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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조직신학자이신

김균진 연세대 신학과 명예교수님의 저서

<생명의 신학: 인간의 생명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이해>를

읽다가 좋은 내용이 있어서 그대로 타이핑해봤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엔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 신학생들, 신자들이

김균진 교수님의 책을 많이 읽기만 해도

한국 교회가 새롭게 달라질 것 같습니다. ^^


<“절대 진리”의 허구성과 이데올로기적 문제성>


필자는 지난 30여 년 간 종교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이것이 절대 진리이다”라는 얘기를 가끔 들을 수 있었다. “이것이 하나님이 계시한 성경의 절대 진리이다”, “우리 교회가 믿는 이것이 하나님의 절대 진리이다”라는 얘기를 우리는 지금도 한국의 개신교계 안에서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소위 절대 진리는 인간의 생명을 훼손하는 또 한 가지 종교적 신화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것이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절대 진리라면, 이것과 다른 생각은 모두 “거짓”이다. 거짓이기 때문에 그것은 허용될 수 없다. 이리하여 모든 “다른 것”에 대한 배타성이 하나의 원리가 되며, 인간 생명의 구체적 상황을 무시한 절대성과 교권주의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이 요구된다. 절대 진리의 이름으로 종교적 사기극이 일어나기도 한다.


서로 자기의 생각을 “절대 진리”라고 고집할 때, 대화와 타협이 불가능하다. 자기의 생각과 다른 생각은 쉽게 “이단”으로 정죄되고, 자기의 주장에 대한 불복종은 하나님에 대한 불복종으로 간주된다. 이리하여 교단과 교단, 종교와 종교 간의 분리와 싸움이 일어난다. 서로 대화하고 타협할 수 있는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어린이와 여성의 생명을 신의 제물로 바치는 일, 중세기의 마녀재판과 화형, 지동설을 주장한 브루노의 화형, 30년에 걸친 근대 유럽의 “종교전쟁”, 오늘날 무슬림의 자살폭탄 테러는 소위 종교의 절대 진리가 얼마나 잔인하며 거짓된 것인가를 예시한다.


“절대적 진리”란 인간의 모든 상황에 대해 타당성을 지닌 것을 말한다. 모든 상황에 타당성을 지니기 때문에, 그것은 “절대적”이다. 여기서 상황의 구체성은 무시된다. 상황이 어찌됐든 인간은 소위 절대적 진리에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상황에 대해 타당한 진리는 어느 상황에도 타당하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을 우리는 신약성서에서 볼 수 있다. 예수 당시 유대교 사회에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절대적 진리로 생각되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안식일에는 밀 이삭을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병자는 죄 때문에 병에 걸렸다고 생각되어 사회에서 소외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생명에 도움이 되어야 할 종교가 오히려 절대 진리의 이름으로 인간의 생명을 억압하고 소외시키는 현실을 발견한다. 예수는 절대 진리의 허구를 깨뜨린다. 그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주며 죄인들의 친구가 된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따 먹는 것을 허용한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의 많은 성직자들은 성서문자주의 내지 축자영감설에 근거하여 성서의 글자 자체를 시간을 초월하여 타당성을 가진 절대 진리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 아래에 있다”는 바울서신의 구절들을 절대적 진리인 것처럼 가르친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성경적 진리”, 곧 절대 진리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여성의 생명에 대한 모욕이요 훼손이다. 국민의 다수가 기독교를 믿는 미국의 여성에게 1920년까지 투표권이 부여되지 않았고, 캐나다에서는 그보다 조금 이른 1918년에야 여성의 투표권을 인정했으며, 퀘백 주 지방선거에서는 1940년까지도 여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았던 사실은 기독교가 “성경적 진리”, “절대 진리”의 이름으로 여성의 권리와 생명을 훼손하였던 사례를 증명한다. 만일 성서의 글자를 하나님의 절대 진리라고 믿는다면, 모든 남자 목사님들은 구약성서의 명령에 따라 수염을 깎지 말아야 할 것이며(레위기 19:27, 21:5), 하나님을 우리 인간과 똑같은 “아버지”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물론 기독교는 포기할 수 없는 기본 진리를 가진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성육신, 예수의 십자가의 구원과 부활, 예수의 다시 오심(재림)과 최후 심판 등은 기독교가 포기할 수 없는 기본 진리에 속한다. 그러나 기본 진리에 대한 해석과 이해는 다양할 수 있다. 어떤 해석과 이론도 절대성을 요구할 수 없다.


구체적 예를 들어 기독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상한다. 그러나 신적 존재인 하나님은 인간 아버지가 아니다. “아버지”라는 기독교의 호칭은 하나님에 대한 은유에 불과하며 결코 하나님 자신과 일치하지 않는다. 만일 하나님이 글자 그대로 인간 아버지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인간 아버지의 상(像)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에 대한 모든 상을 금지한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인간에게 가르쳐 주지 않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창세기 32:29, 출애굽기 3:13 - 14, 사사기 13:17 – 18).


따라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은 물론 “어머니”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의 인식도 절대적 진리가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모든 진술은 은유에 불과하다. “과학도 오직 비유로써 얘기한다.” 신적 존재로서의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파악할 수 있는 영역 저 너머에 계신다. 하나님의 천사가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에게 말한 것처럼, 그는 우리 인간에게 언제나 하나의 “비밀”이다. 따라서 하나님에 관한 인간의 모든 인식과 이야기는 은유의 성격을 가진다. 예수도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오직 비유를 통해 얘기하였다. 모든 종교적 진리는 비유 내지 은유의 성격을 가진다.


오늘날 한국의 많은 개신교회 성직자들이 고집하는 성경문자주의는 성경의 참 진리를 드러내지 못하며, 자기에게 편리한 대로 성경의 말씀을 가르치는 오류를 노정하고 있다. 성경의 말씀 중에 필요한 것만 하나님의 진리라 주장하고, 필요하지 않은 부분은 무시해버린다. 예를 들어 “오직 믿음으로” 의로움을 받는다는 구절은(로마서 3:28)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의와 자비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요 “헛것”이라는(야고보서 3:17,20) 구절에 대해 침묵한다. “십일조를 바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다”라고 십일조를 강조하지만, 하나님이 기뻐하는 제사는 의와 공평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와 죄의 용서는 강조하지만,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남자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구절은 절대 진리인 것처럼 가르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다”는 구절은 무시한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진리는 왜곡되며, 잘못된 신앙 양태와 교회의 거짓된 일들이 “성경적 진리”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가르침으로써, 불의한 사회 연실을 묵인하도록 유도한다. 이로써 하나님의 진리를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전락시키며,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책임의식을 마비시킨다. 사회는 발전하는데, 교회는 옛날의 “전통”을 고집하면서 남존여비의 유교적 의식을 버리지 못한다. “세상 모든 것은 허무하다”고 가르치면서 교회가 세상의 명예와 돈에 집착하기 때문에, 돈과 명예가 없는 장애인과 노동자가 교회 안에 들어오는 것이 어렵다고 한다(물론 이런 얘기는 일부의 교회에 속한다고 생각된다).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 경직되고 사회 발전에 뒤처진 단체는 개신교회라고 한다. 그 까닭은 절대 진리의 권위주의와 경직성에 빠져 새롭게 변화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직된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을 뜻한다. 몸이 뻣뻣하게 경직되면 죽는다. 기업체도 경직성에 빠지면 살아남을 수 없다. 한국의 개신교회가 생명을 위한 하나님의 진리에 충실코자 한다면,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 시대의 변천 속에서 성경말씀을 새롭게 해석하고 자신의 체제를 개혁해야 한다. 조선왕조의 몰락을 초래한 대원군의 폐쇄주의의 과오를 교회는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중요한 문제는 기존의 것과 “다른 것”을 무조건 배척하고 기존의 것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에 있고 “세상의 희망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다. 이를 위해 개혁교회는 언제나 새롭게 개혁되는 교회라는 자신의 진리를 과감하게 실천해야 할 것이다.


신준호 교수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수준의 사고 체계보다도 더 ‘복잡’하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자신이 익숙해져 있는 기존의 단순한 사고 체계 안으로 환원시키는 신앙은 윤리적 삶의 상실을 가져온다. 왜냐하면 현대사회는 쉽게 해석된 성서의 내용처럼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한하게 분화된 복잡한 권력의 질서 안에서 단순 소박하게 해석된 성서의 내용들은 윤리적, 가치론적 혼돈을 초래할 수 있다”(신준호 2000, 30, 31).


유한하고 제약되어 있는 인간이 절대성을 요구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말이 되지 않는다. “절대성”이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인간이 절대성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상 “자기 스스로를 우상화하는 짓”에 불과하다(정재현 2006b, 47). 이 우상화의 배면에는 자기의 힘을 확장시키고자 하는 인간의 욕심이 교묘하게 숨어 있다.


그러므로 한국의 개신교회는 절대적인 진리가 자기에게만 있다는 종교적 교만과 배타주의를 버려야 할 것이다. 개신교회가 그것을 주장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개신교회의 폐쇄성과 배타성에 싫증을 느끼고 등을 돌린다는 사실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삶에 관한 많은 진리들이 동양의 고전들 안에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참 진리는 자기를 절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비움에 있다. 예수도 자기를 비워 종의 형태를 취하였다(빌립보서 2:7). 자기를 비움은 타(他)를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참으로 성숙한 사람은 자기를 비우고 타를 인정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종교에도 해당된다. 기독교가 자기를 비우고 타 종교를 관용할 때, 기독교는 보다 더 성숙한 종교로 보일 것이다. 정부기관의 통계에 따르면 “타 종교는 이단이다”라는 개신교회의 배타적 태도에 혐오를 느껴 많은 신자들이 개신교회를 떠난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한 물리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 그리고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모든 것은 4차원적 물체보다 훨씬 더 이해되기 어렵다.…세계의 다양한 종교들 안에서 하나님과 초월적인 것이 우리에게 표상된다. 세계의 종교들은 이들에 관해 다양하게 진술하며, 우리는 이들 종교들 가운데 어느 종교가 본래의 진리를 선포하는지 서로 논쟁한다. 세계의 종교들은 부분적으로 모순된 점들을 가지고 있지만, 만일 우리가 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볼 수 있다면, 이들 모두는 참된 것으로 증명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의 종교들은 서로 관용해야 할 뿐 아니라, 서로 동일한 지위에 있는 것으로 존경해야 하며, 그들의 다양하고 구체적인 표현 형식들 배면에… 어떤 잠재성이 숨어 있는지 예감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학문의 세계에서 절대적 진리에 대한 주장은 하나의 신화에 속한다. 객관성을 생명으로 가진 자연과학의 세계에서도 소위 절대적 진리란 인정되지 않는다. 대상 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 단위체 곧 소립자는 우리가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안개구름과 같다. 그것의 위치를 파악코자 할 때 그것의 속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고, 그것의 속도를 파악코자 할 때 그것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소립자들의 상태는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일종의 잠재적 상태, 즉 ‘발생하려는 경향’으로 파악된다”(현요한 2002, 302).


따라서 우리가 파악코자 하는 모든 대상의 “객관적 확정”은 불가능하다(Heisenberg 1971, 26). 세계의 어떤 사물도 우리는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유동적이며 잠재성 자체이다. 대상에 대한 인간의 모든 인식은 인식하는 사람의 관심과 인식 방법에 따라 제한되어 있고, 인식의 과정 속에서 대상의 존재가 변화된다. 그러므로 소위 절대성을 요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유일한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단 하나의 진리만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예” 아니면 “아니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오늘날 과학의 통찰에 의하면 “이러한 형식으로 우리는 진리에 대해 결단할 수 없다” 진리는 상대방에 대한 인정과 서로의 대화를 통해 공동으로 추구될 수 있을 뿐이다.


김균진,  <생명의 신학: 인간의 생명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이해>  93 – 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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