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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길과 종교의 길

조회 수 386 추천 수 0 2023.11.25 12: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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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길과 종교의 길

신약 성경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 1:1)라는 말씀으로 시작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신약이 가르치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을 믿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에 왜 아브라함과 다윗을 소환하였을까?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고 다윗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롬 4:16-22, 행 13:22). 믿음은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삶의 방식이어야지 삶의 방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하나 되는 삶을 살아간 사람의 본이다. 아브라함은 백 세가 되어 자기 몸이 이미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도 죽은 것 같아도 자식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또 자식을 얻은 후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였을 때 그 말씀을 믿고 이삭을 드렸다(창 15:1-6, 22:1-12).

다윗 왕이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은 그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삼상 13:14).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한 사람은 사무엘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따라 행한 사람이었으니 그는 다윗 왕에 앞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다(삼상 2:35). 사무엘은 계시를 받은 사람이었으며(삼상 3:21), 모든 것을 자신이 본 것에 따라 수행하였다. 더욱이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즉 맞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마음의 복사본이며 복제였다. 그는 그의 행동과 생활과 일에서뿐 아니라 그의 온 존재의 인격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따랐다. 그의 존재와 하나님의 마음은 하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었던 그가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대행자였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은 곧 그가 고려하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다른 사상이나 고려나 생각이 없었다. 그의 생활과 일은 무엇이든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것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륜을 수행하시기 위하여 그를 쓰실 수 있으셨던 것은 그가 하나님과 일치된 사람이자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된 사람으로서, 자신을 전혀 관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구하려는 어떤 생각도 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일치된 사람이자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된 사람인 사무엘은 사울 왕이 하나님의 마음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위하자, 즉 자신을 위하자 그를 버리고 다윗을 택하여 왕이 되게 하였다(삼상 15:9, 12). 사무엘이 다윗을 택하여 왕이 되게 한 것은 그가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즉 맞는 사람, 곧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에 맞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엡 1:5, 9, 11 참조).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뜻을 행할 것이다.

다윗이 사울 왕과 달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즉 맞는 사람이 된 것은 그가 사울과 달리 항상 하나님께 물었기 때문이다(삼하 2:1, 행 13:22). 하나님이 사울을 죽이시고 다윗에게 왕위를 주신 것은 사울이 여호와께 묻지 않았기 때문이며, 다윗이 왕이 된 것은 그가 항상 여호와께 물었고 여호와께서는 그의 물음에 답하셨고 그는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을 알고 그것을 따라 행했기 때문이다(대하 10:14, 삼상 30:6-8, 삼하 2:1, 5:19, 23:3). 다윗은 하나님께 물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을 알고 그 갈망을 따라 살았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즉 맞는, 곧 일치된 믿음의 사람이었다. 다윗은 기도 안에서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물음으로 그분과 하나된 사람이었다(약 5:17).

그런데 오늘날은 아브라함과 다윗과 같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즉 맞는, 곧 일치된 믿음의 사람을 볼 수 없다. 그런 사람은 생명의 흐름이 있는 사람인데 오늘날은 그런 사람이 없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처음 기독교가 생겨날 때는 생명이 있었다(창 1장, 요 1:4). 마음의 이치, 인간의 이치, 삶의 이치, 세상의 이치, 우주의 이치를 관통하는 생명의 강이 흘렀다(창 2:10, 요 7:38-39, 계 22:1, 시 36:8). 사람들은 그 이치를 마시며 생명을 얻어 예전에 몰랐던 평화와 안식과 기쁨을 얻었다.

종교의 창시자들이 세상을 떠나고, 세월이 흐르고 또 흐르면서 사람들은 생명의 이치를 수학 공식처럼 공식화하고 도식화하기 시작했다. 처음 의도는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쉽게 공식화하면 사람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더 쉽지 않을까, 그런 의도였다.

예를 들어 보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요 15:5-7). 예수님의 메시지에 담긴 이치, 즉 생명의 강물을 마시려면 어떡해야 할까? 내 마음이 예수의 마음이 돼 봐야 한다. 동시에 예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돼야 한다. 예수님의 마음과 내 마음 둘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통하고 흘러야 한다. 그러려면 깊은 궁리와 진지한 묵상이 필요하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구절을 도식화하면 수월해진다.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가고, 신앙을 가져라. 그럼 당신은 이미 예수 안에 거한 것이다. 그럼 예수님도 당신 안에 거한 것이다.”이렇게 간단해진다. 이걸 한 번 더 도식화하면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 된다.

종교가 이런 식으로 흘러가면 큰 문제가 생긴다. 무슨 문제냐? 종교가 처음 생겨날 때 흘렀던 생명의 강이 말라버린다. 정확히 말하면 강은 여전히 흐르지만, 그 강물을 마시는 사람을 보기가 어려워진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종교의 껍데기만 먹고, 종교의 알맹이는 먹기 어려워진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견지망월(見指忘月)하기 때문이다. 손가락, 즉 교리를 보면서, 달, 즉 진리, 곧 생명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예전에 감리교 신학대의 박종천 교수가 이런 말을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이유가 뭔가? 예수를 믿으면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야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통하게 된다. 그게 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 끝이 아니다. 그 고백에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나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이 통하기 위함이다. 그런 통함을 위해서는 신앙을 도식화하고 공식화해선 곤란하다. 신앙을 도식화하고 공식화하면 믿음이 형해화(形骸化)된다. 그것은 교회의 양적 성장과 마케팅을 위해선 플러스가 되지만 교인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는 마이너스가 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항상 초심을 잃지 않고, 종교의 존재 이유를 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유대교가 율법의 정신을 잃고 율법을 도식화하고 공식화하여 율법이 형해화(形骸化)되었을 때 예수님은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신 후에 그분이 전한 하나님의 나라의 정신을 종교인들은 교리화하여 버렸다. 그래서 기독교가 개독교가 되었다. 오늘날 기독교는 유대교가 간 길을 똑같이 걷고 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세상을 이기고 교회의 하락을 이긴 믿음의 사람이 아닌 종교인은 주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을 것이다(고후 4:10, 계 2:7, 요일 5:4).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종교의 길을 가지 않으려면 말씀으로 기도함으로 주와 합하여 한 영이 되어 하나님께 묻고 그분의 마음에 합한, 즉 맞는, 곧 일치된 믿음의 사람이 되어 그분의 마음을 갈망을 따라 행함으로 세상을 이기고 교회의 하락을 이겨야 한다(고전 6:17).

예수님은 왜 이 땅에 오셨는가, 기독교는 왜 생겨났는가? 이 물음 속에 늘 답이 있게 마련이다.


[레벨:29]모모

2023.11.26 02:02:52
*.134.194.227

성경 구절을 일일이 찾아가면서 글을 작성하시는가 보군요. 대단하십니다. 혹시 다 외우고
계시는지요? 정말 놀랍습니다.
하나님과 합하여 한 영이 되는 것이 중요하군요. 하나님과의 일치를 위해서 조금 더 분발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비추천은 실수로 잘못 누른 것이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23.11.26 19:28:24
*.157.223.40

위 대글러 모모 님의 표현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체 구도 가운데서 

각각의 성경구절을 바르게 해석해주셨군요.

우리 모두 견지망원의 차원에 머물지 말고 

조금씩이라도 근원, 또는 실체에 가까이 갔으면 합니다.

평화로운 교회력 마지막 주일 밤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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