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설교를 듣던중 답답함에...

조회 수 1832 추천 수 24 2005.07.11 22:4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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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사님 건강하시죠...
   그냥 잠깐 지나가려다가 장마전선이 머물러 뭔가를 내뱉고 가듯...저도 잠시 몇마디 내 뱉고 가려고 합니다.

   오늘 장경동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조금은 아쉬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가정에 대한 설교를 하고 계셨는데요. 그 내용중의 저의 귀를 상당히 거슬리게 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내용인데요...하와와 리브가를 비교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부모)의 역할을 강조하는 내용인 것 같은데...하와는 가인과 아벨의 싸움에서 아벨을 구하지 못해서 죽게한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어머니이고, 리브가는 에서와 야곱의 관계에서 야곱이 죽음을 당하게 될 그 당시에 그로하여금 도망갈 길을 열어주어서 그 역할을 다했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과연 그것이 어떤 근거를 바탕으로 한 말인지....아니면 그냥 내 뱉은 말인지....자신의 이야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러한 근거없는 이야기를 하는 듯한 장목사님의 태도가 마음에 답답함을 던져주었습니다.
   무엇이 그분으로 하여금 그렇게 억측스런 설교를 하게 만드는 것인지...
   아니면 제가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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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5.07.12 00:05:48
*.249.178.12

유희탁 목사님,
요즘 내가 뜻하지 않게 '설교비평'이라는 악역을 맡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막연하게 '정말 들을 게 없는 설교를 하시네.'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매우 불신앙적인 설교를 하시네 하는 확신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말이죠.
설교 명망가들이나, 또는 교회를 키우기 위해서
불철주야 애를 쓰는 중소형 교회 목사들을 포함해서 그렇습니다.
얼마전에 모새골 임영수 목사님의 설교를
매우 바람직한 설교로 제시한 적이 있습니다.
최소한 그런 정도의 영적인 지평이 있어야
성서를 실제로 '구원론적' 차원에서 전할 수 있습니다.
아마 내가 모르는 목사님들 중에서 그런 분들이 제법 많을 겁니다.
그냥 숨어 있어서 눈에 뜨이지 않을 뿐이죠.
혹시 주변에 그런 분이 있으면 추천해보세요.
저의 설교비평 작업에서 다루어볼까 합니다.
지금까지 나는 기장 목사님들은 한번도 다루지 않았어요.
아마 기장 목사님들 중에서는 잘나가는 분이 없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만큼 정도를 걷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설교행위에서 가장 중요한 게 성서의 세계로 들어가야 하는 건데
신학대학교, 신대원에서 그런 훈련이 충분하게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졸업한 채 목회 현장에 휘둘리다보니
세월이 가도 역시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어쩌면 목사님들이 게을러서,
또는 머리가 따라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교회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근본적으로는 목사 자신의 책임이 가장 큽니다.
성서의 세계는 영적 시각에 잡히지 않고
대신 교회부흥이라는 현안만 강하게 작동되는 교회 현실에서
목회자의 영성이 어떻게 될는지는 불문가지입니다.
장경동 목사님의 하와와 리브가 해석은 '소설'입니다.
설교자가 성서의 행간을 읽어낼 능력이 있어서
전혀 새로운 영적 리얼리티를 열어준다면 고맙겠지만
카인과 아벨의 싸움을 말리지 못했다는 발상은
아마 장 목사님이 요즘 이경규 씨와 함께 활동하시는 탓인지 모르겠지만,
내게 코미디처럼 들리는군요.
이런 자리에서 남을 비아냥거리는 건 좋지 못한 것 같네요.
그럴 생각이 없으니까 이해하세요.
아마 장 목사님은 청중을 재미있게 하느라고
별 생각이 없이 한마디 던진 건지 모르지요.
그러나 그런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서는 조심해야 할 태도입니다.
그건 그렇고,
성서기자는 형제살해라는 현실을 신화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가인과 아벨 설화를 제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왜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았는지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벨은 맏배의 좋은 양을 바쳤고,
가인은 아무 곡식이나 드렸다고 하지만
그런 해석은 견강부회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죽일 수 있다는 이 현실,
심지어 존속살해가 가능한 인간의 현실을
성서기자는 여기서 제시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악인가를 설명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 싸움에 하와가 등장하다니...
기상천외한 발상이군요.
야곱을 오빠 라반의 집으로 피신시킨 리브가의 지혜가 돋보이나요?
오히려 리브가는 야곱을 편애한 문제가 많은 어머니입니다.
사실 이런 부분은 성서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조금 더 그 서사에 접근해 보면,
리브가가 야곱을 피신시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에서는 결국 야곱을 죽이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물론 불같은 성격의 에서가 칼을 들고 설치기는 했지만
과연 죽이기까지 했겠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야곱이 20년만에 돌아왔을 때
야곱의 걱정과 달리 에서는 동생을 따뜻이 맞았지요?
겱국 성서는 야곱의 야심과 비인간적 행동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그를 선택하고 지키셨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거지요.
어쩌면 역으로 야곱이 인간적인 야심을 펼치지 않았다면
그만큼 시행착오가 줄어들 수 있었다는 사실을
성서 기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무엇이 실체적 진실인지 잘 모릅니다.
텍스트는 늘 무언가를 감추고 있습니다.
그것은 종말까지 자기의 길을 가게 될 겁니다.
그 텍스트 안에 들어간 사람에 의해서 그 숨겨진 것이 조금씩 드러날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서는 아직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흐의 '파르티타'(?)가 아지 모든 음악의 세계를 노출하지 않고
여전히 위대한 연주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듯이
성서도 역시 궁극적인 것을 숨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삶과 역사, 시간과 생명, 갈등과 모순 같은
깊이를 충분히 성찰하지 않은 사람이
흡사 조자룡 헌칼 휘두르듯 칼춤을 추는 건 좀 모양이 우습지요.
왜 오늘 설교자들이 이렇게 성서 텍스트를
존재론적으로 접근하지 못한 채 도구적으로만 사용할까요?
이런 이야기를 하려면 참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모더니즘과 사회주의 해체와 신자유주의를 설명해야 하고,
특히 우리의 독재시절에 있었던 압축성장의 사회학적 내용들을 설명해야 합니다.
오늘은 그만 접어야겠군요.
좀 느리지만, 그리고 불안하지만
성서 텍스트의 존재론적 근거를 포착해나가는 길이
대중추수주의(포퓰리즘)의 횡포와 그 허무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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