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쓴 글의 요지는 “인류의 역사는 정해진 길로 간다. 물론 도구가 있겠지만…” 입니다.
그러나, 위의 글을 읽는 분들이 “절대자 하나님이 도구를 시켜 위대한 역사를 행하셨다. 하나님은 위대하시다.”라고 오판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오해를 하지 않도록 몇 가지를 전하고 싶습니다.
1) 절대자 인격신 하나님은 없습니다.
율법이 하나님입니다. 율법 하나님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인간 각 개인과 함께 하셨으나 율법은 지켜도 죽고 안 지켜도 죽는 모순의 하나님 입니다. 인류는 이 율법에서 벗어나기 위해 구원자를 찾습니다.
2) 인류가 행하는 역사는 율법을 벗어나려는 행위 일체입니다. 모든 본능은 율법으로 부터 도망입니다.
과학을 발전시켜 새보다 높이 날고 치타보다 빠르게 달립니다. 율법에서 자유로운 SF영화를 좋아하고 수퍼맨을 기다리고... 그러나, 결국 율법에 갇혀 죽습니다. 그것도 죄인으로 죽습니다. 율법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3) 율법 하나님 + 독생자 성령 = 예수님,
원래부터 하나님은 인간 각자에게 계십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율법이라 불리우고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이라고 불립니다.
성령을 받음으로써 인류는 율법에서 자유로와 집니다. 그러나, 율법을 깨는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함으로써 율법에서 놓입니다. 갈빗대 23개인 불구의 남편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잃어 버린 갈빗대 하나를 찾음으로써 완전한 남편을 만납니다. "아담 + 독생자 성령 = 예수님" 입니다. 첫째 아담이 율법 하나님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구원, 이것이 성서의 핵심이지요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는 방법을 아주아주 여러가지 모양으로, 여러각도에서
암호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성서 해석이라도 결과적으로 그 해석이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자신의 각도에서 구체스럽게
말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있는지, 어떤지는 글을 쓰는 저자 자신의
양심의 소리에 의해서 가장 잘 알고 있지요.
그렇다면 자신의 성서해석은 이렇 이렇다고 본다... 라는 말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누구나의 성서해석은 세상에 두어도 둘 곳이 없을 만큼이나 많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구원에 대한 수억만가지 것들중의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그 성서해석이
읽는독자에게 얼마나 알아듣기 쉬운 해석의 설명이냐 하는 것으로 평가 되어야 합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제 생각이라고 쓰지 못해 죄송합니다.
속에 있는 생각들을 풀어놓을 곳을 찾아 여기 저기 기웃거리다 다비아에 와서 수필을 합니다.
단지 "교리"라는 프레임에 갇혀 인격신 숭배에 빠진 세상에게 장독깨는 마음으로 돌을 던지고 싶었습니다.
좀 불편하고 소란스럽겠지만, 깨어 나야 할 때라 보고서...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누구나 2000년간 섬기던 우상의 기억들을 허탈한 듯이 반추하겠죠.
율법의 탈출을 위해 물질을 찾다가 오히려 물질 문명의 노예가 되어 버린 인류,
3억년전 부터 모아 놓은 화석연료를 불과 200년 만에 다 파먹고 멸종 앞에서 서성대고 있습니다.
이제 깨어 나야 합니다. 출 애굽 해야 합니다. 애굽에는 절망 뿐입니다.
문득 오래전에 봤던 메트릭스가 생각이 나는군요.
읽어 주셔어 감사드리고요...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여?
역사가 필연의 정해진 길인지 아니면 확율의 현실화인지 어찌아누?
정해진 길이라고 주장하려면 미래가 예측 가능해야 하는데 그렇지는 않지요?
율법이 신의 뜻인지 인간의 공갈인지 뭘로 증명할 수 있지요?
앞의 도배글에 성경구절 또한 많이 인용했던데 구절의 권위와 당위성으로 무엇을 이야기 하는 것은 설교인가요 아니면 논리인가요?
논리라?
그대는 매우 많은 이야기를 당연시 하는 군요.
'죄인으로 죽는다.'
'율법에 갇혀있다.'
그리고 율법으로 부터 도망친다는 인간의 본성.
이런 이야기들이 어디로 부터 나와 당연시 되는 것들인지 모르겠군요?
그대가 의심하지 않는 것들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나는 이 모두가 의심스러운데 말입니다.
이런 의심을 내버려두고 논리를 이야기 해나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대가 당연시 하는 것들에 대한 것들 부터 논리적여야 할 것입니다.
아니면 이는 설교일 뿐입니다.
미래가 예측 가능하다는 것도 의문입니다.
현대의 과학들은 이를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불확정적이라는 것이죠.
심지어는 미래에 일어나는 일들이 과거를 규정하기 조차하는 머리를 '띵~'하게 하는 경우도 일어나니 말입니다.
미래가 예측가능함이 그대가 이야기하는 '법'의 원리라면 이는 모든 영역에서 원리로 작용해야 하는데 현실생활에서도 잘 모르겠고 명확하게 설명되는 양자역학의 세상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것들입니다.
마이너스 10의 몇 승씩 되는 아주 짧은 시간 이후의 일들 조차도 예측하지 못하죠.
내가 경계하는 것은 신의 뜻을 알았다고 착각하거나 안다고 공갈치는 경우죠.
신의 뜻을 깨닫고 그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그냥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속에 신의 뜻이 내재해 있을 지도 모르겠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당위성에 전체를 휘어감은 의구심을 내버려둔채 어떤 논리가 진행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설교'라면 가능할 것입니다.
인생이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절대적이며 당연한 한계와
대안으로 성경을 보니 하나님은 "법"으로 보인다고 대안으로 근거 삼았습니다.(1.하나님 에서)
그러므로 한계적 논리가 맞습니다.
다만, 한계를 정당화 하기 위해 도메인 개념을 도입합니다.
법은 도메인이 있습니다.
저의 주장은 "육체로 사는 인간"이라는 도메인을 대상으로 기술하였습니다.
천지창조는 "내가 태어난 그 날"이며 나의 생로병사의 기록이 성경 66권입니다.
그러나 창세기에서 나의 천지창조는 죄의 빅뱅이라고 기술하신 바,
나는 죄인으로 죽을 수 밖에 없음에 문제 해결을 위해 구원자를 찾으라는 예언을 따릅니다.
상대론이 나왔을 때에 이해한 사람이 3명이라던 기록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더욱이 양자론은 실존이나 현실 세계에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지동설이 처음 나왔을 때는 미친 소리로 들렸답니다.
다비아에서 제가 방문하여 소란끼치는 이유는
"인격신 하나님은 없다",
"법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고",
"각자 성령세례를 받음으로 완전한 율법 예수님을 영접하여 스스로 예수그리스도가 되자"입니다.
지금은 좋은 소리 듣기 어려움을 압니다.
양자론에 대해서 한마디.
양자론은 사실상 논리라기 보다는 실험을 통해 증명되는 과학입니다.
왜 그렇게 되는지 이해되지 않지만 실험을 통하면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논리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지요 있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양자역학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그리 어려운 논리도 아닙니다.
서구철학의 고질병인 인과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 입니다.
우리가 종교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인과론으로 이해를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틀이 과연 신에 대한 접근을 가능하게 할 지에 대하여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불확정성이라는 매우 불안한(?) 이해의 방법이 저는 더욱 다가옵니다.
신의 죄인에 대한 처결과 그 이후의 이해하기 어려운 진행은 오히려 불확정성의 논리가 더욱 적합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눈앞에 드러나는 현실을 통하여 알 뿐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모습을 이야기 합니다.
양자역학의 이해를 위하여 - 브라이언 그린의 Fabric Cosmos "우주의 구조"를 추천합니다.
성경에 대한 한마디.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이야기를 당연시합니다.
성경은 왜 당연시 되어야 합니까?
누구의 권위로 그것을 위임받은 것입니까?
성경에 적혀있는 내용들의 혼란함은 신의 계시적 표상물로 자리잡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주고 있으며 그것을 채택한 이들의 권위 또한 누가 부여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정경을 책택할 만큼 권위있고 정당한 카톨릭은 왜 타락할 수 밖에 없었을까? 라는 의문이 그것입니다.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 타락해 종교개혁을 유발한 카톨릭의 정경채택의 권위는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수 많은 다른 내용의 동일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들은 성경이 매우 인간적으로 쓰여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귀하가 대안으로 제시하듯이 '신을 알 수 없는 인간'이 쓴 성서의 내용으로 신을 안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이야기가 아닐까요?
Fabric Cosmos, 저에게 어려운 책입니다.
또한 인간을 표현해야 하는 제 수준에는 아인슈타인의 빛과 시공간이면 충분하며 인간의 원소인 아담, 하와, 카인, 아벨, 생명과, 선악과, 뱀과 뱀의 배설물인 죄를 표현하기에는 지금의 제 능력은 불확정성은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초보적인 수준의 모델링입니다.
저의 관심 도메인은 오직 인간입니다. 왜 태어나서 죄를 짓게 하시나? 행복과 불행은 무엇이고 운명은 무엇인가? 절대자는 있는가? 구원자는 무엇인가? 양심은 무엇이고? 욕심과 육체와 죄의 관계는? 죽으면 죄는 남는가 ? 등등
양자역학을 말씀하셨으니 문득 기억 하나, 핵물리학의 아버지 맨체스터대학의 러터퍼드가 원자핵을 규명할 때에 1900년대 초의 광학 기술로는 원자나 전자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러터퍼드는 원자핵의 크기를 측정하였습니다. 러터퍼드는 보이지 않는 원자 구조를 태양계의 항성과 행성 움직임을 응용하여 원자핵과 전자의 움직임을 모델링 한 후 규명하였습니다. 후일 그의 업적을 기술한 글을 보니 이 때 사용된 기술은 놀랍게도 오직 러터퍼드의 “직관”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후일 정설이 된 닐스보어의 양자역학에 비하면 러터퍼드의 원자 모델링은 걸음마 수준이었습니다만, 지금도 러터퍼드의 접근은 놀랍습니다. 볼 수 없는 것을 측정했습니다!!!
성경을 중심으로 종교를 기술하는 이유를 제가 도배한 글 중 “(1)하나님”의 일 부분을 발췌로 갈음 합니다.
“성경책은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렸으나 재미없어서 잘 읽지 않으면서도 갖고 다니려 하고 타인에게 읽기를 권하는 책이다. 집, 차량, 여행지 등 도처에 않 읽는 많은 성경이 있다. 재미도 없고 읽지도 않을 성경이 수 없이 많이 팔리고 권함을 받는 이유를 유추하면 딱히 성경 구절로 입증 하지는 못하지만 인류는 막연히 성경책을 하나님이 준 책이라고 믿는다. 또한 갖고 있는 것 만으로도 위안을 받는지 힘들 때 주로 찾는다. 많은 시행 횟수가 진리에 수렴하는 섭리와 막연한 기대감으로 성경책에서 하나님을 찾아본다.”
'죄'라는 개념은 어떤 기준을 근거로 판단합니다.
그것은 종교적 율법이거나 아니면 인간이 만들어 놓은 법일 것입니다.
물론 모두가 다 인간이 만들어 놓았다는 점에서는 다른 점이 없습니다.
이러한 잣대는 시공간의 이동 속에서 변화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매우 당연시하는 죄도 때로는 죄가 않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절대적 죄를 규정할 명확한 경계는 모호해집니다.
이러하기에 인간 행위를 '죄'로 보거나 아니면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는 것은 이항적 선택의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일 것입니다.
그대로 파악하는 것, 그러하기에 인간이기에 행하는 행태들을 그냥 그런 무위한 것들로 보는 것이 인간을 온전히 보아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물론 현실의 법에서는 죄에 대한 규정과 그에 따르는 벌이 있을 것입니다만 성서의 흐름에서 나타나는 죄인을 벌하지 않는 신의 모습은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기에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죄론과 이에 따르는 징벌과 종말은 종교가 인간에 대해서 행하는 위협일 것입니다.
악과 선에 대한 이항적 잣대를 들이대지 않고 있는 인간을 그대로 보는 것만이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가능하게 하고 인간에 대한 증오를 소멸시킬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내재적 의미에서 욕망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욕망은 인간을 살아가게 하고 세상을 발전시킵니다.
수 많은 종교와 국가가 인간에게 제시하는 금욕적 실천은 사실상 자신들의 권력으로 인간을 포섭하고 길들이기 위한 과정일 뿐입니다.
물론 욕망에도 권력화하는 것과 탈주하고 자유로워지려는 이항적이지 않는 스팩트럼화된 것들이 존재합니다.
욕망을 욕심이라는 부정적 기표를 통하여 모두 통제하려는 것이 바로 권력화의 과정일 것입니다.
욕망을 긍정하는 것 이것이 지층화되는 것을 벗어나 탈주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이 속에 인간의 해방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의 죄의 기준은 인간이나 인간의 제도가 만들지 않았습니다.
죄의 기준은 누구나에게 존재하는 율법입니다.
폐 없는 사람이 없듯이 두 돌판 "율법 십계명"은 누구나에게 있습니다.
율법이 정한 죄의 기준을 예로 들면, "엄마와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라 하면 과히 틀리지 않습니다.
아니면 "내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없는 것" 도 동일하겠죠.
우리 뇌에는 살면서 행한 "모든 생각 + 모든 말 + 모든 행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들을 어머니와 함께 (또는 아이들과 함께) 빛 앞에 비춰 볼 때에
함께 볼 수 없다면 죄입니다.
죄의 기준은 인간의 제도가 정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섬기는 율법 하나님이 정한 것입니다.
문제는 율법 하나님은 죄를 알게 할 뿐, 죄를 짓지 않도록 못하는 불구의 하나님인 바, 온전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찾습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십계가 어떻게 생겨났는 지에 대한 입장은 앞에서 잠시 드린 바 있습니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법전이나 기자조선의 법조팔금 등과 별로 다를게 없는 고대법적 체계입니다.
여러 면에서는 함므라비법보다 체계적이지 않습니다.
'출애굽기를 모세가 기록했는지에 대해서는 불분명하지만 모세가 기록했다고 하더라도 신의 계시를 통하여 십계명을 만들었다는 주장에는 어떤 근거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후대에 작성한 것이라면 이는 신화적 내용을 통하여 각색됐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할 것입니다.
성경 중에는 후대에 주인공의 이름을 빌어 그 권위를 차용하고자 하는 의도를 지닌 경우들이 종종있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성경을 어떻게 보는 지는 자유입니다만 의문을 가지지 않고 본다면 그것은 신이 당신에게 주어준 것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도 모르게 당신속에 들어와있는 당신이 우상이라고 이야기 했던 2000년간의 종교적 내용을 그대로 주장하거나 답습하는 것일 뿐입니다.
어머니와 함께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장성해서 다른 짝을 가지는 것도 당연한 것이며 어머니와 함께 기록을 보매 못할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가 죄라고 생각하는 것들, 부끄러운 것들은 인간이기에 당연히 저지를 수 밖에 없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을 벌하지 않았듯이 요나를 내치지 않았듯이 베드로를 버리지 않았듯이 이 모든 인간의 행태에도 불구하고 신은 우리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류의 흔들거리는 논쟁 마차에 탑승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도 모르게 그만 내 정신이 혼미해질 위험을 미리 감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보다 우세하거나, 우수하거나, 혹은 우월하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이런 때 좀 조심해서 먼 발치에서 구경이나 하는 게 상책이라는 걸 안다는 그런 말입니다.
각설하고,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얘기는,
수탉氏께서 말씀하신 '2000년간 지속된 우상숭배'라는 그 개념에
저도 어느정도 동의한다는 말씀입니다.(외람되지만, 굳이 평하자면 그 얘기는 대단히
탁월한 개념의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종교들에는 곧바로 우상숭배로 변질되는 그러한 특성이 공통적으로 있는 것 같아요.
석가모니의 고도의 인생 철학을 종교화(:우상화)시킨 불교적인 행태야 뭐 말할 것도 없고,
우리 기독교는 제발 그렇지 않았어야 될텐데, 실상은, 우선 로마교회가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허용한 '성모 마리아 숭배'라는 대표적 우상숭배 행태를 비롯해서, 성인숭배사상,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할 것 없이 교회건물 숭배, 교회의 물질숭배, 인간숭배..... 등등등등 우리 눈에 보이는
거의 모든 게 우상으로 둔갑하고 말지요. 그게 바로 인간적인 한계인 듯 해요.
말로는 '예수 믿는다' 하면서도, 실은 원래부터 자기가 믿고 싶었던 것(사람, 돈, 물질 등등등)을 믿는
그런 거지요.
그래서 기독교인들 대다수는 아마도 자신의 종교가 그런 것들에 관한 자신의 어떤 열망을 충족시켜
줄 것이라고 믿거나, 종교를 그런 도구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구약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만 우상이 되고만 이삭을 난도질해서 죽여 태워 번제로
드려버리라고 명령하셨지요.
그 얘기를 수만 번씩이나 들으면서도, 모든 걸 우상으로 만들고 마는 인간 내면의 '우상숭배' 특성은
사라지지가 않고 있느니, 도대체 언제나 인간이 '주님 원하시는 모습'으로 장성할 수 있을런지...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요?
수탁님의 글을 다는 읽지는 못했으나 일부분 잘 읽었습니다.. 질문 하나 드릴게요
1. 윗글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서 인간의 역사는 수동적 의미이며,
하나님의 역사에 인간은 쓰여지는 도구이다. 로 말씀하시는데요..
인간이 그렇게 하나님의 도구로 쓰여지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나요?
예를들면 루터의 종교개혁이나 에디슨의 빛 발명...등으로 하나님은 그들을 도구로 사용하여
인간을 구원하고 있는 것인가요?
쉬운말로 짧게 좀 부탁 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