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1년 수개월이라는 기간 제가 이곳과 인연을 맺는 동안 간혹 제 메일로
좋은 교회(?) 추천을 당부하는 분들이 계시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상투적이지 않은, 그리하여 '좀 더 좋은' 그러한 설교에 목말라
할지도 모르겠다는 게 지금의 제 느낌입니다.
원론적으로는 "敎會"에 어떤 좋고 나쁨이 없는 게 맞겠으나,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현실이 그렇지 못하여 기왕에 좋은 교회와 (각자의 견해에) 그렇지 못한 교회가 따로
있는 그게 현실이라면, 좋은 설교가야말로 '좋은 교회'의 첫째 조건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 진 예수만이 근래에 알게 된 (국내) 세 가지 유형의 명설교가를 아래와 같이 추천합니다.
물론 이분들 말고도 좋은 설교가가 (가끔) 있지만, 금번 추천하는 이분들의 설교는
(좋은 의미에서) 매우 특색있는, 각자의 이유있는 주관이 공고히 확립된 그러한 설교임에
틀림이 없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 가지 사전에 분명히 드릴 말씀은, 금번 추천하는 이 세 설교가들의 설교가 매우
확립된 주관과 색깔이 분명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그분들이 계시는 교회 자체를
어떤 식으로든지 평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님을 서전 말씀드립니다(저는 그분들의 교회를
가 본적이 아직은 없습니다).
끝으로, 우리가(필요하다고 느끼시는 분들) 인터넷으로나마 이분들의 설교를 같이 듣고, 더욱
배우고 같이 생각하고자(어떤 비판 목적이 아니라, 각자의 신앙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뜻인
것입니다.
가장 유명한 설교가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바 있는 19세기 영국의 찰스 스펄전 목사가 그의
15세때이던 눈 내린 겨울 어느 주일 아침 설교를 들을 교회를 찾아 도심의 낯선 골목들을 헤매
다가 문득 처음 들어간 어느 조그만 교회에서 어떤 설교자의 알 수 없는 설교를 듣고 크게
회심을 하게 됐었다는 그 일화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 가나다 순 - <설교특색>
1. 김동국 목사 (수원온누리비전교회) 감성적인 분석 설교 (주로 신약 소재)
2. 박영선 목사 (잠실 소재 남포교회) 인문적/신학적 분석 설교 (주로 신약 소재)
3. 송태근 목사 (노량진 소재 강남교회) 성서학적 분석 설교 (구약 소재가 많음)
끝으로 필자인 저는 신학을 한 사람이 아니므로, 위에 대강 기록한 각 설교가별
'설교특색'이 다소 미흡하거나 실제와 다소 상이하더라도 넓은 해량과 이해
있으시기 바랍니다.
위 필자 진 예수만 ( E 주소 : sankjin031@hanmail.net)
<종말의 시작과 끝의 시기에 관한 송태근 목사 견해 요약>
많은 기독교인들이 대체로 "종말"의 의미보다는 그 시기에 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언제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가 의문인데, '언제'가 될 것인가 라는 시기에 관한 의문이 가장 강하다.
동.서양 많은 이단들은 그 일어날 시기를 올무로 활용한다. 그러나 종말이 완성되어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그 시기에 관해서는 예수님 말씀하신바 아버지만 아시는 일이므로, 이를 알 수도 없는
것이며 또한 알려고 할 필요도 없다.
- 종말의 시작 : 십자가사건 발생시점으부터 종말은 이미 시작됐으며, 지금도 그 완성을 향해서
종말은 진행되고 있다.
- 종말의 끝 : 예수 재림시 종말은 완성된다.
* 종말은 생명세계에 벌로서 내려지는 것이라기보다,
종말의 도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강남교회 <담임목사 주일설교> 2008.3.2일자 '요한계시록 제1강')
설교들은 넘쳐나지만, 책임있는 성서해석은 찾아보기가 너무 힘듭니다. 설교자들은 고민
없이 자신이 말할 수 있는 부분에 관해서만 적당히 (아전 인수식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해
말해버리는 것이 거의 습성화 돼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말이 절대적인 것이나 되는
것처럼 큰소리를 쳐댑니다.
지금 이 시대 기독교 대중들은 이와 같은 교회내 풍조들에 지쳐있습니다. 차라리 아직도 지
치지 않은 신앙계 사람들이 이상해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간 필자인 제게 참으로 궁금하던 것 중의 하나가 요한계시록에 관한 해석. 저는 요한계시
록을 성서의 大마감장에 해당되는 기록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 누가,
어떤 설교가가 감히 요한계시록을 손댈 수 있는지. 자신이 없으니 그에 관한 말씀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교회 방침대로 믿음 생활에 충실할 것만을 주문합니다.
성서 해석에 정통해야만 할, 그래서 온전히 성서해독을 전해줘야할 설교자들이 그저 종교철학
혹은 종교사상에 관한 서적들만 탐독한 결과로 강단의 설교가 일종이 종교철학 강연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설교자들이 깊이 없는 잡서적을 통해서 주워 들은 그저 허접한 세상 관심거리에
나 익숙해져서 그걸 재료로 해서 소위 '처세론/성공 전략''을 설교 주제로 삼고 있어 설교가 세상
유명 강사들의 '입담' 그것처럼 돼버린 게 아닌지, 대다수 목회자들이 앞의 이러한 두 부류에 속
하는 세태가 아닌지, 이러한 의구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 지금 오늘의 현실입니다.
참으로 아쉽기만 한 교계 풍토입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서 지금 성서는 '마침표 없는' 단지
하나의 미완의 대하소설로 돼버렸습니다.
우리의 믿음처럼 성서가 하나님 말씀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이 겨우 그 정도일 리는 없습니다.
'666'이 바코드를 뜻하는 것이라는 '근거 없는 풍설'뿐, 그런데 필자가 계시록을 아무리 읽어봐도
그게 아닌 것 같았습니다. 필자의 의문은 우선 하나님 말씀인 성서가 그렇게 단편적인 의미를
가진 기록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라는 사고에 서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놀랍게도 요한계시록 13장(절대 권세를 거머쥔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 '짐승'이라는 단어,
그리고 그 짐승의 표 '666'과 관련된 말세적 세상 풍조에 관한 언급)에 관한 송태근 목사의 강해
내용이 그간 필자가 혼자서 사유해 왔던 내용과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역사
혹은 고고학자가 아닌 필자가 '666'이라는 상징 숫자에 관해서 사도 요한이 활동하던 그 당시와
관련된 고고학적 해석방식은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저는 그 부분의 계시록이 시사하고자 하는
바로써, 만약 누구든지 받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우선 경제활동 불가) '짐슴의 표'와 그 수 '666'이
의미하는 내용을 유추해서 사유해 왔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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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저가 모든 자들에게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그 수는 (곧)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육이라."
- 계시록 13장 -
우리 앞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여실히 살아 있는 요한계시록 말씀,
(인류사상 최대 영적인 인물 사도 요한이 그저 노망이 들어서 보게 된 어떤 환각이거나 혹은 그로 인한
혼자만의 알 수 없는 실언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성서 전체가 괴이한 거짓 기록들의
집합문서일 것입니다)
세상 절대 권세(능력)를 거머쥔 것으로 표현된 계시록 기록의 '짐승'
그리고 그 짐승의 표 '666''은 무엇을 상징한 것인가?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 송태근 목사의 '요한계시록 강해' 중 추천편 -
강해 들어가기 : http://www.knpc.or.kr/broadcasting/skin_ms1.asp?fn=mms://mv04.cip.co.kr/knpc/lordday/Sn1/audio/20091011.wma&subject=undefined
(강남교회 <담임목사 주일설교> 2009.10.11일자 '요한계시록 제43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