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 <열린 토론실>입니다. 다비안들의 부담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채>와는 달리, 보다 진지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나 주제를 나누고 싶은 분들을 위한 게시판입니다. 가급적 예의를 갖추시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대화는 다비안을 비롯한 여러 네티즌들의 온라인 상에서의 자유로운 것이기에 그 방향과 정체성이 반드시 다비아와 일치하지는 않음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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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예수뿐입니다!안녕하세요^^ 너무 오랫만이죠~ 제가 요즘 따로 뭔가를 꾸미느라 괜시리 바빴어요 그동안에 사실은 많은 전쟁을 치뤘습니다. 하마터면 죽을 뻔 했어요 무슨소리냐구요? 제 안에서 엄청난 전쟁을 치뤘답니다. 눈에 보이는 전쟁도 무섭고 위험하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는 전쟁이 더 살벌한지 아세요? 영적전쟁이라고 하는데요 그 전쟁에서 제가 거의 죽다 살았습니다. 영적전쟁을 한마디로 요약할순 없습니다. 다분히 주관적이고 도 객관적인 면도 많기에 속단하기가 힘들지요. 개인적일수도 있고 공동채적일 수도 있고 넓게는 국가적이며 세계적일 수도 있거든요. 저는 그리 폭넓은 사유에는 자신이 없기에 축소해서 개인적인 부분에 한정을 지을까해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제 입장을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모든 영적전쟁의 최대의 목표는 “죄”와의 싸움이다. 죄란 밖에있는것보다 자기속에 그 뿌리가 있기때문에 눈치를 채기가 쉽지않지요. 어떤이는 그 죄가 자기속에서 꿈틀거리는걸 모르기도 하고요. 안다고 해도 인간적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 “죄의 본성“에 이미 철저하게 갇혀있었던 인간의 실존은 결국 무방비상태로 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쉽게 말해서 ‘죄를 인식하고 있다고’해서 그가 죄를 재어할 힘이나 실력이 전무하다는 겁니다. 이것은 노력으로,훈련으로, 수양으로,명상을,주술적인 수단이나 방법론적으로는 안된다는 거 죠. 너무 단정적으로 말했나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이 자신의 힘으로 통재할거라 자신하세요? 저는 번번히 무너지는데요. 마음한번 고쳐먹는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사람은 압니다. 그거 쉽지않지요. 알아도 못하고 몰라서도 못하는게 우리 인간의 한계라는걸 인정해야 하거든요. 요즘은 그 인정하기 싫은사실을 조금씩 인정하고 있습니다. 말이 길어졌네요. 솔직히 제가 바로 그놈입니다. 남들은 몰라도 제 자신은 그걸 알지요. 또한 우리 주님께서 이미 아십니다. 다른사람의 눈과 마음은 다 속여도 불꽃같은 눈동자로 흑암을 대낮같이 보시는 하나님의 시선에 피하여 숨을곳이 없답니다. 그래서 구약의 믿음의 사람 ‘다윗’왕도 이렇게 고백했다니까요? 「내가 “어둠에게 나를 가리고 밤에게 나를 둘러 달라” 해도 어둠조차 주로부터 숨지 못하며 밤도 낮처럼 환하게 빛날 것입니다. 주께는 어둠이나 빛이나 다를 바 없으니 말입니다.」 (우리말성경시편139편11,12) 더 기가막힌 다윗의 고백을 들어보실래요? 「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니 나를 아실 것입니다 . 내가 앉고 서는 것을 아시고 멀리에서도 내 생각을 아십니다. 주께서는 내가 길을 다니는 것과 내가 눕는 것을 아시니 내가 하는 모든 일을 샅샅이 알고 계십니다. 오 여호와여, 내가 말을 혀에 담기도 전에 주께서는 그것마저 다 아십니다. 주께서는 나를 앞뒤로 둘러싸 주시고 내게 손을 얹으셨습니다. 그토록 잘 아시다니 너무도 놀랍고 너무도 높아서 나는 이를 수 없습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겠습니까? 내가 주 앞을 떠나 어디로 피하겠습니까? 내가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에 계시며 지옥에 잠자리를 마련해도 거기에 계십니다. 내가 새벽 날개를 타고 바다 저 끝에 내려앉더라도 어디에서든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으로 나를 꼭 붙드실 것입니다」 (시편139편1~10) 우리는 하나님앞에 숨을곳이 없습니다. 절망입니다. 그러나 단 한분이 계십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을 가려주시고 덮어주시고 방패가 되시고 변호해주시고 편을 들어주시는 그분!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우리는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 이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 곧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보좌들과 주권들과 권력들과 권세들이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창조됐기 때문입니다. 만물이 아들로 인해 창조됐고 아들을 위해 창조됐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 함께 서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아들은 그분의 몸인 교회의 머리십니다. 그분은 근본이시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먼저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이는 그분이 친히 만물 가운데 으뜸이 되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모든 충만으로 아들 안에 거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셨고 그 아들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뤄 만물, 곧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모든 것이 아들로 인해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 신약-골로새서1장14~20) 모든사람들이 예수를 믿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하여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구원”과도 직결되는 이유지요. 어느분이 (저한테 질문한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의문을 달았습니다.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가?” 이 질문의 또다른 의도는 ‘다른길은 없는가?와 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라는 뉘앙스를 깔고 있다고 보는데요. 꼭 예수만 믿어야 구원을 얻는가라는 문제제기겠죠. 이건 굉장히 민감한 부분이죠. 저같은 무식자가 다룰수 없는부분입니다. 그러나 한사람의 ‘예수 믿는자’로서 즉, 기독교인으로서 개인적으로는 대답을 해야겠지요? 제 대답은 이겁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그리스도외에 다른길이 없다는 것이 저의 대답이고 성경의 대답입니다. 다른종교에게 돌질을 당하겠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다른 종교를 무시하거나 부정하거나 적대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기독교가 완전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다른종교가 틀렸다는 뜻도 아닙니다. 다만, 서 있는 자리가 다릅니다. 가는 길이 다른것이지요. 우린 모두 각자의 길을 가는것 뿐입니다. 그리고 또 저는 “종교 다원주의자”는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평화’를 소망합니다. 다른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주장에 인정합니다. 다만, 구원의 본질,내용,성격,가치관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이죠. 어떤 종교나 심지어 무신론자들에게도 각자의 구원은 존재합니다. 예를 들자면, 죽을병에 든 사람은 병에서 치유받는것이 구원이라면 틀린걸까요? 그외에도 많죠? 알콜중독, 도박등에서 해방이 된다면 그것도 구원이겠지요.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좀더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오직 “예수”외에 다른구원이 없다는게 저의 고백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여러 의견들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배타성과 편협성을 예로 들면서 항변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주장에도 일견 타당성이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동감합니다. 예를 든다면, 예수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하고 죽은 조상들이나 어린아이들이나 오지에 있는 수 많은 종족들은 구원에서 제외된거냐는것과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협소하고 설마하니 예수 안믿었다고 지옥보내시겠는가라는 의견들이죠. 다른종교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으로 기독교를 밀어붙이면서 압박을 하더군요. 심지어 기독인들이 그런생각을 맘한구석에 품고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분들의 걱정이나 안타까움을 십분 이해 합니다만 저는 지금 그런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과거에 이미 돌아가신 조상들의 문제때문에 지금 고민하고 갈등하고 만약 조상들이 예수안믿어서 구원받지 못했다면 나는 그런 하나님은 안믿겠다라는 고집으로 무장하신분들께 개인적으로 조심스럽게 한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과거의 문제보다는 현제 자신을 돌아보시는게 순서일거라고요. 우리에게 오늘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내일이 온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모든인간에게 내일이 온다는 믿음이 있습니까? 아무도 우린 한치앞을 장담할 수 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직면하고있는 현실이며 우리의 주재랍니다. 주재파악을 해야한다는 뜻입니다. 내가지금 성경에서 요구하는 그 “예수”를 믿고 있는가? 만약 믿고있다면 그것이 내가 원해서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인가? 를 생각해보시고 결론은“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은혜 놀라워를 찬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상들이 구원을 받았는지 못받았는지는 하나님앞에 가면 확인할 수 있는문젭니다. 구원이 어떤 공식도 아니고 방법도 아니고 원리도 아닙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우리가 아무리 모색을 해도 구원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으로 구원을 배푸십니다. 조상들의 구원문제는 우리의 영역 밖의 문제입니다. 그 문제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조상들이나 자살이나 여러가지 이유로, 죽음은 인간이 피할 수가 없지만 그 죽음이후의 세계는 우리가 알 수 없고 하나님께 있기에 우리가 지금 관심을 갖고 살아야 하는것은 “나”는 어떻게 반응하며 살고 있는가? 에 초점이 있어야합니다. 왜 우리가 이문제를 재껴놓고서 시간을 낭비합니까? 지금 우리에게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어제 만났던 그사람을 다음에 또 만날수 있을지 없을지를 알 수가 없는것입니다. 죽음의 문이 나는 피하고 다른사람에게만 열린다고 속단하지 마십시오. 다른나라에서 전쟁이나 질병이나 여러가지 이유로 죽어가는 그들의 문제가 꼭 남의나라문제가 아니라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마십시오. 이렇게 긴급하고 절박하게 살아가는 사실을 아는이가 별로 없습니다.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정신을 못차리게 현란하게 속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우리에게 ‘내일’은 오늘보다 낳을거라고 속입니다. 이런문제에 이분들을 거론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지금 아프칸에 억류된 사람들이 이럴줄 알았을까요? 대구 지하철 화재를 알고 출근했을까요? 물놀이로 피서지에서 죽은 이들에게도요. 폭우속에서 밭을 돌아보다가...하우스를 점검하다가... 출근하다가 미국의 9.11사건에도요... 그들은 여러가지 모양으로 가족들과 “같다올께”라는 인사를 했지만 끝내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다시한번 죄송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짧은 ‘찰나’의 시간에 살고 있는지 실감하세요? 이런 긴급한 사실을 생각한다면 얼마나 시간을 낭비하고 사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우리는 (믿는자들께) 우리속에 숨어있는‘죄’를 억누르는데도 힘이 달립니다. 지금 누구를 비난하며, 정죄하며, 판단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 ‘감사’하기도 부족합니다. 오늘 내가 밥한끼 먹을 수 있는것도 내가 힘있고 능력있고 잘나서 그런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걸 아시나요? 다시한번 정리합니다.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를 믿는것 뿐입니다. 여러분이 받아들이시든 거절하시든 자유입니다. 다만 그 자유에대한 책임도 여러분에게 돌아갑니다. 구원은 분명히 “배타적‘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모두에게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내가지금 ‘예수“를 믿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십시오. 믿음을 주신것도 내 실력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랍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알 수 없는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그 길은 오직 예수외에 없습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제시한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성경기록자들은 다양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심층적으로 다 다룰수는 없고요. 저는 화평이라는 대목을 잠깐 살펴볼까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를 화목시켜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이 같고 있는 내용이죠. 하나님의 자녀. 후사, 칭의, 중생, 영광등 모든것을 포함하지요. 제 개인적인 채험에 결부를 하면 서두에서말한것처럼 “영적전쟁”에서 화평을 말하고자 합니다. 흔히 ‘회개’라고 하는 단어 들어보셨죠? 한동안 제가 영적전쟁을 하면서 내 속에 꿈틀거리는‘ 죄’와의 싸움에서 끙끙거리고 있었습니다. 그시간에는 뭔가 알 수 없는 강력한 힘이 압박을 하고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콱막힘을 느꼈습니다. 제가 원래 영적이지 못했지만 그때만큼은 꼼짝을 못했어요. 기도도 안돼고요. 기도할 힘이 없어요. 말씀도 안들어오고 맘이 괭장히 답답했어요. 사실은 죄를 멀거니 보고서 수수방관했다는게 옳습니다. 그때 거절하고 도망을 했어야 하는데 어느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거든요. 나중에는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죽을것 같은 기분이 들자 그때서야 정신이 들더군요. 내가 이래서는 안돼지. 다른방법이 없었지요. 맘속에 들어있던 죄의 쓰레기를 비워내야했습니다. 그것이 못내 미련이 남고 아쉬움도 있었지만 더 이상 늦으면 큰일나겠다 싶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주님께서 제 양심과 마음을 통해 계속 싸인을 보내셨는데 죄의 달콤한 유혹에 갈등했었지요. 다윗의 고백처럼 “내 속에 숨은 죄를 토설”하게 하시고 돌아서게 하시자 비로소 화평을 맛볼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죽다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이게 제 실력으로 가능햇을까요? 아닙니다. 주께서 불쌍히 보시고 건저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하나님과 화목하라 그랬나봅니다. 예수 안에서 더욱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라고 노래했습니다. 주의 은혜로 돌아서는 힘을 받고나니 맘속에 막혔던 것이 사라졌습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경험입니다. 이 모든것을 가능하게 하신분이 하나님이시며 그 길이 예수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제가 여러분들께 전하고픈 소식입니다. “오직 예수” 감사합니다. 작은자 올림. by 작은자 |
2007.08.10 08:37:15
아멘입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3:10) 성서는 '인문학적'으로 이해가 안되나 새롭게 됨을 통해 받아드려지는 것 같습니다.
2007.08.10 09:26:26
저도 아멘..
그마음으로..그은혜로..
살아도..바울과 같은..한편의 고통이 있읍니다 이은혜가
이민족과세상에 아직은 편만하게 흐르지 않고 있읍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상을 보냅니다.은혜 나눌수 있는것 감사드립니다...
그마음으로..그은혜로..
살아도..바울과 같은..한편의 고통이 있읍니다 이은혜가
이민족과세상에 아직은 편만하게 흐르지 않고 있읍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상을 보냅니다.은혜 나눌수 있는것 감사드립니다...
2007.08.10 11:25:02
나는 예수를 통해서 구원 받음을 고백 합니다
한가지 말하고 싶다면 우리의 조상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라는
표현은 매우 이기적인 발상입니다
성경을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이는 여러분은 저와 뜻이 다르겠지만
성경은 사람이 쓴 글입니다..
나는 그 속에서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알아가고 있는 중인 한 사람입니다.
바울의 교리가 완전 한것은 아닙니다.
개신교의 교리는 문제가 많습니다..
나는 맹신은 하기 싫습니다..
작은자 님의 말대로 하자면 우리 조상들이야 지옥에 갔건 말건 지금 우리는
예수믿고 천국가면 되지 않느냐 는 말인데 나는 그런 예수라면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것이 하나님의 공의와 선하심이라면 나는 믿지 않을 것입니다.
한가지 말하고 싶다면 우리의 조상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라는
표현은 매우 이기적인 발상입니다
성경을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이는 여러분은 저와 뜻이 다르겠지만
성경은 사람이 쓴 글입니다..
나는 그 속에서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알아가고 있는 중인 한 사람입니다.
바울의 교리가 완전 한것은 아닙니다.
개신교의 교리는 문제가 많습니다..
나는 맹신은 하기 싫습니다..
작은자 님의 말대로 하자면 우리 조상들이야 지옥에 갔건 말건 지금 우리는
예수믿고 천국가면 되지 않느냐 는 말인데 나는 그런 예수라면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것이 하나님의 공의와 선하심이라면 나는 믿지 않을 것입니다.
2007.08.10 16:50:28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느니, 영혼구원이 중요하다느니 하는 이들은 다음 잠언을 묵상해야 합니다.
종교는 억압받는 피조물들의 한숨이요, 심장없는 세상의 심장이며, 영혼없는 상태의 영혼이다. 이는 인민의 아편이다.(카를 마르크스)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며)타 종교를 무조건적으로 악마의 소산이라고 생각하는 개종 중심의 선교 신학은 제국주의적인 발상이다. 지구촌에서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현실과 그 진리성을 인정하되 종교간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종교를 배워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새로운 신학이 정립돼야 한다"(감리교신학자 고 변선환 선생)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는 빈민가와 인간의 영혼을 억압하는 경제적인 조건, 인간의 영혼을 짓누르는 사회적인 조건에는 무관심한 채 인간의 영적인 구원에만 관심을 갖는 종교는 사멸하게 된다.”(마틴 루터 킹 목사)
종교는 억압받는 피조물들의 한숨이요, 심장없는 세상의 심장이며, 영혼없는 상태의 영혼이다. 이는 인민의 아편이다.(카를 마르크스)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며)타 종교를 무조건적으로 악마의 소산이라고 생각하는 개종 중심의 선교 신학은 제국주의적인 발상이다. 지구촌에서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현실과 그 진리성을 인정하되 종교간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종교를 배워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새로운 신학이 정립돼야 한다"(감리교신학자 고 변선환 선생)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는 빈민가와 인간의 영혼을 억압하는 경제적인 조건, 인간의 영혼을 짓누르는 사회적인 조건에는 무관심한 채 인간의 영적인 구원에만 관심을 갖는 종교는 사멸하게 된다.”(마틴 루터 킹 목사)
2007.08.11 01:39:55
감사합니다
영광스럽게도 작은자의 글도 쟁토방으로 옮겨졌네요^^
제글이 그렇게 영향을 줄정도란 말씀인가요?
아니면 다비아와의 길이 달라서인가요?
제가 보기에 다비아는 진보와 보수를 수용한다는 것에 반하여
아직 버티고 있는중입니다. 자기 정채성을 들어내는것은 중요하지요.
나와 다르다고 무조건 반대하지 맙시다.
저는 사랑채가 비교적 많은 눈팅님들께서 즐겨찾는 곳이라서
비록 다비아와는 색갈이 좀 다르더라도 다양한 사고를 낼수 있고
볼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아쉽지만 운영자의 하신일에 어쩝니까요^^
조만간 내리려고 햇었는데말이죠.
도루박님! wjdrnjs 님! 감사합니다.
순둥이님! 감사합니다.
위 표현중에서“한가지 말하고 싶다면 우리의 조상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라는
표현은 매우 이기적인 발상입니다“ 이렇게 보셨군요. 그럴수도 있겠습니다.
억지같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독선적이고 이기적입니다. 우린 그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을 받고 있구요. 물론 받을 자격이 없다는건 아실것이고 그럼에도 받았다는거도 인정하시겠죠?
조상들의 구원문제를 하나님께 맡기자는게 이기적일까요?
그럼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할건데요? 우리가 할 수 있는게 뭐가 있을까요?
그 문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으로 구원을 주실자는 주실 것이고 그렇지 못하실
자는 어쩔수 없다는 거지요.
적합한지 모르겠지만요. 포도원 품군의 비유도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포도원주인의 횡포아닌가요? 그때문에 어떤이는 이익을 보고 어떤이는
손해를 봅니다. 그렇다고 따질 수 없지요.
바울사도의 인용을 한번 더 빌립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저는 결코 바울이 완전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뿐 아니라
아브라함도 성경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허물이 없는사람 없지요.
성경에서 그들의 치부를 숨긴곳 있습니까?
인간적인 자서전하곤 비교할 수 없을만큼 성경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허물과 실패까지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교리가 완전할 수 없다는 그말씀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이상의 교리가 또 나올수 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일생이 오직 주님을 전파하는 일에 모든것을 목적했거든요.
일신상의 문제때문에 그가 주님을 향한 사명을 포기하지도 않았고 뒤로 미루지도 않았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자신이 이미 얻었다고도 하지 않았지요.
오직 푯대를 향하여 달려갈 뿐이다 했지요. 그런차원에서
내가 주님을 구원자로 믿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위의 댓글에서처럼
“나는 맹신은 하기 싫습니다.. 작은자 님의 말대로 하자면 우리 조상들이야
지옥에 갔건 말건 지금 우리는 예수믿고 천국가면 되지 않느냐 는 말인데
나는 그런 예수라면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것이 하나님의 공의와 선하심이라면
나는 믿지 않을 것입니다. “ 이렇게 까지 저를 몰아부칠 필요까지 있을까요?
바울이 맹신자는 아니지요. 물론 저도 바울이 될 순 없습니다.
비교조차 불가합니다. 저 역시도 맹신은 거부 합니다. 그런면에서 지나간세대를
논하는일에 힘빼지 말자는 겁니다. 오늘이 중요하다는 거죠.
하나님앞에서 우리의 지난 과거가 의미가 있겠어요? 지나간 허물을 따지신다면
누가 하나님앞에 서있겠어요? 믿는자의 삶의 우선순위를 생각해보자는 의미에서
올린것입니다. 이해가 다르다면 어쩔수 없지요.
바우로님! 감사합니다.
좋은 지적입니다. 영혼구원의 중요성이 강조되는것 자체를 문제삼아서
그런것이 아닌줄 압니다. 다만 그런주의자들의 오류와 병패로인한 사회적인 문제를
우려하신 뜻이겠지요. 동감이죠. 그렇지만 영혼구원을 우선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사회문제를 외면한다고 보시는것은 좀 거시기 합니다.
제정신 박힌 믿는사람치고 어떻게 사회적인 약자와 억압당하는자들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겠습니까? 만일 그런자들이라면 위선자들이거나 거짓믿는자들이겠지요.
아니면 믿음에 견고하지 못하여서 숨어있는자들일테고요.
그런자들은 그렇게 하도록 놔두시지요.
사람들의 눈에도 보이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눈에 안띌까요?
자기 머리위에 숯불 쌓아두는것까지 신경쓰지 맙시다.
차라리 잃어버린 양한마리를 찾는 노력을 하는게 낳지요.
예수께서 오신것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백성을 찾아 구원하러 오셧습니다.
성경은 유감스럽게도 택자와 불택자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사람으로선 할 수 없으되 오직 하나님은 하실수 있다고
주께서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사도들이 기록했습니다.
제가 미리 위에서 언급했습니다만, 어디까지나 믿는자의 한사람으로서
개인적인 생각을 밝힌것이라고요. 저의 주장이 강요하는 것으로
읽혀졌다면 안타깝습니다. 저는 타종교에대하여서 분명히 비하한적 없구요.
서 있는 자리와 생각과 가치관의 다름을 말했습니다.
성경의 내용을 함축시켜서 오직 예수로 말미암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이
제 견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고 그 이상은 저도 모릅니다.
구원을 왜 받았고 어떻게 받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럴 자격이 저한테
눈꼽만큼도 없고 지금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구원의 확신”을 주장하는 ‘구원파’는 더욱 아니올시다.
누구도 내가 확실히 구원받았다라고 자신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몰르죠.
나중에 그분앞에 가보면 알수 있는데 갈지 못갈지 장담 못하겠습니다.
지금 제 꼬라지를 보니까 도저히...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소망을 둡니다.
모두 평안하소서!
샬롬~
영광스럽게도 작은자의 글도 쟁토방으로 옮겨졌네요^^
제글이 그렇게 영향을 줄정도란 말씀인가요?
아니면 다비아와의 길이 달라서인가요?
제가 보기에 다비아는 진보와 보수를 수용한다는 것에 반하여
아직 버티고 있는중입니다. 자기 정채성을 들어내는것은 중요하지요.
나와 다르다고 무조건 반대하지 맙시다.
저는 사랑채가 비교적 많은 눈팅님들께서 즐겨찾는 곳이라서
비록 다비아와는 색갈이 좀 다르더라도 다양한 사고를 낼수 있고
볼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아쉽지만 운영자의 하신일에 어쩝니까요^^
조만간 내리려고 햇었는데말이죠.
도루박님! wjdrnjs 님! 감사합니다.
순둥이님! 감사합니다.
위 표현중에서“한가지 말하고 싶다면 우리의 조상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라는
표현은 매우 이기적인 발상입니다“ 이렇게 보셨군요. 그럴수도 있겠습니다.
억지같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독선적이고 이기적입니다. 우린 그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을 받고 있구요. 물론 받을 자격이 없다는건 아실것이고 그럼에도 받았다는거도 인정하시겠죠?
조상들의 구원문제를 하나님께 맡기자는게 이기적일까요?
그럼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할건데요? 우리가 할 수 있는게 뭐가 있을까요?
그 문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으로 구원을 주실자는 주실 것이고 그렇지 못하실
자는 어쩔수 없다는 거지요.
적합한지 모르겠지만요. 포도원 품군의 비유도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포도원주인의 횡포아닌가요? 그때문에 어떤이는 이익을 보고 어떤이는
손해를 봅니다. 그렇다고 따질 수 없지요.
바울사도의 인용을 한번 더 빌립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저는 결코 바울이 완전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뿐 아니라
아브라함도 성경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허물이 없는사람 없지요.
성경에서 그들의 치부를 숨긴곳 있습니까?
인간적인 자서전하곤 비교할 수 없을만큼 성경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허물과 실패까지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교리가 완전할 수 없다는 그말씀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이상의 교리가 또 나올수 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일생이 오직 주님을 전파하는 일에 모든것을 목적했거든요.
일신상의 문제때문에 그가 주님을 향한 사명을 포기하지도 않았고 뒤로 미루지도 않았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자신이 이미 얻었다고도 하지 않았지요.
오직 푯대를 향하여 달려갈 뿐이다 했지요. 그런차원에서
내가 주님을 구원자로 믿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위의 댓글에서처럼
“나는 맹신은 하기 싫습니다.. 작은자 님의 말대로 하자면 우리 조상들이야
지옥에 갔건 말건 지금 우리는 예수믿고 천국가면 되지 않느냐 는 말인데
나는 그런 예수라면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것이 하나님의 공의와 선하심이라면
나는 믿지 않을 것입니다. “ 이렇게 까지 저를 몰아부칠 필요까지 있을까요?
바울이 맹신자는 아니지요. 물론 저도 바울이 될 순 없습니다.
비교조차 불가합니다. 저 역시도 맹신은 거부 합니다. 그런면에서 지나간세대를
논하는일에 힘빼지 말자는 겁니다. 오늘이 중요하다는 거죠.
하나님앞에서 우리의 지난 과거가 의미가 있겠어요? 지나간 허물을 따지신다면
누가 하나님앞에 서있겠어요? 믿는자의 삶의 우선순위를 생각해보자는 의미에서
올린것입니다. 이해가 다르다면 어쩔수 없지요.
바우로님! 감사합니다.
좋은 지적입니다. 영혼구원의 중요성이 강조되는것 자체를 문제삼아서
그런것이 아닌줄 압니다. 다만 그런주의자들의 오류와 병패로인한 사회적인 문제를
우려하신 뜻이겠지요. 동감이죠. 그렇지만 영혼구원을 우선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사회문제를 외면한다고 보시는것은 좀 거시기 합니다.
제정신 박힌 믿는사람치고 어떻게 사회적인 약자와 억압당하는자들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겠습니까? 만일 그런자들이라면 위선자들이거나 거짓믿는자들이겠지요.
아니면 믿음에 견고하지 못하여서 숨어있는자들일테고요.
그런자들은 그렇게 하도록 놔두시지요.
사람들의 눈에도 보이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눈에 안띌까요?
자기 머리위에 숯불 쌓아두는것까지 신경쓰지 맙시다.
차라리 잃어버린 양한마리를 찾는 노력을 하는게 낳지요.
예수께서 오신것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백성을 찾아 구원하러 오셧습니다.
성경은 유감스럽게도 택자와 불택자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사람으로선 할 수 없으되 오직 하나님은 하실수 있다고
주께서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사도들이 기록했습니다.
제가 미리 위에서 언급했습니다만, 어디까지나 믿는자의 한사람으로서
개인적인 생각을 밝힌것이라고요. 저의 주장이 강요하는 것으로
읽혀졌다면 안타깝습니다. 저는 타종교에대하여서 분명히 비하한적 없구요.
서 있는 자리와 생각과 가치관의 다름을 말했습니다.
성경의 내용을 함축시켜서 오직 예수로 말미암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이
제 견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고 그 이상은 저도 모릅니다.
구원을 왜 받았고 어떻게 받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럴 자격이 저한테
눈꼽만큼도 없고 지금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구원의 확신”을 주장하는 ‘구원파’는 더욱 아니올시다.
누구도 내가 확실히 구원받았다라고 자신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몰르죠.
나중에 그분앞에 가보면 알수 있는데 갈지 못갈지 장담 못하겠습니다.
지금 제 꼬라지를 보니까 도저히...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소망을 둡니다.
모두 평안하소서!
샬롬~
2007.08.11 14:54:32
주지하시다시피 인문학적인 태도의 중심시각은 인간 중심적(자기 중심적)인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절대자와 진리의 실상 그리고 그 세계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일진데,
인간이 인간아닌 다른 무엇(etwas)으로 대상화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나 이성적으로 불가능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겠지요.
사람들은 그러한 부조리한 현실구조를 '합리적 이성'이라는 나약한 버팀목으로 버팅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일한 입장에 있는 타인들로부터 격려와 지원을 받는 것입니다. 같이 망하자는 거지요.
그러다보니까 지극히 현세적이 되는 것이고 물질 지향적이 되고 심리적인 경향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기술된 문학적 창작물에 불과한 것이고요, 인간이 알수 없고 알지 못하는 초월적 세계에 대해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지요.
종교는 문화 행위가 되는 것이고 윤리와 도덕적 한계를 넘어서면 경멸하고 이단시하는 겁니다. 또한 사회적 정치적 신념체계로 치부되어 사회 현실 속에서 자신이 꿈꾸는 신적 이상사회를 구현하고자 하는 노력이 구체화되고 때로 정치 세력화 하기도 하지요.
기독교에서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절대자와 진리의 실상 그리고 그 세계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일진데,
인간이 인간아닌 다른 무엇(etwas)으로 대상화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나 이성적으로 불가능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겠지요.
사람들은 그러한 부조리한 현실구조를 '합리적 이성'이라는 나약한 버팀목으로 버팅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일한 입장에 있는 타인들로부터 격려와 지원을 받는 것입니다. 같이 망하자는 거지요.
그러다보니까 지극히 현세적이 되는 것이고 물질 지향적이 되고 심리적인 경향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기술된 문학적 창작물에 불과한 것이고요, 인간이 알수 없고 알지 못하는 초월적 세계에 대해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지요.
종교는 문화 행위가 되는 것이고 윤리와 도덕적 한계를 넘어서면 경멸하고 이단시하는 겁니다. 또한 사회적 정치적 신념체계로 치부되어 사회 현실 속에서 자신이 꿈꾸는 신적 이상사회를 구현하고자 하는 노력이 구체화되고 때로 정치 세력화 하기도 하지요.
2007.08.11 15:12:27
짧고도 허무한 이 세상, 비록 비극적인 종말을 맞는다하더라도 내 배짱대로 살고싶은 인간욕망의 극단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동료들이 있으니 외롭진 않지요. 그러한 동료들이란 적군을 말합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말입니다.
산다는 것은 소소한 웃음꺼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겠지요 그러므로 우스개소리가 중요합니다. 탈자와 오자 하나없는 글쓰기가 재주부림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는 가치로 느낄테니까요. 이들에게는 내용없는 형식과 껍질이 중요하니까요.
종교는 장사꾼들이 모여드는 시장터와 같게되지요. 목사는 장사꾼이라 불리는 것을 솔직한 자기고백이라고 받아들입니다. 생명이 없는 죽은 식육점 가게에 비유하는 게 더 옳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체험과 믿음을 얻은 성도의 신앙 고백은 이들에게 딴나라의 방언으로 들릴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로 어쩌면 이들에게까지 썩은 육포를 팔아먹을 속셈을 할지도 모르지요.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내려다본 세상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일지 모릅니다.
산다는 것은 소소한 웃음꺼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겠지요 그러므로 우스개소리가 중요합니다. 탈자와 오자 하나없는 글쓰기가 재주부림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는 가치로 느낄테니까요. 이들에게는 내용없는 형식과 껍질이 중요하니까요.
종교는 장사꾼들이 모여드는 시장터와 같게되지요. 목사는 장사꾼이라 불리는 것을 솔직한 자기고백이라고 받아들입니다. 생명이 없는 죽은 식육점 가게에 비유하는 게 더 옳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체험과 믿음을 얻은 성도의 신앙 고백은 이들에게 딴나라의 방언으로 들릴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로 어쩌면 이들에게까지 썩은 육포를 팔아먹을 속셈을 할지도 모르지요.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내려다본 세상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일지 모릅니다.
낑낑대며 제 홈 대문에 걸어논겁니다
개인적인 생각이라서 반대하시는분들이
계셔도 일단 다른분들을 위해서 좀 모양새는 없지만
잠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