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 <열린 토론실>입니다. 다비안들의 부담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채>와는 달리, 보다 진지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나 주제를 나누고 싶은 분들을 위한 게시판입니다. 가급적 예의를 갖추시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대화는 다비안을 비롯한 여러 네티즌들의 온라인 상에서의 자유로운 것이기에 그 방향과 정체성이 반드시 다비아와 일치하지는 않음을 밝혀둡니다.
글 수 253
요즈음 많은 성도들이 찬송가를 기피하고 Gospel 혹은 CCM들을 즐겨 부르고 환호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려가 앞서는 것은 왠일일까?
말하기는 무엇하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에도 이미 Gospel이 버젓이 등제되어 있는 마당에 이런 글을 쓰는 게 우습기도 하다.
우선 찬송이란 성부, 성자, 성령 즉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송하는 노래로 맨 마지막엔 아멘으로 끝나게 되어있다.
찬양이란 사람의 기분을 전환시키기 위하여 부르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을 찬양키 위하여 부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에 반하여 Gospel 혹은 CCM은 인간의 희노애락을 분출키 위한 방편으로 일반 가요는 부를 수 없으니까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인간 중심의 음악이다.
미국에서 무디 목사의 부흥 운동 이래 전세계적으로 확산이 되었는데 그 때에도 예배용으로는 철저히 금지하였고 다만 성도의 교제와 전도운동에만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 후 그 중에서 예배용으로 적합한 가사로 개사의 과정을 거치고 곡을 다듬어 예배용으로 편입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그런데 요즘은 너무 Gospel 혹은 CCM이 성도들 사이에서 만연함에 따라 그 구분을 확실히 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따라서 천박한 곡조나 가사는 우리가 선별할 필요가 있고 음악에 조예가 깊은 분들의 조언을 받을 필요가 생기게 된 것이다.
너무 사람들의 기분이나 감정에 치우치는 가사와 곡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우려가 있을 뿐더러 인성을 상하게 하는 우도 범하게 된다.
그 중에서 반기독적인 가사도 즐비함을 인식하고 성서에서 말하는 신앙과 거리가 먼 곡들도 많음을 부인치 못하는 현실인 것이다.
따라서 찬양을 하되 신앙과 음악에 대한 안목이 매우 필요하다.
이상은 청년부가 발간한 Gospel과 CCM 모음집 추천말로 써 준 글 중에서 발췌를 했습니다.
말하기는 무엇하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에도 이미 Gospel이 버젓이 등제되어 있는 마당에 이런 글을 쓰는 게 우습기도 하다.
우선 찬송이란 성부, 성자, 성령 즉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송하는 노래로 맨 마지막엔 아멘으로 끝나게 되어있다.
찬양이란 사람의 기분을 전환시키기 위하여 부르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을 찬양키 위하여 부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에 반하여 Gospel 혹은 CCM은 인간의 희노애락을 분출키 위한 방편으로 일반 가요는 부를 수 없으니까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인간 중심의 음악이다.
미국에서 무디 목사의 부흥 운동 이래 전세계적으로 확산이 되었는데 그 때에도 예배용으로는 철저히 금지하였고 다만 성도의 교제와 전도운동에만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 후 그 중에서 예배용으로 적합한 가사로 개사의 과정을 거치고 곡을 다듬어 예배용으로 편입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그런데 요즘은 너무 Gospel 혹은 CCM이 성도들 사이에서 만연함에 따라 그 구분을 확실히 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따라서 천박한 곡조나 가사는 우리가 선별할 필요가 있고 음악에 조예가 깊은 분들의 조언을 받을 필요가 생기게 된 것이다.
너무 사람들의 기분이나 감정에 치우치는 가사와 곡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우려가 있을 뿐더러 인성을 상하게 하는 우도 범하게 된다.
그 중에서 반기독적인 가사도 즐비함을 인식하고 성서에서 말하는 신앙과 거리가 먼 곡들도 많음을 부인치 못하는 현실인 것이다.
따라서 찬양을 하되 신앙과 음악에 대한 안목이 매우 필요하다.
이상은 청년부가 발간한 Gospel과 CCM 모음집 추천말로 써 준 글 중에서 발췌를 했습니다.
2007.06.07 20:29:23
아아...음악 얘기가 나왔군요...ㅋㅋㅋ
글쎄 음악에 대해서라면 지면(?)이 모자랄만큼 얘기할 것이 많지요. 특히나 찬양과 CCM이 얽힌 문제라면 단순히 음악의 화성학적인 문제를 넘어서서 사회문화적인 분석도 필요하고 무엇보다 서양음악사과 종교음악사에 대해서도 언급을 해야하니까요. 또한 기본적으로 예술론이란 가치론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철학적 함의도 논의하면 할수록 깊어집니다.
시경이 옛 주나라 저잣거리에서 나오던 민중들의 노래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레고리안 찬트가 모테트와 마드리갈 (고대 서양음악의 성악형태)에서 시작된 사실을 상기한다면
기원론적인 문제에서 성과 속의 구분은 없어지겠지요.
그레고리안 찬트에서 화성학의 고급과 저질의 기준은 안정된 화음=상위일체=신에 대한 찬양으로 인식되었으니까요. 거슬러올라가면 현의 길의 수학적 비례가 우주의 조화를 내포한다는 피타고라스적 철학의 영향도 있겠죠.
몇몇 불협화음이란 말 그대로 금지된 화성조합이었습니다. 조화스럽지 못함은 곧 미와 반대인 추이고 그 추는 곧 선이 아닌 악이엇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음악에 관한 유교의 입장과 그리스도교 초기의 입장은 놀랄만큼의 유사성이 보입니다. 얘기가 옆으로 샜군요. ^^;
어쨋든 서양음악의 발달이 미사전례음악의 발달과 같이 해온 사실은
미사음악이 종교개혁이후 개신교 측에서 쇠퇴하고 다른 형태로서 발달해온 사실또한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시작해야겠죠.
지금 음악예술론이나 미학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는 게 아닌줄은 압니다만 무엇보다 현상적인 작금의 교회음악의 위기상황에서 역사적 고찰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미사음악과 함께 개신교의 영향을 받아 생활성가 운동을 해온 가톨릭측의 선례도 한 번 벤치마킹해야할 필요도 있구요.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퍼진 CCM의 변천사도 고찰해야 할겁니다. 예를 들어, 군사독재정부 시절에 퍼진 운동가요중심의 CCM과 대중음악과의 접합으로 시도되어 콘서트까지 벌이게된 포스트운동권 CCM, 그것의 상업성과 음악성에 관한 연구들도 함께 논의되어야겠죠.
예상되는 논의 하나 보태자면 (순전히 저의 예견이지만)
논의하다보면 성가라는 것이 애초 목적이 하느님을 찬양하고 우리가 은혜받는 철저한 "목적용" 음악(음악의 미적성취가 본래적 목적이 아닌)이라는 점을 들어 성과 속으로 나누려는 우물가님의 이원론적 견해를 반박하는 측이 있겠구요, 다른 측은 현재 CCM의 상업화된 현실과 그것들이 수요자들의 영성에 미치는 과잉상징화에 대한 우려등을 들 수가 있겠네요.
제가 빠뜨린 사항도 있겠지만 암튼 위와 같이 우리가 논의해야 할 가이드라인을 제시해봅니다.
글쎄 음악에 대해서라면 지면(?)이 모자랄만큼 얘기할 것이 많지요. 특히나 찬양과 CCM이 얽힌 문제라면 단순히 음악의 화성학적인 문제를 넘어서서 사회문화적인 분석도 필요하고 무엇보다 서양음악사과 종교음악사에 대해서도 언급을 해야하니까요. 또한 기본적으로 예술론이란 가치론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철학적 함의도 논의하면 할수록 깊어집니다.
시경이 옛 주나라 저잣거리에서 나오던 민중들의 노래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레고리안 찬트가 모테트와 마드리갈 (고대 서양음악의 성악형태)에서 시작된 사실을 상기한다면
기원론적인 문제에서 성과 속의 구분은 없어지겠지요.
그레고리안 찬트에서 화성학의 고급과 저질의 기준은 안정된 화음=상위일체=신에 대한 찬양으로 인식되었으니까요. 거슬러올라가면 현의 길의 수학적 비례가 우주의 조화를 내포한다는 피타고라스적 철학의 영향도 있겠죠.
몇몇 불협화음이란 말 그대로 금지된 화성조합이었습니다. 조화스럽지 못함은 곧 미와 반대인 추이고 그 추는 곧 선이 아닌 악이엇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음악에 관한 유교의 입장과 그리스도교 초기의 입장은 놀랄만큼의 유사성이 보입니다. 얘기가 옆으로 샜군요. ^^;
어쨋든 서양음악의 발달이 미사전례음악의 발달과 같이 해온 사실은
미사음악이 종교개혁이후 개신교 측에서 쇠퇴하고 다른 형태로서 발달해온 사실또한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시작해야겠죠.
지금 음악예술론이나 미학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는 게 아닌줄은 압니다만 무엇보다 현상적인 작금의 교회음악의 위기상황에서 역사적 고찰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미사음악과 함께 개신교의 영향을 받아 생활성가 운동을 해온 가톨릭측의 선례도 한 번 벤치마킹해야할 필요도 있구요.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퍼진 CCM의 변천사도 고찰해야 할겁니다. 예를 들어, 군사독재정부 시절에 퍼진 운동가요중심의 CCM과 대중음악과의 접합으로 시도되어 콘서트까지 벌이게된 포스트운동권 CCM, 그것의 상업성과 음악성에 관한 연구들도 함께 논의되어야겠죠.
예상되는 논의 하나 보태자면 (순전히 저의 예견이지만)
논의하다보면 성가라는 것이 애초 목적이 하느님을 찬양하고 우리가 은혜받는 철저한 "목적용" 음악(음악의 미적성취가 본래적 목적이 아닌)이라는 점을 들어 성과 속으로 나누려는 우물가님의 이원론적 견해를 반박하는 측이 있겠구요, 다른 측은 현재 CCM의 상업화된 현실과 그것들이 수요자들의 영성에 미치는 과잉상징화에 대한 우려등을 들 수가 있겠네요.
제가 빠뜨린 사항도 있겠지만 암튼 위와 같이 우리가 논의해야 할 가이드라인을 제시해봅니다.
2007.06.08 01:47:43
교회음악이란, 기본적으로 전례(예배)음악입니다.
개신교, 특히 비전례적 자유교회주의가 편만한 미국과 한국에 있어,
교회음악의 혼란이 창궐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교 전례, 즉 예배의 개념과 전통이 부재하고,
그 자리를, 미국적, 그리고 한국적인 실용주의가 차지하고 들어앉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늘상 지겹게 되풀이하는 말입니다만,
개신교 모델 자체가 탈전통적, 탈맥락적, 탈보편적 충동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는데,
미국과 한국의 개신교는 그것을 극단으로 밀고 나갔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사회적으로 대접받는 음악의 격조 우열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과 속이니, 그리스 철학에 있어 수학과 음악과의 상관관계니까지 왜 굳이 들먹이는지 모르겠군요.
(야고보의 예의 그 글쓰기 버릇이라 할까)
음악미학, 음악기호학, 음악사회학을 논하자면 필요할 겝니다만,
교회음악이라는 특수 분야를 다루는 데 있어, 이렇게 대뜸 논의를 확장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걸 야고보군 본인도 알기에, 일부러 곁길로 새 놓고, 다시 원위치했겠지요.
각설하고, 성속, 격조 문제가 아니라,
교회음악이라는 특수성의 문제, 즉,
교회음악의 공시성과 통시성의 맥락, 용도, 요구되는 덕목 등의 차원인데,
미국과 한국의 개신교에 있어, 이것이 희미해져 버린겁니다.
교회가 지배권을 읽고 세속화된 현대에 있어, 대중문화는 이제 교회 안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지요.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는 바, 교회음악에 대한 맥락과 기준을 붙잡고 있으면,
그 대중음악적 요소들을 교회 안으로, 전례(예배)에 맞게 잘 소화할 수 있는 겁니다.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좋은 예가, 1983년판 현행 가톨릭성가입니다.
그 중에서, 현대의 창작 성가들은, 친근한 대중성과 함께, 신앙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어서,
대단히 살갑게 다가오며,
가사 또한 성서와 교리를 잘 요약하고 있는, 신자 교육의 용도로도 훌륭한 것들이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현행 한국의 개신교, 성공회, 천주교 성가집 가운데, 천주교 것이 가장 잘 되었다고 평가함)
음악 장르로 따지자면, 클래식 내지 전통적 교회음악의 풍으로만 작곡한다고 교회적, 그리스도교적이 되는 건 아닙니다.
이건 그야말로 케이스 바이 케이스지요. 예컨대,
모차르트의 대관식 미사의 아뉴스 데이(하느님의 어린 양) 부분은,
자신의 다른 오페라의 아리아, 즉 세속 음악에서 따 왔지만, 대단히 간절하고 경건한 효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과 거의 유사한 양식과 풍격인 장엄미사곡은,
철저히 인간적인 음악이면서, 하느님께 다가가며 봉사하는 깊은 음악이거든요.
바그너의 도취적인 음악이 교회에는 맞지 않겠지요.
그러나, 그의 열렬한 음악적 추종자였던 브루크너의 작품들은, 바그너의 큰 영향 아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영적이고 그리스도교적입니다.
즉, 교회음악의 작가들이 그리스도교 전통과 영성, 교회음악의 맥락을 붙잡고 있어야 하며,
그 특수한 용도인 교회와 전례(예배)에 대하여 잘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가요? 미국과 한국의 자본주의적 개신교의 상황에서,
상업적으로 팔기 위해 양산하는 CCM들은, 이런 것들을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한국의 대다수 개신교회와 목회자들부터가 별 의식이 없고, 신경을 쓰지 않으며, 지식도 없습니다.
그러니, 꿩 잡는 게 매라고, 소위 '부흥'에 도움이 될 만한 곡들을 교회 안에 마구 수용하고,
청년들의 그러한 요구에, 지도와 계도는 고사하고, 오히려 잘 들어주지요.
신학대학원 안에도 교회음악과 예배에 대하여 별반 다루는 내용이 없습니다.
이렇게 시장이 공급을 수용하고, 그 수용이 다시금 공급을 창출하는 악순환이 재생산되고 있다고 봅니다.
전통과 맥락, 예배(전례)에 대한 기준을 분명히 갖고 있는 천주교의 경우는,
대중음악을 잘 순치시켜 교회와 전례, 그리스도교에 맞게 승화시키고 있는데,
개신교는, 여과 장치조차 부재한 것입니다.
개신교, 특히 비전례적 자유교회주의가 편만한 미국과 한국에 있어,
교회음악의 혼란이 창궐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교 전례, 즉 예배의 개념과 전통이 부재하고,
그 자리를, 미국적, 그리고 한국적인 실용주의가 차지하고 들어앉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늘상 지겹게 되풀이하는 말입니다만,
개신교 모델 자체가 탈전통적, 탈맥락적, 탈보편적 충동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는데,
미국과 한국의 개신교는 그것을 극단으로 밀고 나갔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사회적으로 대접받는 음악의 격조 우열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과 속이니, 그리스 철학에 있어 수학과 음악과의 상관관계니까지 왜 굳이 들먹이는지 모르겠군요.
(야고보의 예의 그 글쓰기 버릇이라 할까)
음악미학, 음악기호학, 음악사회학을 논하자면 필요할 겝니다만,
교회음악이라는 특수 분야를 다루는 데 있어, 이렇게 대뜸 논의를 확장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걸 야고보군 본인도 알기에, 일부러 곁길로 새 놓고, 다시 원위치했겠지요.
각설하고, 성속, 격조 문제가 아니라,
교회음악이라는 특수성의 문제, 즉,
교회음악의 공시성과 통시성의 맥락, 용도, 요구되는 덕목 등의 차원인데,
미국과 한국의 개신교에 있어, 이것이 희미해져 버린겁니다.
교회가 지배권을 읽고 세속화된 현대에 있어, 대중문화는 이제 교회 안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지요.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는 바, 교회음악에 대한 맥락과 기준을 붙잡고 있으면,
그 대중음악적 요소들을 교회 안으로, 전례(예배)에 맞게 잘 소화할 수 있는 겁니다.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좋은 예가, 1983년판 현행 가톨릭성가입니다.
그 중에서, 현대의 창작 성가들은, 친근한 대중성과 함께, 신앙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어서,
대단히 살갑게 다가오며,
가사 또한 성서와 교리를 잘 요약하고 있는, 신자 교육의 용도로도 훌륭한 것들이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현행 한국의 개신교, 성공회, 천주교 성가집 가운데, 천주교 것이 가장 잘 되었다고 평가함)
음악 장르로 따지자면, 클래식 내지 전통적 교회음악의 풍으로만 작곡한다고 교회적, 그리스도교적이 되는 건 아닙니다.
이건 그야말로 케이스 바이 케이스지요. 예컨대,
모차르트의 대관식 미사의 아뉴스 데이(하느님의 어린 양) 부분은,
자신의 다른 오페라의 아리아, 즉 세속 음악에서 따 왔지만, 대단히 간절하고 경건한 효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과 거의 유사한 양식과 풍격인 장엄미사곡은,
철저히 인간적인 음악이면서, 하느님께 다가가며 봉사하는 깊은 음악이거든요.
바그너의 도취적인 음악이 교회에는 맞지 않겠지요.
그러나, 그의 열렬한 음악적 추종자였던 브루크너의 작품들은, 바그너의 큰 영향 아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영적이고 그리스도교적입니다.
즉, 교회음악의 작가들이 그리스도교 전통과 영성, 교회음악의 맥락을 붙잡고 있어야 하며,
그 특수한 용도인 교회와 전례(예배)에 대하여 잘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가요? 미국과 한국의 자본주의적 개신교의 상황에서,
상업적으로 팔기 위해 양산하는 CCM들은, 이런 것들을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한국의 대다수 개신교회와 목회자들부터가 별 의식이 없고, 신경을 쓰지 않으며, 지식도 없습니다.
그러니, 꿩 잡는 게 매라고, 소위 '부흥'에 도움이 될 만한 곡들을 교회 안에 마구 수용하고,
청년들의 그러한 요구에, 지도와 계도는 고사하고, 오히려 잘 들어주지요.
신학대학원 안에도 교회음악과 예배에 대하여 별반 다루는 내용이 없습니다.
이렇게 시장이 공급을 수용하고, 그 수용이 다시금 공급을 창출하는 악순환이 재생산되고 있다고 봅니다.
전통과 맥락, 예배(전례)에 대한 기준을 분명히 갖고 있는 천주교의 경우는,
대중음악을 잘 순치시켜 교회와 전례, 그리스도교에 맞게 승화시키고 있는데,
개신교는, 여과 장치조차 부재한 것입니다.
2007.06.08 08:48:55
허허...원래 현상적인 것은 심층적 분석이 필요하게 마련이죠...제가 옆길로 샜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유교와 그리스도교간의 음악을 대하는 가치론적 입장의 공통점을 지칭함이구요.
분명히 제가 예상하는 바는, 즉 오늘날 ccm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나올 수있는 반론의 입장에서, (제가 지지하는 입장은 아닙니다만) 음악이 '천해지고 있다'는 우물가님의 주장에 대한 반대근거를 말함이엇습니다.
대체 천하다라는 기준이 뭔가?
화성학적 기준인가? 그렇다면 기원론적인 근거도 따져봐야 하는거구요.
천하다, 경박하다라는 말 속에 음악과 예술 전반에 대한 가치론적인 함의를 담겨져있기에 그것에 관한 논의도 나올 수 잇지않은가 하는 점입니다.
제가 국내 유명 포털사이트 d모사 에서 음악칼럼을 한창 쓰고 있을 때 (이달의 칼럼으로 뽑히기도 했고, 작은 음악 레이블 잡지사에서 정기투고룰 하는 칼럼니스트로 제의받기도 했습죠) 교회음악과 ccm에 관한 논의를 한 두번 한 것도 아니구요. 꼭 그런 논의를 하다보면 궁극적으로 따져들어가는 영역의 질문들입니다. 제 경험상에서는 절대 관계 없는 논의는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제가 커버한 사회학적 논의가 함께 들어가야겠죠.
"각설하고, 성속, 격조 문제가 아니라,
교회음악이라는 특수성의 문제, 즉,
교회음악의 공시성과 통시성의 맥락, 용도, 요구되는 덕목 등의 차원"을 말씀하셨는데
말씀하신 것 중에 통시성이라함은 역사를 말하는 것으로 그리스철학과 음악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구요, 요구되는 덕목이라는 차원을 말씀하셨는데 다름아닌 교회음악 이기 때문에 성과 속을 나누는 기준에 대해 논의를 해야하는 것입니다.
서양음악사 초기음악을 살펴보면 교회음악과 교회음악 아닌 것의 기준은 성음악과 속음악으로 구분되어 변증법적으로 서로 발전되어왔음을 (이건 너무 기초적인 음악사적 상식입니다. 그래서 제가 모테트를 얘기한 것이구요) 인지하신다면 그냥 쉽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토마스형님은 독일고전음악을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기실 예로 드신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미사곡들은 전통양식에서 벗어나므로 (형식적인 면에서가 아닌 화성적 구조측면에서) 일반적인 전례에 쓰이는 음악이 아니엇습니다. 특별히 자신이 속한 교구의 주교나, 영주 그리고 의뢰받은 교회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만든 그들만의 미사전레곡 버전입니다. 그런면에서 그들의 음악은 속음악으로 분류됩니다(비록 미사전례 형식적 구조를 따르지만). 더구나 그 때까지 교회음악의 주도권은 기악음악이 아니라 성악음악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논의가 나온다면 ccm측에서 반대쪽 입장을 아리스토크라틱하다라는 비판을 삼기에 충분한 근거가 된다고 저는 보는 것이죠.
저번에 신학이 실용적 목적이 있는 학문이라고 하셨듯이 교회음악도 실용적 목적이므로 만약 하느님과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실용적 목적만 성취하는 것에 대해 포커스를 맞춘다면 굳이 ccm의 상업적 현실을 지적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결국 개인취향이라는 거죠. 음악을, 음악 그자체의 목적인 미적 논의에서 벗어나, 특정한 목적으로 바라보았을 때의 논의는 사회학적 논쟁외에는 남지 않게됩니다. 그것은 토마스 형님이 윗글에서 적어주신, 다시 우리가 다비아에서 지겹게 논쟁했던 것들이구요. 그런 것들도 결코 무관하진 않습니다만, 저는 최소한 음악에 관한 논의를 하려면 제가 말한 부분이 논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제가 예상하는 바는, 즉 오늘날 ccm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나올 수있는 반론의 입장에서, (제가 지지하는 입장은 아닙니다만) 음악이 '천해지고 있다'는 우물가님의 주장에 대한 반대근거를 말함이엇습니다.
대체 천하다라는 기준이 뭔가?
화성학적 기준인가? 그렇다면 기원론적인 근거도 따져봐야 하는거구요.
천하다, 경박하다라는 말 속에 음악과 예술 전반에 대한 가치론적인 함의를 담겨져있기에 그것에 관한 논의도 나올 수 잇지않은가 하는 점입니다.
제가 국내 유명 포털사이트 d모사 에서 음악칼럼을 한창 쓰고 있을 때 (이달의 칼럼으로 뽑히기도 했고, 작은 음악 레이블 잡지사에서 정기투고룰 하는 칼럼니스트로 제의받기도 했습죠) 교회음악과 ccm에 관한 논의를 한 두번 한 것도 아니구요. 꼭 그런 논의를 하다보면 궁극적으로 따져들어가는 영역의 질문들입니다. 제 경험상에서는 절대 관계 없는 논의는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제가 커버한 사회학적 논의가 함께 들어가야겠죠.
"각설하고, 성속, 격조 문제가 아니라,
교회음악이라는 특수성의 문제, 즉,
교회음악의 공시성과 통시성의 맥락, 용도, 요구되는 덕목 등의 차원"을 말씀하셨는데
말씀하신 것 중에 통시성이라함은 역사를 말하는 것으로 그리스철학과 음악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구요, 요구되는 덕목이라는 차원을 말씀하셨는데 다름아닌 교회음악 이기 때문에 성과 속을 나누는 기준에 대해 논의를 해야하는 것입니다.
서양음악사 초기음악을 살펴보면 교회음악과 교회음악 아닌 것의 기준은 성음악과 속음악으로 구분되어 변증법적으로 서로 발전되어왔음을 (이건 너무 기초적인 음악사적 상식입니다. 그래서 제가 모테트를 얘기한 것이구요) 인지하신다면 그냥 쉽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토마스형님은 독일고전음악을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기실 예로 드신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미사곡들은 전통양식에서 벗어나므로 (형식적인 면에서가 아닌 화성적 구조측면에서) 일반적인 전례에 쓰이는 음악이 아니엇습니다. 특별히 자신이 속한 교구의 주교나, 영주 그리고 의뢰받은 교회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만든 그들만의 미사전레곡 버전입니다. 그런면에서 그들의 음악은 속음악으로 분류됩니다(비록 미사전례 형식적 구조를 따르지만). 더구나 그 때까지 교회음악의 주도권은 기악음악이 아니라 성악음악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논의가 나온다면 ccm측에서 반대쪽 입장을 아리스토크라틱하다라는 비판을 삼기에 충분한 근거가 된다고 저는 보는 것이죠.
저번에 신학이 실용적 목적이 있는 학문이라고 하셨듯이 교회음악도 실용적 목적이므로 만약 하느님과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실용적 목적만 성취하는 것에 대해 포커스를 맞춘다면 굳이 ccm의 상업적 현실을 지적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결국 개인취향이라는 거죠. 음악을, 음악 그자체의 목적인 미적 논의에서 벗어나, 특정한 목적으로 바라보았을 때의 논의는 사회학적 논쟁외에는 남지 않게됩니다. 그것은 토마스 형님이 윗글에서 적어주신, 다시 우리가 다비아에서 지겹게 논쟁했던 것들이구요. 그런 것들도 결코 무관하진 않습니다만, 저는 최소한 음악에 관한 논의를 하려면 제가 말한 부분이 논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07.06.08 22:03:59
내가 말했듯이, 베토벤, 모차르트 등, 고전파 이래의 교회 음악들 중 상당수는 과거의 교회 음악과는 다른,
속음악이라 볼 수 있을 겝니다.
사실, 까놓고 말해서, 베토벤의 장엄미사곡은, 미사곡이라기보다는 성악 교향곡이지요.
모차르트의 미사곡들은 오페라 아리아와 합창 모음이고.
그러나, 성속을 떠나서, 교회의 용도, 즉 전례와, 그리스도교적 분위기의 맥락에 부합하게끔 하는,
그 실용적 목적에, 작곡가는 충실해야 될 필요가 있지요.
순수 예술 창작물이 아닌, 실용 음악이니까.
때문에, 굳이, 논의를 확장하지 말고,
(누군들 확장의 필요성을 모르겠습니까. 저도 인문학과 예술을 공부하는 자인데)
편의상 실용적 수준에서 진행해 나가자는 겁니다.
(의도적 생략을 희망하는 것임)
고전파 이래의 작곡가들이 교회 음악을 단지 속음악 양식에 따라 작곡한 게 아니라는 것 또한 야고보군은 잘 알 테지요?
베토벤이 장엄미사곡을 작곡하기 위해 그레고리안을 위시한 숱한 교회 음악의 전통과 양식들을 공부했다는 건
굳이 거론하지 않아도 될 사례겠군요.
참 애매한 얘기가 될 테지만, 그리스도교적, 영적, 경건함, 이런 덕목들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예컨대, 같은 브루크너 교향곡이라도, 프루트뱅글러가 지휘하면 인간적인 투쟁가가 되기 십상이고,
첼리비다케가 지휘하면 명상적, 정념적이 되는,
이런 차원의 문제를 주관적이지 않게 얘기하려니 힘들구만요.
요컨대, 대중음악적 양식이라도, 그리스도교적, 교회적, 경건함 등을 얼마든지 갖출 수 있고,
그 좋은 모범을 한국에서는 천주교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작곡가, 작사가들의 의식도 깨었고, 교회 음악과 전례에 대한 공부도 하고 있으며,
반대로, 교회 역시, 이러한 방향으로 장려, 여과해서 발전시키고 있다는 말이지요.
제가 강조하는 것은, 음악 자체 이전에, 그 음악을 꼴짓고 방향을 설정하는 기준되는 가치관입니다.
한국의 개신교에는 그것이 부재하고,
더욱이 자본주의적, 실용주의적 분위기 가운데, 더욱 혼란으로 치닫고 있다는 겁니다.
속음악이라 볼 수 있을 겝니다.
사실, 까놓고 말해서, 베토벤의 장엄미사곡은, 미사곡이라기보다는 성악 교향곡이지요.
모차르트의 미사곡들은 오페라 아리아와 합창 모음이고.
그러나, 성속을 떠나서, 교회의 용도, 즉 전례와, 그리스도교적 분위기의 맥락에 부합하게끔 하는,
그 실용적 목적에, 작곡가는 충실해야 될 필요가 있지요.
순수 예술 창작물이 아닌, 실용 음악이니까.
때문에, 굳이, 논의를 확장하지 말고,
(누군들 확장의 필요성을 모르겠습니까. 저도 인문학과 예술을 공부하는 자인데)
편의상 실용적 수준에서 진행해 나가자는 겁니다.
(의도적 생략을 희망하는 것임)
고전파 이래의 작곡가들이 교회 음악을 단지 속음악 양식에 따라 작곡한 게 아니라는 것 또한 야고보군은 잘 알 테지요?
베토벤이 장엄미사곡을 작곡하기 위해 그레고리안을 위시한 숱한 교회 음악의 전통과 양식들을 공부했다는 건
굳이 거론하지 않아도 될 사례겠군요.
참 애매한 얘기가 될 테지만, 그리스도교적, 영적, 경건함, 이런 덕목들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예컨대, 같은 브루크너 교향곡이라도, 프루트뱅글러가 지휘하면 인간적인 투쟁가가 되기 십상이고,
첼리비다케가 지휘하면 명상적, 정념적이 되는,
이런 차원의 문제를 주관적이지 않게 얘기하려니 힘들구만요.
요컨대, 대중음악적 양식이라도, 그리스도교적, 교회적, 경건함 등을 얼마든지 갖출 수 있고,
그 좋은 모범을 한국에서는 천주교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작곡가, 작사가들의 의식도 깨었고, 교회 음악과 전례에 대한 공부도 하고 있으며,
반대로, 교회 역시, 이러한 방향으로 장려, 여과해서 발전시키고 있다는 말이지요.
제가 강조하는 것은, 음악 자체 이전에, 그 음악을 꼴짓고 방향을 설정하는 기준되는 가치관입니다.
한국의 개신교에는 그것이 부재하고,
더욱이 자본주의적, 실용주의적 분위기 가운데, 더욱 혼란으로 치닫고 있다는 겁니다.
2007.06.18 23:37:24
이것 역시 카테고리의 문제인듯 싶습니다. 예배의 정의를 어떻게 내릴것인가? 예배음악, 찬양, 찬송등을 예배에 어떻게 적재적소에 놓을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요. 성속의 문제도 있구요. 기독교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음악과 예배에 적용될 수 있는 음악을 분리해서 생각하면 될 듯 싶습니다. CCM에 대한 정의도 다루어야 하구요. 찬송가에 대한 정의, 역사적고찰, 사회적 고찰등 여러맥락에서 전반적으로 다 짚어야 종합예술이 탄생되지 싶은데요. 일단 카테고리를 한정해서 논의함이 옳다고 봅니다. 성과 속의 문제를 다룰 것인가? 아니면 예배학에서 예배에서의 음악의 사용을 다룰 것인가? 아니면 기독교인들이 음악적 장르를 어떻게 수용해야 할 것인가? 음악적 장르는 음악의 형식이나 악기의 사용인가? 아니면 가사의 내용인가? 기독교인이 음악을 만들면 기독교음악인가? 아니면 기독교적 복음이나 찬양의 내용이 담겨야 기독교음악인가? 세속음악을 기독교음악으로 사용할 수 있는가? 이런 등등의 문제가 종합적으로 짚어져야 할 듯 싶네요. 그런데 여기서 문제를 제기하신 분의 문제제기는 성과 속의 문제를 제기하셨기 때문에, 과연 현대음악은 저급하고 천박하며 고전음악은 고급스럽고 경건한 음악인가? 이런 문제를 제기하신 것 같거든요... 그래서 성과 속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나머지 문제를 다룸이 바람직 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예배에 있어서는 예전을 중시하며 또한 예배를 구성하고 있는 하나 하나의 의미를 잘 살려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예배에 사용하는 음악과 찬양도 성경적으로 잘 검증해서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지만 죄인된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구원받음을 감사해서 하나님의 백성됨이, 자녀됨이 감사해서 드리는 찬양이기에, 인간의 음악으로 인간의 언어로 드리는 음악이며 찬양이니, 궂이 천상의 멜로디를 흉내내거나 추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최대한 그런 마음들이 잘 표현될 수 있는 각자의 문화와 음악정서에 맞는 음악을 도구로 사용해야 문제가 되지 않겠지요.
제 개인적인 결론은, 장르는 문제가 되지 않으나 예배에 참석하는 대상이 누가 주류냐에 따라 예배를 드리는 대상이 가장 드리기 좋은 음악을 취사 선택하여 그 내용을 검증하여 드리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고전음악이나 국악을 강요할 필요가 없고 나이든 어르신들에게 락이나 힙합을 강요할 필요도 없으며 강요해서도 안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기독교음악이라는 큰 카테고리안에서 기독교음악이 예배 음악만 있는 것은 아니니, 예배음악과 일상음악과의 어느 정도 구분을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클래식 듣지 말란법 없고 가요나 국악 부르지 말란 법 없잖습니까? 어렸을땐 다같이 동요불렀고 가요불렀고 국악도 배우고...가곡도 배우고.. 다 수용할 수 있듯이 이원론적으로 기독교인들은 복음적인 직접적인 내용이 들어간 노래만 부르고 들어야 한다면 가요나 팝송 전통음악등은 쓰레기 저급하고 천박한 것으로 취급되겠지요... 아무튼.... 많은 좋은 의견 부탁합니다.
저도 예배에 있어서는 예전을 중시하며 또한 예배를 구성하고 있는 하나 하나의 의미를 잘 살려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예배에 사용하는 음악과 찬양도 성경적으로 잘 검증해서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지만 죄인된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구원받음을 감사해서 하나님의 백성됨이, 자녀됨이 감사해서 드리는 찬양이기에, 인간의 음악으로 인간의 언어로 드리는 음악이며 찬양이니, 궂이 천상의 멜로디를 흉내내거나 추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최대한 그런 마음들이 잘 표현될 수 있는 각자의 문화와 음악정서에 맞는 음악을 도구로 사용해야 문제가 되지 않겠지요.
제 개인적인 결론은, 장르는 문제가 되지 않으나 예배에 참석하는 대상이 누가 주류냐에 따라 예배를 드리는 대상이 가장 드리기 좋은 음악을 취사 선택하여 그 내용을 검증하여 드리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고전음악이나 국악을 강요할 필요가 없고 나이든 어르신들에게 락이나 힙합을 강요할 필요도 없으며 강요해서도 안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기독교음악이라는 큰 카테고리안에서 기독교음악이 예배 음악만 있는 것은 아니니, 예배음악과 일상음악과의 어느 정도 구분을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클래식 듣지 말란법 없고 가요나 국악 부르지 말란 법 없잖습니까? 어렸을땐 다같이 동요불렀고 가요불렀고 국악도 배우고...가곡도 배우고.. 다 수용할 수 있듯이 이원론적으로 기독교인들은 복음적인 직접적인 내용이 들어간 노래만 부르고 들어야 한다면 가요나 팝송 전통음악등은 쓰레기 저급하고 천박한 것으로 취급되겠지요... 아무튼.... 많은 좋은 의견 부탁합니다.
2007.07.04 09:26:08
잘 아시겠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이 미국에서 "복음성가"로 불리워지던 곡들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찬양 뿐 아니라 이른바 "가스펠", 혹은 교제송이라 볼 수 있는 곡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반면 현대의 음악과 멜로디, 리듬과 악기를 이용해 새로이 작곡되고 불리워지는 곡들 가운데도, 그 가사나 멜로디가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찬양이며 예배 음악으로 사용되기에 손색이 없는 곡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찬송가 370장 같은 경우 가사가 이렇습니다.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찬 이슬 맺힐 때에 즉시 일어나
해 돋는 아침부터 힘써서 일하라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
얼핏 보면 새마을 운동 주제가 같지 않습니까?
반면 CCM이라 일컬어지는 곡 중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란 곡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이름 높여드립니다
주의 나라 찬양 속에 임하시니
능력의 주께 찬송하네
전능하신 하나님 찬양
언제나 동일하신 주
전능하신 하나님 찬양
영원히 다스리네"
과연 둘 중에 어느 곡이 더 예배에 적합한 곡일까요?
아직도 "공예배 시간에는 찬송가만 불러야 한다"라는 억지 아닌 억지를 부리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예배에 적합한 곡인지 아닌지의 구별은 필요하지만, 찬송가는 성스러운 곡이고 CCM은 천박한 곡이다라는 선입견은 오히려 이러한 구분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드는 방해 요소일 뿐이라 생각합니다.
반면 현대의 음악과 멜로디, 리듬과 악기를 이용해 새로이 작곡되고 불리워지는 곡들 가운데도, 그 가사나 멜로디가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찬양이며 예배 음악으로 사용되기에 손색이 없는 곡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찬송가 370장 같은 경우 가사가 이렇습니다.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찬 이슬 맺힐 때에 즉시 일어나
해 돋는 아침부터 힘써서 일하라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
얼핏 보면 새마을 운동 주제가 같지 않습니까?
반면 CCM이라 일컬어지는 곡 중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란 곡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이름 높여드립니다
주의 나라 찬양 속에 임하시니
능력의 주께 찬송하네
전능하신 하나님 찬양
언제나 동일하신 주
전능하신 하나님 찬양
영원히 다스리네"
과연 둘 중에 어느 곡이 더 예배에 적합한 곡일까요?
아직도 "공예배 시간에는 찬송가만 불러야 한다"라는 억지 아닌 억지를 부리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예배에 적합한 곡인지 아닌지의 구별은 필요하지만, 찬송가는 성스러운 곡이고 CCM은 천박한 곡이다라는 선입견은 오히려 이러한 구분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드는 방해 요소일 뿐이라 생각합니다.
2007.07.07 12:56:18
그렇기 때문에, 박정훈님 말씀처럼,
교통정리가 필요하다는 거지요^^
그런데, 제가 위에서 거론했다시피,
한국 개신교 안에는 그러한 교통정리의 준거, 기준이 부재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굳이 딴지를 걸자면^^; ,
예로 드신 이 가사: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이름 높여 드립니다
주의 나라 찬양 속에 임하시니
능력의 주께 찬송하네
전능하신 하나님 찬양
언제나 동일하신 주
전능하신 하나님 찬양
영원히 다스리네"
- 이것도, 문제는 많다고 봅니다.
달콤한 감성적 선율의 그릇 안에서, 하느님을 가부장적, 권력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것 말고는, 어떠한 신학적, 성서적 풍부함도 없습니다.
함량 미달이며, 좀 심하게 말해, 하느님 상의 편중된 왜곡이라고 봅니다.
교통정리가 필요하다는 거지요^^
그런데, 제가 위에서 거론했다시피,
한국 개신교 안에는 그러한 교통정리의 준거, 기준이 부재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굳이 딴지를 걸자면^^; ,
예로 드신 이 가사: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이름 높여 드립니다
주의 나라 찬양 속에 임하시니
능력의 주께 찬송하네
전능하신 하나님 찬양
언제나 동일하신 주
전능하신 하나님 찬양
영원히 다스리네"
- 이것도, 문제는 많다고 봅니다.
달콤한 감성적 선율의 그릇 안에서, 하느님을 가부장적, 권력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것 말고는, 어떠한 신학적, 성서적 풍부함도 없습니다.
함량 미달이며, 좀 심하게 말해, 하느님 상의 편중된 왜곡이라고 봅니다.
2007.07.11 01:11:53
어떤 곡이든지, 부르는 사람이 마음을 담아 찬양드리면 좋은 찬양이 되겠지요.
그러나, 교회의 예배에 사용되는 찬송을 분별하는 것은 그것과는 또 다른 차원입니다.
예시된 가사를 다시 볼까요?
"주의 나라"
- '하느님의 나라'란, 신구약 성서를 관통하는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 찬양은, 그 주님, 하느님을 어떻게 수식하고 규정하고 있나요?
"능력", "전능하신(X2)"
- 단지 이 뿐이잖습니까?
예배 찬송이란, 성서와 그리스도교 교리 등을 깊이 담아야 할 필요도 있고,
이에 비추어, 신자들에 대한 교육적, 목회적인 기능도 갖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능력과 전능으로 규정되기만 합니까?
물론, 한 찬송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라는 주제에 관하여 다 다룰 수는 없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승리주의와 기복주의가 만연한 기존의 한국 교회 안에서,
이런 찬송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요?
구약성서의 핵심 개념인 하느님의 다스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나라로 선포되었는데,
그 예수 그리스도가 능력과 전능의 주님으로 오셨던가요?
아니거든요.
그러나, 교회의 예배에 사용되는 찬송을 분별하는 것은 그것과는 또 다른 차원입니다.
예시된 가사를 다시 볼까요?
"주의 나라"
- '하느님의 나라'란, 신구약 성서를 관통하는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 찬양은, 그 주님, 하느님을 어떻게 수식하고 규정하고 있나요?
"능력", "전능하신(X2)"
- 단지 이 뿐이잖습니까?
예배 찬송이란, 성서와 그리스도교 교리 등을 깊이 담아야 할 필요도 있고,
이에 비추어, 신자들에 대한 교육적, 목회적인 기능도 갖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능력과 전능으로 규정되기만 합니까?
물론, 한 찬송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라는 주제에 관하여 다 다룰 수는 없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승리주의와 기복주의가 만연한 기존의 한국 교회 안에서,
이런 찬송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요?
구약성서의 핵심 개념인 하느님의 다스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나라로 선포되었는데,
그 예수 그리스도가 능력과 전능의 주님으로 오셨던가요?
아니거든요.
2007.07.11 18:20:56
무명재님이 말씀하시는 의도는 잘 알겠습니다만, 겨우 8구절로 이루어진 곡에 성경의 핵심 진리를 균형 있게 담는다는 것은 무리일 것입니다. 찬송가처럼 4,5절까지 있어서 그나마 다양한 내용을 담을 수 있다면 모를까.
예배에서 저 한곡만 부르고 끝낼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한 곡에서 부족한 부분은 다른 곡을 통해서 얼마든지 전체 예배에 균형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찬양곡의 두 가지 포인트에서 풍성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라는 부분입니다.
전능하신 조물주이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고백은, 너무나도 익숙한 우리에게는 식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실상 너무나 위대한 고백입니다. 저는 이 한가지 만으로도 예배에 이 곡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기회가 되면 그럴 것입니다. (청년부 시절 '찬양인도자'로 섬겼었습니다.)
둘째는 "주의 나라 찬양 속에 임하시니"라는 부분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굉장히 오묘하고 깊은 개념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를 "찬양"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제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예배, 그리고 찬양이라는 주제는 파면 팔수록 귀한 보물이 쏟아져 나오는 소중한 보고입니다. 이곳에 그 내용을 모두 언급하는 것은 무리이겠습니다만, 아무튼 '하나님의 나라가 찬양 속에 임한다'라는 표현은 제게 있어 매우 신선하고 많은 시사점을 주는 표현입니다.
비록 짧은 가사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교육적, 목회적인 기능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할지라도, "화두"를 던진다는 측면에 있어서 이 곡은 저로서는 나무랄 데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실상 이 곡에서 주로 반복되는 가사는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히 다스리네"와 같은 구절들이지만 제가 찬양을 인도할 때는 그러한 부분에 강조점을 두어 이 곡을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전능"을 강조했다면 어디까지나 그러한 전능한 하나님이 내 "아버지" 되심의 의미를 보다 풍성하게 되새기기 위한 것일 따름입니다.
물론 인도자의 의도와 다르게 예배자들은 각자의 고백대로 하나님을 찬양하였을 수도 있습니다만, 그들 중에 "전능하신 하나님"에만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을 찬양한 이들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배 찬송은 교육적, 목회적인 기능이 주가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강조하는 것이 역기능을 낳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은 하나님을 임재를 맛본 이들로서는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부터 터져나오는 고백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배에서 저 한곡만 부르고 끝낼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한 곡에서 부족한 부분은 다른 곡을 통해서 얼마든지 전체 예배에 균형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찬양곡의 두 가지 포인트에서 풍성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라는 부분입니다.
전능하신 조물주이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고백은, 너무나도 익숙한 우리에게는 식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실상 너무나 위대한 고백입니다. 저는 이 한가지 만으로도 예배에 이 곡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기회가 되면 그럴 것입니다. (청년부 시절 '찬양인도자'로 섬겼었습니다.)
둘째는 "주의 나라 찬양 속에 임하시니"라는 부분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굉장히 오묘하고 깊은 개념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를 "찬양"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제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예배, 그리고 찬양이라는 주제는 파면 팔수록 귀한 보물이 쏟아져 나오는 소중한 보고입니다. 이곳에 그 내용을 모두 언급하는 것은 무리이겠습니다만, 아무튼 '하나님의 나라가 찬양 속에 임한다'라는 표현은 제게 있어 매우 신선하고 많은 시사점을 주는 표현입니다.
비록 짧은 가사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교육적, 목회적인 기능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할지라도, "화두"를 던진다는 측면에 있어서 이 곡은 저로서는 나무랄 데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실상 이 곡에서 주로 반복되는 가사는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히 다스리네"와 같은 구절들이지만 제가 찬양을 인도할 때는 그러한 부분에 강조점을 두어 이 곡을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전능"을 강조했다면 어디까지나 그러한 전능한 하나님이 내 "아버지" 되심의 의미를 보다 풍성하게 되새기기 위한 것일 따름입니다.
물론 인도자의 의도와 다르게 예배자들은 각자의 고백대로 하나님을 찬양하였을 수도 있습니다만, 그들 중에 "전능하신 하나님"에만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을 찬양한 이들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배 찬송은 교육적, 목회적인 기능이 주가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강조하는 것이 역기능을 낳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은 하나님을 임재를 맛본 이들로서는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부터 터져나오는 고백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다행히도(?) 수년 전부터 전세계적으로 찬송가를 리메이크하는 흐름이 일어나고는 있습니다.(이 역시 외국에서부터 시작했지요) 고전적인 음률에 현대적인 변화를 줘서 찬송가 속에 담겨져 있는 믿음의 선조들의 복음의 메시지를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좀 더 친숙하게 접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솔직히 저도 여기에 촛점을 맞춰서 예배 때 주로 사용하고는 있습니다.(모든 세대가 공감하며 찬양하는데 도움)
이는 어쩌면 위 글에서 지적하신 부분에 대한 해결책 중에 하나로써 생기는 움직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야 교회에서 기타와 드럼을 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 여겨졌던 시대에서 왠만한 군소교회에서도 체계있는(기타, 건반, 베이스, 드럼, 싱어등) 찬양팀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음이 두드러지는 현상입니다. 제가 아쉬워하는 부분은 실제로 여러 교회 집회에 참석하면서 드리게 되는 찬양속에서(요새는 동영상으로도 많이 접할 수 있지요) 단지 멜로디만을 중요시하느라 어떤 흐름있는 메시지를 함께 나누는 모습을 찾기는 어려웠다는 부분입니다.
찬양을 곡조있는 기도로써, 회중이 함께 드리는 기도로써 찬양을 드린다면(어떻게 기도할지 주제가 있어야 겠지요) 찬양을 만든 이가 어떤 말씀과 만남으로써 이런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게 되었는지를 묵상하기까지는 아니더라도 동시대적인 기독교 음악(CCM)으로도 얼마든지 지금 이 시대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예배 할수 있지 않을지 생각해 봅니다.
누구 아시는 고수분께서 이를테면 천박한 곡조의 곡들은 어떻게 분별하는지를 좀 일깨워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