로 부인하지 않았다면 믿음의 주체는 결국 베드로가 소유하고 유지하는 꼴 임니다.
믿음을 주시는 분과 이끄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 예수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베드로는 세번 부인함을 통해 처절하게 느낌니다.
그 베드로는 이제 흔들리지 않는 믿음에 자신을 믿을 까요???
세번 부인하게 만드는 사건이 하나님의 주관안에서 벌어짐니다.
그런 사건이 꼭 필요했기 때문임니다.
이것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 할수는 없습니다.
믿음은 같으나 분량이 다르기 때문임니다.
어떤 자는 순교하게 하실수도 있고
어떤 자는 겨우 겨우 힘들게 주일 예배 지각하며 참석 할수도 있는검니다.
믿음안에는 걸림돌이 있습니다.
걸림돌 조차 예수믿게 하기 위함이 있고
걸려 넘어지게 함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선택권이 없습니다...
참 어려운 말임니다...
예수믿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넘어짐을 바라봄이 아니라
넘어짐을 통해서 선하게 이끄심에 감사하며
믿음으로 인도하시는 것에 감사하는 자 임니다.

믿음이 WEZARD 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주권으로 주어지는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신앙생활 하면서 이런 믿음이 항상 동일하게 유지 되는 것이 아니죠..
하나님은 자녀된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부르심의 뜻대로 합당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시지만
세상사와 신앙생활이 그런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님 의 글에서 베드로의 부인사건을 예로 들었는데요..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자
예수님은 이 를 알게 해준 것은 하나님이 너로 하여금 알게 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또 잠시 뒤 예수께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을 가르치시자
다시 베드로는 그리 말라고 주님이 하실 일을 만류 합니다.
이 때 예수님은 베드로의 마음에 사단이 들어가서 주님이 받을 십자가의 잔 을
받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의 자리를 넘볼려다가
쫓겨난 사단이 어지럽혀 놓은 이 피조세계를 회복 하시기 위해서 일하고 계십니다.
신앙생활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만 의지한다고 하면
우리의 삶에 순간 순간, 때대로 인도하시고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놓쳐 버리기 십상 입니다.
이 세상에는 분명 하나님의 자녀들을 넘어지고, 다시 믿음에서 떨어지게 하는 실체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실체와, 우리의 눈과 마음, 몸을 미혹하는 눈에 보이는 실체도 있습니다.
“의 의 도를 안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 니라. 이르기를 개 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다“ 고 사도 베드로는 믿는 자들도 길을 잘못 들어 서면 이런 형편이 됨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복음서에서 하나님 자녀로서 회개가 얼마나 중요한 관건임을 누누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회개는 생명 문을 여는 정말 중요한 단초입니다.
예수님의 첫 가르침이 회개하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을까요?
이 땅에서 살아 가면서 나의 교만함과, 내 욕심, 아집, 여러 가지 잘못을 스스로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회개 하면 하나님이 그때는
“그래 너는 내 아들이잖니.내가 너 를 잘 안다 ,나는 너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너의 하나님이다” 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오곤 하지요..
진정한 사랑의 본체로써, 생명을 주관하는 하나님을 그때서야 비로써 대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 베드로의 넘어짐에 주목한 것이 아니라 그의 신앙과정 중 그 시간을 주목해본 것입니다
wezard님이 얘기하신 것 처럼 예수님과 동행하고 가르침을 받았던 베드로,
예수님이 그리스도 되신다는 고백을 한 바로 그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했다는
성경의 사실을 인용한 것입니다
하물며 감각적으로 예수님을 보거나 만져본 일이 없는 우리들이
자신의 믿음을 어떻게 확인하고 성찰할수 있는지...과정을 설명하려는 의도였구요
베드로는 제자였지만 참 제자로 거듭나기 위해 그 사건을 통해서 철저한 변화의 길을 가게 된거라 생각합니다
이 모든게 말씀하신 것 처럼 하나님아래서 이뤄진 일이지요
wezard님의 글과 제글의 표현에 차이와 공감이 함께 공존하는 것 같은데...
베드로가 세번 부인함을 통해서 믿음 주시는 분과 이끄시고 영광 받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얘기는
문자적으론 받는 자와 주는 자의 입장을 어떻게 동시에 느낄수 있는지 공감이 잘 안가는 부분이고..
믿음안에는 걸림돌이 있다는 것과 무엇이 어렵다고 말씀하는 지도 공감이 안되네요
걸림돌은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에게 다 적용됩니다
걸림돌이 걸림돌로 끝나는 길과 믿음의 반석이 되는 길사이 인간의 선택이 있을 뿐이지요
하나님과 예수님은 그 선택의 길을 온 인류에게 열어 놓으셨습니다
어렵지 않은 것을 너무 어렵게 받아 들이시는 건 아닌지 생각합니다.
왜 이런 글을 올렸는지 이해가 되지 않네요.
다비아에 출입하신지 좀 되는 것 같은데....
마치 다비아는 틀렸어.
내 말을 들어. 이런 투로 들려서 살짝 불쾌한 느낌이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별과 달님. 초면이네요 ^^ 님은 제가 초면이시겠지만 저는 님의 여럿글을 읽어봤습니다
일단 저에 대해 간단히 소개가 필요하겠군요 ^^ 예장통합교회에 다니는 청년(서른좀 넘었습니다 ㅋ)입니다.
박영선목사님만 파고들다가 ㅋ 아는 형님의 추천으로 다비아에 들어와 제일 처음 접한게 매일QT 마가복음 묵상이었습니다.
QT내용상으로는 마침 그때 예수님께서 물위를 걷고 있으셨죠 ㅋ
근데 정목사님의 큐티해석이 저에게는 참 오묘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때 저는 성경이 하늘에서 떨어진 책이라고 생각지는 않았어도 상당부분은 사실로 받아들이고 싶어했던 상태였으니까요.
특히 예수님의 행적부분이요.
하여튼 그 QT를 단초로 다비아 곳곳을 탐독한후 크게 놀랐습니다. 홍해사건, 구름기둥 불기둥, 동정녀 마리아등등..
실망했다는 표현이 더 솔직한거 같군요. 신앙전반이 흔들렸다고나 할까요?!
보수적인 교회에서 자라온 평신도에게 성서의 역사비평은 감당하기 버거운 짐입니다.
일단 역사비평은 인정하겠는데 거기에 대한 대처방안이 시급하더군요.
그래서 자유주의신학 놀이터에 폭탄을 던졌다던 칼바르트의 책을 봤습니다. 놀랍게도 그분역시 성서의 역사비평을 용인(容認)하는 입장 같더군요. 전면부인할줄 알았는데 말이죠.
열받아서 당장 주일저녁셀리더모임(저희교회 청년부는 셀구조로 되어있습니다)에 가서 목사님께 따지듯 물었습니다.
오병이어, 물위를 걸은 사건이 역사적 사건이냐고 말이죠. 전 목사님께서 저를 꾸짖을줄 알았습니다. 꾸지람받고 다시 생각하려고 했었죠.
근데 목사님께서 부인하지 않으시더란말입니다 ㅋ 오히려 자신은 칼바르트를 좋아하신다면서~참 기가막힌 노릇이었죠 ㅋ
근데 왜 설교에는 그런 내색(성서의 역사비평)이 전혀 없으셨던 걸까요?!
제 이런질문 이후에도 목사님의 설교는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여전히 역사비평을 배제한 문자주의식 접근, 적용중심이었죠.
그후부터 목사님을 볼때면 안타까움이 늘 가슴에 남습니다. 설교듣기도 좀 어려워졌고요..
문자주의와 보수적 전통에 길들여진 교회기득세력의 의식구조를 전환하기란 한 젊은 목사에겐 너무나 버거운 짐이었겠죠.
요즘 진행되는 QT내용이 그런거 아닐까요? 버거운 짐을 지신 예수님 말입니다 ㅎ
계몽주의가 가져온 신학적 과제에 대한 답을 찾아 항해해왔던 현대신학자들의 고뇌의 항로를 통째로 간과할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자유주의신학이 한번 휩쓸고 간 이상 더이상 정통신학에서는 답을 찾기가 어려워졌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자유주의신학을 무시하고 덮어버리기에는 너무 많은것을 알아버리지 않았습니까 ㅋ
칼바르트의 변증법적 접근을 흉내내서 다비아에 대한 제 소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다비아를 접하면서 위기(부정)에 처하는거 같습니다.
신학적토대로 이루어지는 역사비평을 비롯한 인문학적 토대의 깊이있는 해석에도 불구하고
막판(?)에 설명할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말이죠. 저는 이 사태를 존재적 절망이라고 보고싶습니다만..
그제서야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인식론적 한계, 존재적 절망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주권(긍정) 말입니다. 실재라고도 할수있을까요?!
다비아는 이런 인간의 실존앞에서 할수없음과 해야됨의 역설을 안고 케리그마의 역할을 묵묵히 감당해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긴 세월을 몇몇 사람들의 목회적 입맛에 따라 놀아났다고 한다면 너무 거친표현인가요?!
자유주의신학의 흔적은 꽁꽁숨겨버린채, 입맛에 맞는 설교(기복주의)를 들어오며,
단순도식구도로 접근해 실존적 결단만을 요구당했던 세월이 기가막히지 않습니까?!
이제서야 뭔가 좀 보게되었는데 다시 눈을 가리자구요?
다비아에서 이루어지는 끝없는 논쟁과 토론, 대화가 하나님을 향한 갈망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기에
저별과 달님의 끊임없는 노력(?)도 다비아사(史)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역동적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인기관리를 위해서라도 조금은 마음을 오픈하심이 어떨런지요.. ㅎ

저의 이 글을 운영자들께서 쟁토방으로 옮겨야 한다고 판단한것 같은데요 ..
솔직히 이럴때는 제가 지금 기독교 사이트에 들어와 있는것 맞는지
제 자신이 혼돈이 막 오는군요..
그리구 쟁토방에 로그인 없이 자유로이 들어 오면 덜 번거롭겠는데요..
왜 굳이 이곳에 로그인 해야 되는지도 궁금 하군요?
제 글을 이 곳으로 옮긴 운영진도 이해가 잘 안되는군요..
사랑채에 결코 가벼운 사안이 아닌 쟁점적인 토론을 유발하는 글 들도 다소 있는것 같은데요..
유신 진화론 건도 제가 분명히 일하고 돌아 와서 링크 달겠다고 말씀 드렸는데
컴터 끄고 일하고 돌아오니 제가 올린 글이 삭제 되어 버렸더군요..
그들 얼굴도 한번 직접 뵌 적이 없지만
왜 그렇게 했는지 너무도 잘 이해가 되는걸요.
저 위에 보시면 열린토론방의 개설 취지가 적혀 있네요.
"그 방향과 정체성"이라는 글귀는 굵게 처리되어 있고요.
제가 알기로는 본 사이트, 그리고 다비아는
소위 다비아 운동을 위해 개설되고 운영되며 움직이는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별과 달님의 글은 거기서 완전히 벗어나 있거든요.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겁니다.
그래도 그런 이야기를 무시하지는 않지요.
열린 토론방에서 공개적으로 대화와 토론이 가능하니까요.
로그인을 해야만 이 방의 글을 읽고 쓸 수 있나봐요?
적절한 조치라고 봅니다.
왜 그런지는 곰곰히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다 말 못할 운영진의 고민도 있을겁니다.
저도 개인적으로는 3천명이 넘는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매스컴을 타기도 했죠.
별별 이야기가 다 올라옵니다.
좋은 글도 많고요. 하지만 다 수렴할 수는 없습니다.
한 기관, 단체의 정체성과 의지를 무시할 수는 없거든요.
저별과 달님의 순수의도와는 다르게 그 글은 다비아운동의 지향점과 방법론에 있어서
거의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어요.
그리고 유신진화론도, 본인 글도 아니고 어마어마한 양의 글을 그냥 긁어온데다가
단지 링크 하나 단다고 해서 저작권 문제, 전혀 해결되지 않습니다.
논문쓸 때 두 단어만 중첩되도 바로 따옴표 달고 각주 처리해야 합니다.
링크는 각주처리보다 유연하고 가볍습니다. 동급이 아닙니다.
저작권법의 칼날은 앞으로 더 날카로워졌으면 졌지 무뎌지지는 않을겁니다.
그렇게 긁어오다가는 언젠가 본보기로 다비아가 당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다비아가 그런 저작권을 보호해야
다비아의 지적 저작권도 보호받게 됩니다. 상호존중이지요.
그런 글은 간단히 링크 걸고, 본인이 소화하시는 데로 이야기를 하셔도
충분한 글입니다.
제 글이 운영진의 의사와 다를 수는 있지만 옆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드리고 싶은 말씀이었습니다.
이왕 다비아에 발을 들이신 김에
왜 이런 운동을 하고 있는지 단지 "읽기 답하는" 것만이 아니라
진지하게 고민하고 받아들이셨으면 합니다.
그래야 밟고 넘어설 수도 있습니다.

그럼 안희철 목사 님께서 어떤 정체성과 안 맞는지 좀 가르쳐 주시겠어요..
그리구 로그인 문제 생각해봐도 왜 굳이 로그인 해서 들어 가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좀 가르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또 유신 진화론건도 제가 간단하게 설명할줄 몰라서 안한것도 아니구요
그날 장사 준비 때문에 많이 바빠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저작권 이야기 하셨는데요.. 그럼 다비아 꼭지글에 요즘 사실상 펌글 칼럼 분도 올리고 음악방에도
계속 올라 오는데 사실 모두 저작권 문제 되는것 아닌가요?
왜 굳이 제가 올린 글을 문제 삼아서 저작권 문제 삼으시는 건가요?
일단 기본적으로 성경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요.
이걸 제가 여기서 설명해야 하는 건 아니죠?
이미 저별과 달님도 알만큼 아시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다비아에 널리고 널린 이야기니까요.
로그인은요, 그런 불편을 일부러 만드는 경우도 있어요.
공개의 단계라고 보시면 되죠.
물론 가입만 하고 로그인만 하면 볼 수 있게 해놓았다는 점에서도 투명해요.
토론방은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다비아 정체성과 안맞을 "수도 있다"는 전제가 있어요.
한편으로는 다비아의 글을 성실히 읽고 대할 준비가 되었는가를 판가름할 수도 있고요.
아무 사이트에나 막 가입하는 건 아니잖아요.
회원이 되고 회원의 자격 하에서 토론에 임하는 것이고
아래 운영원칙에 나온 데로, 그 테두리 안에서 토론이 이뤄지게 되니까
안정장치도 마련되는 셈이고요.
이것 말고도 많은 베려가 운영진들 내에 있을거예요. 저도 다 헤아릴 수는 없구요.
이런게 궁금하시면 아래 운영참여 란을 통해 얼마든지 물어볼 수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간단하게 설명할 줄 모르시지 않았다면 그렇게 하셨어야죠.
바쁘셨다면 바쁘지 않은 시간을 내서 하셨어야지요.
그게 무슨 생명을 다루는 시급한 문제였나요?
좀 빗나간 이야기지만, 사실 그 분야는 신학에서도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뤄지는 분야예요.
모두가 바빠요. 바빠서 그냥 긁어서 올리신 글을 읽는 이들도 모두 바쁘답니다.
저도 시간이 남아서 여기서 타자치고 있는 건 아니예요. 얼마나 제 상황을 이해하실지 모르겠지만.
서로 마찬가지지요.
펌글을 칼럼으로 올린 분이 있다고요? 그게 사실이라면 심각한 문제군요. 바로 문제제기 하세요.
음악방 문제는, 제가 거길 들어가본적이 없어서(제가 윈도우 체제를 안 쓰고 맥OS를 써서 플레이 자체가 안된답니다)
모르겠지만, 이 또한 중요한 지적이예요. 문제제기 하세요.
표적수사도 아니고 무슨 저별과 달님 글만 문제삼겠어요. 그런데 저별과 달님 링크 글이 눈에 확 띄긴 했어요. 말도 안되는 글을, 그것도 본인 글도 아니고 펌이라니. 그 효과가 더 크지 않았겠어요?

유신 진화론 비평에 관한 글이 말도 안되는 글 이 라면
그것이 바로 다비아의 정체성과도 연관이 되는군요..
그 효과가 그렇게 글을 삭제시킬 정도로 걱정 스러웠던가요?
그리구 이글 꼭지에서 창조, 회개, 기도, 말씀 뭐 이런 간단한 내용들을
문제 삼는 안희철 목사님이 전 이해가 잘 안되는군요..
그리고 저는 펌글이라도 한번 볼수 있다고 생각하고 문제 제기 하기 싫습니다.
음악방 문제도 마찬 가지구요..
다만 제 글을 시발점으로 다비아에서 먼저 문제 제기를 하길래 저도 물어 본것 이지요..
똥개도 지집에선 80% 먹고 들어 간다는데 뭐 공중에 헛발치기 제가 하는것 같습니다. 휴유~

제 말이 어렵나요? 난감하군요.
그리고요,
저별과 달님이 걱정되면 걱정됐지
다비아요? 미안한 말씀이지만 그깟 글에 무너졌으면
다비아는 진작에 쫑났습니다.
이말 또 오해 마세요. 내용 자체가 가볍다는 거지
던지는 주제의 깊이는 한 인간이 평생을 두고 해도 모자랍니다.
전 정말 저별과 달님 걱정이 됩니다.
이렇게 다비아 깊이 들어와 계시면서도
어쩜 저렇게 변화 없이 한결같을까 하고요.
제가 몇 가지 좀 여쭤봐도 되나요?
정말 궁금하고 걱정되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다비아에 들어오셨어요?
어떤 계기로 말이지요.
그리고 지금 여기 다비아에 머물고 계신 목적이나 이유가 있으신가요?
여기서 얻은 수확이나 열매가 있으신가요? 구체적으로 어떤?
다비아를 통해 신앙적 도전을 받았거나 충격을 받은(긍정적으로) 글은 무엇인가요?
따로 글타래를 열어서 글 달지 마시고 여기 리플로 달아주세요.
답 안하셔도 되요. 제가 이런 걸 요구할 권리는 없어요.
다만, 진심으로 걱정되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다비아가 한 개인개인에 맞추어 모두에게 좋은 결실을 맺어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다비아에도 한계가 있겠죠.
그래도 오랜 기간 여기 머물고 계시다면 특별한 이유라도,
혹은 적당한 목적이나 뭔가 얻는 것이라도 있지 않겠나 생각이 듭니다.
그럼...

진취적인 글들을 보고 나름대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바르트, 몰트만,판넨베르크의 신학에 대해서도 알게 된게 많구요..
여러가지 배울점도 많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리지만 이번에 제가 먼저 여기에 불만을 토로한건
사실상 100% 펌글이나 다름없는 글이 저 말고도 여러분이 올리는데 유독 제가 올린 건을
가지고 문제를 삼는것 같아서 제가 좀 예민해 진것 같습니다.
그리구 안희철 목사님은 지금 저를 꼭 취조 하고 계신것 같아요..
질문이 많은것 같으신데 다 답변 안해도 되죠..

이미 이전 댓글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저별과 달님께서 100% 펌글이라고 알려주신 것들 중에서
딱 1개만 펌글이었고
나머지는 다비아 회원들 본인의 글이었습니다.
나름대로는 균형감있게 게시판 관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저별과 달님처럼 예민하게 반응하시면
참 난감합니다.
유신 진화론에 대해서도 몇차례 댓글을 통해서 링크 처리해달라고 부탁드렸지만
지적하신 다른 글들을 삭제한 후에도
여전히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런 경우 운영자가 취할 태도는 형평성에 따라 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요?
저별과 달님께서는 유독 저별과 달님께서 올리신 글을 가지고 문제를 삼는다고 하시는데
저별과 달님께서야 말로 유독 다비아의 운영원칙에 어긋나는 글들을 많이 올리시지 않고 있었나요?
이전 리뉴얼 전부터 100% 펌글은 가급적 자제를 부탁드렸고
또한 글을 소개하실 때에는 링크 처리와 원문 출처를 부탁드렸는데도
일방적으로 퍼오기를 자주 해오신 분은 저별과 달님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메뉴에서 사라져 있지만 이전 퍼온글 게시판에 저별과 달님께서
올리신 글들만 봐도 그렇구요.
매번 운영원칙에 어긋나는 게시물에 대해서 운영자의 판단이 있을 때마다
다비아 정체성 운운하시면서 예민하게 반응하신 것은 오히려 저별과 달님이 아니신가 생각합니다.
(게시물을 게시판 성격에 따라 이동시키는 경우는 제법 됩니다.
하지만 모두 저별과 달님처럼 반응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랜 시간동안 경험과 합의를 통해 쌓여온 이곳의 운영원칙을 가급적
저별과 달님께서도 잘 지켜주셨음 합니다.
문제는 글의 내용이나 성격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운영원칙을 어기는 글 게시에 있지 않나 싶어요.
다시 한번 정중하게 부탁드립니다.
운영원칙 숙지해주시고, 그에 맞는 게시판 활동해주시면 됩니다.

전 사실 베낀글 코너에도 링크 달아야 하는줄 몰랐어요..
또 다른 회원 분들도 링크를 거는 분들도 있고
저처럼 아예 통째로 실어 올리는 분들도 많아 보여서
그렇게 올려도 되는줄 알았습니다.
이 점 숙지하지 못한 점은 저의 불찰 같네요..
앞으로 유의하여 글 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100% 펌 글이 딱 한개 만은 아닌것 같았는데요..
수고 하시는 이길용 박사 님을 자꾸 성가시게 해서 죄송 합니다.
그럼 수고 하십시요!

믿음은 토론의 출발점인 논리와 합리적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으라고 하는 이들에게는 그러한 강요부터가 잘못됐다고 말하는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믿음은 신과 나와의 개인적 관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확신한 믿음조차 다른이에게 강요되는 것은 위험하기 조차 합니다.
교회에 가면 믿음의 확신이 있느나고 물으며 강요하기조차 합니다.
그렇다고 답변하는 이나 또한 믿음의 확신에 차 묻는 교역자나 자신의 믿음에 대한 회의가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의 성숙함은 믿음의 확신이 아니라 믿음에 대한 회의로 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회의에는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심지어는 창조론 조차도 말입니다.
당신은 무엇으로 부터 이러한 창조론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믿음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습니까? 그렇다면 그 믿음에 대한 확신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렇다면 그것을 확신하지 않는 자의 믿음은 없는 것입니까?
님께서는다른 방식의 믿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다 지금은 사이비 이단으로 규정된 할렐루야 기도원에 대하여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교회의 많은 이들이 심지어는 매우 많은 교역자나 사모, 장로, 권사, 집사 등의 직분을 가진 분들이 이곳에 가서 성령의 체험을 하였다고 이야기 하곤 했습니다.
신유의 은사를 확인했고 이를 통하여 또는 뜨거운 성령의 불이 몸안에 들어왔다고 하면서 믿음에 대한 확신을 간증하곤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가졌던 믿음의 확신은 무엇일까요?
또한 알파코스 등에서 일어나는 금이빨 사건 등을 보면서 그러한 감정을 느끼는 이들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를 접하면서 이빨을 닦지 않아서 누렇게 되었다고 웃으며 말씀하시는 우리교회의 치의예과 교수이신 집사님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을 까요?
동일한 사건 속에서도 서로가 받아들이는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다양성 입니다.
당신이 가지는 믿음에 대한 회의 없는 확신은 바로 기독교인이 가지는 독선과 아집과 편견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하심을 뜨거운 무엇이 몸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나 방언이 그러한 것을 증거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의 믿음에 저 역시 무엇이라 말하지는 않겠지만 말씀이 곧 성령이라는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는 신비하고 뜨거운 무엇으로 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성령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세상에 선포되었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은 우리의 몫입니다.
님이 부정하시는 육신의 정욕 문제도 그것이 인간세상을 유지 발전시키는 의욕의 한 단편일 뿐입니다.
님이 터부시하는 부정적 정욕은 제가 이야기 하는 긍정적 의욕과 매우 분리되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어쩌면 분리가 불가능한 부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정욕이 분리되지 못한 인간의 군상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윤리적 종교로서 자신의 위상에 방점을 두지 않는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기독교는 매우 믿기 쉬운 종교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면 되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살아가면 되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신앙의 성숙을 위해서 확신할 것이 아니라 회의하며 믿음을 완성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아마도 다비아의 말씀들이 그러한 역할에 도움을 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