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제가 약 15년 만에 다시 숙독한바 있는 워치만 니의 저서 <말씀의 사역> 의 주요 내용들을 간단히 서머리하여
여기에 단순 소개합니다. 이를 소개하는 이유는, 1900년대 초.중반에 쓰여진 이 책이 매우 뛰어난 영적 감각으로
쓰여진 게 분명하다는 점과, 지금 이 시대에도 이 책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너무도 크고 유효하다는 점입니다.
약 400쪽에 달하는 이 책은, 영역본을 통하여 국내에서는 70년대 초에 번역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모쪼록 이러한 짧은 소개의 글을 통하여서라도 방황하는, 그리고 시대적으로 방황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신앙
중심이 자리매김을 단단히 할 수 있게 될 어떤 전기와 도전의 계기, 또는 그러한 작은 재료로 작용하게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입니다.
한가지, 이 책의 원 저자는 중국인으로, 제가 읽은 한역본(역자 : 권혁봉)에는 저자를 '웥취만 니'라고 소개하고 있으며,
영역 저자명은 Watchman Nee 라고 되어 있음을 첨언합니다.('워치만 니'로 표현함이 가장 무난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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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의 교리적인 부분을 최고라도 되는 것으로 생각해서 그것을
간추려 뽑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는 약속을 주셨으며, 모세를 통해서는 율법을 주셨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은혜를 주셨다.
오늘의 사역은 다만 하나님의 과거 계시를 확장하는 그 일이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은 마틴 루터 종교개혁 시기 이후 회복의 사역을 시작하셨다. 사도들이 한 말을 다시
이야기하는 것과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진리를 선포한다는 것을 회복으로 보지는 않는다.
오늘날의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들어 설교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도무지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바로 그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가지고 설교를 하건만,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려 들지 않고 스스로 조직화 해놓은 교리를 전시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오늘날 필요한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찬양하도록 만드는 일이 아니며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빛에
거꾸러지도록 하는 일이다.
흔히 잘못된 사역의 모습으로는, 교리와 진리와 교훈을 가지고 섬기는 태도이다. 사역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를 섬기는
그것이 곧 사역이다.
우리가 주님을 보고서 참으로 주님이심을 알기 위해 우리의 눈을 뜨자면 거기에는 반드시 주님의 계시가 있어야만 한다.
단순 운집 세계에서는 유효한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접촉 세계에서만 유효한 일들이 일어난다. 예수께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운집해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셨지만, 누군가가 접촉해올 때는 강하게 인식하셨다.
세상적인 비유와 외부적인 말들을 하나님의 말씀인줄로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계시가 없다면 성경과 주님은 두 개의 분리된 실체로 나뉘어 있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성경으로 교회를 섬길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리스도를 교회에 소개할 수는 없게 된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의 환상을 볼 때는 그리스도를 제외한 모든 것들은 뒤로 물러나 사라지게 된다. 그것이 성결이든,
의든, 혹은 생명이든, 모두 다 사라지고 그리스도만 특이하게 나타난다. 혹 어떠한 영적인 것들이더라도 그리스도에
비길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리스도를 참으로 이해하게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계시의 능력뿐이다.
그리스도에 관한 참다운 지식이 없이는 말해지는 것은 단지 몇 마디 성경적 지식일 뿐이게 되며, 청중들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전하지 못하고 성경적 교훈이나 교리나 설명만 전하는 결과 계시를 보게 하는데 실패해 교회는
황폐해지게 된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파해야 한다.
“거룩”은, 옳은 행위들의 집합이 거룩이 아니며, 그리스도 자신이 곧 거룩이다.
당면한 오늘의 문제는 교리는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나 계시는 상실됐다는 점이다.
말씀 사역이 단지 교리를 이해하고 전하는 정도라면 기독교는 육적 종교에 불과할 것이다.
계시 없이 그냥 성경에 관해서 말한다면 그건 단순한 주석일 뿐이다.
말씀 사역자의 말씀과 감정이 다 옳더라도, 영이 작용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만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어떤
교리뿐이게 된다.
현재의 교회의 임무는 (사람들에게 기름을 부을 수 있도록) 교회가 성령님의 그릇이 되는 그 일이다.
말라기 3장 10절의 십일조의 원리는 구약의 원리인데, 이때는 축복이 하늘에 있었기 때문이며, 오늘날은 축복이
땅으로 내려왔으며 대신 성령님이 교회를 하늘로 들어 올리신다.
사역이란 사람들에게 영적인 부를 나눠주는 일이다. 사역자는 자기가 본 그리스도, 자기에게 있는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줘야 한다.
하나님은 말씀을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처럼 만드실 의향이 없으시다. 말씀은 단순하고 분명하며 이해하기
쉬워야 한다.
오답으로 체크되어 나올 그런 가능성을 실은 처음부터 이미 사전에 감지했습니다. 저 역시도 이 답안(즉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뒤를 다시 한번 읽어봤던 것이니까요.
그렇더라도 저는 어디까지나 저자의 사고의 긍정적인 측면을 바라보고자 생각했으며, 또 다른 측면에서는
인간의 생각이나 감정을 문자로써 100퍼센트 온전하게 표현하는 것 자체가 사실을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이런 사정은 뭔가 자기 생각을 글로써 써보려고 많이 노력한 사람일수록 그 한계성을 느낄 것입니다. 다만,
"이심전심"이라는 말처럼 저는 워치만 니의 이 귀절이, 설교가 말쟁이들 말처럼 화려한 말의 성찬으로 되어
서는 안되고 영감있는 설교를 하라(좀더 학술적인 표현으로 성령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도록 이라고 해도 되
겠습니다)는 뜻을 좀 강하게 표현해서 글로 쓰다보니 그렇게 심히 자의적인 표현으로 보이기도(즉 비판적인
시각으로 볼 때는 문제가 있는 어귀인 것으로) 하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그러니 이 떡을 받아 먹으라 라고 말씀 전파하시다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이상한 눈초리로 보이고 오해를 받아 그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일종의 제자)이
떨어져 나갔다는 얘기가 복음서에 숨김없이(속된말로 그런 건 그저 적당히 숨겨도 될 것이지만, 역시 성경은
다른 책이라는 것이 이런 면에서도 잘 나타나지요)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저는 아직까지는 워치만 니가 긍정적인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물론 재차 말하지만, 아무리 어떠한 사람이더라도 그 사람의 말이 100퍼센트 내개 수긍이 갈 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어떤 사람들이 우리 허락도 받지 않고서 예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라고 걱정의 말씀을
드렸을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냥 두어라. 내 이름을 훼방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돕는 사람
이다라는 (대강)그런 식으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신앙적인 문제(사안)들에 관한 옳고 그름의 최종적인 판단 준거는 다른 어떤 것도 아닌, 과연 예수를 훼방하고
있느냐 아니면 예수를 돕고 높이고 있느냐 그것일 겁니다. 그 외에 다른 것이 있다면 그 자체가 문제이지요.
물론 저 역시 극단론을 펼칠 생각은 없으며, 단지 주객전도가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뜻의 표현입니다.
오래 전에 <스펄전의 설교노트>라는 책을 읽고는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릅니다.
그 책을 읽을 때 아무리 마음에 와 닿는 좋은 말을 찾아보려 해도 별반 그런 게 보이지를 않았으니까요.
그 책을 지금 다시 꺼내 읽으면 어떨지 몰라도 별로 그러고 싶은 기억이 들지를 않습니다.
그에 비하면 <말씀의 사역>은 너무나 구구절절 알찬 내용의 좋은 책이라고 생각됩니다.(재차 말하지만,
이상한 것 -좀 마땅치 않은 것 - 하나 꼬투리 잡아서 시비걸지는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때로는 내
생부모님이라도 이상하게 생각되던 어린 시절도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대부분의 훌륭한 큰 악곡들도 듣다보면 약간 텅빈 곳이 있듯이, 책도 마찬가지.
그런데 이렇게 석류알 박히듯 내용물이 꽉찬 책도 찾아보기가 쉽지는 않지요.
크고, 보다 폭넓고, 현실감 있고, 긍정하고, 그리고 포용하는(다만, 타종교 말고 개신교 내에서의 개념
입니다) 그러한 어떤 "실천적 능력이 함양된" 신앙 관점을 갖자라고 이 면을 빌어 감히 모든 분들께
제언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