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먼저 제가 아직은 눈치보며 자판을 두드려야하는 신세인고로,
그리고 문제되는 글이 다른 게시판에 잇으므로 여기에 옮기는 의미에서,
하나의 완결된 형태로 글을 쓰지 못하고 데미님이 쓰신 글 단락단락마다 답글 형태로 댓글을 다는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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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섭 목사님도 부활에 대해 쓰신 글을 보니 예수님이 몸으로 다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생각은 당연히 그 당시부터 있었던 것 같은데 누가복음 24:37절에서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靈)으로 생각했다는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해 예수님은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고 하시며 손과 발을 만져 보게 하시고 생선 한 토막을 잡수셨습니다. 영(靈)이 아니라 몸으로 부활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께서 몸으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고 이해한다면 결국 성경 말씀대로 하면 아직도 마음에 의심하는 것인데 그렇게 의심할 수밖에 없다면 뭔가 분명한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제가 묻고 싶은 것입니다. 혹 그것이 상대성이론이나 양자론 또는 비유클리트기하학을 모른다고 말하는 이성과 합리주의에 근거한 것인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그 당시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사건을 전해주는 기록을 글자그대로 믿지 못할 때는 그만한 근거가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가 예수라는 청년이 유대 땅에서 십자가에 처형되었다는 기록을 남겼는데 그 기록의 진위를 누구나 의심하지 않습니다. 의심할 때는 어떤 근거가 있어야 하거든요. 성경에서 그 당시 있었던 일에 대해서 기록으로 남겨 주었다면 믿어야 합니다. 그렇데 믿지 못할 때는 그에 상응하는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 근거가 무엇인지요? >>

- 글쎄 역사학이라는 학문도 본래 그렇거니와 역사학이 객관성을 담지할 수 있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카 vs 랑케) 해묵은 논쟁이죠. 또 철학적 측면에서 어떤 현상이 (특히나 과거에) 일어났는가 아닌가하는 것은 인식론적인 문제입니다. 어떠한 역사기록에 예수라는 청년이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고는 하지만 (요제푸스 같은), 그것이 우리가 믿는 그 예수인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더구나 육신이 부활했다고 믿는다는 것은 상식에 위배되는 일입니다. 상식에 위반되는 일에 믿음을 가지는 것은 어려운 노릇이죠. 진화론적으로 볼 때 상식의 개념은 생존을 위한 일종의 자동기제로서 작용해왔습니다. (물론 상식이 합리성을 담보하진 않죠. 이에 대해선 나중에 신경과학과 진화심리학을 통해서 언급할 기회가 잇을 겁니다.) 직접 쓰신 바대로 우리는 그 당시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설사 그 당시 그곳에 있었다하더라도 예수가 어떤 인물인지 사람들마다의 시선이 달랐던 것 처럼 우리 또한 부활이나 처형등에 관한 기록을 각자의 시선으로 기록할 요량이 크기에 '선뜻' 믿기가 어려운 것이죠. 또한 성경이라는 것이 모두가 아시는 바와 같이 그것이 정경으로서의 권위 획득의 과정에서 빠져나간 사료가 있고 추가된 사료도 있었으며 거기에는 반드시 성령으로 인한 요인 만이 아닌 역사/정치/철학적 배경이 있었을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의심의 여지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조금 유식하게 격을 높여 말해서 양자론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중력가속기는 옥토끼 이야기와는 격에서 사뭇 다르지 않습니까?
양자론에서 물체는 어딘가에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근저를 이루는 미시세계에서는 명백하게 오류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즉 그렇게 말하면 '말이 안된다'는 것인데, 그것을 양자론에서는 nonlocality라고 말합니다.
문밖에 서 계시던 예수님이 집안으로 들어오시려면 문이든 벽을 통과하든 중간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양자론에서는 A지점에서 B지점으로 그냥 갑니다. 프랑크상수만큼의 간격을 그냥 갑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를 과학자들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말입니다...
문밖(A지점)에서 집안(B지점)으로 그냥 이동한 것이 그렇게 말이 안되는 일인가요?
미국에 있는 친구 목소리을 옆에서 이야기하듯 듣게 만든 핸드폰도 결국 양자론 덕분인데
우리는 지금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데 아직 뉴튼만 붙잡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더 놀라운 일도 있습니다.
빛이 파동이냐 입자냐를 두고 스컬리와 드륄이 했던 실험에 의하면 시간적으로 뒤의 일이 시간적으로 앞선 일을 결정하기도 합니다. 양자론에서 아주 흥미로운 실험입니다.
곁길로 빠져서, 예수님과 열 명의 문둥병자 이야기를 해 보면...
똑같이 예수님 앞에서 같은 말을 들은 사람 가운데 제사장에게 간 사람은 문둥병이 나았을 것입니다. 가지 않은 사람은 낫지 않았을 테구요. 이 사건을 믿고 안 믿고를 떠나 그 에피소드를 생각해 보면 프로세스가 그럴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해 볼 수가 있습니다.
문둥병이 나은 사람은 도대체 어느 시점에 나은 것일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순간? 아니면 제사장 앞에서? 아니면 제사장 앞을 떠나 서서히 점진적으로? 위에 말한 찬송은 예수님 앞에서 이미 문둥병이 나았고 증거는 아직 확보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나게도 위에 언급한 양자론의 실험이 마치 이것을 설명해 주는 듯합니다.
스컬리와 드륄의 실험에 의하면 나중에 입자로 관측이 시도된 빛은 처음 출발부터 입자의 성질을 나타냅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빛은 파동의 성질을 갖습니다.
즉, 나중에 제사장 집에 간 문둥병자는 예수님 앞에서 이미 나은 사람입니다. 또 결국 제사장 집에 가지 않은 문둥병자는 처음부터 낫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이런 것을 생각하면 박영선 목사님의 닫힌 종말론과 판넨베르크와 정용섭 목사님의 열린 종말론이 악수를 나눌 수도 있겠다는 힌트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

- 말씀하신 양자론의 비국소성이나 시간역전스펙트럼의 경우를 성서 이적설화의 해석에 적용하셨군요. 저의 느낌은 좀 해석이 나이브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적설화같은 우리의 상식에 어긋나는 일들을, 마찬가지로 우리의 상식과 위배되는 듯이 이해되어지는 양자론으로 풀면 어떨까 하는 것이 취지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둘의 공통점은 거기까지라고 생각되어집니다. 분명 양자론은 우리의 상식을 위배하고 이적설화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양자론을 이적설화에 적용시켜 해석하는 것은 분명한 전제가 잇는바, 그것은 다름아닌 대상에 대한 실재론적 인식입니다. 이적설화같은 것이 하나의 비유나 상징으로 다양하게 해석될 수도 있는데 왜 굳이 정말 실제 잇었던 이적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그것이 실제로 잇어야만 한다는 전제하에 해석을 하려다보니 무리하게 양자론이 적용된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반론으로 다음을 들 수 잇겟습니다. 양자론은 실재론적이기 보단 관념론적 이론입니다. 전술하신 것 처럼 비국소성이나 슈뢰딩거의 고양이, 역전스펙트럼 같은 현상들은 양자론이 우리의 3차원 감각으로 도저히 확인될 수 없기에, 그러나 확률수학의 힘을 빌어서 예측가능하기에 실재성을 담보하진 않지만 관념적으로 가능한 차원이란 얘기입니다. 또 하나의 반론 근거를 대자면 만약 데미님이 말씀하신 것 처럼, 이적설화가 양자론으로 해석되어 실재했던 것이라면 왜 神은 양자론적으로 존재하고 행동하는가? 혹은 神이 우리에게 현현하는 초자연적 이적들은 양자론적으로 효과를 나타내는가? 나아가 神의 본성은 양자론적인가? 라는 의문에 부딪치게 됩니다. 다시말해 하느님의 존재방식이 왜 양자론인가에 대해 먼저 말해야 한다는 거죠.
양자론에서처럼 입자의 이동과정이 인지할 수 없는 방식이란 것 때문에, 이적설화에서도 역시 우리가 신체 감관으로서는 인지할 수 없는 기적현상들을 양자론의 입자 운동방식처럼 적당히 은폐시키려는 목적이 다분히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의 하느님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은 아니지만 언제나 아인슈타인의 머리에서 생각되어 그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세상에 진리의 모습을 띄고 현현합니다. 아인슈타인의 고민이자 행복은 항상 그거였죠. 왜 하느님은 그러한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하느님은 수학자인가? 중요한 것은 이런 고민에 물리법칙을 뛰어넘는 이적에 관한 것은 없다는데 있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그 분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존재라는 말이 떠오르네요.
마이컬슨과 몰리가 에테르가 없다고 증명해 내었을 때 충격을 받앗던 사람들은 일단의 물리학자들 뿐 만이 아닙니다. 에테르가 누려왔던 가설적인 지위덕에 성령이 무소부재하게 존재하는 방식으로 에테르를 이용한 가짜 신학자들이 있었거든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
성경을 어떤 의미의 이성주의 또는 합리주의로 대하시는지요... >>

- 이성과 합리성, 진리성에 관한 개념들은 좀 다른 것인데 이곳 게시판에서는 좀 혼란스럽게 섞어서 사용하더군요. 철학적 측면에서 용어사용의 구획을 정리해야할텐데 이것은 추후 시간이 나면 올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