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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섭 교수의 설교비평을 읽고  균형 2005-10-29  39  
  




  나는 왜 이 글을 쓰는가?

김동호 목사 옹호(?)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김동호 목사님은 한국교회개혁의 상징이다. 자신의 권리를 양보하는 미덕을 실천 한다는 한 가지만으로도 이런 평가에 대한 정당성은 주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 후로는 정용섭 교수님을 정교수로, 김동호 목사님을 김목사로 표현함에 이해를 바란다.) 좀더 솔직히 말하면 본인은 김 목사를 본 받을 것이 많은 좋은 목회자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이러한 개인의 차원이 아닌 한국교회의 바람직한 개혁을 위해 그의 진정성이 오해 없이 전해졌으면 하는 바램으로 김 목사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을 숨기지 않겠다. 비평자인 정교수나 비평의 대상인 김목사와 아무런 관계도 없으면서도 이글을 기록하는 본인의 동기이기도 하다.

정용섭 교수의 '김동호 목사 설교비평'을 읽고 잠시 할말을 잊었었다. 무엇보다 과연 이런 글을 쓸수 있는 학자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흥분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정교수의 비평은 매우 예리하고 철저하다. 비평중간의 틈새를 파고 들기도 쉽지 않을 많큼 논리적이며 치열하다. 정교수는 평소의 주장처럼 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하자는 입장에 충실하다. 그는 자신이 진보적인 신학관을 가지고 있음을 이미 천명했다. 이점에서 김목사의 설교를 비평하는 그의 자세는 지극히 진보적 이었다.

우선 두 가지를 언급하자.
복음적인 목회자를 진보적인 학자가 비평하면서 스스로 선택한 신학적인 틀에 얽메이지 않는 공정한 비평이었는가에 의문을 제기하고싶다. 한 예를 들면 믿음에 대한 그의 신학적이해를 기준으로 상대의 믿음이해를 비평하는 시각이다. 정통주의를 향해 열린마음을 촉구하는 그의 진정성이 의문이다. 자신은 닫힌 마음으로 그러나 상대를 향해서는 열린마음을 촉구하는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다음으로 정 교수는 이 비평을 위해 15편의 설교를 프린터로 출력해서 꼼꼼히 읽었다고 한다. 그는 이를 근거로 청중의 반응으로 나타나는 설교의 이면까지 심층분석한다. 그런데 의문이다. 과연 설교문을 통해 설교와 그 이면까지 분석하는 일이 가능한가? 예배때의 설교는 매우 역동적인 현장이다. 설교자와 청중이 말씀앞에 눈을 마주치며 표정과 몸짓으로 서로 교감하는 생생한 현장이다. 때론 급한 바람 처럼 때론 세미한 음성으로 청중의 내면을 일깨우는 성령의 내재를 경험하는 시간인 것이다. 그럼에도 설교의 그 생생한 이면을 분석했다는 정교수는 아무래도 천리안을 가졌거나 투시의 은사를 받은 것 같다. 이는 단지 현장중계와 녹화의 차이가 아니다. 오히려 문자중계를 보면서 운동장의 생생한 분위기를 이미 꽤 뚫고 있다는 그의 자만이 아닐까? 비평가 답게 설교문이라는 택스트의 구조와 내용에 대해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 하지 않았을까? 이 후에라도 정 교수가설교와 설교문의 차이가 무엇인지 그리고 설교문을 통해 비평하는 범위는 어디까지인지도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이제 정교수의 치열한 논리를 따라가 보자.
그는 성경앞에 부실한(?) 김 목사의 설교가 어떻게 청중의 감동을 유발 하는지 기본적인 의문을 가지고 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그 감동의 이면에는 선동적인 설교자의 성향이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리고 김 목사의 설교에 나타난 선동의 두 가지 성격을 ‘본말전도’와 ‘사실왜곡’으로 규정한다.

선동과 감동사이
선동과 감동의 차이는 무엇인가? 일반적인 이해를 보자. 선동이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한 일종의 집단 최면이라 한다면 감동은 의지적이며 인격적인 수용이다. 때문에 선동이 일시적이라면 감동은 지속적이다. 더욱이 선동의 결과가 공허라면 감동의 결과는 성령의 열매이다. 그럼에도 정교수는 히틀러와 박정희 같은 독재자들의 연설방식을 선동으로 규정한다. 나아가 이러한 선동이 김 목사의 설교의 이면이라 해석하고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김 목사의 설교에 감동 받고 삶의 현장에 열매를 맺어가는 현상을 단지 심리적인 반응으로서의 선동이라 단정하는 것은 지나치다. 그것은 전하는 이 뿐 아니라 그의 설교를 듣고 반응하는 청중 모두를 향한 모독이다. 선동과 감동을 혼동하며 계시와 감동을 대립시킴으로 독자를 ‘선동’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러한 구분을 마치 '결과론'혹은 '결과 지상론'을 주장하는 것으로 오도하지 않았으면 한다.

본말전도
정 교수가 분석한 선동의 첫 번째 성격은 본말전도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개인의 주관적 확신, 철학, 인생관으로 대체 했다는 지적이다. 곧 하나님의 말씀이 사족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아니 근본적으로 그가 이해하는 설교란 무엇인가?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이다. 그 내용은 두 가지로 구성된다. 곧 말씀에 대한 주석과 적용으로 이루어진다. 김목사의 설교의 특징은 해석보다는 적용에 강조점을 두고있다는 것이 본인의 이해이다. 그럼에도 정교수의 비평에서는 형식과 격식을 싫어하는 김 목사의 실용적인 특성이 진지하게 고려된 흔적이 없다. 이는 말씀에 대한 무시나 격하가 아니라 오히려 적용을 강조함으로 적극적인 실천을 촉구하는 설교자의 특성이라 볼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럼 과연 왜 김 목사가 그런가 하는 이해는 필요하지 않을까? 정 교수의 언급처럼 보편화된 바클레이의 주석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본문해석이 생략된 이유는 무엇일까? 주석성경이 보급되고 인터넷을 통해 성경 본문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널려있다. 그 기본적인 본문이해는 설교를 듣는 청중의 몫으로 남겨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가? 아니 그러한 기본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설교자 나름의 판단으로 보여진다.

한국교회의 강단의 문제로 두 가지가 지적된다. 우선 정교수의 언급처럼 본문에 대한 신학적인 바탕의 부실함에 기인한 성경이해 이다. 또 한가지는 본문의 주석에 비해 풍부한 적용이 미흡하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없다’는 지적을 받는 원인이 무엇인가? 말씀에 대한 주석이 부족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들은 말씀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라 보는가? 이점에서 김 목사는 후자에 의도적인 강조를 두고 있다는 것이 본인의 이해이다. 실천하길 원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현대 그리스도인이 김 목사의 설교에 감동 받는 이면의 실체가 바로 이것이 아닌가?

정 교수는 진정 김 목사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으신가?
혹시 정 교수는 현대 설교와 하나님의 말씀을 동등하게 보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다. 설교가 하나님의 음성인가 인간의 말인가에 대한 논의는 생략하자. 바른 설교의 이상차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언급하는 것은 옳다. 그럼에도 정 교수가 내린 설교의 정의와 하나님의 말씀이 일치한다면 그래서 그러한 설교를 찾으려 한다면 포기하는 것이 현명하다. 한 가지 분명히 하자. 설교는 설교자의 해석된 언어이지, 계시차원의 말씀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니 하나님의 말씀이 포함된 선포이지…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설교를 듣고 싶다는 것은 욕심이다. 글 쓴이 본인 역시 일천한 신앙이지만 아직 그런 설교를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다. 아니 근본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인간의 해석과 적용이 포함된 설교자의 표현을 사용하셔서 역사 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정히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다면, 성경을 펼 것을 권하고 싶다. 모두의 갈증을 해갈 할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만날 수 있으리라…


사실왜곡
김 목사의 설교를 선동이라 규정하며 정 교수가 제시한 선동의 두 번째 성격이다. 마16:13-20을 본문으로 한 김 목사의 설교가 성경본문을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 교수 본인이 정리한 것처럼, ‘믿음으로 천국을 소유하고, 내세의 천국만이 아닌 현세의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자는 주장이’ 김 목사 설교의 핵심이다. 그런데 정교수의 귀에는 별 내용이 없이 들린다니… 의아하다. 내세의 천국을 소유한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현세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자는 아니 이에 동참하자는 대 명제가 그렇게도 단순한 문제란 말인가? 그 심층적 의미를 실천적 지침으로 접근한 것이 김 목사의 15편 설교에 담겨진 내용이라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15편이 아닌 150편으로도 부족한 아니 평생 되새기며 들어야 할 주제가 아닌가 이 말이다.

그럼 과연 무엇을 왜곡했다는 말인가? 정 교수는 두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는 믿음이해이며 둘째는 믿음 지상주의를 조장 한다는 것이다. 그가 이해하는 ‘믿음’은 무엇인가? 그토록 주장하는 ‘믿음의 심화’란 무엇인가?

정 교수가 인용하며 의의를 제기하는 대목이다. ‘베드로가 받은 천국의 열쇠로 천국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의 이어지는 친절한 교정을 보자. “9절 말씀은 이렇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여기서 베드로가 예수님에게서 받았다는 열쇠는 천국의 문을 열고 닫는 그런 열쇠가 아니라, 앞으로 베드로가 초대 기독교에서 지도자로서 활동하게 된다는 뜻이다. 천국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그런 열쇠는 재림하실 예수님에게만 있을 뿐이다(계 1:18 참조). 설령 천국 문의 열쇠라고 하더라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권한을 준 것은 결코 아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베드로가 받았다는 천국열쇠를 마치 문자적으로만 이해한 것으로 김 목사를 곡해 하는 경우이다. 여기서 열쇠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대속을 뜻함을 현장에서 설교를 들은 회중은 다 알고 있는데 설교문을 읽는 정교수만 이해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마치 베드로의 열쇠를 예수 그리스도와 전혀 무관한 인간의 공로차원에서 언급되는 어떤 열쇠쯤으로 치부하는 그의 이해력이 걱정된다. 천국의 문을 열고 닫는 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이러한 표현 속에 담긴 김 목사의 의도가 무엇인가? 공급되는 은혜와 무관한 인간의 반응에 따라 천국이 열리기도 잠기기도 한다는 뜻으로 이해한단 말인가? 필자역시 이러한 표현이 흡족한 것은 아니다. 오해를 유발 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공급된 은혜에 반응하며 결단을 촉구하는 수용의 차원에서 언급된 표현임을 모르겠다는 뜻인지 아니면 애써 왜곡하는 것인지 의아하다. 믿음을 통해 천국을 소유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의아해 하는 정교수의 설명이 듣고 싶다.

정교수가 왜곡이라 주장하는 두 번째 내용이다. ‘믿음 지상주의’
김 목사의 믿음강조가 믿음 지상주의자이기 때문이라 한다. 정 교수는 아마 믿음을 강조하지 않는 사람인가 보다. 이유를 설명하는 정 교수의 글을 보자.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은사이며 따라서 상대적인 차원이지만, 사랑은 하나님 존재 자체이며 따라서 절대적인 차원이기 때문이다.” 믿음과 사랑을 별개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그의 시각이 생소하다. 왜 이러한 구분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마치 믿음을 강조하면 사랑이 소멸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김 목사가 언급하는 믿음은 사랑과 전혀 무관 한 믿음이라도 된다는 뜻인가?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가 바로 믿음 아니던가? 이 문제는 믿음과 사랑이라는 분리된 차원이 아니라 연속적인 선상에서 바라 봐야 하는 대목이다.

그가 언급하는 천국의 열쇠는 과연 무엇을 통해 어떠한 과정을 통해 획득한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믿음이 욕망이 될 수 있다는 말은 또한 무엇인가? 믿음을 인간의 반응(행위)차원으로만 이해하는 그로서는 당연할지 몰라도 김 목사의 설교에 반응하는 다수의 청중은 아님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선동의 근거라고 제시한 것 치고는 너무도 빈약하지 않은가?

16절에 언급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믿음으로 단정하지 말 것을 주문하는 정교수의 설명을 보자. “베드로의 고백을 무조건 '믿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를 네가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절). '알게 한 이'라는 구절을 근거로 본다면 베드로의 이 진술은 근본적으로 예수님에게 대한 정확한 '인식'을 의미한다. 또는 그것을 전제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확한 인식이 바로 초기 기독교의 토대인 셈이다.”

이에지는 그의 설명이다.
"기독교의 가르침을 모두 '믿음 일원론'으로 몰아가는 것은 그 믿음의 다층적 의미를 충분히 헤아리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어리석음이다. 믿음은 인식이며 동시에 신뢰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기다림이고 침묵이고 놀람이다. 즉 믿음은 천국의 열쇠를 얻겠다는 욕망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미래를 맡길만한 분이라는 인식과 신뢰라는 말이다."

'믿음은 인식이며 신뢰이며 다른 한편으론 기다림이며 침묵이고 놀람'이라는 정교수의 문학적표현이 인상적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말인가? 그럼 김 목사가 언급하는 믿음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 없는 믿음이란 말인가? 인식과 신뢰 없는 믿음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아니 믿음이라는 의미속에 이미 인식과 신뢰가 근본적으로 내포되지 않은가 이 말이다.

천국의 열쇠는 믿음의 시작이다. 곧 믿음을 주시는 방편이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의 동기라고 볼수있다. 내세의 천국만 바라보지 말고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실천하자는 김 목사의 설교는 한귀로 듣고 흘려 버렸단 말인가? 그것이 바로 ‘기다림과 침묵과 놀람’의 가시적인 표현이 아닐까? 이점에서 정 교수는 설교문을 통해 얻은 지식에 의존하는 그의 비평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좋은 말이라고 무조건 아무데나 적용하는 방식은 문제라 보여진다. 한국교회의 기복주의적 성향을 지적하려는 의도라면 김 목사의 설교는 적합한 대상이라 볼 수 없다.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결론적으로 정 교수는 진보주의를 옹호하며 진보주의의 진심을 이렇게 변호한다. “김 목사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진보주의자들도 사회구조가 개혁되면 인간의 모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와 그 통치가 어떻게 역사내재와 역사초월의 변증법적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지 생명과 존재의 신비 가운데서 투쟁하면서 살아갈 뿐이다.”

진보주의임을 자처하는 정교수의 진보적인 신학관을 두고 논쟁을 확대 할 의도는 없다. 이는 본말이 전도되는 것을 싫어하는 정교수도 마찬가지라 본다. 다만 그가 주장하는 ‘역사초월과 역사내재의 변증법적 방식’이 무엇인지 잠시 언급해 보겠다. 초월과 내재의 일치를 이루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분의 삶을 본을 삼아 따라 가려는 것이 복음을 아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이다. 이를 권장하는 김 목사의 설교는 이점에서 일치한다. 그 방식으로 정 교수가 제시한 ‘생명과 존재의 신비 가운데 투쟁하며 사는 삶’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럼에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큰 계명으로 삼고 실천하기 위해 애쓰는 그리스도인에게 이질적인 내용이 아님은 확실한 것 같다.

문학적 감수성 뒤에서 ‘생명과 존재의 신비 가운데서의 투쟁’이라는 막연한 단어를 나열하기 보다는 본인이 이해하는 믿음과 설교의 정의부터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었으면 한다. 정 교수가 주장하는 신학적 바탕에 근거한 성경이해가 이번에는 좀 지나쳤다는 느낌이다. 아니 많이 지나쳤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5.10.29 23:45:20
*.249.178.30

정정희 씨,
바쁘시네요.
어느새 숭의교회까지 달려갔다 오셨는지.
내 설교비평에 대한 위의 콤멘트가 재미있군요.
그런데 그 분이 나를 진보주의자라고 전제하는군요.
내가 그 글에서 그걸 천명한 적이 없는데요.
천국의 열쇠는 믿음의 시작이라는 그분의 진술이 좀 이상하군요.
그쪽의 분들은 '천국' 자체에 대해서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걸 모두 안다고 전제하고 그 열쇠를 얻기 위해서 열심히 믿자는 것이지요.
그게 코메디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이지요?
그 나라는 통이라는 건 아주 기초에 속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통치라는 게 무엇일까요?
김동호 목사의 트렌드라고 할 '청부론'이 하나님의 통치인가요?
그게 좀 웃긴다는 말입니다.
도대체가 깨끗한 부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교회 재정을 투명하게 사용한다고 해서
그게 바로 교회의 본질이 살아가는 지름길은 전혀 아닙니다.
그런 건 일종의 청교도적 경건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그건 역시 율법주의의 범주 안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교회 재정이라고 불투명하게 사용하는 교회보다는
상대적으로 건강한 교회 아닌가 하고 말하겠지요.
그게 좀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보이는 교회의 민주적 운영, 도덕성 회복은 나름으로 의미가 있긴 하지만
그건 결국 개량주의에 불과한 거에요.
그렇게 개량이라고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해야겠지요.
그걸 내가 말릴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동조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런 개량주의는 어느 순간에 수구로 돌변할 수 있으니까요.
요즘 뉴라이트 운동을 하시는 김 아무개 목사님에게서 그런 걸 볼 수 있지요.
내가 지금 좌충우돌하는 것 같군요.
말을 줄이는 게 본전이라고 하는 건데, 말이 많아졌어요.
젊은 사람들을 위해서 거칠라도 말하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이렇게 합니다.
위의 글을 쓰신 분도 내 주장이 구체적이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군요.
요즘 그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만큼 내 글쓰기가 관념으로 흐른다는 뜻인지.
이만.

비슬산

2005.10.31 14:21:25
*.105.197.107

시원하면 좋겠다라고 생각한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겨울의 문턱에 다가왔습니다

인간이 무얼하든지간에 우주는 어김없이

자기자리를 지켜감에 경외감 마저 듭니다

다만 현실에 파 묻혀 그 신비와 함께하지 못함을 후회합니다

그냥 지나칠려다가 인사도 할겸 들렀습니다

대응도 글쓴이의 방식에 맞게 하는게 이해하기 쉬운관계로

조목조목 따질려다가 부질없는거 같아 짧게 말할렵니다

"균형"님의 글은 그저 말꼬리 잡기에 불과합니다

또하나 "꿈보다 해몽이 더 좋은" 그런거 같네요

결론적으로 김동호목사님께서 설교하시고 옆에서 "균형"님이

해석이나 주석을 하시면 환상적인 그림입니다


건강들 유의하시고

좋은날들 되시길 바랍니다

[레벨:5]권요안

2005.10.31 19:41:04
*.105.130.14

눈에 띄는 대목이 있네요,

"한국교회의 강단의 문제로... ...본문의 주석에 비해 풍부한 적용이 미흡하다는 것이다.... ...이점에서 김 목사는... ...의도적인 강조를 두고 있다... ...실천하길 원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현대 그리스도인이 김 목사의 설교에 감동 받는 이면의 실체가 바로 이것이 아닌가?"

이 문장에서 왜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선동'에 '감동'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군요. 독재를 미화하다 못해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심리와 비슷한 것 아닐까요.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스스로 고민하는 것 보다 훨씬 쉬울테니 말이죠.

저도 공감합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친절한, 너무나도 친절한 설교자가 개개인의 삶에 꼭 맞는 말씀을 '적용'해 주길 원합니다. '막연한 단어를 나열하기 보다는...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죠. 단, 명령하되 명령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부드럽고 세련되게.

설교자가 '선동'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만큼이나 청중들 또한 설교자의 선동이 전해주는 편리한 '감동'을 뿌리치기 힘든 것 같습니다.

[레벨:1]정세웅

2005.11.03 15:26:23
*.59.55.77

권요안님 말씀에 대략 남감이네요....
어떤 적용이냐는 것도 무시못하지요.. 제가 느끼기에는 목회자들이 너무 적용에 무게를 두어서 문제라고 생각하는데요. 설교가 줄 수 있는 인간존재의 가치와 신비를 너무 무시하는 것 같아서요. 현 자본주의라는 셋팅안에서의 실용적 적용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그 분들 말씀이 자본주의라는 세계를 넘어설 수 있는 고민은 주지 못하는 듯 하네요. 제가 자본주의에 대해 혐오감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어떤 것이 되었든, 세상을 거스르는 신앙의 속성이 잘 선포되는 것 같지는 않아요. 잔뜩 소리를 높이고 난리를 치지만, 결국 제자리에 있더라고요. 결론은 버킹검(?)이라고 적용이라기 보다는 실용에 가까운 인생상담에 이르고 말지요. 때론 그 인생상담 조차도 상식과 개인감정을 짓밟을 때도 있고요. 제도교회의 목사라서 그런가요? 요즘 잘 나가는 목사님들 있잖아요. 마치 주부강좌와 인간극장, 거기에 시트콤 짬뽕해 놓은 것 같아서요. 설교보다는 교양강좌나 EBS특강을 듣는게 더 낳다고 느낄 때가 많아요... 함부로 말해서 죄송...

[레벨:5]권요안

2005.11.03 18:17:31
*.105.130.14

이런 제 글을 오해하셨군요. ㅜ.ㅜ;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 답을 찾아 나가는 과정을 외면한다는 뜻의 반어적 표현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골치 아프고, 복잡한 건 싫다는 것이지요. 바로 포장 뜯어서 바로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를 더 선호한다는...

그런 설교들이 "자본주의라는 세계를 넘어설 수 있는 고민은 주지 못"한다는 정세웅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이건 반어법이 아니라 진심입니다. 믿어주세요. ^^;;) 자본주의를 넘어서기는 커녕 오히려 철저하게 자본주의 체제에 길들여져 있다고 봐야겠지요. 청부론과 같은 주장이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합니다.

적용은 반드시 탐구의 단계를 거쳐야 하는 것일텐데 진지한 탐구는 찾아보기 힘들고 온통 가벼운 적용들만 넘쳐나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남들이야 적용을 하든, 적응을 하든 공부할 사람들은 열심히 공부 합시다!!! ^^;

[레벨:1]정세웅

2005.11.04 09:49:26
*.59.55.77

ㅋㅋㅋ. 같은 제가 오버했군요. 죄송^.^
진지한 탐구는 힘들고 온통 가벼운 적용들만 넘쳐나는 것 같다는 님의 말씀 친숙합니다...
그런데 그 진지한 탐구에 대해 친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아니면 그렇게 만들어 온 것인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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