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즈가 토론을 제안합니다. 따라서 제가 발제자를 겸하므로 토론 진행을 제 마음대로 하겠습니다 (불만이 있으신 분은 이 꼭지에 아예 다시는 안 들어 오시면 됩니다, ㅋㅋ).
자, 어떤 토론이냐 하면,
키스 W. 휘틀럼이 지은 “고대 이스라엘의 발명”를 읽고서 각자의 의견을 교환하는 것입니다.
원만한 진행을 위해서 몇 가지 조건을 답니다.
첫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책을 읽은 사람들만 토론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읽지 않은 사람은 어떡하냐구요?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읽도록 하세요.
둘째, 토론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지만 (또는 못하지만), 토론 내용에 궁금증이 생기는 분들이 분명히 계실겁니다. ‘질문’하세요. 이런 분들을 질문자라고 부르겠습니다. 질문자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궁금증을 ‘간단히(아주 중요함)’ 한 두줄로 물어볼 수 있습니다 (두 줄이 넘어가면 가차없이 질문 전체를 잘라 버립니다). 토론자나 제가 성심껏 답변합니다.
셋째, 책은 읽지 않았으나 토론 내용에 뭔가 자신의 생각을 더하고 싶으신 분들도 계실겁니다. 참으세요!. 부디 책 읽고 난 후 참여하세요.
넷째, 토론 기간은 한정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다비아에 남아 있는 한 (오! 브리즈여 영원하라!) 답변 드리고 또 대화 나누겠습니다. 즉, 지금 책을 읽기 시작해도 전혀 늦지 않습니다.
다섯째, “와, 재미있다.”, “참 유익하군요” 같은 감동의 댓글이나 아니면 그저 막연히 "기대됩니다.", "재미있겠는데요?" 같은 반응이 저절로 나온다면 굳이 말리지 않겠습니다. 아니 이 경우엔 누구든지 댓글다는 거 환영합니다.
여섯째, “뭐 이따위 제한을 하는 토론이 있어?” 하시는 분들은 흥분하시지 마시고 그냥 잊어버리세요. 건강에 해롭습니다.
마지막, 저는 기본적으로 위 저자의 입장에서 토론을 진행할 것이나, 필요하다면 그 반대의 입장에서도 의견 개진을 할 것입니다. “왜, 너는 왔다 갔다 하느냐?”고 꾸중하지 말아 주세요. 원래 토론 발제자가 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거든요.
그럼 많은 관심을 바라며 -----.
Rosemary R. Ruether 교수님은 기본적으로 여성-해방주의신학자로 잘 알려지신 분이시죠. 어쩌다가 반유대주의적 신약학을 연구하게 되셨는지는 구체적인 이유는 아직 모르겠지만, 조만간 알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아마도 그 "유대인식 홀로코스트 신학"(The Wrath of Jonah, Ch. 7)이라는 개념이 기독교 신학에도 나타나고 있음을 가장 먼저 비판하기 시작한 여성-해방주의신학자들 중에서 대표급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남편 분이신 Herman Ruether 교수님은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적극 지지하시는 정치사회과학자이시고 팔레스타인-인권운동가이기도 하십니다.
저도 구해서, 나름대로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몸풀기로서 몇가지 생각이 드네요.
1. 브리즈님께서 이 책을 선정하게 된 이유가 있으신지요?
"구약학"관련책이라고 하기에는 저자로부터 욕을 먹을 것 같고, 또 역사책이라고 하기에도 서론에 저자가 쓴대로, "표준적인 역사학의 방식과는 철저히 다른 접근방식으로" 나갈것이라는 말에 움찔하게 됩니다. 혹시 선정하게 된 개인적이유나 학문적인 이유나 관심을 한번 말씀해 주시면 좋겠네요.
2. "고대이스라엘역사"(헤이스,밀러)와 마틴노트 이스라엘역사와 전승사관련책자와 폰라트 구약신학 책들을 함께 보고 있습니다. 휘틀럼도 이분들이 어떤 분들인지 이분들의 책들이 어떤 내용인지 알고 계시겠지요. 노트나 폰라트가 만약 휘틀럼이 자신의 책 제목으로 쓴 발명(invention)이라는 단어를 본다면 조금 당황해하지는 않을까 생각도 들구요.
서서히 느긋하게 진지하게 저도 이 토론을 통해서, 많이 배웠으면 좋겠네요. 예전에 열심히 공부하지 못한 제 자신이 조금은 후회되지만, 그래도 이런 기회가 주어진다는게 다행이네요.
건강하십시오.
까마귀님의 질문에 당황해 하는 저 자신을 발견합니다. 휘틀럼의 ‘고대 이스라엘의 발명’을 토론 주제로 삼아보자고 제안한 것엔 어느정도 충동적인 면도 있었거든요.
그렇더라도 충동의 배경이 되는 몇 가지 이유를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먼저, 앞서 열린 토론방에서 이 책이 거론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필 이 책이 제 눈길을 끈 까닭은 아마 그만큼 논쟁거리가 많기 때문일거예요. 항상 그렇듯이 토론의 와중에서 어떤 인물의 사상이나 관점, 어떤 책자의 내용등은 간단히 스쳐지나가곤 하지요. 그런데 저는 휘틀럼의 저작이 그렇게 간단히 취급되기엔 무게가 너무 크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제가 그 책을 접한게 한 3년 전쯤으로 기억합니다. 해결의 기미가 안 보이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분쟁을 바라보는 관점에도 다양성을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역사 쓰기’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고민하게 해 주었지요. 이 점은 과거 역사의 해석을 놓고 경쟁하는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과의 관계를 생각하는데도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구약의 역사성에 의심을 던지는 책을 놓고 토론을 진행하는데 대한 부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저들은 왜, 또 무슨 근거에서 역사적 텍스트로서의 성경의 정확성을 부인하는 것일까를 들어보고, 그에 대한 반론이나 비평을 고민해보는 것이 서로 빤한 패 보여주면서 제법 시간 끌다가 적당히 마무리 짓는 토론보다는 더 의미있을 걸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책의 저자 입장에서 토론을 진행하겠다고 말한 이유는 저자의 관점에 전적으로 동의해서가 아니라 다비아의 특성상, 저자의 관점이 소수의견이 될 것 같은 지레짐작에 토론의 균형을 위한 것입니다 (저는 어떤 책이나 논문이든 일단 삐뚤어진 시각으로 대하는게 습관화된 사람이랍니다).
몇 가지 (중요한) 이유가 더 있으나 토론의 긴장감을 떨어뜨릴 위험이 커서 지금 당장 밝힐 수 없음을 저 역시 무척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까마귀님과 다비안 여러분들의 이해와 아량을 구합니다.
끝으로, 제가 토론을 제안했고 또한 진행도 제 마음대로
해볼려고 잔머리 굴리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이 여러 다비안들과 함께 더 폭넓게 배우고 더 깊게 생각해 보고자
하는 마음에서이지, 누구보다 더 많이 알고 있거나 이해했기 때문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이 기회를 통해 만천하에
선포하는 바입니다. 푸하하하-----.
즉시 써두었어야 했어.
발밑이 꺼져버린 듯, 뭔가에 배신당한 듯,
어둡고 황량한 곳에 내동댕이쳐진 듯한, 황폐한 기분.
이젠 꽤나 극복을 했고, 스스로 상당히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다윗-솔로몬 시대마저(?) 일종의 허구라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왜 그리도 불편한지.
이런 비슷한 절망감을 전에도 몇 번 경험했는데, 그 때 마다 나는
딱히 무엇을 납득한 것도 아니면서, 여전히 교회를 댕기고 있는 거야.
오늘도 그랬어. 마치 거기가 내 자리라는 듯, 안도감마저 느끼며,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어.
<고대 이스라엘의 발명>을 힘들여 한 번 읽고 난 후,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들이, 내게 거의 생소한 것이었다는 생각을 했어.
고고학, 역사, 정치, 이런 것들이 그 자체로서 내게 무슨 흥밋거리는 아니야.
어쨌든 이 책을 읽는 동안, 묘한 감정 상태로, 지난 주 내내 홍역을 앓았는데,
사실상, ‘나는 문자적인 성경 이해를 벗어났다’는 생각이, 착각이었던 거지!
‘굽힐 수 없는 엄연한 사실’로 존재하는 고고학적 결과물을 앞에 두고,
성서가 말하는 서사들을 대하는 나의 방식은, 이제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어.
딱히 무엇이 그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마 나는 여전히 교회에 머물러 있을 게야.
<고대 이스라엘의 발명>을 다시 읽기 시작하니, 차분하게 내용이 눈에 들어오는데,
그냥 덮었어. 한동안 이 책을 안 읽을 생각이야.
지난주에 겪은 갈등을 음미해야 하거든! ㅋㅋ^^
p.s. 꼭지글로 올리기 보다는, 여기 댓글로 있는 것이 어울릴 것 같네요. ^^
휘틀러의 위 책을 읽고 홍역을 앓다니
그 이유가 뭘까 생각했소이다.
본인이 쓴 것처럼
다윗-솔로몬 역사도 가공일 수 있다는,
그것도 역시 가설일진데,
그 사실에 작은 충격을 받았다는 것 아니겠소.,
늘오늘 님 정도의 깊은 생각을 하는 사람도 이러니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하겠소이까.
결론만 말씀드린다면,
그냥 재미 삼아 읽으면 된답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그 책을 깎아내릴려는 게 아니라
전혀 다른 관점이기 때문이에요.
마치 다윈의 진화론을 전해듣고
호들갑으로 대응할 필요가 없듯이요.
생물학적 연구를 신학적으로 왈가왈부하지 않아도 되는 거지요.
<고대이스라엘의 발명>은 분명한 집필의도를 갖고 있는 책이제요.
망각된 팔레스타인 역사의 복원이지요.
(책을 다 읽으면 조금 자세히 말할 수도 있는데, 아직은.....)
그가 틀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거에요.
한 가지 더,
신학이 이런 문제 제기로 흔들리지 않으니,
늘오늘이 여전히 교회 예배에 참서하고 있듯이,
그냥 편안하게 생각하세요.
신학자들이 휘틀러의 생각을 모르거나
그것을 무시하거나 휘들릴 만큼
단순하거나 순진한 사람들이 아니랍니다.
18세기부터 몇 세기에 걸쳐
성서는 잔인할 정도로 비평당했지요.
역사 비평이요.
휘틀러가 말한 내용이 내가 보기에는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신학자들도 구약성서가 기술하고 있는 내용을
사실 역사로 믿지 않아요.
그렇다고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도 생각하지 않지요.
거기에 어느 정도의 역사적 사실성이 개입했는지를 두고
많은 논의가 지속되고 있어요.
성서신학은 정말 엄밀하답니다.
휘틀러는 신학자들이 성서를 해석할 때
정치적 관점을 놓쳤다고 하던데(휘틀러 책, 44쪽)
그건 오해에요.
이런 말을 더 끌고 가려면 휘틀러의 책을 더 읽어야 하는데요.
어제 서울에서 내려오면서 기차 칸에서 읽은 것만으로는 부족하군요.
한 마디만 더.
휘틀러는 폰 라트의 선언인
"구약성서는 하나의 역사책이다."를 인용했어요.
폰 라트가 구약성서를 실증적 역사책으로 보는 것처럼
휘틀러가 설명했더군요.
폰 라트는 그걸 말하는 게 아니거둔요.
구약성서에 역사가 있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역사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이지요.
그 역사는 Geschichte이지
History는 아니거든요.
팔레스틴에 살고 있는 한 민족,
또는 여러 민족,
스스로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생각했던 민족을 통해서 전승된,
휘틀러의 표현대로 '네러티브'거든요.
위 까마귀의 방식으로 이 책을 읽는 게 좋겠네요.
폰 라드와 마틴 노트의 책을 겸해서 읽는 거 말이지요.
먼저 신학책을 읽은 게 좋아요.
그게 힘들면
휘틀러의 책을 '재미'로 읽을 것.
신학과는 다른 사회과학책으로 전제하고 읽을 것.
좋은 한주!
(물론 아래 [펌] 발제문에 내용이 들어있습니다만)
이 책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내용을 알려 주시면 어떨까요?
흥미롭게 읽으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무심코 읽어 보셨다가는 정신 건강을 해치실 분들도 - 뭐 이따위 책이 다있냐 - 분명 계실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