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 <열린 토론실>입니다. 다비안들의 부담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채>와는 달리, 보다 진지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나 주제를 나누고 싶은 분들을 위한 게시판입니다. 가급적 예의를 갖추시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대화는 다비안을 비롯한 여러 네티즌들의 온라인 상에서의 자유로운 것이기에 그 방향과 정체성이 반드시 다비아와 일치하지는 않음을 밝혀둡니다.
글 수 253
정용섭 목사님의 설교비평에 대한 박영선 목사님의 반론글을 두고 이어지는 토론이 끈이 되어
다비아에 오게된 저는 이 공간에서 드러나는 견해에 호기심이 일어났습니다.
기독교인이 어떤 사유의 과정을 거쳐 이런 말을 하게 되는 것일까 궁금해졌다고나 할까.
성서읽기에서 인문학적인 전통을 소중히 여길 것이라는 홈페이지 대문에 걸린 말도
처음에는 수수께끼처럼 느껴졌습니다.
인문학적인 전통을 소중히 여기면서 성경을 보면 어떻게 보인다는 것일까?...
그래서 태생적인 지적 호기심으로 다비아에 실려있는 글들을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읽었습니다.
대학시절에 예수를 믿게 된 저는 장로교, 감리교에서 신앙생활을 했지만
신학적으로 비교적 자유로운 생각을 했다고 스스로 정리합니다.
대학시절에는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텍스트로 성경공부하다가 칼빈주의가 성경을 해석하기에는
그릇이 너무 협소하다는 과격한 주장을 펴 친구와 의가 틀어지기까지 했으니까요.
암튼 다비아에 실린 글들을 읽고 느낀 것은,
글들에서 나타나는 견해들에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고
그것이 또 다양한 방식으로 조율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밖의 시선으로 볼 때 생각이 치밀하지 않으면 나타나기 쉬운 오류나 잘못된 흐름도
있다는 느낌도 듭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잘못 파악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오류를 파악하기 가장 좋은 방법이 '진지한' 토론이니까.)
느낀 점을 두 가지만 우선 거론하면,
1) 첫 번째로 인문학적인 성경 읽기에 대한 소견입니다.
홈페이지 첫머리에 있는 '성서읽기에서 인문학적인 전통을 소중히 여길 것'이라는 말인데,
인문학은 문학,역사학,철학을 일컫고 그 바탕에 언어학이 깔려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인문학적인 전통으로 성경을 본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생각해
봤습니다.
성서 본문은 역사적인 기록이며, 따라서 집필될 당시의 역사적 특이성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바를 해석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이해됩니다.
여기에 텍스트 개념이 등장하여 언어학적인 텍스트들을 주의깊게 분석하여 해석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를 갈라놓는 갈림길치고는 이정표가 그리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런 의도 자체를 두고 보수주의에서도 딴지를 걸 만 이유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정 목사님 말씀처럼 서로 '기본적 사유 틀이 소통되지 않으면 대화는 더디거나 제 자리에 머물거나,
막히거나 옆으로 새'게 됩니다.
그렇다면 기본적 사유의 틀이 달라지는 것은 아마도 이 지점이 아니라
한참 더 지난 어느 지점에서야 나타날 것 같습니다.
모세 출애굽 당시의 성경 기록은 이집트 19왕조에 속한 파라오 람세스 2세
또는 메르나프타하(Merneptah) 시대의 역사적 기록입니다.
우리 시대가 아닌 그 시대의 눈으로 그 사건을 바라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각으로 바라본다고 해서
홍해가 갈라졌다는 기록을 축자적으로 해석하면 넌센스라는 결론을 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 보수주의와 진보주의가 갈라지는 갈림길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성경 텍스트를 면밀히 해석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때 그 자리에 없었던 우리로서는 알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보주의는 만일 출애굽 당시 그런 초자연적인 기적이 가능했다면
지금은 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느냐,는 이성적인 판단을 선택한 것입니다.
역사적 기록으로서의 텍스트 상의 기표와 기의의 문제를 연구함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역사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가?
그보다도 더 심오한 질문으로 '진리가 무엇이냐'란 빌라도의 질문을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칸트 순수이성비판 이후로 많은 철학자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씨름했습니다.
칸트가 던진 충격 이후, 현상학을 거쳐 비트겐슈타인을 지나면서 결국 언어 문제에 인류가
매달려 온 것도 따지고 보면 진리를 알아내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런데 언어 문제에 매달리면서 인류의 사유는 '더 이상 진리 따위는 상관이 없다'는
이상한 신념을 수면 위로 내밀었다가 들이밀었다가 했습니다.
이런 신념도 철학적 사유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의 선택일 뿐입니다.
세계에 관한 모든 해석이 궁극적으로는 언어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세계를 기술한
것의 배후에 이른다거나 또는 그것을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언어철학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결과가 바로 '홍해가 실제로 갈라졌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상관이 없다'는
견해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사유의 틀'은 선택하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진화론에 관한 것입니다.
다비아 게시판의 창조과학회와 관련한 글과 이어진 댓글을 읽으면서
저는 일상적인 사고로는 그 말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언어학을 이야기하니 언어적 유희의 단계일까도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적 관점에서 창세기를 믿으며 동시에 창조론자들은 정신나간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이야기하니 말입니다.
그러다가 2001년11월6일 조선일보의 판넨베르크 교수와의 대담 기사를 읽고는 어느 정도
의문이 풀렸습니다. (혹 필요하신 분은 제 홈에서 다운받으십시요. http://kdaeil.com/pdf/pannenberg.pdf )
판넨베르크 교수는 창조설과 진화설이 '창발적 진화(emergent evolution)'라는 개념을 통해
화해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판넨베르크 교수가 그렇게 말할 때는 단서가 붙습니다.
즉 "자연도태 원리에 근거한 기계적 과정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고 생명생산이 어떤 새로운 것을
지속적으로 생산한다는 출현과정으로 표현된다면” 진화론을 신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고도 미묘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할 때 진화론은 다음 3단계 정도를 말합니다.
○ 무기물에서 유기물로 합성... 이것은 밀러의 실험이라고 무기물에 전기에너지를 주었을 때 유기물이
합성되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자연법칙이 아니라 인간의 지혜와 지식이 개입된 실험장치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 유기물이 생명체로 진화한다.
○ 단세포 생명체에서 인간까지 진화한다.
그런데 판넨베르크는 이런 기계론적인 진화론은 '저등생물체로부터 고등생물체에로의 진화',
'새로운 개체를 발생케 하는 후성설적 진화'를 근본적으로 설명할 수 없을 뿐더러
성서의 '창발적 진화(emergent evolution)'와 화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판넨베르크는 '창발적 진화(emergent evolution)'의 최고봉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로고스의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진화의 단계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갑자기 발생(emergent)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진화론을 말할 때 그 진화론은 판넨베르크가 말하는 그 진화론이 아닙니다.
판넨베르크의 조선일보 대담에 의하면 과학자들이 '전혀 새로운 것이 갑작스럽게 출현하는
'창발적 진화론을 이야기 한답니다.
이제 진화론이 과학이라면 그 '전혀 새로운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남겠지요.
여기 게시판의 진화론과 창조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종교적 관점에서 창세기를 믿으며
동시에 창조론자들은 정신나간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제가 잘못 들은 것일까요? 다시 가서 읽어 봐도 그렇습니다.
개인적인 느낌은 판넨베르크의 '창발적 진화(emergent evolution)'도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외에 어떤 예를 찾을 수 있는지 의아합니다.
제가 잘못 이해한 것일까요?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15 15:22)
다비아에 오게된 저는 이 공간에서 드러나는 견해에 호기심이 일어났습니다.
기독교인이 어떤 사유의 과정을 거쳐 이런 말을 하게 되는 것일까 궁금해졌다고나 할까.
성서읽기에서 인문학적인 전통을 소중히 여길 것이라는 홈페이지 대문에 걸린 말도
처음에는 수수께끼처럼 느껴졌습니다.
인문학적인 전통을 소중히 여기면서 성경을 보면 어떻게 보인다는 것일까?...
그래서 태생적인 지적 호기심으로 다비아에 실려있는 글들을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읽었습니다.
대학시절에 예수를 믿게 된 저는 장로교, 감리교에서 신앙생활을 했지만
신학적으로 비교적 자유로운 생각을 했다고 스스로 정리합니다.
대학시절에는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텍스트로 성경공부하다가 칼빈주의가 성경을 해석하기에는
그릇이 너무 협소하다는 과격한 주장을 펴 친구와 의가 틀어지기까지 했으니까요.
암튼 다비아에 실린 글들을 읽고 느낀 것은,
글들에서 나타나는 견해들에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고
그것이 또 다양한 방식으로 조율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밖의 시선으로 볼 때 생각이 치밀하지 않으면 나타나기 쉬운 오류나 잘못된 흐름도
있다는 느낌도 듭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잘못 파악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오류를 파악하기 가장 좋은 방법이 '진지한' 토론이니까.)
느낀 점을 두 가지만 우선 거론하면,
1) 첫 번째로 인문학적인 성경 읽기에 대한 소견입니다.
홈페이지 첫머리에 있는 '성서읽기에서 인문학적인 전통을 소중히 여길 것'이라는 말인데,
인문학은 문학,역사학,철학을 일컫고 그 바탕에 언어학이 깔려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인문학적인 전통으로 성경을 본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생각해
봤습니다.
성서 본문은 역사적인 기록이며, 따라서 집필될 당시의 역사적 특이성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바를 해석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이해됩니다.
여기에 텍스트 개념이 등장하여 언어학적인 텍스트들을 주의깊게 분석하여 해석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를 갈라놓는 갈림길치고는 이정표가 그리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런 의도 자체를 두고 보수주의에서도 딴지를 걸 만 이유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정 목사님 말씀처럼 서로 '기본적 사유 틀이 소통되지 않으면 대화는 더디거나 제 자리에 머물거나,
막히거나 옆으로 새'게 됩니다.
그렇다면 기본적 사유의 틀이 달라지는 것은 아마도 이 지점이 아니라
한참 더 지난 어느 지점에서야 나타날 것 같습니다.
모세 출애굽 당시의 성경 기록은 이집트 19왕조에 속한 파라오 람세스 2세
또는 메르나프타하(Merneptah) 시대의 역사적 기록입니다.
우리 시대가 아닌 그 시대의 눈으로 그 사건을 바라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각으로 바라본다고 해서
홍해가 갈라졌다는 기록을 축자적으로 해석하면 넌센스라는 결론을 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 보수주의와 진보주의가 갈라지는 갈림길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성경 텍스트를 면밀히 해석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때 그 자리에 없었던 우리로서는 알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보주의는 만일 출애굽 당시 그런 초자연적인 기적이 가능했다면
지금은 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느냐,는 이성적인 판단을 선택한 것입니다.
역사적 기록으로서의 텍스트 상의 기표와 기의의 문제를 연구함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역사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가?
그보다도 더 심오한 질문으로 '진리가 무엇이냐'란 빌라도의 질문을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칸트 순수이성비판 이후로 많은 철학자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씨름했습니다.
칸트가 던진 충격 이후, 현상학을 거쳐 비트겐슈타인을 지나면서 결국 언어 문제에 인류가
매달려 온 것도 따지고 보면 진리를 알아내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런데 언어 문제에 매달리면서 인류의 사유는 '더 이상 진리 따위는 상관이 없다'는
이상한 신념을 수면 위로 내밀었다가 들이밀었다가 했습니다.
이런 신념도 철학적 사유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의 선택일 뿐입니다.
세계에 관한 모든 해석이 궁극적으로는 언어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세계를 기술한
것의 배후에 이른다거나 또는 그것을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언어철학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결과가 바로 '홍해가 실제로 갈라졌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상관이 없다'는
견해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사유의 틀'은 선택하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진화론에 관한 것입니다.
다비아 게시판의 창조과학회와 관련한 글과 이어진 댓글을 읽으면서
저는 일상적인 사고로는 그 말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언어학을 이야기하니 언어적 유희의 단계일까도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적 관점에서 창세기를 믿으며 동시에 창조론자들은 정신나간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이야기하니 말입니다.
그러다가 2001년11월6일 조선일보의 판넨베르크 교수와의 대담 기사를 읽고는 어느 정도
의문이 풀렸습니다. (혹 필요하신 분은 제 홈에서 다운받으십시요. http://kdaeil.com/pdf/pannenberg.pdf )
판넨베르크 교수는 창조설과 진화설이 '창발적 진화(emergent evolution)'라는 개념을 통해
화해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판넨베르크 교수가 그렇게 말할 때는 단서가 붙습니다.
즉 "자연도태 원리에 근거한 기계적 과정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고 생명생산이 어떤 새로운 것을
지속적으로 생산한다는 출현과정으로 표현된다면” 진화론을 신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고도 미묘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할 때 진화론은 다음 3단계 정도를 말합니다.
○ 무기물에서 유기물로 합성... 이것은 밀러의 실험이라고 무기물에 전기에너지를 주었을 때 유기물이
합성되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자연법칙이 아니라 인간의 지혜와 지식이 개입된 실험장치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 유기물이 생명체로 진화한다.
○ 단세포 생명체에서 인간까지 진화한다.
그런데 판넨베르크는 이런 기계론적인 진화론은 '저등생물체로부터 고등생물체에로의 진화',
'새로운 개체를 발생케 하는 후성설적 진화'를 근본적으로 설명할 수 없을 뿐더러
성서의 '창발적 진화(emergent evolution)'와 화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판넨베르크는 '창발적 진화(emergent evolution)'의 최고봉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로고스의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진화의 단계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갑자기 발생(emergent)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진화론을 말할 때 그 진화론은 판넨베르크가 말하는 그 진화론이 아닙니다.
판넨베르크의 조선일보 대담에 의하면 과학자들이 '전혀 새로운 것이 갑작스럽게 출현하는
'창발적 진화론을 이야기 한답니다.
이제 진화론이 과학이라면 그 '전혀 새로운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남겠지요.
여기 게시판의 진화론과 창조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종교적 관점에서 창세기를 믿으며
동시에 창조론자들은 정신나간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제가 잘못 들은 것일까요? 다시 가서 읽어 봐도 그렇습니다.
개인적인 느낌은 판넨베르크의 '창발적 진화(emergent evolution)'도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외에 어떤 예를 찾을 수 있는지 의아합니다.
제가 잘못 이해한 것일까요?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15 15:22)
2007.05.15 00:07:19
데미 님,
좋은 글, 잘 읽고 많이 배웠습니다.
인문학적 성서읽기는 성서시대로 반드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가지로 설명해야겠지만
줄여서 말한다면 그것은 성서를 '해석'하자는 뜻입니다.
성서를 규범적으로 우리의 삶에 대입하는 게 아니라
그 지평을 가능한 정확하게 포착해서
오늘의 지평에서 풀어내는 것입니다.
횔덜린, 괴테의 시를 해석해야 하듯이
성서도 역시 해석해야 하겠지요.
기보가 해석되어야 하듯이,
도덕경이 새롭게 해석되듯이
성서도 역시 해석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진화론과 창조론은 대립되는 게 아닙니다.
진화론과 소위 창조과학이 대립하는 것이겠지요.
오히려 창조론과 창조과학이 대립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서의 창조 이야기와 조직신학의 창조론은
생물학이 말하는 진화론과 싸울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물론 무신론적 진화론과는 약간 이야기가 달라지겠지요.
그래도 과학은 생물학자들에게 맡겨놓는 게 최선입니다.
그들이 잘못 짚으면 진리 속성상 물러갈 수밖에 없겠지요.
제가 창조과학에 대해서 더 길게 말씀드리기가 어렵군요.
잘 모르기도 하고,
별로 유익한 이야기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세계 신학계에서 전혀 이슈가 되지 않는 문제가
한국교회에는 대단한 것처럼 다루어지는 게 조금 이상하군요.
신학과 과학은 훨씬 근원적인 차원에서 경쟁하고,
협력하면서 상생의 길을 가야합니다.
신학과 철학과의 관계도 똑같겠지요.
주의 은총이.
좋은 글, 잘 읽고 많이 배웠습니다.
인문학적 성서읽기는 성서시대로 반드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가지로 설명해야겠지만
줄여서 말한다면 그것은 성서를 '해석'하자는 뜻입니다.
성서를 규범적으로 우리의 삶에 대입하는 게 아니라
그 지평을 가능한 정확하게 포착해서
오늘의 지평에서 풀어내는 것입니다.
횔덜린, 괴테의 시를 해석해야 하듯이
성서도 역시 해석해야 하겠지요.
기보가 해석되어야 하듯이,
도덕경이 새롭게 해석되듯이
성서도 역시 해석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진화론과 창조론은 대립되는 게 아닙니다.
진화론과 소위 창조과학이 대립하는 것이겠지요.
오히려 창조론과 창조과학이 대립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서의 창조 이야기와 조직신학의 창조론은
생물학이 말하는 진화론과 싸울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물론 무신론적 진화론과는 약간 이야기가 달라지겠지요.
그래도 과학은 생물학자들에게 맡겨놓는 게 최선입니다.
그들이 잘못 짚으면 진리 속성상 물러갈 수밖에 없겠지요.
제가 창조과학에 대해서 더 길게 말씀드리기가 어렵군요.
잘 모르기도 하고,
별로 유익한 이야기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세계 신학계에서 전혀 이슈가 되지 않는 문제가
한국교회에는 대단한 것처럼 다루어지는 게 조금 이상하군요.
신학과 과학은 훨씬 근원적인 차원에서 경쟁하고,
협력하면서 상생의 길을 가야합니다.
신학과 철학과의 관계도 똑같겠지요.
주의 은총이.
2007.05.15 15:03:51
제 글에 대한 정목사님의 친절한 지적에 감사를 드립니다.
휠더린, 괴테의 시가 해석되야 하듯이 성경도 해석되야 한다는 말씀에는 백 번 공감합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의 문제가 자꾸 제기되는 것은 문제가 그 해석에 있다기보다는
'그렇게 해석하게 되는 기반'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컴퓨터가 말썽을 일으키면 우리가 이것저것 해보다 안되면 처음부터 새로 부팅을 하듯이
저는 성경 해석이 서로 상이할 때 되돌아보아야 하는 bootstrapping point가
해석 그 이전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즉 문제는 인문학적인 성경읽기에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뜻입니다.
그리고 진화론에 관해서인데,
진화론과 창조론은 대립되는 게 아니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 말씀 후에 '물론 무신론적 진화론과는 약간 이야기가 달라지겠지요'라고 하셨습니다.
언어는 소통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이 말씀이 오해를 낳는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이야기되어질 때 진화론은 무신론적 진화론을 말하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배우는 진화론이 바로 그 무신론적 진화론이구요.
그 상황에서 진화론과 창조론이 대립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시면
늘상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민감한 상황에서조차 '진화론과 창조론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을 하시면
그렇게 말씀하시는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지 않나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자유의 문제, 즉 결정론적 세계관을 수용할 것인가 열린 세계관을 수용할 것인가,의
문제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진화론을 거부하면 결정론적 세계관을 받아들여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결정론적 세계관과 열린 세계관은 이성 안에서는 당연히 모순 개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세계의 진실은 오히려 모순에 걸쳐 있는 것 같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철학자 니체에 매료되 그를 더 잘 이해할 욕심으로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고
조선일보에 실린 백국원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는데
그 판넨베르크의 니체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란 아포리즘 형식을 빌어 말하기를
'모순을 이해한 자가 진정으로 세계를 이해한 자'라고 했습니다.
저는 결정론적 세계관과 열린 세계관이 우리 이성이 결국 받아들여야 할 모순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서는 우리의 구원이 이미 결정된 것처럼 표현하기도 하고
'스스로 돌이켜 살지니라(겔18:32)' 하고 우리의 자유의지를 강조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이 모순은 성경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인간 이성의 기능 문제에 걸려 있다고
저는 생각하는데요...
휠더린, 괴테의 시가 해석되야 하듯이 성경도 해석되야 한다는 말씀에는 백 번 공감합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의 문제가 자꾸 제기되는 것은 문제가 그 해석에 있다기보다는
'그렇게 해석하게 되는 기반'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컴퓨터가 말썽을 일으키면 우리가 이것저것 해보다 안되면 처음부터 새로 부팅을 하듯이
저는 성경 해석이 서로 상이할 때 되돌아보아야 하는 bootstrapping point가
해석 그 이전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즉 문제는 인문학적인 성경읽기에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뜻입니다.
그리고 진화론에 관해서인데,
진화론과 창조론은 대립되는 게 아니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 말씀 후에 '물론 무신론적 진화론과는 약간 이야기가 달라지겠지요'라고 하셨습니다.
언어는 소통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이 말씀이 오해를 낳는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이야기되어질 때 진화론은 무신론적 진화론을 말하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배우는 진화론이 바로 그 무신론적 진화론이구요.
그 상황에서 진화론과 창조론이 대립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시면
늘상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민감한 상황에서조차 '진화론과 창조론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을 하시면
그렇게 말씀하시는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지 않나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자유의 문제, 즉 결정론적 세계관을 수용할 것인가 열린 세계관을 수용할 것인가,의
문제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진화론을 거부하면 결정론적 세계관을 받아들여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결정론적 세계관과 열린 세계관은 이성 안에서는 당연히 모순 개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세계의 진실은 오히려 모순에 걸쳐 있는 것 같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철학자 니체에 매료되 그를 더 잘 이해할 욕심으로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고
조선일보에 실린 백국원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는데
그 판넨베르크의 니체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란 아포리즘 형식을 빌어 말하기를
'모순을 이해한 자가 진정으로 세계를 이해한 자'라고 했습니다.
저는 결정론적 세계관과 열린 세계관이 우리 이성이 결국 받아들여야 할 모순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서는 우리의 구원이 이미 결정된 것처럼 표현하기도 하고
'스스로 돌이켜 살지니라(겔18:32)' 하고 우리의 자유의지를 강조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이 모순은 성경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인간 이성의 기능 문제에 걸려 있다고
저는 생각하는데요...
2007.05.15 15:09:06
섬돌님, 다시 만나게 되니 반갑습니다~
성경을 두고 축자적인 해석이란 말을 쓸 때 그 말하는 사람에 따라 의미의 파장이 넓은 것 같습니다.
원래 축자적인 해석이란 말은 일점일획이란 말에서 유래된 것 같은데 일단 다양한 번역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번역본 성경을 두고 일점일획이란 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우선 자기모순에 빠지는 일이니까
처음 쓰여진 언어로서의 성경을 두고 축자적이란 말을 사용할 것인가 아닌가가 문제가 되겠지요.
그런데 처음에는 그런 의미로부터 출발한 '축자적'이란 말이 '나사로를 살리셨다'라는 사건에 적용되면
죽은자를 살렸다는 사건이 진실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로 축자적 해석이란 말의 쓰임새가 바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혼동이 결국 서로를 이간질시킨다고 생각합니다.
섬돌님이 말씀하시는 '무한한 신성을 인간의 말로 표현할때 과연 유한한 인간이 신성을 온전히 말에
담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오로지 전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김제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왜 시해했는가 하는 문제를 말할 때는 언어 문제가 등장하지만
누가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총을 발사했느냐,의 문제에는 언어 문제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때에도 언어 유희가 등장할 수는 있지만 진실을 감추기 위한 기만일 뿐입니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이나 데리다에 이르면 이것마저 흔들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누구도 비트겐슈타인이나 데리다를 완벽히 이해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들 이론 자체가 그것을 방해하고 그 노력을 기만하니까요.
비트겐슈타인을 수강한 두 수강생이 <길잃은 시인>이란 제목으로 그에 관한 시를 지었다지 않습니까?
어느 대학 철학과에서 우연히 자신을 발견하게 된 길 잃은 예술가 비트겐슈타인이여,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천재가 아닌 우리는 그들의 사상을 따라가다가 맘에 드는 문구를 붙들고 자신의 세계관을 구축하면서 헤맵니다.
그러나 그 사이 천재인 그들은 그 자리를 벗어나 저만치 가서 이전에 자신이 했던 말을 부정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이나 데리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결국 수사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는 것입니다.
보다 근원적인 삶의 어떤 국면은 언제나 언어 바깥에 놓여 있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지금 포스트모더니즘이 점차 사람들의 관심권을 벗어나고 인문학이 위기니 어쩌니 하는 것은
결국 자업자득인 면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지성사를 생각할 때 자업자득이라기 보다 어쩔 수 없는 국면인지도 모르지만...
후기 구조주의자로서 질 들레즈 같은 사람이 칸트의 비판적 계승자로 나선 것은 칸트의 비판철학 이후
언어 분석에 물두하게 된 철학에 대한 자기 반성적인 요소가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들뢰즈는 이성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칸트적 주제를 다시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칸트의 비판철학에서도 인식론은 결국 실천 즉 인식을 넘어선 믿음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성경을 두고 축자적인 해석이란 말을 쓸 때 그 말하는 사람에 따라 의미의 파장이 넓은 것 같습니다.
원래 축자적인 해석이란 말은 일점일획이란 말에서 유래된 것 같은데 일단 다양한 번역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번역본 성경을 두고 일점일획이란 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우선 자기모순에 빠지는 일이니까
처음 쓰여진 언어로서의 성경을 두고 축자적이란 말을 사용할 것인가 아닌가가 문제가 되겠지요.
그런데 처음에는 그런 의미로부터 출발한 '축자적'이란 말이 '나사로를 살리셨다'라는 사건에 적용되면
죽은자를 살렸다는 사건이 진실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로 축자적 해석이란 말의 쓰임새가 바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혼동이 결국 서로를 이간질시킨다고 생각합니다.
섬돌님이 말씀하시는 '무한한 신성을 인간의 말로 표현할때 과연 유한한 인간이 신성을 온전히 말에
담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오로지 전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김제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왜 시해했는가 하는 문제를 말할 때는 언어 문제가 등장하지만
누가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총을 발사했느냐,의 문제에는 언어 문제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때에도 언어 유희가 등장할 수는 있지만 진실을 감추기 위한 기만일 뿐입니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이나 데리다에 이르면 이것마저 흔들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누구도 비트겐슈타인이나 데리다를 완벽히 이해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들 이론 자체가 그것을 방해하고 그 노력을 기만하니까요.
비트겐슈타인을 수강한 두 수강생이 <길잃은 시인>이란 제목으로 그에 관한 시를 지었다지 않습니까?
어느 대학 철학과에서 우연히 자신을 발견하게 된 길 잃은 예술가 비트겐슈타인이여,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천재가 아닌 우리는 그들의 사상을 따라가다가 맘에 드는 문구를 붙들고 자신의 세계관을 구축하면서 헤맵니다.
그러나 그 사이 천재인 그들은 그 자리를 벗어나 저만치 가서 이전에 자신이 했던 말을 부정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이나 데리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결국 수사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는 것입니다.
보다 근원적인 삶의 어떤 국면은 언제나 언어 바깥에 놓여 있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지금 포스트모더니즘이 점차 사람들의 관심권을 벗어나고 인문학이 위기니 어쩌니 하는 것은
결국 자업자득인 면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지성사를 생각할 때 자업자득이라기 보다 어쩔 수 없는 국면인지도 모르지만...
후기 구조주의자로서 질 들레즈 같은 사람이 칸트의 비판적 계승자로 나선 것은 칸트의 비판철학 이후
언어 분석에 물두하게 된 철학에 대한 자기 반성적인 요소가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들뢰즈는 이성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칸트적 주제를 다시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칸트의 비판철학에서도 인식론은 결국 실천 즉 인식을 넘어선 믿음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2007.05.15 17:09:15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일주일동안 정학당하고 자숙하고 돌아왔는데 때마침 문제학생들이 일을 벌여놓으셨네요(?) ㅎㅎㅎ 하지만 여전히 흥미롭습니다. 저두 막 글을 쓰고 싶은데... 위의 정목사님 글과 예전에 운영자님이 보내신 편지에 담긴 글들이 생각이 나네요...여긴 인문학적인 성서읽기를 하는 곳이라구요...따라서 우리가 하는 담론들은 실상 그것과는 그리 직접적인 연계가 되지 않는다는 뉘앙스를 받았습니다. 우리 사유가 인문학적일 순 있지만 인문학으로 성서읽기는 아니잖아요? 데미님은 끊임없이 인문학적으로 성서읽는 것 자체에 대한 심층적 기제를 문제삼으시는, 일종의 방법론적 문제제기인 것 같고, 이곳 분위기는 그러한 것은 다비아의 공통주제가 아니라는 것 같고....ㅋㅋㅋ운영모토와 어긋나는 일이라면 하지않아야 하는 것이 손님된 도리입니다만...
(아, 다른 얘기지만 제대하면 오프라인 성서모임은 꼭 나갈 겁니다!!! 회비도 내구요...ㅎㅎ^^;)
그!래!도! 조심스레 담론을 형성하는 것은 어떨까하는 마음으로 타진해봅니다. 이 글로요.
데미님이 쓰신 글에 대한 답글을 오늘 밤에 다시 쓰죠.
소심해져서 바로 글 못쓰고 잠깐 반추해봅니다. ^^;
(아, 다른 얘기지만 제대하면 오프라인 성서모임은 꼭 나갈 겁니다!!! 회비도 내구요...ㅎㅎ^^;)
그!래!도! 조심스레 담론을 형성하는 것은 어떨까하는 마음으로 타진해봅니다. 이 글로요.
데미님이 쓰신 글에 대한 답글을 오늘 밤에 다시 쓰죠.
소심해져서 바로 글 못쓰고 잠깐 반추해봅니다. ^^;
2007.05.15 17:56:59
voltaire님 반갑습니다. 정학 당하고... 문제학생들이 일을 벌이고...분위기가 이상하게 흐릅니다.~^^
우리들이 하는 담론이 동떨어진 것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 산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특정 주제를 연구한다면 모르지만 인문학적인 성서읽기는 이미
그 상황을 벗어난 듯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방법으로 성경을 봐야 한다는 강한 주장으로 모습을 드러낸다면 이번에는
그 주장들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살펴보는 것은 당연한 순서가 아니겠는가 싶은 거죠.
이것이 발전의 원리이기도 하고.
또 이것이 제게는 기본적으로 내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닐까 검증하는 과정이기도 하구요.
어디 다른 곳에서 이런 담론을 펼칠 곳이 없고,
다행이 여기는 어느 정도 환영하는 것 같기도 하고..(나만의 착각?)
우리들이 하는 담론이 동떨어진 것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 산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특정 주제를 연구한다면 모르지만 인문학적인 성서읽기는 이미
그 상황을 벗어난 듯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방법으로 성경을 봐야 한다는 강한 주장으로 모습을 드러낸다면 이번에는
그 주장들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살펴보는 것은 당연한 순서가 아니겠는가 싶은 거죠.
이것이 발전의 원리이기도 하고.
또 이것이 제게는 기본적으로 내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닐까 검증하는 과정이기도 하구요.
어디 다른 곳에서 이런 담론을 펼칠 곳이 없고,
다행이 여기는 어느 정도 환영하는 것 같기도 하고..(나만의 착각?)
2007.05.15 18:30:13
뭐, 저도 데미님 말씀에 공감합니다만 다른 분들 (특히 운영진)입장에선 그게 아닌 것 같기도 하고...운영하는 입장으로 생각해보니 또 충분히 공감도 가고....그냥 멋없이 시작하려니깐 괜히 쑥스러워서 써본 겁니다..하하하...분위기 좋게 시작하려구요...^^; 그럼 즐건 저녁식사 되시길~
2007.05.15 22:52:28
1) 첫 번째로 인문학적인 성경 읽기에 대한 소견과 정목사님의 답변을 읽고
- 1번 사항에 관해서는 제가 전술한 "각각의 담론의 지향점 차이"가 명확히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인문학적 성서해석의 실천적 작업과 그것의 방법론적 정당성에 대한 고민.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정목사님은 방법론적 고민과 관련해 공리공논으로 빠질 위험이 있는 (정목사님 개인의 생각이신 것 같지만) 몇몇 "삼천포행" 담론 주제에 대해서 거부감과 우려를 나타내시는 것 같습니다. 창조과학 논쟁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생각하시는 듯 합니다. 얼만큼이나 그 외연이 일치할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정목사님의 입장에 동조하면서 몇가지 덧붙이자면, (순전히 사족입니다)
창조과학에 관한 공론화 문제는 유럽의 경우 별 문제가 안되지만 북미지역에서는 "정치적"문제로 비화가 된 상태입니다. 보수기독교 단체들과 과학자 연합진영에서 각 주의 과학 교과서 채택문제를 두고 팽팽한 로비가 지금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더 웃긴 사례를 들자면, 대선주자들을 모아놓고 창조론이냐 진화론이냐를 물어보는 것은 하나의 관례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유권자들은 "사실"의 문제를 놓고 "신념"을 결정하는, 코미디라고 보기엔 너무 심각한 (대통령 선거) 행위를 강요당하고 있는 겁니다. 미국 같은 나라에 아직 근대성이 필요하다면 오버인가요? 근대성이란 말이 거부감을 준다면 과학지식의 대중화, 탈권위화가 아직 필요하다는 겁니다. 물론, 그것은 바로 올바른 과학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져야겠죠.
<<우리는 어떻게 역사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가?
그보다도 더 심오한 질문으로 '진리가 무엇이냐'란 빌라도의 질문을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칸트 순수이성비판 이후로 많은 철학자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씨름했습니다.
칸트가 던진 충격 이후, 현상학을 거쳐 비트겐슈타인을 지나면서 결국 언어 문제에 인류가
매달려 온 것도 따지고 보면 진리를 알아내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런데 언어 문제에 매달리면서 인류의 사유는 '더 이상 진리 따위는 상관이 없다'는
이상한 신념을 수면 위로 내밀었다가 들이밀었다가 했습니다.
이런 신념도 철학적 사유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의 선택일 뿐입니다.
세계에 관한 모든 해석이 궁극적으로는 언어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세계를 기술한
것의 배후에 이른다거나 또는 그것을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언어철학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결과가 바로 '홍해가 실제로 갈라졌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상관이 없다'는
견해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사유의 틀'은 선택하는 것입니다.>>
- 이 부분은 제가 얕은 지식으로나마 좀 구분을 할 필요가 잇어서 인용을 그대로 했는데요. 진리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철학분야의 존재론적인 질문입니다. 여기에는 진리대응설, 진리정합설, 진리실용설 등으로 나누어질 수 잇죠.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진리가 존재하는 방식에 관한 존재론적 질문이고, 예로 드신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이나 현상학은 "무엇"이냐는 질문 보다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하는 인식론적 물음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겠죠. 언어문제에 천착한 철학이 나오게된 배경은, 진리가 무엇인가?가 아니라 진리를 어떻게 인식하지?라는 질문에서 나온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오해하시는 해체주의적 사고는 비트겐슈타인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제 은사이신 연세대학교 이승종 교수는 비트겐슈타인과 데리다에 관한 비교 논문으로 뉴욕대학교에서 논문상을 타셨습니다. 책으로도 나왓으니 일독을 권해드립니다) 그는 우리가 언어라는 사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끊임없이 잘못된 질문들을 던질 것이며 그 질못된 질문들은 결국 우리를 혼돈에 빠뜨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을 한거죠.
"어느날 사자가 갑자기 말을 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사자의 사유체계와 우리의 사유체계가 다른이상 우리는 사자가 말을 한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할 것이란 거죠. 그리고 그 사유체계는 다름아닌 언어라는 감옥입니다. 물론 후기비트겐슈타인은 가족유사성이론을 들어 진리인식의 비본질성에 관해 언급하기도 했습니다만 그것이 진리는 없다식의 회의주의나 진리 따위는 아무거나이거나 혹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식의 해체주의 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비트겐슈인은 다만 진리 인식 방법이 플라톤적인 절대실재를 파악하는 것으로는 힘들것이라는 입장을 가족유사성 이론을 통해(그러나 실제로는 착각인)얘기한 것 뿐입니다. 이러한 철학사적 사실을 간과하신 결과가 바로
"세계에 관한 모든 해석이 궁극적으로는 언어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세계를 기술한 것의 배후에 이른다거나 또는 그것을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언어철학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결과가 바로 '홍해가 실제로 갈라졌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상관이 없다'는 견해가 아닐까 싶습니다." 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되겠죠.
(뒤에 포스트모더니즘의 과격분자들이 그랫던 것 처럼) 비트겐슈타인은 "세계를 기술한 것의 배후"를 포기한 적이 절대로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TRACTATUS 말미에 "내가 지금 이 글에서 논한 것 보다 논하지 않은 것들을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후기에 그가 찾은 다른 방법은 진리 구획기준의 문제 즉, 언어의 화용론적 성향을 연구하는 것이었죠. (후에 옥스포드 일상언어학파가 등장합니다. 말과 행위라는 J.L.AUSTIN저서가 대표적입니다) 언어가 사용되는 생생한 삶의 현장에서, 심층부에 속하는 일상언어들간의 규칙, 즉 게임규칙을 연구하면 진리를 보는데 색안경으로 작용하는 언어라는 굴레를 파악하는 것이 수월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죠. 그것은 곧 인간이 진리를 인식하는데 사용하는 언어와 행위를 연구하는 것으로서 진리인식의 메타적인 학적수행이 되겠죠. 얘기가 길어졌지만, 요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적 기반이 "홍해의 갈라짐 사건이 실재했는지 하지않았는지에 대해 상관없다고 말하는 근거가 된다"는 주장이 허술하다는 겁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진리인식론에 따르면 "홍해의 갈라짐 사건을 기술하는 인간 언어의 특성들과 행위들을 연구하면 인간이 사용하는 진리인식의 기준과 방법을 잘 파악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것이 되겠지요.
그리고 덧붙여 말씀드리면 "사유의 틀은 본질적으로 선택"이라는 측은 파이어아벤트의 이론이구요, 진리는 상호간 규약(곧, 측정)이라는 측면이 뒤앙-콰인의 논제입니다. 모두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받긴 했죠.
데미님이 만약 파이어아벤트의 이론을 등에 업고 그를 근거로 삼아 얘기하신다고 해도 그것이 성서해석의 각각에 대한 고유한 사고의 틀을 만드는 근거라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어보입니다. 오히려 규약주의적 측면이 강하다고 말할 수 있는바, 그것이 곧 해석이나 전례에서 내려오는 (일관되는 것일경우)"전통"과 (시대마다 달라지는 경우)"역사"라고 할 수 있겠죠. 데미 님이 주장하시는 바가 틀리다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입장 중에서 하나이기 때문에 그것만이 어떤 주장의 요소나 전적인 근거라고 하기엔 논리가 빈약하다는 점을 말씀드리려고 햇던 겁니다.
사족입니다만 비트겐슈타인은 현상학의 후설과 마찬가지로 대륙철학과 영미철학 양쪽 모두에 영향을 준 대철학자들로 곡해가 많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비트겐슈타인의 경우 포스트모더니즘 진영에서 많이 왜곡되고 있는데 가능한 특정 관점의 2차자료보다는 비트겐슈타인 철학 자체에 관한 공부가 필요하겠죠.
2) 두 번째로 진화론에 관한 것입니다.
<<○ 무기물에서 유기물로 합성... 이것은 밀러의 실험이라고 무기물에 전기에너지를 주었을 때 유기물이
합성되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자연법칙이 아니라 인간의 지혜와 지식이 개입된 실험장치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 유기물이 생명체로 진화한다.
○ 단세포 생명체에서 인간까지 진화한다.
그런데 판넨베르크는 이런 기계론적인 진화론은 '저등생물체로부터 고등생물체에로의 진화',
'새로운 개체를 발생케 하는 후성설적 진화'를 근본적으로 설명할 수 없을 뿐더러
성서의 '창발적 진화(emergent evolution)'와 화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판넨베르크는 '창발적 진화(emergent evolution)'의 최고봉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로고스의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진화의 단계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갑자기 발생(emergent)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진화론을 말할 때 그 진화론은 판넨베르크가 말하는 그 진화론이 아닙니다.
판넨베르크의 조선일보 대담에 의하면 과학자들이 '전혀 새로운 것이 갑작스럽게 출현하는
'창발적 진화론을 이야기 한답니다.
이제 진화론이 과학이라면 그 '전혀 새로운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남겠지요.
여기 게시판의 진화론과 창조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종교적 관점에서 창세기를 믿으며
동시에 창조론자들은 정신나간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제가 잘못 들은 것일까요? 다시 가서 읽어 봐도 그렇습니다.>>
-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창발론이라는 단어와 진화론의 두가지 입장입니다. 창발론부터 얘기하자면, 창발론의 개념은 사실 베르그송의 창작물입니다. 그것이 베르그송의 거대한 존재론 (후에 화이트헤드 존재론의 전범이 되지요. 베르그송의 이해는 화이트헤드 철학의 필수입니다. 많은 신학생들이 과정신학을 논하는데 앞서 베르그송을 연구하지 않는 세태는 참 안타깝습니다. 국내 최고의 전문가이신 은사님인 문창옥 교수님도 첫 논문은 화이트헤드가 아닌 베르그송이었습니다)의 ELAN VITAL이란 개념에서 나온 생명체의 창발성 개념이죠. 그런데 이 개념은 좀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오독되거나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거든요. 가령 진화론에서의 창발성은 흔히들 오해하시는 것처럼 진화론 전체에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화론의 양축인 단속평형설과 점진적 진화설 중에 단속평형설에 무게가 실린 개념이죠.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단속평형설은 리차드 도킨스의 점진적 진화설에 의해 구성력이 좀 떨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아직 완전히 기운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유전학과 분자생물학적 결과들은 리처드 도킨스의 손을 들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판넨베르그가 말한, 그리고 창발적 진화론이라고 표현된 단속평형설이 틀렸다고 결론이 날 경우, 판넨베르그의 자연신학적 고찰은 "줄을 잘 못 선 것"일까요? 다른 개념의 창발성은 좀 더 문학적인 표현으로서 ELAN VITAL 그 자체를 있게하는 원동력입니다. 문명사에 대한 화이트헤드적 진단에서 사용되는 개념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죠. (문명의 모험) 그것들간의 뉘앙스 차이는 우리가 금새 알 수 잇을 정도로 레벨이 다른 개념입니다. 판넨베르그의 로고스에 대한 창발적 진화개념은 후자가 아닐런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것은 다른 차원의 창발성 개념이므로 받아들일 수 잇는 여지가 (인문학적 사유에서는) 충분히 잇지만, 만약 전자의 개념으로 받아들인다면 먼저 단속평형설에 대한 과학적 지지입장을 가져야 할 겁니다. 선행문제 해결의 오류인 거죠.
끝으로 사족하나 더 달겠습니다. 리처드 도킨스와 스티븐 제이 굴드의 진화논쟁은 이제 도킨스의 푸들이라는 다니엘 데넷과 신진 이원론자들의(정신-육체)의 의식논쟁으로 옮겨갔습니다. 진화라는 거대한 테마에서 "의식"이라는 중요한 주제가 새롭게 떠오른 것이죠. 이것은 어떻게 단세포생물에서 고등생물로의 진화가 가능한지, 진화에 따른 결과물로 의식이 생긴 건지, 의식에 따라 생물의 종별로 영혼이란 것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열쇠입니다.
창발적이란 단어가 영혼과 의식에 관련된 것이라면 당연히 이러한 문제가 "이슈"로 떠올라야 합니다. 왜 판넨베르그가 창발벅이란 단어를 그렇게 사용했는지 한 번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판넨베르그가 단속편형설지지자가 아니라면 말이죠.
- 1번 사항에 관해서는 제가 전술한 "각각의 담론의 지향점 차이"가 명확히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인문학적 성서해석의 실천적 작업과 그것의 방법론적 정당성에 대한 고민.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정목사님은 방법론적 고민과 관련해 공리공논으로 빠질 위험이 있는 (정목사님 개인의 생각이신 것 같지만) 몇몇 "삼천포행" 담론 주제에 대해서 거부감과 우려를 나타내시는 것 같습니다. 창조과학 논쟁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생각하시는 듯 합니다. 얼만큼이나 그 외연이 일치할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정목사님의 입장에 동조하면서 몇가지 덧붙이자면, (순전히 사족입니다)
창조과학에 관한 공론화 문제는 유럽의 경우 별 문제가 안되지만 북미지역에서는 "정치적"문제로 비화가 된 상태입니다. 보수기독교 단체들과 과학자 연합진영에서 각 주의 과학 교과서 채택문제를 두고 팽팽한 로비가 지금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더 웃긴 사례를 들자면, 대선주자들을 모아놓고 창조론이냐 진화론이냐를 물어보는 것은 하나의 관례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유권자들은 "사실"의 문제를 놓고 "신념"을 결정하는, 코미디라고 보기엔 너무 심각한 (대통령 선거) 행위를 강요당하고 있는 겁니다. 미국 같은 나라에 아직 근대성이 필요하다면 오버인가요? 근대성이란 말이 거부감을 준다면 과학지식의 대중화, 탈권위화가 아직 필요하다는 겁니다. 물론, 그것은 바로 올바른 과학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져야겠죠.
<<우리는 어떻게 역사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가?
그보다도 더 심오한 질문으로 '진리가 무엇이냐'란 빌라도의 질문을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칸트 순수이성비판 이후로 많은 철학자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씨름했습니다.
칸트가 던진 충격 이후, 현상학을 거쳐 비트겐슈타인을 지나면서 결국 언어 문제에 인류가
매달려 온 것도 따지고 보면 진리를 알아내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런데 언어 문제에 매달리면서 인류의 사유는 '더 이상 진리 따위는 상관이 없다'는
이상한 신념을 수면 위로 내밀었다가 들이밀었다가 했습니다.
이런 신념도 철학적 사유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의 선택일 뿐입니다.
세계에 관한 모든 해석이 궁극적으로는 언어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세계를 기술한
것의 배후에 이른다거나 또는 그것을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언어철학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결과가 바로 '홍해가 실제로 갈라졌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상관이 없다'는
견해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사유의 틀'은 선택하는 것입니다.>>
- 이 부분은 제가 얕은 지식으로나마 좀 구분을 할 필요가 잇어서 인용을 그대로 했는데요. 진리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철학분야의 존재론적인 질문입니다. 여기에는 진리대응설, 진리정합설, 진리실용설 등으로 나누어질 수 잇죠.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진리가 존재하는 방식에 관한 존재론적 질문이고, 예로 드신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이나 현상학은 "무엇"이냐는 질문 보다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하는 인식론적 물음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겠죠. 언어문제에 천착한 철학이 나오게된 배경은, 진리가 무엇인가?가 아니라 진리를 어떻게 인식하지?라는 질문에서 나온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오해하시는 해체주의적 사고는 비트겐슈타인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제 은사이신 연세대학교 이승종 교수는 비트겐슈타인과 데리다에 관한 비교 논문으로 뉴욕대학교에서 논문상을 타셨습니다. 책으로도 나왓으니 일독을 권해드립니다) 그는 우리가 언어라는 사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끊임없이 잘못된 질문들을 던질 것이며 그 질못된 질문들은 결국 우리를 혼돈에 빠뜨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을 한거죠.
"어느날 사자가 갑자기 말을 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사자의 사유체계와 우리의 사유체계가 다른이상 우리는 사자가 말을 한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할 것이란 거죠. 그리고 그 사유체계는 다름아닌 언어라는 감옥입니다. 물론 후기비트겐슈타인은 가족유사성이론을 들어 진리인식의 비본질성에 관해 언급하기도 했습니다만 그것이 진리는 없다식의 회의주의나 진리 따위는 아무거나이거나 혹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식의 해체주의 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비트겐슈인은 다만 진리 인식 방법이 플라톤적인 절대실재를 파악하는 것으로는 힘들것이라는 입장을 가족유사성 이론을 통해(그러나 실제로는 착각인)얘기한 것 뿐입니다. 이러한 철학사적 사실을 간과하신 결과가 바로
"세계에 관한 모든 해석이 궁극적으로는 언어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세계를 기술한 것의 배후에 이른다거나 또는 그것을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언어철학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결과가 바로 '홍해가 실제로 갈라졌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상관이 없다'는 견해가 아닐까 싶습니다." 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되겠죠.
(뒤에 포스트모더니즘의 과격분자들이 그랫던 것 처럼) 비트겐슈타인은 "세계를 기술한 것의 배후"를 포기한 적이 절대로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TRACTATUS 말미에 "내가 지금 이 글에서 논한 것 보다 논하지 않은 것들을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후기에 그가 찾은 다른 방법은 진리 구획기준의 문제 즉, 언어의 화용론적 성향을 연구하는 것이었죠. (후에 옥스포드 일상언어학파가 등장합니다. 말과 행위라는 J.L.AUSTIN저서가 대표적입니다) 언어가 사용되는 생생한 삶의 현장에서, 심층부에 속하는 일상언어들간의 규칙, 즉 게임규칙을 연구하면 진리를 보는데 색안경으로 작용하는 언어라는 굴레를 파악하는 것이 수월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죠. 그것은 곧 인간이 진리를 인식하는데 사용하는 언어와 행위를 연구하는 것으로서 진리인식의 메타적인 학적수행이 되겠죠. 얘기가 길어졌지만, 요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적 기반이 "홍해의 갈라짐 사건이 실재했는지 하지않았는지에 대해 상관없다고 말하는 근거가 된다"는 주장이 허술하다는 겁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진리인식론에 따르면 "홍해의 갈라짐 사건을 기술하는 인간 언어의 특성들과 행위들을 연구하면 인간이 사용하는 진리인식의 기준과 방법을 잘 파악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것이 되겠지요.
그리고 덧붙여 말씀드리면 "사유의 틀은 본질적으로 선택"이라는 측은 파이어아벤트의 이론이구요, 진리는 상호간 규약(곧, 측정)이라는 측면이 뒤앙-콰인의 논제입니다. 모두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받긴 했죠.
데미님이 만약 파이어아벤트의 이론을 등에 업고 그를 근거로 삼아 얘기하신다고 해도 그것이 성서해석의 각각에 대한 고유한 사고의 틀을 만드는 근거라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어보입니다. 오히려 규약주의적 측면이 강하다고 말할 수 있는바, 그것이 곧 해석이나 전례에서 내려오는 (일관되는 것일경우)"전통"과 (시대마다 달라지는 경우)"역사"라고 할 수 있겠죠. 데미 님이 주장하시는 바가 틀리다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입장 중에서 하나이기 때문에 그것만이 어떤 주장의 요소나 전적인 근거라고 하기엔 논리가 빈약하다는 점을 말씀드리려고 햇던 겁니다.
사족입니다만 비트겐슈타인은 현상학의 후설과 마찬가지로 대륙철학과 영미철학 양쪽 모두에 영향을 준 대철학자들로 곡해가 많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비트겐슈타인의 경우 포스트모더니즘 진영에서 많이 왜곡되고 있는데 가능한 특정 관점의 2차자료보다는 비트겐슈타인 철학 자체에 관한 공부가 필요하겠죠.
2) 두 번째로 진화론에 관한 것입니다.
<<○ 무기물에서 유기물로 합성... 이것은 밀러의 실험이라고 무기물에 전기에너지를 주었을 때 유기물이
합성되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자연법칙이 아니라 인간의 지혜와 지식이 개입된 실험장치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 유기물이 생명체로 진화한다.
○ 단세포 생명체에서 인간까지 진화한다.
그런데 판넨베르크는 이런 기계론적인 진화론은 '저등생물체로부터 고등생물체에로의 진화',
'새로운 개체를 발생케 하는 후성설적 진화'를 근본적으로 설명할 수 없을 뿐더러
성서의 '창발적 진화(emergent evolution)'와 화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판넨베르크는 '창발적 진화(emergent evolution)'의 최고봉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로고스의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진화의 단계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갑자기 발생(emergent)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진화론을 말할 때 그 진화론은 판넨베르크가 말하는 그 진화론이 아닙니다.
판넨베르크의 조선일보 대담에 의하면 과학자들이 '전혀 새로운 것이 갑작스럽게 출현하는
'창발적 진화론을 이야기 한답니다.
이제 진화론이 과학이라면 그 '전혀 새로운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남겠지요.
여기 게시판의 진화론과 창조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종교적 관점에서 창세기를 믿으며
동시에 창조론자들은 정신나간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제가 잘못 들은 것일까요? 다시 가서 읽어 봐도 그렇습니다.>>
-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창발론이라는 단어와 진화론의 두가지 입장입니다. 창발론부터 얘기하자면, 창발론의 개념은 사실 베르그송의 창작물입니다. 그것이 베르그송의 거대한 존재론 (후에 화이트헤드 존재론의 전범이 되지요. 베르그송의 이해는 화이트헤드 철학의 필수입니다. 많은 신학생들이 과정신학을 논하는데 앞서 베르그송을 연구하지 않는 세태는 참 안타깝습니다. 국내 최고의 전문가이신 은사님인 문창옥 교수님도 첫 논문은 화이트헤드가 아닌 베르그송이었습니다)의 ELAN VITAL이란 개념에서 나온 생명체의 창발성 개념이죠. 그런데 이 개념은 좀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오독되거나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거든요. 가령 진화론에서의 창발성은 흔히들 오해하시는 것처럼 진화론 전체에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화론의 양축인 단속평형설과 점진적 진화설 중에 단속평형설에 무게가 실린 개념이죠.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단속평형설은 리차드 도킨스의 점진적 진화설에 의해 구성력이 좀 떨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아직 완전히 기운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유전학과 분자생물학적 결과들은 리처드 도킨스의 손을 들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판넨베르그가 말한, 그리고 창발적 진화론이라고 표현된 단속평형설이 틀렸다고 결론이 날 경우, 판넨베르그의 자연신학적 고찰은 "줄을 잘 못 선 것"일까요? 다른 개념의 창발성은 좀 더 문학적인 표현으로서 ELAN VITAL 그 자체를 있게하는 원동력입니다. 문명사에 대한 화이트헤드적 진단에서 사용되는 개념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죠. (문명의 모험) 그것들간의 뉘앙스 차이는 우리가 금새 알 수 잇을 정도로 레벨이 다른 개념입니다. 판넨베르그의 로고스에 대한 창발적 진화개념은 후자가 아닐런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것은 다른 차원의 창발성 개념이므로 받아들일 수 잇는 여지가 (인문학적 사유에서는) 충분히 잇지만, 만약 전자의 개념으로 받아들인다면 먼저 단속평형설에 대한 과학적 지지입장을 가져야 할 겁니다. 선행문제 해결의 오류인 거죠.
끝으로 사족하나 더 달겠습니다. 리처드 도킨스와 스티븐 제이 굴드의 진화논쟁은 이제 도킨스의 푸들이라는 다니엘 데넷과 신진 이원론자들의(정신-육체)의 의식논쟁으로 옮겨갔습니다. 진화라는 거대한 테마에서 "의식"이라는 중요한 주제가 새롭게 떠오른 것이죠. 이것은 어떻게 단세포생물에서 고등생물로의 진화가 가능한지, 진화에 따른 결과물로 의식이 생긴 건지, 의식에 따라 생물의 종별로 영혼이란 것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열쇠입니다.
창발적이란 단어가 영혼과 의식에 관련된 것이라면 당연히 이러한 문제가 "이슈"로 떠올라야 합니다. 왜 판넨베르그가 창발벅이란 단어를 그렇게 사용했는지 한 번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판넨베르그가 단속편형설지지자가 아니라면 말이죠.
2007.05.16 00:13:27
볼테르 님의 글쓰기는 화려하군요.
심리학을 전공하신다고 했는데,
철학, 신학, 물리생물학, 사회학 등등,
모든 전문분야를 꿰뚫고 있네요.
논리적 사유와 글쓰기도 제가 보기에는 아주 뛰어나네요.
내가 따라가기 힘들 정도니까요.
가능한 약간 '덜' 전문적인 용어와 개념으로 글을 쓴다면
다비안들에게 큰 도움이 되겠네요.
앞으로 기대가 큽니다.
데미 님의 글을 읽고
앞으로 많은 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구요.
한 가지만 말씀드려도 되겠지요.
진화론과 창조론을 말할 때
왜 진화론을 반드시 무신론적인 이론으로 전제하시는 걸까요?
학생들이 학교에서 그런 진화론을 배운다구요?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까지 그걸 전제하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제가 보기에 진화론은 그냥 생물학의 이론입니다.
물리학에서 천동설로부터 지동설로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났듯이
생물학에서 완성된 창조론으로부터 진화적 창조론으로(이게 말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난 겁니다.
태양이 돌다가 지구가 돈다고 하면 하나님의 창조능력이 손상되나요?
마찬가지로 생명체가 진화된다고 해서 하나님의 창조능력이 손상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대목은 쓸데 없이 진화론 자체와 소모적인 논쟁을 벌일 것이 아니라
진화론이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신학이 해야 할 일이지요.
이게 과학만능주의는 아닙니다.
과학은 과거와 현재의 세계를 설명하는 거라면
신학은 종말의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겟지요.
과학과 신학이 만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소위 창조과학은 그 지점을 잘못 잡은 겁니다.
참고적으로 아래에 판넨베르크의 글을 인용해서 실었습니다.
가능하다면 그의 책을 전부 읽은 것도 좋겠지요.
(판넨베르크, 박일준 역, 자연신학, 2장 “창조론과 현대과학”, 결론부분, 84,85쪽)
본 장에서 필자는 자연과학자들이 제시하는 자연에 대한 기술을 철저히 받아들이는 것이 신학자들에게 능사는 아니라는 사실을 제시했다. 사실 기존 분야들의 한계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과학자들의 보고보다 더 순박한 것도 없다. 하느님의 실재는 자연을 정의하는 인수(因數)이며, 이 사실을 무시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사물들의 가장 적절한 설명에 이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연 사건들 속에서 인식되는 우발성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 법칙의 우발성을 인시케 만들어 주며, 이러한 인식은 자유로운 신적 창조자의 피조물로서 자연 전체를 이해하도록 인도해준다. 역장 개념은 신학자들이 그의 역사적 맥락들을 통해, 그리고 그의 체계이론적 함축성들을 통해 주의 깊게 검토할 필요가 있는 개념이다. 역장 개념은 자연 현상을 속에 현시하는 하느님의 영적 현존을 보다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 줄 수 있다. 아인쉬타인의 장 이론은 시간과 공간과 에너지를 포괄하여 시간의 전체성을 보다 잘 이해하기 쉬운 개념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 이는 우리가 시간을 이해할 때 영원성에 우선성을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시시켜 준다고 생각된다.
신학자로서 우리의 할 일은 기존하고 있는 자연과학과의 관계를 맺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과학을 창조해낼 수 없다. 그렇지만 자연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과학 분야들이 제공해 주고 있는 것들을 넘어서 우리의 하느님 이해를 자연 이해에 포함시켜야만 한다.
위의 글에서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1. 신학은 자신의 과학을 만들 수 없다.(진화론과 쓸 데 없이 싸우지 마라.)
2. 과학자들이 과학 너머를 볼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진화론은 신을 부정하지 않을 수 있다.)
감사. 좋은 밤!
심리학을 전공하신다고 했는데,
철학, 신학, 물리생물학, 사회학 등등,
모든 전문분야를 꿰뚫고 있네요.
논리적 사유와 글쓰기도 제가 보기에는 아주 뛰어나네요.
내가 따라가기 힘들 정도니까요.
가능한 약간 '덜' 전문적인 용어와 개념으로 글을 쓴다면
다비안들에게 큰 도움이 되겠네요.
앞으로 기대가 큽니다.
데미 님의 글을 읽고
앞으로 많은 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구요.
한 가지만 말씀드려도 되겠지요.
진화론과 창조론을 말할 때
왜 진화론을 반드시 무신론적인 이론으로 전제하시는 걸까요?
학생들이 학교에서 그런 진화론을 배운다구요?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까지 그걸 전제하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제가 보기에 진화론은 그냥 생물학의 이론입니다.
물리학에서 천동설로부터 지동설로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났듯이
생물학에서 완성된 창조론으로부터 진화적 창조론으로(이게 말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난 겁니다.
태양이 돌다가 지구가 돈다고 하면 하나님의 창조능력이 손상되나요?
마찬가지로 생명체가 진화된다고 해서 하나님의 창조능력이 손상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대목은 쓸데 없이 진화론 자체와 소모적인 논쟁을 벌일 것이 아니라
진화론이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신학이 해야 할 일이지요.
이게 과학만능주의는 아닙니다.
과학은 과거와 현재의 세계를 설명하는 거라면
신학은 종말의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겟지요.
과학과 신학이 만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소위 창조과학은 그 지점을 잘못 잡은 겁니다.
참고적으로 아래에 판넨베르크의 글을 인용해서 실었습니다.
가능하다면 그의 책을 전부 읽은 것도 좋겠지요.
(판넨베르크, 박일준 역, 자연신학, 2장 “창조론과 현대과학”, 결론부분, 84,85쪽)
본 장에서 필자는 자연과학자들이 제시하는 자연에 대한 기술을 철저히 받아들이는 것이 신학자들에게 능사는 아니라는 사실을 제시했다. 사실 기존 분야들의 한계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과학자들의 보고보다 더 순박한 것도 없다. 하느님의 실재는 자연을 정의하는 인수(因數)이며, 이 사실을 무시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사물들의 가장 적절한 설명에 이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연 사건들 속에서 인식되는 우발성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 법칙의 우발성을 인시케 만들어 주며, 이러한 인식은 자유로운 신적 창조자의 피조물로서 자연 전체를 이해하도록 인도해준다. 역장 개념은 신학자들이 그의 역사적 맥락들을 통해, 그리고 그의 체계이론적 함축성들을 통해 주의 깊게 검토할 필요가 있는 개념이다. 역장 개념은 자연 현상을 속에 현시하는 하느님의 영적 현존을 보다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 줄 수 있다. 아인쉬타인의 장 이론은 시간과 공간과 에너지를 포괄하여 시간의 전체성을 보다 잘 이해하기 쉬운 개념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 이는 우리가 시간을 이해할 때 영원성에 우선성을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시시켜 준다고 생각된다.
신학자로서 우리의 할 일은 기존하고 있는 자연과학과의 관계를 맺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과학을 창조해낼 수 없다. 그렇지만 자연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과학 분야들이 제공해 주고 있는 것들을 넘어서 우리의 하느님 이해를 자연 이해에 포함시켜야만 한다.
위의 글에서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1. 신학은 자신의 과학을 만들 수 없다.(진화론과 쓸 데 없이 싸우지 마라.)
2. 과학자들이 과학 너머를 볼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진화론은 신을 부정하지 않을 수 있다.)
감사. 좋은 밤!
2007.05.16 00:58:58
voltaire님, 깊이 들어가다가는 자칫 길을 잃기 쉬우니 정리하면서 가겠습니다.
토론은 "각각의 담론의 지향점 차이"를 확인하고 그 지향점이 갈라지기 전을 찾기 위해 끈기있게
bootstrapping point를 조금씩 후퇴시켜 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적 성경읽기도 마찬가지고 진화론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가 무엇이냐'란 빌라도의 질문을 그대로 차용하다 보니 존재론적 질문이 되었지만
이것은 일상적인 용어 수준이고 실은 voltaire님의 지적처럼 비약하여 인식론적 질문을 제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진리에 대한 인식론적 회의주의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야기하려던 것은 언어를 이해하는 데 끼친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입니다.
데리다의 해체주의도 사실은 회의주의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 역시 끼친 영향은 마찬가지였다는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어차피 데리다도 비트겐슈타인의 영향권에서 자유로웠다고 말할 수 없고.
비트겐슈타인과 데리다가 도달한 정점은 시지프스가 올라간 정점과도 같아 그들 자신조차 잠시도
그대로 머무르기 힘들었던 지점이란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사상이 왜곡될 수밖에 없고 그런 의미에서 '홍해가 실제로 갈라졌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상관이 없다'라는 견해가 비트겐슈타인과 데리다의 영향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voltaire님, 이 점을 다시 주의해서 생각해 보심이 어떨지...
출애굽기 텍스트를 인문학적으로 해석한다고 하여 '홍해가 실제로 갈라졌다는 것이 아니다'라는
견해나 '홍해가 실제로 갈라졌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상관이 없다'라는 견해가 나온다면
그것은 비트겐슈타인이나 데리다를 왜곡한 결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왜곡은 해석자가 어떤 전제 또는 세계관을 먼저 선택함으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전제가 어떤 확고한 근거를 가진 것이냐,에 초점을 맞춘 것이구요.
다시 요약하면,
인문학적인 성경읽기에서 '홍해가 실제로 갈라진 것이 아니다'라는 견해나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축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라는 견해가 나올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밤, 우선 여기까지...
토론은 "각각의 담론의 지향점 차이"를 확인하고 그 지향점이 갈라지기 전을 찾기 위해 끈기있게
bootstrapping point를 조금씩 후퇴시켜 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적 성경읽기도 마찬가지고 진화론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가 무엇이냐'란 빌라도의 질문을 그대로 차용하다 보니 존재론적 질문이 되었지만
이것은 일상적인 용어 수준이고 실은 voltaire님의 지적처럼 비약하여 인식론적 질문을 제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진리에 대한 인식론적 회의주의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야기하려던 것은 언어를 이해하는 데 끼친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입니다.
데리다의 해체주의도 사실은 회의주의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 역시 끼친 영향은 마찬가지였다는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어차피 데리다도 비트겐슈타인의 영향권에서 자유로웠다고 말할 수 없고.
비트겐슈타인과 데리다가 도달한 정점은 시지프스가 올라간 정점과도 같아 그들 자신조차 잠시도
그대로 머무르기 힘들었던 지점이란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사상이 왜곡될 수밖에 없고 그런 의미에서 '홍해가 실제로 갈라졌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상관이 없다'라는 견해가 비트겐슈타인과 데리다의 영향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voltaire님, 이 점을 다시 주의해서 생각해 보심이 어떨지...
출애굽기 텍스트를 인문학적으로 해석한다고 하여 '홍해가 실제로 갈라졌다는 것이 아니다'라는
견해나 '홍해가 실제로 갈라졌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상관이 없다'라는 견해가 나온다면
그것은 비트겐슈타인이나 데리다를 왜곡한 결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왜곡은 해석자가 어떤 전제 또는 세계관을 먼저 선택함으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전제가 어떤 확고한 근거를 가진 것이냐,에 초점을 맞춘 것이구요.
다시 요약하면,
인문학적인 성경읽기에서 '홍해가 실제로 갈라진 것이 아니다'라는 견해나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축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라는 견해가 나올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밤, 우선 여기까지...
2007.05.16 05:08:18
홍해가 왜 실제로 갈라져야 할까요?
하나님이 당신이 지으신 세계의 법칙을 무너뜨리지 않고는
구원의 역사를 풀어나갈 수 없었다는 말일까요?
오히려, 자신들에게 일어난 역사를 두고,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이루어진 사태 앞에서, 그 놀라움과 감격을 담아내고,
앞으로 전개될 도전에 맞설 용기를 고취하기 위한 문학적 서술로서,
홍해의 갈라짐 등등의 기적설화를 이해하는 것이, 설득력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만이 옳다는 주장은 좀 거시기합니다만, 이러한 이해는
더 진지하고 생명력있는 신앙고백을 위한 든든한 바탕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기적설화는, 자연법칙이 깨어진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상상력의 빈곤, 노예근성의 강고함이 깨어졌음을,
그것들이 거듭 깨어져야 함을, 요청하는, 계시(?)로 이해할 때,
홍해의 갈라짐은 우리에게 유의미하다는 것이죠.
출애굽의 ‘역사’ 앞에서, 홍해의 갈라짐 따위는,
문학적 소품일 뿐, 기적 축에도 못 든다는,, ^^
p.s. 대화의 흐름을 깬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ㅋㅋ
님들의 대화는 정말 흥미진진합니다. 머 자꾸 듣다보면
제대로 알아듣는 날도 오겠죠? 그런 날을 향해, 파이팅 ^^
하나님이 당신이 지으신 세계의 법칙을 무너뜨리지 않고는
구원의 역사를 풀어나갈 수 없었다는 말일까요?
오히려, 자신들에게 일어난 역사를 두고,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이루어진 사태 앞에서, 그 놀라움과 감격을 담아내고,
앞으로 전개될 도전에 맞설 용기를 고취하기 위한 문학적 서술로서,
홍해의 갈라짐 등등의 기적설화를 이해하는 것이, 설득력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만이 옳다는 주장은 좀 거시기합니다만, 이러한 이해는
더 진지하고 생명력있는 신앙고백을 위한 든든한 바탕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기적설화는, 자연법칙이 깨어진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상상력의 빈곤, 노예근성의 강고함이 깨어졌음을,
그것들이 거듭 깨어져야 함을, 요청하는, 계시(?)로 이해할 때,
홍해의 갈라짐은 우리에게 유의미하다는 것이죠.
출애굽의 ‘역사’ 앞에서, 홍해의 갈라짐 따위는,
문학적 소품일 뿐, 기적 축에도 못 든다는,, ^^
p.s. 대화의 흐름을 깬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ㅋㅋ
님들의 대화는 정말 흥미진진합니다. 머 자꾸 듣다보면
제대로 알아듣는 날도 오겠죠? 그런 날을 향해, 파이팅 ^^
2007.05.16 10:22:14
늘오늘 님, 토론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우리가 예로서 거론하는 출애굽기 텍스트를 생각해 보면,
홍해가 왜 실제로 갈라져야 할까요? 라는 질문보다는 왜 그것을 기록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지
그에 대한 어떤 확고한 근거가 있는지를 먼저 생각하는 게 순서가 아닐까요?
그 근거가 늘오늘 님의 글 속에도 나와 있지만
그 기록에 나타난 이적은 '세계의 법칙'을 무너뜨린다는 사실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란 이미 설정한 어떤 기준입니다. 즉 이성주의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면 늘오늘 님은 금방 자가당착에 빠지고 맙니다.
늘오늘 님 말씀처럼 홍해가 갈라지기 전에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이미 이루어진 상태입니다.
앞서 일어난 것을 생각하면 홍해가 갈라진 것 정도는 기적 축에도 들지 않습니다.
출애굽 기록에 의하면,
그 당시 애굽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자손은 대략 100만이 조금 넘을 정도의 소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모세가 나타나서 민족적 자의식을 일깨웠습니다.
그 당시 오리엔트에서 가장 강대한 국가였던 이집트에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민족적 자의식이 일어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 상황에서 하나님은 바로에게 모세를 보냈고, 모세는 바로에게 당당하게 요구했습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전한 것은 "내 백성을 보내라"라는 여호와의 말씀이었습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습니다.)
모세의 요구를 거절한 바로에게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을 내렸습니다.
열 가지 재앙 모두 '세계의 법칙'을 무너뜨리는 이적입니다.
그런데 출애굽에 등장하는 이적은 성경에 의하면 그냥 에피소드가 아닙니다.
너희가 말하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면 이적을 보이라는 바로의 요구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적은 하나님이 참하나님임을 드러내는 징표였던 것입니다.
바로의 요구에 묵묵무답이었다면 하나님은 없는 것입니다.
즉 성경에 기록된 이적이 사실이 아니라면 톡 까놓고 말해 하나님은 없는 것입니다!!
당연히 구원에 대한 확신이란 말도 의미없는 말이고, 믿음 또한 의미없는 말에 불과합니다.
늘오늘 님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이루어진 사태 앞에서'라고 이미 그것을 인정한 듯한
말씀을 하셨는데 그리고 나서 홍해가 갈라지는 '일도 아닌' 이적에 대해서는 다른 태도를
취하시는 것 같습니다.
자, 그러면 제가 위에서 자꾸 말씀 드리는 bootstrapping point 를 조금 앞으로 당기겠습니다.
애굽에 있는 모든 물이 피로 변하는 첫 번째 이적부터 장자가 죽임을 당하는 마지만 이적까지
그 기록은 성서 그대로 받아들여지시는지요?
만일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이번에는 강대국의 노예로 있던 소수의 민족이 그 강대국의
압제로부터 벗어난다는 설정이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즉 출애굽 기록 전체가 무너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홍해가 갈라진 사실을 믿어야 된다는 말은 물론 아닙니다.
성서라는 텍스트를 놓고 보면 이건 작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 난관은 성경 전체를 가로지르며 줄줄이 이어집니다.
늘오늘 님은 앞서 '하나님이 당신이 지으신 세계의 법칙'이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진지한 말이라면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늘오늘 님이 말씀하시는 세계의 법칙이란 우리들이 사는 세계, 즉 시간과 공간이라는
날줄과 씨줄에 갇혀진 세계의 법칙이란 뜻입니다.
그 법칙을 만드신 하나님이 그 법칙 바깥에 서 계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애굽왕 바로에게 모세가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이 참하나님임을 드러내는 방법은
바로 '날줄과 씨줄에 갇혀진 세계의 법칙'을 벗어남을 보여주는 열가지 재앙이었습니다.
저 위에서 voltaire 님과 토론한 내용에 있지만 우리가 목도하는 현상계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로서는 인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세계와 그 너머의 세계가 연결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또다른 문제지만
만일 연결될 수 있다면 그것을 우리는 출애굽기에서 목도하는 것입니다.
참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이적을 보이라는 바로의 요구에 대한 답변의 형태로 등장합니다.
그것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는 인문학적인 연구에 의해서 결정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에 의해서라는 말을 저는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로서 거론하는 출애굽기 텍스트를 생각해 보면,
홍해가 왜 실제로 갈라져야 할까요? 라는 질문보다는 왜 그것을 기록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지
그에 대한 어떤 확고한 근거가 있는지를 먼저 생각하는 게 순서가 아닐까요?
그 근거가 늘오늘 님의 글 속에도 나와 있지만
그 기록에 나타난 이적은 '세계의 법칙'을 무너뜨린다는 사실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란 이미 설정한 어떤 기준입니다. 즉 이성주의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면 늘오늘 님은 금방 자가당착에 빠지고 맙니다.
늘오늘 님 말씀처럼 홍해가 갈라지기 전에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이미 이루어진 상태입니다.
앞서 일어난 것을 생각하면 홍해가 갈라진 것 정도는 기적 축에도 들지 않습니다.
출애굽 기록에 의하면,
그 당시 애굽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자손은 대략 100만이 조금 넘을 정도의 소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모세가 나타나서 민족적 자의식을 일깨웠습니다.
그 당시 오리엔트에서 가장 강대한 국가였던 이집트에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민족적 자의식이 일어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 상황에서 하나님은 바로에게 모세를 보냈고, 모세는 바로에게 당당하게 요구했습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전한 것은 "내 백성을 보내라"라는 여호와의 말씀이었습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습니다.)
모세의 요구를 거절한 바로에게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을 내렸습니다.
열 가지 재앙 모두 '세계의 법칙'을 무너뜨리는 이적입니다.
그런데 출애굽에 등장하는 이적은 성경에 의하면 그냥 에피소드가 아닙니다.
너희가 말하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면 이적을 보이라는 바로의 요구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적은 하나님이 참하나님임을 드러내는 징표였던 것입니다.
바로의 요구에 묵묵무답이었다면 하나님은 없는 것입니다.
즉 성경에 기록된 이적이 사실이 아니라면 톡 까놓고 말해 하나님은 없는 것입니다!!
당연히 구원에 대한 확신이란 말도 의미없는 말이고, 믿음 또한 의미없는 말에 불과합니다.
늘오늘 님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이루어진 사태 앞에서'라고 이미 그것을 인정한 듯한
말씀을 하셨는데 그리고 나서 홍해가 갈라지는 '일도 아닌' 이적에 대해서는 다른 태도를
취하시는 것 같습니다.
자, 그러면 제가 위에서 자꾸 말씀 드리는 bootstrapping point 를 조금 앞으로 당기겠습니다.
애굽에 있는 모든 물이 피로 변하는 첫 번째 이적부터 장자가 죽임을 당하는 마지만 이적까지
그 기록은 성서 그대로 받아들여지시는지요?
만일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이번에는 강대국의 노예로 있던 소수의 민족이 그 강대국의
압제로부터 벗어난다는 설정이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즉 출애굽 기록 전체가 무너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홍해가 갈라진 사실을 믿어야 된다는 말은 물론 아닙니다.
성서라는 텍스트를 놓고 보면 이건 작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 난관은 성경 전체를 가로지르며 줄줄이 이어집니다.
늘오늘 님은 앞서 '하나님이 당신이 지으신 세계의 법칙'이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진지한 말이라면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늘오늘 님이 말씀하시는 세계의 법칙이란 우리들이 사는 세계, 즉 시간과 공간이라는
날줄과 씨줄에 갇혀진 세계의 법칙이란 뜻입니다.
그 법칙을 만드신 하나님이 그 법칙 바깥에 서 계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애굽왕 바로에게 모세가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이 참하나님임을 드러내는 방법은
바로 '날줄과 씨줄에 갇혀진 세계의 법칙'을 벗어남을 보여주는 열가지 재앙이었습니다.
저 위에서 voltaire 님과 토론한 내용에 있지만 우리가 목도하는 현상계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로서는 인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세계와 그 너머의 세계가 연결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또다른 문제지만
만일 연결될 수 있다면 그것을 우리는 출애굽기에서 목도하는 것입니다.
참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이적을 보이라는 바로의 요구에 대한 답변의 형태로 등장합니다.
그것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는 인문학적인 연구에 의해서 결정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에 의해서라는 말을 저는 하고 있는 것입니다.
2007.05.16 10:28:43
정목사님 안녕하세요? ^^ 길고 횡설수설하기까지한 제글을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글에 대한 단점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쉽게 고쳐지진 않네요...아직 배움이 덜 영글어서 그런 것이라 생각합니다...저도 좀 더 많은 다비안들과 소통하고 싶긴한데...
앞으로 좀 더 글을 다듬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정목사님의 답글을 보고 어떤 부분은 동의하면서도 어떤 부분은 수긍이 선뜻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다시 글을 올려봅니다. 먼저 진화론과 창조론의 소모적인 논쟁은 피해야한다는 지적은 백번 동의합니다. 그런 논쟁은 "인문학으로 성서읽기"라는 실천적 작업을 수행함에 있어 그리 발전적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영역도 다른 것 같구요. 다만, 제시하신 "자연신학"(박일준 역)의 일부를 발췌하여 밝히신 "신학의 생물학에 대한 선도역할론"에는 의문이 가는 바입니다. 우선, 솔직히 저도 "자연신학"을 읽긴 했지만 배움이 한참 모자란 때 한두번 읽은 뒤 지금껏 읽지 못했다는 걸 먼저 밝힙니다. 그럼에도 제가 그 책을 읽고 느낀 점은, 신학이 자연과학의 방향을 제시하여야 한다는 학문적 위계나 헤게모니(?)를 언급했다는 뉘앙스는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판넨베르그나 정목사님은 신학을 공부하시기에 그런 역할론이 무리없이 수용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다른 학문을 신학과 동등한 입장에서 (물론 가치체계가 다르긴 하지만) 보는 저로선 대체 신학이 생물학에서 어떤 "선도적" 길라잡이 될 수 있는지 의아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발췌한 내용을 아무리 보아도, 자연과학과 "관계"를 맺는 것을 강조할 뿐이지 자연과학이 신학의 부분집합적 성격을 갖는다거나 신학이 자연과학에 영향을 주는 예는 거의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제시하신 지문만 보아도 판넨베르그는 자연과학의 결과물들을 신적 존재를 이해하는 데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장이론) 입장으로 보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정목사님이 말씀하신 그 선도적 위치가 바뀐 것이 아닌가하는 것입니다. 물론, 신학이 자연과학이 보지 못하는 "저 너머" 어떤 것을 보여줄 수는 있습니다만 그것은 필요조건이 아닙니다. 진화론은 신학없이 홀로 설 수 있지만 적어도 판넨베르그의 신학은 진화론이나 장이론 없이 홀로 설 수는 없어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러한 측면에서 가치체계가 다른 "두 문화" 사이의 간극을 섣불리 메우려는 모든 시도가 위험하다고 느낍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수학에 대한 오용이라던지, 페미니스트나 강단좌익들이 남용하는 물리학의 사실들 말입니다. 전술하였던 바와 같이 모든 과학은 계속 진보한다는 가정하에, 판넨베르그가 기대고있던 많은 과학이론들이 미래의 어느 순간 다른 것으로 대치되었을 경우 (과학사에서 흔한 일이죠) 판넨베르그가 추구했던 신에 대한 이해는 어떻게 될까요?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대한 예를 들겠습니다. 프로이트 박사는 아시는 바와 같이 무의식 이론으로 심리학을 통한 인간이해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지만, 정작 그의 무의식 이론은 이제 주류 과학계에선 사장되어버린 개념입니다. 하지만 그가 지향하고자 했던 것, 즉 정신세계를 분석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심층적 이해를 도모했던 것은 지성사에서 크게 빛나는 패러다임 쉬프트로서 아직도 후배 과학자들이 존경하는 인식론적 전환이라 할 수 있죠.
만약 판넨베르그가 어떤 신학사적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면 프로이트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판넨베르그가 말하는 창발성이 단속평형설이라던지, 장이론이 새로운 물리학 개념에 의해 수정된다던지 하는 일이 얼마든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게되면 그가 가지는 신학사적 위치는 굉장히 입지가 좁아지게 되지않을까하는 생각입니다. 현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세련된 사기의 전철을 밟을 우려가 있다면 너무 과한 지적일까요? 과학이 진보함에 따라 판넨베르그의 신학도 진보하는 것이라면 대승적 차원에서 그 지향하는 바는 충분히 수긍하겟습니다만, 판넨베르그의 신학이 자연과학을 선도하는 차원에서 영향을 주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진화론은 물론 신을 부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전칭명제가 아닌 것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말로써, 가령 리처드 도킨스의 진화론은 신을 부정하지만 다니엘 데넷의 진화론은 굳이 신을 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신을 긍정할 수 있는 진화론측의 입장에서 말하는 신은 더이상 기독교적 외피를 두른 신의 개념이 아니란 것이죠. 뭔가 만약 논의를 해야한다면 이부분을 논의함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진화론이냐 창조론이냐의 주제보단, 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진화론에서 나타나는 신의 개념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해석문제 같은 거 말이죠.
두번째로 데미님의 답글에 대한 답글입니다.
우선 비트겐슈타인에 대해서 여전히 곡해하고 계시는데요. 비트겐슈타인은 한번도 헤메인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범인들이 헤메이는 것을 보통사람의 방식이 아닌 것으로 경고하고 다닌 사람이죠. 케임브릿지 학생들이 만든 그 시라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수업스타일에서 나온 일종의 해프닝입니다. (그런 해프닝은 굉장히 많습니다.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평전을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그는 그만큼 이상한 매력을 풍기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이 도달한 정점이란 것은 "자신조차 잠시도 머무르기 힘들었던 지점"이라고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가 "논고"를 탈고하고 7년동안 오스트리아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하다가 다시 나와 "탐구"를 완성하고는 이제 더이상 철학에선 할게 없다며 철학을 버린 사람입니다. 일종의 자기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런면에서 "자신조차 왔다리갔다리했던 사상인데 후배들이 왜곡하는것은 오죽하랴"라는 말은 철학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제가 왜 이런 시시콜콜한 사실문제를 잡고 늘어지는가 의구심이 드실 수도 있을 것 같아 이제 그 의도를 밝힙니다만, 비트겐슈타인이 곡해된 것은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사상이 흐릿하거나 혹은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는 것에서 출발했다는 전제를 버리셔야 한다는 겁니다. 비트겐슈타인이야 어땠는지, 혹은 칸트나 흄이 어땠는지 간에 우리는 나름의 해석을 하기 때문에 홍해사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는 거죠.
좀 더 명확하게 데미님이 짚어주시는 포인트로 들어가보겠습니다.
저의 언어로 말씀드리면 "누군가의 텍스트가 어떻게 해석되는가는, 해석자의 세계관에 대한 선택이 우선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선택이란 것이 과연 얼마나 합리적인 것일까?" 하는 문제입니다. 만약 저의 의중이 맞다면 저는 이 문제가 다비아에서 과연 필요한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는 전술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데미님의 문제의식은 우리의 가치관,세계관, 도그마가 어떻게 발생하는가에 대한 "기원론적인 문제"로서 전적으로 피아제나 비고츠키 류의 발달심리학에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면서 사물에 대한 인지에서부터 수라는 개념에 대한 추상적 개념을 습득하고, 나아가 가치체계를 확립시키는데 합리화가 필요한 세계관, 도그마를 선택하는 것에 대한 편향성 내지, 취사선택에 관한 이론은 이미 밝혀진 바가 많습니다.
섦마 발달심리학적인 과학적 사실을 알고 싶은 것은 아닐테지요? 매우 재밌는 분야로서 소개시켜드릴 순 잇지만, 제가 느낀 바로는 이 "도그마의 기호적 선택문제"에 대한 데미님의 의중은 "그것이 얼마나 합리적인 것인가"하는 회의론이 짙게 깔려있는 것 같습니다. 거기에 관련해서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세계관 선택의 문제가 얼만큼 근거가 확보되는 문제인지는 말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 데미님은 여기서부터 출발하여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치실 법한데,
"결국 세계관의 선택은 기호적인 것으로서, 아무런 논리적 근거가 없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에 기초한 해석자의 다양한 해석이란 것도 사실 근거가 없는 것으로, 단지 기호적 선택의 결과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홍해가 갈라졌다라는 이적설화를 해석할 때 실재론적인 해삭에서부터 상징적인 해석까지 모두 동등하다"
맞습니까? ^^ 만약 맞다면 다음과 같은 반론을 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런 논리의 도식이라면 발달심리학 차원에서 아이가 보는 세상과 어른이 보는 세상인식이 동등하다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발달심리학적 사실들은 영유아와 유소년, 청소년과 중장년이 실제 사물과 추상적 개념을 이해하는데 근본적인 차이 (생물학적-정확히는 호르몬과 뇌신경세포의 발달로 인한)를 보여줍니다. 영아들에게 눈앞에서 인형을 보여주었다가 갑자기 종이로 가려버리면 영아는 처음부터 인형이 없었던 것으로 인식하고 행동합니다. 생물학적 뇌구조가 그렇게 되어있을 뿐더러, 그것이 그들이 겪는 최초의 합리화라는 사고작용단계입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영유아의 인식단계에 머물러 있다면 그사람은 저발달장애거나 퇴행성발달장애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겠죠.
성서의 이적설화를 보는 것도 이와 같을 겁니다. 발달된 과학적 사실들이 있고 다양한 해석들이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잇는 것들도 있지만 현저히 저발달되거나 퇴행적인 해석들도 잇다는 겁니다. 취사선택의 합리성에 관한 질문은 여기서부터 출발해야겠죠? 선택문제에 대한 기원론적인 의문은 해석자에 대해서 말해줄 수는 있지만 해석자가 보는 텍스트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습니다. 차라리 텍스트에 대한 여러 해석이 칸트의 실천적 이성에 비추어 볼 때 얼머나 의미가 있는 것인지 연구를 하는 것이 더 의미잇는 일 같습니다.
일단 저도 여기까지.
제글에 대한 단점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쉽게 고쳐지진 않네요...아직 배움이 덜 영글어서 그런 것이라 생각합니다...저도 좀 더 많은 다비안들과 소통하고 싶긴한데...
앞으로 좀 더 글을 다듬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정목사님의 답글을 보고 어떤 부분은 동의하면서도 어떤 부분은 수긍이 선뜻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다시 글을 올려봅니다. 먼저 진화론과 창조론의 소모적인 논쟁은 피해야한다는 지적은 백번 동의합니다. 그런 논쟁은 "인문학으로 성서읽기"라는 실천적 작업을 수행함에 있어 그리 발전적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영역도 다른 것 같구요. 다만, 제시하신 "자연신학"(박일준 역)의 일부를 발췌하여 밝히신 "신학의 생물학에 대한 선도역할론"에는 의문이 가는 바입니다. 우선, 솔직히 저도 "자연신학"을 읽긴 했지만 배움이 한참 모자란 때 한두번 읽은 뒤 지금껏 읽지 못했다는 걸 먼저 밝힙니다. 그럼에도 제가 그 책을 읽고 느낀 점은, 신학이 자연과학의 방향을 제시하여야 한다는 학문적 위계나 헤게모니(?)를 언급했다는 뉘앙스는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판넨베르그나 정목사님은 신학을 공부하시기에 그런 역할론이 무리없이 수용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다른 학문을 신학과 동등한 입장에서 (물론 가치체계가 다르긴 하지만) 보는 저로선 대체 신학이 생물학에서 어떤 "선도적" 길라잡이 될 수 있는지 의아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발췌한 내용을 아무리 보아도, 자연과학과 "관계"를 맺는 것을 강조할 뿐이지 자연과학이 신학의 부분집합적 성격을 갖는다거나 신학이 자연과학에 영향을 주는 예는 거의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제시하신 지문만 보아도 판넨베르그는 자연과학의 결과물들을 신적 존재를 이해하는 데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장이론) 입장으로 보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정목사님이 말씀하신 그 선도적 위치가 바뀐 것이 아닌가하는 것입니다. 물론, 신학이 자연과학이 보지 못하는 "저 너머" 어떤 것을 보여줄 수는 있습니다만 그것은 필요조건이 아닙니다. 진화론은 신학없이 홀로 설 수 있지만 적어도 판넨베르그의 신학은 진화론이나 장이론 없이 홀로 설 수는 없어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러한 측면에서 가치체계가 다른 "두 문화" 사이의 간극을 섣불리 메우려는 모든 시도가 위험하다고 느낍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수학에 대한 오용이라던지, 페미니스트나 강단좌익들이 남용하는 물리학의 사실들 말입니다. 전술하였던 바와 같이 모든 과학은 계속 진보한다는 가정하에, 판넨베르그가 기대고있던 많은 과학이론들이 미래의 어느 순간 다른 것으로 대치되었을 경우 (과학사에서 흔한 일이죠) 판넨베르그가 추구했던 신에 대한 이해는 어떻게 될까요?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대한 예를 들겠습니다. 프로이트 박사는 아시는 바와 같이 무의식 이론으로 심리학을 통한 인간이해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지만, 정작 그의 무의식 이론은 이제 주류 과학계에선 사장되어버린 개념입니다. 하지만 그가 지향하고자 했던 것, 즉 정신세계를 분석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심층적 이해를 도모했던 것은 지성사에서 크게 빛나는 패러다임 쉬프트로서 아직도 후배 과학자들이 존경하는 인식론적 전환이라 할 수 있죠.
만약 판넨베르그가 어떤 신학사적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면 프로이트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판넨베르그가 말하는 창발성이 단속평형설이라던지, 장이론이 새로운 물리학 개념에 의해 수정된다던지 하는 일이 얼마든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게되면 그가 가지는 신학사적 위치는 굉장히 입지가 좁아지게 되지않을까하는 생각입니다. 현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세련된 사기의 전철을 밟을 우려가 있다면 너무 과한 지적일까요? 과학이 진보함에 따라 판넨베르그의 신학도 진보하는 것이라면 대승적 차원에서 그 지향하는 바는 충분히 수긍하겟습니다만, 판넨베르그의 신학이 자연과학을 선도하는 차원에서 영향을 주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진화론은 물론 신을 부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전칭명제가 아닌 것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말로써, 가령 리처드 도킨스의 진화론은 신을 부정하지만 다니엘 데넷의 진화론은 굳이 신을 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신을 긍정할 수 있는 진화론측의 입장에서 말하는 신은 더이상 기독교적 외피를 두른 신의 개념이 아니란 것이죠. 뭔가 만약 논의를 해야한다면 이부분을 논의함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진화론이냐 창조론이냐의 주제보단, 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진화론에서 나타나는 신의 개념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해석문제 같은 거 말이죠.
두번째로 데미님의 답글에 대한 답글입니다.
우선 비트겐슈타인에 대해서 여전히 곡해하고 계시는데요. 비트겐슈타인은 한번도 헤메인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범인들이 헤메이는 것을 보통사람의 방식이 아닌 것으로 경고하고 다닌 사람이죠. 케임브릿지 학생들이 만든 그 시라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수업스타일에서 나온 일종의 해프닝입니다. (그런 해프닝은 굉장히 많습니다.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평전을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그는 그만큼 이상한 매력을 풍기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이 도달한 정점이란 것은 "자신조차 잠시도 머무르기 힘들었던 지점"이라고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가 "논고"를 탈고하고 7년동안 오스트리아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하다가 다시 나와 "탐구"를 완성하고는 이제 더이상 철학에선 할게 없다며 철학을 버린 사람입니다. 일종의 자기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런면에서 "자신조차 왔다리갔다리했던 사상인데 후배들이 왜곡하는것은 오죽하랴"라는 말은 철학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제가 왜 이런 시시콜콜한 사실문제를 잡고 늘어지는가 의구심이 드실 수도 있을 것 같아 이제 그 의도를 밝힙니다만, 비트겐슈타인이 곡해된 것은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사상이 흐릿하거나 혹은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는 것에서 출발했다는 전제를 버리셔야 한다는 겁니다. 비트겐슈타인이야 어땠는지, 혹은 칸트나 흄이 어땠는지 간에 우리는 나름의 해석을 하기 때문에 홍해사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는 거죠.
좀 더 명확하게 데미님이 짚어주시는 포인트로 들어가보겠습니다.
저의 언어로 말씀드리면 "누군가의 텍스트가 어떻게 해석되는가는, 해석자의 세계관에 대한 선택이 우선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선택이란 것이 과연 얼마나 합리적인 것일까?" 하는 문제입니다. 만약 저의 의중이 맞다면 저는 이 문제가 다비아에서 과연 필요한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는 전술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데미님의 문제의식은 우리의 가치관,세계관, 도그마가 어떻게 발생하는가에 대한 "기원론적인 문제"로서 전적으로 피아제나 비고츠키 류의 발달심리학에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면서 사물에 대한 인지에서부터 수라는 개념에 대한 추상적 개념을 습득하고, 나아가 가치체계를 확립시키는데 합리화가 필요한 세계관, 도그마를 선택하는 것에 대한 편향성 내지, 취사선택에 관한 이론은 이미 밝혀진 바가 많습니다.
섦마 발달심리학적인 과학적 사실을 알고 싶은 것은 아닐테지요? 매우 재밌는 분야로서 소개시켜드릴 순 잇지만, 제가 느낀 바로는 이 "도그마의 기호적 선택문제"에 대한 데미님의 의중은 "그것이 얼마나 합리적인 것인가"하는 회의론이 짙게 깔려있는 것 같습니다. 거기에 관련해서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세계관 선택의 문제가 얼만큼 근거가 확보되는 문제인지는 말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 데미님은 여기서부터 출발하여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치실 법한데,
"결국 세계관의 선택은 기호적인 것으로서, 아무런 논리적 근거가 없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에 기초한 해석자의 다양한 해석이란 것도 사실 근거가 없는 것으로, 단지 기호적 선택의 결과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홍해가 갈라졌다라는 이적설화를 해석할 때 실재론적인 해삭에서부터 상징적인 해석까지 모두 동등하다"
맞습니까? ^^ 만약 맞다면 다음과 같은 반론을 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런 논리의 도식이라면 발달심리학 차원에서 아이가 보는 세상과 어른이 보는 세상인식이 동등하다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발달심리학적 사실들은 영유아와 유소년, 청소년과 중장년이 실제 사물과 추상적 개념을 이해하는데 근본적인 차이 (생물학적-정확히는 호르몬과 뇌신경세포의 발달로 인한)를 보여줍니다. 영아들에게 눈앞에서 인형을 보여주었다가 갑자기 종이로 가려버리면 영아는 처음부터 인형이 없었던 것으로 인식하고 행동합니다. 생물학적 뇌구조가 그렇게 되어있을 뿐더러, 그것이 그들이 겪는 최초의 합리화라는 사고작용단계입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영유아의 인식단계에 머물러 있다면 그사람은 저발달장애거나 퇴행성발달장애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겠죠.
성서의 이적설화를 보는 것도 이와 같을 겁니다. 발달된 과학적 사실들이 있고 다양한 해석들이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잇는 것들도 있지만 현저히 저발달되거나 퇴행적인 해석들도 잇다는 겁니다. 취사선택의 합리성에 관한 질문은 여기서부터 출발해야겠죠? 선택문제에 대한 기원론적인 의문은 해석자에 대해서 말해줄 수는 있지만 해석자가 보는 텍스트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습니다. 차라리 텍스트에 대한 여러 해석이 칸트의 실천적 이성에 비추어 볼 때 얼머나 의미가 있는 것인지 연구를 하는 것이 더 의미잇는 일 같습니다.
일단 저도 여기까지.
2007.05.16 11:12:49
톡까놓고 이렇게 질문하신다면,,,
“늘오늘 너는 홍해가 갈라진 사실을 인정 안하겠다는 말이냐?”
사족을 달지 않은, 저의 대답은 이겁니다.
“안합니다!”
“그러고도, 기독교인이냐?”
“예!” ^^
p.s. 아무래도 저는 관망만 해야겠슴다. ^^;
voltaire님의 궤도차 앞에서 삽질하는 거 같아서. ㅋㅋ^^
“늘오늘 너는 홍해가 갈라진 사실을 인정 안하겠다는 말이냐?”
사족을 달지 않은, 저의 대답은 이겁니다.
“안합니다!”
“그러고도, 기독교인이냐?”
“예!” ^^
p.s. 아무래도 저는 관망만 해야겠슴다. ^^;
voltaire님의 궤도차 앞에서 삽질하는 거 같아서. ㅋㅋ^^
2007.05.16 11:25:04
voltaire님,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신뢰가 지극합니다요. 하하...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제 이해에 부족함이 있으면 용서(?)하시고.
이야기의 흐름을 정리하는 방식으로 voltaire님이 깊고 복잡하게 나가시는 데 대해서
저는 단순하고 간단하게 요약하면서 토론에서 나타나는 갈림길을 찾는데 주력할 작정입니다.
제가 비트겐슈타인을 거론한 것은 그의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고
그에게서 현대에 끼친 언어에 대한 영향을 추출하여 적용하려던 것입니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언어에는 감쳐진 본질도, 세계의 본질을 향해 난 형이상학적 창문도
없다는 점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동의하시지요?)
이것만을 주목한다면 이것은 비트겐슈타인 만의 고유한 업적은 아닐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영역에서 출발한 것이었지만 이미 칸트에 의해 이루어진 업적입니다.
그렇다면,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인문학적인 성경읽기에서 '감쳐진 본질'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바로 위 댓글에서 말한 것처럼 출애굽기의 열 가지 기적이 또는 홍해가 갈라진 기적이
하나님의 참하나임임을 드러내는 징표로서 이해할 수는 있지만 진실 즉 '감쳐진 본질'에
접근할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votaire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실재론적 해석과 상징적 해석이 동등하다는 것입니다.
근거가 없다는 뜻이라기 보다 해석에 근거라는 것을 붙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말은 회의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일차적인 의미는 상징적인 해석이 옳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칸트에게서도 마찬가지고 비트겐슈타인에게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이제 남아 있는 중요한 것은 voltaire님 말씀처럼 선택과 실천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계속 붙잡고 있는 bootstrapping point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제 이해에 부족함이 있으면 용서(?)하시고.
이야기의 흐름을 정리하는 방식으로 voltaire님이 깊고 복잡하게 나가시는 데 대해서
저는 단순하고 간단하게 요약하면서 토론에서 나타나는 갈림길을 찾는데 주력할 작정입니다.
제가 비트겐슈타인을 거론한 것은 그의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고
그에게서 현대에 끼친 언어에 대한 영향을 추출하여 적용하려던 것입니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언어에는 감쳐진 본질도, 세계의 본질을 향해 난 형이상학적 창문도
없다는 점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동의하시지요?)
이것만을 주목한다면 이것은 비트겐슈타인 만의 고유한 업적은 아닐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영역에서 출발한 것이었지만 이미 칸트에 의해 이루어진 업적입니다.
그렇다면,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인문학적인 성경읽기에서 '감쳐진 본질'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바로 위 댓글에서 말한 것처럼 출애굽기의 열 가지 기적이 또는 홍해가 갈라진 기적이
하나님의 참하나임임을 드러내는 징표로서 이해할 수는 있지만 진실 즉 '감쳐진 본질'에
접근할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votaire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실재론적 해석과 상징적 해석이 동등하다는 것입니다.
근거가 없다는 뜻이라기 보다 해석에 근거라는 것을 붙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말은 회의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일차적인 의미는 상징적인 해석이 옳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칸트에게서도 마찬가지고 비트겐슈타인에게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이제 남아 있는 중요한 것은 voltaire님 말씀처럼 선택과 실천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계속 붙잡고 있는 bootstrapping point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2007.05.16 12:14:45
늘오늘 님,
톡까놓고 말씀해 주시는 것도 괜찮은 방법입니다. 그 지점이 사태가 분명히 진전되는 시점이니까요.
그런데 그렇다면 홍해가 갈라지기 전, 바로에게 보인 열 가지 이적도 글자 그대로 믿지 못하시겠네요?
예수가 병든 자를 고치고, 소경을 눈뜨게 하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고, 오병이어의 이적도,
물 위를 걸었다는 낭설도, 또 그런 사실과 소문 때문에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라다녔다는
그런 사실 자체도, 급기야는 그러던 예수가 죽었다가 3일 만에 살아나서 제자들에게 몸을 보이시고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보이기 위해 같이 생선을 잡수시기까지 했다는 기록도...
뭔가 좋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수없는 거짓말을 되풀이 하는 책을 '믿는다'는 표현을 하시는지.
아라비안나이트나 걸리버이야기를 두고 우리는 진실 운운하지 않습니다. 그건 어차피...
그러나, 끊임없이 역사와 연결시켜 거짓 사실을 날조하는 성경을 '믿는' 것을 두고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하시는데 주저함이 없으신지 궁금합니다.
제가 이렇게 토론을 벌이는 이유는, 바로 그 비밀을 알고 싶어서 입니다.
역사와 연결하여 끊임없는 날조로 점철되어 있는 성경을 두고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수많은 말들을 쏟아내고 있는지 그 비밀을 알고 싶어서 말입니다.
우선 이 토론에서 제가 도달한 지점은 성경의 기록이 진실된 기록이라고 생각하거나
수많은 날조된 이야기가 사실인양 부가되어 있는 기록이라고 생각하거나 인문학적으로는 밝혀지지
않는 것 같다는 사실까지입니다. (이 토론에서 아직 합의된 것이 아닌가?)
누구도 마찬가지지만, 늘오늘 님도 자신의 선택에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은 분명한 듯합니다.
다른 쪽 선택이 진실이 아니라면 모르지만 진실이라면.
톡까놓고 말씀해 주시는 것도 괜찮은 방법입니다. 그 지점이 사태가 분명히 진전되는 시점이니까요.
그런데 그렇다면 홍해가 갈라지기 전, 바로에게 보인 열 가지 이적도 글자 그대로 믿지 못하시겠네요?
예수가 병든 자를 고치고, 소경을 눈뜨게 하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고, 오병이어의 이적도,
물 위를 걸었다는 낭설도, 또 그런 사실과 소문 때문에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라다녔다는
그런 사실 자체도, 급기야는 그러던 예수가 죽었다가 3일 만에 살아나서 제자들에게 몸을 보이시고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보이기 위해 같이 생선을 잡수시기까지 했다는 기록도...
뭔가 좋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수없는 거짓말을 되풀이 하는 책을 '믿는다'는 표현을 하시는지.
아라비안나이트나 걸리버이야기를 두고 우리는 진실 운운하지 않습니다. 그건 어차피...
그러나, 끊임없이 역사와 연결시켜 거짓 사실을 날조하는 성경을 '믿는' 것을 두고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하시는데 주저함이 없으신지 궁금합니다.
제가 이렇게 토론을 벌이는 이유는, 바로 그 비밀을 알고 싶어서 입니다.
역사와 연결하여 끊임없는 날조로 점철되어 있는 성경을 두고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수많은 말들을 쏟아내고 있는지 그 비밀을 알고 싶어서 말입니다.
우선 이 토론에서 제가 도달한 지점은 성경의 기록이 진실된 기록이라고 생각하거나
수많은 날조된 이야기가 사실인양 부가되어 있는 기록이라고 생각하거나 인문학적으로는 밝혀지지
않는 것 같다는 사실까지입니다. (이 토론에서 아직 합의된 것이 아닌가?)
누구도 마찬가지지만, 늘오늘 님도 자신의 선택에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은 분명한 듯합니다.
다른 쪽 선택이 진실이 아니라면 모르지만 진실이라면.
2007.05.16 12:30:53
[ ‘진리의 책’이라는 성서는 구원만이 아닌 인간사 모든 것에 대한 진리를 표상하는 책이라고 하는 게 옳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비(非)진리 아니 반(反)진리를 필요로 하고, 또한 반진리와 투쟁해야 하는 진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속성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법의 언어에 대한 최근의 일련의 연구에서 제기된 견해인데, 진리의 책이라는 거룩한 경전(經典), 나아가 경전 가운데 유일 정통의 경전인 정전(正典)의 언어에 대한 해석으로 바로 연결시켜도 전혀 무방합니다. 요컨대 초시간적이고 초공간적인 진리, 즉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모든 영역에서 ‘진리’를 대표하는 책이 바로 ‘성서’라는 기독교의 종교적 언어 속에 내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서를 믿는다’는 표현 속에는 역사적 진실성에 대한 믿음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믿는 대상이 ‘성서’가 아니라면, 가령 ‘친구인 너를 믿는다’는 말은 믿음의 함의가 전혀 다릅니다. ‘친구가 지금 내게 거짓을 말하고 있을지라도, 아니 더 나아가 그가 일반적인 의미에서 좋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친구이니까 너의 이 태도는 나를 해하려는 것은 필경 아닐 거야’라는 확신이자 자기 암시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성서를 믿나요?’라는 물음은 초시공간적인 양자택일의 상황으로 우리를 몰아붙입니다. 거기에는 ‘진리다’와 ‘반진리다’라는 두 가지 대답만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둘 다를 부정할 수 없는 우리는 당황하게 되고, 그래서 대답을 유보하지 않으면 빠져나올 수 없는 순환의 고리 속에 꿰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성서학자들은 지식과 진리간의 이러한 긴장을 누구보다도 첨예하게 마주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첨예한 긴장은, 가장 현대적인 학문적 언어로 채워진 신학일 경우에도, 많은 경우 잘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있습니다. ‘거룩’, 즉 시공간적인 초월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거룩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인과성에 관한 학문적 설명도 포기하지 않으려니 어정쩡함은 불가피한 현상일 것입니다.
한데 흥미롭게도 그러는 와중에서 여러 성서학자들이 성서를 ‘신앙적 성찰의 책’이라고 재규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찰’이라는 표현을 주목해야 합니다.
먼저 성찰을 얘기하려면 ‘통념’이라는 것에 대해 얘기해야 합니다. 통념은 같은 문화권대에 사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지혜입니다. 매 순간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아름답고 추한지 등을 판단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런데 통념은 그러한 혼란스러움을 제거하는 사회가 공유하는 진리인 것입니다. 여기서 유념할 것은 통념이, 양심이나 상식처럼 이해되는 세속화된 사회와는 달리, 종교적으로 구성될 때 종종 초시간적이고 초공간적인 진리인양 받아들여진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통념은 사람들의 경험들을 해석하는 인식 체계입니다. 또한 종교적 통념은 그러한 해석 체계가 절대적인 의미를 지니는 경향이 있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한데 이것은 통념이 경험을 억압하는 인식틀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성찰이란 바로 이때 나타납니다. 즉 통념으로 인해 경험이 억압되는 현상을 고통스러워하는 데서 성찰은 출발합니다. 고통스러워함은 종종 통념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문제제기는 통념의 부정으로 나아갑니다. 성찰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견고한 인식 체계, 모든 것을 어떤 방향으로 해석하게 하는 사유의 틀, 심지어 자기 자신의 내면까지 지배하는 이 견고함에 고통스러워하고 문제제기하고 투쟁하는 것, 이러한 통념에 대한 부정의 과정이 곧 성찰인 것입니다.
성찰은 ‘이것이 답이다’라고 말하게 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이것이 답이 아니다라고 말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찰만으로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끝없이 진리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해야 맞는 것이야’라고 말하는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성찰은 바로 이러한 진리를 흔드는 인식의 과정인 것입니다.
성서가 신앙적 성찰의 책이라는 성서학자들의 규정은 성서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줍니다. 성서를 믿는 게 아니라 성서를 ‘성찰’하라고, 그것이 성서가 우리에게 준 하나의 가르침이라고 말입니다.
현대의 학문은 성서에 대한 믿음을 시험합니다. 그런데 성찰하는 신앙은 지식과 진리의 싸움에 신앙을 낭비하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삶을 성찰하는 태도를 일깨웁니다. 이럴 경우 학문은 성서의 편견, 성서에 대한 편견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하나의 장치입니다. 물론 학문이 또 하나의 진리로 자리매김하려 할 때, 성서를 성찰하는 신앙은 그러한 학문의 편견, 그 배제의 메커니즘에 저항하게 합니다.
그런 점에서 누가 제게 성서를 믿느냐고 묻는다면, 성서를 믿는 것도 아니요 안 믿는 것도 아니고, 다만 성서를 성찰하겠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즉 성경에 기록된 이적이 사실이 아니라면 톡 까놓고 말해 하나님은 없는 것입니다!!" 에 놀라서,
이미 읽으신 글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김진호 목사님 2004년 설교 중에서 부분을 퍼왔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비(非)진리 아니 반(反)진리를 필요로 하고, 또한 반진리와 투쟁해야 하는 진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속성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법의 언어에 대한 최근의 일련의 연구에서 제기된 견해인데, 진리의 책이라는 거룩한 경전(經典), 나아가 경전 가운데 유일 정통의 경전인 정전(正典)의 언어에 대한 해석으로 바로 연결시켜도 전혀 무방합니다. 요컨대 초시간적이고 초공간적인 진리, 즉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모든 영역에서 ‘진리’를 대표하는 책이 바로 ‘성서’라는 기독교의 종교적 언어 속에 내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서를 믿는다’는 표현 속에는 역사적 진실성에 대한 믿음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믿는 대상이 ‘성서’가 아니라면, 가령 ‘친구인 너를 믿는다’는 말은 믿음의 함의가 전혀 다릅니다. ‘친구가 지금 내게 거짓을 말하고 있을지라도, 아니 더 나아가 그가 일반적인 의미에서 좋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친구이니까 너의 이 태도는 나를 해하려는 것은 필경 아닐 거야’라는 확신이자 자기 암시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성서를 믿나요?’라는 물음은 초시공간적인 양자택일의 상황으로 우리를 몰아붙입니다. 거기에는 ‘진리다’와 ‘반진리다’라는 두 가지 대답만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둘 다를 부정할 수 없는 우리는 당황하게 되고, 그래서 대답을 유보하지 않으면 빠져나올 수 없는 순환의 고리 속에 꿰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성서학자들은 지식과 진리간의 이러한 긴장을 누구보다도 첨예하게 마주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첨예한 긴장은, 가장 현대적인 학문적 언어로 채워진 신학일 경우에도, 많은 경우 잘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있습니다. ‘거룩’, 즉 시공간적인 초월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거룩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인과성에 관한 학문적 설명도 포기하지 않으려니 어정쩡함은 불가피한 현상일 것입니다.
한데 흥미롭게도 그러는 와중에서 여러 성서학자들이 성서를 ‘신앙적 성찰의 책’이라고 재규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찰’이라는 표현을 주목해야 합니다.
먼저 성찰을 얘기하려면 ‘통념’이라는 것에 대해 얘기해야 합니다. 통념은 같은 문화권대에 사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지혜입니다. 매 순간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아름답고 추한지 등을 판단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런데 통념은 그러한 혼란스러움을 제거하는 사회가 공유하는 진리인 것입니다. 여기서 유념할 것은 통념이, 양심이나 상식처럼 이해되는 세속화된 사회와는 달리, 종교적으로 구성될 때 종종 초시간적이고 초공간적인 진리인양 받아들여진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통념은 사람들의 경험들을 해석하는 인식 체계입니다. 또한 종교적 통념은 그러한 해석 체계가 절대적인 의미를 지니는 경향이 있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한데 이것은 통념이 경험을 억압하는 인식틀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성찰이란 바로 이때 나타납니다. 즉 통념으로 인해 경험이 억압되는 현상을 고통스러워하는 데서 성찰은 출발합니다. 고통스러워함은 종종 통념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문제제기는 통념의 부정으로 나아갑니다. 성찰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견고한 인식 체계, 모든 것을 어떤 방향으로 해석하게 하는 사유의 틀, 심지어 자기 자신의 내면까지 지배하는 이 견고함에 고통스러워하고 문제제기하고 투쟁하는 것, 이러한 통념에 대한 부정의 과정이 곧 성찰인 것입니다.
성찰은 ‘이것이 답이다’라고 말하게 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이것이 답이 아니다라고 말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찰만으로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끝없이 진리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해야 맞는 것이야’라고 말하는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성찰은 바로 이러한 진리를 흔드는 인식의 과정인 것입니다.
성서가 신앙적 성찰의 책이라는 성서학자들의 규정은 성서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줍니다. 성서를 믿는 게 아니라 성서를 ‘성찰’하라고, 그것이 성서가 우리에게 준 하나의 가르침이라고 말입니다.
현대의 학문은 성서에 대한 믿음을 시험합니다. 그런데 성찰하는 신앙은 지식과 진리의 싸움에 신앙을 낭비하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삶을 성찰하는 태도를 일깨웁니다. 이럴 경우 학문은 성서의 편견, 성서에 대한 편견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하나의 장치입니다. 물론 학문이 또 하나의 진리로 자리매김하려 할 때, 성서를 성찰하는 신앙은 그러한 학문의 편견, 그 배제의 메커니즘에 저항하게 합니다.
그런 점에서 누가 제게 성서를 믿느냐고 묻는다면, 성서를 믿는 것도 아니요 안 믿는 것도 아니고, 다만 성서를 성찰하겠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즉 성경에 기록된 이적이 사실이 아니라면 톡 까놓고 말해 하나님은 없는 것입니다!!" 에 놀라서,
이미 읽으신 글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김진호 목사님 2004년 설교 중에서 부분을 퍼왔습니다.
2007.05.16 12:36:35
주술로써 질병을 고치던 시대의 인물, 예수를,
주술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주술사라고 말하는 것,
어느 것이 온당한 것일까를 생각했더랬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주술은 의술을 방해하는 천덕꾸러기인 시대이구요.
예수의 치유행위에 대해서 아무런 의심이 없습니다.
합비루들이 자유를 찾아 새로운 공동체를 일구어가던
사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의 기록을 사실로서 확정하려는 것과,,
우리의 인식이 도달한 인문학적 사유를 통해서
성경에 담긴 계시/고백의 광맥을 탐사해 나가면서,
나의 고백을 담아내는 것,, 어느 것이 바른 신앙일까요?
제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이 저를 만들어갑니다. ^^
주술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주술사라고 말하는 것,
어느 것이 온당한 것일까를 생각했더랬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주술은 의술을 방해하는 천덕꾸러기인 시대이구요.
예수의 치유행위에 대해서 아무런 의심이 없습니다.
합비루들이 자유를 찾아 새로운 공동체를 일구어가던
사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의 기록을 사실로서 확정하려는 것과,,
우리의 인식이 도달한 인문학적 사유를 통해서
성경에 담긴 계시/고백의 광맥을 탐사해 나가면서,
나의 고백을 담아내는 것,, 어느 것이 바른 신앙일까요?
제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이 저를 만들어갑니다. ^^
2007.05.16 13:12:47
볼테르 님,
한 가지만 해명해야겠군요.
나는 신학이 자연과학을 선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언급한 적도 없는데,
볼테르 님은 그렇게 읽었군요.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기는,
더구나 그것이 온전하게 회통되기는 어렵거나
불가능한지도 모르겠군요.
어쨌거나
신학이 기존의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읽어내려는 자연과학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고유한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 뿐이었지요.
그것이 때로는 배타적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보편적인 진리에 근거합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계시'라고 말할 수 있지요,.
계시라는 용어를 오해하지는 마세요.
계시는 보편적 해석학을 무시하는
기독교의 독선적인 인식론이 아니랍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이덱거의 <존재> 개념에 가깝습니다.
하이덱거가 말하듯 존재의 말걸음에 응대하는 인간 사유가 바르게 전개될 때
인간은 현존재로 살아갈 수 있듯이
신학은 기본적으로 계시론적인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신학은 자연과학을 재단하지 않는다는 사실만
전하고 싶군요.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다는 말입니다.
아자!!!
한 가지만 해명해야겠군요.
나는 신학이 자연과학을 선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언급한 적도 없는데,
볼테르 님은 그렇게 읽었군요.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기는,
더구나 그것이 온전하게 회통되기는 어렵거나
불가능한지도 모르겠군요.
어쨌거나
신학이 기존의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읽어내려는 자연과학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고유한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 뿐이었지요.
그것이 때로는 배타적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보편적인 진리에 근거합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계시'라고 말할 수 있지요,.
계시라는 용어를 오해하지는 마세요.
계시는 보편적 해석학을 무시하는
기독교의 독선적인 인식론이 아니랍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이덱거의 <존재> 개념에 가깝습니다.
하이덱거가 말하듯 존재의 말걸음에 응대하는 인간 사유가 바르게 전개될 때
인간은 현존재로 살아갈 수 있듯이
신학은 기본적으로 계시론적인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신학은 자연과학을 재단하지 않는다는 사실만
전하고 싶군요.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다는 말입니다.
아자!!!
2007.05.16 13:26:39
정목사님 끝까지 제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긴 비가 오네요...남도 끝자락입니다...비가오는 날은 건축공사 현장에서 일하시는 분들만 쉬는게 아니라 저희도 쉬는 날이랍니다. 다행히 오늘같이 생각들이 모이는 날에 비가 와주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정목사님의 글을 곡해한 부분이 있었다면 바로 잡겠습니다.
다만, 제가 그렇게 곡해하게 된 목사님의 구절을 나열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대목은 쓸데 없이 진화론 자체와 소모적인 논쟁을 벌일 것이 아니라
진화론이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신학이 해야 할 일이지요.
과학자들이 과학 너머를 볼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진화론이 나아가야 할 방향제시와 과학자들이 과학 너머를 볼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 저는 이것을 신학의 자연과학에 대한 선도적 역할론으로 해석했습니다. 사실 좀 해석하고도 이상했던 것이, 제가 여태까지 정목사님의 저작물로 파악했던 목사님 생각과는 맞지않는 것이 아닌가, 제가 잘못해석했나 하는 생각에 몇번씩 읽어보앗답니다. 역시 제가 잘못 읽은 것이로군요. ^^
신학이 하이데거적 사유에서의 계시라고 한다면 저는 정목사님과 계시에 대한 의견이 많이 닮은 것 같습니다. 단 (여기에 언급되진 않았지만) 탈은폐에 관한 몇가지 지적은 석연치 않아보입니다만, 그래도 대승적으로 같은 지점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가르침 바랍니다. ^^
감사합니다.
여긴 비가 오네요...남도 끝자락입니다...비가오는 날은 건축공사 현장에서 일하시는 분들만 쉬는게 아니라 저희도 쉬는 날이랍니다. 다행히 오늘같이 생각들이 모이는 날에 비가 와주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정목사님의 글을 곡해한 부분이 있었다면 바로 잡겠습니다.
다만, 제가 그렇게 곡해하게 된 목사님의 구절을 나열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대목은 쓸데 없이 진화론 자체와 소모적인 논쟁을 벌일 것이 아니라
진화론이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신학이 해야 할 일이지요.
과학자들이 과학 너머를 볼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진화론이 나아가야 할 방향제시와 과학자들이 과학 너머를 볼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 저는 이것을 신학의 자연과학에 대한 선도적 역할론으로 해석했습니다. 사실 좀 해석하고도 이상했던 것이, 제가 여태까지 정목사님의 저작물로 파악했던 목사님 생각과는 맞지않는 것이 아닌가, 제가 잘못해석했나 하는 생각에 몇번씩 읽어보앗답니다. 역시 제가 잘못 읽은 것이로군요. ^^
신학이 하이데거적 사유에서의 계시라고 한다면 저는 정목사님과 계시에 대한 의견이 많이 닮은 것 같습니다. 단 (여기에 언급되진 않았지만) 탈은폐에 관한 몇가지 지적은 석연치 않아보입니다만, 그래도 대승적으로 같은 지점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가르침 바랍니다. ^^
감사합니다.
2007.05.16 14:45:02
다음으로 데미님께 답글 드리겠습니다.
<<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언어에는 감쳐진 본질도, 세계의 본질을 향해 난 형이상학적 창문도
없다는 점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동의하시지요?)
이것만을 주목한다면 이것은 비트겐슈타인 만의 고유한 업적은 아닐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영역에서 출발한 것이었지만 이미 칸트에 의해 이루어진 업적입니다.
그렇다면,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인문학적인 성경읽기에서 '감쳐진 본질'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바로 위 댓글에서 말한 것처럼 출애굽기의 열 가지 기적이 또는 홍해가 갈라진 기적이
하나님의 참하나임임을 드러내는 징표로서 이해할 수는 있지만 진실 즉 '감쳐진 본질'에
접근할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votaire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실재론적 해석과 상징적 해석이 동등하다는 것입니다.
근거가 없다는 뜻이라기 보다 해석에 근거라는 것을 붙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입니다.^^) >>
- 이 구절에서 저는 다시 한 번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데미님이 이해하신 비트겐슈타인은 심각하게 곡해되고 있으며, 설령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받은 일부 해체주의자들이 본질은 없고 차이만 있다라고 얘기하는 주장을 받아들이신다고 해도 위와 같은 주장은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하나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1. 비트겐슈타인의 사조에 따라 언어에는 감춰진 본질도, 세계의 본질을 향해 난 형이상학적 창문도 없다는 점을 받아들인다면,그러한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인문학으로 성서읽기에서 "감춰진 본질"은 드러날 수 없지 않느냐? 따라서 실재론적 해석과 상징론적 해석은 동등하다.
: 비트겐슈타인의 사조에 따르면 언어 자체에는 분명 감춰진 본질도, 세계의 본질을 향해 난 형이상학적 창문도 없습니다. 전기에는 언어그림이론에 따른 원자론으로 그것이 있다는 쪽 이었으나 후기에는 가족유사성이론에 의해 결국 없다로 전향을 했죠. 그 이유가 중요합니다. "언어 자체"에는 본질이 없지만, "언어 행위"에는, 즉 구문론적 언어법칙이 아닌 우리의 일상 언어 행위에서는 그것이 연구될 수 있다는 것이죠. 중요한 점은 비트겐슈타인이 언어분석을 통해 버린 것과 희망한 것을 잘 구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로 말되어질 수 없는 것에 침묵하라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동조하고,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언어행위에 대해서 말 되어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실천적 논구를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 대입시켰습니다. 지적하신 바와 같이 그 둘은 공통점이 많습니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이론을 설명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니 가족유사성 이론에 대한 것만 살짝 포인트를 찍어주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후기 비트겐슈타인 이론에 따르면 감춰진 본질은 없습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큰 오해가 일어나는데요.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감춰지던, 탈은페되던 원체 본질이란 없습니다. 가족유사성 이론은 대표적인 비본질주의 담론입니다. 그런데 데미님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이론에 의거해 "감춰진 본질"을 찾을 수 없다고 얘기하시니 뭔가 내부논리적으로 모순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원래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이론에 본질이란 없는데도 불구하고, "감춰진 본질"을 보는데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이론을 도구로 사용하신 것과 그걸 사용했더니 역시 아무것도 안보이더라 라는 식의 주장은 "낫으로 사과를 깎았는데 역시 잘 안깎이더라. 그렇다면 이 사과는 먹을 순 없는것이다."라는 식의 황당한 이야기와 같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이론은 언어-행위에 대한 화용론적 담론입니다. 이는 실천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앞에서 말씀드린바, 그 실천적 성격이란 칸트가 말한 실천이성비판에서 언급된 "요청에 의해 존재하는 신"의 개념과, 성서로 따진다면, 빈이님이 말씀하신 성찰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같은 실천이성적 활동이 성서읽기라고 한다면 인문학으로 성서읽기는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겠죠. 바로 언어-행위 말입니다. "그렇다면 인문학이 언어-행위론적 활동인가?" 라고 묻는다면 대개의 사람들은 그렇다라고 대답하실 것 같습니다. 이것에 관한 토론은 다음 주제의 꼭지로 삼아도 충만할 주제이니 잠시 보류하죠. 여기까지는 이만 비트겐슈타인 이론의 잘못된 사용에 대한 지적이었습니다.
그 다음,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인문학적 해석은 결국 둘 다 감춰진 본질에 다가갈 수 없으니 실재론과 상징론 모든 해석이 동등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무리가 있어보입니다. 이것은 비논리적인 양시론입니다. 양시론이 성립하면 양비론도 성립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요.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인문학적 해석은 결국 감춰진 본질에 다가갈 수 없으니 실재론과 상징론 모든 해석이 무의미하다"
오히려 문맥상으로는 양비론이 훨씬 논리적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어찌해서 양시론이 성립되는지 먼저 그 심연 속의 거대한 긍정부터 파고들어가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반론은 실재론과 상징론이 어떤 측면에서 동일한 것인지 혹은 차이가 나는지 좀 더 가치론적으로 면밀히 분석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미 오지의 어느 부족은 아직도 지구가 네모나고 평평한 대지라고만 생각합니다. 그것은 일견 진실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그런 신화적 신념에 대한 해석은 세계에 대한 "상식"에 기초가 됩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상식은 우리가 생명체로서 번식하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제입니다. 추론같은 고등사고 작용과는 차원이 틀리죠. 하지만 우리는 상식이 과학적 추론에 의해서 붕괴되는 것을 만힝 봐왔습니다. 다친 데에는 무조건 과산화수소로 소독을 해야한다거나, 겨울에는 추워서 감기에 걸린다는 믿음이나 그런 것들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있어 땅이 평평한 네모라는 진실은 그들이 생존하는데 필요한 상식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지구가 네모나다는 세계에 대한 해석은 충분히 가치가 있으며, 부분적 진실입니다. 단 사실은 아니죠. 다시 현대 문명사회로 눈을 돌려봅시다. 이제 우리에게 있어서 필요한 것은 "생존을 위한 상식과 상식화된 추론들"입니다. 비행기를 운용하려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도 알아야하고 측량을 하려면 유클리드 기하학으로는 그다지 정밀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추론들과 함께 여전히 우리의 사소한 동작들은 상식에 지배를 받습니다. 이것은 생존을 위한 진화적 기제로서 다친 곳을 소독하거나 겨울에 추워서 감기가 걸리는 것은 아니지만 둘 다 몸에 해로운 것은 주의해야 한다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식이란 그런 것이죠.
이제 다시 실재론과 상징론을 볼 때, 제가 전술한 발달심리학의 결과들을 말씀드렸거니와, 세계를 보는 해석의 차이는 발달적인 것과 비발달적인 것이 있습니다. 문명화된, 문자를 가진 사회에서 문자 이전의 세계관을 가진다면 비발달적 세계관을 가진 것이 되거니와, 그것은 앞서 비유한 원시부족의 상식적 수준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실재론적 해석이죠. 홍해가 갈라지고, 10가지 재앙이 일어나고, 해가 멈추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이런 일들을 해석하는데 있어 실재론적 해석은 원시부족에서 통용되는 진실입니다. 진실이되 부분적으로 진실인, 그 사회에서 통용되는 상식과 믿음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상징론을 비롯한 많은 인문학적인 해석들은 다양한 문명사회의 발전만큼이나 발달된 세계관을 펼치고 잇습니다. 그것은 퇴행적이지 않으며 상식과 함께 보편적 진실을 추구하는데 도움이되는 추론을 담고 잇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계관의 선택과 그에 따른 해석의 차이는 가치론적으로 논구하여보면 분명 차이가 잇습니다. 통용되는 사회가 다르며, 그 사회에 따라 가치부여가 틀려지며, 더욱이 발달과 비발달의 차이도 존재하죠. 그것이 무작정 동둥하다라는 식의 양시론은 묵고될 수 없습니다.
실천적으로 우리가 무얼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부분적인 대답으로 바로 "인문학으로 성서읽기"를 대답으로 하며 이만 줄입니다.
<<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언어에는 감쳐진 본질도, 세계의 본질을 향해 난 형이상학적 창문도
없다는 점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동의하시지요?)
이것만을 주목한다면 이것은 비트겐슈타인 만의 고유한 업적은 아닐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영역에서 출발한 것이었지만 이미 칸트에 의해 이루어진 업적입니다.
그렇다면,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인문학적인 성경읽기에서 '감쳐진 본질'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바로 위 댓글에서 말한 것처럼 출애굽기의 열 가지 기적이 또는 홍해가 갈라진 기적이
하나님의 참하나임임을 드러내는 징표로서 이해할 수는 있지만 진실 즉 '감쳐진 본질'에
접근할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votaire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실재론적 해석과 상징적 해석이 동등하다는 것입니다.
근거가 없다는 뜻이라기 보다 해석에 근거라는 것을 붙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입니다.^^) >>
- 이 구절에서 저는 다시 한 번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데미님이 이해하신 비트겐슈타인은 심각하게 곡해되고 있으며, 설령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받은 일부 해체주의자들이 본질은 없고 차이만 있다라고 얘기하는 주장을 받아들이신다고 해도 위와 같은 주장은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하나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1. 비트겐슈타인의 사조에 따라 언어에는 감춰진 본질도, 세계의 본질을 향해 난 형이상학적 창문도 없다는 점을 받아들인다면,그러한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인문학으로 성서읽기에서 "감춰진 본질"은 드러날 수 없지 않느냐? 따라서 실재론적 해석과 상징론적 해석은 동등하다.
: 비트겐슈타인의 사조에 따르면 언어 자체에는 분명 감춰진 본질도, 세계의 본질을 향해 난 형이상학적 창문도 없습니다. 전기에는 언어그림이론에 따른 원자론으로 그것이 있다는 쪽 이었으나 후기에는 가족유사성이론에 의해 결국 없다로 전향을 했죠. 그 이유가 중요합니다. "언어 자체"에는 본질이 없지만, "언어 행위"에는, 즉 구문론적 언어법칙이 아닌 우리의 일상 언어 행위에서는 그것이 연구될 수 있다는 것이죠. 중요한 점은 비트겐슈타인이 언어분석을 통해 버린 것과 희망한 것을 잘 구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로 말되어질 수 없는 것에 침묵하라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동조하고,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언어행위에 대해서 말 되어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실천적 논구를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 대입시켰습니다. 지적하신 바와 같이 그 둘은 공통점이 많습니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이론을 설명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니 가족유사성 이론에 대한 것만 살짝 포인트를 찍어주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후기 비트겐슈타인 이론에 따르면 감춰진 본질은 없습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큰 오해가 일어나는데요.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감춰지던, 탈은페되던 원체 본질이란 없습니다. 가족유사성 이론은 대표적인 비본질주의 담론입니다. 그런데 데미님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이론에 의거해 "감춰진 본질"을 찾을 수 없다고 얘기하시니 뭔가 내부논리적으로 모순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원래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이론에 본질이란 없는데도 불구하고, "감춰진 본질"을 보는데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이론을 도구로 사용하신 것과 그걸 사용했더니 역시 아무것도 안보이더라 라는 식의 주장은 "낫으로 사과를 깎았는데 역시 잘 안깎이더라. 그렇다면 이 사과는 먹을 순 없는것이다."라는 식의 황당한 이야기와 같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이론은 언어-행위에 대한 화용론적 담론입니다. 이는 실천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앞에서 말씀드린바, 그 실천적 성격이란 칸트가 말한 실천이성비판에서 언급된 "요청에 의해 존재하는 신"의 개념과, 성서로 따진다면, 빈이님이 말씀하신 성찰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같은 실천이성적 활동이 성서읽기라고 한다면 인문학으로 성서읽기는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겠죠. 바로 언어-행위 말입니다. "그렇다면 인문학이 언어-행위론적 활동인가?" 라고 묻는다면 대개의 사람들은 그렇다라고 대답하실 것 같습니다. 이것에 관한 토론은 다음 주제의 꼭지로 삼아도 충만할 주제이니 잠시 보류하죠. 여기까지는 이만 비트겐슈타인 이론의 잘못된 사용에 대한 지적이었습니다.
그 다음,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인문학적 해석은 결국 둘 다 감춰진 본질에 다가갈 수 없으니 실재론과 상징론 모든 해석이 동등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무리가 있어보입니다. 이것은 비논리적인 양시론입니다. 양시론이 성립하면 양비론도 성립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요.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인문학적 해석은 결국 감춰진 본질에 다가갈 수 없으니 실재론과 상징론 모든 해석이 무의미하다"
오히려 문맥상으로는 양비론이 훨씬 논리적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어찌해서 양시론이 성립되는지 먼저 그 심연 속의 거대한 긍정부터 파고들어가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반론은 실재론과 상징론이 어떤 측면에서 동일한 것인지 혹은 차이가 나는지 좀 더 가치론적으로 면밀히 분석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미 오지의 어느 부족은 아직도 지구가 네모나고 평평한 대지라고만 생각합니다. 그것은 일견 진실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그런 신화적 신념에 대한 해석은 세계에 대한 "상식"에 기초가 됩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상식은 우리가 생명체로서 번식하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제입니다. 추론같은 고등사고 작용과는 차원이 틀리죠. 하지만 우리는 상식이 과학적 추론에 의해서 붕괴되는 것을 만힝 봐왔습니다. 다친 데에는 무조건 과산화수소로 소독을 해야한다거나, 겨울에는 추워서 감기에 걸린다는 믿음이나 그런 것들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있어 땅이 평평한 네모라는 진실은 그들이 생존하는데 필요한 상식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지구가 네모나다는 세계에 대한 해석은 충분히 가치가 있으며, 부분적 진실입니다. 단 사실은 아니죠. 다시 현대 문명사회로 눈을 돌려봅시다. 이제 우리에게 있어서 필요한 것은 "생존을 위한 상식과 상식화된 추론들"입니다. 비행기를 운용하려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도 알아야하고 측량을 하려면 유클리드 기하학으로는 그다지 정밀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추론들과 함께 여전히 우리의 사소한 동작들은 상식에 지배를 받습니다. 이것은 생존을 위한 진화적 기제로서 다친 곳을 소독하거나 겨울에 추워서 감기가 걸리는 것은 아니지만 둘 다 몸에 해로운 것은 주의해야 한다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식이란 그런 것이죠.
이제 다시 실재론과 상징론을 볼 때, 제가 전술한 발달심리학의 결과들을 말씀드렸거니와, 세계를 보는 해석의 차이는 발달적인 것과 비발달적인 것이 있습니다. 문명화된, 문자를 가진 사회에서 문자 이전의 세계관을 가진다면 비발달적 세계관을 가진 것이 되거니와, 그것은 앞서 비유한 원시부족의 상식적 수준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실재론적 해석이죠. 홍해가 갈라지고, 10가지 재앙이 일어나고, 해가 멈추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이런 일들을 해석하는데 있어 실재론적 해석은 원시부족에서 통용되는 진실입니다. 진실이되 부분적으로 진실인, 그 사회에서 통용되는 상식과 믿음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상징론을 비롯한 많은 인문학적인 해석들은 다양한 문명사회의 발전만큼이나 발달된 세계관을 펼치고 잇습니다. 그것은 퇴행적이지 않으며 상식과 함께 보편적 진실을 추구하는데 도움이되는 추론을 담고 잇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계관의 선택과 그에 따른 해석의 차이는 가치론적으로 논구하여보면 분명 차이가 잇습니다. 통용되는 사회가 다르며, 그 사회에 따라 가치부여가 틀려지며, 더욱이 발달과 비발달의 차이도 존재하죠. 그것이 무작정 동둥하다라는 식의 양시론은 묵고될 수 없습니다.
실천적으로 우리가 무얼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부분적인 대답으로 바로 "인문학으로 성서읽기"를 대답으로 하며 이만 줄입니다.
2007.05.16 15:59:36
빈이님, 다른 쪽에서도 의미있는 생각을 들려주셨던 기억이 나네요. 반갑습니다.
인용해 주신 글, 김진호 목사님이면 '반신학'을 이야기하신 분이 아닌가 싶네요...
이런 민감한 주제의 토론을 통해서, 다른 방법이라면 수년이 걸려도 접근하지 못하는 주제로
우리가 신속히 접근해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저는 김진호 목사님의 말씀 가운데 두 가지를 붙잡고 조금 더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그 하나는 "당신은 성서를 믿나요?"라는 물음에 왜 둘 다 부정할 수 없느냐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믿을 수가 없는 이유가 그다지 복잡한 사유를 거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일상적인 경험을 토대로 형성되어 온 자연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입니다.
둘 다 부정할 수 없다 했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초월적인 존재를 떠나지도 못하는데
초월적인 존재라면 당연히 초월하리라 짐작되는 자연의 원칙이 아이러니하게도
그 존재를 이해하는 기준 잣대가 되고 있다는 것이 이상합니다.
그리고 진퇴양란에서 나타난 '통년과 성찰'을 중심으로 한 반신학은 어떤 모양인가요?
지적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구미는 댕기지만 그 이상일까 싶습니다.
플라톤을 읽는 정도 이상의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줄 수 있느냐는 것에 의구심이 입니다.
통념이란 말도 언뜻 들으면 그럴 듯해 보이지만 과연 존재와 인식에 관한 사회 통념이
우리 시대와 달랐던 시대는 어느 시대에 있었는지 그것도 궁금합니다.
존재와 인식에 관한 통념이 우리 시대와 이 천년 전에는 달랐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요?
젊은 시절 저는 한비자와 플라톤을 읽으면서 그들 시대와 우리 시대의 통념이 너무나
일치한다는 사실에 새삼 전율을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통념이 다르려면 차원이 달라져야 합니다.
같은 해 한 날 한 시에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났지만 쌍둥이는 아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통념을 달리해야 합니다. 세 쌍둥이거든요...^^
과연 성서의 진실을 바라볼 때의 통념도 이런 것일까요?
'통념과 성찰'에 대한 견해는 제 생각으로는 허공에 뜬 관념 같습니다만...
또 하나,
성경에 기록된 이적이 사실이 아니라도 하나님을 그대로 믿는다면 그 믿음을 무엇을 믿는 믿음이고
또 그것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구원? 또는 내세에 대한 희망? 아마도 그것은 아닐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렇다면 이 땅에 사는 동안 얻을 수 있다고 믿는 마음의 평안? 지적 욕구의 충족? 자족?
사람들과의 교제? 사업의 도움? 도대체 기독교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늘오늘 님이 말씀하시듯 '성경에 담긴 계시/고백의 광맥을 탐사해 나가면서, 나의 고백을
담아내는 것'을 통해 얻어지는 것은 무엇일까요?
인용해 주신 글, 김진호 목사님이면 '반신학'을 이야기하신 분이 아닌가 싶네요...
이런 민감한 주제의 토론을 통해서, 다른 방법이라면 수년이 걸려도 접근하지 못하는 주제로
우리가 신속히 접근해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저는 김진호 목사님의 말씀 가운데 두 가지를 붙잡고 조금 더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그 하나는 "당신은 성서를 믿나요?"라는 물음에 왜 둘 다 부정할 수 없느냐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믿을 수가 없는 이유가 그다지 복잡한 사유를 거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일상적인 경험을 토대로 형성되어 온 자연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입니다.
둘 다 부정할 수 없다 했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초월적인 존재를 떠나지도 못하는데
초월적인 존재라면 당연히 초월하리라 짐작되는 자연의 원칙이 아이러니하게도
그 존재를 이해하는 기준 잣대가 되고 있다는 것이 이상합니다.
그리고 진퇴양란에서 나타난 '통년과 성찰'을 중심으로 한 반신학은 어떤 모양인가요?
지적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구미는 댕기지만 그 이상일까 싶습니다.
플라톤을 읽는 정도 이상의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줄 수 있느냐는 것에 의구심이 입니다.
통념이란 말도 언뜻 들으면 그럴 듯해 보이지만 과연 존재와 인식에 관한 사회 통념이
우리 시대와 달랐던 시대는 어느 시대에 있었는지 그것도 궁금합니다.
존재와 인식에 관한 통념이 우리 시대와 이 천년 전에는 달랐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요?
젊은 시절 저는 한비자와 플라톤을 읽으면서 그들 시대와 우리 시대의 통념이 너무나
일치한다는 사실에 새삼 전율을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통념이 다르려면 차원이 달라져야 합니다.
같은 해 한 날 한 시에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났지만 쌍둥이는 아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통념을 달리해야 합니다. 세 쌍둥이거든요...^^
과연 성서의 진실을 바라볼 때의 통념도 이런 것일까요?
'통념과 성찰'에 대한 견해는 제 생각으로는 허공에 뜬 관념 같습니다만...
또 하나,
성경에 기록된 이적이 사실이 아니라도 하나님을 그대로 믿는다면 그 믿음을 무엇을 믿는 믿음이고
또 그것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구원? 또는 내세에 대한 희망? 아마도 그것은 아닐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렇다면 이 땅에 사는 동안 얻을 수 있다고 믿는 마음의 평안? 지적 욕구의 충족? 자족?
사람들과의 교제? 사업의 도움? 도대체 기독교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늘오늘 님이 말씀하시듯 '성경에 담긴 계시/고백의 광맥을 탐사해 나가면서, 나의 고백을
담아내는 것'을 통해 얻어지는 것은 무엇일까요?
2007.05.16 18:24:19
voltaire 님, 비트겐슈타인을 두고 우리가 하는 담론이 곁가지로 빠진 것 같기는 하나
인문학적인 성경읽기에 중요한 포인트를 잡을 수도 있을 것 같으니 조금만 더 이어 갑시다.
암튼 voltaire 님과 제가 일치하는 부분이 나타났네요.
비트겐슈타인이 언어분석을 통해 '버린 것'과 '희망한 것' 중에서 버린 것으로,
언어 자체에는 분명 감춰진 본질도, 세계의 본질을 향해 난 형이상학적 창문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맥이 닿는 견해라고 보여지는데
그런데 vlotaire 님은 그런 말에 동의하고 밑에 가서는 후기 비트겐슈타인 이론에 따르면
감춰지던, 탈은폐되던 원체 본질이란 없다고 말을 합니다.
제가 처음 비트겐슈타인을 거론하며 수면위로 오르락내리락 한다는 견해로 지적한 것이
진실이 (원래 없으니) 홍해가 갈라졌든 아니든 상관이 없다,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실천적 문제를 빼면 같은 말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희망한 것'과 인문학적인 성경읽기로 넘어가기까지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문제들이 더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건 이후에 하고...
지금 우리가 벌이는 비트겐슈타인이 본질이 있다 했는가 없다 했는가, 라는 진실게임을 추적하는데
그 자신의 후기 이론을 적용시킨다면 어떤 언어/행위로 접근해 갈 수 있을까요?
지금 우리가 인문학적인 성경읽기라는 주제로 이런 담론을 벌이니
그보다는 훨씬 쉬울 비트겐슈타인 진실게임을 해결 할 수 있는지 먼저 생각해 본다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과 인문학적인 성경읽기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비트겐슈타인이라는 한 인물이 전기와 후기에 본질에 대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했고,
그가 죽은 후에 2년 뒤, 그의 케임브리지 제자들의 입을 통해 알려진 파편화된 후기 철학을 통해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본질에 대한 그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과연 접근할 수 있는 것일까요?
어쩐지 인문학적인 성경읽기와 너무도 비슷한 주제인 듯싶은데...
인문학적인 성경읽기에 중요한 포인트를 잡을 수도 있을 것 같으니 조금만 더 이어 갑시다.
암튼 voltaire 님과 제가 일치하는 부분이 나타났네요.
비트겐슈타인이 언어분석을 통해 '버린 것'과 '희망한 것' 중에서 버린 것으로,
언어 자체에는 분명 감춰진 본질도, 세계의 본질을 향해 난 형이상학적 창문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맥이 닿는 견해라고 보여지는데
그런데 vlotaire 님은 그런 말에 동의하고 밑에 가서는 후기 비트겐슈타인 이론에 따르면
감춰지던, 탈은폐되던 원체 본질이란 없다고 말을 합니다.
제가 처음 비트겐슈타인을 거론하며 수면위로 오르락내리락 한다는 견해로 지적한 것이
진실이 (원래 없으니) 홍해가 갈라졌든 아니든 상관이 없다,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실천적 문제를 빼면 같은 말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희망한 것'과 인문학적인 성경읽기로 넘어가기까지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문제들이 더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건 이후에 하고...
지금 우리가 벌이는 비트겐슈타인이 본질이 있다 했는가 없다 했는가, 라는 진실게임을 추적하는데
그 자신의 후기 이론을 적용시킨다면 어떤 언어/행위로 접근해 갈 수 있을까요?
지금 우리가 인문학적인 성경읽기라는 주제로 이런 담론을 벌이니
그보다는 훨씬 쉬울 비트겐슈타인 진실게임을 해결 할 수 있는지 먼저 생각해 본다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과 인문학적인 성경읽기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비트겐슈타인이라는 한 인물이 전기와 후기에 본질에 대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했고,
그가 죽은 후에 2년 뒤, 그의 케임브리지 제자들의 입을 통해 알려진 파편화된 후기 철학을 통해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본질에 대한 그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과연 접근할 수 있는 것일까요?
어쩐지 인문학적인 성경읽기와 너무도 비슷한 주제인 듯싶은데...
2007.05.16 18:30:55
뭔가 소통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 듯합니다. 제가 볼 때, 본질이란 단어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요. 데미님의 본질에 대한 생각은 철학적으로 볼 때, 실체 개념과 유사하다고 생각됩니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이 파악하고자 했던 본질은 실체 개념이 아닌, 언어-그림 이론을 통해 나타난 세계의 존재방식입니다. 즉 언어와 세계가 논리적 원자문장으로 분할할 경우 일대일 대응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이 경우에는 진리가 일대일 대응설을 취하게 됩니다. 근원적 무언가가 있다는 실체 개념과는 다르죠. 비트겐슈타인은 실체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 언어를 연구한 것이 아닙니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사상도 방법과 진리면에서는 전기와 틀리지만 역시 실체개념의 본질을 연구하진 않았습니다. 전기나 후기 모두 언어가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포커스가 맞춰진 것이죠.
따라서 저의 전술한 내용은 이런 기본 배경을 숙지하고 다시 읽어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후기비트겐슈타인은 가족유사성이론을 들어 진리인식의 비본질성에 관해 언급하기도 했습니다만 그것이 진리는 없다식의 회의주의나 진리 따위는 아무거나이거나 혹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식의 해체주의 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에 대해 부연하자면: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말하고자 했던 바는 결코 본질이 있다, 없다의 얘기가 아닙니다. 언어연구에 있어서 그것이 얼마나 세계를 반영하고 있는가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죠. 가족유사성에 의거한 비본질주의적 특성은 언어-행위에 나타난 일종의 담화행태적 특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언어-행위 연구를 통하여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어떤 사건이 실재했는가 하지않았는가를 따질 수 있는 논리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건을 기술하는 우리의 언어-행위적 특성을 연구하면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다양한 언어-행위적 양태들을 볼 수 있을 것이란 말입니다. 그 양태들 중 하나가 "언어 규칙"인데 그 "규칙의 성격"이 비본질적이란 것이죠. 결코 진리 속성이 비본질적인 것이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걸 사용해서 감춰진 진실에 대한 문제를 풀겠다는 건 좀 모순 처럼 보인다는 제 견해였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이론이 오용되었건 남용되었건, 혹은 적절히 인용되었건간에 실재론과 상징론을 위시한 모든 이론이 동등하다라는 것에 대한 저의 반론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양시론으로 끌고 가시는 거대한 긍정의 추동력은 무엇입니까? 데미님의 글을 보면 전제가 항상 긍정과 실재입니다. 독특한 것은 그 긍정과 실재의 대상이 비상식적이거나 비과학적인 것이지요. 대상이 그러한 성질을 가지고 잇으면 논리적으로는 양비론이 더 적합할텐데요. 더구나 제가 제시한 바있는 해석체계에 대한 발달심리학적, 인류학적 연구 성과물들은 실재론과 상징론을 같은 위치에 두고 보지 않습니다.
터툴리아누스는 불합리하므로 믿는다고 말했고 안셀무스는 알기 위해 믿는다고 했습니다.
데미님의 이적사건에 대한 양자론적 해석은 안셀무스편에 있다가도
왜 초월자를 이성으로 재는지 모르겟다는 입장의 터툴리안쪽으로 가기도 합니다.
둘은 분명 모순인데 데미님이 주장하시고자 하는바의 bootstrapping point를 자신의 경우에 적용시키셔서 얘기해주십시오.
따라서 저의 전술한 내용은 이런 기본 배경을 숙지하고 다시 읽어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후기비트겐슈타인은 가족유사성이론을 들어 진리인식의 비본질성에 관해 언급하기도 했습니다만 그것이 진리는 없다식의 회의주의나 진리 따위는 아무거나이거나 혹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식의 해체주의 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에 대해 부연하자면: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말하고자 했던 바는 결코 본질이 있다, 없다의 얘기가 아닙니다. 언어연구에 있어서 그것이 얼마나 세계를 반영하고 있는가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죠. 가족유사성에 의거한 비본질주의적 특성은 언어-행위에 나타난 일종의 담화행태적 특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언어-행위 연구를 통하여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어떤 사건이 실재했는가 하지않았는가를 따질 수 있는 논리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건을 기술하는 우리의 언어-행위적 특성을 연구하면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다양한 언어-행위적 양태들을 볼 수 있을 것이란 말입니다. 그 양태들 중 하나가 "언어 규칙"인데 그 "규칙의 성격"이 비본질적이란 것이죠. 결코 진리 속성이 비본질적인 것이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걸 사용해서 감춰진 진실에 대한 문제를 풀겠다는 건 좀 모순 처럼 보인다는 제 견해였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이론이 오용되었건 남용되었건, 혹은 적절히 인용되었건간에 실재론과 상징론을 위시한 모든 이론이 동등하다라는 것에 대한 저의 반론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양시론으로 끌고 가시는 거대한 긍정의 추동력은 무엇입니까? 데미님의 글을 보면 전제가 항상 긍정과 실재입니다. 독특한 것은 그 긍정과 실재의 대상이 비상식적이거나 비과학적인 것이지요. 대상이 그러한 성질을 가지고 잇으면 논리적으로는 양비론이 더 적합할텐데요. 더구나 제가 제시한 바있는 해석체계에 대한 발달심리학적, 인류학적 연구 성과물들은 실재론과 상징론을 같은 위치에 두고 보지 않습니다.
터툴리아누스는 불합리하므로 믿는다고 말했고 안셀무스는 알기 위해 믿는다고 했습니다.
데미님의 이적사건에 대한 양자론적 해석은 안셀무스편에 있다가도
왜 초월자를 이성으로 재는지 모르겟다는 입장의 터툴리안쪽으로 가기도 합니다.
둘은 분명 모순인데 데미님이 주장하시고자 하는바의 bootstrapping point를 자신의 경우에 적용시키셔서 얘기해주십시오.
2007.05.16 18:37:57
성경에 기록된 이적이 사실이 아니라도 하나님을 그대로 믿는다면 그 믿음을 무엇을 믿는 믿음이고
또 그것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구원? 또는 내세에 대한 희망? 아마도 그것은 아닐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렇다면 이 땅에 사는 동안 얻을 수 있다고 믿는 마음의 평안? 지적 욕구의 충족? 자족?
사람들과의 교제? 사업의 도움? 도대체 기독교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늘오늘 님이 말씀하시듯 '성경에 담긴 계시/고백의 광맥을 탐사해 나가면서, 나의 고백을
담아내는 것'을 통해 얻어지는 것은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한 대답을 꺼립니다.
1. 믿음의 문제
객관적 신앙;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그 사실, 우리가 믿는 대상
주관적 믿음: 내가 믿는 행위; 나의 믿음; 실은 이 믿음은 나의 믿음이 아니라 주님의 믿음임; 히 12;2 믿음의 주(창시자)요 온전케 하시는 이(완성자)
우리가 홍해 사건을 믿는 것, 주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그것은 객관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믿는 신앙이지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믿는 성경의 귀한 것들을 가리킵니다. 이 객관적인 믿음은 주관적인 믿음을 산출합니다.
요 1;12 영접=믿음; 내 안에 들어오신 그 분이 나로 하여급 믿게 합니다. 지극히 거룩한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큰 축복(유 20절)으로 이 믿음이 우리에게 올 때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옵니다. 즉 믿음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 안에는 구원, 거듭남, 신성한 생명,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 있습니다(벧후 1:4).
지금 우리는 이 거룩한 믿음위에 자신을 건축해야 합니다. 믿는 이들인 우리는 지극히 거룩한 믿음의 내용으로 우리 자신을 건축하고 이 믿음의 기초 위에 자신을 건축해야 합니다.
2. 도대체 기독교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구원, 거듭남, 신성한 생명,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입니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도올이 조직 신학자들과의 대담에서 밝혔듯이 "사람이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기독교를 통해 우리는 "능력에 있어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과 표현과 인격과 형상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이유입니다. 믿음의 결국이 그것입니다.
3. 열린 종말론과 닫힌 종말론, 즉 인문학적으로 성서 읽기와 축자 영감설에 대한 나의 견해
저는 한의사 입니다. 한의학에는 크게 두 파가 있습니다. 고래의 한의학과 사상의학이 그것입니다. 이 둘을 비교하면서 "열린 종말론과 닫힌 종말론, 즉 인문학적으로 성서 읽기와 축자 영감설"에 대해 말해 보겠습니다.
고래의 한의학은 자연이나 우주에 속한 인간, 즉 자연을 바탕으로 인간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사상의학은 사람을 통하여 우주를 바라봅니다. 인문학적으로 성서 읽기는 한의학으로 하면 사상의학입니다. 축자 영감설은 한의학으로 하면 고래의 한의학입니다.
이에 대한 차이를 쉽게 말해봅니다.
고래의 한의학은 나타난 증상을 가지고 어느 장부가 고장이 났다고 말합니다. 즉 밖을 통하여 안을 바라봅니다.
사상의학은 반대로 안을 통하여 밖을 바라봅니다. 즉 어느 장부가 고장이 났기 때문에 어떠한 증상이 나타났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에는 다 맹점이 있습니다. 고래의 한의학에서는 나타난 증상이 이러하면 안에 어느 장부가 고장이 났을거라는 가정을 자연의 현상을 통하여 설정해 놓았는데, 실제로 이것이 만만잖다는 것입니다. 사상의학은 이미 내장의 원인이 체질에 있기 때문에 체질만 알면 어느 내장이 원인이 되어 어떤 증상이 나타난 줄을 알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체질을 알기가 만만잖다는 것입니다.
이 둘을 비교하면 그래도 저는 사상의학이 쉬게 느껴집니다. 왜 안을 먼저 알고 안을 통해서 밖을 보는 것이 쉬우니까요. 예를 들면 나무의 가지가 썪어 들어가는데 어디서 고장이 났지는 뿌리를 파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학문은 다 사람을 놓고 진단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이론이든 사람을 치료하면 그만입니다.
마찬 가지로 인문학적으로 성서 읽기와 축자 영감설은 다 신학입니다. 결국은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학문이지요. 인문학적으로 성서 읽기에는 뭔가 문제가 생기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인식의 지평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축자 영감설의 신앙에도 뭔가 문제가 생기기 쉽습니다. 맹신이 생기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 두 신학에서 저는 어떤 것이 더 적합할까 말한다면 아직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성서를 보는 축자 영감설에 더 비중을 둡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인식 저편에 있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3장 7절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선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학문이 서로 통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평행선이네요.
또 그것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구원? 또는 내세에 대한 희망? 아마도 그것은 아닐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렇다면 이 땅에 사는 동안 얻을 수 있다고 믿는 마음의 평안? 지적 욕구의 충족? 자족?
사람들과의 교제? 사업의 도움? 도대체 기독교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늘오늘 님이 말씀하시듯 '성경에 담긴 계시/고백의 광맥을 탐사해 나가면서, 나의 고백을
담아내는 것'을 통해 얻어지는 것은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한 대답을 꺼립니다.
1. 믿음의 문제
객관적 신앙;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그 사실, 우리가 믿는 대상
주관적 믿음: 내가 믿는 행위; 나의 믿음; 실은 이 믿음은 나의 믿음이 아니라 주님의 믿음임; 히 12;2 믿음의 주(창시자)요 온전케 하시는 이(완성자)
우리가 홍해 사건을 믿는 것, 주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그것은 객관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믿는 신앙이지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믿는 성경의 귀한 것들을 가리킵니다. 이 객관적인 믿음은 주관적인 믿음을 산출합니다.
요 1;12 영접=믿음; 내 안에 들어오신 그 분이 나로 하여급 믿게 합니다. 지극히 거룩한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큰 축복(유 20절)으로 이 믿음이 우리에게 올 때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옵니다. 즉 믿음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 안에는 구원, 거듭남, 신성한 생명,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 있습니다(벧후 1:4).
지금 우리는 이 거룩한 믿음위에 자신을 건축해야 합니다. 믿는 이들인 우리는 지극히 거룩한 믿음의 내용으로 우리 자신을 건축하고 이 믿음의 기초 위에 자신을 건축해야 합니다.
2. 도대체 기독교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구원, 거듭남, 신성한 생명,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입니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도올이 조직 신학자들과의 대담에서 밝혔듯이 "사람이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기독교를 통해 우리는 "능력에 있어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과 표현과 인격과 형상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이유입니다. 믿음의 결국이 그것입니다.
3. 열린 종말론과 닫힌 종말론, 즉 인문학적으로 성서 읽기와 축자 영감설에 대한 나의 견해
저는 한의사 입니다. 한의학에는 크게 두 파가 있습니다. 고래의 한의학과 사상의학이 그것입니다. 이 둘을 비교하면서 "열린 종말론과 닫힌 종말론, 즉 인문학적으로 성서 읽기와 축자 영감설"에 대해 말해 보겠습니다.
고래의 한의학은 자연이나 우주에 속한 인간, 즉 자연을 바탕으로 인간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사상의학은 사람을 통하여 우주를 바라봅니다. 인문학적으로 성서 읽기는 한의학으로 하면 사상의학입니다. 축자 영감설은 한의학으로 하면 고래의 한의학입니다.
이에 대한 차이를 쉽게 말해봅니다.
고래의 한의학은 나타난 증상을 가지고 어느 장부가 고장이 났다고 말합니다. 즉 밖을 통하여 안을 바라봅니다.
사상의학은 반대로 안을 통하여 밖을 바라봅니다. 즉 어느 장부가 고장이 났기 때문에 어떠한 증상이 나타났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에는 다 맹점이 있습니다. 고래의 한의학에서는 나타난 증상이 이러하면 안에 어느 장부가 고장이 났을거라는 가정을 자연의 현상을 통하여 설정해 놓았는데, 실제로 이것이 만만잖다는 것입니다. 사상의학은 이미 내장의 원인이 체질에 있기 때문에 체질만 알면 어느 내장이 원인이 되어 어떤 증상이 나타난 줄을 알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체질을 알기가 만만잖다는 것입니다.
이 둘을 비교하면 그래도 저는 사상의학이 쉬게 느껴집니다. 왜 안을 먼저 알고 안을 통해서 밖을 보는 것이 쉬우니까요. 예를 들면 나무의 가지가 썪어 들어가는데 어디서 고장이 났지는 뿌리를 파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학문은 다 사람을 놓고 진단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이론이든 사람을 치료하면 그만입니다.
마찬 가지로 인문학적으로 성서 읽기와 축자 영감설은 다 신학입니다. 결국은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학문이지요. 인문학적으로 성서 읽기에는 뭔가 문제가 생기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인식의 지평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축자 영감설의 신앙에도 뭔가 문제가 생기기 쉽습니다. 맹신이 생기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 두 신학에서 저는 어떤 것이 더 적합할까 말한다면 아직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성서를 보는 축자 영감설에 더 비중을 둡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인식 저편에 있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3장 7절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선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학문이 서로 통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평행선이네요.
2007.05.16 19:35:22
voltaire 님, 역시 사용하는 단어의 커뮤니케이션에 어긋남이 있었던 것 같군요.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말하고자 했던 바는 결코 본질이 있다, 없다의 얘기가 아니라는 데 동의합니다.
그걸 표현한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감춰지던, 탈은폐되던 원체 본질이란 없습니다.'란 말이
언어 자체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세계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이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해도 될 것 같습니다.
결국 이 문제가 우리의 처음 주제에서 다시 나오겠지만...
그런데,
출애굽 기사에 대한 voltaire 님의 해석을 들으니...
"이제 다시 실재론과 상징론을 볼 때, 제가 전술한 발달심리학의 결과들을 말씀드렸거니와, 세계를 보는 해석의 차이는 발달적인 것과 비발달적인 것이 있습니다. 문명화된, 문자를 가진 사회에서 문자 이전의 세계관을 가진다면 비발달적 세계관을 가진 것이 되거니와, 그것은 앞서 비유한 원시부족의 상식적 수준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실재론적 해석이죠. 홍해가 갈라지고, 10가지 재앙이 일어나고, 해가 멈추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이런 일들을 해석하는데 있어 실재론적 해석은 원시부족에서 통용되는 진실입니다. 진실이되 부분적으로 진실인, 그 사회에서 통용되는 상식과 믿음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상징론을 비롯한 많은 인문학적인 해석들은 다양한 문명사회의 발전만큼이나 발달된 세계관을 펼치고 잇습니다. 그것은 퇴행적이지 않으며 상식과 함께 보편적 진실을 추구하는데 도움이되는 추론을 담고 잇기 때문입니다."
voltaire 님은 출애굽 당시나 예수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아프리카 미개인 수준으로
이해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진화론의 영향이겠지요.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쓰여진 로마서를 보면 그 사유의 수준이 우리 시대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지 않나요?
플라톤 [국가]를 읽어보면 어떨까요? 역시 우리 시대와는 다른 미개한 시대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도 불가사의라고 말하는 피라미드를 축조한 수학과 과학 수준으로 출애굽 당시인
람세스 2세나 메르네프타하 시대가 미개한 시대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진화론을 받아들인다 해도 4-5000년은 진화하기에는 너무도 짧은 순간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이 초월자의 존재를 부인한 것이 아니라면 (있다 없다가 아니라)
그 초월자가 존재하고 (가능성은 있으니까)
너희가 말하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면 이적을 보이라는 바로의 요구에 대한 응답으로 10가지 이적이
행해졌다는 출애굽 내용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결국 초월자는 없다는 해석으로 이어지는 게 아닌가요?
터툴리아누스는 불합리하므로 믿는다고 말했고 안셀무스는 알기 위해 믿는다고 했습니다.
제가 잠깐 의견을 물었던 이적사건에 대한 양자론적 해석은 그 어느 쪽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터툴리아누스와 안셀무스의 이야기가 모순이 아니라 다 옳다고 생각합니다.
양시론적인 말이 아니라... 이 문제는 실천 문제에서 다시 나올 것 같은데요.
bootstrapping point 를 다시 잡아갑시다... 천천히.
여러 갈래의 주제가 마구 튀어나오니 제대로 짚어가기가 힘드네요.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말하고자 했던 바는 결코 본질이 있다, 없다의 얘기가 아니라는 데 동의합니다.
그걸 표현한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감춰지던, 탈은폐되던 원체 본질이란 없습니다.'란 말이
언어 자체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세계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이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해도 될 것 같습니다.
결국 이 문제가 우리의 처음 주제에서 다시 나오겠지만...
그런데,
출애굽 기사에 대한 voltaire 님의 해석을 들으니...
"이제 다시 실재론과 상징론을 볼 때, 제가 전술한 발달심리학의 결과들을 말씀드렸거니와, 세계를 보는 해석의 차이는 발달적인 것과 비발달적인 것이 있습니다. 문명화된, 문자를 가진 사회에서 문자 이전의 세계관을 가진다면 비발달적 세계관을 가진 것이 되거니와, 그것은 앞서 비유한 원시부족의 상식적 수준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실재론적 해석이죠. 홍해가 갈라지고, 10가지 재앙이 일어나고, 해가 멈추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이런 일들을 해석하는데 있어 실재론적 해석은 원시부족에서 통용되는 진실입니다. 진실이되 부분적으로 진실인, 그 사회에서 통용되는 상식과 믿음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상징론을 비롯한 많은 인문학적인 해석들은 다양한 문명사회의 발전만큼이나 발달된 세계관을 펼치고 잇습니다. 그것은 퇴행적이지 않으며 상식과 함께 보편적 진실을 추구하는데 도움이되는 추론을 담고 잇기 때문입니다."
voltaire 님은 출애굽 당시나 예수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아프리카 미개인 수준으로
이해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진화론의 영향이겠지요.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쓰여진 로마서를 보면 그 사유의 수준이 우리 시대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지 않나요?
플라톤 [국가]를 읽어보면 어떨까요? 역시 우리 시대와는 다른 미개한 시대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도 불가사의라고 말하는 피라미드를 축조한 수학과 과학 수준으로 출애굽 당시인
람세스 2세나 메르네프타하 시대가 미개한 시대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진화론을 받아들인다 해도 4-5000년은 진화하기에는 너무도 짧은 순간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이 초월자의 존재를 부인한 것이 아니라면 (있다 없다가 아니라)
그 초월자가 존재하고 (가능성은 있으니까)
너희가 말하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면 이적을 보이라는 바로의 요구에 대한 응답으로 10가지 이적이
행해졌다는 출애굽 내용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결국 초월자는 없다는 해석으로 이어지는 게 아닌가요?
터툴리아누스는 불합리하므로 믿는다고 말했고 안셀무스는 알기 위해 믿는다고 했습니다.
제가 잠깐 의견을 물었던 이적사건에 대한 양자론적 해석은 그 어느 쪽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터툴리아누스와 안셀무스의 이야기가 모순이 아니라 다 옳다고 생각합니다.
양시론적인 말이 아니라... 이 문제는 실천 문제에서 다시 나올 것 같은데요.
bootstrapping point 를 다시 잡아갑시다... 천천히.
여러 갈래의 주제가 마구 튀어나오니 제대로 짚어가기가 힘드네요.
2007.05.16 20:48:48
이제 인문학적인 성경읽기라는 주제로 돌아가기 위해...
앞서 진화론을 인정한다는 것이 무신론적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라는 게 확인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습니다.
창발적진화론을 받아들여도 진화의 단계단계마다 하나님이 관여하십니다.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고, 참 하나님이면 이적을 보이라는 바로의 주장은 일리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라고 희롱당했습니다.
만일 성경의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참 하나님이라면 이적이 있지 않을까요?
지금 다비안 님들 앞에 누군가 나타나서 내가 하나님이다, 하면 어떻게 판단하시겠습니까?
"당신이 하나님이거든..." 이렇게 말을 시작해야 하고 그 다음을 채워야 한다면 뭐라 하시겠습니까?
만일 성경의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참 하나님이라도 그런 이적을 행하신다는 게 불합리할까요?
우리가 사는 세계 너머에 초월자가 있다면 말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를 택하면 뭐 이런 이야기가 다 시시껄렁한 잡담이 되겠지만...
앞서 진화론을 인정한다는 것이 무신론적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라는 게 확인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습니다.
창발적진화론을 받아들여도 진화의 단계단계마다 하나님이 관여하십니다.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고, 참 하나님이면 이적을 보이라는 바로의 주장은 일리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라고 희롱당했습니다.
만일 성경의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참 하나님이라면 이적이 있지 않을까요?
지금 다비안 님들 앞에 누군가 나타나서 내가 하나님이다, 하면 어떻게 판단하시겠습니까?
"당신이 하나님이거든..." 이렇게 말을 시작해야 하고 그 다음을 채워야 한다면 뭐라 하시겠습니까?
만일 성경의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참 하나님이라도 그런 이적을 행하신다는 게 불합리할까요?
우리가 사는 세계 너머에 초월자가 있다면 말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를 택하면 뭐 이런 이야기가 다 시시껄렁한 잡담이 되겠지만...
2007.05.16 22:19:22
잠시 악천후로 인해 인터넷이 안되는 관계로 제가 썼던 글들이 다 날아가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이거 영 기운이 빠지는데요~ ㅎㅎㅎ 하지만 다시 글을 써봅니다. 일단 제글에 대한 반론에 대답을 해야겠죠.
1. 비트겐슈타인 얘기에 대한 오해는 푸셨을 법한데 아직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시니 난감합니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이 초월자의 존재를 부인한 것이 아니라면 (있다 없다가 아니라)
그 초월자가 존재하고 (가능성은 있으니까)
너희가 말하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면 이적을 보이라는 바로의 요구에 대한 응답으로 10가지 이적이
행해졌다는 출애굽 내용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결국 초월자는 없다는 해석으로 이어지는 게 아닌가요? "
이상의 질문은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에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쓸데없는 질문입니다. 즉 우리의 사고를 한계지우는 언어의 그물에 다름아닌 질문이란 겁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세상을 얼마나 나타낼 수 있는지에 대해 랑기 위해 언어그림이론과 언어행위이론을 연구했지, 결코 특정 시점의 사건에 대한 기록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언어를 연구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에 대한 후계인 옥스포드 일상언어 학파의 화행론에 대한 예가 도움이 될까해서 간략히 소개합니다
J.L.Austin을 필두로한 옥스포드 일상언어 학파는 어떤 문장들에 대한 진위파악은 실제 행위와 관련되어 그 적절-부적절의 여부가 가려지는데 주목합니다. 초기 러셀의 기술이론은 모든 문장이 문장 자체의 분석에 의해 진위가 파악될 수 있다고 하였는데 그것에 대한 반대입장이었죠. 실제 행동의 성사여부에 달린 적절-부적절 문장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겁니다.
"나는 야고보에게 유산 100만 파운드를 지급한다"
이 문장에 대한 진위 여부는 기술이론처럼 100만 파운드라는 돈의 존재라던가, 야고보라는 사람의 존재여부에 따른 것이 아니라 상기한 100만 파운드의 돈을 야고보에게 증여하느냐 혹은 하지 않느냐의 수행에 따라 그 적절과 부적절의 여부가 가려진다고 보는 것이죠. 이와같은 문장을 수행문이라고 지칭하는데 수행문이야 말로 언어-행위이론의 정수라고 보앗던 것이죠.
이제 수행문의 분석입장에서 이집트 탈출기의 이적들을 살펴본다면 그 진위여부는 당연히 이적들이 실재했는가 하지않았는가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하지만 어떤 특정시점에 벌어진 과거의 사건이 실재했는가 하지않았는가에 대한 문제는 과학적인 연구조사가 필요한 것이므로 언어적 분석으로는 그 진위가 가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후기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이어받은 수행문의 분석과정을 도입하더라도 이적이 실재하였는가에 대한 논의는 언어적 분석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애초부터 비트겐슈타인의 의도가 아닌 "잘못된 질문"에 그 방법을 끼워넣는 것은 해답을 도출하는데 어려움을 즌다는 것을 이렇게 길게 풀어서 설명한 겁니다.
2. 제가 예로든 세계관의 발달심리학적/인류학적 연구 결과물들은 인간의 현상해석에 대한 강력한 실증적 사례입니다. 문화권별로, 문자이전과 이후별로 나누어질 수 있는 세계관의 다양성은 데미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그리 간단히 나눌 수 잇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예로든 남미 오지 마을의 부족은 문자이전의 신화적 세계관을 실재적 해석에 기대어 살고 있는 예이지만, 데미님이 예로 드신 그리스 문명이나 이집트 문명의 경우는 문자가 발명되고 난 이후의 세계에 대한 해석들로 그 세계관의 차이가 그야말로 천양지차이겠죠. 더구나 말씀하신 국가론이나, 로마서같은 저작물은 실재론적 해석을 꼭 해야할 당위성을 가지고 있는 저작물이 아니거니와, 그것이 저자의 원본 그대로 내려온 경우도 아닙니다. 따라서 예로서는 부적절하구요. bootstrapping point의 기원론에 관한 논의는 발달심리학이나 인류학적 사실에 관한 기본배경 없이는 더이상 논의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세계관에 대한 선택이 해석보다 먼저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데미님의 견해도 100% 사실이 아니거니와 (왜냐하면 세계관의 변화는 발달하면서 일어나므로 맞물려 일어나는 진행형입니다)
해석 이전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 세계관은 100% 선택이라고만 볼 수도 없숩니다
(왜냐하면 자연/사회적 환경에 의해 세계관이 결정되어 주어진 것일 수도 잇으므로 자의적이 아닌 경우가 많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미님은 생물학적 진화론을 다시 여기에 도입하야 개념혼동을 일으키며 논박을 하고 계신데 이점은 못내 아쉽습니다.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가 같이 일어나는 공진화의 개념은 이보다 좀 더 큰 상위의 스케일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언급될 계제는 아니구요.
3. 창발론적 진화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창발론적 진화론이 실재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단속평형설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단계마다 하느님이 관여하신다는 발상은 순전히 기독교 측에서 해석을 하기 위한 방편이죠. 전술한 바와같이 진화론은 홀로 설 수 잇지만 판넨베르그의 자연신학은 홀로 설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진화론은 그냥 진화론이고 거기에 신학적 해석이 잇을 뿐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이적을 행하시는 창조주가 실재한다는 명분으로 삼는 것은 비약입니다.
4. 이제 데미님께 묻습니다. 대체 왜 반과학적이고 비상식적인 이적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해석되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잇는지 말입니다. 문제를 좀 더 국한시켜본다면 다른 문화권의 비슷한 이적설화들도 (예를 들어 길가메쉬 서사시같은 같은 중근동의 신화에 나오는 여러 영웅들과 이적들에 관한) 성서와 마찬가지로 동등한 자격이 잇습니다. 먼저 데미님이 성서의 이적들에 대한 기사가 실재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다른 종교의 그것에도 같은 입장을 취하셔야 합니다. 최소한의 일관된 입장유지를 위해서라도 다른 문화권이나 종교의 이적들은 상징론적으로 해석되어선 안된다고 먼저 인정하셔야한다는 겁니다. 기독교의 성서가 어떤 고고학적인 특별한 지위를 누릴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적이라는 것이 왜 반물리학적이고 비이성적 성격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는지도 설명하셔야 합니다. 초월자가 자신을 나타내는 신비는 왜 그러한 방식인가에 대한 타당한 입증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그것은 신의 존재방식에 관한 질문입니다. 왜 신은 그러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보이고 그러한 방식으로 밖에 보일 수 없는 것인가? 그게 신의 존재방식인가? 이런힌 질문들 말입니다. 창조주는 초이성적이고 초자연적이지 반이성적이거나 반자연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많이 모호하게 사용하는 초물리주의나 초자연주의는 인식의 저 너머에 잇는 것이므로 언어로 나타내기조차 힘이듭니다. 하지만 말씀하신 이적 따위들은 충분히 상상가능한 엽기적인 일이며 인간 상상력의 한계가 거기까지라는 것 밖에 보여주지 못한 인류학적 사실들일 뿐입니다. 그래서 여러 종교문화권에서 언어로 비슷한 패턴으로 기록되어졌으며 그것은, 인간이 신과 자연이 돌아가는 것을 알아내기 위한 하나의 지적 노정의 초창기 일부 파편일 뿐입니다. 데미님이 알고자 하시는 신비같은 것은 반자연법칙적인 것이 아니라 초자연법칙적이며 이것은 인간의 상상 즉, 언어를 뛰어넘는 일입니다.
다시 비트겐슈타인으로 돌아가죠
"말할 수 없는것에 관해서는 침묵하라"
인문학으로 성서읽기는 말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해 말을 하는 작업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적에 대한 실재론적 인식은 해석적 작업이 아닌 하나의 물리학적 사실의 인지라고 봐야 할겁니다.
세상에 반물리학적 비이성적 신비보다 세상이 지금 이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비이며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분석해낼 수 있는 하느님의 현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개념과 모순되지 않죠.
1. 비트겐슈타인 얘기에 대한 오해는 푸셨을 법한데 아직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시니 난감합니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이 초월자의 존재를 부인한 것이 아니라면 (있다 없다가 아니라)
그 초월자가 존재하고 (가능성은 있으니까)
너희가 말하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면 이적을 보이라는 바로의 요구에 대한 응답으로 10가지 이적이
행해졌다는 출애굽 내용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결국 초월자는 없다는 해석으로 이어지는 게 아닌가요? "
이상의 질문은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에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쓸데없는 질문입니다. 즉 우리의 사고를 한계지우는 언어의 그물에 다름아닌 질문이란 겁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세상을 얼마나 나타낼 수 있는지에 대해 랑기 위해 언어그림이론과 언어행위이론을 연구했지, 결코 특정 시점의 사건에 대한 기록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언어를 연구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에 대한 후계인 옥스포드 일상언어 학파의 화행론에 대한 예가 도움이 될까해서 간략히 소개합니다
J.L.Austin을 필두로한 옥스포드 일상언어 학파는 어떤 문장들에 대한 진위파악은 실제 행위와 관련되어 그 적절-부적절의 여부가 가려지는데 주목합니다. 초기 러셀의 기술이론은 모든 문장이 문장 자체의 분석에 의해 진위가 파악될 수 있다고 하였는데 그것에 대한 반대입장이었죠. 실제 행동의 성사여부에 달린 적절-부적절 문장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겁니다.
"나는 야고보에게 유산 100만 파운드를 지급한다"
이 문장에 대한 진위 여부는 기술이론처럼 100만 파운드라는 돈의 존재라던가, 야고보라는 사람의 존재여부에 따른 것이 아니라 상기한 100만 파운드의 돈을 야고보에게 증여하느냐 혹은 하지 않느냐의 수행에 따라 그 적절과 부적절의 여부가 가려진다고 보는 것이죠. 이와같은 문장을 수행문이라고 지칭하는데 수행문이야 말로 언어-행위이론의 정수라고 보앗던 것이죠.
이제 수행문의 분석입장에서 이집트 탈출기의 이적들을 살펴본다면 그 진위여부는 당연히 이적들이 실재했는가 하지않았는가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하지만 어떤 특정시점에 벌어진 과거의 사건이 실재했는가 하지않았는가에 대한 문제는 과학적인 연구조사가 필요한 것이므로 언어적 분석으로는 그 진위가 가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후기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이어받은 수행문의 분석과정을 도입하더라도 이적이 실재하였는가에 대한 논의는 언어적 분석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애초부터 비트겐슈타인의 의도가 아닌 "잘못된 질문"에 그 방법을 끼워넣는 것은 해답을 도출하는데 어려움을 즌다는 것을 이렇게 길게 풀어서 설명한 겁니다.
2. 제가 예로든 세계관의 발달심리학적/인류학적 연구 결과물들은 인간의 현상해석에 대한 강력한 실증적 사례입니다. 문화권별로, 문자이전과 이후별로 나누어질 수 있는 세계관의 다양성은 데미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그리 간단히 나눌 수 잇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예로든 남미 오지 마을의 부족은 문자이전의 신화적 세계관을 실재적 해석에 기대어 살고 있는 예이지만, 데미님이 예로 드신 그리스 문명이나 이집트 문명의 경우는 문자가 발명되고 난 이후의 세계에 대한 해석들로 그 세계관의 차이가 그야말로 천양지차이겠죠. 더구나 말씀하신 국가론이나, 로마서같은 저작물은 실재론적 해석을 꼭 해야할 당위성을 가지고 있는 저작물이 아니거니와, 그것이 저자의 원본 그대로 내려온 경우도 아닙니다. 따라서 예로서는 부적절하구요. bootstrapping point의 기원론에 관한 논의는 발달심리학이나 인류학적 사실에 관한 기본배경 없이는 더이상 논의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세계관에 대한 선택이 해석보다 먼저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데미님의 견해도 100% 사실이 아니거니와 (왜냐하면 세계관의 변화는 발달하면서 일어나므로 맞물려 일어나는 진행형입니다)
해석 이전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 세계관은 100% 선택이라고만 볼 수도 없숩니다
(왜냐하면 자연/사회적 환경에 의해 세계관이 결정되어 주어진 것일 수도 잇으므로 자의적이 아닌 경우가 많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미님은 생물학적 진화론을 다시 여기에 도입하야 개념혼동을 일으키며 논박을 하고 계신데 이점은 못내 아쉽습니다.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가 같이 일어나는 공진화의 개념은 이보다 좀 더 큰 상위의 스케일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언급될 계제는 아니구요.
3. 창발론적 진화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창발론적 진화론이 실재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단속평형설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단계마다 하느님이 관여하신다는 발상은 순전히 기독교 측에서 해석을 하기 위한 방편이죠. 전술한 바와같이 진화론은 홀로 설 수 잇지만 판넨베르그의 자연신학은 홀로 설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진화론은 그냥 진화론이고 거기에 신학적 해석이 잇을 뿐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이적을 행하시는 창조주가 실재한다는 명분으로 삼는 것은 비약입니다.
4. 이제 데미님께 묻습니다. 대체 왜 반과학적이고 비상식적인 이적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해석되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잇는지 말입니다. 문제를 좀 더 국한시켜본다면 다른 문화권의 비슷한 이적설화들도 (예를 들어 길가메쉬 서사시같은 같은 중근동의 신화에 나오는 여러 영웅들과 이적들에 관한) 성서와 마찬가지로 동등한 자격이 잇습니다. 먼저 데미님이 성서의 이적들에 대한 기사가 실재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다른 종교의 그것에도 같은 입장을 취하셔야 합니다. 최소한의 일관된 입장유지를 위해서라도 다른 문화권이나 종교의 이적들은 상징론적으로 해석되어선 안된다고 먼저 인정하셔야한다는 겁니다. 기독교의 성서가 어떤 고고학적인 특별한 지위를 누릴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적이라는 것이 왜 반물리학적이고 비이성적 성격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는지도 설명하셔야 합니다. 초월자가 자신을 나타내는 신비는 왜 그러한 방식인가에 대한 타당한 입증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그것은 신의 존재방식에 관한 질문입니다. 왜 신은 그러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보이고 그러한 방식으로 밖에 보일 수 없는 것인가? 그게 신의 존재방식인가? 이런힌 질문들 말입니다. 창조주는 초이성적이고 초자연적이지 반이성적이거나 반자연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많이 모호하게 사용하는 초물리주의나 초자연주의는 인식의 저 너머에 잇는 것이므로 언어로 나타내기조차 힘이듭니다. 하지만 말씀하신 이적 따위들은 충분히 상상가능한 엽기적인 일이며 인간 상상력의 한계가 거기까지라는 것 밖에 보여주지 못한 인류학적 사실들일 뿐입니다. 그래서 여러 종교문화권에서 언어로 비슷한 패턴으로 기록되어졌으며 그것은, 인간이 신과 자연이 돌아가는 것을 알아내기 위한 하나의 지적 노정의 초창기 일부 파편일 뿐입니다. 데미님이 알고자 하시는 신비같은 것은 반자연법칙적인 것이 아니라 초자연법칙적이며 이것은 인간의 상상 즉, 언어를 뛰어넘는 일입니다.
다시 비트겐슈타인으로 돌아가죠
"말할 수 없는것에 관해서는 침묵하라"
인문학으로 성서읽기는 말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해 말을 하는 작업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적에 대한 실재론적 인식은 해석적 작업이 아닌 하나의 물리학적 사실의 인지라고 봐야 할겁니다.
세상에 반물리학적 비이성적 신비보다 세상이 지금 이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비이며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분석해낼 수 있는 하느님의 현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개념과 모순되지 않죠.
2007.05.16 23:37:04
우선 voltaire 님의 답변 1번에 대해서는, 제 말을 오해하셨습니다.
저는 비트겐슈타인 이야기를 끝내고 처음 했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계속 헛도는 감이 있었는데 드디어 그 원인이 찾아냈습니다.
우리가 가다가 걸린 곳이 결국 이성의 문제였군요...
voltaire 님은 아래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창조주는 초이성적이고 초자연적이지 반이성적이거나 반자연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많이 모호하게 사용하는 초물리주의나 초자연주의는 인식의 저 너머에 잇는 것이므로 언어로 나타내기조차 힘이듭니다.
결국 이 말과 관련하여 우리가 계속 어긋나곤 했던 것입니다.
지리하게 토론한 보람이 있습니다. 여기가 이제 제대로 된 출발점입니다.~!!
저는 비트겐슈타인 이야기를 끝내고 처음 했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계속 헛도는 감이 있었는데 드디어 그 원인이 찾아냈습니다.
우리가 가다가 걸린 곳이 결국 이성의 문제였군요...
voltaire 님은 아래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창조주는 초이성적이고 초자연적이지 반이성적이거나 반자연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많이 모호하게 사용하는 초물리주의나 초자연주의는 인식의 저 너머에 잇는 것이므로 언어로 나타내기조차 힘이듭니다.
결국 이 말과 관련하여 우리가 계속 어긋나곤 했던 것입니다.
지리하게 토론한 보람이 있습니다. 여기가 이제 제대로 된 출발점입니다.~!!
2007.05.17 00:58:19
데미님의 칸트철학이 또 제 머리에서 쥐가나게 하는군요. 게다가 언어문제까지 겹치니, 몽롱합니다. 다만, 책에서 읽던 것이 이렇게 두 분의 토론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정리가 되는 것 같아서 새삼 토론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는군요.
제 나름대로 칸트의 3대 비판을 요약해보면,
인간의 인식은, 실천영역이 배제된 상태에서는 자연과학적인 사실을 인식할 뿐이다. 정목사님이 말하시는 인식론적인 지평이 이걸 말하는 것으로 보구요.
그러나, 인간의 인식에는 인식의 영역을 넘어서는 영역이 있는데 이것은 믿음이라는 실천영역이 포함되는 경우로, 이때, 비로서 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 이건 존재론적 지평이 되겠네요.
위의 제 요약이 맞다면,
인간은 생물학적인 존재로, 자연과학적인 탐구의 주체인 동시에 객체이지만, 그것만으로는 한정하기엔 좀 뭔가가 있는 존재이고, 즉 인식론적인 지평으로만 해석하기엔 좀 뭔가 있는(?) 존재론적 지평을 가진 존재라고 봐야겠군요. 그리고 그 사이의 연결고리가 믿음일 거구요.
그래서 인식론은 결국 실천 즉 인식을 넘어서 믿음의 문제로 이어지구요.
그럼 기독교에서 진리는 믿음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말이 되겠네요.
진리를 드러내는 통로가 믿음이란 말을 풀어서 써보면, 믿는다는 것은 신을 믿는다는 말이고, 신을 믿는다는 말은, 신의 의지가 표현된 글(성경)을 믿는다는 말일 겁니다. 즉 성경을 하느님의 글로 믿는다는 것이지요.
다시, 칸트식으로 표현하면,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인간의 실천(행위)를 통해서 증명하는 것’이 믿음이 되나요? 그렇다면, 믿는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믿음을 증명하는 행위 즉 실천이 전제되는 것으로 전 이해하게 되네요.
좀 논리의 비약이 있지만 이해하신다면....
좀 더 실천과 행위가 전제된 믿음에 대해 제 경험을 좀 말해볼게요. 책도 좋지만, 실제로 알고 있다고하는 것을 삶에 적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입장이라서요.
제가 이렇게 집요하게 믿음을 행위 즉 실천과 동일한 개념으로 묶으려고 하는 것은 설명은 할 수 없지만, 삶속에서 말씀을 적용하면서 살다보니, 이론적으로는 설명이 안되지만,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좀 어려운 차원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게 되네요.
제가 비트겐쉬타인의 언어이론이나 데리다를 언급한 것은, 혹 언어가 진리를 드러내는 통로가 될 지도 모른다는 소박하지만, 제 나름의 체험과 고백이 있어서 질문한 겁니다.
제 경우에는, 문자적인 성경의 의미를 삶속에서 적용하다보니, 그 축자적인 의미속에 다층적이고 다의적인 의미가 숨어 있는 것을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정목사님 표현대로 하면, 드러나지 않은 계시, 또는 은폐된 계시라고 볼 수 있는 세계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 세계는 문자적인 차원의 성경 읽고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실천행위가 시작될 때 비로서 가능하게 되더라구요. 아마도 그 최종적인 신비의 전모는 종말에서야 온전히 들어날 것으로 생각되구요.
믿음의 행위가 수반되면, 즉 자신의 삶을 성경의 말씀에 의지해서 세상에 던질 때, 성경의 글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다층적으로 다가옵니다.
예를 들어보죠.
성경에 보면, 가장 큰 계명이 뭐냐고 묻자, 예수님이 사랑이라고 대답하십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하신거죠.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이 말을 알고 있고 믿을 겁니다. 자신의 삶에서 이 말을 되새김하고 실천하려고 할 겁니다. 그래서 늘 자신의 생활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려고 하겠죠. 형제자매, 부모님, 사촌, 이웃, 친구들, 또는 무심히 지나치다 만나는 무명의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려고 노력할 겁니다.
그렇지만, 쉬울 것이라고 판단하고 시작했지만, 곧 그 자그마한 배려도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고, 실망도 하고 좌절도 할 것으로 봅니다. 어쩌면, 사랑이 인간에게는 원초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사랑이 없는 자신의 모습에서 절망하게 될 것으로 봅니다. 결국 이게 시작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에서도 사랑을 화두로 삼고 몇 개월을 산다면....
사랑이란 말이, 다층적으로 다의적인 다가옵니다.
아마도, 더 이상 사랑이 사랑이 아니고, 슬픔, 좌절, 고통, 무관심, 은총, 자기부인....
좀 비약해서 말하면, 이 한마디 제대로 붙들고 살아도, 성경 속에 숨겨진 비밀을 풀어낼 수 있는 만능열쇠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어렵고 난해한 성경의 구절구절이 다 구슬꿰듯이 엮이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구요. 이 지점이 인식론적 지평과 존재론적 지평이 만나는 점이라고 생각되는군요. 문제는 성경을 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믿지 못하는데서 모든 문제가 시작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다시 축자적인 의미 속에 갖혀 지내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구요.
한편 흥미로운 것은...
양자역학에서도, 믿음은 인식론적 지평과 존재론적 지평을 연결하는 지점이 있다는 건데요.
아래 글을 함 읽어보시고 평가 좀 해주시길..사상의학을 하시는 분의 글을 퍼왔습니다.
몸과 마음
몸과 마음의 관계는 대체의학을 하는데 요체가 되기 때문에 마음의 정체성을 확실히 정리하여야 한다. 몸과 마음의 관계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질문이며 그래서 옛날에는 철학자들을 괴롭힌 주제이었고 오늘날에는 과학자들을 괴롭히는 3대 미스터리(마음, 공간, 시간) 중의 하나이다. 옛날로 거슬러 가면 플라톤은 이상주의를 주장하였고 아리스토델레스는 현실주의를 주장하였다. 그래서 이것을 흔히 이원론 논쟁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논쟁은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끝없이 이어졌다.
그래서 17세기까지는 몸과 마음의 관계가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어떤 시대는 유물론이 우세하는가 하면 또 어떤 시대는 유심론이 우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7세기 뉴턴 물리학이 등장하면서 마음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변해버렸다. 그러다가 1900년 이후 양자 물리학이 등장하면서 마음이 재등장하게 되었다. 그래서 마음의 문제가 어떻게 양자 물리학에서 다루어지게 되었는가를 세계적인 석학이며 초심리학의 대가인 미국의 캔 윌버(Ken Wilber)를 통해서 한 번 알아보도록 하자.
“Eye to Eye” 중에서 “마음과 양자역학”
윌버가 저술한 책 중에 “Eye to Eye”라는 책이 국내에서 번역되어 있는데 이 책에 “마음과 양자역학”에 관한 부분이 있는데 이것을 본인이 약간 첨언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1900년이 시작되면서 과학자들은 광자와 전자 등과 같은 소립자가 어떤 때는 입자(粒子)로 관찰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파동(波動)으로 관찰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이 사실은 과학자들을 몹시 괴롭히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입자(粒子)와 파동(波動)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서로 다른 성질을 갖는데 한 순간에는 입자(粒子)가 되고 또 다른 순간에는 파동(波動)이 된다니 말이다.
이 문제를 수학 방정식으로 해결한 사람이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슈뢰딩거 방정식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해석을 할 수 없었다. 슈뢰딩거 방정식의 해석의 실마리를 푼 사람은 보른이었다.
그는 파동(波動)이란 운동 현상이므로 입자처럼 실재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파동함수의 제곱은 특정 입자(粒子)를 어떤 특정 위치에서 발견할 확률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파동 방정식 그 자체는 관찰할 수 없는 것이나 그 제곱은 어떤 특정 영역에서 입자(粒子)를 발견할 확률을 나타낸다고 주장하였다.
예를 들면, 계산에 의하여 전자(電子)가 발견될 확률이 A영역에서는 60퍼센트, B영역에서는 30퍼센트, C영역에서는 10퍼센트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가 전자(電子)를 관찰하는 순간에 전자(電子)는 B영역에 나타나면서(B영역은 100퍼센트가 되면서) A영역의 확률 및 C영역의 확률은 제로(0)가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전자(電子)의 존재를 확률로 표시하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 상식적으로는 과학자가 어떤 도구를 사용하여 관찰을 통하여 전자(電子)가 있나 없나를 확인만 하면 될 일인데, 왜 전자(電子)를 관찰할 때는 이렇게 이상한 확률로 표시해야 할까?
그 이유는 양자역학자들의 생각에는 전자(電子)가 관찰되기 이전의 파동(波動)상태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존재의 가능성”만 가지고 있다가 과학자가 전자(電子)를 관찰하는 순간에 비로소 그것이 입자(粒子)의 상태로 그 존재의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양자물리학에서 “관측의 문제”
이와 같이 전자, 광자 등과 같은 소립자가 관찰되기 이전에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잠재성”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확률로 밖에 표현할 수 없다고 했으며, 소립자가 이와 같이 가능태(可能態)의 상태로 존재하는 원리를 양자역학에서는 “불확정성 원리”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불확정성 원리는 주로 코펜하겐 대학의 물리학자들의 중심으로 주장되었기 때문에 “코펜하겐 해석”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관측의 문제”라는 것이 대두되었다. 즉, “존재의 가능성”만 갖고 있던 전자(電子)가 어떻게 과학자의 “관측”에 의하여 실제로 전자(電子)로 물현(物現)될 수 있다는 말인가? 다시 말하면 전자(電子)가 세 개의 문을 통과할 확률(60/30/10)로부터 파동함수가 붕괴되면서 실제적인 존재 B로 도약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양자역학자들은 “관측의 문제”를 중심으로 많은 의문이 생겼다. 정말로 관측 자체가 전자(電子)의 가능태(可能態)에서 전자를 실질적 존재로 물현(物現)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일까? 정말로 전자(電子)는 관측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상식적으로는 전자(電子)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을 것만 같은데 그래서 만약 전자(電子)가 가능태(60/30/10)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양자역학자들은 이와 같이 “관측의 문제”를 중심으로 서로 상이한 주장을 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양자역학은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 학파가 발생하게 되었다.
1. 코펜하겐 학파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코펜하겐 학파의 주장을 따르고 있다. 코펜하겐 학파에서는 “전자(電子)를 관측하기 이전에는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관측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관측 이후”만 우리가 알 수 있는 전부인 동시에 우리가 알아야 할 사상의 전부일 뿐, “관측 이전을 보러 간다”든지, “관측 이전의 존재 여부”를 해명할 필요도 가능성도 없다는 것이다.
참고로 말하면,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말로 표현하면서 죽는 순간까지 코펜하겐 학파의 이 확률론적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2. 숨은 변수 이론
이 이론에서는 전자(電子)는 관측하기 이전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전자(電子)는 관측하기 이전이나 관측하기 이후나 항상 존재하고 있다. 단지 현재로서는 우리 인간이 전자(電子)의 관측하기 이전의 상태를 알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여 알 수 없을 뿐이지 전자(電子)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언젠가는 전자(電子)의 관측하기 이전의 상태를 탐구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는 것이다. 이 “숨은 변수 이론”은 데이비드 봄(David Bohm)이 주장하였고, 봄(Bohm)은 나중에 계속된 연구에서 “숨은 변수”란 알고 보니까 “양자 포텐셜(quantum potential)”이라고 사실을 밝혔으며 그래서 “숨은 변수”란 용어는 사용할 필요가 없어졌고 “양자 포텐셜”이라는 용어로 대치하였다.
그리고 봄(Bohm)의 양자 포텐설은 “벨(Bell)의 정리”에 의하여 수학적으로 증명이 되었고, 1983는 프랑스의 아스펙트는 이를 실험적으로 증명하였다.
3. 다세계 이론
이 이론은 에버렛(Everett), 휠러(Wheeler) 및 그레엄(Graham) 등이 주장한 가설이다. 코펜하겐 학파에서는 입자(粒子)를 관측하기 이전에는 60/30/10이라는 가능태로만 존재하다가 관측에 의하여 하나만 100퍼센트로 물현(物現) 되고 나머지는 0퍼센트로 없어지고 만다고 주장하였으나, 다세계 이론에서는 입자(粒子)가 실제로 60퍼센트, 30퍼센트 그리고 10퍼센트로 존재하고 있으나 단지 그들은 우주의 다른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입자(粒子)는 실제로 A라는 우주에도 존재하고 있고, B라는 우주에도 존재하고 있으며, C라는 우주에도 존재하고 있는데 과학자는 단지 이 중에서 어느 하나의 우주에 존재하는 입자(粒子)만을 관측한다는 주장이다.
4. 마음/물질 결합 이론
이 이론은 위그너(Wigner), 사르파티(Sarfatti), 워커(Walker), 무지스(Muses) 그리고 베이넘(Beynam) 등이 주장한 이론인데, 이 이론에서는 관측이라는 것이 사람이 하는 행위이며, 이 사람의 관측 행위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은 바로 사람의 “마음”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위그너, 사르파티 및 베이넘 등은 과학자가 입자(粒子)를 관측하는 순간 과학자의 “마음”이 가능태의 입자(粒子)에 가서 작용하여 “가능태”를 “존재의 상태”로 물현(物現)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하였고, 워크 및 무지스 등은 입자(粒子)를 관측하기 이전의 상태가 바로 “마음” 그 자체라고 주장하였다.
양자 물리학이 등장한 이후 뇌과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만 했다. 마음은 현대의학에서 생각하는 것과 같이 뇌의 전기적 혹은 생화적 부수 현상인가? 마음은 물리적 구조의 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 구조와 중첩된 에너지장인가? 마음은 뇌의 에너지장이 아니라 몸과 구별되는 독립된 존재인가?
도대체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뇌?
뇌의 장?
몸과 별개?
마음
마음은 현대의학에서 생각하는 것과 같이 뇌의 전기적 혹은 생화적 부수 현상인가?
이것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칼 프리브람의 기억에 대한 실험을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로버트 쟌과 브랜드 듄의 실험에서 마음이 에너지처럼 몸 밖으로 방사해서 작용을 하기 때문에 마음을 에너지로 간주하는 한, 마음은 물리적 구조의 뇌에 있는 것이 아니다. 쉘드레이크의 확장된 마음에 관한 실험도 마음은 뇌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칼 프리브람(Karl Pribram)
프린스톤 대학의 교수이었으며, 뇌 분야의 아인슈타인이라고 불리는
미국의 신경외과 의사
원숭이를 통한 수 십 년 동안의 기억에 관한 연구를 했는데 현대의학에서 기억을 담당하는 부분으로 알려진 뇌의 해마를 잘라내도 단기 기억은 장애가 생기지만 과거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그는 기억에는 두 가지가 작용한다고 하였다. 하나는 “심층부 처리 구조”에 의한 작용이고, 다른 하나는 “표면 회로”에 의한 작용이라고 하였다.
“심층부 처리 구조”
“심층부 처리 구조”는 진동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에너지장이라는 뜻) 눈으로는 볼 수 없으며 기억이 분산화 되어 있고 변조된 주파수가 정보로 암호화된 구조라고 하였다.
“표면 회로”
이에 비하여 “표면 회로”는 기억을 담당하는 뇌의 국소적인 부위(해마)를 말한다. 그래서 칼 프리브람은 기억이 일어나는 과정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기억이 저장되는 과정
기억은 해마라는 국소적 부위에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은 분산되어 저장된다”라고 하였다.
기억이 일어나는 과정
“심층부처리 구조”에 저장되었던 기억이 “방송”을 하게 되면 그것을 “표면 회로”에서 “수신”함으로써 기억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심층부 처리 구조”는 마치 방송국에서 방송되는 주파수와 같은 것이고 “표면 회로”는 라디오 수신기와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홀로그램 기억(holographic memory) 이론이라고 부른다.
로버트 쟌과 브랜다 듄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의 공대 교수 로버트 쟌(Robert G Jahn) 심리학 교수 브랜다 듄(Brenda Dunne)
양자 물리학의 “관측의 문제”에서 등장한 “마음은 에너지이다”라는 견해에 강한 집착을 가지고 평생을 연구하였다. 전자난수(電子亂數) 발생기(RNG)를 사용하여 사람의 마음이 전자(電子)에 미치는 영향을 대대적으로 연구 전자난수 발생기(RNG)란 무작위 숫자 발생기로써 무작위로 “0” 혹은 “1”을 제시하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고 그래서 최종적으로 각각의 숫자는 50% 나타나게 되어 있다.
이 RNG를 이용하여 마음의 의지대로 전자의“0”이 뛰어 나오거나 혹은 전자의 “1”이 뛰어 나오게 할 수 있나? 1970대부터 1996년까지 1262건에 달하는 방대한 실험을 통해 인간의 마음은 電子(물질)에 작용한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라고 하였다.
쇠구슬
마음은 에너지와 같아 몸 밖으로 방사하여 물질에 전달될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은 아주 미세한 입자(粒子)로 되어 있어 물리적 입자와 동일하기 때문에 그것이 입자일 때는 일정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것이 파동으로 변하면 시공간을 초월하여 이동할 수 있다.
레스 커컵(Les Kirkup)
호주의 시드니 공과대학 교수
레스 커컵(Les Kirkup)은 마음의 내용을 전송하는 장치를 개발하여 이것을 마인드 스위치(mind switch)라고 불렀다.
오디오
냉장고
형광등
Mind Switch
머리에 띠를 두르고 “텔레비전아 켜저라”, “오디오야 켜저라”, “냉장고야 켜저라”,” 형광등아 켜저라”라고 마음 먹으면 이 마음의 내용이 무선으로 전송되어 95%에서 정확히 그렇게 된다고 하였다.
마음은 몸 밖으로 방사하여 장난감 기차에 전달될 수 있다
루퍼트 쉘드레이크(Rupert Sheldrake)
영국 캠브리지대학에서 생화학 박사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철학 공부 영국 왕립학회 연구교수 쉘드레이크가 저술한 책이 국내에서 번역되어 있는데 “세상을 바꿀 일곱 가지 실험들”이다.
쉘드레이크가 박사가 영국 왕립학회 연구교수를 재직하고 있을 당시에는 모든 과학자가 그러하듯이 그도 무신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종교를 미신적인 시대의 유물로 간주하였고, 그래서 기도는 사람에게 일종의 심리적인 위약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완전히 무의미한 것으로 생각하였던 사람이었다.
그러던 그가 1968년 인도를 방문하였고 인도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즉 극단적인 가난한 삶을 사는 인도사람들이 풍요로운 삶을 사는 대부분의 서구 사람들보다 더 즐겁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내면의 기쁨과 평화가 무엇인가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명상을 시작하였고 나중에는 기독교의 묵상에도 심취하였다.
쉘드레이크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기도를 많이 하게 되었고 기도를 하면 그 내용이 현실화된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기도와 관계되는 과거의 문헌들을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전세계의 문화를 조사한 결과
모든 문화에서 기도가 죽은 조상을 도울 수 있거나 혹은 도움을 불러올 수 있고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환경을 변화할 수 있다는 사례가 많음을 발견하였다. 뿐만 아니라 20세기 이후 기도치유에 관하여 발표된 논문 131건 중에서 절반 이상이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결과를 보여준다는 사실도 발견하였다.
쉘드레이크는 다음에서 보는 바와 같은 주류 과학에서 쓰이는 것보다 더 엄격하고, 과학적이며, 개방적이며, 실험적인 방법을 선책하여 과학적 실험에 착수하였다.
개 주인의 집과 직장에 동시에 비디오 카메라를 설치하고 관찰하면 주인의 귀가 시간이 일정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이 직장에서 퇴근하겠다고 결정하는 순간 개가 집 현관에서 주인을 기다린다.
쉘드레이크의 실험: 애완동물은 심령가!
앞에서와 같은 실험 방법으로 고양이, 앵무새, 말 기타 동물들이 주인의 마음이나 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고 하였으며 이런 실험이 3,500개나 된다고 하였다. 예를 들면, 많은 고양이들이 수의사에게 갈 주인의 마음을 알아 차린다. 개가 산책을 떠날 것이라는 주인의 마음을 알아 차린다.
동물을 자신의 주인이 집에 돌아올 때를 안다. 심지어 수마일 떨어져 있는 자기 주인의 귀가 시간을 알아 차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작위 실험에 의하면 개의 50%와 고양이의 30%가 주인의 귀가시간을 예견한다고 하였다.
쉘드레이크의 실험: 전화 텔레파시
개와 고양이는 전화가 걸려 오면 그 전화가 집주인이 건 전화인 것을 알아 차린다. 심지어는 해외에서 전화를 걸어도 그것이 주인의 전화라는 것을 알아 차린다.
쉘드레이크의 실험: 흰개미의 집짓기
흰개미들이 집을 만들 때, 개미들은 볼 수가 없기 때문에 눈으로 보는 것도 아니고, 소리를 이용하는 것도 아니며, 냄새를 통하는 것도 아닌 것으로 밝혀져 있다. 그런데 완벽하게 집을 짓는다. 마치 누군가가 청사진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완벽한 집을 짖는다. 흰개미들을 반으로 나누어도 방해를 받지 않는다.
쉘드레이크의 실험: 비들기의 집찾기
비둘기들은 아무리 멀리 떨어뜨려도 자신의 둥지를 어김없이 찾아온다.
쉘드레이크의 동물 실험에 대한 결론
애완동물이 사람들과 보이지 않는 무언가의 장(場)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며 비들기가 집을 찾아오는 능력도 또한 보이지 않는 무언가의 장(場)의 힘이 있기 때문이며 흰개미들이 정교한 구조물을 짓는 것은 무언가의 장(場)에 의하여 통합적으로 조정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쉘드레이크는 이와 같이 동물들에서 볼 수 있는 장(場)을 형태장(morphic field)라고 불렀다. 사실은 쉘드레이크가 말하는 “형태장”이란 “정신의 장(場)”을 뜻한다.
쉘드레이크의 장(場)에 대한 설명
장(場)이라는 개념은 자석 주위에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장을 연상하면 이해하기 쉬운데 이 용어는 1840년대 전기와 자기를 연구하고 있던 파라데이(M. Faraday)가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이다. 그리고 1920년대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내세우면서 중력에 장(場) 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나아가 양자 물리학의 발전으로 원자와 아원자의 밑바탕에는 장(場)이 영향을 미친다는 인식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전자는 전자장, 양성자는 양성자장, 중성자는 중성자장으로 발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발생생물학자들은 발생 초기에 유기체의 형태를 결정하는 보이지 않는 청사진 역할을 하는 것도 장(場)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형태발생장(morphogenic field)
쉘드레이크의 사람에 대한 실험: “눈 빛 속에 담긴 비밀을 찾아서”
피실험자 4명을 구하여 방 한쪽 구석의 벽을 향하여 앉히고 나머지 여러 사람들은 방의 반대쪽 구석에 앉아서 4명의 등을 응시하게 하였다. 쉘드레이크가 무작위로 4명 중에서 한 사람의 이름이 적힌 카드를 들어올리고 20초 후에 4명의 피실험자들에게 자신들에게 시신이 왔는지 안 왔는지를 용지에 기록하였다.
그 결과, 4명 중에서 2명은 우연적인 수치를 훨씬 상회하여 거의 항상 알아맞혔다. 또 다른 실험에서는 피실험자 120명이 참가한 총 10번의 실험에서 맞힌 추측이 틀린 추측에 비하여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높았다고 하였다.
쉘드레이크는 이 실험의 결론으로 우리의 정신은 뻗어나가(확장되어)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을 어루만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눈빛만으로 사람을 어루만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밤하늘의 별들을 볼 때, 우리의 정신은 천문학적인 거리를 건너뛰어 이 천체들에 가서 닿는 것이라고 하였다.
쉘드레이크의 사람에 대한 실험: 전화 텔레파시 실험
피험자는 미리 정해진 시간에 4 사람 중 1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4 사람은 피험자와 가장 친한 친구나 가족 중에서 선정한다. 전화 걸 사람은 매 실험마다 피험자가 주사위를 굴려 무작위로 선택한다.
피험자는 전화 건 사람이 어떤 말도 하기 전에 누구인지 답해야 한다. 800여 번의 실험에서 평균 성공률은 42%로써 우연에 해당되는 25%보다 천문학적인 숫자만큼 큰 차이를 보였다.
또 다른 실험에서 4명 중 2명은 피험자와 친한 사람이고, 나머지 2명은 피험자가 만나보지도 못한 낯선 사람으로 선정했다. 친한 사람이 전화를 걸었을 때 맞힌 확률은 56%로 매우 높은 유의성을 보였고, 낯선 사람의 경우는 성공률이 우연치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이런 효과는 거리의 멀고 가까움과는 상관이 없었다.
아이를 양육하는 엄마와 그 아이 사이에는 놀라운 텔레파시적 연결이 있었다. 애완동물과 주인과의 텔레파시적 반응은 강력하였다. 예를 들면, 주인이 사고를 당하면 애완동물은 그것을 알아차리고 반응을 보였다.
쉘드레이크의 사람에 대한 실험: 학습 촉진 효과 실험
십자말 퍼즐 푸는 것을 TV 시청자들에게 보여주었다. 이때 성공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기록하였다. 다음은 그 퍼즐을 본적도 없고 그 TV 프로그램도 시청하지 않은 사람에게 퍼즐을 풀도록 하였는데 처음보다 훨씬 더 빨리 퍼즐을 풀었다.
쉘드레이크의 사람에 대한 실험: “환상 속의 팔과 다리”
피실험자가 환상지(phantom limb)를 가진 사람 앞에 앉는다. 환상지를 가진 사람이 무작위순으로 아무 행동을 하지 않거나 환각상의 다리로 피실험자의 등을 두드린다. 20초 후에 피실험자들에게 환각상의 다리가 자신의 등에 닿았는지 안 닿았는지를 용지에 기록하였다.
그 결과, 158회의 응답 중 올바른 대답을 한 경우는 틀린 경우에 비하여 통계적으로 유의한 수준으로 높았다고 하였다.
에너지장
쉘드레이크는 이 실험의 결론으로, 피실험자가 환각상의 다리를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은 비록 육체적으로는 다리가 절단된 상태이지만 짤린 부위에서의 에너지장은 남아 있음을 뜻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자석 주위에 자기장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쇳가루를 제거해도 자기장은 사라지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하였다.
쉘드레이크의 실험: “기초 상수들의 가변성”
전 세계의 여러 연구소에서 만유인력 상수(중력의 잡아당기는 힘)를 측정하는 장치를 설치하고 한 달 간격으로 최적의 방법을 써서 측정하여 2-3년 뒤에 이 측정 결과를 비교한다.
그 결과, 어떤 달에는 낮고 또 어떤 달에는 높게 나타난다. 그 이유는 우주가 기계처럼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도 장(場)이 있어 유동을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쉘드레이크의 사람에 대한 실험: “실험자의 기대 효과”
핵물리학자들 사이에는 새로운 아원자 소립자를 발견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스개 소리가 아니고 진실이다. 대다수의 전문가들은 새로운 소립자를 발견할 가능성이 있다고 확신할 경우 그것을 찾기 위한 값비싼 가속장치와 충돌기를 만들어실험을 하면 어김없이 기대된 소립자가 입자 검출 장치인 거품 상자나 사진 필름에 흔적으로 감지된다. 이러한 현상은 정신이 물질을 지배하는 현상 때문이라고 하였다.
쉘드레이크의 사람에 대한 실험: “환자의 기대 효과”
1957년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라이트(Wright) 씨는 임파종이라는 암을 앓고 있었는데 어떤 약에도 치료 효과가 없어 절망 상태에 있었다. 바로 그때 임파종에 경이의 치료약이 개발되었다는 소식이 텔레비전에서 발표되었고 그 약을 주사함으로써 라이트 씨의 병은 놀라울 정도로 호전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서 텔레비전에서는 그 경이의 약은 사실이 아니라는 보도가 있었고 그러자 2개월 후 라이트 씨의 병은 다시 악화되었다. 담당 의사는 더 이상 좋은 치료법이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보다 강력한 신개발 약이라고 소개하면서 증류수를 주사하였다. 증류수 치료를 계속 받은 라이트 씨는 더 이상 병이 진행되지 않고 소강 상태를 유지하다가 한 참 후에 다른 원인으로 사망하였다.
65세의 주디(Judy) 여사는 20년 전부터 파킨슨 질환을 앓고 있었다. 그녀는 미국 콜로라도의 덴버시에 있는 한 종합병원에서 파킨슨 질환을 치료하기 위하여 수술을 받았다. 수술 내용은 파킨슨 병에 의하여 파괴된 뇌세포를 보충하기 위하여 두개골에 4개의 구멍을 내고 여기를 통하여 태아 신경세포를 이식하는 수술이었다. 수술 후에 모든 경과가 다 좋았다.
그래서 그녀는 20년 동안이나 떨리기도 하고, 허둥대기도 하며, 강직되기도 하는 운동 장애 증상이 상당히 완화되었다. 드디어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설 때 나타나든 통증도 사라졌고, 치료약을 복용하지 않고도 혼자서 화장실에 출입하는 것이 가능해졌으며, 진공청소기로 집안을 청소도 할 수 있게 되었고, 심지어 자가용을 운전하여 드라이브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전에 나타났던 기립성 저혈압도 사라졌으며, 말하는 것도 아주 유연해졌고 노래도 잘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쥬디 여사가 받았던 수술 내용
쥬디 여사가 수술을 받았던 병원은 10년째 파킨슨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를 대상으로 태아 신경세포 이식수술을 연구해오고 있었다. 의학에서는 새로 개발된 약이나 혹은 새로운 수술법이 개발되면 그것이 정말로 치료 효과가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하여 연구군의 치료 결과와 대조군의 치료 결과를 서로 비교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임상연구는 해당 병원의 윤리위원회에서 이 연구가 윤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심사를 받아야 하며 또한 사전에 환자로부터 동의를 받고 시작한다. 여기서 연구군이란 새로 개발된 약물을 직접 투여하거나 혹은 새로운 수술법을 직접 시술하는 그룹을 말하며, 대조군이란 새로 개발된 약물이라고 하면서 사실은 가짜 약을 투여하거나 혹은 새로운 수술법이라고 하면서 가짜 수술(sham operation이라고 함)을 하는 그룹을 말한다. 그리고 수술 후 1년이 지난 다음에는 대조군에 해당되었던 환자들에 대해서는 진짜 수술을 해 준다는 약속이 되어 있었다. 사실은 쥬디 여사는 태아 신경세포 이식수술을 받은 연구군이 아닌 가짜 수술을 받은 대조군에 속했던 환자이었다. 쥬디 여사를 포함하여 40명의 가짜 수술을 받은 환자들은 병원과의 약속대로 가짜 수술을 받은 1년 후에 모두 진짜 수술을 받았는데 진짜 수술을 받기 전까지 수 차례에 걸쳐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설문조사를 했는데 그 결과, 진짜 수술을 받았던 연구군보다 오히려 대조군에서 삶의 질이나 운동 검사 성적에서 더 좋은 결과로 나타났다. 쥬디 여사의 경우는 쥬디 여사가 가짜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도 증상의 호전은 지속되었다.
위약(placebo) 효과
가짜 약에 의하거나 혹은 가짜 수술에 의하여 이와 같이 진짜 약이나 진짜 수술을 한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나는 현상을 “위약(placebo) 효과”라고 하는데 이것은 환자의 기대 효과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환자의 마음이 육체를 지배한 것이다.
종합: 쉘드레이크의 “확장된 마음”
쉘드레이크는 이상의 모든 실험들을 종합해 볼 때, 우리는 마음이 뇌 속에 있으며 정신활동은 뇌활동 이외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도록 교육을 받아왔으나 마음은 뇌 속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확장”되어 있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순간 아무리 감도가 좋은 장치로도 간신히 포착되는 뇌의 전기 화학적 신호가 멀리 떨어진 거리에 있는 사람이나 물건에 영향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관점을 찾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정신의 장(場)”이라는 개념이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은 뇌의 안에도, 밖에도 존재하는 마음의 장(場)을 통해 일어난다고 하였다. “정신의 장(場)”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정신의 장(場)”은 뇌 속의 전자기 패턴의 영역을 넘어 훨씬 더 광대하고 막대한 거리를 뻗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기도를 하면 그 기도의 내용은 “정신의 장(場)”을 운반체(carrier wave)로 이용하여 무한정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마치 방송국에서 아나운서가 말을 하면 그 음성 정보(sound wave)가 고주파라는 반송체에 실리어 수신장치인 라디오까지 전달되는 것과 꼭 같은 원리이다. 쉘드레이크는 “정신의 장(場)”이 무한정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는 양자역학의 “비국소성 원리”를 도입하였다. 다시 말하면 “정신의 장(場)”은 비국성 원리를 특징으로 한다는 뜻이다. 양자역학에서 비국소성 원리는 처음에 가설로 시작되었으나 지금은 실험적으로 증명된 완벽한 원리이다. 그런데 쉘드레이크는 바로 이 비국소성 원리의 원인 인자가 바로 “정신의 장(場)”이라는 것이다. 쉘드레이크는 나중에 이 “정신의 장(場)”을 그냥 "형태장"이라는 용어로 통일하여 불렀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장이 존재한다.
아원자 입자도 고유의 형태장이 있고
아원자로 구성된 원자도 고유의 형태장
원자로 구성된 분자에도 고유의 형태장
분자로 구성된 세포도 고유의 형태장
세포로 구성된 조직도 고유의 형태장
조직으로 구성된 장기도 고유의 형태장
장기로 구성된 개체도 고유의 형태장
개체로 구성된 가족도 고유의 형태장
가족으로 구성된 사회도 고유의 형태장
사회로 구성된 생태계도 고유의 형태장
사회로 구성된 각 민족에도 고유의 형태장
개도 고유의 형태장
비들기도 고유의 형태장
흰개미도 고유의 형태장이 있다고 하였다.
생태계로 구성된 지구도 고유의 형태장(가이아)
행성으로 구성된 태양계도 고유의 형태장
태양계로 구성된 은하계도 고유의 형태장
은하계로 구성된 우주도 고유의 형태장이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이 말하는 “시공간”도 우주의 형태장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형태장에는 여러 가지 계층이 있는데 계층이 높아질수록 장(場)의 크기가 클 뿐만 아니라 더 포괄적이고 복잡하며 초인적 지성을 갖는다고 하였다. 따라서 태양계가 지성을 가지고 있고 은하계는 한 차원 더 높은 지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 태양계나 은하계가 가지고 있는 이 초인적 지성은 언제부터 출발하였나? 그것은 처음부터 우주의 시작과 함께 그냥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우리는 더 이상 두개골 속에 갇힌 존재가 아니며, 우리의 마음은 서로에게서 분리되거나 고립된 것도 아니고,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신체나 환경, 다른 사람들에게 낯선 이방인이 아니라 우리는 모두 상호 연결되어 있다고 강조하였다.
제 나름대로 칸트의 3대 비판을 요약해보면,
인간의 인식은, 실천영역이 배제된 상태에서는 자연과학적인 사실을 인식할 뿐이다. 정목사님이 말하시는 인식론적인 지평이 이걸 말하는 것으로 보구요.
그러나, 인간의 인식에는 인식의 영역을 넘어서는 영역이 있는데 이것은 믿음이라는 실천영역이 포함되는 경우로, 이때, 비로서 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 이건 존재론적 지평이 되겠네요.
위의 제 요약이 맞다면,
인간은 생물학적인 존재로, 자연과학적인 탐구의 주체인 동시에 객체이지만, 그것만으로는 한정하기엔 좀 뭔가가 있는 존재이고, 즉 인식론적인 지평으로만 해석하기엔 좀 뭔가 있는(?) 존재론적 지평을 가진 존재라고 봐야겠군요. 그리고 그 사이의 연결고리가 믿음일 거구요.
그래서 인식론은 결국 실천 즉 인식을 넘어서 믿음의 문제로 이어지구요.
그럼 기독교에서 진리는 믿음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말이 되겠네요.
진리를 드러내는 통로가 믿음이란 말을 풀어서 써보면, 믿는다는 것은 신을 믿는다는 말이고, 신을 믿는다는 말은, 신의 의지가 표현된 글(성경)을 믿는다는 말일 겁니다. 즉 성경을 하느님의 글로 믿는다는 것이지요.
다시, 칸트식으로 표현하면,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인간의 실천(행위)를 통해서 증명하는 것’이 믿음이 되나요? 그렇다면, 믿는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믿음을 증명하는 행위 즉 실천이 전제되는 것으로 전 이해하게 되네요.
좀 논리의 비약이 있지만 이해하신다면....
좀 더 실천과 행위가 전제된 믿음에 대해 제 경험을 좀 말해볼게요. 책도 좋지만, 실제로 알고 있다고하는 것을 삶에 적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입장이라서요.
제가 이렇게 집요하게 믿음을 행위 즉 실천과 동일한 개념으로 묶으려고 하는 것은 설명은 할 수 없지만, 삶속에서 말씀을 적용하면서 살다보니, 이론적으로는 설명이 안되지만,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좀 어려운 차원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게 되네요.
제가 비트겐쉬타인의 언어이론이나 데리다를 언급한 것은, 혹 언어가 진리를 드러내는 통로가 될 지도 모른다는 소박하지만, 제 나름의 체험과 고백이 있어서 질문한 겁니다.
제 경우에는, 문자적인 성경의 의미를 삶속에서 적용하다보니, 그 축자적인 의미속에 다층적이고 다의적인 의미가 숨어 있는 것을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정목사님 표현대로 하면, 드러나지 않은 계시, 또는 은폐된 계시라고 볼 수 있는 세계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 세계는 문자적인 차원의 성경 읽고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실천행위가 시작될 때 비로서 가능하게 되더라구요. 아마도 그 최종적인 신비의 전모는 종말에서야 온전히 들어날 것으로 생각되구요.
믿음의 행위가 수반되면, 즉 자신의 삶을 성경의 말씀에 의지해서 세상에 던질 때, 성경의 글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다층적으로 다가옵니다.
예를 들어보죠.
성경에 보면, 가장 큰 계명이 뭐냐고 묻자, 예수님이 사랑이라고 대답하십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하신거죠.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이 말을 알고 있고 믿을 겁니다. 자신의 삶에서 이 말을 되새김하고 실천하려고 할 겁니다. 그래서 늘 자신의 생활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려고 하겠죠. 형제자매, 부모님, 사촌, 이웃, 친구들, 또는 무심히 지나치다 만나는 무명의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려고 노력할 겁니다.
그렇지만, 쉬울 것이라고 판단하고 시작했지만, 곧 그 자그마한 배려도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고, 실망도 하고 좌절도 할 것으로 봅니다. 어쩌면, 사랑이 인간에게는 원초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사랑이 없는 자신의 모습에서 절망하게 될 것으로 봅니다. 결국 이게 시작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에서도 사랑을 화두로 삼고 몇 개월을 산다면....
사랑이란 말이, 다층적으로 다의적인 다가옵니다.
아마도, 더 이상 사랑이 사랑이 아니고, 슬픔, 좌절, 고통, 무관심, 은총, 자기부인....
좀 비약해서 말하면, 이 한마디 제대로 붙들고 살아도, 성경 속에 숨겨진 비밀을 풀어낼 수 있는 만능열쇠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어렵고 난해한 성경의 구절구절이 다 구슬꿰듯이 엮이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구요. 이 지점이 인식론적 지평과 존재론적 지평이 만나는 점이라고 생각되는군요. 문제는 성경을 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믿지 못하는데서 모든 문제가 시작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다시 축자적인 의미 속에 갖혀 지내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구요.
한편 흥미로운 것은...
양자역학에서도, 믿음은 인식론적 지평과 존재론적 지평을 연결하는 지점이 있다는 건데요.
아래 글을 함 읽어보시고 평가 좀 해주시길..사상의학을 하시는 분의 글을 퍼왔습니다.
몸과 마음
몸과 마음의 관계는 대체의학을 하는데 요체가 되기 때문에 마음의 정체성을 확실히 정리하여야 한다. 몸과 마음의 관계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질문이며 그래서 옛날에는 철학자들을 괴롭힌 주제이었고 오늘날에는 과학자들을 괴롭히는 3대 미스터리(마음, 공간, 시간) 중의 하나이다. 옛날로 거슬러 가면 플라톤은 이상주의를 주장하였고 아리스토델레스는 현실주의를 주장하였다. 그래서 이것을 흔히 이원론 논쟁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논쟁은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끝없이 이어졌다.
그래서 17세기까지는 몸과 마음의 관계가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어떤 시대는 유물론이 우세하는가 하면 또 어떤 시대는 유심론이 우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7세기 뉴턴 물리학이 등장하면서 마음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변해버렸다. 그러다가 1900년 이후 양자 물리학이 등장하면서 마음이 재등장하게 되었다. 그래서 마음의 문제가 어떻게 양자 물리학에서 다루어지게 되었는가를 세계적인 석학이며 초심리학의 대가인 미국의 캔 윌버(Ken Wilber)를 통해서 한 번 알아보도록 하자.
“Eye to Eye” 중에서 “마음과 양자역학”
윌버가 저술한 책 중에 “Eye to Eye”라는 책이 국내에서 번역되어 있는데 이 책에 “마음과 양자역학”에 관한 부분이 있는데 이것을 본인이 약간 첨언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1900년이 시작되면서 과학자들은 광자와 전자 등과 같은 소립자가 어떤 때는 입자(粒子)로 관찰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파동(波動)으로 관찰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이 사실은 과학자들을 몹시 괴롭히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입자(粒子)와 파동(波動)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서로 다른 성질을 갖는데 한 순간에는 입자(粒子)가 되고 또 다른 순간에는 파동(波動)이 된다니 말이다.
이 문제를 수학 방정식으로 해결한 사람이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슈뢰딩거 방정식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해석을 할 수 없었다. 슈뢰딩거 방정식의 해석의 실마리를 푼 사람은 보른이었다.
그는 파동(波動)이란 운동 현상이므로 입자처럼 실재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파동함수의 제곱은 특정 입자(粒子)를 어떤 특정 위치에서 발견할 확률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파동 방정식 그 자체는 관찰할 수 없는 것이나 그 제곱은 어떤 특정 영역에서 입자(粒子)를 발견할 확률을 나타낸다고 주장하였다.
예를 들면, 계산에 의하여 전자(電子)가 발견될 확률이 A영역에서는 60퍼센트, B영역에서는 30퍼센트, C영역에서는 10퍼센트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가 전자(電子)를 관찰하는 순간에 전자(電子)는 B영역에 나타나면서(B영역은 100퍼센트가 되면서) A영역의 확률 및 C영역의 확률은 제로(0)가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전자(電子)의 존재를 확률로 표시하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 상식적으로는 과학자가 어떤 도구를 사용하여 관찰을 통하여 전자(電子)가 있나 없나를 확인만 하면 될 일인데, 왜 전자(電子)를 관찰할 때는 이렇게 이상한 확률로 표시해야 할까?
그 이유는 양자역학자들의 생각에는 전자(電子)가 관찰되기 이전의 파동(波動)상태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존재의 가능성”만 가지고 있다가 과학자가 전자(電子)를 관찰하는 순간에 비로소 그것이 입자(粒子)의 상태로 그 존재의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양자물리학에서 “관측의 문제”
이와 같이 전자, 광자 등과 같은 소립자가 관찰되기 이전에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잠재성”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확률로 밖에 표현할 수 없다고 했으며, 소립자가 이와 같이 가능태(可能態)의 상태로 존재하는 원리를 양자역학에서는 “불확정성 원리”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불확정성 원리는 주로 코펜하겐 대학의 물리학자들의 중심으로 주장되었기 때문에 “코펜하겐 해석”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관측의 문제”라는 것이 대두되었다. 즉, “존재의 가능성”만 갖고 있던 전자(電子)가 어떻게 과학자의 “관측”에 의하여 실제로 전자(電子)로 물현(物現)될 수 있다는 말인가? 다시 말하면 전자(電子)가 세 개의 문을 통과할 확률(60/30/10)로부터 파동함수가 붕괴되면서 실제적인 존재 B로 도약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양자역학자들은 “관측의 문제”를 중심으로 많은 의문이 생겼다. 정말로 관측 자체가 전자(電子)의 가능태(可能態)에서 전자를 실질적 존재로 물현(物現)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일까? 정말로 전자(電子)는 관측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상식적으로는 전자(電子)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을 것만 같은데 그래서 만약 전자(電子)가 가능태(60/30/10)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양자역학자들은 이와 같이 “관측의 문제”를 중심으로 서로 상이한 주장을 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양자역학은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 학파가 발생하게 되었다.
1. 코펜하겐 학파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코펜하겐 학파의 주장을 따르고 있다. 코펜하겐 학파에서는 “전자(電子)를 관측하기 이전에는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관측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관측 이후”만 우리가 알 수 있는 전부인 동시에 우리가 알아야 할 사상의 전부일 뿐, “관측 이전을 보러 간다”든지, “관측 이전의 존재 여부”를 해명할 필요도 가능성도 없다는 것이다.
참고로 말하면,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말로 표현하면서 죽는 순간까지 코펜하겐 학파의 이 확률론적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2. 숨은 변수 이론
이 이론에서는 전자(電子)는 관측하기 이전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전자(電子)는 관측하기 이전이나 관측하기 이후나 항상 존재하고 있다. 단지 현재로서는 우리 인간이 전자(電子)의 관측하기 이전의 상태를 알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여 알 수 없을 뿐이지 전자(電子)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언젠가는 전자(電子)의 관측하기 이전의 상태를 탐구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는 것이다. 이 “숨은 변수 이론”은 데이비드 봄(David Bohm)이 주장하였고, 봄(Bohm)은 나중에 계속된 연구에서 “숨은 변수”란 알고 보니까 “양자 포텐셜(quantum potential)”이라고 사실을 밝혔으며 그래서 “숨은 변수”란 용어는 사용할 필요가 없어졌고 “양자 포텐셜”이라는 용어로 대치하였다.
그리고 봄(Bohm)의 양자 포텐설은 “벨(Bell)의 정리”에 의하여 수학적으로 증명이 되었고, 1983는 프랑스의 아스펙트는 이를 실험적으로 증명하였다.
3. 다세계 이론
이 이론은 에버렛(Everett), 휠러(Wheeler) 및 그레엄(Graham) 등이 주장한 가설이다. 코펜하겐 학파에서는 입자(粒子)를 관측하기 이전에는 60/30/10이라는 가능태로만 존재하다가 관측에 의하여 하나만 100퍼센트로 물현(物現) 되고 나머지는 0퍼센트로 없어지고 만다고 주장하였으나, 다세계 이론에서는 입자(粒子)가 실제로 60퍼센트, 30퍼센트 그리고 10퍼센트로 존재하고 있으나 단지 그들은 우주의 다른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입자(粒子)는 실제로 A라는 우주에도 존재하고 있고, B라는 우주에도 존재하고 있으며, C라는 우주에도 존재하고 있는데 과학자는 단지 이 중에서 어느 하나의 우주에 존재하는 입자(粒子)만을 관측한다는 주장이다.
4. 마음/물질 결합 이론
이 이론은 위그너(Wigner), 사르파티(Sarfatti), 워커(Walker), 무지스(Muses) 그리고 베이넘(Beynam) 등이 주장한 이론인데, 이 이론에서는 관측이라는 것이 사람이 하는 행위이며, 이 사람의 관측 행위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은 바로 사람의 “마음”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위그너, 사르파티 및 베이넘 등은 과학자가 입자(粒子)를 관측하는 순간 과학자의 “마음”이 가능태의 입자(粒子)에 가서 작용하여 “가능태”를 “존재의 상태”로 물현(物現)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하였고, 워크 및 무지스 등은 입자(粒子)를 관측하기 이전의 상태가 바로 “마음” 그 자체라고 주장하였다.
양자 물리학이 등장한 이후 뇌과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만 했다. 마음은 현대의학에서 생각하는 것과 같이 뇌의 전기적 혹은 생화적 부수 현상인가? 마음은 물리적 구조의 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 구조와 중첩된 에너지장인가? 마음은 뇌의 에너지장이 아니라 몸과 구별되는 독립된 존재인가?
도대체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뇌?
뇌의 장?
몸과 별개?
마음
마음은 현대의학에서 생각하는 것과 같이 뇌의 전기적 혹은 생화적 부수 현상인가?
이것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칼 프리브람의 기억에 대한 실험을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로버트 쟌과 브랜드 듄의 실험에서 마음이 에너지처럼 몸 밖으로 방사해서 작용을 하기 때문에 마음을 에너지로 간주하는 한, 마음은 물리적 구조의 뇌에 있는 것이 아니다. 쉘드레이크의 확장된 마음에 관한 실험도 마음은 뇌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칼 프리브람(Karl Pribram)
프린스톤 대학의 교수이었으며, 뇌 분야의 아인슈타인이라고 불리는
미국의 신경외과 의사
원숭이를 통한 수 십 년 동안의 기억에 관한 연구를 했는데 현대의학에서 기억을 담당하는 부분으로 알려진 뇌의 해마를 잘라내도 단기 기억은 장애가 생기지만 과거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그는 기억에는 두 가지가 작용한다고 하였다. 하나는 “심층부 처리 구조”에 의한 작용이고, 다른 하나는 “표면 회로”에 의한 작용이라고 하였다.
“심층부 처리 구조”
“심층부 처리 구조”는 진동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에너지장이라는 뜻) 눈으로는 볼 수 없으며 기억이 분산화 되어 있고 변조된 주파수가 정보로 암호화된 구조라고 하였다.
“표면 회로”
이에 비하여 “표면 회로”는 기억을 담당하는 뇌의 국소적인 부위(해마)를 말한다. 그래서 칼 프리브람은 기억이 일어나는 과정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기억이 저장되는 과정
기억은 해마라는 국소적 부위에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은 분산되어 저장된다”라고 하였다.
기억이 일어나는 과정
“심층부처리 구조”에 저장되었던 기억이 “방송”을 하게 되면 그것을 “표면 회로”에서 “수신”함으로써 기억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심층부 처리 구조”는 마치 방송국에서 방송되는 주파수와 같은 것이고 “표면 회로”는 라디오 수신기와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홀로그램 기억(holographic memory) 이론이라고 부른다.
로버트 쟌과 브랜다 듄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의 공대 교수 로버트 쟌(Robert G Jahn) 심리학 교수 브랜다 듄(Brenda Dunne)
양자 물리학의 “관측의 문제”에서 등장한 “마음은 에너지이다”라는 견해에 강한 집착을 가지고 평생을 연구하였다. 전자난수(電子亂數) 발생기(RNG)를 사용하여 사람의 마음이 전자(電子)에 미치는 영향을 대대적으로 연구 전자난수 발생기(RNG)란 무작위 숫자 발생기로써 무작위로 “0” 혹은 “1”을 제시하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고 그래서 최종적으로 각각의 숫자는 50% 나타나게 되어 있다.
이 RNG를 이용하여 마음의 의지대로 전자의“0”이 뛰어 나오거나 혹은 전자의 “1”이 뛰어 나오게 할 수 있나? 1970대부터 1996년까지 1262건에 달하는 방대한 실험을 통해 인간의 마음은 電子(물질)에 작용한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라고 하였다.
쇠구슬
마음은 에너지와 같아 몸 밖으로 방사하여 물질에 전달될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은 아주 미세한 입자(粒子)로 되어 있어 물리적 입자와 동일하기 때문에 그것이 입자일 때는 일정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것이 파동으로 변하면 시공간을 초월하여 이동할 수 있다.
레스 커컵(Les Kirkup)
호주의 시드니 공과대학 교수
레스 커컵(Les Kirkup)은 마음의 내용을 전송하는 장치를 개발하여 이것을 마인드 스위치(mind switch)라고 불렀다.
오디오
냉장고
형광등
Mind Switch
머리에 띠를 두르고 “텔레비전아 켜저라”, “오디오야 켜저라”, “냉장고야 켜저라”,” 형광등아 켜저라”라고 마음 먹으면 이 마음의 내용이 무선으로 전송되어 95%에서 정확히 그렇게 된다고 하였다.
마음은 몸 밖으로 방사하여 장난감 기차에 전달될 수 있다
루퍼트 쉘드레이크(Rupert Sheldrake)
영국 캠브리지대학에서 생화학 박사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철학 공부 영국 왕립학회 연구교수 쉘드레이크가 저술한 책이 국내에서 번역되어 있는데 “세상을 바꿀 일곱 가지 실험들”이다.
쉘드레이크가 박사가 영국 왕립학회 연구교수를 재직하고 있을 당시에는 모든 과학자가 그러하듯이 그도 무신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종교를 미신적인 시대의 유물로 간주하였고, 그래서 기도는 사람에게 일종의 심리적인 위약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완전히 무의미한 것으로 생각하였던 사람이었다.
그러던 그가 1968년 인도를 방문하였고 인도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즉 극단적인 가난한 삶을 사는 인도사람들이 풍요로운 삶을 사는 대부분의 서구 사람들보다 더 즐겁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내면의 기쁨과 평화가 무엇인가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명상을 시작하였고 나중에는 기독교의 묵상에도 심취하였다.
쉘드레이크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기도를 많이 하게 되었고 기도를 하면 그 내용이 현실화된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기도와 관계되는 과거의 문헌들을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전세계의 문화를 조사한 결과
모든 문화에서 기도가 죽은 조상을 도울 수 있거나 혹은 도움을 불러올 수 있고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환경을 변화할 수 있다는 사례가 많음을 발견하였다. 뿐만 아니라 20세기 이후 기도치유에 관하여 발표된 논문 131건 중에서 절반 이상이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결과를 보여준다는 사실도 발견하였다.
쉘드레이크는 다음에서 보는 바와 같은 주류 과학에서 쓰이는 것보다 더 엄격하고, 과학적이며, 개방적이며, 실험적인 방법을 선책하여 과학적 실험에 착수하였다.
개 주인의 집과 직장에 동시에 비디오 카메라를 설치하고 관찰하면 주인의 귀가 시간이 일정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이 직장에서 퇴근하겠다고 결정하는 순간 개가 집 현관에서 주인을 기다린다.
쉘드레이크의 실험: 애완동물은 심령가!
앞에서와 같은 실험 방법으로 고양이, 앵무새, 말 기타 동물들이 주인의 마음이나 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고 하였으며 이런 실험이 3,500개나 된다고 하였다. 예를 들면, 많은 고양이들이 수의사에게 갈 주인의 마음을 알아 차린다. 개가 산책을 떠날 것이라는 주인의 마음을 알아 차린다.
동물을 자신의 주인이 집에 돌아올 때를 안다. 심지어 수마일 떨어져 있는 자기 주인의 귀가 시간을 알아 차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작위 실험에 의하면 개의 50%와 고양이의 30%가 주인의 귀가시간을 예견한다고 하였다.
쉘드레이크의 실험: 전화 텔레파시
개와 고양이는 전화가 걸려 오면 그 전화가 집주인이 건 전화인 것을 알아 차린다. 심지어는 해외에서 전화를 걸어도 그것이 주인의 전화라는 것을 알아 차린다.
쉘드레이크의 실험: 흰개미의 집짓기
흰개미들이 집을 만들 때, 개미들은 볼 수가 없기 때문에 눈으로 보는 것도 아니고, 소리를 이용하는 것도 아니며, 냄새를 통하는 것도 아닌 것으로 밝혀져 있다. 그런데 완벽하게 집을 짓는다. 마치 누군가가 청사진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완벽한 집을 짖는다. 흰개미들을 반으로 나누어도 방해를 받지 않는다.
쉘드레이크의 실험: 비들기의 집찾기
비둘기들은 아무리 멀리 떨어뜨려도 자신의 둥지를 어김없이 찾아온다.
쉘드레이크의 동물 실험에 대한 결론
애완동물이 사람들과 보이지 않는 무언가의 장(場)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며 비들기가 집을 찾아오는 능력도 또한 보이지 않는 무언가의 장(場)의 힘이 있기 때문이며 흰개미들이 정교한 구조물을 짓는 것은 무언가의 장(場)에 의하여 통합적으로 조정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쉘드레이크는 이와 같이 동물들에서 볼 수 있는 장(場)을 형태장(morphic field)라고 불렀다. 사실은 쉘드레이크가 말하는 “형태장”이란 “정신의 장(場)”을 뜻한다.
쉘드레이크의 장(場)에 대한 설명
장(場)이라는 개념은 자석 주위에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장을 연상하면 이해하기 쉬운데 이 용어는 1840년대 전기와 자기를 연구하고 있던 파라데이(M. Faraday)가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이다. 그리고 1920년대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내세우면서 중력에 장(場) 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나아가 양자 물리학의 발전으로 원자와 아원자의 밑바탕에는 장(場)이 영향을 미친다는 인식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전자는 전자장, 양성자는 양성자장, 중성자는 중성자장으로 발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발생생물학자들은 발생 초기에 유기체의 형태를 결정하는 보이지 않는 청사진 역할을 하는 것도 장(場)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형태발생장(morphogenic field)
쉘드레이크의 사람에 대한 실험: “눈 빛 속에 담긴 비밀을 찾아서”
피실험자 4명을 구하여 방 한쪽 구석의 벽을 향하여 앉히고 나머지 여러 사람들은 방의 반대쪽 구석에 앉아서 4명의 등을 응시하게 하였다. 쉘드레이크가 무작위로 4명 중에서 한 사람의 이름이 적힌 카드를 들어올리고 20초 후에 4명의 피실험자들에게 자신들에게 시신이 왔는지 안 왔는지를 용지에 기록하였다.
그 결과, 4명 중에서 2명은 우연적인 수치를 훨씬 상회하여 거의 항상 알아맞혔다. 또 다른 실험에서는 피실험자 120명이 참가한 총 10번의 실험에서 맞힌 추측이 틀린 추측에 비하여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높았다고 하였다.
쉘드레이크는 이 실험의 결론으로 우리의 정신은 뻗어나가(확장되어)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을 어루만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눈빛만으로 사람을 어루만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밤하늘의 별들을 볼 때, 우리의 정신은 천문학적인 거리를 건너뛰어 이 천체들에 가서 닿는 것이라고 하였다.
쉘드레이크의 사람에 대한 실험: 전화 텔레파시 실험
피험자는 미리 정해진 시간에 4 사람 중 1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4 사람은 피험자와 가장 친한 친구나 가족 중에서 선정한다. 전화 걸 사람은 매 실험마다 피험자가 주사위를 굴려 무작위로 선택한다.
피험자는 전화 건 사람이 어떤 말도 하기 전에 누구인지 답해야 한다. 800여 번의 실험에서 평균 성공률은 42%로써 우연에 해당되는 25%보다 천문학적인 숫자만큼 큰 차이를 보였다.
또 다른 실험에서 4명 중 2명은 피험자와 친한 사람이고, 나머지 2명은 피험자가 만나보지도 못한 낯선 사람으로 선정했다. 친한 사람이 전화를 걸었을 때 맞힌 확률은 56%로 매우 높은 유의성을 보였고, 낯선 사람의 경우는 성공률이 우연치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이런 효과는 거리의 멀고 가까움과는 상관이 없었다.
아이를 양육하는 엄마와 그 아이 사이에는 놀라운 텔레파시적 연결이 있었다. 애완동물과 주인과의 텔레파시적 반응은 강력하였다. 예를 들면, 주인이 사고를 당하면 애완동물은 그것을 알아차리고 반응을 보였다.
쉘드레이크의 사람에 대한 실험: 학습 촉진 효과 실험
십자말 퍼즐 푸는 것을 TV 시청자들에게 보여주었다. 이때 성공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기록하였다. 다음은 그 퍼즐을 본적도 없고 그 TV 프로그램도 시청하지 않은 사람에게 퍼즐을 풀도록 하였는데 처음보다 훨씬 더 빨리 퍼즐을 풀었다.
쉘드레이크의 사람에 대한 실험: “환상 속의 팔과 다리”
피실험자가 환상지(phantom limb)를 가진 사람 앞에 앉는다. 환상지를 가진 사람이 무작위순으로 아무 행동을 하지 않거나 환각상의 다리로 피실험자의 등을 두드린다. 20초 후에 피실험자들에게 환각상의 다리가 자신의 등에 닿았는지 안 닿았는지를 용지에 기록하였다.
그 결과, 158회의 응답 중 올바른 대답을 한 경우는 틀린 경우에 비하여 통계적으로 유의한 수준으로 높았다고 하였다.
에너지장
쉘드레이크는 이 실험의 결론으로, 피실험자가 환각상의 다리를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은 비록 육체적으로는 다리가 절단된 상태이지만 짤린 부위에서의 에너지장은 남아 있음을 뜻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자석 주위에 자기장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쇳가루를 제거해도 자기장은 사라지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하였다.
쉘드레이크의 실험: “기초 상수들의 가변성”
전 세계의 여러 연구소에서 만유인력 상수(중력의 잡아당기는 힘)를 측정하는 장치를 설치하고 한 달 간격으로 최적의 방법을 써서 측정하여 2-3년 뒤에 이 측정 결과를 비교한다.
그 결과, 어떤 달에는 낮고 또 어떤 달에는 높게 나타난다. 그 이유는 우주가 기계처럼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도 장(場)이 있어 유동을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쉘드레이크의 사람에 대한 실험: “실험자의 기대 효과”
핵물리학자들 사이에는 새로운 아원자 소립자를 발견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스개 소리가 아니고 진실이다. 대다수의 전문가들은 새로운 소립자를 발견할 가능성이 있다고 확신할 경우 그것을 찾기 위한 값비싼 가속장치와 충돌기를 만들어실험을 하면 어김없이 기대된 소립자가 입자 검출 장치인 거품 상자나 사진 필름에 흔적으로 감지된다. 이러한 현상은 정신이 물질을 지배하는 현상 때문이라고 하였다.
쉘드레이크의 사람에 대한 실험: “환자의 기대 효과”
1957년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라이트(Wright) 씨는 임파종이라는 암을 앓고 있었는데 어떤 약에도 치료 효과가 없어 절망 상태에 있었다. 바로 그때 임파종에 경이의 치료약이 개발되었다는 소식이 텔레비전에서 발표되었고 그 약을 주사함으로써 라이트 씨의 병은 놀라울 정도로 호전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서 텔레비전에서는 그 경이의 약은 사실이 아니라는 보도가 있었고 그러자 2개월 후 라이트 씨의 병은 다시 악화되었다. 담당 의사는 더 이상 좋은 치료법이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보다 강력한 신개발 약이라고 소개하면서 증류수를 주사하였다. 증류수 치료를 계속 받은 라이트 씨는 더 이상 병이 진행되지 않고 소강 상태를 유지하다가 한 참 후에 다른 원인으로 사망하였다.
65세의 주디(Judy) 여사는 20년 전부터 파킨슨 질환을 앓고 있었다. 그녀는 미국 콜로라도의 덴버시에 있는 한 종합병원에서 파킨슨 질환을 치료하기 위하여 수술을 받았다. 수술 내용은 파킨슨 병에 의하여 파괴된 뇌세포를 보충하기 위하여 두개골에 4개의 구멍을 내고 여기를 통하여 태아 신경세포를 이식하는 수술이었다. 수술 후에 모든 경과가 다 좋았다.
그래서 그녀는 20년 동안이나 떨리기도 하고, 허둥대기도 하며, 강직되기도 하는 운동 장애 증상이 상당히 완화되었다. 드디어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설 때 나타나든 통증도 사라졌고, 치료약을 복용하지 않고도 혼자서 화장실에 출입하는 것이 가능해졌으며, 진공청소기로 집안을 청소도 할 수 있게 되었고, 심지어 자가용을 운전하여 드라이브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전에 나타났던 기립성 저혈압도 사라졌으며, 말하는 것도 아주 유연해졌고 노래도 잘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쥬디 여사가 받았던 수술 내용
쥬디 여사가 수술을 받았던 병원은 10년째 파킨슨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를 대상으로 태아 신경세포 이식수술을 연구해오고 있었다. 의학에서는 새로 개발된 약이나 혹은 새로운 수술법이 개발되면 그것이 정말로 치료 효과가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하여 연구군의 치료 결과와 대조군의 치료 결과를 서로 비교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임상연구는 해당 병원의 윤리위원회에서 이 연구가 윤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심사를 받아야 하며 또한 사전에 환자로부터 동의를 받고 시작한다. 여기서 연구군이란 새로 개발된 약물을 직접 투여하거나 혹은 새로운 수술법을 직접 시술하는 그룹을 말하며, 대조군이란 새로 개발된 약물이라고 하면서 사실은 가짜 약을 투여하거나 혹은 새로운 수술법이라고 하면서 가짜 수술(sham operation이라고 함)을 하는 그룹을 말한다. 그리고 수술 후 1년이 지난 다음에는 대조군에 해당되었던 환자들에 대해서는 진짜 수술을 해 준다는 약속이 되어 있었다. 사실은 쥬디 여사는 태아 신경세포 이식수술을 받은 연구군이 아닌 가짜 수술을 받은 대조군에 속했던 환자이었다. 쥬디 여사를 포함하여 40명의 가짜 수술을 받은 환자들은 병원과의 약속대로 가짜 수술을 받은 1년 후에 모두 진짜 수술을 받았는데 진짜 수술을 받기 전까지 수 차례에 걸쳐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설문조사를 했는데 그 결과, 진짜 수술을 받았던 연구군보다 오히려 대조군에서 삶의 질이나 운동 검사 성적에서 더 좋은 결과로 나타났다. 쥬디 여사의 경우는 쥬디 여사가 가짜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도 증상의 호전은 지속되었다.
위약(placebo) 효과
가짜 약에 의하거나 혹은 가짜 수술에 의하여 이와 같이 진짜 약이나 진짜 수술을 한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나는 현상을 “위약(placebo) 효과”라고 하는데 이것은 환자의 기대 효과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환자의 마음이 육체를 지배한 것이다.
종합: 쉘드레이크의 “확장된 마음”
쉘드레이크는 이상의 모든 실험들을 종합해 볼 때, 우리는 마음이 뇌 속에 있으며 정신활동은 뇌활동 이외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도록 교육을 받아왔으나 마음은 뇌 속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확장”되어 있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순간 아무리 감도가 좋은 장치로도 간신히 포착되는 뇌의 전기 화학적 신호가 멀리 떨어진 거리에 있는 사람이나 물건에 영향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관점을 찾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정신의 장(場)”이라는 개념이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은 뇌의 안에도, 밖에도 존재하는 마음의 장(場)을 통해 일어난다고 하였다. “정신의 장(場)”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정신의 장(場)”은 뇌 속의 전자기 패턴의 영역을 넘어 훨씬 더 광대하고 막대한 거리를 뻗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기도를 하면 그 기도의 내용은 “정신의 장(場)”을 운반체(carrier wave)로 이용하여 무한정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마치 방송국에서 아나운서가 말을 하면 그 음성 정보(sound wave)가 고주파라는 반송체에 실리어 수신장치인 라디오까지 전달되는 것과 꼭 같은 원리이다. 쉘드레이크는 “정신의 장(場)”이 무한정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는 양자역학의 “비국소성 원리”를 도입하였다. 다시 말하면 “정신의 장(場)”은 비국성 원리를 특징으로 한다는 뜻이다. 양자역학에서 비국소성 원리는 처음에 가설로 시작되었으나 지금은 실험적으로 증명된 완벽한 원리이다. 그런데 쉘드레이크는 바로 이 비국소성 원리의 원인 인자가 바로 “정신의 장(場)”이라는 것이다. 쉘드레이크는 나중에 이 “정신의 장(場)”을 그냥 "형태장"이라는 용어로 통일하여 불렀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장이 존재한다.
아원자 입자도 고유의 형태장이 있고
아원자로 구성된 원자도 고유의 형태장
원자로 구성된 분자에도 고유의 형태장
분자로 구성된 세포도 고유의 형태장
세포로 구성된 조직도 고유의 형태장
조직으로 구성된 장기도 고유의 형태장
장기로 구성된 개체도 고유의 형태장
개체로 구성된 가족도 고유의 형태장
가족으로 구성된 사회도 고유의 형태장
사회로 구성된 생태계도 고유의 형태장
사회로 구성된 각 민족에도 고유의 형태장
개도 고유의 형태장
비들기도 고유의 형태장
흰개미도 고유의 형태장이 있다고 하였다.
생태계로 구성된 지구도 고유의 형태장(가이아)
행성으로 구성된 태양계도 고유의 형태장
태양계로 구성된 은하계도 고유의 형태장
은하계로 구성된 우주도 고유의 형태장이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이 말하는 “시공간”도 우주의 형태장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형태장에는 여러 가지 계층이 있는데 계층이 높아질수록 장(場)의 크기가 클 뿐만 아니라 더 포괄적이고 복잡하며 초인적 지성을 갖는다고 하였다. 따라서 태양계가 지성을 가지고 있고 은하계는 한 차원 더 높은 지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 태양계나 은하계가 가지고 있는 이 초인적 지성은 언제부터 출발하였나? 그것은 처음부터 우주의 시작과 함께 그냥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우리는 더 이상 두개골 속에 갇힌 존재가 아니며, 우리의 마음은 서로에게서 분리되거나 고립된 것도 아니고,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신체나 환경, 다른 사람들에게 낯선 이방인이 아니라 우리는 모두 상호 연결되어 있다고 강조하였다.
2007.05.17 08:33:24
섬돌님 올려주신 자료는 잘 보았습니다. 그런데 올려주신 자료의 신빙성이 의심이 되는군요...
저명한 학자들과 일군의 과학사적 사실들과 유사과학의 사례를 짬뽕한 전형적인 신물리학 계열의 물타기 자료입니다. ^^; 논의에 별로 도움은 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양자역학과 마음(뇌)에 관한 책이라면 플라토니즘에 입각해서 비교적 잘 정리되어 있는 로저 펜로즈경의 "황제의 새 마음"이라던가, "괴델,에셔,바흐" (더글러스 호프스태터)라는 책의 일독을 권해드립니다. 후자의 경우는 양자물리학적 지지입장은 아니나 충분히 소개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올려주신 자료는 글쓰신 분이 사상의학을 하시는 분이라 유사과학적 냄새가 너무 진하게 풍기는데요 ^^;
모두 통틀어 겔만의 양자신비주의라는 묶음으로 편재될 수 있습니다. 별 논의할 거리는 못됩니다.
일단 데미님이 출발점을 다시 찾으셨다고 하니 기다려보죠! ^^
저명한 학자들과 일군의 과학사적 사실들과 유사과학의 사례를 짬뽕한 전형적인 신물리학 계열의 물타기 자료입니다. ^^; 논의에 별로 도움은 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양자역학과 마음(뇌)에 관한 책이라면 플라토니즘에 입각해서 비교적 잘 정리되어 있는 로저 펜로즈경의 "황제의 새 마음"이라던가, "괴델,에셔,바흐" (더글러스 호프스태터)라는 책의 일독을 권해드립니다. 후자의 경우는 양자물리학적 지지입장은 아니나 충분히 소개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올려주신 자료는 글쓰신 분이 사상의학을 하시는 분이라 유사과학적 냄새가 너무 진하게 풍기는데요 ^^;
모두 통틀어 겔만의 양자신비주의라는 묶음으로 편재될 수 있습니다. 별 논의할 거리는 못됩니다.
일단 데미님이 출발점을 다시 찾으셨다고 하니 기다려보죠! ^^
2007.05.17 10:02:14
섬돌님, voltaire님... 저는 섬돌님이 올려주신 자료가 voltaire 님 말씀처럼 과학사적 사실과 유사과학의
사례가 혼합된 자료이긴 하지만 과학자을 하는 입장이 아니라면 아주 좋은 자료가 된다고 봅니다.
또 과학의 나아가게 하는 아이디어로서의 상상력도 그것 자체로는 과학이 아니니까요.
제가 양자론에 관심을 가지고 열 명의 문둥병자 이야기를 했던 것도 섬돌님의 자료와 비슷한 케이스였고...
[황제의 새 마음]과 [괴델,에셔,바흐]를 흥미있게 읽고 있는 중입니다요~
그리고 저는 섬돌님의 접근 방법에 대해서 일단 북마크를 해두고 싶습니다.
자... 암튼, 이제 우리가 비트겐슈타인과 진화론이니 검토해 봐야 할 과정을 그런대로 검토해 본 것 같고
그 결과로 왜 서로 자꾸 어긋났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voltaire 님과도 그렇고 정목사 님과도 그렇고 또 다른 분들과도 그렇습니다.
이왕 나왔으니 홍해의 이적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면, 언어분석의 인문학적 접근으로는 그 이야기가
진실인지 아닌지를 분간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저의 그게 진실이 아니면 하나님도 없지 않느냐는 물음에서 자꾸 어긋났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배경이 바로 voltaire 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창조주는 초이성적이고 초자연적이지 반이성적이거나 반자연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많이 모호하게 사용하는 초물리주의나 초자연주의는 인식의 저 너머에 잇는 것이므로 언어로 나타내기조차 힘이듭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긋남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은 실천(행동)이 어떻게 진리를 향한 우리의 여정에 유일하게 남은 길인가를 이해함에 있어
명쾌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과 홍해의 이적이 다시 맞물리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다시 잡은 bootstrapping point가 이 근방 언저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인식의 저 너머에 있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세계와 우리의 세계는 연결될 수 있는가...하는 문제.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초자연적인 현상을 우리가 목도할 수 있는가, 의 문제가 바로 갈림길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을 수 없는 것'이 존재하는가....?
사례가 혼합된 자료이긴 하지만 과학자을 하는 입장이 아니라면 아주 좋은 자료가 된다고 봅니다.
또 과학의 나아가게 하는 아이디어로서의 상상력도 그것 자체로는 과학이 아니니까요.
제가 양자론에 관심을 가지고 열 명의 문둥병자 이야기를 했던 것도 섬돌님의 자료와 비슷한 케이스였고...
[황제의 새 마음]과 [괴델,에셔,바흐]를 흥미있게 읽고 있는 중입니다요~
그리고 저는 섬돌님의 접근 방법에 대해서 일단 북마크를 해두고 싶습니다.
자... 암튼, 이제 우리가 비트겐슈타인과 진화론이니 검토해 봐야 할 과정을 그런대로 검토해 본 것 같고
그 결과로 왜 서로 자꾸 어긋났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voltaire 님과도 그렇고 정목사 님과도 그렇고 또 다른 분들과도 그렇습니다.
이왕 나왔으니 홍해의 이적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면, 언어분석의 인문학적 접근으로는 그 이야기가
진실인지 아닌지를 분간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저의 그게 진실이 아니면 하나님도 없지 않느냐는 물음에서 자꾸 어긋났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배경이 바로 voltaire 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창조주는 초이성적이고 초자연적이지 반이성적이거나 반자연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많이 모호하게 사용하는 초물리주의나 초자연주의는 인식의 저 너머에 잇는 것이므로 언어로 나타내기조차 힘이듭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긋남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은 실천(행동)이 어떻게 진리를 향한 우리의 여정에 유일하게 남은 길인가를 이해함에 있어
명쾌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과 홍해의 이적이 다시 맞물리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다시 잡은 bootstrapping point가 이 근방 언저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인식의 저 너머에 있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세계와 우리의 세계는 연결될 수 있는가...하는 문제.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초자연적인 현상을 우리가 목도할 수 있는가, 의 문제가 바로 갈림길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을 수 없는 것'이 존재하는가....?
2007.05.17 11:14:53
데미님의 실천이성 개념에 큰 혼동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꾸 실천이성과 실천이성을 헷갈려 하시는 것 같은데요.
일단 섬돌님의 유사과학에 대한 얘기부터 잠깐하고 넘어가죠. (주제와는 큰 상관이 없지만 제가 줄기차게 주장해오던 바이므로) 데미님은 저런 일련의 유사과학들이 어떤 과학의 신선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큰 오산입니다. 유사과학과 과학적 아이디어는 개념이 다릅니다. 과학철학에서 다루는 가설과 검증/반증의 기초적인 개념 밖에 있는 일종의 사기입니다. 과학철학적 배경지식을 가지고 주의깊게 관찰하신다면 아이디어와 유사과학의 차이는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여기서 다시 과학철학을 얘기할 순 없고...칼 포퍼의 개념만 알면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이쯤하고 넘어가죠. (제가 굳이 이글을 쓴 이유는 데미님의 어떤 신비지향적인 사고가 이런 것들에 영향을 받지 않았나하는 사견에서 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긋남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은 실천(행동)이 어떻게 진리를 향한 우리의 여정에 유일하게 남은 길인가를 이해함에 있어
명쾌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과 홍해의 이적이 다시 맞물리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다시 잡은 bootstrapping point가 이 근방 언저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창조주는 초이성적이고 초자연적이지 반이성적이거나 반자연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많이 모호하게 사용하는 초물리주의나 초자연주의는 인식의 저 너머에 잇는 것이므로 언어로 나타내기조차 힘이듭니다."
이말을 곡해하시면 곤란합니다. 이말을 칸트식으로 풀어서 얘기하면 신, 절대자,초월자의 개념은 순수이성으로 파악하기 불가능하다라는 말을 나타낸 것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실천이성의 얘기는 bootstrapping point가 아닙니다. 데미님이 애초에 지적하신 bootstrapping point는 세계관의 선택이라는 문제로 오히려 순수이성의 태생적 문제를 말함이 아니었던가요? 원래부터 목적이 실천이성의 방법모색이었다면 굳이 bootstrapping point 기원론같은 문제는 꺼내지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일부러 먼길을 돌아온 느낌입니다.
또한 실천이성이 진리를 향한 유일한 길이란 표현도 별로 올바른 표현이 아닙니다. 둘 다 진리를 향해나아가는 프로세스의 일환들이죠. 칸트의 저작시리즈는 유기적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칸트의 묘비명에는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을 간략히 줄여주는 문구가 있죠.
"하늘에는 반짝이는 뭇별들, 내 맘속엔 빛나는 도덕률"
뭇별들이란 천문학으로 지칭되는 사물에 관한 것들 즉, 종합명제로 쌓아올라갈 수 잇는 순수이성의 역할을 말하는 것이고, 그외에 인간으로서 파악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신, 자유, 영원 등등) 판단기준으로서 요청되는 도덕에 관한 것을 압축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데미님은 실천이성비판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인 "도덕률"과 "요청되는 神의 개념", 그리고 마찬가지로 "요청되는 자유의지"의 개념을 아직 읽지않으시고 묻는 것 같습니다. 실천이성비판에서 사용되는 기본개념들을 숙지하신다면 자꾸 "초자연적인 현상을 우리가 목도할 수 있는가"라는 쓸데없는 문제에 집착하지 않으시게 될겁니다.
저번에도 말씀드린 것 같은데 일단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을 둘 다 읽으시기 바랍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대략 3가지 개념들은 순수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실천이성적 파악의 매우 중요한 기준입니다. 그것을 여기서 다시 설명할 순 없잖아요. 이것 때문에 자꾸 이야기가 뱅뱅 도는 것 같습니다. 실천이성 얘기가 나오면 더이상 초자연적 현상의 목도 가능성에 대한 얘기는 이슈가 안되어야 합니다. 자꾸 낫으로 사과가 안깎인다고 얘기하시는데 낫으로는 당연히 사과가 안깎이죠.... 사과엔 과도를 써야합니다. 그런데 과도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논의의 가능성은 중단될 것 같습니다. 왜냐면 과도가 무엇인지 제가 만들어서 보여드릴 순 없고 직접 과도가 무엇인지 알아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시중에 과도는 널렸습니다. 실천이성비판이라는 과도는 도서관에 인터넷에 책방에 무궁무진합니다. 최재희 교수님의 과도를 권해드립니다. 일독하시고 얘기 나눴으면 합니다. 실천이성을을 논의하는데 최소한의 개념은 알고 해야 논의가 자꾸 헛도는 것을 막을 수 있거든요.
일단 섬돌님의 유사과학에 대한 얘기부터 잠깐하고 넘어가죠. (주제와는 큰 상관이 없지만 제가 줄기차게 주장해오던 바이므로) 데미님은 저런 일련의 유사과학들이 어떤 과학의 신선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큰 오산입니다. 유사과학과 과학적 아이디어는 개념이 다릅니다. 과학철학에서 다루는 가설과 검증/반증의 기초적인 개념 밖에 있는 일종의 사기입니다. 과학철학적 배경지식을 가지고 주의깊게 관찰하신다면 아이디어와 유사과학의 차이는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여기서 다시 과학철학을 얘기할 순 없고...칼 포퍼의 개념만 알면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이쯤하고 넘어가죠. (제가 굳이 이글을 쓴 이유는 데미님의 어떤 신비지향적인 사고가 이런 것들에 영향을 받지 않았나하는 사견에서 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긋남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은 실천(행동)이 어떻게 진리를 향한 우리의 여정에 유일하게 남은 길인가를 이해함에 있어
명쾌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과 홍해의 이적이 다시 맞물리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다시 잡은 bootstrapping point가 이 근방 언저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창조주는 초이성적이고 초자연적이지 반이성적이거나 반자연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많이 모호하게 사용하는 초물리주의나 초자연주의는 인식의 저 너머에 잇는 것이므로 언어로 나타내기조차 힘이듭니다."
이말을 곡해하시면 곤란합니다. 이말을 칸트식으로 풀어서 얘기하면 신, 절대자,초월자의 개념은 순수이성으로 파악하기 불가능하다라는 말을 나타낸 것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실천이성의 얘기는 bootstrapping point가 아닙니다. 데미님이 애초에 지적하신 bootstrapping point는 세계관의 선택이라는 문제로 오히려 순수이성의 태생적 문제를 말함이 아니었던가요? 원래부터 목적이 실천이성의 방법모색이었다면 굳이 bootstrapping point 기원론같은 문제는 꺼내지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일부러 먼길을 돌아온 느낌입니다.
또한 실천이성이 진리를 향한 유일한 길이란 표현도 별로 올바른 표현이 아닙니다. 둘 다 진리를 향해나아가는 프로세스의 일환들이죠. 칸트의 저작시리즈는 유기적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칸트의 묘비명에는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을 간략히 줄여주는 문구가 있죠.
"하늘에는 반짝이는 뭇별들, 내 맘속엔 빛나는 도덕률"
뭇별들이란 천문학으로 지칭되는 사물에 관한 것들 즉, 종합명제로 쌓아올라갈 수 잇는 순수이성의 역할을 말하는 것이고, 그외에 인간으로서 파악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신, 자유, 영원 등등) 판단기준으로서 요청되는 도덕에 관한 것을 압축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데미님은 실천이성비판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인 "도덕률"과 "요청되는 神의 개념", 그리고 마찬가지로 "요청되는 자유의지"의 개념을 아직 읽지않으시고 묻는 것 같습니다. 실천이성비판에서 사용되는 기본개념들을 숙지하신다면 자꾸 "초자연적인 현상을 우리가 목도할 수 있는가"라는 쓸데없는 문제에 집착하지 않으시게 될겁니다.
저번에도 말씀드린 것 같은데 일단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을 둘 다 읽으시기 바랍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대략 3가지 개념들은 순수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실천이성적 파악의 매우 중요한 기준입니다. 그것을 여기서 다시 설명할 순 없잖아요. 이것 때문에 자꾸 이야기가 뱅뱅 도는 것 같습니다. 실천이성 얘기가 나오면 더이상 초자연적 현상의 목도 가능성에 대한 얘기는 이슈가 안되어야 합니다. 자꾸 낫으로 사과가 안깎인다고 얘기하시는데 낫으로는 당연히 사과가 안깎이죠.... 사과엔 과도를 써야합니다. 그런데 과도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논의의 가능성은 중단될 것 같습니다. 왜냐면 과도가 무엇인지 제가 만들어서 보여드릴 순 없고 직접 과도가 무엇인지 알아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시중에 과도는 널렸습니다. 실천이성비판이라는 과도는 도서관에 인터넷에 책방에 무궁무진합니다. 최재희 교수님의 과도를 권해드립니다. 일독하시고 얘기 나눴으면 합니다. 실천이성을을 논의하는데 최소한의 개념은 알고 해야 논의가 자꾸 헛도는 것을 막을 수 있거든요.
2007.05.17 12:27:13
voltaire 님도 자신이 받아들인 프로세스 외에는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군요.
실천이성 얘기가 나오면 더이상 초자연적 현상의 목도 가능성에 대한 얘기는 이슈가 안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내가 위에서 말한 것은 실천 이성이 왜 문제가 되어야 하느냐, 라는 주제가 나오기 직전입니다.
지금 voltaire 님의 말을 따라 실천이성으로 넘어가면 일반종교와 기독교는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칸트나 비트겐슈타인의 실천 문제가 기독교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자명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처음 출발한 주제가 '인문학적인 성경읽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voltaire 님의 사유 프로세스는 초이성적이고 초자연적인 창조주까지 인문학 안에 가두는 것입니다.
내가 '믿을 수 없는 것'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한 것은 실천이성 문제로 넘어간 상태에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개념에 혼동을 일으킨 것이지요.
순수이성의 문제에서 이 정도로 간단히 실천이성의 문제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천이성의 문제가 나오기도 전의 질문으로 이해하시기 바라며 다시 질문합니다.
내가 '믿을 수 없는 것'이 존재하는가....?
실천이성 얘기가 나오면 더이상 초자연적 현상의 목도 가능성에 대한 얘기는 이슈가 안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내가 위에서 말한 것은 실천 이성이 왜 문제가 되어야 하느냐, 라는 주제가 나오기 직전입니다.
지금 voltaire 님의 말을 따라 실천이성으로 넘어가면 일반종교와 기독교는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칸트나 비트겐슈타인의 실천 문제가 기독교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자명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처음 출발한 주제가 '인문학적인 성경읽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voltaire 님의 사유 프로세스는 초이성적이고 초자연적인 창조주까지 인문학 안에 가두는 것입니다.
내가 '믿을 수 없는 것'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한 것은 실천이성 문제로 넘어간 상태에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개념에 혼동을 일으킨 것이지요.
순수이성의 문제에서 이 정도로 간단히 실천이성의 문제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천이성의 문제가 나오기도 전의 질문으로 이해하시기 바라며 다시 질문합니다.
내가 '믿을 수 없는 것'이 존재하는가....?
2007.05.17 12:29:11
글쎄요, 데미님이 말씀하신 초자연적 현상이란 것도 굳이 기독교적이 않아도 됩니다. 제가 단 댓글 중에 다른 종교의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실재론적 해석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한 걸로 기억하는데요. 그건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그리고, 어디서부터 사유의 개념이 서로 틀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칸트와 비트겐슈타인 얘기부터 하죠. 칸트나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실천문제는 물론 기독교만을 지칭하진 않습니다. 일반 종교의 주제를 대상으로 삼은 것이죠. 꼭 기독교여야 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한 질문인 것 같은데 데미님이 말미에 남기신 "내가 '믿을 수 없는 것'이 존재하는가....? "와 같은 질문도 꼭 기독교 틀안에서 나오는 질문이 아닌 것 같습니다.
데미님이 알고자하시는 바가 기독교적 틀안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구요. 그러면에서 그것이 과연 옳은 질문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분명 데미님이 말씀하신 질문은 제종교적인 개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 같은데요?
꼭 기독교적 틀이어야 한다는 근본적인 이유가 "인문학으로 성서읽기"라고 하신다면 bootstrapping point의 문제는 그다지 일반적이지 않은 문제가 됩니다. 하지만 분명, bootstrapping point라는 것은 인간의 인식론 문제로서 기독교적인 개념이 아닌 일반학문적인 개념입니다. 따라서 사유의 틀을 잘못 잡고 시작한 셈이지요.
다시 한 번 실천이성비판의 일독을 권해드립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과 희망할 수 있는 것에 관해서 칸트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칸트의 사유를 애초에 꺼내신 건 데미님이니, 칸트적으로 끝까지 말씀드리면 "믿을 수 없는 것이 있는가?" 라는 문제는 "다루지 않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이 생각나는군요.
"오도된 질문은 쓸데없이 미로를 헤메이게 만든다"
그리고, 어디서부터 사유의 개념이 서로 틀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칸트와 비트겐슈타인 얘기부터 하죠. 칸트나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실천문제는 물론 기독교만을 지칭하진 않습니다. 일반 종교의 주제를 대상으로 삼은 것이죠. 꼭 기독교여야 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한 질문인 것 같은데 데미님이 말미에 남기신 "내가 '믿을 수 없는 것'이 존재하는가....? "와 같은 질문도 꼭 기독교 틀안에서 나오는 질문이 아닌 것 같습니다.
데미님이 알고자하시는 바가 기독교적 틀안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구요. 그러면에서 그것이 과연 옳은 질문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분명 데미님이 말씀하신 질문은 제종교적인 개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 같은데요?
꼭 기독교적 틀이어야 한다는 근본적인 이유가 "인문학으로 성서읽기"라고 하신다면 bootstrapping point의 문제는 그다지 일반적이지 않은 문제가 됩니다. 하지만 분명, bootstrapping point라는 것은 인간의 인식론 문제로서 기독교적인 개념이 아닌 일반학문적인 개념입니다. 따라서 사유의 틀을 잘못 잡고 시작한 셈이지요.
다시 한 번 실천이성비판의 일독을 권해드립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과 희망할 수 있는 것에 관해서 칸트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칸트의 사유를 애초에 꺼내신 건 데미님이니, 칸트적으로 끝까지 말씀드리면 "믿을 수 없는 것이 있는가?" 라는 문제는 "다루지 않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이 생각나는군요.
"오도된 질문은 쓸데없이 미로를 헤메이게 만든다"
2007.05.17 12:34:40
"그 당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때 그 자리에 없었던 우리로서는 알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라고 쓰신 것에서 짐작하기로는, 데미님은 우리가 그 당시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고, 따라서 이적 기사를 믿느냐 안믿느냐는 "복잡한 사유를 거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개인의 선택에 따른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시는 듯 합니다. 저는 약간 초점을 달리해서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들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범위를 좁혀서 말씀드리자면, 사람들이 남북국 분열 이전의 사건들을 기록한 성경 텍스트의 역사성에 대해 의문을 품는 기본적인 이유는, 기적 이야기가 많이 나오기 때문이 아니라,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유적/유물 증거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고학자 핑컬슈타인은 [성경: 고고학인가 전설인가] 에서, "20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성서) 고고학은 성경이 역사적 근거 없이 후대에 쓰여진 사제 문학일 뿐이라는 주장을 반박할 만한 많은 유물 증거들을 발견해 냈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 기록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정확하게 기록한 것이라는 주장과 고고학 발굴 증거 사이에는 수많은 모순점들이 존재한다 (By the end of the twentieth century, archaeology had shown that there were simply too many material correspondences between the finds in Israel and in the entire Near East and the world described in the Bible to suggest that the Bible was late and fanciful priestly literature, written with no historical basis at all. But at the same time there were too many contradictions between archaeological finds and the biblical narratives to suggest that the Bible provided a precise description of what actually occurred [The Bible Unearthed], 2002, pp.19-21]" 고 쓰고 있습니다.
한 예를 들자면, 사람들이 '여리고 성 함락'이 역사상 실제로 일어난 일은 아닐 것이라고 믿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믿기 힘든 기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발굴된 여리고 유적에서 그 시기에 아예 사람이 거주했던 흔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리고 유적만 그런 거라면 뭔가 다른 해석이 가능할 지도 모르겠지만, 여호수아서에 기록된 다른 성읍들도 (아이, 기브온, 그비라, 브에롯, 기랏여아림, 아랏, 헤스본 등등) 같은 발굴 결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후기 청동기 시대에, 그 성읍들에는 사람이 거주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이런 이유로 적어도 고고학 쪽에서는 여호수아서 텍스트를 기반으로 하는 소위 "13세기 정복설"은 기각되었습니다 (핑컬슈타인, 같은책, p.83). 이런 고고학 유물 발굴 결과 역시 데미님에게는 "복잡한 사유를 거치지 않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단순한 세상 지식일 지 모르겠습니다.
정목사님의 "인문학적 전통을 소중히하는 성경 읽기"나, 김진호 목사님의 "성찰로서의 성경 읽기" 모두 이렇게 신학 외적인 분야에서 제기되는 도전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의미 있는 해석 지평을 열어 보려는 노력이라고, "이적이 사실이 아니라면 기독교는 무엇인가"라는 데미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냥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라고 쓰신 것에서 짐작하기로는, 데미님은 우리가 그 당시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고, 따라서 이적 기사를 믿느냐 안믿느냐는 "복잡한 사유를 거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개인의 선택에 따른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시는 듯 합니다. 저는 약간 초점을 달리해서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들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범위를 좁혀서 말씀드리자면, 사람들이 남북국 분열 이전의 사건들을 기록한 성경 텍스트의 역사성에 대해 의문을 품는 기본적인 이유는, 기적 이야기가 많이 나오기 때문이 아니라,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유적/유물 증거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고학자 핑컬슈타인은 [성경: 고고학인가 전설인가] 에서, "20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성서) 고고학은 성경이 역사적 근거 없이 후대에 쓰여진 사제 문학일 뿐이라는 주장을 반박할 만한 많은 유물 증거들을 발견해 냈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 기록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정확하게 기록한 것이라는 주장과 고고학 발굴 증거 사이에는 수많은 모순점들이 존재한다 (By the end of the twentieth century, archaeology had shown that there were simply too many material correspondences between the finds in Israel and in the entire Near East and the world described in the Bible to suggest that the Bible was late and fanciful priestly literature, written with no historical basis at all. But at the same time there were too many contradictions between archaeological finds and the biblical narratives to suggest that the Bible provided a precise description of what actually occurred [The Bible Unearthed], 2002, pp.19-21]" 고 쓰고 있습니다.
한 예를 들자면, 사람들이 '여리고 성 함락'이 역사상 실제로 일어난 일은 아닐 것이라고 믿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믿기 힘든 기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발굴된 여리고 유적에서 그 시기에 아예 사람이 거주했던 흔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리고 유적만 그런 거라면 뭔가 다른 해석이 가능할 지도 모르겠지만, 여호수아서에 기록된 다른 성읍들도 (아이, 기브온, 그비라, 브에롯, 기랏여아림, 아랏, 헤스본 등등) 같은 발굴 결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후기 청동기 시대에, 그 성읍들에는 사람이 거주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이런 이유로 적어도 고고학 쪽에서는 여호수아서 텍스트를 기반으로 하는 소위 "13세기 정복설"은 기각되었습니다 (핑컬슈타인, 같은책, p.83). 이런 고고학 유물 발굴 결과 역시 데미님에게는 "복잡한 사유를 거치지 않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단순한 세상 지식일 지 모르겠습니다.
정목사님의 "인문학적 전통을 소중히하는 성경 읽기"나, 김진호 목사님의 "성찰로서의 성경 읽기" 모두 이렇게 신학 외적인 분야에서 제기되는 도전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의미 있는 해석 지평을 열어 보려는 노력이라고, "이적이 사실이 아니라면 기독교는 무엇인가"라는 데미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2007.05.17 12:40:20
이쯤에서 질문/입장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데미님은 방법론적으로 우회하는 방법을 취하셨지만 결국 우리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는 질문은 이것인 것 같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초자연적 현상은 왜 실재론적으로 해석하면 안되는가?"
다이렉트하게 이런 질문을 데미님의 사유방식으로 논증하기 위해 bootstrapping point를 문제삼은 거고 거기에 더하여 칸트나 데리다, 비트겐슈타인을 끌어오신 것이죠.
저의 불만은 데미님이 끌어들이신 칸트나 데리다 비트겐슈타인, 그리고 세계관 결정의 기원론적 문제인 (정확히는 발달심리학과 인류학적 문제인) bootstrapping point 개념들이 자체에서 자연스레 파생되는 질문들이 아니라, 데미님의 저 사유 하나를 위해 이것저것 누더기처럼 골라서 붙여 만든 사유의 모듬회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개념의 오용이 생기게 되는 것이죠....안그런가요?
데미님은 방법론적으로 우회하는 방법을 취하셨지만 결국 우리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는 질문은 이것인 것 같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초자연적 현상은 왜 실재론적으로 해석하면 안되는가?"
다이렉트하게 이런 질문을 데미님의 사유방식으로 논증하기 위해 bootstrapping point를 문제삼은 거고 거기에 더하여 칸트나 데리다, 비트겐슈타인을 끌어오신 것이죠.
저의 불만은 데미님이 끌어들이신 칸트나 데리다 비트겐슈타인, 그리고 세계관 결정의 기원론적 문제인 (정확히는 발달심리학과 인류학적 문제인) bootstrapping point 개념들이 자체에서 자연스레 파생되는 질문들이 아니라, 데미님의 저 사유 하나를 위해 이것저것 누더기처럼 골라서 붙여 만든 사유의 모듬회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개념의 오용이 생기게 되는 것이죠....안그런가요?
2007.05.17 13:06:13
voltaire 님, 토론은 인내와 관용이 있어야 합니다.
합일점 또는 무엇인가 얻어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런데 의외로 voltaire 님은 자신의 사유 체계 안에 갇혀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세계관이 형성되는 과정에 누더기 같은 남의 생각이 덕지덕지 붙게 마련입니다.
voltaire 님의 생각도 결국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덕지덕지 모인 누더기입니다.
인터넷을 뒤지면 다 나오는 그런 생각들... 지금 누더기를 얼마나 더 많이 모았나 넝마주이들이 싸우는
뒷골목으로 만들지 말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아는 지식 나부랭이가 많으면 얼마나 많겠습니까?
언젠가 영화를 보았는데 총잡이 둘이 서서 대결을 하고 있습니다.
한쪽 총잡이가 총을 빙그르르 돌리고 이쪽 저쪽으로 옮겨가며 온갖 모션을 취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고 있던 상대방이 그냥 빵~ 하고 총을 쏘고, 현란한 묘기를 벌이던 총잡이는 푹~!
중요한 것은 그 한 방의 총알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voltaire 님, 상대하는 이쪽 저쪽을 향해 가볍게 던지는 말은 스스로를 깎아내리게 됩니다.
조금만 더 인내하시길... 토론은 내가 얼마나 많이 알고있나를 드러내는 곳이 아닙니다.
합일점 또는 무엇인가 얻어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런데 의외로 voltaire 님은 자신의 사유 체계 안에 갇혀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세계관이 형성되는 과정에 누더기 같은 남의 생각이 덕지덕지 붙게 마련입니다.
voltaire 님의 생각도 결국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덕지덕지 모인 누더기입니다.
인터넷을 뒤지면 다 나오는 그런 생각들... 지금 누더기를 얼마나 더 많이 모았나 넝마주이들이 싸우는
뒷골목으로 만들지 말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아는 지식 나부랭이가 많으면 얼마나 많겠습니까?
언젠가 영화를 보았는데 총잡이 둘이 서서 대결을 하고 있습니다.
한쪽 총잡이가 총을 빙그르르 돌리고 이쪽 저쪽으로 옮겨가며 온갖 모션을 취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고 있던 상대방이 그냥 빵~ 하고 총을 쏘고, 현란한 묘기를 벌이던 총잡이는 푹~!
중요한 것은 그 한 방의 총알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voltaire 님, 상대하는 이쪽 저쪽을 향해 가볍게 던지는 말은 스스로를 깎아내리게 됩니다.
조금만 더 인내하시길... 토론은 내가 얼마나 많이 알고있나를 드러내는 곳이 아닙니다.
2007.05.17 14:10:10
변이님, 진지하게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동화 속 요정 이야기를 두고 그것이 사실인가 아닌가로 이렇게 토론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이적에 대해서 고고학 이야기가 나오고 하는 것 자체가 그리 간단치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이적들이 그냥 에피소드가 아니라 역사를 진행시키는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출애굽의 내용은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서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등장하는데
열 가지 재앙이 없었으면 홍해까지 오는 내용 자체가 성립이 되기 힘듭니다.
그것 때문에 기적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문제는 성경 전체가 그런 형태의 기록이라는 점입니다. 아직도 정 목사님의 부활에 대한 내용이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만 토론이 여기까지 오면 아마도 '죽은자가 살아났다'는 이적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경우도 예수의 죽음 이후 베드로 같은 제자도 부인하는 마당에 무슨 힘으로 그 이후의 역사가
만들어 졌느냐, 하는 역사 인식의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접입니다.
2천 년 가까이 앗시리아에 대한 고고학적 유물이 없을 때 성경의 앗시리아 관련한 기록은 그야말로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것도 1845년 고고학적인 발굴 때문에 바뀌었습니다.
고고학자가 '고고학은 성경이 역사적 근거 없이 후대에 쓰여진 사제 문학일 뿐이라는 주장을 반박할 만한 많은 유물 증거들을 발견해 냈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 기록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정확하게 기록한 것이라는 주장과 고고학 발굴 증거 사이에는 수많은 모순점들이 존재한다'라고 말할 때 그것 자체로는 우리의 선택에 증거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 게시판에 인문학적 성경읽기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제기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금석으로 홍해 이적을 꺼냈던 것이고...
그런데 인문학적인 사유를 펼치다 보니 그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곳까지 왔는데 그 말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선행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종의 언어유희로 전락한다는 거죠.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구별되어 유일한 하나님을 주장하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제가 칸트와 비트겐슈타인을 계속 붙잡은 것에 대해 voltaire 님이 드디어 짜증이 난 모양인데(?)
다른 분들이 거기서 뭔가 내가 보지 못하는 것,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을 보았는가 싶어서였습니다.
일단 그게 아니군요... 그래서 저는 처음 원점으로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voltaire 님도 믿을 수 없는 것이 실재하는가? 라는 질문에는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네요.
마치 한 달 일했는데 오너가 '봉급을 받으면 뭐할 건데? 요즘 회사 사정이 좀 어렵고, 다른 회사들도 다
그렇고... 돈이라는 게 있다가도 없고... 오늘 오후에 은행에 들려야 하는데...일했으니 당연히 봉급은
줘야지.' 이런 말을 수 천 마디 해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돈을 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화 속 요정 이야기를 두고 그것이 사실인가 아닌가로 이렇게 토론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이적에 대해서 고고학 이야기가 나오고 하는 것 자체가 그리 간단치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이적들이 그냥 에피소드가 아니라 역사를 진행시키는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출애굽의 내용은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서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등장하는데
열 가지 재앙이 없었으면 홍해까지 오는 내용 자체가 성립이 되기 힘듭니다.
그것 때문에 기적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문제는 성경 전체가 그런 형태의 기록이라는 점입니다. 아직도 정 목사님의 부활에 대한 내용이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만 토론이 여기까지 오면 아마도 '죽은자가 살아났다'는 이적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경우도 예수의 죽음 이후 베드로 같은 제자도 부인하는 마당에 무슨 힘으로 그 이후의 역사가
만들어 졌느냐, 하는 역사 인식의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접입니다.
2천 년 가까이 앗시리아에 대한 고고학적 유물이 없을 때 성경의 앗시리아 관련한 기록은 그야말로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것도 1845년 고고학적인 발굴 때문에 바뀌었습니다.
고고학자가 '고고학은 성경이 역사적 근거 없이 후대에 쓰여진 사제 문학일 뿐이라는 주장을 반박할 만한 많은 유물 증거들을 발견해 냈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 기록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정확하게 기록한 것이라는 주장과 고고학 발굴 증거 사이에는 수많은 모순점들이 존재한다'라고 말할 때 그것 자체로는 우리의 선택에 증거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 게시판에 인문학적 성경읽기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제기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금석으로 홍해 이적을 꺼냈던 것이고...
그런데 인문학적인 사유를 펼치다 보니 그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곳까지 왔는데 그 말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선행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종의 언어유희로 전락한다는 거죠.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구별되어 유일한 하나님을 주장하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제가 칸트와 비트겐슈타인을 계속 붙잡은 것에 대해 voltaire 님이 드디어 짜증이 난 모양인데(?)
다른 분들이 거기서 뭔가 내가 보지 못하는 것,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을 보았는가 싶어서였습니다.
일단 그게 아니군요... 그래서 저는 처음 원점으로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voltaire 님도 믿을 수 없는 것이 실재하는가? 라는 질문에는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네요.
마치 한 달 일했는데 오너가 '봉급을 받으면 뭐할 건데? 요즘 회사 사정이 좀 어렵고, 다른 회사들도 다
그렇고... 돈이라는 게 있다가도 없고... 오늘 오후에 은행에 들려야 하는데...일했으니 당연히 봉급은
줘야지.' 이런 말을 수 천 마디 해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돈을 줘야 하는 것입니다.
2007.05.17 14:46:38
빈이 님이 쓰신 글 말미를 옮깁니다.
- 정목사님의 "인문학적 전통을 소중히하는 성경 읽기"나, 김진호 목사님의 "성찰로서의 성경 읽기" 모두 이렇게 신학 외적인 분야에서 제기되는 도전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의미 있는 해석 지평을 열어 보려는 노력이라고, "이적이 사실이 아니라면 기독교는 무엇인가"라는 데미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문제는 신학 외적인 분야에서 제기된 도전입니다.
그 도전은 이성주의와 합리주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런데 '도전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도전은 외부에서 왔지만 그러고 보니 나도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닌가요?
즉 도전은 외부에서 오는 것 같지만 실은 우리 내부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도전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뜻은 '그래 당신들이 맞다. 기적은 없다'라고 말하는 것인데
도전은 홍해의 이적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그 도전을 외면하지 않으면 소경의 나음도 없고
죽은자의 살아남(부활)도 없고 내세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원도 없는 것입니다.
도전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구원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좋은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이렇게도 들리고 저렇게도 들리는 말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뭐 이렇게까지 하면서 성경을 붙들고 있어야 하는 어떤 이유가 그래도 남아 있습니까?
정 뭣하면 산상수훈만 오려 책상 앞에 붙여두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지키지도 못할 테지만.
저는 이 상황이라면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가 보자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도전이 과연 옳은가?
- 정목사님의 "인문학적 전통을 소중히하는 성경 읽기"나, 김진호 목사님의 "성찰로서의 성경 읽기" 모두 이렇게 신학 외적인 분야에서 제기되는 도전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의미 있는 해석 지평을 열어 보려는 노력이라고, "이적이 사실이 아니라면 기독교는 무엇인가"라는 데미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문제는 신학 외적인 분야에서 제기된 도전입니다.
그 도전은 이성주의와 합리주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런데 '도전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도전은 외부에서 왔지만 그러고 보니 나도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닌가요?
즉 도전은 외부에서 오는 것 같지만 실은 우리 내부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도전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뜻은 '그래 당신들이 맞다. 기적은 없다'라고 말하는 것인데
도전은 홍해의 이적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그 도전을 외면하지 않으면 소경의 나음도 없고
죽은자의 살아남(부활)도 없고 내세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원도 없는 것입니다.
도전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구원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좋은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이렇게도 들리고 저렇게도 들리는 말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뭐 이렇게까지 하면서 성경을 붙들고 있어야 하는 어떤 이유가 그래도 남아 있습니까?
정 뭣하면 산상수훈만 오려 책상 앞에 붙여두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지키지도 못할 테지만.
저는 이 상황이라면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가 보자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도전이 과연 옳은가?
2007.05.17 14:46:53
유익한 배움의 기회를 제공해 주시는 두분의 수고에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결국 긴 논의과정 끝에 서로가 서있는 지평을 재 확인함으로
이 토론이 마무리 되는 것이 아닌지 왠지 우려됩니다.
이쯤에서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서
진화론과 인문학적 성경읽기를 대하는 서로의 출발을 공개하는 것이 어떨가 하는 생각입니다.
기독교 교인이신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신뢰하는지에 대한 선언부터 말입니다.
종교일반에서 접근하는 주제와
유신론적 기독교 세계관에서의 접근은 애초에 다를 수 밖에 없겠지요.
이러한 자기공개가 읽는이로 하여금
서로의 상이한 입장을 이해하는 틀이 될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간 고생하셨는데,
서로 간에 유익한 합의에 이를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국 긴 논의과정 끝에 서로가 서있는 지평을 재 확인함으로
이 토론이 마무리 되는 것이 아닌지 왠지 우려됩니다.
이쯤에서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서
진화론과 인문학적 성경읽기를 대하는 서로의 출발을 공개하는 것이 어떨가 하는 생각입니다.
기독교 교인이신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신뢰하는지에 대한 선언부터 말입니다.
종교일반에서 접근하는 주제와
유신론적 기독교 세계관에서의 접근은 애초에 다를 수 밖에 없겠지요.
이러한 자기공개가 읽는이로 하여금
서로의 상이한 입장을 이해하는 틀이 될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간 고생하셨는데,
서로 간에 유익한 합의에 이를수 있기를 바랍니다.
2007.05.17 15:20:21
균형 님, 토론은 각자의 입장을 확인하고 그것을 지키려고 벌이는 싸움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서로 다른 견해가 있을 때 왜 그런 차이가 나타났는지 이해하는 노력을 통해 서로 보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되는 아주 훌륭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각자가 서 있는 지평을 처음부터 확인하는 것도 좋겠지만 토론을 통해 자연스레 드러나게 되어 있고
보다 중요한 것은 각자의 지평이 문제가 아니라 접접을 찾아내어 어느 쪽으로 튈지 모르는 길을 따라가
보는 것입니다. 저는 물론 유일한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쳔입니다.
서로 다른 견해가 있을 때 왜 그런 차이가 나타났는지 이해하는 노력을 통해 서로 보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되는 아주 훌륭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각자가 서 있는 지평을 처음부터 확인하는 것도 좋겠지만 토론을 통해 자연스레 드러나게 되어 있고
보다 중요한 것은 각자의 지평이 문제가 아니라 접접을 찾아내어 어느 쪽으로 튈지 모르는 길을 따라가
보는 것입니다. 저는 물론 유일한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쳔입니다.
2007.05.17 15:43:08
데미님,
네, '닫힘'과 '열림'의 차이를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선명한 차이를 서로간에 부각함으로
각자가 처한 진영을 사수하자는 의도가 아니시라 믿기에,
우선 이렇게 상대의 출발과 동기를 서로간에 확인하는 과정이
오히려 효울적일수 있다는 본 것이지요.
뵙게되서 반갑습니다.
네, '닫힘'과 '열림'의 차이를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선명한 차이를 서로간에 부각함으로
각자가 처한 진영을 사수하자는 의도가 아니시라 믿기에,
우선 이렇게 상대의 출발과 동기를 서로간에 확인하는 과정이
오히려 효울적일수 있다는 본 것이지요.
뵙게되서 반갑습니다.
2007.05.17 16:11:22
기독교는 뭔가 특별하다!
아니, 특별해야만 한다!
그 특별함이란, 이적과 기사이다.
성경에 나오는 신기한 이야기들이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의 믿음은 허당이다.
기독교는 뭔가 특별하다!
그래, 특별해야만 한다!
그 특별함이란, 역사이다. 인간이다.
신과 영웅이 판치는 세상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니!
이적과 초능력이 떵떵거리는 세상에서, 십자가에 처형당한 하나님이라니!
그렇다!
너네들의 믿음은 허당이다.
너무나 인간적인, 바로 이곳을 흐르는 현실.
이보다 더한 신비가 어디 있으며,
이보다 절절한 신앙이 어딨는가!
아니, 특별해야만 한다!
그 특별함이란, 이적과 기사이다.
성경에 나오는 신기한 이야기들이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의 믿음은 허당이다.
기독교는 뭔가 특별하다!
그래, 특별해야만 한다!
그 특별함이란, 역사이다. 인간이다.
신과 영웅이 판치는 세상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니!
이적과 초능력이 떵떵거리는 세상에서, 십자가에 처형당한 하나님이라니!
그렇다!
너네들의 믿음은 허당이다.
너무나 인간적인, 바로 이곳을 흐르는 현실.
이보다 더한 신비가 어디 있으며,
이보다 절절한 신앙이 어딨는가!
2007.05.17 18:08:42
비트겐슈타인이 왜 부지깽이를 휘두르다가 나갔는지 심정이 이해되는군요.
데미님, 누더기를 말씀하셨는데, 저는 데미님이 자신의 사유라는 옷에 이것저것 덕지덕지 천쪼가리를 붙여다가 "이거 옷 맞지 않느냐?" 라고 물어보셔서 친절히(!) 원단을 보여드리며 거기엔 그런 천을 쓰는게 아니라고 말씀드린게 다입니다. 우리의 토론과정을 한 번 쭉 살펴보십시오. 데미님은 처음부터 비트겐슈타인이며, 데리다며, bootstrapping point로 표현된 발달심리학이며, 인류학이며, 칸트까지 엉성하게 가져다 붙이셨고 저는 그것들이 개념상으로 오용되거나 남용되는 것을 지적하였을 뿐입니다. 거기서 한발자국도 나아가질 못했죠.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 대한 얘길 하면서 가장 기본적인 개념도 인식하지 못하시고,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이해도 피상적이시고, bootstrapping point의 기원론 얘길 꺼내시곤 실증적 예를 드니 회피하시고.....속옷에 스판덱스 천을 쓸 순 없잖습니까...
이 토론이 난항을 겪게 된 원인은 아까도 댓글에 달았다시피, 데미님의 문제제기 방법의 오류에서 출발합니다. 차라리 19세기 자유주의 신학부터 20세기 칼바르트며 여러 신학자들이 다양하게 성서를 해석한 해석학의 예들이 도처에 널렸는데 직접적으로 "이적기사를 실재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한 옹호"를 표방하지 않으시고 칸트니 뭐니 같다붙이시고 저는 그런 개념에 대해 오용되는 것을 막고.... 토론이 쳇바퀴를 돌 수 밖에요. 제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하도 칸트를 들먹이시길래 실천이성비판의 3가지 개념은 기본적으로 아시는 줄 알았습니다. 이런 격차를 가지고선 토론이 불가능합니다. 저한테 배우기도 싫으시겠지만 제가 가르쳐드릴 입장도 아니잖아요.
제가 더욱 짜증이 났던 건, 데미님이 던지신 것과 같은, 알 수 없는 질문들을 막기 위해 비트겐슈타인이 그토록 침묵하라고 했는데, 오히려 비트겐슈타인을 들먹이시며 논의를 시작하시는 황당함이 제 인내심보다 길어져서 그랬습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도 그렇구요. 역발상이신가요? 차라리 다른 계열의 철학자를 말하셨으면 이렇게 황당항미 짜증으로 변질되진 않았을 겁니다.
칼자루를 쥐지않고, 칼날부분을 쥐곤 피가 왜 나는지, 분명히 당신이 이 칼은 명검이라고 햇잖아? 근데 왜 손에서 피가 나지! 라고 하시면 처음에는 황당하지만 칼자루를 잡으라고 가르쳐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 칼자루와 칼날을 혼동하시면서 너의 검은 명검이 아니라고하시면 칼 한번 제대로 휘둘러 보지도 못하고 끝나는 거 아닙니까!
대체로 데미님의 문제의식에 관한 감수성과 끈기는 높이 평가할만 합니다만 자신이 지금 무얼 쥐고 있는지 판단하시길 바랍니다.
"믿을 수 없는 것이 실재하는가?" 같은 엉터리 질문에 (실존적 질문일 수 잇는 데미님에겐 나름대로 가치있는 질문이겠지만), 그것에 대해 데미님은 이미 답을 가지고 계신 것 같고, (물론 우문에는 현답이 패러독스의 형태로 존재하지만 저는 그런 논의는 원치 않습니다) 저희에게 그것을 논증적 형태로 먼저 꺼내십시오. 괜히 소크라테스가 산파법하듯이 질문의 형태로 유도하지 마시구요.
성서해석상의 실재론적, 상징론적, 존재론적 방법과 그에 대한 비판은 조직신학에 대해서 조금만 공부하셔도 내용이 나옵니다. 여기 신학 전공하신 분들 많으니 얘기도 생산적으로 진행 될 거구요. 차라리 처음부터 다이렉트하게 질문하셨으면 우회하지 않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기독교적 틀안에서 진행되는 그런 토론에 참여할 용의는 있지만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기에는 너무 멀리 온 것 같군요.
데미님, 누더기를 말씀하셨는데, 저는 데미님이 자신의 사유라는 옷에 이것저것 덕지덕지 천쪼가리를 붙여다가 "이거 옷 맞지 않느냐?" 라고 물어보셔서 친절히(!) 원단을 보여드리며 거기엔 그런 천을 쓰는게 아니라고 말씀드린게 다입니다. 우리의 토론과정을 한 번 쭉 살펴보십시오. 데미님은 처음부터 비트겐슈타인이며, 데리다며, bootstrapping point로 표현된 발달심리학이며, 인류학이며, 칸트까지 엉성하게 가져다 붙이셨고 저는 그것들이 개념상으로 오용되거나 남용되는 것을 지적하였을 뿐입니다. 거기서 한발자국도 나아가질 못했죠.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 대한 얘길 하면서 가장 기본적인 개념도 인식하지 못하시고,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이해도 피상적이시고, bootstrapping point의 기원론 얘길 꺼내시곤 실증적 예를 드니 회피하시고.....속옷에 스판덱스 천을 쓸 순 없잖습니까...
이 토론이 난항을 겪게 된 원인은 아까도 댓글에 달았다시피, 데미님의 문제제기 방법의 오류에서 출발합니다. 차라리 19세기 자유주의 신학부터 20세기 칼바르트며 여러 신학자들이 다양하게 성서를 해석한 해석학의 예들이 도처에 널렸는데 직접적으로 "이적기사를 실재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한 옹호"를 표방하지 않으시고 칸트니 뭐니 같다붙이시고 저는 그런 개념에 대해 오용되는 것을 막고.... 토론이 쳇바퀴를 돌 수 밖에요. 제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하도 칸트를 들먹이시길래 실천이성비판의 3가지 개념은 기본적으로 아시는 줄 알았습니다. 이런 격차를 가지고선 토론이 불가능합니다. 저한테 배우기도 싫으시겠지만 제가 가르쳐드릴 입장도 아니잖아요.
제가 더욱 짜증이 났던 건, 데미님이 던지신 것과 같은, 알 수 없는 질문들을 막기 위해 비트겐슈타인이 그토록 침묵하라고 했는데, 오히려 비트겐슈타인을 들먹이시며 논의를 시작하시는 황당함이 제 인내심보다 길어져서 그랬습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도 그렇구요. 역발상이신가요? 차라리 다른 계열의 철학자를 말하셨으면 이렇게 황당항미 짜증으로 변질되진 않았을 겁니다.
칼자루를 쥐지않고, 칼날부분을 쥐곤 피가 왜 나는지, 분명히 당신이 이 칼은 명검이라고 햇잖아? 근데 왜 손에서 피가 나지! 라고 하시면 처음에는 황당하지만 칼자루를 잡으라고 가르쳐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 칼자루와 칼날을 혼동하시면서 너의 검은 명검이 아니라고하시면 칼 한번 제대로 휘둘러 보지도 못하고 끝나는 거 아닙니까!
대체로 데미님의 문제의식에 관한 감수성과 끈기는 높이 평가할만 합니다만 자신이 지금 무얼 쥐고 있는지 판단하시길 바랍니다.
"믿을 수 없는 것이 실재하는가?" 같은 엉터리 질문에 (실존적 질문일 수 잇는 데미님에겐 나름대로 가치있는 질문이겠지만), 그것에 대해 데미님은 이미 답을 가지고 계신 것 같고, (물론 우문에는 현답이 패러독스의 형태로 존재하지만 저는 그런 논의는 원치 않습니다) 저희에게 그것을 논증적 형태로 먼저 꺼내십시오. 괜히 소크라테스가 산파법하듯이 질문의 형태로 유도하지 마시구요.
성서해석상의 실재론적, 상징론적, 존재론적 방법과 그에 대한 비판은 조직신학에 대해서 조금만 공부하셔도 내용이 나옵니다. 여기 신학 전공하신 분들 많으니 얘기도 생산적으로 진행 될 거구요. 차라리 처음부터 다이렉트하게 질문하셨으면 우회하지 않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기독교적 틀안에서 진행되는 그런 토론에 참여할 용의는 있지만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기에는 너무 멀리 온 것 같군요.
2007.05.17 23:42:21
voltaire 님은 차이점을 이해하는 분석력에서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납니다.
그러나 유사성을 이해하는 통찰력에서는 이상하게도 거의 백치 수준인 듯 싶습니다.
인내심을 잃은 것 같으니 더 이상의 토론은 무의미하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인문학적 성경읽기를 파악하기 위한 제 의도의 절반은 이루어졌습니다. 그만해도 큰 소득이지요.
voltaire 님, 정목사 님, 그리고 섬돌 님, 빈이 님, 균형 님, 늘오늘 님, 브니엘남 님,
그리고 말없이 이 소동을 지켜 보아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평안하십시오...
그러나 유사성을 이해하는 통찰력에서는 이상하게도 거의 백치 수준인 듯 싶습니다.
인내심을 잃은 것 같으니 더 이상의 토론은 무의미하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인문학적 성경읽기를 파악하기 위한 제 의도의 절반은 이루어졌습니다. 그만해도 큰 소득이지요.
voltaire 님, 정목사 님, 그리고 섬돌 님, 빈이 님, 균형 님, 늘오늘 님, 브니엘남 님,
그리고 말없이 이 소동을 지켜 보아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평안하십시오...
2007.05.19 15:47:46
창세기에 의하면 에덴 동산 가운데 선악(善惡)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먹지 말라고 금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그것을 금지하셨을까요?
성경 기록 외에 다른 정보가 없으니 그 이상은 자세한 내용을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우리에게 해로울 것 같지가 않은데 말입니다.
그런데 다 아시다시피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는 그것을 따먹게 됩니다.
성경엔 그 결과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창3:7)'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영역 성경에 보니까 그 부분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As soon as they had eaten it, they were given understanding(GNB)...
정말로 선과 악, 즉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능력(understanding)이 인간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이 자기들의 몸이 벗을 줄을 알게 된 것입니다.
벌거벗은 것과 입은 것을 분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벗은 줄을 잘 모릅니다.
'눈이 밝아' 스스로 벗은 줄을 알게 되는 나이부터, 우리는 성인이라고 부릅니다.
성인으로 진입하는 기준인 분별력은 진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더러 벗은 줄도 모르는 어린아이로 돌아가라고? 이 말씀은 도대체 무슨 말씀일까요?
여기 쟁토방에도 보니까 이런 주제와 관련한 토론이 있었더군요...
그런데 깊이 따지고 들어가지 않아도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뭔가 어떤 낌새를 채고 있습니다.
여기서 벌어진 것같은 치열한 토론이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성인이 된 우리들이 어쩐 일인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하지 않는' 상태에 대한 동경을 늘
가지고 있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사랑하는 연인들은 치열한 토론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는 대화는 '반찬은 뭐 먹었어? 김? 김치? 오늘 일어나자마자 내 생각 했어?' 따위입니다.
치열한 분별력의 세계는 우리들의 존재가 진정으로 원하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요?
나무를 보되 숲은 보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나무를 보려면 그 방향으로 다가가 더 깊이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만 합니다.
그 방향을 포기하고 정반대 방향으로 뒤로 멀리 물러나지 않으면 숲은 결코 보이지 않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나무만 연구하다 보면 '숲은 없다'와 같은 놀라운 신념도 갖게 됩니다.
그게 사람이기도 합니다.
숲을 보기위해 뒷걸음질 하는 것이 그야말로 진보에 역행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무를 보려는 방향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한참 가야 숲이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인문학적인 성경읽기와 관련하여 그 출발점에 대해 우려하는 것은 그와 비슷한 것입니다.
현대 무용의 창시자라 하는 이사도라 던컨 자서전 머릿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실을 쓰려고 할 때 작가가 가져야 할 기본 조건이
그 사실에 대한 경험이 없어야 한다는 말은 진실이다.
자신의 생을 돌아보며 수많은 자료들을 정리해야 할 것 같은 자서전 머릿말로는 조금 어처구니 없지요?
그러나 이런 말을 들을 때 우리는 그 말이 가지고 있는 울림이 우리 가슴에도 있다는 걸 느낍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만 속한 존재가 아니라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토론을 마무리하면서 '분별력과 통찰력'을 이야기한 것이 조금 걸리기도 해서 사족을 답니다.
주 안에서 좋은 주말이 되시길...
하나님은 그것을 먹지 말라고 금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그것을 금지하셨을까요?
성경 기록 외에 다른 정보가 없으니 그 이상은 자세한 내용을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우리에게 해로울 것 같지가 않은데 말입니다.
그런데 다 아시다시피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는 그것을 따먹게 됩니다.
성경엔 그 결과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창3:7)'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영역 성경에 보니까 그 부분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As soon as they had eaten it, they were given understanding(GNB)...
정말로 선과 악, 즉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능력(understanding)이 인간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이 자기들의 몸이 벗을 줄을 알게 된 것입니다.
벌거벗은 것과 입은 것을 분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벗은 줄을 잘 모릅니다.
'눈이 밝아' 스스로 벗은 줄을 알게 되는 나이부터, 우리는 성인이라고 부릅니다.
성인으로 진입하는 기준인 분별력은 진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더러 벗은 줄도 모르는 어린아이로 돌아가라고? 이 말씀은 도대체 무슨 말씀일까요?
여기 쟁토방에도 보니까 이런 주제와 관련한 토론이 있었더군요...
그런데 깊이 따지고 들어가지 않아도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뭔가 어떤 낌새를 채고 있습니다.
여기서 벌어진 것같은 치열한 토론이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성인이 된 우리들이 어쩐 일인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하지 않는' 상태에 대한 동경을 늘
가지고 있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사랑하는 연인들은 치열한 토론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는 대화는 '반찬은 뭐 먹었어? 김? 김치? 오늘 일어나자마자 내 생각 했어?' 따위입니다.
치열한 분별력의 세계는 우리들의 존재가 진정으로 원하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요?
나무를 보되 숲은 보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나무를 보려면 그 방향으로 다가가 더 깊이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만 합니다.
그 방향을 포기하고 정반대 방향으로 뒤로 멀리 물러나지 않으면 숲은 결코 보이지 않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나무만 연구하다 보면 '숲은 없다'와 같은 놀라운 신념도 갖게 됩니다.
그게 사람이기도 합니다.
숲을 보기위해 뒷걸음질 하는 것이 그야말로 진보에 역행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무를 보려는 방향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한참 가야 숲이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인문학적인 성경읽기와 관련하여 그 출발점에 대해 우려하는 것은 그와 비슷한 것입니다.
현대 무용의 창시자라 하는 이사도라 던컨 자서전 머릿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실을 쓰려고 할 때 작가가 가져야 할 기본 조건이
그 사실에 대한 경험이 없어야 한다는 말은 진실이다.
자신의 생을 돌아보며 수많은 자료들을 정리해야 할 것 같은 자서전 머릿말로는 조금 어처구니 없지요?
그러나 이런 말을 들을 때 우리는 그 말이 가지고 있는 울림이 우리 가슴에도 있다는 걸 느낍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만 속한 존재가 아니라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토론을 마무리하면서 '분별력과 통찰력'을 이야기한 것이 조금 걸리기도 해서 사족을 답니다.
주 안에서 좋은 주말이 되시길...
2007.05.19 16:17:15
예전 중국에 유명한 선승이 있었습니다. 그 선승은 깨달음의 경지를 얻어 도를 아는 자라고 천하에 소문이 나게되었습니다. 고관대작들과 수행승들이 그 비결을 물으려고 진귀한 보물들을 가지고 찾아왔지만 선승은 도(道)가 무엇인가란 질문에 대한 대답은 도통 해주질 않았고, 손님들은 엄지 손가락 하나만 지긋이 치켜세우는 선승만 구경하다가 돌아갔더랬습니다.
그런데 그 선승이 머무는 절에는 선승을 시종하는 동자승이 있었습니다. 그 동자승은, 많은 사람들이 선승에게 도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마다 엄지 손가락을 올리는 선승을 보곤, "아, 도(道)란 저것이구나." 하여 선승을 흉내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온 절을 쏘다니며, 여기저기 선배승들을 귀찮게 하곤 엄지손가락을 슬며시 올리는 것이 어느덧 선승의 귀에 까지 들렸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선승이 동자승을 가까이 불렀습니다. 그리고선 물었지요.
"도(道)가 무엇이냐?"
그러자 동자승은 엄지손가락을 내밀었고, 선승은 사정없이 그 손가락을 숨겨둔 칼로 동강 내버렸습니다.
동자승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체 울면서 그 자리를 뛰쳐나갔습니다.
얼마 지난 후, 선승이 다시 동자승을 불렀습니다.
"도(道)가 무엇이냐?"
동자승은 이번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선승이 말했습니다.
"잘 보거라,"
선승은 동자승 앞에서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이며 말했습니다.
"보이느냐?"
"네."
동자승의 대답과 동시에 선승은 그자리에서 자신의 엄지 손가락을 번개처럼 잘라버렸습니다.
그리고, 동자승은 그 자리에서 득도를 했습니다.
-----------------------------------------------------------------------------------------------------------------------------
손가락을 들어올리는 일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많은 이들은 동자승처럼 손가락을 아무렇게나 올리곤 하죠.
선승이 그런 행위를 하는 의미에 대해 말 그대로 피상적인 이해를 한 결과입니다.
다행히 동자승은 스승을 잘 만나서
자기 손가락을 희생해가며 가르쳐준 스승 덕분에 득도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지 생각을 해보게됩니다.
개념에 대한 오용과 혼용, 그리고 남용.
어느 순간 그런 모습에서 동자승이 멋모르고 엄지손락을 올리는 짓을 떠올리게 됩니다.
---------------------------------------------------------------------------------------------------------------------------------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 계속 말을 하려고하는 칼 포퍼에게
말로서 자신의 그런 주장을 말한다면 그것은 자기모순이 되는 걸 알고는
부지깽이를 휘두르다가 나가버렸습니다.
칼 포퍼는 죽을 때까지 비트겐슈타인이 그렇게 하고 나간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곤 끝까지 비트겐슈타인을 이해할 수 없었죠.
그런면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스승의 기질은 없었나봅니다.
그런데 그 선승이 머무는 절에는 선승을 시종하는 동자승이 있었습니다. 그 동자승은, 많은 사람들이 선승에게 도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마다 엄지 손가락을 올리는 선승을 보곤, "아, 도(道)란 저것이구나." 하여 선승을 흉내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온 절을 쏘다니며, 여기저기 선배승들을 귀찮게 하곤 엄지손가락을 슬며시 올리는 것이 어느덧 선승의 귀에 까지 들렸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선승이 동자승을 가까이 불렀습니다. 그리고선 물었지요.
"도(道)가 무엇이냐?"
그러자 동자승은 엄지손가락을 내밀었고, 선승은 사정없이 그 손가락을 숨겨둔 칼로 동강 내버렸습니다.
동자승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체 울면서 그 자리를 뛰쳐나갔습니다.
얼마 지난 후, 선승이 다시 동자승을 불렀습니다.
"도(道)가 무엇이냐?"
동자승은 이번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선승이 말했습니다.
"잘 보거라,"
선승은 동자승 앞에서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이며 말했습니다.
"보이느냐?"
"네."
동자승의 대답과 동시에 선승은 그자리에서 자신의 엄지 손가락을 번개처럼 잘라버렸습니다.
그리고, 동자승은 그 자리에서 득도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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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을 들어올리는 일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많은 이들은 동자승처럼 손가락을 아무렇게나 올리곤 하죠.
선승이 그런 행위를 하는 의미에 대해 말 그대로 피상적인 이해를 한 결과입니다.
다행히 동자승은 스승을 잘 만나서
자기 손가락을 희생해가며 가르쳐준 스승 덕분에 득도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지 생각을 해보게됩니다.
개념에 대한 오용과 혼용, 그리고 남용.
어느 순간 그런 모습에서 동자승이 멋모르고 엄지손락을 올리는 짓을 떠올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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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 계속 말을 하려고하는 칼 포퍼에게
말로서 자신의 그런 주장을 말한다면 그것은 자기모순이 되는 걸 알고는
부지깽이를 휘두르다가 나가버렸습니다.
칼 포퍼는 죽을 때까지 비트겐슈타인이 그렇게 하고 나간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곤 끝까지 비트겐슈타인을 이해할 수 없었죠.
그런면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스승의 기질은 없었나봅니다.
2007.05.19 16:51:20
내가 그만 칼 포퍼에 비유되고 있군요. 이거 대단한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은 '말하는 자는 알 수 없다'는 장자의 말을
베낀 것 같은데 '말할 수 없는 것'과 말이 연결될 수 있느냐는 것이 제 마지막 질문의 내적 의미였습니다.
부지깽이 사건과 관련한 말을 자꾸 옮기는 것이 voltaire님이 비트겐슈타인을 이원론자로 이해한다는
의미는 아니시겠지요? 물론 답변을 유도하는 질문은 아닙니다만...
비트겐슈타인이 천재 중의 천재이나 인류의 진정한 스승이 되지 못하는 것은
부지깽이를 휘두르다가 나갈 수 밖에 없는 정도의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건의 원인은 자기가 도달한 곳이 숙명적으로 머무를 수 없는 곳이었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구요.
그러고 보면 비트겐슈타인은 칼 포퍼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던 것입니다.
voltaire님, 좋은 분을 만났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기분 상하게 했다면 용서하십시오.
우리 이야기가 마무리된 것이 아니기에 언젠가 다시 쟁토방에 글을 쓰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때까지 한 번, 뒤로 물러나 보는 훈련을 해 보시지요...
마무리되었는데 괜한 사족을 달았나 막 후회를 하는 중입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은 '말하는 자는 알 수 없다'는 장자의 말을
베낀 것 같은데 '말할 수 없는 것'과 말이 연결될 수 있느냐는 것이 제 마지막 질문의 내적 의미였습니다.
부지깽이 사건과 관련한 말을 자꾸 옮기는 것이 voltaire님이 비트겐슈타인을 이원론자로 이해한다는
의미는 아니시겠지요? 물론 답변을 유도하는 질문은 아닙니다만...
비트겐슈타인이 천재 중의 천재이나 인류의 진정한 스승이 되지 못하는 것은
부지깽이를 휘두르다가 나갈 수 밖에 없는 정도의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건의 원인은 자기가 도달한 곳이 숙명적으로 머무를 수 없는 곳이었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구요.
그러고 보면 비트겐슈타인은 칼 포퍼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던 것입니다.
voltaire님, 좋은 분을 만났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기분 상하게 했다면 용서하십시오.
우리 이야기가 마무리된 것이 아니기에 언젠가 다시 쟁토방에 글을 쓰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때까지 한 번, 뒤로 물러나 보는 훈련을 해 보시지요...
마무리되었는데 괜한 사족을 달았나 막 후회를 하는 중입니다.^^
2007.05.19 17:44:49
천재가 꼭 인류의 스승이 되어야 할 당위성은 없지요.
여전히 비트겐슈타인에 대해서 오해를 하시지만
어떤 주제에 대한 문제의식의 발화점으로서만 삼는다면
그걸로 충분히 좋은 토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이나 칸트에 대해서 좀 더 아실 수 있는 계기였으면 더욱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만약 다음에 토론을 다시 하게 된다면
좀 더 다이렉트하고 솔직한 논증방식의 토론을 하고 싶습니다.
사실 우리의 토론주제는 이미 가독교적 틀안에서 같은 고민을 하던, 그 고민을 몸으로 느끼던
많은 신학자들의 발자취인 것 같습니다.
그들도 칸트나 비트겐슈타인, 심지어 아인슈타인까지 고려하면서 말이죠.
특정한 성격해석의 당위성 문제와 그것의 실존적 선택배경이
조직신학과 성서해석학을 통해 본격적으로 얘기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군대와서 머리 굴려본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그런지
쉽게 달아올랐나봅니다.
제 글에 심한 결례가 보였다면 용서를 바랍니다.
너무 멀리 돌아온것 같다는 글을 썼고 그게 사실인 것 같지만,
그럼에도 저 역시 마음 한 구석에서 토론의 끈을 놓고 싶진 않았답니다. ^^
여전히 비트겐슈타인에 대해서 오해를 하시지만
어떤 주제에 대한 문제의식의 발화점으로서만 삼는다면
그걸로 충분히 좋은 토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이나 칸트에 대해서 좀 더 아실 수 있는 계기였으면 더욱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만약 다음에 토론을 다시 하게 된다면
좀 더 다이렉트하고 솔직한 논증방식의 토론을 하고 싶습니다.
사실 우리의 토론주제는 이미 가독교적 틀안에서 같은 고민을 하던, 그 고민을 몸으로 느끼던
많은 신학자들의 발자취인 것 같습니다.
그들도 칸트나 비트겐슈타인, 심지어 아인슈타인까지 고려하면서 말이죠.
특정한 성격해석의 당위성 문제와 그것의 실존적 선택배경이
조직신학과 성서해석학을 통해 본격적으로 얘기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군대와서 머리 굴려본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그런지
쉽게 달아올랐나봅니다.
제 글에 심한 결례가 보였다면 용서를 바랍니다.
너무 멀리 돌아온것 같다는 글을 썼고 그게 사실인 것 같지만,
그럼에도 저 역시 마음 한 구석에서 토론의 끈을 놓고 싶진 않았답니다. ^^
그 전에는 구전으로 전해진 것들이 있었다고 봐야 할 것 같네요. 글이 아니라, 말로 전해진 세월이 훨씬 길다고 봐야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일단 말이 글이 되는 과정에서, 그 말을 글로 옮기게 되는 과정에 어떤 답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무한한 신성을 인간의 말로 표현할때 과연 유한한 인간이, 신성을 온전히 말에 담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하고, 말로 담겨진 것이 글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과연, 신성의 속성을 온전히 담아 표현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있을 것으로 봅니다.
말에서 글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제한하는 결과가 있었다고 봐야 할 것으로 봅니다.
이런 말은 어떨까요?
하느님은 기독교를 통해서 말하신다.
그러나
기독교는 곧 하나님이다라고 할 수는 없다. 즉 그 역은 꼭 참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기독교를 유태인 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생각해도 됩니다.
즉, 기독교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하나의 중요한 '통로'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제 생각은 적어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성을 말할 때는 성경이 성령의 영감으로 쓰여진 것이라고 할 지라도, 불가피하게 하나님의 속성을 제한하게 된다는 사실은 좀 인정하는 선에서 시작하고, 그 위에서 논의를 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입니다. 즉 축자적인 해석은 좀 심각히 의문을 품어야한다는 거죠. 왜냐면, 완전한 신성을 불완전한 인간의 인식 속에서 표현해야하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죠. 사실 우린 성령과 동행하면서도, 온전히 성령의 뜻을 알지 못하고 헛다리를 집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은폐된 진리가 온전히 드러나지 않았다고 볼 수 도 있구요.
좀 더 나가서, 하나님의 신성을 표현하는 인간의 말과 글을 좀더 파고들다보면,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말과 글이라는 인식론적인 지평속에서 그 한계를 뚫고, 존재론적인 지평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해 봅니다. 제 자신의 고민이 숨어 있습니다. 고걸 전 생명의 자기 초월 내지는 창발적 진화, 구원이라고 생각하고 있고요.
그래서 부탁드리는 건데요.
제가 아직 정리가 안되서 그런데요. 혹시, 말 또는 글이 -언어학적 관점이겠네요- 점, 선, 면이라는 3차원적인 성질이 아니라, 즉 존재를 나타내는 성격으로써 3차원적인 것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것이 포함되는 4차원적인 성질이라면... 혹 데리다나 비트겐쉬타인의 언어학적 해석이 4차원적인 언어의 성격을 말하는 것이라면, 전 창발적 진화에 대해 좀더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즉 4차원적인 성격이라면, 당연히 말은 글은 곧, 그 말을 하는 인간 내지 그 글을 쓰는 인간의 행위가 수반되는 것으로 보거든요. 어쩌면, 인간이나 생명이 본질적으로 언어행위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존재의 신비로 들어간다고 볼 수도 있겠구요. 하여간 말과 글은 중요한 열쇠인 것 같은데요. 데리다나 비트겐쉬타인의 말과 글에 대한 생각이 뭔지 잘 이해가 안되서 전 정리가 안되네요. 얼핏 읽은 기억으로는 그런 의미도 포함되는 것 처럼 보이는데... 데미님이 좀 정리해 주시면 도움이 될 듯한데요.
그 후에 즉 언어가 4차원적인 성질의 것이라는 것이 정리되면, 제 나름대로의 창발적 진화나 자기 초월에 대한 이야기 보따리를 좀 풀어보고 싶은데요...
히브리적으로 봐도, 신성을 표현하는 언어인 야훼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될 수없는 존재이구요. 하나님을 원어적의미로 봐도,, I am who I am 차원이 아니라... I will be what will be 차원에서 해석해야 올바른 해석일 것이고, 생물의 창발적 진화가 설명될 것 같네요. 즉 뒤의 표현이 만물을 지으시고 유지시키시는 존재로서의 신성을 잘 표현한다고 보거든요. 즉 만물을 만드시고 유지하시고 진화시키는, 창조행위를 '이미 완료'한 것이아니라 지금도 '진행중'이신 신성을 표현하는 것이거든요.
데미님이나 다른 분이 데리다나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언어에 대해 좀 설명해주셨으면 도움이 되겠네요. 혹 그들의 표현에서 진리의 일단을 볼 수 있지않을까해서 드리는 질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