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 <열린 토론실>입니다. 다비안들의 부담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채>와는 달리, 보다 진지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나 주제를 나누고 싶은 분들을 위한 게시판입니다. 가급적 예의를 갖추시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대화는 다비안을 비롯한 여러 네티즌들의 온라인 상에서의 자유로운 것이기에 그 방향과 정체성이 반드시 다비아와 일치하지는 않음을 밝혀둡니다.
글 수 253
어제 설교 비평에 답글을 두개나 올리며 님의 진지한
댓글을 기대했지만 오늘 올리신 글은 저를 더욱 당혹스럽게 했기에
이곳 사랑채에서 대화를 더 나누길 원합니다.
님께서는
"죄문제를 성경의 중심으로 보지않고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가
중심이라는 주장들을 이해 할 수 없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이땅에 오심은 죄 문제를 해결하러 오셨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해결되는 영역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던가요?
죄라는 대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라는 집안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
라고 말하셨습니다.
저는 여기서 제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신구약 전체의 핵심 사상이 '하나님 나라'라는 사실은
더이상 설명이 필요없을 만큼 명백한 사실이고
이에 대한 근거 구절도 무수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의 성육신 더 나아가 십자가와 부활의 케리그마는
분명 속죄의 문제 정점에 놓고 있으며 죄라는 대문을 통해서는
당연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속죄라는 열쇠가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통로일 지언정
열쇠가 하나님 나라는 아니지 않습니까?
이는 명백한 본말의 전도 아닙니까?
그리고 님께서 이해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죄문제가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해결되는 나라인데
물론 맞습니다!
하지만 이는 죄송하게도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정의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단순히 속죄, 속량의 문제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통치와 이를 실현하는 운동(movement) 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불의와 폭압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사회적 부정과 불의의 내면에 인간의
탐욕스런 죄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고
이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이겨내는 능력을
구하는 것이 바른 태도이겠지요.
하지만 이땅의 아픔과 절망이 단순히 속죄를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을 증거하신 대상은
로마제국의 폭거와 종교기득권층의 횡포에
짓눌려 있는 '아나윔'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증거하신 하나님 나라가
단순히 '너희 죄를 용서받아라' 이겠습니까?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결코 속량 문제를 가볍게 생각하지않고
이는 분명 하나님 나라를 열어가는 열쇠임을 믿습니다.
그런데 어찌 하나님의 나라를 죄 문제로만 뒤덮을 수가 있겠습니까?
정말 이 두 부등관계가 이해되지 않으십니까?
아니면 알면서도 외면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한가지 더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님께서는 다른글의 댓글에서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요즘은 신학적 막가파 시대다.남녀분별을 말함에도,
남녀차별로 이해해서 모든 부분에서 남녀동일을 주장한다.
하나님의 창조원리,질서를 말함에도,요즘은 그것도 차별이요
타파의 대상이 되는 시대인 것이다.
여자목사제도가 생겨난 것도 지난세기의 일이다. 그것을 차별로 보고 불평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여자 목사 제도가 차별에 대한 불평인지요?
어떻게 이것이 신학적 막가파 행동이라고 생각하시는 지요?
저는 이와 같은 말씀하시는 분들 앞에 답답함을 금할길이 없습니다.
제가 입대하기전 소위 '기저귀' 사건이 있었습니다.
인터넷으로 널리 공개된 mp3 파일에 의하면
그 사건의 장본인 되시는 목사님은 그날 총신대 신대원 채플에서
'이것이 보수 신학이고 말씀중심' (기억이 오래되어 축자적으로 정확치는 않습니다)라며
여자 목사 안수에 반대를 표하셨습니다.
분명 그에 대한 근거는 고린도전서와 디모데 전서에 기록된 바울의 논술이겠지요.
'여자는 가르치지 말라', '여자는 조용하라' 같은 말들 말이지요.
그런데 저는 여기서 의아심을 감출수가 없습니다.
합동측을 비롯해서 여성 목사 안수를 금하는 교단들은
분명 여자전도사님들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들은
각 교회에서 정말 헌신적으로 사역하십니다.
대체 '전도사'로서 가르치는 것은 허용되면서 '목사'로서
가르치는 것은 왜 인정받을수 없는 것이지요?
교회의 편의에 따라 남자들과 다름없이 일은 시키면서
정작 그에 따른 권한과 권위를 감히 성경말씀을 들먹이며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 명백히 남녀노소빈부의 차이가 없음을 (갈 3:28)
선포하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원칙론적인 사상입니다.
고린도전서와 디모데 전서의 해당 구절은 당시 '상황'에 따른 기록일 뿐이고요
더군다나 구약의 전통에 따라도 사사 드보라는 말할것도 없고
요시야 왕때 발견된 율법 두루마리에 대한 설명을 듣기 위해
제사장과 신하들이 찾아간 사람은 다름 아닌 여선지자 훌다였습니다.
그외의 성경 말씀을 넘겨보아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남녀의 차별이 없음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입니다.
그 어느 남성 못지 않게 충분한 신학적 준비를 갖추고 농어촌과 선교지 등지에서
결혼도 포기하며 헌신적으로 사역하시는 여자 전도사님들이
단지 여자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축도도, 안수도 할 수 없는
그 서글픈 현실과 눈물겨운 심정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대체 어떻게 이것이 차별이 아닌 분별이며
보수신학이며 말씀 중심입니까?
또 이에 대해 저항하는 각 교단 여성 신학생들과 전도사님들이
어째서 신학적 막가파입니까?
님께서는 여자 목사안수를 허용하는 저희교단(통합) 신학이
인본주의라고 생각하겠지만 지독한 편견으로 성경을 곡해하는 것이
오히려 남성우월주의와 권위주의에 사로잡힌 인본주의입니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더이어서 하겠습니다.
님께서 인용하신 편지글은 그야말로 감정만을 자극할 뿐이지
그에 따른 논리적 근거는 상당히 빈약했습니다.
성경 곳곳에 두루나타난 하나님의 모성을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부성을 부인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어머니라고 부르는것이 신성모독이라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만 불러야 하는 것 역시 신성모독입니다.
님께서는 깔뱅사상의 전통주의를 따른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전통과 정통은 반드시 구분되어야 합니다.
지난 시간 주류로 인정되어온 신학이라해서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며
오늘날의 상황(context)에서 재해석해야 합니다.
물론 그렇다해서 진리가(text) 훼손되어서는 안되지만
참된 재해석만이 진리를 더욱 진리되게하는 도구이지
익숙한 진리만을 고집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다소 감정이 격해저 죄송합니다.
님의 글 곳곳에는 하나님과 성경 그리고 신학의 '앎'에 대한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때문에 쉽사리
다른 이들의 '앎'에 대해 비난을 가하고 있고요...
그런데 저는... 성경을 다독하는 편임에도 읽으면 읽을수록
그리고 아직 어린 나이지만 삶의 터널을 지나면 지날수록
하나님에 대해 더욱더 '모르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때문에 더욱 두 눈을 부릎뜨며 성경을 읽고
앞선이들의 고뇌가 담긴 신학책을 들추게 됩니다.
과연 님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있다고 확신하십니까?
지금의 앎에 대해서 자신하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당연히 겸허하게 다른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일단 충분히 경청한 후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것이
학문의 바른 순서가 아닙니까?
제가 이렇게 흥분해서 긴 글을 쓰는 까닭은
총신, 고신 등 '보수 신학' 을 자임하는 학교 신학생들
혹은 목회자들의 전형적인 그늘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저도 모르게 그러한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네요.
무례하게 들리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님께서는 어쩌면 제 신학이 인본주의적 장신대
신학아래서 불건전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저희 학교 주변 친구들은 제 '보수'적 신앙에
종종 걱정을 보낼 때가 있습니다.
또 기회가 닿을 때마다 장애인 이동권 투쟁등
집회 현장에 '운동권' 선배들과 찾아나서는 저를 보고
'진보'적으로 치우쳤다는 우려를 보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에 게의치 않습니다.
참된 신학은 '진보'혹은 '보수' 라는 특정이데올로기에
결코 메여있지 않으며 저마다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맞이하는 진보와 보수 사이의 그 어디쯤이기 때문이지요
바른 신념과 대화 그러한 칼과 칼집의 위대한 역학관계를 통해
님의 신앙과 신학이 더욱 온전히 성장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댓글을 기대했지만 오늘 올리신 글은 저를 더욱 당혹스럽게 했기에
이곳 사랑채에서 대화를 더 나누길 원합니다.
님께서는
"죄문제를 성경의 중심으로 보지않고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가
중심이라는 주장들을 이해 할 수 없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이땅에 오심은 죄 문제를 해결하러 오셨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해결되는 영역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던가요?
죄라는 대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라는 집안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
라고 말하셨습니다.
저는 여기서 제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신구약 전체의 핵심 사상이 '하나님 나라'라는 사실은
더이상 설명이 필요없을 만큼 명백한 사실이고
이에 대한 근거 구절도 무수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의 성육신 더 나아가 십자가와 부활의 케리그마는
분명 속죄의 문제 정점에 놓고 있으며 죄라는 대문을 통해서는
당연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속죄라는 열쇠가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통로일 지언정
열쇠가 하나님 나라는 아니지 않습니까?
이는 명백한 본말의 전도 아닙니까?
그리고 님께서 이해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죄문제가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해결되는 나라인데
물론 맞습니다!
하지만 이는 죄송하게도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정의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단순히 속죄, 속량의 문제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통치와 이를 실현하는 운동(movement) 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불의와 폭압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사회적 부정과 불의의 내면에 인간의
탐욕스런 죄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고
이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이겨내는 능력을
구하는 것이 바른 태도이겠지요.
하지만 이땅의 아픔과 절망이 단순히 속죄를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을 증거하신 대상은
로마제국의 폭거와 종교기득권층의 횡포에
짓눌려 있는 '아나윔'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증거하신 하나님 나라가
단순히 '너희 죄를 용서받아라' 이겠습니까?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결코 속량 문제를 가볍게 생각하지않고
이는 분명 하나님 나라를 열어가는 열쇠임을 믿습니다.
그런데 어찌 하나님의 나라를 죄 문제로만 뒤덮을 수가 있겠습니까?
정말 이 두 부등관계가 이해되지 않으십니까?
아니면 알면서도 외면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한가지 더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님께서는 다른글의 댓글에서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요즘은 신학적 막가파 시대다.남녀분별을 말함에도,
남녀차별로 이해해서 모든 부분에서 남녀동일을 주장한다.
하나님의 창조원리,질서를 말함에도,요즘은 그것도 차별이요
타파의 대상이 되는 시대인 것이다.
여자목사제도가 생겨난 것도 지난세기의 일이다. 그것을 차별로 보고 불평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여자 목사 제도가 차별에 대한 불평인지요?
어떻게 이것이 신학적 막가파 행동이라고 생각하시는 지요?
저는 이와 같은 말씀하시는 분들 앞에 답답함을 금할길이 없습니다.
제가 입대하기전 소위 '기저귀' 사건이 있었습니다.
인터넷으로 널리 공개된 mp3 파일에 의하면
그 사건의 장본인 되시는 목사님은 그날 총신대 신대원 채플에서
'이것이 보수 신학이고 말씀중심' (기억이 오래되어 축자적으로 정확치는 않습니다)라며
여자 목사 안수에 반대를 표하셨습니다.
분명 그에 대한 근거는 고린도전서와 디모데 전서에 기록된 바울의 논술이겠지요.
'여자는 가르치지 말라', '여자는 조용하라' 같은 말들 말이지요.
그런데 저는 여기서 의아심을 감출수가 없습니다.
합동측을 비롯해서 여성 목사 안수를 금하는 교단들은
분명 여자전도사님들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들은
각 교회에서 정말 헌신적으로 사역하십니다.
대체 '전도사'로서 가르치는 것은 허용되면서 '목사'로서
가르치는 것은 왜 인정받을수 없는 것이지요?
교회의 편의에 따라 남자들과 다름없이 일은 시키면서
정작 그에 따른 권한과 권위를 감히 성경말씀을 들먹이며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 명백히 남녀노소빈부의 차이가 없음을 (갈 3:28)
선포하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원칙론적인 사상입니다.
고린도전서와 디모데 전서의 해당 구절은 당시 '상황'에 따른 기록일 뿐이고요
더군다나 구약의 전통에 따라도 사사 드보라는 말할것도 없고
요시야 왕때 발견된 율법 두루마리에 대한 설명을 듣기 위해
제사장과 신하들이 찾아간 사람은 다름 아닌 여선지자 훌다였습니다.
그외의 성경 말씀을 넘겨보아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남녀의 차별이 없음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입니다.
그 어느 남성 못지 않게 충분한 신학적 준비를 갖추고 농어촌과 선교지 등지에서
결혼도 포기하며 헌신적으로 사역하시는 여자 전도사님들이
단지 여자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축도도, 안수도 할 수 없는
그 서글픈 현실과 눈물겨운 심정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대체 어떻게 이것이 차별이 아닌 분별이며
보수신학이며 말씀 중심입니까?
또 이에 대해 저항하는 각 교단 여성 신학생들과 전도사님들이
어째서 신학적 막가파입니까?
님께서는 여자 목사안수를 허용하는 저희교단(통합) 신학이
인본주의라고 생각하겠지만 지독한 편견으로 성경을 곡해하는 것이
오히려 남성우월주의와 권위주의에 사로잡힌 인본주의입니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더이어서 하겠습니다.
님께서 인용하신 편지글은 그야말로 감정만을 자극할 뿐이지
그에 따른 논리적 근거는 상당히 빈약했습니다.
성경 곳곳에 두루나타난 하나님의 모성을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부성을 부인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어머니라고 부르는것이 신성모독이라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만 불러야 하는 것 역시 신성모독입니다.
님께서는 깔뱅사상의 전통주의를 따른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전통과 정통은 반드시 구분되어야 합니다.
지난 시간 주류로 인정되어온 신학이라해서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며
오늘날의 상황(context)에서 재해석해야 합니다.
물론 그렇다해서 진리가(text) 훼손되어서는 안되지만
참된 재해석만이 진리를 더욱 진리되게하는 도구이지
익숙한 진리만을 고집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다소 감정이 격해저 죄송합니다.
님의 글 곳곳에는 하나님과 성경 그리고 신학의 '앎'에 대한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때문에 쉽사리
다른 이들의 '앎'에 대해 비난을 가하고 있고요...
그런데 저는... 성경을 다독하는 편임에도 읽으면 읽을수록
그리고 아직 어린 나이지만 삶의 터널을 지나면 지날수록
하나님에 대해 더욱더 '모르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때문에 더욱 두 눈을 부릎뜨며 성경을 읽고
앞선이들의 고뇌가 담긴 신학책을 들추게 됩니다.
과연 님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있다고 확신하십니까?
지금의 앎에 대해서 자신하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당연히 겸허하게 다른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일단 충분히 경청한 후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것이
학문의 바른 순서가 아닙니까?
제가 이렇게 흥분해서 긴 글을 쓰는 까닭은
총신, 고신 등 '보수 신학' 을 자임하는 학교 신학생들
혹은 목회자들의 전형적인 그늘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저도 모르게 그러한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네요.
무례하게 들리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님께서는 어쩌면 제 신학이 인본주의적 장신대
신학아래서 불건전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저희 학교 주변 친구들은 제 '보수'적 신앙에
종종 걱정을 보낼 때가 있습니다.
또 기회가 닿을 때마다 장애인 이동권 투쟁등
집회 현장에 '운동권' 선배들과 찾아나서는 저를 보고
'진보'적으로 치우쳤다는 우려를 보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에 게의치 않습니다.
참된 신학은 '진보'혹은 '보수' 라는 특정이데올로기에
결코 메여있지 않으며 저마다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맞이하는 진보와 보수 사이의 그 어디쯤이기 때문이지요
바른 신념과 대화 그러한 칼과 칼집의 위대한 역학관계를 통해
님의 신앙과 신학이 더욱 온전히 성장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2007.02.01 03:37:09
님의 경우는 여자목사 안수문제에 관해서도 정대진님의 글에는 많은 반론을 하고 싶다고 한 것을 보니 여성에 대한 성직임명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저는 여성에 대한 성직임명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단 성서를 보면 하느님이 여성을 예언자로 임명하시어 그분의 말씀을 전달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점에서 여성성직은 아주 성서적입니다. 신학자중에는 신약성서에 나오는 교회내 여성 행정가들을 디아코노스(부제의 어원)으로 보는 분들도 있습니다.
또한 교회역사속에서도 여성 성직임명을 하는 교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제가 신앙생활하는 대한성공회만 해도 1999년 이후 여성에게 사제서품을 허용했으며, 최근엔 여성수도자인 오인숙 카타리나 수녀님에 대해 부제서품을 하였습니다. 대한성공회의 모태인 영국 성공회는 이미 1992년 여성에 대한 사제서품을 허용했고, 물론, 그 이전부터 여성에게 부제서품을 허용해왔습니다. 혹시 용어를 못 알아들으실지 모르겠는데, 사제는 교회에서 감서성찬례(성공회 미사)집전과 설교를 할 권한이 있는 신부이고, 부제는 주교와 사제를 돕는 성직자입니다. 보수교단으로 불리는 성결교회도 여성에게 목사안수를 허용했고, 최근 감리교도 1962년에 한국 개신교회 최초로 여성에게 목사안수를 허용했습니다.
그리고 님이 그토록 지지하는 깔뱅주의교회들도 이미 여성에 대해 목사안수를 허용해오고 있습니다. 그 증거로 미국 장로교(PCA)의 경우 여성에 대한 목사안수를 허용했습니다. 혹시 아실지 모르겠는데 기독교 우익이자 온건 그리스도교 근본주의자인 빌리 그래함도 아들과 딸이 모두 개신교 목사입니다.
단지, 남성 목사들의 기득권지키기 때문에 한국 보수골통 개신교 교단들이 불허하는 것입니다.
만약 님의 생각대로 여성에게 성직임명하는게 잘못이라면 왜 우리 성공회와 감리교 그리고 미국 장로교가 여성에게 성직을 허용하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여성에게 목사안수를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구절로 여겨져온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의 '여성은 집회에서 조용해야 합니다.'라는 구절은 사도 바울로께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후대에 남성 성직자들이 집어넣은 구절입니다. 이는 제 주관적 의견이 아니라 신약성서학자로 유명한 김세윤 교수의 학설입니다. 더구나 전체적으로 읽어보면 여성은 조용하라는 게 아닙니다. 사도 바울로는 이 구절에서 '남성만 하느님의 말씀을 맡았습니까?'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초대교회에서는 루가의 복음서의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가 여성성직자들의 반목을 중재하기 위해 넣은 이야기라는 학설이 있을 정도로 여성도 성직자로 일한게 분명합니다.
이런데도 여성차별과 여성 구분이라는 말장난을 하면서 수구성을 보이실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 하시러 이땅에 오셨다는 말은 맞는 말입니다. 니케아 신경을 보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오셨다는 신앙고백이 있고, 루가의 복음서 1장에도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게 예수님에 대한 해석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s
왜냐면 루가의 복음서 4장을 읽어보면 [나는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고, 가난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왔습니다.]라고 선언하시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억눌린 자는 정말 문자 그대로 억압받는 자를 말합니다. 즉, 예수님의 메시아 취임설교는 정치적으로 억눌린 자를 해방시키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혁명가적인 선언인 것입니다. 만약 로마제국의 위정자들이 이 말을 들었다면 예수님은 33세가 아닌, 30세에 십자가에서 처형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행복설교(루가 6:21,25)와 예수님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의 성가(루가 1:53)도 진지하게 들어보면 사회혁명을 조장하는 내용들입니다. '부자는 굶주릴 날이 올 것이므로 불행하다.','가난한 자는 배부르게 될 것이므로 행복하다. ','하느님은 부자를 빈손으로 만드셨습니다.'라는 내용들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러 오셨다고만 보는 것은 그리고 예수님 즉, 그리스도가 죄를 전제로 한 단어라는 님의 주장은 루가의 복음서 1장만 읽고 판단하는 지극히 편협한 것입니다.
십자가도 물론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숭고한 죽음이라는 점에서 죄를 전제로 합니다만, 정작 복음사가인 마르코는 억울하게 고난받는 이들의 수난의 상징이라는 다른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더구나 십자가형이 혁명가들에 대한 탄압수단이었다는 점에서 예수님이 로마에게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의미에서 님의 근본주의적 해석은 너무 단순한 해석, 불의한 체제에 대한 비평의식을 없애는 기득권층들만의 신앙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말이 심하다고 하셨는데, 그렇게 느끼셨다면 정말 미안합니다.주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정 선생님이 배를 잡고 웃었다는 말은 가시박힌 말이 아닐 겁니다. 그분의 착한 기질상 남을 비웃거나 옹졸할 분이 아니거든요...한번 오프라인 모임이 있으면 제 말이 이해가 가실 겁니다.
일단 성서를 보면 하느님이 여성을 예언자로 임명하시어 그분의 말씀을 전달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점에서 여성성직은 아주 성서적입니다. 신학자중에는 신약성서에 나오는 교회내 여성 행정가들을 디아코노스(부제의 어원)으로 보는 분들도 있습니다.
또한 교회역사속에서도 여성 성직임명을 하는 교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제가 신앙생활하는 대한성공회만 해도 1999년 이후 여성에게 사제서품을 허용했으며, 최근엔 여성수도자인 오인숙 카타리나 수녀님에 대해 부제서품을 하였습니다. 대한성공회의 모태인 영국 성공회는 이미 1992년 여성에 대한 사제서품을 허용했고, 물론, 그 이전부터 여성에게 부제서품을 허용해왔습니다. 혹시 용어를 못 알아들으실지 모르겠는데, 사제는 교회에서 감서성찬례(성공회 미사)집전과 설교를 할 권한이 있는 신부이고, 부제는 주교와 사제를 돕는 성직자입니다. 보수교단으로 불리는 성결교회도 여성에게 목사안수를 허용했고, 최근 감리교도 1962년에 한국 개신교회 최초로 여성에게 목사안수를 허용했습니다.
그리고 님이 그토록 지지하는 깔뱅주의교회들도 이미 여성에 대해 목사안수를 허용해오고 있습니다. 그 증거로 미국 장로교(PCA)의 경우 여성에 대한 목사안수를 허용했습니다. 혹시 아실지 모르겠는데 기독교 우익이자 온건 그리스도교 근본주의자인 빌리 그래함도 아들과 딸이 모두 개신교 목사입니다.
단지, 남성 목사들의 기득권지키기 때문에 한국 보수골통 개신교 교단들이 불허하는 것입니다.
만약 님의 생각대로 여성에게 성직임명하는게 잘못이라면 왜 우리 성공회와 감리교 그리고 미국 장로교가 여성에게 성직을 허용하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여성에게 목사안수를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구절로 여겨져온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의 '여성은 집회에서 조용해야 합니다.'라는 구절은 사도 바울로께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후대에 남성 성직자들이 집어넣은 구절입니다. 이는 제 주관적 의견이 아니라 신약성서학자로 유명한 김세윤 교수의 학설입니다. 더구나 전체적으로 읽어보면 여성은 조용하라는 게 아닙니다. 사도 바울로는 이 구절에서 '남성만 하느님의 말씀을 맡았습니까?'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초대교회에서는 루가의 복음서의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가 여성성직자들의 반목을 중재하기 위해 넣은 이야기라는 학설이 있을 정도로 여성도 성직자로 일한게 분명합니다.
이런데도 여성차별과 여성 구분이라는 말장난을 하면서 수구성을 보이실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 하시러 이땅에 오셨다는 말은 맞는 말입니다. 니케아 신경을 보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오셨다는 신앙고백이 있고, 루가의 복음서 1장에도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게 예수님에 대한 해석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s
왜냐면 루가의 복음서 4장을 읽어보면 [나는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고, 가난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왔습니다.]라고 선언하시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억눌린 자는 정말 문자 그대로 억압받는 자를 말합니다. 즉, 예수님의 메시아 취임설교는 정치적으로 억눌린 자를 해방시키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혁명가적인 선언인 것입니다. 만약 로마제국의 위정자들이 이 말을 들었다면 예수님은 33세가 아닌, 30세에 십자가에서 처형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행복설교(루가 6:21,25)와 예수님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의 성가(루가 1:53)도 진지하게 들어보면 사회혁명을 조장하는 내용들입니다. '부자는 굶주릴 날이 올 것이므로 불행하다.','가난한 자는 배부르게 될 것이므로 행복하다. ','하느님은 부자를 빈손으로 만드셨습니다.'라는 내용들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러 오셨다고만 보는 것은 그리고 예수님 즉, 그리스도가 죄를 전제로 한 단어라는 님의 주장은 루가의 복음서 1장만 읽고 판단하는 지극히 편협한 것입니다.
십자가도 물론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숭고한 죽음이라는 점에서 죄를 전제로 합니다만, 정작 복음사가인 마르코는 억울하게 고난받는 이들의 수난의 상징이라는 다른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더구나 십자가형이 혁명가들에 대한 탄압수단이었다는 점에서 예수님이 로마에게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의미에서 님의 근본주의적 해석은 너무 단순한 해석, 불의한 체제에 대한 비평의식을 없애는 기득권층들만의 신앙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말이 심하다고 하셨는데, 그렇게 느끼셨다면 정말 미안합니다.주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정 선생님이 배를 잡고 웃었다는 말은 가시박힌 말이 아닐 겁니다. 그분의 착한 기질상 남을 비웃거나 옹졸할 분이 아니거든요...한번 오프라인 모임이 있으면 제 말이 이해가 가실 겁니다.
2007.02.01 11:20:45
정말 아이러니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목숨을 거는 듯한 포즈를 취하는 보수 근본주의자들이 더 이데올로기적이고 더 인본주의적이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만든, 일차원적이거나 평면적인 "신학원리"가 절대적인양 하나님을 그 속에 구겨 넣어서 하나님이 숨도 못쉬게 만든 느낌이 농후합니다... 어쩌면 그 하나님은 그들의 무의식 속에 투영된 금기심( taboo)이거나 강박의식의 형상화는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말이 너무 과격했는지 모르지만...
2007.02.01 16:53:41
제 글의 의미는 하나님의 나라가 성경의 중심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죽어있는 인간상태의 비참함 또한 성경의 중심적인 내용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 하시러 이땅에 오셨습니다. 그 구원의 성격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를 정리 하자면 또 여러 주장들이 있을 수도 있겠죠. 저는 창세기에서부터 계속해서 중심주제로 나타나는 것은 죄로말미암아 영적으로 죽어있는 인간의 비참한 상태와 그럼에도 구속역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생명으로의 회복(하나님의 나라)에대한 약속과 성취로 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본질)에대한 정대진님의 견해는 저와는 많이 다르군요. 막연하게 이쪽 계통에 있는 분들은 이렇게 생각들을 하고 있을거란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자목사 안수문제에 관해서도 정대진님의 글에는 많은 반론을 하고 싶지만, 요즘 눈이 안좋고 컴퓨터 글쓰기도 독수리 타법으로 겨우 하고 있으니 그만둘까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본질)과 여자목사제도의 이해에 관해서는 제 생각을 대변하는 책을
소개하겠습니다.혹 기회가 되시면 접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와 교회,은혜와 영광(게할더스 보스)-크리스찬 다이제스트,
*하나님 나라의 도래(해르만 리델보스)-생명의 말씀사
* 교 회(에드먼드 클라우니)-IVF
그리고 바우로님,위의 짧은 글을 통하여 제 말의 의도를 이해 하셨을 것으로 생각 합니다.
바우로님이 설명하신 내용들의 단어를 살펴 보십시오. 예수,구원,십자가,그리스도....
이단어들이 강하게 전제하고 있는 단어는 죄가 아닙니까?죄로말미암아 죽어있는 인간.
어떤 사람들이 성경의 내용을 창조,타락,구속으로 정리 하기도 하던데,타락(죄)또한
성경의 핵심사항이란 말입니다.그리고 구속(하나님의 나라)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문제겠죠.
그리고 '막가파'라는 용어 사용은 취소 합니다. 무례한 표현을 용서 하시기 바랍니다.
어쩌다 이 까페에 들어와 보니,제 생각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는 분들의 글을읽고 답답해서
한마디하고 나간다는 생각으로 한 말입니다. 제가 막 나간 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댓글들을 살펴보면서 느낀점 한가지만 말씀 드리고 마칠까 합니다.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대할때 글속에 가시들이 들어 있는 느낌을 갖는 글들이 많더군요.
저의 글에대한 댓글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978번과 979번의 댓글을 보면,979번의 댓글에서는
정목사님도 그런 모습이 보입니다. '배를 잡고 웃었다'
댓글을 통해서 말씀 드리려다 제가 저지른 일이 있어서 참다가 이참에 말씀 드립니다.
생명품은 자들로서 생명의 능력이 댓글 속에서도 비춰졌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본질)에대한 정대진님의 견해는 저와는 많이 다르군요. 막연하게 이쪽 계통에 있는 분들은 이렇게 생각들을 하고 있을거란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자목사 안수문제에 관해서도 정대진님의 글에는 많은 반론을 하고 싶지만, 요즘 눈이 안좋고 컴퓨터 글쓰기도 독수리 타법으로 겨우 하고 있으니 그만둘까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본질)과 여자목사제도의 이해에 관해서는 제 생각을 대변하는 책을
소개하겠습니다.혹 기회가 되시면 접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와 교회,은혜와 영광(게할더스 보스)-크리스찬 다이제스트,
*하나님 나라의 도래(해르만 리델보스)-생명의 말씀사
* 교 회(에드먼드 클라우니)-IVF
그리고 바우로님,위의 짧은 글을 통하여 제 말의 의도를 이해 하셨을 것으로 생각 합니다.
바우로님이 설명하신 내용들의 단어를 살펴 보십시오. 예수,구원,십자가,그리스도....
이단어들이 강하게 전제하고 있는 단어는 죄가 아닙니까?죄로말미암아 죽어있는 인간.
어떤 사람들이 성경의 내용을 창조,타락,구속으로 정리 하기도 하던데,타락(죄)또한
성경의 핵심사항이란 말입니다.그리고 구속(하나님의 나라)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문제겠죠.
그리고 '막가파'라는 용어 사용은 취소 합니다. 무례한 표현을 용서 하시기 바랍니다.
어쩌다 이 까페에 들어와 보니,제 생각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는 분들의 글을읽고 답답해서
한마디하고 나간다는 생각으로 한 말입니다. 제가 막 나간 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댓글들을 살펴보면서 느낀점 한가지만 말씀 드리고 마칠까 합니다.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대할때 글속에 가시들이 들어 있는 느낌을 갖는 글들이 많더군요.
저의 글에대한 댓글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978번과 979번의 댓글을 보면,979번의 댓글에서는
정목사님도 그런 모습이 보입니다. '배를 잡고 웃었다'
댓글을 통해서 말씀 드리려다 제가 저지른 일이 있어서 참다가 이참에 말씀 드립니다.
생명품은 자들로서 생명의 능력이 댓글 속에서도 비춰졌으면 합니다.
2007.02.01 17:34:26
구름님... 우선 저보다 많이 연장자이신데
이처럼 공개적인 공간에 자칫 무례하게 들릴수 있는
격한 감정이 표출된 글을 앞서 올려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이를 너그러이 이해하시고 답글 달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님께서는 제 글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셨습니다.
죄로 말미암은 인간과 피조세계의 비참함 그리고 이를 위해
스스로를 내던지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
이와 같은 케리그마가 성경의 중심이 아니란 것을
감히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저는 결코 이를 가볍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와 같은 케리그마 까지도 성경전체를 면면히 흐르는
'하나님 나라' 사상보다는 결코 우위에 둘수 없다는 사실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님께서는 제가 말한 하나님 나라 개념을 두고 '이 쪽 계통' 이라는 표현으로
저와 다비아를 어느 특정 집단으로 묶으셨는데
제가 하나님 나라 이해에 있어 '불의와 폭압에 맞서 싸운다'는 것을
말한 것은 결코 그것만이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영역은 죄문제로 축소 될 수 없고
그와같은 현실성의 문제역시 포함함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사실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는 것도
이미 케케묵은 사고방식일 뿐입니다.
대체 개인구원없는 사회구원 혹은 사회구원없는 개인구원이 무슨의미가 있습니까?
18~19세기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아시아와 아프리카등지에
도착했던 서구 선교사들은 철저히 변질된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현재적 실현을 뒤로 가려버린채
죄 속량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게 한 것이지요.
그런 복음으로 자국의 제국주의적 침탈을 합리화하고
제국주의의 칼날아래 신음하는 식민지 성도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그저 현재의 절망에 위안을 주는
'죽어서 가는' 나라에 불과했습니다.
그야말로 아편이었던 것이지요.
우리나라는 감사하게도 많은 선교사들이 더불어 함께
일본 제국주의와 맞서 싸웠지만 그후 한국 교회는 점점 제국주의에 순응하여
교회의 사회적 정치적 역할을 터부시했습니다.
비극은 그런 잘못된 하나님 나라 이해가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님께서는 성경의 주제를
" 죄로말미암아 영적으로 죽어있는 인간의 비참한 상태와
그럼에도 구속역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생명으로의 회복(하나님의 나라)에대한 약속과 성취" 라고 이해하셨는데
이는 결국 비참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 즉 속량이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위함이라는 것, 즉 하나님 나라 개념이
죄의 구속 보다 상위에 있음을 님 스스로 자인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죄인을 구원하십니까?
죄로 말미암아 비참하게 얼룩진 피조세계를 무엇을 위해 새롭게 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아닌가요?
지극히 단순히 생각해보아도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함으로
관계를 회복하는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거할
하나님의 나라는 무료한 파라다이스에 불과할 테니까요
하나님께서는 그 처절한 십자가를 택하시면서까지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과연 무엇입니까?
단순히 우리가 죽어서갈 '편한 세상' 그래서 현재의 삶의 불의와 억압에 대해
묵묵히 참고 견딜 구실에 불과 합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명백히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자녀로 고백하는 작은 자들의 위대한 연대가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6:10, 개역개정판) 라고
기도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의미겠습니까? 종말론적으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오늘 우리가 선 이 자리에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며
나아가라는 말씀아닌가요?
따라서 사회 곳곳에 만연한 불의와 악구조에 대해
당당히 맞서싸우는것 역시 성도의 바른 삶 아닌가요?
이것이 무리한 해석 입니까?
이것은 주님의 기도 외에도 아모스 선지자를 비롯한
구약 선지자들의 절규와 초대 야고보의 질타에도
너무나 명백히 드러나 있습니다.
이와같이 위대하고 광대한 하나님 나라가 정말 인간의 죄문제 해결보다
중심을 차지할수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이것을 말하는 것이 '이 쪽 계통'으로 분류되어야할 이유인가요?
이곳 다비아를 사랑하는 사람들 중 정용섭 목사님의 글에
100% 동의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매일마다 저마다 분명한 신학적 색깔로 활발히 토론이 오갑니다.
이것이 바로 저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이곳을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그런식으로 다름의 문제에 대해 충분한 대화 없이
선을 긋는것이 '보수'의 전형적인 맹점입니다.
'보수 신앙'을 외치는 합동측이 그토록 수많은 분열을 한것은
결국 '니가 더 보수냐, 내가 더 보수냐' 싸운 결과 아닙니까?
님께서는 저를 어떻게 보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축자영감설이 아닌) Verbal Inspiration 을 지지하며
님과 마찬가지로 깔뱅주의적 개혁주의 유산을 소중히
간직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님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기는
모든 시대풍조와 신학을 거부합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성경 말씀을 화석화 시키며 또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는 근본주의자들에게도 동일한 답답함을 느낍니다.
글이 길어졌지만 저로하여금 이곳 사랑채에 토론의 장을 열게한
결정적인 문제이기에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정말 여자 목사 안수 문제가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는 단지 님 한사람의 신앙과 인격에 대해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 안수를 반대하는 사람과 직접적인 대화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정중히 묻는 것입니다.
정말 여성 목사 안수가 하나님의 뜻에 거스른 것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제발 저로 하여금 '그럴듯한 얘기라고' 이해할수 설득해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너무나 당연한 진실에
반대하는 것을 이해할수가 없습니다.
제 군대 후임중에 보수적 성향을 띈 학교 신학생이 있어서
위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아도 심정적으로 반대하긴 하지만
자기도 근거를 대라면 곤란하다고 말하더군요
성경에 대한 분명한 주관을 가지신 분으로서 (결코 비꼬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우시더라도 여자 목사안수 문제에 대해 명확히 입장과
그 근거를 밝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야기가 두서 없이 길어졌지만 결국 요지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비참한 죄인을 구원하면서 까지 이루실 나라를 꿈꾸셨고
따라서 속량 문제는 이러한 나라를 열어가는 귀중한 열쇠임에 분명하지만
그것이 성경 중심을 차지하는 하나님 나라를 다 덮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추천해주신 책은 기회가 허락하는데로 감사히 잘 읽도록 하겠습니다.
저역시 권하자면... 여자 목사 안수 문제와는 관련이 없지만
성공회 대천덕 신부님의 '토지와 경제정의' (홍성사) 꼭 읽으실 것을 권합니다.
기독교인으로서 마땅한 사회적 책임에 눈이 뜨이실 겁니다.
하나님 나라를 열어가는 위대한 은혜가
님과 가정내에 더욱 풍성히 함께 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이처럼 공개적인 공간에 자칫 무례하게 들릴수 있는
격한 감정이 표출된 글을 앞서 올려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이를 너그러이 이해하시고 답글 달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님께서는 제 글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셨습니다.
죄로 말미암은 인간과 피조세계의 비참함 그리고 이를 위해
스스로를 내던지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
이와 같은 케리그마가 성경의 중심이 아니란 것을
감히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저는 결코 이를 가볍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와 같은 케리그마 까지도 성경전체를 면면히 흐르는
'하나님 나라' 사상보다는 결코 우위에 둘수 없다는 사실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님께서는 제가 말한 하나님 나라 개념을 두고 '이 쪽 계통' 이라는 표현으로
저와 다비아를 어느 특정 집단으로 묶으셨는데
제가 하나님 나라 이해에 있어 '불의와 폭압에 맞서 싸운다'는 것을
말한 것은 결코 그것만이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영역은 죄문제로 축소 될 수 없고
그와같은 현실성의 문제역시 포함함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사실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는 것도
이미 케케묵은 사고방식일 뿐입니다.
대체 개인구원없는 사회구원 혹은 사회구원없는 개인구원이 무슨의미가 있습니까?
18~19세기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아시아와 아프리카등지에
도착했던 서구 선교사들은 철저히 변질된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현재적 실현을 뒤로 가려버린채
죄 속량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게 한 것이지요.
그런 복음으로 자국의 제국주의적 침탈을 합리화하고
제국주의의 칼날아래 신음하는 식민지 성도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그저 현재의 절망에 위안을 주는
'죽어서 가는' 나라에 불과했습니다.
그야말로 아편이었던 것이지요.
우리나라는 감사하게도 많은 선교사들이 더불어 함께
일본 제국주의와 맞서 싸웠지만 그후 한국 교회는 점점 제국주의에 순응하여
교회의 사회적 정치적 역할을 터부시했습니다.
비극은 그런 잘못된 하나님 나라 이해가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님께서는 성경의 주제를
" 죄로말미암아 영적으로 죽어있는 인간의 비참한 상태와
그럼에도 구속역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생명으로의 회복(하나님의 나라)에대한 약속과 성취" 라고 이해하셨는데
이는 결국 비참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 즉 속량이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위함이라는 것, 즉 하나님 나라 개념이
죄의 구속 보다 상위에 있음을 님 스스로 자인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죄인을 구원하십니까?
죄로 말미암아 비참하게 얼룩진 피조세계를 무엇을 위해 새롭게 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아닌가요?
지극히 단순히 생각해보아도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함으로
관계를 회복하는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거할
하나님의 나라는 무료한 파라다이스에 불과할 테니까요
하나님께서는 그 처절한 십자가를 택하시면서까지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과연 무엇입니까?
단순히 우리가 죽어서갈 '편한 세상' 그래서 현재의 삶의 불의와 억압에 대해
묵묵히 참고 견딜 구실에 불과 합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명백히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자녀로 고백하는 작은 자들의 위대한 연대가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6:10, 개역개정판) 라고
기도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의미겠습니까? 종말론적으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오늘 우리가 선 이 자리에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며
나아가라는 말씀아닌가요?
따라서 사회 곳곳에 만연한 불의와 악구조에 대해
당당히 맞서싸우는것 역시 성도의 바른 삶 아닌가요?
이것이 무리한 해석 입니까?
이것은 주님의 기도 외에도 아모스 선지자를 비롯한
구약 선지자들의 절규와 초대 야고보의 질타에도
너무나 명백히 드러나 있습니다.
이와같이 위대하고 광대한 하나님 나라가 정말 인간의 죄문제 해결보다
중심을 차지할수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이것을 말하는 것이 '이 쪽 계통'으로 분류되어야할 이유인가요?
이곳 다비아를 사랑하는 사람들 중 정용섭 목사님의 글에
100% 동의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매일마다 저마다 분명한 신학적 색깔로 활발히 토론이 오갑니다.
이것이 바로 저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이곳을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그런식으로 다름의 문제에 대해 충분한 대화 없이
선을 긋는것이 '보수'의 전형적인 맹점입니다.
'보수 신앙'을 외치는 합동측이 그토록 수많은 분열을 한것은
결국 '니가 더 보수냐, 내가 더 보수냐' 싸운 결과 아닙니까?
님께서는 저를 어떻게 보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축자영감설이 아닌) Verbal Inspiration 을 지지하며
님과 마찬가지로 깔뱅주의적 개혁주의 유산을 소중히
간직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님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기는
모든 시대풍조와 신학을 거부합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성경 말씀을 화석화 시키며 또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는 근본주의자들에게도 동일한 답답함을 느낍니다.
글이 길어졌지만 저로하여금 이곳 사랑채에 토론의 장을 열게한
결정적인 문제이기에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정말 여자 목사 안수 문제가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는 단지 님 한사람의 신앙과 인격에 대해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 안수를 반대하는 사람과 직접적인 대화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정중히 묻는 것입니다.
정말 여성 목사 안수가 하나님의 뜻에 거스른 것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제발 저로 하여금 '그럴듯한 얘기라고' 이해할수 설득해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너무나 당연한 진실에
반대하는 것을 이해할수가 없습니다.
제 군대 후임중에 보수적 성향을 띈 학교 신학생이 있어서
위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아도 심정적으로 반대하긴 하지만
자기도 근거를 대라면 곤란하다고 말하더군요
성경에 대한 분명한 주관을 가지신 분으로서 (결코 비꼬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우시더라도 여자 목사안수 문제에 대해 명확히 입장과
그 근거를 밝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야기가 두서 없이 길어졌지만 결국 요지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비참한 죄인을 구원하면서 까지 이루실 나라를 꿈꾸셨고
따라서 속량 문제는 이러한 나라를 열어가는 귀중한 열쇠임에 분명하지만
그것이 성경 중심을 차지하는 하나님 나라를 다 덮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추천해주신 책은 기회가 허락하는데로 감사히 잘 읽도록 하겠습니다.
저역시 권하자면... 여자 목사 안수 문제와는 관련이 없지만
성공회 대천덕 신부님의 '토지와 경제정의' (홍성사) 꼭 읽으실 것을 권합니다.
기독교인으로서 마땅한 사회적 책임에 눈이 뜨이실 겁니다.
하나님 나라를 열어가는 위대한 은혜가
님과 가정내에 더욱 풍성히 함께 하시길 기도드립니다.
2007.02.02 10:04:20
님들의 진지하신 담론을 지켜보며 참 즐겁습니다.
내용에 동참할만한 깜량은 못되고...
바우로님, 수구(戍舊)는 守舊가 아니었던가요?
그리고 구름님!
dabia.net을 자꾸 '까페'라고 하시니까 듣기에 좀 거시기 하네요.
봄볕/대진님께선 조금만 속도를 늦추시면 어떨까요?
'정대진님의 글에~합니다'란 구절을 고려하셔서,
구름님으로 하여금 차근차근 정리한 후 입장을 밝히실 수 있도록 말입니다.
내용에 동참할만한 깜량은 못되고...
바우로님, 수구(戍舊)는 守舊가 아니었던가요?
그리고 구름님!
dabia.net을 자꾸 '까페'라고 하시니까 듣기에 좀 거시기 하네요.
봄볕/대진님께선 조금만 속도를 늦추시면 어떨까요?
'정대진님의 글에~합니다'란 구절을 고려하셔서,
구름님으로 하여금 차근차근 정리한 후 입장을 밝히실 수 있도록 말입니다.
2007.02.02 23:17:38
여자목사 제도는 과연 성경적인가- 김세윤 교수의 주장을 우려하며
이 ㅇ ㅇ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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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합동측 총회장의 총신대학 '기저귀 발언'(2003.11.12) 이후 교계가 시끄러웠다. 그는 경건회 도중 여자목사제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펴면서 '여성의 기저귀'를 들먹여 적절치 못한 표현을 했다. 그가 의도한 것은 여자 목사제도에 대한 견해였지만 그 말을 받아들이는 다수의 사람들은 '기저귀' 라는 용어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것이 여성비하 문제로 확산되었다. 당시 당사자는 용어채택으로 인한 자신의 실언을 사과했지만 기독교 여성단체들에서는 그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여성목사 안수를 허락할 것을 요구하기에 까지 이르렀다.
이제 반년을 넘겨 총신 신학대학원 여동문회는 지난 7월 5일 풀러신학교의 김세윤 교수를 초빙해 '성경에 나타난 여성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김 교수는 나름대로 이유들을 나열하며 여자 목사제도의 타당성을 제시했다. 그는 특히 고린도전서 14:34,35의 기록에 대한 사본학적 불안정과 두 구절이 고린도전서 14장의 전체적인 문맥을 끊고 있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어 후대에 삽입된 것이 확실하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했다("'여자여 잠잠하라'는 후대 편집된 것!", 뉴스앤조이, 제90호, 2004.7.8, 참조).
그러나 필자는 우선 고린도전서 14:34,35이 후대에 삽입되었다는 말을 그렇게 자신있게 말하는 그의 무모한 용기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렇다면 동일한 성경저자가 기록한 디모데전서 2:9-14의 말씀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 말할지 궁금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유린당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음을 감추고 싶지 않다. 나아가 한 저명한 신학자의 주장이 한국교회에 끼칠 영향을 생각하면 심히 우려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적으로는 한국의 다수 교단들이 이미 여자목사제도를 도입하고 있으며, 한국 보수주의 교단에서도 여자목사제도를 심정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교수나 목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여자목사제도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시대에 부응하는 깨어있는 자로 인식되는 반면 부인하는 자는 그와 반대로 인식되고 있다. 더구나 다수의 교회 지도자들이 원리보다는 사회적 분위기 읽기에 주력하고 있는 점과, 시대에 편승하고 있는 일부 인사들의 자세가 원리적 접근을 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주고 있다.
필자는 결코 남성우월주의자가 아니며 여성을 비하하고자 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다. 도리어 남성우월주의적 사고를 가진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의 오만함을 지적하고 싶다. 이 글을 쓰면서 신앙을 가진 여성들에게 호소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교회는 결코 남성이나 여성을 위한 단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주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 가운데 존재하는 직분은 어떤 경우에도 특정인 혹은 특정 부류에게 주어지는 기득권적 권리가 될 수 없다. 만일 직분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자가 있다면 그는 이미 교회의 직분자로서 적합하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성이나 여성 중 어느 편을 지지하여 기득권적 논쟁을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누구 혹은 특정 부류의 편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입장에서 모든 것을 해석하고 적용해야 하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
[Ⅱ]
(1)
직분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직분과 직책에 대한 차이를 이해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물론 이런 구분은 용어자체에 대한 구분이 아니라 교회의 직분을 이해하기 위한 편의적인 방편이다. 교회의 직분은 항존하는 필수요건이다. 즉 교회의 목사, 장로, 집사 등의 직분은 단순히 일의 능률을 위해 분담하는 직책이 아니라 교회 가운데 마땅히 있어야 하는 본질적 은사이다. 이는 일반적인 직책이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아니라 조직의 편의나 일의 능률을 위해 두고 있는 임의적 제도라는 점과 대비된다고 할 수 있다.
교회에서 말하는 직분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사로서 원리상 인간들이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창안하거나 만든 제도가 아니다. 즉 직분은 인간의 선택이나 능력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원리상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것이다. 이에 반해 직책이란 인간의 판단과 능력에 따른 것으로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효율적인 기능을 의미한다.
교회에는 다양한 직분들과 직책들이 있다. 목사, 장로, 집사 직분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은사적 방편이라면 남전도회장, 여전도회장, 선교부장, 구제부장, 주일학교 교사 등은 직책에 속한다. 이러한 직책은 조직 혹은 기관으로 부터 맡겨진 일의 능률을 위해 남녀의 성에 관계없이 적절한 사람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직분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사이므로 목사도 이와 동일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제도가 있었는데 제사장은 단순한 개인의 능력에 따른 직책이 아니었다. 모든 제사장은 레위인으로서 아론의 자손 가운데서 세워졌다. 이스라엘 백성 중 레위지파 자손이 아니면서 그 직무를 잘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여 아무나 제사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기서 필자는 제사장직과 목사직분을 연관지어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며 제사장이 남성이어야 했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제사장은 하나님의 전적인 뜻과 경륜으로 말미암는 직분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직분에는 지위의 높고 낮음이 있는 것이 아니며 거기에 권력이나 외적인 권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런 식으로 직분을 이해하게 된다면 권력이나 권위를 가진 '높은 자리'를 남성들만 가지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지적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직분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 특별히 허락한 은사이며 인간들의 명예나 권리를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2)
현재 논의 되고 있는 직분 문제에 있어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교회의 직분이 마치 시대의 조류에 맞추어져야 하는 듯한 분위기이다. 이는 교회의 직분이 토론이나 여론을 배경으로 하여 변화가능한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민주적인 절차에 따른 다수의 견해에 따르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인본주의적 대세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이 약화되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시대나 지역에 따라 상이한 문화를 가지게 된다. 교회는 항상 그 상이한 문화들 가운데 존재해 왔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바는 교회의 직분은 사회적 분위기나 여론에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역사 속에 상속되어져 온 많은 교회들은 다양한 인간 문화들 가운데서 말씀이 교훈하는 바를 그대로 지키고 보존하려고 애써 왔다. 세상 가운데 존재하는 교회가 필연적으로 투쟁하고 싸우면서 한편으로 고난을 당해야할 요소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교회의 직분은 인간들의 토론에 의해 결정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토론은 시대와 문화를 배경으로 할 수 밖에 없으므로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나 분위기에 능숙한 사람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 설득력 있게 말을 잘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이에 대해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느냐를 주의깊게 잘 살펴보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여론의 수렴을 거쳐 직분에 대한 해석이나 방향을 결정하려는 노력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지난해 말, 직분과 여성문제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 총신대학에서는 설문조사를 통해 80% 정도의 학생들이 여자목사 제도를 찬성 혹은 입장을 유보하는 것으로 집계했다(총신대보, 제 256호 2003년 10월 14일. 참조). 그 설문조사에 참여한 많은 학생들은 여자목사제도를 지지하거나 그것이 별문제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신학을 지향하고 있다는 총신대학생들이 그 정도의 생각을 하고 있다면 다른 신학대학이나 많은 기독교 여성 단체들의 그에 대한 생각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대체적인 배경이 하나님의 구체적인 말씀이 아니라 사회 정신적 경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바는 인간들의 경험적 자기 생각이나 판단이 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 진리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3)
오늘날 여자 목사제도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 근거를 성경에 나타나는 여 사사나 여성들의 활약에 두고 있는 것 같다. 나아가 신약성경을 고등비평하는 자들의 입장도 이제 새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구약성경을 보면, 드보라와 같은 여인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사의 직분을 훌륭히 수행했으며 라합, 룻, 에스더 등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들어 쓰신 믿음의 여성들이다. 물론 신약성경에도 훌륭한 믿음의 여인들이 수없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기억해야할 바는 그 모든 여성들이 그러한 믿음의 지위를 남성으로부터 쟁취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구속사 가운데서 자신의 고유한 뜻에 따라 그 여성들을 특별히 선택하심으로써 놀라운 경륜을 이루어 가셨으나, 남성과 여성에게 하나님의 일을 고르게 분배하려는 목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내용들을 단순히 규범적으로 해석하여 받아들이려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신약성경의 여성들 또한 교회의 직분적 개념과 더불어 이해되어야 한다. 사도바울은 직분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며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해야 할 것을 언급했는데, 그것은 여성을 무시하기 때문에 한 말이 아니라 주님의 교회를 위한 언약적 가르침이었다. 그는 구약시대에 훌륭한 여 사사와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교회의 감독직분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을 구분한 것은 구약 역사에 등장하는 여성 관련 내용들이 단순한 규범이 아니라는 기본 개념 위에서 창조와 연관된 교회의 특이성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만일 여성과 관련된 구약의 역사적 사실을 우리 시대의 교회의 규범으로 이해한다면 율법과 복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설명에 해석상 많은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
여자목사제도를 인정하려는 자들 중에는, 교회 가운데 남성과 여성 사이에 어떠한 구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인격자로서 인간 사이에 남녀간 아무런 차등이 없다는 것은 옳지만 직분에 대한 구별 자체가 없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남성과 여성은 창조질서 가운데서 분명히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인격이나 능력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질서와 그 가운데 존재하는 본질적인 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첫 언약에서 드러나듯이 자녀의 출산은 여성의 몫이며 외부의 위험을 방어하고 가정을 지키고 보호하는 일은 남성의 몫으로 그것은 창조질서에 속한 것이다.
[Ⅲ]
(1)
신약성경을 살펴보면, 가르치는 교사로서 여성을 교회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진리의 계시임을 믿는다. 이미 잘 알고 있는 바대로,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고전 14: 24,25)고 이야기했다. (그 말씀을 후대에 삽입된 것이라 주장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고린도전서 14장은 특별히 교회를 세워나가기 위한 은사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이 여자로 하여금 교회에서 잠잠하도록 요구한 것은, 율법 즉 구약성경을 근거로 하여 은사와 관련된 직분적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바울을 통해 허락하신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시임을 잘 이해해야 한다. 다시말해 이 본문은 여성과 관련된 일반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당시의 문화나 관습을 배경으로 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즉,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는 바울의 요구가 일반 생활이나 논의에 있어서 침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 뿐더러 소위 교회 안에서 '여성다움'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는 교회의 직분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해야하는 이유가 율법에 근거해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율법을 근거로 한 것은 성전과 제사장 직분과 연관된 것이다. 여성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제사할 수 없었다.) 물론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않음'의 의미가 '여자답게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으라'는 권면이 아니라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로서의 직분이 허락되지 않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칫 고린도전서 14:24의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가르침을 '남성은 교회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는 말로 오해하기도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니다. 우리가 여기서 얻는 교훈은, 교회의 교사직분이 남성에게 맡겨졌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직분을 남성에게 주어진 어떤 특별한 권리로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바울의 기록은, 교회의 상속이 구약의 율법을 바탕으로 한 교사 직분을 통해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교회에는 그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고유한 질서가 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가르치는 목사직은 개인의 의사에 따라 스스로 성취할 수 있는 직분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 세워지는 직분이다.
바울은 또한 디모데전서 2:11-14에서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디모데전서는 이른 바 목회서신으로 교회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특히 디모데전서 2장은 직분에 관련된 기록을 하고 있다.
바울은 위 본문에서, 여자가 가르치는 목사의 직분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를 창조질서와 인간이 범죄한 초기 과정에서 찾고 있으며, 그런 연유로 인해 그 직분을 허락하지 않노라고 선언하고 있다. 즉 성경에서 여성들이 교회의 가르치는 직분을 가지는 것을 허락지 않는 이유가 여성비하나 여성의 지적능력에 대한 불신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의 역할을 창조질서와 연관하여 더욱 본질적인 것에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본문에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이라는 목사의 교사사역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남자를 주관하는 것'이라는 말은 감독의 직분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2)
성경은 이렇듯이 여자가 교회에서 가르치는 직분, 즉 목사의 직분을 가지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여권주의자들이나 시대적 여성옹호론자들이 여자 목사제도를 인정하려고 애쓰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시대적 페미니즘의 영향 때문이다. 현대에 이르러 많은 여성들과 여성옹호론자들이 남녀 평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역사 가운데 있어왔던 남성들의 잘못된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적 사고로 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사상은 급기야 교회 가운데도 들어와, 직분에 있어서도 성경의 구체적인 가르침을 살피기에 앞서 여권회복의 차원에서 논의의 틀을 제공하고 있다. 여자가 결코 남자보다 못하거나 부족한 것이 없으니 성적 차별이 불필요하며 모든 직분은 남녀가 공평하게 가질 수 있다는 논리이다. 나아가 그들은, 과거 남성들이 여성 위에 군림함으로써 모든 직분과 권위를 독점해 왔으므로 이제 빼앗긴 여성의 직분적 권리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시대에 있어서 많은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이 목사의 직분을 권력 및 권위와 연관된 '높은 자리'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이는 직분을 정치적인 직책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결과이다. 그러므로 왜 그 높고 힘있는 자리에 여자들은 올라갈 수 없고 남자들만 올라가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느냐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그 동안 많은 목사들의 잘못된 권위주의와 교회를 무시했던 악한 행태가 그런 분위기를 만들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남성이 목사의 직분을 맡도록 허락된 것은 결코 남성이 여성보다 성품이 우수하다거나 지적으로 유능해서가 아니다. 만일 누군가 그렇게 생각하다면 그것은 잘못된 남성우월주의적 사고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능력 면에서 볼 때 남성보다는 오히려 여성들이 더 섬세하고 정확한 면이 있을 수 있다. 나아가 남성들은 어떤 경우에도 성적인 차별성으로 인해 여성들을 무시하거나 멸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목사제도가 허용될 수 없음을 지적하는 이유는 성경의 원리적 가르침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교회 가운데 여자 목사를 금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주님 오실 그 날까지 지켜야할 규범이며 그것을 통해 배워야할 분명한 교훈이 있는 것이다. 교회의 직분은 결코 시대적 조류에 맡겨질 수 없으며 인간의 이성적 합의에 의해서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3)
하나님께서는 하와의 유혹으로 인해 죄가 이 세상에 들어 왔음을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으며 그것을 직분과 연관짓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가 여자를 목사로 허락하지 않는 것은, 남성이 여성 위에 군림할 수 있다거나 여성이 남성에게 군림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진정한 의미는 교회가 목사직분을 남성에게 허락함으로써, 여성을 통해 이 세상에 들어 온 죄악을 다스려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교회의 존재를 묵시적으로 선포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목사 혹은 교사직분이 여성에게는 금지되고 남성에게만 허용된 이유이다.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많은 여성들이 지도자의 위치에 있지 않았느냐는 사실을 내세우며 여성 목사를 인정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제대로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 여자 목사를 인정하는 모범적인 근거로 사용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각 시대에 여성들을 들어 사용하신 것과 하나님께서 특별히 세우신, 죄에 승리하는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의 직분은 분명히 서로 다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마다 여러 여성들을 들어 사용하셨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구약시대 뿐 아니라 사도교회 시대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도 마찬가지이다. 드보라, 기생 라합, 룻, 마리아, 엘리사벳, 한나, 막달라 마리아 등 수 없이 많이 있다. 그들 중 어떤이들은 윤리적 결함이 있는가 하면 어떤이들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윤리성 여부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쓰임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에 따라 그들을 선택하여 쓰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시대에도 많은 여성들을 주님의 나라를 위해 귀하게 사용하고 계신다. 목사의 직분을 오용하며 주님을 욕되게 하는 남성들도 많고 그런 직분을 가지지 않았지만 훌륭한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 여성들이 많이 있다. 목사가 되면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는 것이고 목사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지 않는다는 식의 논리는 성립될 수 없으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은 그 자체로서 아무런 차등없이 매우 소중하다. 하나님께서 남자를 여자 보다 더 사랑하고 계심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러나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의 직분을 허락하시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의 뜻이며 몫이다. 여권주의자들이나 여성 옹호론자들은 시류의 영향으로 인해, 여자들도 남자들 처럼 목사가 될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우려 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교회 안의 성숙한 여성들은 교회의 목사, 즉 교사로서 직분을 담당하는 형제들을 위해 권면하며 그들의 온당한 순종을 위해 기도하는 자세를 가짐으로써 주님의 교회가 온전히 잘 세워져 갈 수 있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필자의 이런 말에 대해, 현실 교회에서 여성들이 가르치고 있는 문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묻는 사람들이 혹 있을지 모른다. 목사가 있지 않은 작은 교회나 주일학교 같은데서 여성들이 실제로 가르치는 것에 대한 지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자가 독립된 교사로서 성도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목사, 즉 교사의 지도를 받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이는 비단 여전도사 뿐 아니라 남자 전도사나 주일학교 교사들도 마찬가지이다.
[Ⅳ]
우리시대의 연약한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교훈이 아니라 세속적 시류의 영향을 받고 있는 점은 매우 안타깝다. 목사 직분을 감당하는 남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순종적인 목회가 아니라 권위주의를 앞세운 인본적인 목회를 함으로써 그러한 잘못된 욕구들이 더욱 강하게 분출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는 말씀에 충실하지 못한 목사들이 성도들 위에 군림하려는 잘못된 모습에서 기인한 부끄러움일 것이다. 그렇잖아도 말씀이 사라져 가는 안타까운 시대에,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해야 할 학자들 마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다.
앞의 김세윤 교수는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왜 이제서야 갑작스럽게 그런 주장을 펴는지 그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금 묻고 싶다. 이전에는 모르고 있다가 최근에 들어와서 고린도전서14:34,35의 삽입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말인가? 이번 주장도 한국의 여성단체에서 초빙하지 않았으면 말하지 않았을 내용은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그는 신학자로서 자질을 의심받을 수 밖에 없다.
바라기로는 교회 가운데 교사로 세움을 받은 목사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올바른 목회를 함으로써, 주님의 몸된 교회가 현대 페미니즘의 시류에 휩쓸리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남성이기 때문에 여성보다 우월하다든지 여성이기 때문에 목사보다 신앙이 못한 것이 아니다. 목사 직분을 가진 남성들 보다 특별한 직분을 가지지 않은 일반 여성들이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얼마든지 많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목사라는 직분으로 인해 더 나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단지 교회가 허락한 직분이므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 직분을 수행해 갈 따름이다.
그리고 이 땅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잘못 세워진 목회자들이 많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교사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는 자들이 신학교를 졸업했다는 이유와 남성이라는 이유로 쉽게 목사가 되어 있다는 사실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말씀에 나타나는 원리 자체를 무시하거나 바꿀 수는 없다. 남성이 교회의 교사인 목사직분을 맡는 것이 성경적이라 하는 것은 단순히 기독교 전통을 보존하기 위한 수구적 견해 때문이 아니다. 직분과 관련된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단순히 시대에 따른 문화적 특성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주님의 말씀은 그가 다시 오실 그 날까지 교회의 중심에 온전히 받아들여야 할 진리의 교훈이다.
하나님 앞에서 남성과 여성의 능력에 따른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목사라고 해서 천국에서 영웅이 된다거나 더 많은 칭찬을 받는 것이 아니며 더 많은 상급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직분을 잘 감당하지 못함으로 인해 더욱 엄한 책망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세상 가운데 존재하는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 지상에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며 직분을 기득권의 한 형태로 이해하는 오류에 빠지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교회에서 기득권을 주장하는 자라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누구라도 주님의 뜻을 오해하고 있는 자들일 것이다. (뉴스앤조이, 2004.7.24)
*여성 목사제도에 관한여 보다 자세한 개혁교회의 신학적 원리에 따른 설명은 제가 소개한 책 [교회]에 나와 있습니다.
이 ㅇ ㅇ 목사
[ l ]
지난해 말 합동측 총회장의 총신대학 '기저귀 발언'(2003.11.12) 이후 교계가 시끄러웠다. 그는 경건회 도중 여자목사제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펴면서 '여성의 기저귀'를 들먹여 적절치 못한 표현을 했다. 그가 의도한 것은 여자 목사제도에 대한 견해였지만 그 말을 받아들이는 다수의 사람들은 '기저귀' 라는 용어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것이 여성비하 문제로 확산되었다. 당시 당사자는 용어채택으로 인한 자신의 실언을 사과했지만 기독교 여성단체들에서는 그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여성목사 안수를 허락할 것을 요구하기에 까지 이르렀다.
이제 반년을 넘겨 총신 신학대학원 여동문회는 지난 7월 5일 풀러신학교의 김세윤 교수를 초빙해 '성경에 나타난 여성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김 교수는 나름대로 이유들을 나열하며 여자 목사제도의 타당성을 제시했다. 그는 특히 고린도전서 14:34,35의 기록에 대한 사본학적 불안정과 두 구절이 고린도전서 14장의 전체적인 문맥을 끊고 있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어 후대에 삽입된 것이 확실하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했다("'여자여 잠잠하라'는 후대 편집된 것!", 뉴스앤조이, 제90호, 2004.7.8, 참조).
그러나 필자는 우선 고린도전서 14:34,35이 후대에 삽입되었다는 말을 그렇게 자신있게 말하는 그의 무모한 용기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렇다면 동일한 성경저자가 기록한 디모데전서 2:9-14의 말씀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 말할지 궁금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유린당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음을 감추고 싶지 않다. 나아가 한 저명한 신학자의 주장이 한국교회에 끼칠 영향을 생각하면 심히 우려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적으로는 한국의 다수 교단들이 이미 여자목사제도를 도입하고 있으며, 한국 보수주의 교단에서도 여자목사제도를 심정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교수나 목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여자목사제도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시대에 부응하는 깨어있는 자로 인식되는 반면 부인하는 자는 그와 반대로 인식되고 있다. 더구나 다수의 교회 지도자들이 원리보다는 사회적 분위기 읽기에 주력하고 있는 점과, 시대에 편승하고 있는 일부 인사들의 자세가 원리적 접근을 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주고 있다.
필자는 결코 남성우월주의자가 아니며 여성을 비하하고자 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다. 도리어 남성우월주의적 사고를 가진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의 오만함을 지적하고 싶다. 이 글을 쓰면서 신앙을 가진 여성들에게 호소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교회는 결코 남성이나 여성을 위한 단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주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 가운데 존재하는 직분은 어떤 경우에도 특정인 혹은 특정 부류에게 주어지는 기득권적 권리가 될 수 없다. 만일 직분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자가 있다면 그는 이미 교회의 직분자로서 적합하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성이나 여성 중 어느 편을 지지하여 기득권적 논쟁을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누구 혹은 특정 부류의 편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입장에서 모든 것을 해석하고 적용해야 하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
[Ⅱ]
(1)
직분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직분과 직책에 대한 차이를 이해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물론 이런 구분은 용어자체에 대한 구분이 아니라 교회의 직분을 이해하기 위한 편의적인 방편이다. 교회의 직분은 항존하는 필수요건이다. 즉 교회의 목사, 장로, 집사 등의 직분은 단순히 일의 능률을 위해 분담하는 직책이 아니라 교회 가운데 마땅히 있어야 하는 본질적 은사이다. 이는 일반적인 직책이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아니라 조직의 편의나 일의 능률을 위해 두고 있는 임의적 제도라는 점과 대비된다고 할 수 있다.
교회에서 말하는 직분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사로서 원리상 인간들이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창안하거나 만든 제도가 아니다. 즉 직분은 인간의 선택이나 능력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원리상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것이다. 이에 반해 직책이란 인간의 판단과 능력에 따른 것으로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효율적인 기능을 의미한다.
교회에는 다양한 직분들과 직책들이 있다. 목사, 장로, 집사 직분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은사적 방편이라면 남전도회장, 여전도회장, 선교부장, 구제부장, 주일학교 교사 등은 직책에 속한다. 이러한 직책은 조직 혹은 기관으로 부터 맡겨진 일의 능률을 위해 남녀의 성에 관계없이 적절한 사람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직분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사이므로 목사도 이와 동일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제도가 있었는데 제사장은 단순한 개인의 능력에 따른 직책이 아니었다. 모든 제사장은 레위인으로서 아론의 자손 가운데서 세워졌다. 이스라엘 백성 중 레위지파 자손이 아니면서 그 직무를 잘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여 아무나 제사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기서 필자는 제사장직과 목사직분을 연관지어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며 제사장이 남성이어야 했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제사장은 하나님의 전적인 뜻과 경륜으로 말미암는 직분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직분에는 지위의 높고 낮음이 있는 것이 아니며 거기에 권력이나 외적인 권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런 식으로 직분을 이해하게 된다면 권력이나 권위를 가진 '높은 자리'를 남성들만 가지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지적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직분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 특별히 허락한 은사이며 인간들의 명예나 권리를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2)
현재 논의 되고 있는 직분 문제에 있어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교회의 직분이 마치 시대의 조류에 맞추어져야 하는 듯한 분위기이다. 이는 교회의 직분이 토론이나 여론을 배경으로 하여 변화가능한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민주적인 절차에 따른 다수의 견해에 따르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인본주의적 대세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이 약화되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시대나 지역에 따라 상이한 문화를 가지게 된다. 교회는 항상 그 상이한 문화들 가운데 존재해 왔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바는 교회의 직분은 사회적 분위기나 여론에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역사 속에 상속되어져 온 많은 교회들은 다양한 인간 문화들 가운데서 말씀이 교훈하는 바를 그대로 지키고 보존하려고 애써 왔다. 세상 가운데 존재하는 교회가 필연적으로 투쟁하고 싸우면서 한편으로 고난을 당해야할 요소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교회의 직분은 인간들의 토론에 의해 결정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토론은 시대와 문화를 배경으로 할 수 밖에 없으므로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나 분위기에 능숙한 사람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 설득력 있게 말을 잘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이에 대해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느냐를 주의깊게 잘 살펴보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여론의 수렴을 거쳐 직분에 대한 해석이나 방향을 결정하려는 노력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지난해 말, 직분과 여성문제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 총신대학에서는 설문조사를 통해 80% 정도의 학생들이 여자목사 제도를 찬성 혹은 입장을 유보하는 것으로 집계했다(총신대보, 제 256호 2003년 10월 14일. 참조). 그 설문조사에 참여한 많은 학생들은 여자목사제도를 지지하거나 그것이 별문제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신학을 지향하고 있다는 총신대학생들이 그 정도의 생각을 하고 있다면 다른 신학대학이나 많은 기독교 여성 단체들의 그에 대한 생각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대체적인 배경이 하나님의 구체적인 말씀이 아니라 사회 정신적 경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바는 인간들의 경험적 자기 생각이나 판단이 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 진리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3)
오늘날 여자 목사제도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 근거를 성경에 나타나는 여 사사나 여성들의 활약에 두고 있는 것 같다. 나아가 신약성경을 고등비평하는 자들의 입장도 이제 새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구약성경을 보면, 드보라와 같은 여인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사의 직분을 훌륭히 수행했으며 라합, 룻, 에스더 등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들어 쓰신 믿음의 여성들이다. 물론 신약성경에도 훌륭한 믿음의 여인들이 수없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기억해야할 바는 그 모든 여성들이 그러한 믿음의 지위를 남성으로부터 쟁취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구속사 가운데서 자신의 고유한 뜻에 따라 그 여성들을 특별히 선택하심으로써 놀라운 경륜을 이루어 가셨으나, 남성과 여성에게 하나님의 일을 고르게 분배하려는 목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내용들을 단순히 규범적으로 해석하여 받아들이려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신약성경의 여성들 또한 교회의 직분적 개념과 더불어 이해되어야 한다. 사도바울은 직분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며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해야 할 것을 언급했는데, 그것은 여성을 무시하기 때문에 한 말이 아니라 주님의 교회를 위한 언약적 가르침이었다. 그는 구약시대에 훌륭한 여 사사와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교회의 감독직분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을 구분한 것은 구약 역사에 등장하는 여성 관련 내용들이 단순한 규범이 아니라는 기본 개념 위에서 창조와 연관된 교회의 특이성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만일 여성과 관련된 구약의 역사적 사실을 우리 시대의 교회의 규범으로 이해한다면 율법과 복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설명에 해석상 많은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
여자목사제도를 인정하려는 자들 중에는, 교회 가운데 남성과 여성 사이에 어떠한 구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인격자로서 인간 사이에 남녀간 아무런 차등이 없다는 것은 옳지만 직분에 대한 구별 자체가 없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남성과 여성은 창조질서 가운데서 분명히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인격이나 능력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질서와 그 가운데 존재하는 본질적인 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첫 언약에서 드러나듯이 자녀의 출산은 여성의 몫이며 외부의 위험을 방어하고 가정을 지키고 보호하는 일은 남성의 몫으로 그것은 창조질서에 속한 것이다.
[Ⅲ]
(1)
신약성경을 살펴보면, 가르치는 교사로서 여성을 교회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진리의 계시임을 믿는다. 이미 잘 알고 있는 바대로,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고전 14: 24,25)고 이야기했다. (그 말씀을 후대에 삽입된 것이라 주장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고린도전서 14장은 특별히 교회를 세워나가기 위한 은사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이 여자로 하여금 교회에서 잠잠하도록 요구한 것은, 율법 즉 구약성경을 근거로 하여 은사와 관련된 직분적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바울을 통해 허락하신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시임을 잘 이해해야 한다. 다시말해 이 본문은 여성과 관련된 일반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당시의 문화나 관습을 배경으로 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즉,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는 바울의 요구가 일반 생활이나 논의에 있어서 침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 뿐더러 소위 교회 안에서 '여성다움'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는 교회의 직분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해야하는 이유가 율법에 근거해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율법을 근거로 한 것은 성전과 제사장 직분과 연관된 것이다. 여성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제사할 수 없었다.) 물론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않음'의 의미가 '여자답게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으라'는 권면이 아니라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로서의 직분이 허락되지 않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칫 고린도전서 14:24의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가르침을 '남성은 교회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는 말로 오해하기도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니다. 우리가 여기서 얻는 교훈은, 교회의 교사직분이 남성에게 맡겨졌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직분을 남성에게 주어진 어떤 특별한 권리로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바울의 기록은, 교회의 상속이 구약의 율법을 바탕으로 한 교사 직분을 통해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교회에는 그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고유한 질서가 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가르치는 목사직은 개인의 의사에 따라 스스로 성취할 수 있는 직분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 세워지는 직분이다.
바울은 또한 디모데전서 2:11-14에서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디모데전서는 이른 바 목회서신으로 교회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특히 디모데전서 2장은 직분에 관련된 기록을 하고 있다.
바울은 위 본문에서, 여자가 가르치는 목사의 직분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를 창조질서와 인간이 범죄한 초기 과정에서 찾고 있으며, 그런 연유로 인해 그 직분을 허락하지 않노라고 선언하고 있다. 즉 성경에서 여성들이 교회의 가르치는 직분을 가지는 것을 허락지 않는 이유가 여성비하나 여성의 지적능력에 대한 불신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의 역할을 창조질서와 연관하여 더욱 본질적인 것에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본문에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이라는 목사의 교사사역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남자를 주관하는 것'이라는 말은 감독의 직분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2)
성경은 이렇듯이 여자가 교회에서 가르치는 직분, 즉 목사의 직분을 가지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여권주의자들이나 시대적 여성옹호론자들이 여자 목사제도를 인정하려고 애쓰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시대적 페미니즘의 영향 때문이다. 현대에 이르러 많은 여성들과 여성옹호론자들이 남녀 평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역사 가운데 있어왔던 남성들의 잘못된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적 사고로 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사상은 급기야 교회 가운데도 들어와, 직분에 있어서도 성경의 구체적인 가르침을 살피기에 앞서 여권회복의 차원에서 논의의 틀을 제공하고 있다. 여자가 결코 남자보다 못하거나 부족한 것이 없으니 성적 차별이 불필요하며 모든 직분은 남녀가 공평하게 가질 수 있다는 논리이다. 나아가 그들은, 과거 남성들이 여성 위에 군림함으로써 모든 직분과 권위를 독점해 왔으므로 이제 빼앗긴 여성의 직분적 권리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시대에 있어서 많은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이 목사의 직분을 권력 및 권위와 연관된 '높은 자리'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이는 직분을 정치적인 직책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결과이다. 그러므로 왜 그 높고 힘있는 자리에 여자들은 올라갈 수 없고 남자들만 올라가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느냐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그 동안 많은 목사들의 잘못된 권위주의와 교회를 무시했던 악한 행태가 그런 분위기를 만들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남성이 목사의 직분을 맡도록 허락된 것은 결코 남성이 여성보다 성품이 우수하다거나 지적으로 유능해서가 아니다. 만일 누군가 그렇게 생각하다면 그것은 잘못된 남성우월주의적 사고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능력 면에서 볼 때 남성보다는 오히려 여성들이 더 섬세하고 정확한 면이 있을 수 있다. 나아가 남성들은 어떤 경우에도 성적인 차별성으로 인해 여성들을 무시하거나 멸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목사제도가 허용될 수 없음을 지적하는 이유는 성경의 원리적 가르침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교회 가운데 여자 목사를 금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주님 오실 그 날까지 지켜야할 규범이며 그것을 통해 배워야할 분명한 교훈이 있는 것이다. 교회의 직분은 결코 시대적 조류에 맡겨질 수 없으며 인간의 이성적 합의에 의해서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3)
하나님께서는 하와의 유혹으로 인해 죄가 이 세상에 들어 왔음을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으며 그것을 직분과 연관짓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가 여자를 목사로 허락하지 않는 것은, 남성이 여성 위에 군림할 수 있다거나 여성이 남성에게 군림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진정한 의미는 교회가 목사직분을 남성에게 허락함으로써, 여성을 통해 이 세상에 들어 온 죄악을 다스려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교회의 존재를 묵시적으로 선포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목사 혹은 교사직분이 여성에게는 금지되고 남성에게만 허용된 이유이다.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많은 여성들이 지도자의 위치에 있지 않았느냐는 사실을 내세우며 여성 목사를 인정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제대로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 여자 목사를 인정하는 모범적인 근거로 사용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각 시대에 여성들을 들어 사용하신 것과 하나님께서 특별히 세우신, 죄에 승리하는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의 직분은 분명히 서로 다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마다 여러 여성들을 들어 사용하셨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구약시대 뿐 아니라 사도교회 시대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도 마찬가지이다. 드보라, 기생 라합, 룻, 마리아, 엘리사벳, 한나, 막달라 마리아 등 수 없이 많이 있다. 그들 중 어떤이들은 윤리적 결함이 있는가 하면 어떤이들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윤리성 여부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쓰임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에 따라 그들을 선택하여 쓰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시대에도 많은 여성들을 주님의 나라를 위해 귀하게 사용하고 계신다. 목사의 직분을 오용하며 주님을 욕되게 하는 남성들도 많고 그런 직분을 가지지 않았지만 훌륭한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 여성들이 많이 있다. 목사가 되면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는 것이고 목사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지 않는다는 식의 논리는 성립될 수 없으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은 그 자체로서 아무런 차등없이 매우 소중하다. 하나님께서 남자를 여자 보다 더 사랑하고 계심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러나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의 직분을 허락하시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의 뜻이며 몫이다. 여권주의자들이나 여성 옹호론자들은 시류의 영향으로 인해, 여자들도 남자들 처럼 목사가 될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우려 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교회 안의 성숙한 여성들은 교회의 목사, 즉 교사로서 직분을 담당하는 형제들을 위해 권면하며 그들의 온당한 순종을 위해 기도하는 자세를 가짐으로써 주님의 교회가 온전히 잘 세워져 갈 수 있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필자의 이런 말에 대해, 현실 교회에서 여성들이 가르치고 있는 문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묻는 사람들이 혹 있을지 모른다. 목사가 있지 않은 작은 교회나 주일학교 같은데서 여성들이 실제로 가르치는 것에 대한 지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자가 독립된 교사로서 성도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목사, 즉 교사의 지도를 받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이는 비단 여전도사 뿐 아니라 남자 전도사나 주일학교 교사들도 마찬가지이다.
[Ⅳ]
우리시대의 연약한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교훈이 아니라 세속적 시류의 영향을 받고 있는 점은 매우 안타깝다. 목사 직분을 감당하는 남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순종적인 목회가 아니라 권위주의를 앞세운 인본적인 목회를 함으로써 그러한 잘못된 욕구들이 더욱 강하게 분출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는 말씀에 충실하지 못한 목사들이 성도들 위에 군림하려는 잘못된 모습에서 기인한 부끄러움일 것이다. 그렇잖아도 말씀이 사라져 가는 안타까운 시대에,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해야 할 학자들 마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다.
앞의 김세윤 교수는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왜 이제서야 갑작스럽게 그런 주장을 펴는지 그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금 묻고 싶다. 이전에는 모르고 있다가 최근에 들어와서 고린도전서14:34,35의 삽입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말인가? 이번 주장도 한국의 여성단체에서 초빙하지 않았으면 말하지 않았을 내용은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그는 신학자로서 자질을 의심받을 수 밖에 없다.
바라기로는 교회 가운데 교사로 세움을 받은 목사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올바른 목회를 함으로써, 주님의 몸된 교회가 현대 페미니즘의 시류에 휩쓸리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남성이기 때문에 여성보다 우월하다든지 여성이기 때문에 목사보다 신앙이 못한 것이 아니다. 목사 직분을 가진 남성들 보다 특별한 직분을 가지지 않은 일반 여성들이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얼마든지 많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목사라는 직분으로 인해 더 나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단지 교회가 허락한 직분이므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 직분을 수행해 갈 따름이다.
그리고 이 땅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잘못 세워진 목회자들이 많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교사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는 자들이 신학교를 졸업했다는 이유와 남성이라는 이유로 쉽게 목사가 되어 있다는 사실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말씀에 나타나는 원리 자체를 무시하거나 바꿀 수는 없다. 남성이 교회의 교사인 목사직분을 맡는 것이 성경적이라 하는 것은 단순히 기독교 전통을 보존하기 위한 수구적 견해 때문이 아니다. 직분과 관련된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단순히 시대에 따른 문화적 특성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주님의 말씀은 그가 다시 오실 그 날까지 교회의 중심에 온전히 받아들여야 할 진리의 교훈이다.
하나님 앞에서 남성과 여성의 능력에 따른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목사라고 해서 천국에서 영웅이 된다거나 더 많은 칭찬을 받는 것이 아니며 더 많은 상급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직분을 잘 감당하지 못함으로 인해 더욱 엄한 책망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세상 가운데 존재하는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 지상에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며 직분을 기득권의 한 형태로 이해하는 오류에 빠지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교회에서 기득권을 주장하는 자라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누구라도 주님의 뜻을 오해하고 있는 자들일 것이다. (뉴스앤조이, 2004.7.24)
*여성 목사제도에 관한여 보다 자세한 개혁교회의 신학적 원리에 따른 설명은 제가 소개한 책 [교회]에 나와 있습니다.
2007.02.03 00:23:04
구름/헛~ 무슨 이런 허접스런 궤변이 다 있는지.. 개인적으로 저는 구름님이 퍼온 그런 허접한 글에 대해 분노마저 느껴지네요..
"남성이 교회의 교사인 목사직분을 맡는 것이 성경적이며, 그것은 진리"라는 발상 말에요...여자목사 반대 이유가 결국은 다양한 직분에 근거하기 때문이라는 얘길 해대지만, 현실적으론 그 직분 자체가 위계를 가지고 있고 지속적으로 차별을 낳고 있는 것을.. 또한 그 직분이란 게 고대나 중세나 현대나 늘 동일하게 고정되어 있어야만 하는 건가요? 글구 그 직분이 고정되어야 하는 이유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놓으신 것이라고 정말로 그렇게 보는 건지....
"남성이 목사직분을 맡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본질적 은사"라고 말하는 그 치들의 뇌속에는 도대체 뭐가 들어 있는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참으로 여기저기 하나님 갖다 붙여서 모독하고 있네요.. 하나님으로부터 직분을 부여받았다고 자꾸 말하는데, 하나님이 남자목사제도 정당화를 위해 존재하는 그런 분인가요? 하나님이 무슨 꼭두각시처럼 당신네들에겐 하나님이 그렇게도 만만하던가요?
그리고 차이의 다양성과 그로 인한 충돌의 폐해도 같이 고려해야 할 텐데.. 전자만 살짝 얘기하는 것도 우습지요.. 제발 허접한 궤변에다 하나님 갖다 붙이진 마시길.. 도대체 하나님이 언제 남정네들 목사제도를 정당화했나요? 당신네들 성경책은 인류 역사속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끔찍하고도 참혹하게 죽여왔던 <살인무기>였음을 왜 그리도 모르는지.. 시간나믄 조찬선,<기독교죄악사>(평단문화사)나 한 번 집구석에서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죄송하네요.. 화있을진저..
"남성이 교회의 교사인 목사직분을 맡는 것이 성경적이며, 그것은 진리"라는 발상 말에요...여자목사 반대 이유가 결국은 다양한 직분에 근거하기 때문이라는 얘길 해대지만, 현실적으론 그 직분 자체가 위계를 가지고 있고 지속적으로 차별을 낳고 있는 것을.. 또한 그 직분이란 게 고대나 중세나 현대나 늘 동일하게 고정되어 있어야만 하는 건가요? 글구 그 직분이 고정되어야 하는 이유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놓으신 것이라고 정말로 그렇게 보는 건지....
"남성이 목사직분을 맡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본질적 은사"라고 말하는 그 치들의 뇌속에는 도대체 뭐가 들어 있는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참으로 여기저기 하나님 갖다 붙여서 모독하고 있네요.. 하나님으로부터 직분을 부여받았다고 자꾸 말하는데, 하나님이 남자목사제도 정당화를 위해 존재하는 그런 분인가요? 하나님이 무슨 꼭두각시처럼 당신네들에겐 하나님이 그렇게도 만만하던가요?
그리고 차이의 다양성과 그로 인한 충돌의 폐해도 같이 고려해야 할 텐데.. 전자만 살짝 얘기하는 것도 우습지요.. 제발 허접한 궤변에다 하나님 갖다 붙이진 마시길.. 도대체 하나님이 언제 남정네들 목사제도를 정당화했나요? 당신네들 성경책은 인류 역사속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끔찍하고도 참혹하게 죽여왔던 <살인무기>였음을 왜 그리도 모르는지.. 시간나믄 조찬선,<기독교죄악사>(평단문화사)나 한 번 집구석에서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죄송하네요.. 화있을진저..
2007.02.03 01:10:07
아버지 역할? 어이쿠~ 님에게는 그게 역할분담론으로 읽히나여? 정말 황당하군요..
그 아버지 역할이란 게 도대체 뭔데요? 게다가 그 아버지 역할을 어머니가 하면 안된다는 법이라도 있나요? 어차피 가부장적 질서가 아닌 민주적 질서와 사랑으로 함께 하는 거라면 어머니라고 해서 못할 것도 뭐 있겠어요..
그래요.. 저는 구름님이 말하는 하나님은 믿지 않아요.. "목사는 영원히 남자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그런 하나님은 그냥 쓰레기통에서나 찾아보라구 해여.. 미안하네요..
그 아버지 역할이란 게 도대체 뭔데요? 게다가 그 아버지 역할을 어머니가 하면 안된다는 법이라도 있나요? 어차피 가부장적 질서가 아닌 민주적 질서와 사랑으로 함께 하는 거라면 어머니라고 해서 못할 것도 뭐 있겠어요..
그래요.. 저는 구름님이 말하는 하나님은 믿지 않아요.. "목사는 영원히 남자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그런 하나님은 그냥 쓰레기통에서나 찾아보라구 해여.. 미안하네요..
2007.02.03 03:42:27
아버지 역할과 어머니 역할, 목사는 남자만? 일관성이 있는지 생각해 보자:
1. 자녀를 두고 이혼한 사람, 기독교인일 경우는 더 골치가 아픈 문제다. 아이를 맡은 여성인 경우, 아버지 역할만이 아니라 부모의 역할을 해야 한다. 성경을 탓할 여유가 없다. 그래도, 그녀는 하느님을 믿을 수 있다.
2. 이혼한 사람은 하느님의 축복 밖에 있는 자?: 이혼이 하느님의 축복보다 세구나..
3. 바울 서신의 내용을 모든 상황에 적용하는 방식의 일관성 문제: 사도 바울은 어떤 곳에서는 여자들은 너울을 쓰고 잠잠히 있으라고 그러고, 어떤 곳에서는 자유자나 노예나 남자나 여자나 한 하느님의 자녀들이라고 하고 있다. 이런~, 성경구절 그냥 갖다 붙이는 건, 조심조심..
4. 예수님 주위의 여자들: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함께 한 여인들, 빈 무덤을 발견한 여인들, 예수님 무릎 아래서 배웠던 여인, 예수님의 마음을 읽고 옥합을 깨뜨린 여인..
5. 창세기에서 여자의 탄생: 남자를 도우라고 지음 받았다? 돕는 것은 최소한 세가지 관계가 있음: 더 못한 자가 더 뛰어난 자를 돕는 경우[예, 아들이 아버지를 돕는 경우], 동등한 경우[예, 비슷한 수준의 친구 사이], 더 뛰어난 자가 돕는 경우[예, 우유부단한 남자를 잘 돕는 씩씩하고 현명한 여자]
6. 마가복음 16:9-20, 특히, 18절*: 성경에 근거해서 남자만 목사를 해야 한다면, 차라리 마가복음 16장 18절로 테스트를 해서, 독을 마셔서 죽는 자들은 믿지 않는 자들이니 목사 라이센스는 가짜라는 시비에는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일관성 문제, 심각해진다.
-----------------------------------------------------------------------
예수께서 이레의 첫날 새벽에 살아나신 뒤에, 맨 처음으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일곱 귀신을 쫓아내 주신 여자이다.
마리아는 예수와 함께 지내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가 살아 계시다는 것과, 마리아가 예수를 목격했다는 말을 듣고서도, 믿지 않았다.
그 뒤에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내려가는데, 예수께서는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들은 다른 제자들에게 되돌아가서 알렸으나,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
그 뒤에 열한 제자가 음식을 먹을 때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이 믿음이 없고 마음이 무딘 것을 꾸짖으셨다. 그들이,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나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표징들이 따를 터인데, 곧 그들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으로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들며, 독약을 마실지라도 절대로 해를 입지 않으며, 아픈 사람들에게 손을 얹으면 나을 것이다."
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뒤에, 하늘로 들려 올라가셔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으셨다.
그들은 나가서, 곳곳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일하시고, 여러 가지 표징이 따르게 하셔서, 말씀을 확증하여 주셨다.
(http://www.holybible.or.kr/cgi/bibleftxt.php?VR=2&VL=41&CN=16&CV=99&FR=H&KY=%b8%b6%bc%c5%b5%b5+ )
1. 자녀를 두고 이혼한 사람, 기독교인일 경우는 더 골치가 아픈 문제다. 아이를 맡은 여성인 경우, 아버지 역할만이 아니라 부모의 역할을 해야 한다. 성경을 탓할 여유가 없다. 그래도, 그녀는 하느님을 믿을 수 있다.
2. 이혼한 사람은 하느님의 축복 밖에 있는 자?: 이혼이 하느님의 축복보다 세구나..
3. 바울 서신의 내용을 모든 상황에 적용하는 방식의 일관성 문제: 사도 바울은 어떤 곳에서는 여자들은 너울을 쓰고 잠잠히 있으라고 그러고, 어떤 곳에서는 자유자나 노예나 남자나 여자나 한 하느님의 자녀들이라고 하고 있다. 이런~, 성경구절 그냥 갖다 붙이는 건, 조심조심..
4. 예수님 주위의 여자들: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함께 한 여인들, 빈 무덤을 발견한 여인들, 예수님 무릎 아래서 배웠던 여인, 예수님의 마음을 읽고 옥합을 깨뜨린 여인..
5. 창세기에서 여자의 탄생: 남자를 도우라고 지음 받았다? 돕는 것은 최소한 세가지 관계가 있음: 더 못한 자가 더 뛰어난 자를 돕는 경우[예, 아들이 아버지를 돕는 경우], 동등한 경우[예, 비슷한 수준의 친구 사이], 더 뛰어난 자가 돕는 경우[예, 우유부단한 남자를 잘 돕는 씩씩하고 현명한 여자]
6. 마가복음 16:9-20, 특히, 18절*: 성경에 근거해서 남자만 목사를 해야 한다면, 차라리 마가복음 16장 18절로 테스트를 해서, 독을 마셔서 죽는 자들은 믿지 않는 자들이니 목사 라이센스는 가짜라는 시비에는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일관성 문제, 심각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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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이레의 첫날 새벽에 살아나신 뒤에, 맨 처음으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일곱 귀신을 쫓아내 주신 여자이다.
마리아는 예수와 함께 지내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가 살아 계시다는 것과, 마리아가 예수를 목격했다는 말을 듣고서도, 믿지 않았다.
그 뒤에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내려가는데, 예수께서는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들은 다른 제자들에게 되돌아가서 알렸으나,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
그 뒤에 열한 제자가 음식을 먹을 때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이 믿음이 없고 마음이 무딘 것을 꾸짖으셨다. 그들이,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나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표징들이 따를 터인데, 곧 그들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으로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들며, 독약을 마실지라도 절대로 해를 입지 않으며, 아픈 사람들에게 손을 얹으면 나을 것이다."
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뒤에, 하늘로 들려 올라가셔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으셨다.
그들은 나가서, 곳곳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일하시고, 여러 가지 표징이 따르게 하셔서, 말씀을 확증하여 주셨다.
(http://www.holybible.or.kr/cgi/bibleftxt.php?VR=2&VL=41&CN=16&CV=99&FR=H&KY=%b8%b6%bc%c5%b5%b5+ )
2007.02.03 04:36:33
/여자목사제도에 대한 구름의 의견
“남녀분별을,,, 말함에도,
남녀차별로 이해해서,
남녀동일을 주장한다.
하나님의 창조원리, 질서를,,, 말함에도,
요즘은 그것도 차별이요 타파의 대상이 되는 시대인 것이다.
여자목사제도가 생겨난 것도,,, 지난세기의 일이다.
그것을 차별로 보고 불평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직분도,,,
시대나 사상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여자 목사제도가 신학적으로
본래부터 합당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가 문제의 초점인데,
저는,,,,, 여자 목사제도는 성경적으로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요약
여자목사제도는 하나님의 창조원리이자 질서인 남녀분별에 위배된다.
여자목사제도는 시대나 사상에 따라 변할 수 없는 직분을 변경하는 행위이다.
/정리
하나님은, 남자는 목사가 될 수 있게, 여자는, 목사가 될 수 없게 창조하셨다.
남자목사제도는, 시대나 사상과는 관계없이 태초부터 종말까지 존속할 것이다.
/늘오늘의 촌평
^^;
“남녀분별을,,, 말함에도,
남녀차별로 이해해서,
남녀동일을 주장한다.
하나님의 창조원리, 질서를,,, 말함에도,
요즘은 그것도 차별이요 타파의 대상이 되는 시대인 것이다.
여자목사제도가 생겨난 것도,,, 지난세기의 일이다.
그것을 차별로 보고 불평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직분도,,,
시대나 사상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여자 목사제도가 신학적으로
본래부터 합당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가 문제의 초점인데,
저는,,,,, 여자 목사제도는 성경적으로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요약
여자목사제도는 하나님의 창조원리이자 질서인 남녀분별에 위배된다.
여자목사제도는 시대나 사상에 따라 변할 수 없는 직분을 변경하는 행위이다.
/정리
하나님은, 남자는 목사가 될 수 있게, 여자는, 목사가 될 수 없게 창조하셨다.
남자목사제도는, 시대나 사상과는 관계없이 태초부터 종말까지 존속할 것이다.
/늘오늘의 촌평
^^;
2007.02.03 04:54:58
rive raod님, 역할이란 말이 오해의 소지가 있나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정하신 고유의 특성적 성격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가정이라는 조직체를 만드시고 가정의 내에 고유적인 질서를 허락 하셨습니다. 가부장제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처럼 교회에서의 목사직분도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연관지어서 설명되어지는 것입니다. 발이 손이 될 수 없고, 손이 발이 될 수 없듯이, 우리 몸에도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가 있지 않습니까? 발이 없으면 손이 그 부분까지 감당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손이 발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위의 긴 글을 천천히 다 읽어 보십시오.
문제로 삼으신2.3.4.5번은 윗글 밑에 기록한 책에 자세히 답변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정하신 고유의 특성적 성격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가정이라는 조직체를 만드시고 가정의 내에 고유적인 질서를 허락 하셨습니다. 가부장제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처럼 교회에서의 목사직분도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연관지어서 설명되어지는 것입니다. 발이 손이 될 수 없고, 손이 발이 될 수 없듯이, 우리 몸에도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가 있지 않습니까? 발이 없으면 손이 그 부분까지 감당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손이 발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위의 긴 글을 천천히 다 읽어 보십시오.
문제로 삼으신2.3.4.5번은 윗글 밑에 기록한 책에 자세히 답변해 주고 있습니다.
2007.02.03 05:01:23
미선이님,제가 이곳 게시판의 글들과 댓글들을 살펴보니, 미선이님은 학문은 깊으신데 하나님은 믿지 않는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미선이님은 가정에서 아버지께서 늘 아버지 역할을 하시는 것이 남녀 차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가정 고유의 특성이지요. 가정에서 아버지가 잘못된 권위주의로 가정위에 군림하는 사례가 있다고 해서 자식이 아버지의 역할을 하자는 취지의 논리는 전자나 후자나 다 잘못된 것이겠지요.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정은 그 특성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교회의 직분도 시대의 가치나 사상에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여자 목사제도가 신학적으로 본래부터 합당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가 문제의 초점인데, 저는 여자 목사제도는 성경적으로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불평과 험악한 글을 쏟아내기 전에 미선이님 영혼의 문제에 관하여 진지한,심각한 고민이 잇으면 합니다.
2007.02.03 07:46:24
구름 님, 진지하게 답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구름 님께서 옮기신 글의 주요한 논지는 다음 부분이군요:
"하나님께서는 하와의 유혹으로 인해 죄가 이 세상에 들어 왔음을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으며 그것을 직분과 연관짓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가 여자를 목사로 허락하지 않는 것은, 남성이 여성 위에 군림할 수 있다거나 여성이 남성에게 군림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진정한 의미는 교회가 목사직분을 남성에게 허락함으로써, 여성을 통해 이 세상에 들어 온 죄악을 다스려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교회의 존재를 묵시적으로 선포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해석이 얼마나 타당한지는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다를 겁니다.
창세기 3장: 11-20, 특히 16절*에 나오는 "내가 너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너는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 것이다.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 (To the woman He said, "I will greatly multiply Your pain in childbirth, In pain you shall bring forth children; Yet your desire shall be for your husband, And he shall rule over you.)"라는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말씀인가는 조심해서 참뜻을 구해야 하지 않을런지요.
이 말씀을 글자 그대로 믿는다면, 왜 마가복음 16장 18절 말씀은 글자 그대로 받을 수 없을까요? 역시, 일관성 문제가 심각합니다. 좀더 간단한 예로는, 십일조는 강조를 하고, 돼지고기 먹지 말라는 것은 슬쩍 넘기는 태도와 같이 신앙의 일관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지요.
아무튼, 누가 맞느냐는 편가르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정답이 벌써 나와 있는데, 왜 자꾸 딴소리 하느냐는 입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는 것을 말씀드리려는 것이지요.
미국에서 남북전쟁을 할 때, 교단이 남북으로 갈라져서 한쪽은 노예제도를 옹호했고, 한쪽은 노예제도 폐지를 주장했지요. 양쪽 다 성서를 근거로요. 그럼, 어느 한쪽은 하느님을 안 믿었나요? 노예제도 폐지가 맞다면, 그 이전에 존속된 노예제도는 또 하느님의 뜻이었나요? 이처럼 그리 간단치가 않다는 말이지요.
주님 안에서 평안하시길.
-텍사스에서
-------------------------------------------------------------
(http://www.holybible.or.kr/cgi/bibleftxt.php?VR=2&VL=1&CN=3&CV=5)
*하나님이 물으셨다. "네가 벗은 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그 남자는 핑계를 대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짝지어 주신 여자, 그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그것을 먹었습니다."
주 하나님이 그 여자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쩌다가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여자도 핑계를 대었다. "뱀이 저를 꾀어서 먹었습니다."
주 하나님이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서 네가 저주를 받아, 사는 동안 평생토록 배로 기어다니고, 흙을 먹어야 할 것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자손을 여자의 자손과 원수가 되게 하겠다. 여자의 자손은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너는 여자의 자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너는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 것이다.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
남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서,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너는 들에서 자라는 푸성귀를 먹을 것이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담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하였다. 그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구름 님께서 옮기신 글의 주요한 논지는 다음 부분이군요:
"하나님께서는 하와의 유혹으로 인해 죄가 이 세상에 들어 왔음을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으며 그것을 직분과 연관짓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가 여자를 목사로 허락하지 않는 것은, 남성이 여성 위에 군림할 수 있다거나 여성이 남성에게 군림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진정한 의미는 교회가 목사직분을 남성에게 허락함으로써, 여성을 통해 이 세상에 들어 온 죄악을 다스려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교회의 존재를 묵시적으로 선포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해석이 얼마나 타당한지는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다를 겁니다.
창세기 3장: 11-20, 특히 16절*에 나오는 "내가 너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너는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 것이다.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 (To the woman He said, "I will greatly multiply Your pain in childbirth, In pain you shall bring forth children; Yet your desire shall be for your husband, And he shall rule over you.)"라는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말씀인가는 조심해서 참뜻을 구해야 하지 않을런지요.
이 말씀을 글자 그대로 믿는다면, 왜 마가복음 16장 18절 말씀은 글자 그대로 받을 수 없을까요? 역시, 일관성 문제가 심각합니다. 좀더 간단한 예로는, 십일조는 강조를 하고, 돼지고기 먹지 말라는 것은 슬쩍 넘기는 태도와 같이 신앙의 일관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지요.
아무튼, 누가 맞느냐는 편가르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정답이 벌써 나와 있는데, 왜 자꾸 딴소리 하느냐는 입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는 것을 말씀드리려는 것이지요.
미국에서 남북전쟁을 할 때, 교단이 남북으로 갈라져서 한쪽은 노예제도를 옹호했고, 한쪽은 노예제도 폐지를 주장했지요. 양쪽 다 성서를 근거로요. 그럼, 어느 한쪽은 하느님을 안 믿었나요? 노예제도 폐지가 맞다면, 그 이전에 존속된 노예제도는 또 하느님의 뜻이었나요? 이처럼 그리 간단치가 않다는 말이지요.
주님 안에서 평안하시길.
-텍사스에서
-------------------------------------------------------------
(http://www.holybible.or.kr/cgi/bibleftxt.php?VR=2&VL=1&CN=3&CV=5)
*하나님이 물으셨다. "네가 벗은 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그 남자는 핑계를 대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짝지어 주신 여자, 그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그것을 먹었습니다."
주 하나님이 그 여자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쩌다가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여자도 핑계를 대었다. "뱀이 저를 꾀어서 먹었습니다."
주 하나님이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서 네가 저주를 받아, 사는 동안 평생토록 배로 기어다니고, 흙을 먹어야 할 것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자손을 여자의 자손과 원수가 되게 하겠다. 여자의 자손은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너는 여자의 자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너는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 것이다.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
남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서,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너는 들에서 자라는 푸성귀를 먹을 것이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담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하였다. 그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2007.02.03 12:34:43
제글에 하루 사이에 이토록 많은 댓글이 달려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조금 당혹스럽기 까지 하네요.
지리할지 모르지만... 마저 정리해야할 것 같습니다.
구름 님께서 뉴스엔조이에 올려진 어느 목사님의 장문의 기고를
올리신 것은 그분의 말씀에 동의하는 것이라 믿고
이야기를 풀어나가겠습니다.
인용하신 이 아무개 목사님의 글에 담긴 진정성과
성경에 대한 진지함은 충분히 느껴지나
역시 근본주의적 오류와 독선에 빠진 내용이었습니다.
세세한 모순을 일일이 열거하기는 피곤하고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구약에 기록된 여 선지자들에 대한 내용은
규범적으로 해석하여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면서
여자 목사 안수에 반대되는 근거로 제기되는...
그것도 바울서신의 지극히 일부에 해단 되는 본문에는
규범적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전체에서 여성역시 하나님의 주권아래 놀랍게 쓰임받았다는 사실을 분명인정하면서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이 오늘날 교회에서 재현되는 것을
구조적으로 제한하는 제도를 찬성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 입니다.
그리고 여자 목사 안수 반대는 '성경적인 원리'로
찬성은 '시류에 영합하는 인본주의'로 이원론적으로 계속 구분했는데
이는 근본주의로서의 '뜨거움'은 자극시킬지언정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에는 분명 걸림돌입니다.
과연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바"라고 굳건히 믿고 있는 것이
정말 성경 전체를 흐르는 하나님의 올곧은 뜻인지 아니면
성경의 일부를 침소봉대한 것인지를 분명히 가려내야 하겠죠.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벌어지는 성경 말씀에 의한 폭력은
너무나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니까요...
그리고 바울서신에 대한 이해에서 우리가 분명히 염두해 둘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편지글이 훗날 오랜 세월이 지나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동양 어느 나라 사람들의 손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혀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사실이죠.
바울은 자신의 편지를 시간과 공간을 넘어 무수한 이들에게
'경전'으로 읽혀질것을 염두하고 편지를 쓰지 않았습니다.
편지안에 담긴 개인적인 권유와 부탁, 저주들이 그 반증이지요
가령 예를 들면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아래와 같은 바울의 쓴소리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하노라"에 나오는
'베어버리기'는 '거세' 라는 뜻입니다.
이를 헬라어 원어적 어감을 살려서 번역하면
"당신들을 헷갈리게 만드는 그 인간들, 자기네 물건들이나 거세(去勢)하라지!" 라는 뜻입니다.
("거꾸로 읽는 신약 성경" 참조 - 대한기독교서회)
그렇다면 이러한 갈라디아서 말씀을 근거로 오늘날에도 여실히
활개치고 다니는 율법주의자들에게 거세 혹은 신체의 일부를 절단하는 것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변함이 없는 확고부동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바울이 갈라디아서 편지를 보낼 때 주어진 '삶의 자리'를 고려하며
이해해야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습니까?
이 아무개 목사님께서 여성 목사 안수 반대를 외치며
'성경적 원리'로 제시한 구절은 성경 전체에서 단 두 부분
그것도 바울 서신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 빈부귀천의 평등을 강변한 사도 바울이
여자가 조용히 하고 잠잠히 할것을 말했다면 당연히
해당 교회의 '상황'을 고려하고 이해해야 함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디모데 전서가 쓰여질 당시 디모데가 목회한 교회와 고린도 교회가
'말 많은' 여자 지도자들에 의해 혼란스러웠을 것이라는
거의 정설에 가까운 추측에 따르면 바울의 그와 같은 견해는
'해당 교회에' 지극히 마땅할 뿐 결코 보편타당한 원칙이 아닙니다.
또한 유혹에 무너진 하와에 의해 죄가 들어왔고 이를 직분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지난날 지극히 남성 중심의 성경해석에 불과합니다.
하와가 유혹에 넘어가는 장면을 기록한 창세기 말씀에 따르면 분명히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 이것이 무슨 의미겠습니까? 죄의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 하와는
단지 순서의 차이일 뿐이지 명백한 '공범'임을 말씀하고 있는것 아닌가요?
따라서 (고린도 전서와 디모데 전서를 기록한 바로 그)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와가 아닌) "아담의 범죄의 경우에는 그 한 사람 때문에
죽음이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롬 5:17, 공동번역) 라고 기록했습니다.
대체 어떻게 이것이 교회 직분, 그것도 여성 목사 안수 반대의 근거가 될 수 있습니까?
포스트 모더니즘 사회에서의 진리의 상대화와 그로인한 절대 불변의 진리 원리의
훼손은 저역시... 아니 '인본주의 신학 처럼 보이는' 모든 이들이 반대하며
이에 대한 반발로 근본주의로 넘어가는 많은 이들의 의중은 충분히 공감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결코 동의와 납득은 할 수 있습니다.
근본주의는 그들이 그토록 멸시하는 자유주의 못지 않게 하나님의 뜻을 훼손하기 때문입니다.
다음과 같은 이아무개 목사님의 말씀은 근본주의적 논증의 전형입니다.
길더라도 재인용 하겠습니다.
"이는 교회의 직분이 토론이나 여론을 배경으로 하여
변화가능한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민주적인 절차에 따른 다수의
견해에 따르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인본주의적 대세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이 약화되는 것을 뜻한다.
(중략)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대체적인 배경이 하나님의 구체적인 말씀이 아니라
사회 정신적 경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바는 인간들의
경험적 자기 생각이나 판단이 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 진리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민주적인 철자에 따른 다수의 견해", "인본주의적 대세", "사회 정신적 경험"
"인간들의 경험적 자기 생각이나 판단" 등의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단어들과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 "진리" 와 같은 단어들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주관 = 하나님의 뜻" 이라는 공식이 지난 교회역사에서
얼마나 추잡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을 오용시켰는지 생각할때
몸서리쳐질정도로 소름끼치는 표현입니다.
축자영감설에 따른 확신이 오히려 인본주의적 자기 경험이고 그 축자영감설을 거스르는 해석이
또한 하나님의 진리일수 있다는 생각은 안해 보셨는지요?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앎'에 제한 되지 않으시기에 우리의 신학함이
'익숙함'으로 끊임없이 벗어나야 하며 따라서 겸손히 말씀앞에 나의 모든 선입견을
벗어던지고 머리를 조아리며 다른이들의 말을 경청하는것이 마땅하지 않은가요?
아쉽게도 구름님께서 인용하신 글은 근본주의적 선동과 오류의 전형만 확인할뿐이지
성경 전체를 흐르는 하나님의 뜻에 근거한 여자 목사 안수 문제에 대한
적절한 대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례한 표현들 거듭해서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제글에 담긴 오류에 대해서는 따끔히 지적해주시길 바랍니다.
대신 거추장스럽게 우리몸을 감싸고 있는 그 모든 편견과 고집을 벗어버리고
힘차게 굽이치며 흘러가는 진리의 강물속으로 '알몸으로' 매일 같이
더불어 함께 뛰어들어가길 또한 진심으로 권하는 바입니다.
내일 맞이할 주님의날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 더욱 풍성하시길 바랍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조금 당혹스럽기 까지 하네요.
지리할지 모르지만... 마저 정리해야할 것 같습니다.
구름 님께서 뉴스엔조이에 올려진 어느 목사님의 장문의 기고를
올리신 것은 그분의 말씀에 동의하는 것이라 믿고
이야기를 풀어나가겠습니다.
인용하신 이 아무개 목사님의 글에 담긴 진정성과
성경에 대한 진지함은 충분히 느껴지나
역시 근본주의적 오류와 독선에 빠진 내용이었습니다.
세세한 모순을 일일이 열거하기는 피곤하고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구약에 기록된 여 선지자들에 대한 내용은
규범적으로 해석하여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면서
여자 목사 안수에 반대되는 근거로 제기되는...
그것도 바울서신의 지극히 일부에 해단 되는 본문에는
규범적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전체에서 여성역시 하나님의 주권아래 놀랍게 쓰임받았다는 사실을 분명인정하면서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이 오늘날 교회에서 재현되는 것을
구조적으로 제한하는 제도를 찬성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 입니다.
그리고 여자 목사 안수 반대는 '성경적인 원리'로
찬성은 '시류에 영합하는 인본주의'로 이원론적으로 계속 구분했는데
이는 근본주의로서의 '뜨거움'은 자극시킬지언정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에는 분명 걸림돌입니다.
과연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바"라고 굳건히 믿고 있는 것이
정말 성경 전체를 흐르는 하나님의 올곧은 뜻인지 아니면
성경의 일부를 침소봉대한 것인지를 분명히 가려내야 하겠죠.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벌어지는 성경 말씀에 의한 폭력은
너무나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니까요...
그리고 바울서신에 대한 이해에서 우리가 분명히 염두해 둘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편지글이 훗날 오랜 세월이 지나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동양 어느 나라 사람들의 손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혀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사실이죠.
바울은 자신의 편지를 시간과 공간을 넘어 무수한 이들에게
'경전'으로 읽혀질것을 염두하고 편지를 쓰지 않았습니다.
편지안에 담긴 개인적인 권유와 부탁, 저주들이 그 반증이지요
가령 예를 들면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아래와 같은 바울의 쓴소리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하노라"에 나오는
'베어버리기'는 '거세' 라는 뜻입니다.
이를 헬라어 원어적 어감을 살려서 번역하면
"당신들을 헷갈리게 만드는 그 인간들, 자기네 물건들이나 거세(去勢)하라지!" 라는 뜻입니다.
("거꾸로 읽는 신약 성경" 참조 - 대한기독교서회)
그렇다면 이러한 갈라디아서 말씀을 근거로 오늘날에도 여실히
활개치고 다니는 율법주의자들에게 거세 혹은 신체의 일부를 절단하는 것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변함이 없는 확고부동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바울이 갈라디아서 편지를 보낼 때 주어진 '삶의 자리'를 고려하며
이해해야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습니까?
이 아무개 목사님께서 여성 목사 안수 반대를 외치며
'성경적 원리'로 제시한 구절은 성경 전체에서 단 두 부분
그것도 바울 서신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 빈부귀천의 평등을 강변한 사도 바울이
여자가 조용히 하고 잠잠히 할것을 말했다면 당연히
해당 교회의 '상황'을 고려하고 이해해야 함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디모데 전서가 쓰여질 당시 디모데가 목회한 교회와 고린도 교회가
'말 많은' 여자 지도자들에 의해 혼란스러웠을 것이라는
거의 정설에 가까운 추측에 따르면 바울의 그와 같은 견해는
'해당 교회에' 지극히 마땅할 뿐 결코 보편타당한 원칙이 아닙니다.
또한 유혹에 무너진 하와에 의해 죄가 들어왔고 이를 직분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지난날 지극히 남성 중심의 성경해석에 불과합니다.
하와가 유혹에 넘어가는 장면을 기록한 창세기 말씀에 따르면 분명히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 이것이 무슨 의미겠습니까? 죄의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 하와는
단지 순서의 차이일 뿐이지 명백한 '공범'임을 말씀하고 있는것 아닌가요?
따라서 (고린도 전서와 디모데 전서를 기록한 바로 그)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와가 아닌) "아담의 범죄의 경우에는 그 한 사람 때문에
죽음이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롬 5:17, 공동번역) 라고 기록했습니다.
대체 어떻게 이것이 교회 직분, 그것도 여성 목사 안수 반대의 근거가 될 수 있습니까?
포스트 모더니즘 사회에서의 진리의 상대화와 그로인한 절대 불변의 진리 원리의
훼손은 저역시... 아니 '인본주의 신학 처럼 보이는' 모든 이들이 반대하며
이에 대한 반발로 근본주의로 넘어가는 많은 이들의 의중은 충분히 공감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결코 동의와 납득은 할 수 있습니다.
근본주의는 그들이 그토록 멸시하는 자유주의 못지 않게 하나님의 뜻을 훼손하기 때문입니다.
다음과 같은 이아무개 목사님의 말씀은 근본주의적 논증의 전형입니다.
길더라도 재인용 하겠습니다.
"이는 교회의 직분이 토론이나 여론을 배경으로 하여
변화가능한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민주적인 절차에 따른 다수의
견해에 따르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인본주의적 대세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이 약화되는 것을 뜻한다.
(중략)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대체적인 배경이 하나님의 구체적인 말씀이 아니라
사회 정신적 경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바는 인간들의
경험적 자기 생각이나 판단이 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 진리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민주적인 철자에 따른 다수의 견해", "인본주의적 대세", "사회 정신적 경험"
"인간들의 경험적 자기 생각이나 판단" 등의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단어들과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 "진리" 와 같은 단어들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주관 = 하나님의 뜻" 이라는 공식이 지난 교회역사에서
얼마나 추잡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을 오용시켰는지 생각할때
몸서리쳐질정도로 소름끼치는 표현입니다.
축자영감설에 따른 확신이 오히려 인본주의적 자기 경험이고 그 축자영감설을 거스르는 해석이
또한 하나님의 진리일수 있다는 생각은 안해 보셨는지요?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앎'에 제한 되지 않으시기에 우리의 신학함이
'익숙함'으로 끊임없이 벗어나야 하며 따라서 겸손히 말씀앞에 나의 모든 선입견을
벗어던지고 머리를 조아리며 다른이들의 말을 경청하는것이 마땅하지 않은가요?
아쉽게도 구름님께서 인용하신 글은 근본주의적 선동과 오류의 전형만 확인할뿐이지
성경 전체를 흐르는 하나님의 뜻에 근거한 여자 목사 안수 문제에 대한
적절한 대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례한 표현들 거듭해서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제글에 담긴 오류에 대해서는 따끔히 지적해주시길 바랍니다.
대신 거추장스럽게 우리몸을 감싸고 있는 그 모든 편견과 고집을 벗어버리고
힘차게 굽이치며 흘러가는 진리의 강물속으로 '알몸으로' 매일 같이
더불어 함께 뛰어들어가길 또한 진심으로 권하는 바입니다.
내일 맞이할 주님의날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 더욱 풍성하시길 바랍니다.
2007.02.03 12:39:13
구름님. .사제가 남성인 아론의 후예라는 점을 들어, 여성은 성직을 맡으면 안된다고 주장하시는데 이는 어불성설입니다. 왜냐면, 아론의 후예인 사제가 목회하는 우리 성공회에서는 여성에게도 사제서품을 허용하거든요. 미국 성공회의 경우는 여성이 교구장인 주교로 목회합니다. 님의 주장대로 아론의 후예인 사제직을 우리 성공회가 여성에게도 허용한다면, 개신교도 목사직을 여성에게도 허용해야 합니다. 더구나 성서를 보면 하느님이 여성을 예언자로 불러서 쓰셨다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런의미에서 여성목사안수가 비성서적이라는 주장은 어불성설이죠.
무엇보다 님의 주장은 논거가 님이 믿는 개신교의 관점에서 잘못되었다는 점에서 비논리적입니다.
님은 개신교의 목사를 구약시대의 사제와 동일하게 여기시는데, 이는 만인사제설이라는 개신교의 원칙을 생각해본다면 모순입니다.. 모든 사람이 사제라면서 왜 목사=사제라고 주장하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남성에게만 목사안수를 주는게 창조질서에 맞는다고요?하긴 그 창조질서라는게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라는 남성우월주의에다가 창세기가 여자로 태어나지 않음을 감사할만큼 여성을 무시하던 유대인들의 가치관이 담긴 구시대적인 가치관이니 보수적인 님의 입맛에는 맞겠죠..하여간 님의 주장은 목사안수를 주는게 남서우월주의적인 편견이라고 자인하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아는 것들, 성경에는 없다/오경준 지음/홍성사중 '남녀차별은 없다'를 읽어보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님의 주장은 논거가 님이 믿는 개신교의 관점에서 잘못되었다는 점에서 비논리적입니다.
님은 개신교의 목사를 구약시대의 사제와 동일하게 여기시는데, 이는 만인사제설이라는 개신교의 원칙을 생각해본다면 모순입니다.. 모든 사람이 사제라면서 왜 목사=사제라고 주장하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남성에게만 목사안수를 주는게 창조질서에 맞는다고요?하긴 그 창조질서라는게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라는 남성우월주의에다가 창세기가 여자로 태어나지 않음을 감사할만큼 여성을 무시하던 유대인들의 가치관이 담긴 구시대적인 가치관이니 보수적인 님의 입맛에는 맞겠죠..하여간 님의 주장은 목사안수를 주는게 남서우월주의적인 편견이라고 자인하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아는 것들, 성경에는 없다/오경준 지음/홍성사중 '남녀차별은 없다'를 읽어보기 바랍니다.
2007.02.03 14:37:49
한 가지 이야기를 해드리죠.. 17세기에 미국에 앤 허친슨이라는 여성이 있었습니다.그녀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고, 이를 위협으로 느낀 남성들에게 탄압당했습니다. 성서에는 여성인 브리스킬라가 하느님의 말씀을 남성인 아폴로에게 전했다는 내용이 있다는 점을 들어 항변했지만 진보적인 그리스도교인들의 공동체로 피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혹시 그 남성의 모습은 여성은 목회하면 안된다고 주장하는 보수적 개신교 목사들이나 교인들의 모습은 아닌지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2007.02.03 16:03:35
이렇게 좋은 공간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이미 진행되고 있는 토론에 중간에 끼어드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꼭 짚고 넘어가고 싶어 글을 남깁니다. 구름님께 질문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능히 여자를 리더(지도자)로 세워 하나님의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으십니까?
여성에게 목사 안수를 금하는 인간의 제도가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만일 하나님이 남성과 여성에 대한 창조 질서를 구름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문자적으로, 기계적으로 적용하시는 분이었다면, 구약의 여자 사사나 선지자가 어떻게 활동할 수 있었겠습니까? 스스로의 창조질서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여자를 세워 교회의 목사로 삼고자 하신다면 교회는 그에 순종해야 할 따름입니다. 인간이 무엇이관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한 교단이 한 인간을 목사로 임명하고 말고를 판단할 권한이 있습니까? 교단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적절한 자격을 갖추었는지를 판단하는 것일뿐, 그가 진정한 목사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여성의 경우는 무조건 목사가 될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여성을 목사로 세우고자 하신다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열어놓는 것이 옳습니까?
베드로의 환상을 다시금 기억했으면 합니다. 성경에서 금하신 음식을 먹으라고 명령하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수밖에 베드로에게 다른 선택이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행 10:15)
하나님께서는 능히 여자를 리더(지도자)로 세워 하나님의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으십니까?
여성에게 목사 안수를 금하는 인간의 제도가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만일 하나님이 남성과 여성에 대한 창조 질서를 구름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문자적으로, 기계적으로 적용하시는 분이었다면, 구약의 여자 사사나 선지자가 어떻게 활동할 수 있었겠습니까? 스스로의 창조질서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여자를 세워 교회의 목사로 삼고자 하신다면 교회는 그에 순종해야 할 따름입니다. 인간이 무엇이관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한 교단이 한 인간을 목사로 임명하고 말고를 판단할 권한이 있습니까? 교단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적절한 자격을 갖추었는지를 판단하는 것일뿐, 그가 진정한 목사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여성의 경우는 무조건 목사가 될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여성을 목사로 세우고자 하신다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열어놓는 것이 옳습니까?
베드로의 환상을 다시금 기억했으면 합니다. 성경에서 금하신 음식을 먹으라고 명령하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수밖에 베드로에게 다른 선택이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행 10:15)
2007.02.03 19:16:44
스컬쳐님의 질문에는 한 가지도 답변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겠군요. 지금 '나무'를 논하고 있는데 '돌'에관한 질문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기차 선로가 생각나는군요. 평행선...질문따로 답변따로
2007.02.03 22:31:26
제 짧은 글이 구름님께 올바로 전달되기에는 부족했나 봅니다. 불친절하기도 하였구요. 구름님께 낯선 느낌과 불편함을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그것처럼 교회에서의 목사직분도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연관지어서 설명되어지는 것입니다. 발이 손이 될 수 없고, 손이 발이 될 수 없듯이, 우리 몸에도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가 있지 않습니까? 발이 없으면 손이 그 부분까지 감당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손이 발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 구름님의 말씀입니다. 교회에서의 목사 직분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연관되어 있다고 설명하셨습니다.
다른 질문에는 답변하실 필요를 못 느끼실 수 있겠지만, 적어도 한가지는 "나무"를 논하는데 "돌"에 대한 질문이라고 치부해 버리실 수는 없을 것 같군요. 구약에서 하나님이 여자 사사나 선지자를 세우신 것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스스로 위배된 행동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창조질서라는 것을 "남자"와 "여자"에 따라 기계적으로 어떤 직분을 맡을 수 있고 없고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 이 점에 대해서만은 답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솔직히, 성경을 자기 편한 대로 규범으로 삼아 율법화하는 태도야 말로 그리스도께서 가장 가슴아파하실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으나 다 하기가 어려울 것 같군요. 한가지만 지적하겠습니다.
저 위에 퍼오신 글에 보면 여자 전도사나 여자 교사의 문제를 단순히 "남자 목사의 지도하에서 가르치는 것이니까 괜찮다"라고 어물쩡 넘어가고 있는데,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찌니라" (딤 2:11~12)는 바울의 명령을 이 시대의 교회가 반드시 지켜야 할 규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결코 그렇게 어물쩡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위 바울의 명령 어디에서 "남자의 지도 하에서는 가르쳐도 된다"는 뉘앙스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행간을 읽어내는 신비적 능력을 소유한 사람의 눈에는 보일지 모르겠지만, 제 눈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는 명령밖에는 안 보입니다.
위의 주장대로 남자의 지도하에 있다면 괜찮다고 칩시다. 만약 위의 주장대로 "여자 전도사도 남자 목사의 지도하에 있다면 괜찮다"라면, 여자 부목사는 남자 담임목사의 지도하에서 가르치면 되는 것이니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습니까? 이런 식의 논리라면 여자 담임목사라 하여도 남자 노회장의 지도하에서 가르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습니까? 여자 노회장이라도 남자 총회장의 지도하에 있다면 괜찮은 것 아닙니까?
성경의 규범이란 것이 이런 식으로 자기 편한대로 갖다 붙이면 되는 것일까요? 지키려면 자기에게 유리한 것, 편한 것만 지키지 말고 바울이 명한 모든 것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자 전도사도, 여자 교사도 허용해서는 안되지 않겠습니까? 성경의 규범을 지켜야 한다면서, 성경의 규범에 어긋나는 것도 이미 하고 있는 것은 관습적으로 해왔으니까 괜찮다는 것입니까? 새로운 것만 안된다는 것입니까?
고린도전서의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라는 말씀을 규범으로 삼아야 한다면, 계시도 없고 방언도 없고 통역함도 없는 예배는 성경의 규범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과연 얼마나 많은 교회에서 예배 시간에 방언과 통역, 예언을 허용하고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5장의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는 말씀도 규범으로 지켜야 한다면, 술 취하거나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교인들은 교회에서 내쫓아야 할 것입니다. 과연 얼마나 많은 교회가 술 취한 이를 교회에서 내어 쫓고 있습니까?
편의에 따라, 말씀을 취사 선택하여 "규범"으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규범"을 지키라고 교회를 세우신 것이 아니며, 말씀 가운데 취사 선택하여 "규범"으로 삼고 지키라고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이땅에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선포하라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라고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부디 이번 글은 구름님께서 평행선을 달린다는 느낌을 받으시기보다는 조금이나마 제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전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00% 동의는 못하시더라도,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는 이해가 된다면 그것으로 족하겠지요.
"그것처럼 교회에서의 목사직분도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연관지어서 설명되어지는 것입니다. 발이 손이 될 수 없고, 손이 발이 될 수 없듯이, 우리 몸에도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가 있지 않습니까? 발이 없으면 손이 그 부분까지 감당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손이 발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 구름님의 말씀입니다. 교회에서의 목사 직분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연관되어 있다고 설명하셨습니다.
다른 질문에는 답변하실 필요를 못 느끼실 수 있겠지만, 적어도 한가지는 "나무"를 논하는데 "돌"에 대한 질문이라고 치부해 버리실 수는 없을 것 같군요. 구약에서 하나님이 여자 사사나 선지자를 세우신 것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스스로 위배된 행동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창조질서라는 것을 "남자"와 "여자"에 따라 기계적으로 어떤 직분을 맡을 수 있고 없고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 이 점에 대해서만은 답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솔직히, 성경을 자기 편한 대로 규범으로 삼아 율법화하는 태도야 말로 그리스도께서 가장 가슴아파하실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으나 다 하기가 어려울 것 같군요. 한가지만 지적하겠습니다.
저 위에 퍼오신 글에 보면 여자 전도사나 여자 교사의 문제를 단순히 "남자 목사의 지도하에서 가르치는 것이니까 괜찮다"라고 어물쩡 넘어가고 있는데,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찌니라" (딤 2:11~12)는 바울의 명령을 이 시대의 교회가 반드시 지켜야 할 규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결코 그렇게 어물쩡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위 바울의 명령 어디에서 "남자의 지도 하에서는 가르쳐도 된다"는 뉘앙스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행간을 읽어내는 신비적 능력을 소유한 사람의 눈에는 보일지 모르겠지만, 제 눈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는 명령밖에는 안 보입니다.
위의 주장대로 남자의 지도하에 있다면 괜찮다고 칩시다. 만약 위의 주장대로 "여자 전도사도 남자 목사의 지도하에 있다면 괜찮다"라면, 여자 부목사는 남자 담임목사의 지도하에서 가르치면 되는 것이니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습니까? 이런 식의 논리라면 여자 담임목사라 하여도 남자 노회장의 지도하에서 가르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습니까? 여자 노회장이라도 남자 총회장의 지도하에 있다면 괜찮은 것 아닙니까?
성경의 규범이란 것이 이런 식으로 자기 편한대로 갖다 붙이면 되는 것일까요? 지키려면 자기에게 유리한 것, 편한 것만 지키지 말고 바울이 명한 모든 것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자 전도사도, 여자 교사도 허용해서는 안되지 않겠습니까? 성경의 규범을 지켜야 한다면서, 성경의 규범에 어긋나는 것도 이미 하고 있는 것은 관습적으로 해왔으니까 괜찮다는 것입니까? 새로운 것만 안된다는 것입니까?
고린도전서의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라는 말씀을 규범으로 삼아야 한다면, 계시도 없고 방언도 없고 통역함도 없는 예배는 성경의 규범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과연 얼마나 많은 교회에서 예배 시간에 방언과 통역, 예언을 허용하고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5장의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는 말씀도 규범으로 지켜야 한다면, 술 취하거나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교인들은 교회에서 내쫓아야 할 것입니다. 과연 얼마나 많은 교회가 술 취한 이를 교회에서 내어 쫓고 있습니까?
편의에 따라, 말씀을 취사 선택하여 "규범"으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규범"을 지키라고 교회를 세우신 것이 아니며, 말씀 가운데 취사 선택하여 "규범"으로 삼고 지키라고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이땅에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선포하라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라고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부디 이번 글은 구름님께서 평행선을 달린다는 느낌을 받으시기보다는 조금이나마 제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전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00% 동의는 못하시더라도,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는 이해가 된다면 그것으로 족하겠지요.
또한, 성서의 중심은 하느님의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설교에 대해서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라고 평가하였지, 예수님은 죄에 대해 설교하셨습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서를 다시한번 읽어보셔야할 듯합니다.
요즘은 신학적 막가파 시대다.남녀분별을 말함에도,남녀차별로 이해해서 모든 부분에서 남녀동일을 주장한다는 것도 1950년대 '우리는 유색인종을 차별하는게 아니라, 구별할 뿐'이라면서 차별을 정당화하고 미화한 백인들의 못된 생각처럼 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에 불과합니다. 더구나 신학적 막가파라는 말도 여성에게도 사제서품이나 목사안수를 주어야 한다고 보는 개혁파들의 개혁적 이념을 그들의 기득권을 침해받을까봐서 두려워하는 수구(戍舊) 교회들의 정서를 보여주는 단어일 뿐입니다. 님은 아니라고 항변할지 모르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예수님의 이땅에 오심은 죄 문제를 해결하러 오셨고,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해결되는 영역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던가라고 하셨는데,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러 오셨다고 하셨지, 죄문제를 해결하려고 오셨다고 한 적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는 주의 기도에서 알 수 있듯이 차별과 불의가 없는 새로운 세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