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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주의에 대한 질문

조회 수 1896 추천 수 12 2005.10.29 17:35:32
정정희 *.120.20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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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외에도 구원이 가능하다면?

1. 예수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올 필요가 있는가?
2. 우리에게 예수는 정말 필요한가?

종교다원주의의 입장에서 상기의 명제가 풀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첫 번째 명제는 즉 예수 없이도 구원이 가능하다면 예수가 굳이 십자가에 죽어야 할 이유가 있었는가? 하는 기독교의 근본교리에 물음을 던져야 한다고 봅니다.

만일 예수의 십자가가 없이도 구원이 이루어진다면 십자가의 죽음은 헛된 것일 수도 있겠지요

두 번째 명제는 예수 없이도 구원이 가능하다면 나와 예수와의 관계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요?
그렇다면 도대체 예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겠지요




높은뜻 숭의교회에서 펀글입니다  아시는대로 말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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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5.10.29 23:30:37
*.249.178.30

정정희 씨, 자주 들르시는군요.
한성영 씨가 늘 한 발 앞서서 길을 제시하고 있네요.
아마 도움이 될 것으로 봅니다.
그렇지만 이 부분에서는 좀 문제가 생길 수 있겠군요.
예수는 우리를 단지 깨닫은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신 건 아닙니다.
설령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데 머물렀을지 모르지만
그 예수가 바로 하나님 나라와의 일치라는 점에서
이제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예수는 전혀 다른 의미가 되었습니다.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되었습니다.
전혀 다른 역사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역사의 신비일 수도 있습니다.
도대체 역사적 실존 인물이었던 예수가,
우리와 다를 게 하나도 없었던 예수가,
목수의 아들이며 스스로 목수였던 예수가
역사 안에서 전혀 새로운 사건으로 지양되었다고나 할까요?
유일회적인 메시야로 지양되었다고나 할까요?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하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질문하기 시작하면 상당히 많은 논의가 필요합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예수 경험을 역사비평적으로 해명해야하고,
그 뒤의 교부들의 해석들도 따라가야 하고,
더 근본적으로는 구약의 묵시문학적 메시야 대망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연관성 안으로 들어가야합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의 인문학적 인식을 통해서
초기 기독교의 부활경험과 생명과의 연관성도 풀어야하겠지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예수가 그리스도로서 확보하고 있는 유일성이
완전하게 확보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에는 신뢰가 필요합니다.
나는 또 하나의 예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이외의 그 어떤 사람도 예수, 또는 그리스도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 없이도 구원이 가능하냐구요?
이런 질문은 내가 보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세례받기 위해서,
직접 전도하기 위해서,
또는 설교할 때 필요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무의미합니다.
그것이 옳은 말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문제는 그런 질문과 논란으로 해결되는 게 아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지 구원의 지평을 확대해가며,
예수를 심층적으로 이해해하는 게 중요하지
예수와 구원이라는 잣대로
교회 밖의 사람들과 타종교인들을 배척할 수는 없으며,
그런 태도는 아무 무익합니다.
아래의 256번 대글에서 말했지만
구원이 훨씬 증층적이고 다원적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하나의 규범으로 그것을 재단할 수는 없을 겁니다.
예수 믿는 게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냐구요?
그럴 리가 있나요.
예수의 가르침, 그의 행위, 그의 십자가와 부활, 그의 운명은
바로 우리의 구원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도 역시 종말론적으로 열려있는 것이지
폐쇄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누가 구원받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로 인해서
우리의 영성을 소진시킬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리얼리티 안으로 들어가는 게 중요합니다.
예수의 성육신과 십자가 문제는 또 하나의 다른 주제입니다.
여기서 욕심을 낼 수는 없군요.
이만.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5.10.30 19:13:18
*.249.178.30

한성영 씨,
수고가 많습니다.
지금까지 말씀하신 내용들은 저도 여러 번 읽고 듣기고 했습니다.
내가 속해 있는 기독교를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종교다원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주장들이 옳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쪽에 내 운명을 걸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는 흡사 공산주의의 목소리가 상당하게 옳기는 하지만
그들의 체제를 내가 따르고 싶지 않다는 것과 비슷하지요.
종교와 정치가 다른 영역이지만, 비유적으로 말한 것 뿐입니다.
위의 글에서 예수와 그리스도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분명하지 않아서
뭐라 말하기는 힘들지만
역사적 예수만 중요한 게 아니라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도 역시 중요한 게 아닐까요?
예수와 그리스도의 일치가 종교다원주의자들에게는 무의미한지 모르지만
나는 그것에 내 운명을 걸기로 했습니다.
우리 각자가 예수가 될어야 한다고 말했지요?
나는 그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고루하다고 생각할 것 같군요.
여전히 깨우침이 없는 것 같지요.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나는 아직도 생명의 신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만이 아니라 한성영 씨도 마찬가지겠지만,
그것이 노출되기를 기다리고 살려고 합니다.
그 생명의 세계는 하이데거 식으로 말해서 존재이겠지요.
우리가 어떻게 처리할 수 없는 그 세계는
내가 의도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것 자체의 힘으로 나타날 뿐이라는 생각이죠.
한성영 씨는 이미 그 세계를 본 것 같군요.
나는 못 보았습니다.
여전히 부분적으로만 압니다.
나는 지금 코끼리의 한가닥 털만 붙들고 있는 형국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그 어떤 도사들도 역시 여기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한성영 씨는 이 말이 동의하지 않으시는지.
나는 그 코끼리 털이 아니라 전체가 드러나야만 생명의 세계가 이루어진다고 믿죠.
그런데 2천년 전의 예수에게서 그 사건이 선취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기독교의 도그마에 불과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는 물리학을 포함해서 모든 게 도그마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열린 세계를 향하는지 아닌지에서 차이가 나겠지요.
밥 먹으라고 성화래서,
중간에 글이 끊기네요.
이만.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5.10.30 23:50:40
*.249.178.30

저녁 먹기 위해 글을 쓰다가 말았는데
벌써 콤멘트가 달렸군요.
잘 하셨습니다.
뭐 길게 말할 것도 없긴 합니다.
깨달은 사람은 언제가 말이 없기 마련이지요.
나는 아직 그렇지 못해서
무언가를 말하려고 애를 씁니다.
한선생이 말한대로 깨달음은 모든 사유를 그칠 때 온다는 말은 옳습니다.
그러나 그말은 부분적으로만 옳습니다.
사유가 없는 한 깨달음도 없으며,
궁극적으로는 사유와 깨달음(또는 깨우침)은 동시적 사건이기도 합니다.
사유는 분석이고 깨우침은 직관이라는 이분적 구분도 옳지 않지요.
어떻게 분석 없이 직관이 가능하며
직관 없이 분석이 요구될 수 있나요.
여기 포도주 한잔이 내 앞에 있습니다.
한성영 씨는 이걸 어떻게 깨우침으로 받아들이나요?
포도주와 자기의 일체가 된다는 직관으로요?
포도주도 공이고 나도 공이라는 그런 관점으로요?
만유가 일체이고, 공은 곧 색이며, 색이 공이죠.
그러나 그런 깨우침이라는 것도
사물의 이치에 대한 분석없이 가능하다고 보세요?
성철이 최첨단의 물리학 책을 그냥 읽었다고 보세요?
사유나 깨우침이나 서로 소통하는 세계입니다.
굳이 구분한다면
사유는 단지 사유로 끝날 수 있지만
그것이 실제의 삶과 일치하려면 깨우침이 있어야하겠지요.
포도주와 자기와의 실제적인 일치는 사유와 다른 세계라는 건 분명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일치(성육신)는 우리가 이렇게 인간으로 사는 한에서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가까이 다가갈 수는 있지만 완전한 일치는 불가능합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예수가 될 수 없다고 믿는 거죠.
흉내는 낼 수 있어요.
도사 연하고 흉내는 낼 수 있지요.
아무 것에도 연연해하지 않고
혹은 이미 궁극적인 것을 발견한 것처럼 말은 하고,
실제로 그렇게 사는 시늉은 어느 정도 가능합니다.
한 선생은 그런 절대의 세계와 이미 일치하고 있나요?
그렇지 않다면 깨우침과는 거리가 있는 거죠.
다시 말하지만 그런 완전한 일치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인간이 세계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벗어난 세계와 일치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도,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테니까
거기에 대해서 내가 왈가왈부할 수는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자기가 아는 것 만큼 살아내는 수밖에 없지요.
다만 각자가 그런 생명의 신비를 화두로 잡고 살면 되지 않을까요?
나는 그것이 바로 예수로부터 주어진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갈 거고,
한선생은 자신이 바로 그 예수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면 되겠지요.
이런 부분에서 더 이상의 논란은 무의미하지 않을는지.

[레벨:1]정세웅

2005.11.03 15:42:51
*.59.55.77

길위라는 말이 너무 어렵군요.
그리고 포도주가 어디있는지 뭐가 중요하나요, 포도주다 싶으면 마시면 되지요.
알지 못하면 알지 못하는데로 살면되고, 알면 아는데로 살면 되지 않나요?
알지 못한다고 무명이라 한다면, 오직 그만 알지 못함을 모르고 있는 것이겠지요.
정목사님의 말씀에 올인합니다.

[레벨:1]정세웅

2005.11.05 16:50:20
*.126.63.53

한성영님, 참 재미있는 분이군요...
나의 내공없음을 이런식으로 대응해 주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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