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필드, 스펄전 이러한 대 신앙선대들에 관한 서적을 탐독했는데, 그로서 알게 된 공통
된 사실 하나는 그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어떤 사람(예 '어떤 목사')에게 영향을 받았다
는 그런 얘기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대신에 그사람들 모두는 오직 성경말씀 가운데서
어떤 "답"을 찾아냈던 것이라는 그런 얘기였고, 아울러서 "성경적 지식만이 우리에게
유일 무이한 '길'"이라는 그런 말이었다.
필자는 근자에 성서신학을 공부한 어떤 분이 제시한 간단한 몇 가지 담론으로부터 실로
중차대한 사실을 알게 된바 있는데, 성서신학이 이렇게 (신앙 정립에) 가치가 있는 줄은
50년을 교회 다닌 내가 이제껏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그런 일이다.
대부분의 설교자들(교회 지도자들)은 우리가 주일학교 시절에 한 번쯤 들었던 얘기
들에다 자신 스스로가 즐겨하거나 혹은 남에게 가르치거나 말해 줄 필요가 있다고 느끼
는 서신서 내용들을 추가하는 정도로 소위 신앙교육을 시키고 있는 게 한국교회의 현실
이다.
그러니 신앙의 성숙과 진보는 사라지고 대신에 신앙적 자가당착, 신앙적 도그마, 모순
적인 신앙의 양상만 나타나게 된다. 비근한 예로, 성서 기록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알지 못하는 구약 텍스트의 순 문자적 이해(오해)는 결국 곡해와 왜곡된 종교 인식을
낳게 만들고 만다. 그렇게 함으로 인해서 살아 있는 메시지적인 거대 내러티브로서의
성서의 본래적인 기능은 사라지고 대신에 성경 말씀은 순전히 종교 행위적 도구로 변
질되고 만다.
이러한 문제와 더불어 또 한 가지 큰 문제 중 하나는 한국 신학계가, 그게 아주 오래된
어거스틴이든 혹은 근래의 어떤 유명 서양 신학자든지 간에, 계속해서 서양의 신학들을
답습하고, 그걸 익히고, 되뇌이는데만 아까운 소명의 세월과 정력을 소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래는 본문의 위 제목과 관련된 교계 인터넷 매체 <뉴스앤조이>의 기사 내용이다.
"이제 한국교회와 신학은 서구의 모방, 번역, 답습이 아니라 스스로의 창조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
그것을 가지고 같은 기독교 수용 역사의 경험을 지닌 변경의 신학과 대화하여야 한다. 그리하여서
새로운 신학적 감동보다는 그동안 축적된 방법론만을 파는 '서구 신학'에 대해 새로운
자극과 도전을 주어야 할 사명 앞에 당도해 있다."
전체 기사 보기 :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790
개신교회의 문제는 성서해석의 부재로 이 상태에까지 온 것으로 봅니다.
문제를 인식한 우리에게 대안은 있는걸까요?
요한은 "예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어서, 그것을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그 기록한 책들을 다 담아 두기에 부족하리라고 생각한다." (요21:25)
"지금은 우리가 거울 속에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고전13:12)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11:30)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 말은 예수님의 이야기는 세상에 다 두기에도 부족할만큼 그렇게 다양하다는 말입니다.
또 그러한 다양한 말은 아주아주 쉬워서 깐당만 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철학을 몰라도, 자신도 무슨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신학자들의 이야기를 몰라도,
세상을 사랑하사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일들을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중세의 신학자들이 한 말들은 예수님을 희미~하게 이야기 하고 있는 말들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는 그 희미한 말들을 확신 있게 , 확실하게 얼굴과 얼굴을 보듯이
예수님을 보면서, 들으면서, 만지면서 그렇게 확실하게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이 그때입니다 . 왜냐하면 이제는 사람들이 희미한 이야기에 신물나 있고,
그것이 예수님의 이야기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뭔가 확실한 것을 찾고자 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 그것이, 지금이 그때라는 것입니다.
방법이야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우선 이런 방법을 생각해 봅니다
성서의 한 구절을 정하여 성서의 토톤장을 만들어 자신이 깨달은 바를 말하게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지금까지 배운 신학자들의 사상으로 판단하거나 자신의 깨달음으로 상대의 말을
반박하지 말고 성서를 해석한 그 말이 내 맘에 와 닿는지 어떤지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정말정말 또 정말로 정직하고, 솔직하게, 진실로 진실로 또 진실로 말입니다.
각자의 성서해석들이 어떻게 그렇게 해석이 되었는지를 기탄없이 말하게 하고, 토론자들이
그 가운데서 가장 보편스런 것을 기울어짐 없이 선택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패러다임에 끊임없이 도전하여 더욱 더 보편스런 견해가 나올 때는 과감하게
또 새로운 패러다임을 세워 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감한 개혁이 일어나야 한다고 봅니다.
기존의 것을 버려야 하는 뼈를 깍는 아픔이 있겠지만, 언젠가는 누군가에 의해서 단행되여야 합니다.
가능하면 개혁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원봉사'이면 좋겠습니다.(너무 강압적인가요..ㅋ)
교회를 세워 성도들에게 헌금을 받거나 십일조를 내게 하지말고
건설현장에서 흙을 나르더라도 땀흘려 일하여 번돈으로 살면서 이 일을 하면 좋겠습니다.
.
제 신앙계 현실에 관한 문제제기의 뜻을 충분히 이해하신듯하여 반갑습니다.
"(신앙의 대선배들이 신학적인 자신의 견해로써 오래전에 이미 밝힌바 있는)그것이
예수님의 이야기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라는 말씀, 참으로
옳고도 타당한 견해이십니다. 예로, 대신학자들끼리 만나면 서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둘은 반드시 등을 돌리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사 책에서 읽은지가 오래돼서 기억이 확칠치는 않지만,
아마 루터와 쯔빙글리가 그랬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또한 칼빈과 요한 웨슬리가 사실상 그랬었던 것이지요)
왜 그렇겠습니까? 왜 우리가 아는 훌륭한 신학자들이 서로 합일하지 못하고 신학적으로 갈등할 수밖에 없을까요?
그들은 모두 사람일 뿐, 예수님도 하나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신학'은 항상 부족하고 편협하게 돼있습니다. 그들의 신학 역시 '사람의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신학은 절대로 사람에게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온전한 신학'을 총체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성서"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말한 신학은 모두 단편적이거나 오류가 있는 것들일 뿐이니까요.
문제는 그러한 사실을 망각하고, 말씀하신 것처럼 기존의 신학들을 마치 온전한 것들인양
신봉하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니 신앙 정신은 시대가 갈수록 점점더 왜곡되고
고목나무처럼 점차 시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은 이 시대의 토양과 기후에 맞는 신앙의 숲을 다시 가꾸도록
성서에 함양된 씨앗을 찾아내서 숲가꾸기를 다시 시도해야 할 때입니다.
.
우리 아니 나의 연약한 신앙을 가끔 아주 호되게 꼬집으시는 진예수만님 글에 댓글 달아봅니다...
신학을 전공하지 않아 오히려 자유롭게 말해 봅니다.
혹 그른 점이 있더라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리라 믿으면서...
신학이란 신에 대한 인간의 이성적 혹은 학문적 접근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루터가 성서로 돌아가자고 외쳤지만
실은 로마 카톨릭도 성서 중심이 아니었던 것은 아니었죠.
로마 카톨릭도 늘 그 중심에는 성서가 자리 잡고 있었다고 생각되는군요.
다만 로마 카톨릭의 문제는 성서를 해석함에
카톨릭 교회가 성서 해석을 독점 했다는 데 있는 거죠.
루터가 개혁하고자 한 것은 카톨릭 교회의 성서 해석 독점이
시민혁명 등의 시대적 상황을 전혀 읽어 내지 못하고
진정한 하나님을 제대로 전할 수 없다고 판단 한 거라 보여 지는군요.
아직도 카톨릭에서는 로마 교황청이 성서 해석을 독점한다고도 보여 지는데요
그럼에도 굴하지 않는 진보적인 신학자들이 많이 있죠. 파문 당하고들 있긴 하지만요.
칼 라너, 한스 킹, 소브리노 등 개신교보다도 더 진보적인 신학자들도 많이 있네요.
온전한 신학은 성서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죠.
현재로선 성서 외에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죠.
우리가 알고 있는 혹 알고자 하는 하나님은 성서에 근거한 하나님이라 볼 수밖에 없거든요.
모든 신학은 이미 성서를 향하고 있다고 생각되는군요.
성서를 중심으로 하지 않는 신학이 사실상 있는가요.
말씀하신 성서는 어떤 성서를 말하시는 가요.
극한의 진보적인 신학조차도 사실은 성서를 제대로 해석하고자한 결과죠.
그 가운데 시대적 상황이 반영되기도 하고
루터식의 하나님을 제대로 전하기 위한 고민들의 결과물이라 보죠.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 혹 세속화 신학이나 과정신학들이 포스트모던 신학조차도
성서의 일면적이라고 누가 주장할 순 있겠지만 그 근원은 성서에서 벗어난 건 아니죠.
성서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셨는데
사실상 성서로의 바른 길을 찾기 위해 신학들이 필요한 거죠.
신학 없이 성서를 제대로 알 수 있다면야 말씀하신대로 신학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다양한 신학들이 다양한 성서 해석의 장을 열고 또한 인간의 삶을 감쌀 때
인간은 진정 신에 대한 다가감을 가질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바르트의 계시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전달’ 되지만
같은 신정통주의 신학일지라도 틸리히까지 오면 오히려 ‘인간에게서 하나님으로 요청’ 되죠.
‘어느 신학이 옳다 그르다’를 떠나서
하나님을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신학은 다양한 시도를 행한다고 봅니다.
말씀하신대로 어떤 신학도 온전히 신을 나타낼 수는 없죠.
어떻게 보면 신 자체도 온전함을 가지지 않는다는 게 과정신학의 출발점인데
과정 신학이라 해서 성서에서 벗어났다곤 할 수 없죠.
우리 모두는 성서로 돌아가기 위해 신학의 힘을 빌리고 있는 거라 생각됩니다.
성서를 카톨릭 교회가 독점할 수 없는 것처럼
개신교 교회의 목사님들도 개인이 성서를 독점할 순 없는 거죠.
그렇다고 일개 나 개인이 성서를 어떻게 제대로 해석할 수 있겠나요.
결국 신학의 힘을 빌어야 하지 않을까요...
답변이 늦었습니다. 아니 차라리 답변드릴 말씀이 쉽게 떠오르지는 않았습니다.
예전에 아델포스님이 쓰신 댓글인가를 한두번 읽으면서, 아마도 이분도 신학을 하시는
그런 분인가보다 생각했던 기억이 나는 것 같은데, 신학을 하지 않으셨다고 스스로
먼저 밝히셨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델포스님의 신학적인 식견이 상당하지 않으신가
하는 감이 듭니다.
이번에 저와 아델포스님 사이에 설정된 논란은 아마 '성서' '신학' 그 둘에 관한 관점인
듯합니다. 그 둘을 정의하거나 논하거나 혹은 규정하기는 너무나 어렵고도 벅찬 일이
될 것입니다(적어도 책 한 권쯤은 써야 될 듯 합니다).
그래서 되도록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본문에서 제가 언급한 "성서"는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즉 그렇게 간단히 혹은 어설프게 해석되고 이해되고 인식된 '좁은 개념의
성서'가 아니라 태초로부터 성서의 마감장까지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시는 신의 거대
메시지적 내러티브로서의 새롭게 정립될 수 있는, 그리고 그래야만 할, '올바르게
인식되는 성서'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또한, 저는 기존의 신학들이 (그 개념이 맞던 틀리던 간에) 너무 협소한 인식의 틀에
갇혀 있었다고 느껴지거나(예를 들어 칼빈의 "예정론" 같은 것) 혹은 지나치게 끝없는
개인적 사유에 머물러 있었지 않았나(수많은 서구 근.현대 신학자들)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저는 후자는 어떤 "신학"이기 보다는 차라리 '종교 철학'이라고 정의해야 맞다고
보고 싶습니다.
저는 새로운 신앙으로의 진보를 위해서는 편협된 기존 개념의 "신학"도, 또한 앞서 언급한
'종교 철학'도, 모든 그러한 것들의 굴레에서 속히 벗어나 진정한 말씀(조각 조각 난도질한
것이 아닌 창세기로부터 계시록까지 연속적으로 관통되는 거대 메시지로서 의 말씀)을
찾아내야(즉 새로운 인식을 정립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또한 그와 아울러서
디테일한 부분도 자의적인 해석(예, "믿음"을 이 세상 축복의 만능키로 보는 것)을 배제하고
정확하게 그 의미를 재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의 예로, 지금 요한 계시록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그리고 그걸로 제대로
설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어디 얼마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성서가 이미 인류 앞에 확연히 공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은 아직도 제대로 밝혀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 아닐런지요.
아델포스님의 의문에 충분한 답변이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지만, 하나의 추가적인
소견이라고 생각하면서 그저 필가는대로 편하게 적어봤음을 양해 구합니다.
진예수님글의 중심을 잘 모르겠네요.
성서신학의 중요성을 이야기 하면서도 어거스틴이나 이런 분의 견해를 빌리는 것은
꺼려하시네요.
신학 무용론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지
오히려 한국 교회의 신학 부재에 대한 의견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헷갈립니다.
신학 무용론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 부재에 대한 고찰이라면
오히려 오랜 역사의 과정속에서 전개 되어온 신학에 대해
배우고 견해를 듣는 과정은 매우 중요할텐데요.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한국 특유의 독창적인 신학을 말해야 됨을 역설하고자 함인지.
어느 것인가요?
다만, 그건 제가 중심이 자꾸 흔들리는 그런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만천하에 목소리 높여 주창할만한 뚜렷한 것을 완성해 내지 못했지
때문입니다(만약 그랬더라면 저는 이미 신학 강의를 통해 이름 날리며
먹고 사는 그런 사람의 하나가 되어있었겠지요).
그리고 (만약 제가 그럴 능력이 된다손 치더라도) 앞으로도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이미 성서 속에 모든 것이 다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겨우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내용을 올바르게 해석해 내는,
그리고 그 요구에 따라서 사는 그일 뿐일 것입니다.
나아가 한편 생각하면 주 예수님 말고 다른 그 누구가 이 세상을 향해서
자신있게 목소리 높여 주창할 만한 것이 있을까요?
그렇지 말아야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다는 그게
또한 문제라고 보고 싶습니다. 그런 사람들 모두는 마치 그게 전부인양
말하지만 그 반대적인 견해를 가진 또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그사람들을
이상하게 바라봅니다(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칼빈과 요한 웨슬리가 그랬었던
것이지요. 웨슬리는 칼빈의 예정론을 '신앙의 독소'라고 말했으니까요).
그런 모든 모습들이 소위 '도그마'인 셈이지요.
굳이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죠지 뮐러 같은 사람은 목소리 높이는 '도그마' 없이,
소리없이 그저 주께서 자신에게 주신 "몫"을 실천하는데만 일생을 사용한 사람인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죠지 뮐러는 세상을 향해 주창한 자신의 신학이
없어요. 단지 성경적 가르침에 따라 실천적 삶을 산 것 뿐이지요. 아마도 뮐러는
주님 요구하신 "이웃 사랑"의 삶을, 당대 영국 사회 고아들의 삶의 구제 쪽에
자신의 해석 관점을 맞추었던 것 같습니다.
이상이 제가 답변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전부는 아니지만, 그저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가는 작은 느낌을 전해 드릴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서구적인 신학이 아니라 한국적인 신학이 필요하다는 말씀이라면 적극 동의합니다.
현재까지로는 민중신학 이외에는 한국적이라고 할만한 신학이 없습니다.
그나마 민중신학도 완전히 독자적인 것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구요 (반론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다석 류영모 선생이 약간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셨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선듯 뒤따라 가기에는 무언가
꺼리껴지는 부분이 많습니다... 이것은 아직 서구적 신학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저의 한계인지도 모르겠
습니다만...어쨌든 보다 한국적인 신학이 아쉽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어떻게 말씀드릴 수 있을까요.
'한국적인 신학'이라. 저는 원론적으로는 그를 부정하면서도, 또한 현실적으로는
그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기도 합니다.
원론적으로 부정하려는 뜻은, 신앙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민족이나 국가나 지역을
구분하여 생각하는 것이 결코 바람직스럽지 못한 태도이기 때문이요, 현실적으로
긍정하고 싶은 이유는 기왕에 유럽 쪽의 것이든 혹은 미국의 것이든 간에 기성의
신학들에 있어 어차피 온전한 것은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그간 유럽 쪽의 신학은 너무 사상적.논리적인 것으로 어어져 왔고(이웃
사랑의 소명보다는 말입니다), 그에 따라서 유럽 기독교의 역사는 '피의 투쟁'으로
흘러왔습니다. 또한 지금 미국쪽 신학의 큰 외형은 일종의 '긍정의 힘' 이라는 말로
대변되고 있다고 보여지는 일종의 '성공담론' 혹은 '성공비결' 같은 것으로 변질되
어 있어 지극히 세속적인 것에 신앙의 눈이 멀어 있는 실정이라고 하는데, 이는 한국
에서의 기복신앙적인 행태와 같은 것으로써, 이로 인해 기독교가 일종의 '주술신앙'의
하나로 타락해버린 참으로 유감스럽고도 두려운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총론적으로 '한국의 신학'이라기 보다는 이 시대의, 우리의, 그리고 새 소명의 '올바른
신학'을 새롭게 추구함이 옳다고 봅니다. 그게 '한국의 것'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이든
말입니다.
이처럼 진정 이 時代(*)를 밝힐 '새롭고 올바른 신학'이 필요한 것인데,
문제는 한국의 신학계가 서구 기성 신학의 도그마에 함몰당한 채로 목적도 방향도 잃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특히 우리 한국인들은 태성적으로 서양인들에 비해 개념.이론의 정립이나 논리의 집대성
쪽(이런 것들이 소위 '학술'이지요)보다는 차라리 그저 움직이고 행동하는데 특기가
있습니다(소위 지금의 한류라는 트렌드가 일종의 그런 풍조의 하나라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 서양인들처럼 이론적인 신학보다는 '학'과 '행' 즉 이론과 실행의 구분 없이
그 둘이 함께하여 이 암울한 시대, 국내 어두운 곳이든, 동남아든, 아니면 아프리카든 혹은
남미 어느 곳이든, 지구촌 구석 구석을 향해서 새로운 실질적인 선행을 베풀어 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굳이 개념 짖자면 그게 바로 '한국의 신학'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아직 미미하나마 어떤
희망으로 비쳐지는 부분이 없지 않다면, 지금 이름없이 희생하는 상당수의 한국 사람들이
세계 구석 구석에서 이런 일을 실천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보여지기도 하는 바로
그 부분인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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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時代 :
물질이 왕노릇하는 '자본주의'라는 총체적 어두움의 시대.
과학과 기술의 신기루에 도취된 시대.
요한계시록 기록의 '육백육십육'의 짐승(사탄)이 왕성하게 판치는 시대.
인간이 도구화(물질화)된 시대.
영들이 혼미하여 정처없이 떠도는 시대.
이웃사랑의 개념이 사라져 가는 시대.
님의 글에 덧붙여 제 생각을 말해봅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11:30)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성서를 아는 일도 아주 쉬워서 철학을 몰라도, 신학을 몰라도 누구나 알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한국에서의 기독교 개신교는 훌륭한 찰학자, 신학자들의 사상에만 얽매여 있다고 봅니다.
그들의 사상이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훌륭한 신학자)은 성서를 읽고 깨달았는데,
깨달음을 얻은 그들은 그들이 깨달은 만큼만 아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국신학자들은 대부분 그들이 깨달음음을 얻은 그 말만을 말한다는 것이 문제 이지요.
그들이 그렇게 성서를 깨달았으면 그것을 초석으로 나는 그들과 다른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것인데
'그들, 철학자, 신학자들의 말이 정확합니다.' 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들이 그렇게 해석해 놓았으니까 더 이상 다른 해석은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한국의 신학자들은 대부분 성서를 스스로 깨달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성서를 깨달은 사람들의 깨달은 내용과, 방법을 가르쳐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대학에서 가르쳐 주는 일로 끝나야 합니다. 그것을 듣고 배운 사람들은
자신이 어떠한 방법을 택해서 먼저 깨달은 사람들과 다른 해석을 할 것인지를 선택을 하고
스스로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이지요. 교수는 이런 사람들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교수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를 읽고 깨달은 사람들의 사상을, 신학자라는 위치에서 재단하고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 루터, 칼빈. 요한웨슬레 등등이 이렇게 말했으니까 다른 말은 모두 틀렸다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한다는 것이죠. 다른말로 하자면 훌륭한 학자들 이야기만 해야 하는 것이고,
스스로 성서를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논리입니다.
차라리 모르면 알려주지나 않으면 성도들이 고생하면서라도 깨달음을 얻기 위해 기도하며
스스로 찾아 갈 수라도 있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