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을 제안한 지도 어언 10여일이 지났고 “이노무 토론 너무 느긋한거 아니야?” 하는 원성도 들리는 듯 해서 더 이상 늦출 수가 없군요. 이제 막 책을 손에 쥐신 분들께서도 쉽게 따라올 수 있도록 서서히 느긋하게 진행하겠습니다.
<첫번째 주제: 편파적인 텍스트>
휘틀럼의 “고대 이스라엘의 발명”의 첫 장은 ‘편파적인 텍스트와 파열된 역사’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편파적인 텍스트’란 다름아닌 성경(구약)을 말하는 것이지요. 휘틀럼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비평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이 바로 ‘편파성을 주장하는 휘틀럼 자신도 역사해석의 정치적 판단이라는 편파성에 함몰되어 있다’라는 것입니다. 책을 실제 읽지 않는 사람들에겐 훌륭한 떡밥인 셈이지요. 그런데 휘틀럼은 이미 “고대 이스라엘의 발명” 첫 장에서 자신의 글도 ‘편파적인 텍스트’라는 것을 인정하고 들어갑니다.
breeze는 역사학과 고고학에서 다루는 모든 텍스트와 유물은 편파적이라는데 (아니, 편파적일 수 밖에 없다는데) 일단 동의합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의 경전인 성경(구약)이 역사학이나 고고학 분야에서 ‘편파적인 텍스트’로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점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유대-기독교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텍스트가 학문 분야에서 다른 텍스트들이나 유물과 똑같이 취급되는 것에 편안하신지를 묻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식으로 취급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신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토론에 참여하면서 주의해야 할 사항들을 바로 아래 꼭지글에서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덧붙여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자신의 의견 만을 담담히 적어주시라는 겁니다. 설사 특정 의견에 대한 반대의견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즉, 다른 이의 의견에 댓글 달지 마시라는 겁니다. 그러한 문제는 breeze가 잘 조정해서 기회를 드릴 것입니다.
토론의 주제나 진행방식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면 저에게 쪽지주세요. 빼놓지 않고 심각하게 고려하겠습니다. 물론 하고 싶은 말이 있음에도 진행자인 breeze의 연약한 마음에 상처를 주면 어쩌나 또는 괜히 진행자의 심기를 건드려 토론하는 과정에서 손해라도 보면 어쩌나 하는 분들도 있겠지요. 녜, 둘 다 맞습니다. 푸하하하-----
낼 모래면 이 곳 동해에서의 생활을 마감하고 대전으로 터전을 옮겨가기에
그 마무리가 무척 바쁘다보니 한 일주일간은 토론에 참석하기가 쉽지 않을 듯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경전인 성경(구약)이 역사학이나 고고학 분야에서 ‘편파적인 텍스트’로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 저로서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생각입니다.
또한 유대-기독교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텍스트가 학문 분야에서 다른 텍스트들이나 유물과 똑같이 취급되는 것에도 본인은 아주 편안합니다.
이럴 때는 그 이유를 안밝혀도 돼나요?
우선, 히브리 성서가 편파적이군요.
팔레스타인 땅에, 그저 잠깐, 그것도 초라하게 존재했던,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선택한 특별한 왕조, 각별한 민족으로 격상(!)시켰으니까요.
다음으론, 성서고고학이 편파적이었어요.
학문적인 역량을, 히브리인들의 편파적인 진술을 입증하는 일에, 온통 쏟아 부었는데,
기실, 서구의 우월성을 확증하고, 그들의 지배권을 확보하자는, 탐욕스런 행보였죠.
이제부터는, 기독교인인 우리들이 편파적일 차례에요.
저들이 발명한 ‘이스라엘역사’의 허울을 폭로하면서, 서구문명에 포로로 잡혀있는
하나님과 우리를 구출하는 거예요.
음,, 말하자면
성서(넓은 의미, 즉 문서+자연+인생)를, 우리식으로(? ?? 암튼!!!) 읽어나가는 거죠. ^^*
두 번째 주제, 세 번째 주제,,, 이 토론을 쫓아가면서, 기회 닿는 대로,
저들의 편파성을 편파적으로(!) 마구마구(? 아냥, 느긋하게!) 성토할꼬얌. ㅋㅋ^^
먼저 물꼬를 터 준 월광님께 감사. 늘오늘님은 학창시절 시험볼 때 문제 끝까지 안 읽고 답부터 쓰는 스타일이었을 것 같아요. 두 분께 그리고 이와 의견이 같거나 비슷한 분들께 좌장(?)이 질문 하나 던집니다.
성경이 고고/역사학 분야에서 하나의 편파적인 텍스트로서 연구대상이 되는 것은 곧바로 그 연구 결과를 (기독교가) 어떤 방식으로 얼마만큼 수용해야 하는 지를 질문하게 합니다.
지난 수 세기 동안 주로 자연과학의 연구 결과가 여러 논란 속에서 우리들의 성경 읽기에 지대한 영향을 주어왔습니다. 그런데 고고학 분야의 결과는 지금까지 우리가 겪어왔던 방식과는 그 차원이나 효과가 다를 것 같습니다. 빅뱅에 의한 우주의 기원이나 진화론에 의한 생물 종의 다양성은 창세기 1장 안에서 융합되어 (모두가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창세기를 읽고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데 새로운 관점과 통찰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고학의 연구 결과는 우리의 인식이 미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줍니다 (휘틀럼의 책 2장에서 주로 다룹니다). 과거의 사건 자체를 없애 버릴 수 있는 파괴력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를들어, 만약 여호수아서 전체가 역사적으로 특정 시간대에 특정한 공간에서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여호수아서를 읽어야 할까요? 제 생각엔 빅뱅이론과 진화론을 가정하고 창세기 1장을 읽는 것과 똑같은 형식으로 읽을 수는 없을 것 같거든요. 시대와 지명과 이름이 (즉, 사건이) 없어져 버리고 (가공된) 이야기만 남는다면 그 안의 하나님을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여러분의 의견을 이 댓글의 댓글로 쭈-욱 달아주세요.
첫 질문에서 월광님이나 늘오늘님과는 다른 견해를 갖고 계신 분들은 여기에 의견 쓰지 마시고 새로운 댓글로 시작해 주세요.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은 다른 대화 주제가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