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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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부터 시작됐는지 모르지만 제가 본격적으로 들은것은 대학에 들어온 90년대 말 부터인거 같습니다.
일단 저의 견해는 흔히 말하는 "은혜'라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이 저같은 날라리 신도들과 구분 짓기 위해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듯 합니다.. 이 표현이 교회안에서 상당히 고결한 표현으로 쓰이고 있어서 저의 삐뚤어진 해석이 거슬리는 분들이 있을텐데요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인간이 좀 삐뚤어졌습니다..
제가 이런 분들을 많이 싫어하는 이유는 이 분들이 주로 하는 말이 너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냐?"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났느냐의 중요척도중 하나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 사랑에 감동해 눈물흘리며 기도해본적이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감정이 메말라여서인지 인격저인 만남이란 걸 못해서 그런 건지 전 눈물흘리며 기도해 본적은 없습니다.. 일단 저는 흔히말하는 인격적인 만남은 없는 듯합니다..
혹시 잘 설명해 주실 분들이 있는지 해서 글을 올립니다..
여담이지만 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거 별로 안 좋은거 같아요.. 결혼, 취업, 기타등등 이런거 다 기도해보고 한다고 하는데 한 보 뒤에서 살펴보면 기도해준다는 사람들의 의지 주로 목회자의 의지대로 돌아가는 면이 많은거 같아요.. 그런 영빨있는 권사나 목사님들은 그렇게해서 사람들 조정하는거 즐기는 듯도 하고요..
일단 저의 견해는 흔히 말하는 "은혜'라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이 저같은 날라리 신도들과 구분 짓기 위해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듯 합니다.. 이 표현이 교회안에서 상당히 고결한 표현으로 쓰이고 있어서 저의 삐뚤어진 해석이 거슬리는 분들이 있을텐데요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인간이 좀 삐뚤어졌습니다..
제가 이런 분들을 많이 싫어하는 이유는 이 분들이 주로 하는 말이 너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냐?"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났느냐의 중요척도중 하나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 사랑에 감동해 눈물흘리며 기도해본적이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감정이 메말라여서인지 인격저인 만남이란 걸 못해서 그런 건지 전 눈물흘리며 기도해 본적은 없습니다.. 일단 저는 흔히말하는 인격적인 만남은 없는 듯합니다..
혹시 잘 설명해 주실 분들이 있는지 해서 글을 올립니다..
여담이지만 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거 별로 안 좋은거 같아요.. 결혼, 취업, 기타등등 이런거 다 기도해보고 한다고 하는데 한 보 뒤에서 살펴보면 기도해준다는 사람들의 의지 주로 목회자의 의지대로 돌아가는 면이 많은거 같아요.. 그런 영빨있는 권사나 목사님들은 그렇게해서 사람들 조정하는거 즐기는 듯도 하고요..
'Show 사랑해' 광고가 생각이 나네요.
사.랑.해 라는 세 음절이 내뱉어지지만 그 단어에 부여하는 의미는
각자 다르다는 의미심장한 내용.
누군가가 자신을 칭찬할때 기분좋아하지 말라는 말도
생각이 나네요.
"당신! 오늘 참 멋있군요"라는 말은
'나 오늘 기분이 무척 좋습니다'의 다름 아니라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라는 문장은,
현 기독교 문화내에서,
무엇인가 특별한 신체험을 한 것으로 스스로 판단내릴때,
내뱉어지는 '전형적인' '기호'로 자리매김 되어 있다고 여겨집니다.
자동 반사적이고 다른 문장(기호)이 없어 보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는 고백은 표현의 단순성과 상투성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하나님 경험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가 장려되고 혹 강요되는 순간은
언제나 종교적 폭력이 작동하는 때라고 여겨지네요.
경험자의 원(原)경험과 고백되는 '한 문장'과의 거리는 너무나
멀게 느껴지는데 정의되지 않은 '한 문장'을 통해 자신의
은밀한 경험에 닿으라니요. 너무한 말이지요.
경험을 개념화 시킬 수는 있어도, 그 개념으로 경험에
다다르는 것은 언제나 불가능할테니까요.
사.랑.해 라는 세 음절이 내뱉어지지만 그 단어에 부여하는 의미는
각자 다르다는 의미심장한 내용.
누군가가 자신을 칭찬할때 기분좋아하지 말라는 말도
생각이 나네요.
"당신! 오늘 참 멋있군요"라는 말은
'나 오늘 기분이 무척 좋습니다'의 다름 아니라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라는 문장은,
현 기독교 문화내에서,
무엇인가 특별한 신체험을 한 것으로 스스로 판단내릴때,
내뱉어지는 '전형적인' '기호'로 자리매김 되어 있다고 여겨집니다.
자동 반사적이고 다른 문장(기호)이 없어 보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는 고백은 표현의 단순성과 상투성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하나님 경험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가 장려되고 혹 강요되는 순간은
언제나 종교적 폭력이 작동하는 때라고 여겨지네요.
경험자의 원(原)경험과 고백되는 '한 문장'과의 거리는 너무나
멀게 느껴지는데 정의되지 않은 '한 문장'을 통해 자신의
은밀한 경험에 닿으라니요. 너무한 말이지요.
경험을 개념화 시킬 수는 있어도, 그 개념으로 경험에
다다르는 것은 언제나 불가능할테니까요.
ㅋ 그렇군요. 위 꼭지글에 언급하신 것과 관련해서,,,
결혼, 기타, 취업 등등 기도해보고 결정한다는 말도
사실 종교성을 위시한 '심리적 보험들기 행위'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자기 마음 편하자는 것이지요.
대학교시절, 신앙적으로 많이 힘들때 멘토격의
청주 사시는 K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너가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너를 믿어주시는 것이다. 넌 어차피 하나님 앞에서는
수많은 팬중의 한명 아니냐. '
화두처럼 던져진 이 한마디에, 내가 심각하게 생각하고
고민했던 기도제목들이 사실 하나님 앞에서는 별반 중요
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결혼도, 취업도 내가 불안하고, 내가 불확실하고, 내가 완벽
하게 결정을 내리고 싶어 중요 기도제목이라고 올려놓지만
웬지 하나님 생각엔
'너가 결혼을 하든, 안하든, 누구와 결혼을 하든...그것이 나에
겐 그렇게 중요하지 않구나. 결혼이든 독신이든 어떤 생활이냐가
더 중요하겠지'
라고 하실것만 같은...
그래서 언제부턴가 무엇인가를 선택할때 내가 선택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거 같아요. 무엇이 보다는
어떻게. 확실한 '선택'보다는 개연적인 '선택'. 하지만 그 개연적
선택을 확실한 '내용'으로 채워가기..
결혼, 기타, 취업 등등 기도해보고 결정한다는 말도
사실 종교성을 위시한 '심리적 보험들기 행위'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자기 마음 편하자는 것이지요.
대학교시절, 신앙적으로 많이 힘들때 멘토격의
청주 사시는 K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너가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너를 믿어주시는 것이다. 넌 어차피 하나님 앞에서는
수많은 팬중의 한명 아니냐. '
화두처럼 던져진 이 한마디에, 내가 심각하게 생각하고
고민했던 기도제목들이 사실 하나님 앞에서는 별반 중요
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결혼도, 취업도 내가 불안하고, 내가 불확실하고, 내가 완벽
하게 결정을 내리고 싶어 중요 기도제목이라고 올려놓지만
웬지 하나님 생각엔
'너가 결혼을 하든, 안하든, 누구와 결혼을 하든...그것이 나에
겐 그렇게 중요하지 않구나. 결혼이든 독신이든 어떤 생활이냐가
더 중요하겠지'
라고 하실것만 같은...
그래서 언제부턴가 무엇인가를 선택할때 내가 선택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거 같아요. 무엇이 보다는
어떻게. 확실한 '선택'보다는 개연적인 '선택'. 하지만 그 개연적
선택을 확실한 '내용'으로 채워가기..
오랜만에 로그인 하게 하는 글이네요.
엄청 많이 사용되면서도, 진정한 의미는 남용되고 오용되는
대표적인 종교적인 단어 가운데 하나가 되겠네요.
저는 하나님이 나와 내 인생에 어떤 의미를 갖기 시작하는 것이 '인격적인 만남'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처음에 타의에 의해서 교회에 나갔을 때에, 기도시간에는 주로 '세계평화'와 '남북통일' 같은 것들을
기도했었습니다.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 하나님은 그런 큰 일이나 신경쓰시라는 거였죠.
일면 하나님의 존재, 그의 세상에 개입하심을 인정하면서도, 이것은 저와 인격적인 관계가 아닌거죠.
지금은 하나님 없는 제 인생은 앙꼬없는 찐빵이죠. ㅋㅋ
이게 인격적인 관계가 아닐까요?
와싱톤교회 김영봉 목사님이 "하나님은 형이상학적인 실체가 아니라, 나와의 관계 안에서 존재한다" 라고
알듯 모를듯한 말씀을 하시더군요. 어렴풋이 동의가 가는 그런 말씀이었습니다.
엄청 많이 사용되면서도, 진정한 의미는 남용되고 오용되는
대표적인 종교적인 단어 가운데 하나가 되겠네요.
저는 하나님이 나와 내 인생에 어떤 의미를 갖기 시작하는 것이 '인격적인 만남'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처음에 타의에 의해서 교회에 나갔을 때에, 기도시간에는 주로 '세계평화'와 '남북통일' 같은 것들을
기도했었습니다.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 하나님은 그런 큰 일이나 신경쓰시라는 거였죠.
일면 하나님의 존재, 그의 세상에 개입하심을 인정하면서도, 이것은 저와 인격적인 관계가 아닌거죠.
지금은 하나님 없는 제 인생은 앙꼬없는 찐빵이죠. ㅋㅋ
이게 인격적인 관계가 아닐까요?
와싱톤교회 김영봉 목사님이 "하나님은 형이상학적인 실체가 아니라, 나와의 관계 안에서 존재한다" 라고
알듯 모를듯한 말씀을 하시더군요. 어렴풋이 동의가 가는 그런 말씀이었습니다.
병훈님, 물론 깊이 생각 해 볼 문제는 맞지만 오히려 간단하게 생각해도 될 듯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성경공부나 성지순례등을 통해 아무리 지식적으로 아무리 많이 알고 있더라도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못했다면 예수님에 "관해서" 아는것이지 (Knowing about Jesus) 예수님을 (직접) 아는것 (Knowing Jesus)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성경공부를 많이해도 그 열심으로 신학을 해도 때로는 예수님에 "대해서만" 아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병훈님을 직접 만나서 교제를 하지 않았다면 엄격히 얘기해서 "안다" 라고 말하기 보단 이곳 다비아를 통해서 "병훈님에 대해서 아는것 (여러가지 정보 즉 성별, 연령, 취미 등등)"이라고 할수 있겠지요. 아무리 제가 병훈님의 정보를 듣고 공부해서 그 정보를 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저는 병훈님을 모른다고 할수 있습니다. 당연히..인격적으로는 말할것도 없고요.
교회에서 같이 주일학교 선생님으로 봉사하다가 사랑하게 되어서 결혼 하게 되는 경우처럼 처음에 그냥 같이 섬기는 선생님의 제 3자의 위치에서 나중에 정말 사랑하는 그래서 볼때마다 가슴이 뛰고 기쁜 그런 바로 내 애인 혹은 아내의 위치로의 변환을 생각해 본다면 어떤 사람이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났다라고 할때 그 이면에는 하나님이어서 그래서 저 멀리 있는 예수, 전지전능하고 죽은자도 살리는 사람이지만 나와는 관계없는 사람이었던 제 3자와의 그런 관계가 바로 나와 깊은 관계가 (인격적인 혹은 애인으로서 사랑하는 그런) 되는 그런 변환이라고 생각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러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 :3 : 20
사족으로.. 그런 인격적인 만남이 때때로 "성령세례" 혹은 "방언"의 모습으로 나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경험한 사람이 그것만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도구로 생각할때가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극단적인 신체험만은 절대 아닙니다. 아주 예전 제 아는 후배는 폭주족으로 살다가 예수님 "인격적"으로 만나고 (물론 이전에도 교회 다니던 형제였지요) 너무 좋아서 침대에서 때구르르 하루종일 구르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이런것들을 사모하는것이 유익한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지식이 뛰어난 사람들한테 더 필요할때가 있을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해본 사람은 사랑해본 사람의 마음을 압니다. 비슷하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혹은 다른 사람이 나는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났다고 할때 그것이 무슨의미인지 짐작 할수 있습니다.
이쯤에서.. 확인 사살 :) "병훈님.. 병훈님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셨습니까? " (하하..농담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성경공부나 성지순례등을 통해 아무리 지식적으로 아무리 많이 알고 있더라도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못했다면 예수님에 "관해서" 아는것이지 (Knowing about Jesus) 예수님을 (직접) 아는것 (Knowing Jesus)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성경공부를 많이해도 그 열심으로 신학을 해도 때로는 예수님에 "대해서만" 아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병훈님을 직접 만나서 교제를 하지 않았다면 엄격히 얘기해서 "안다" 라고 말하기 보단 이곳 다비아를 통해서 "병훈님에 대해서 아는것 (여러가지 정보 즉 성별, 연령, 취미 등등)"이라고 할수 있겠지요. 아무리 제가 병훈님의 정보를 듣고 공부해서 그 정보를 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저는 병훈님을 모른다고 할수 있습니다. 당연히..인격적으로는 말할것도 없고요.
교회에서 같이 주일학교 선생님으로 봉사하다가 사랑하게 되어서 결혼 하게 되는 경우처럼 처음에 그냥 같이 섬기는 선생님의 제 3자의 위치에서 나중에 정말 사랑하는 그래서 볼때마다 가슴이 뛰고 기쁜 그런 바로 내 애인 혹은 아내의 위치로의 변환을 생각해 본다면 어떤 사람이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났다라고 할때 그 이면에는 하나님이어서 그래서 저 멀리 있는 예수, 전지전능하고 죽은자도 살리는 사람이지만 나와는 관계없는 사람이었던 제 3자와의 그런 관계가 바로 나와 깊은 관계가 (인격적인 혹은 애인으로서 사랑하는 그런) 되는 그런 변환이라고 생각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러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 :3 : 20
사족으로.. 그런 인격적인 만남이 때때로 "성령세례" 혹은 "방언"의 모습으로 나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경험한 사람이 그것만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도구로 생각할때가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극단적인 신체험만은 절대 아닙니다. 아주 예전 제 아는 후배는 폭주족으로 살다가 예수님 "인격적"으로 만나고 (물론 이전에도 교회 다니던 형제였지요) 너무 좋아서 침대에서 때구르르 하루종일 구르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이런것들을 사모하는것이 유익한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지식이 뛰어난 사람들한테 더 필요할때가 있을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해본 사람은 사랑해본 사람의 마음을 압니다. 비슷하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혹은 다른 사람이 나는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났다고 할때 그것이 무슨의미인지 짐작 할수 있습니다.
이쯤에서.. 확인 사살 :) "병훈님.. 병훈님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셨습니까? " (하하..농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