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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를 끝장내기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작정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비폭력에 관한 가르침을 단순히 실천할 수 없는 이상주의라고 치부해버린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다른 쪽 뺨을 돌려대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수동적이며 현관의 발 닦개(doormat)처럼 남들에게 무조건 짓밟힐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생각되어, 많은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불의 앞에서 겁쟁이가 되고 불의를 방조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악을 대적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명령 역시 악에 저항하려는 의지를 꺾어버리고 굴종하도록 권고하는 말씀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10리를 가라”를 말씀 역시 구조적 변화를 도모하기보다는 “친절을 베풀라“는 상투어가 되어, 억압하는 자들과 협력할 것을 권고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이런 식으로는 결코 행동하지 않으셨다. 이렇게 오해하게 된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예수님은 이런 식으로 살지도 않았으며 이런 식으로 가르치지도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본래의 사회적 맥락 속에서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역사상 이제까지의 어떤 발언보다도 가장 혁명적인 정치적 선언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할 수 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마태복음 5:38-41 표준새번역 개정판)
제임스 왕(King James, 최초로 영어번역 성경 흠정역을 만든 영국의 왕 - 역자주)이 고용한 궁중 번역자들이 ‘안티스테나이’(antistēnai)를 “Resist not evil,” 즉 “악에게 저항하지 말라”로 번역했을 때, 그들은 단순히 그리스어를 영어로 옮기는 작업 이상의 무엇인가를 했던 것이다. 즉 그들은 비폭력 저항(nonviolent resistance)을 온순함으로 번역해 놓은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억압받는 청중들에게 악에게 저항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 만일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라면 그것은 앞뒤가 안 맞는 말씀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목회 전체가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과는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한글개역에는 “대적한다,” 공동번역에는 “앙갚음한다,” 표준새번역에는 “맞선다”로 번역된 단어 - 역자주)는 두 부분, 즉 ‘안티’(anti)와 ‘히스테미’(histèmi)로 이루어진 단어로서, ‘안티‘ 는 ‘~에 맞서서‘라는 뜻(영어로 against)이며, ’히스테미‘ 는 명사형(stasis)의 동사로서 폭력적인 반란, 무장 봉기, 첨예한 대결을 뜻한다. 그리스어로 번역된 구약성서에서 ’안티스테나이‘ (antistènai)는 주로(71회 가운데 44회) 군사적 충돌의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두 군대가 맞부딪쳐 한쪽이 패배하여 도망할 때까지 칼싸움을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신약성서에서는 이 단어가 바라바에 대한 설명, 즉 “반란을 일으키다가 사람을 죽인”(마가복음 15:7: 누가복음 23:19, 25) 부분에서 나오며, 에베소 사람들에 대한 설명, 즉 “소요죄로 몰릴 위험”(사도행전 19:40)이 있다는 대목에서 나온다. 이처럼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인명살상의 가능성이 있는 소요사태나 무장혁명을 가리킨다.6)
따라서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한 적절한 번역은 “악에 대해(혹은, 너에게 악을 행한 사람에 대해) 똑같은 식으로 맞받아 치지 말아라,” 혹은 “폭력에 대해 폭력으로 보복하지 말아라”일 것이다. 학자역본(Scholars Version, 최근에 예수 세미나의 학자들이 번역한 영역 복음서 - 역자주)은 “악한 자에게 맞서서 폭력적으로 대응하지 말아라”(Don't react violently against the one who is evil)라고 탁월하게 번역했다. 즉 예수님은 악에 대해 반(反)로마 투사들 못지 않게 대항했다는 말이다. 단지 차이점은 악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에 관한 것이었을 뿐이다.
악에 대한 일반적 대응 방법은 다음 세 가지이다. (1) 수동적 태도, (2) 폭력적인 대항, 그리고 (3) 예수님이 분명히 가르친 제3의 길, 즉 전투적인 비폭력(militant nonviolence)이다. 이 셋 가운데 인간은 진화론적으로 처음 두 가지 대응수단, 즉 도피(flight)와 싸움(fight) 두 가지만 선택하도록 되어 있다. “싸우자!”는 예수님이 말씀하기 20년 전에 로마에 맞서서 반란을 일으키려 했던 갈릴리 사람들의 외침이었다. 예수님과 그의 청중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로마 군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된 수 천명의 동족들의 모습을 길가에서 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나사렛에서 북쪽으로 고작 3 마일 떨어진 도시 셉포리스의 주민들 가운데 그 반란군이 무기고를 습격하는 것을 도왔다는 이유로 노예로 팔려간 주민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청중들 가운데 일부는 살아 생전에 인류 역사상 가장 소름끼치는 참상들 가운데 하나였던 반로마 전쟁(기원후 66-70년)을 체험했을 것이다.
만일 “싸움”이 그들에게 먹혀 들어가지 않았다면, 다른 대안은 “도피” 뿐이었다. 즉 수동적인 태도, 굴복하거나, 혹은 기껏해야, 소극적인 공격으로서 명령에 복종은 하지만 잘 따르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태도일 따름이다. 그들에게 제3의 길은 없었다. 억압에 대한 그들의 선택은 굴복하거나 아니면 반란을 일으키는 것뿐이었다.
이제 우리는 왜 제임스 왕의 충실한 학자들이 ‘안티스테나이’를 “resist not,” 즉 “저항하지 말라”로 번역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제임스 왕은 사람들이 그를 비롯한 군주들의 부당한 정책들에 맞설 수 있는 다른 수단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대중들은 단지 두 가지 선택, 즉 도피하거나 싸우는 길만이 있다고 믿도록 만들어야만 했다. 우리는 저항하지 않거나, 저항하거나, 둘 중의 하나밖에는 선택할 수 없다는 식이다. 그리고 제임스 왕의 번역자들에 따르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저항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군주들의 절대권력을 인정하신 것처럼 보인다. 즉 굴복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현대 번역자들 역시 온순하게 이런 번역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런 두 가지 선택 가운데 어느 것도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상관이 없다. 여기서 우리가 매우 분명하게 깨달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이 악에 대한 대응 방법으로서 수동적인 태도와 폭력 모두를 몹시 싫어하셨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세 번째 길로서, 이 두 가지 선택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안티스테나이’는 굴복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없다.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예수님은 그 의미를 분명하게 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세 가지 간단한 사례를 들었다.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왜 오른쪽 뺨인가?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사람의 오른쪽 뺨을 치는가? 한번 시험해 보라. 당시 오른손을 쓰던 세상에서 오른손 주먹으로 상대방을 치면 그 상대방은 왼쪽 뺨을 맞게 된다. 주먹으로 상대방의 오른쪽 뺨을 치기 위해서는 왼손을 사용할 필요가 있는데,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는 왼손을 불결한 일을 위해서만 사용했다. 쿰란 공동체(메시아를 기다리며 광야에서 금욕생활을 한 집단 - 역자주)에서는 심지어 왼손을 사용하여 제스처를 했을 경우 공동체에서 쫓겨나 10일 동안 참회하는 벌을 받았다(사해사본, 1QS 7).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오른쪽 뺨을 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른손 손등으로 치는 방법이다. 이것은 주먹다짐이 아니라, 창피를 주기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 즉 그 의도는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치욕을 주기 위함이며, 그 “꼬락서니”를 제대로 알도록 만들기 위함이다. 당시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같은 신분의 사람을 손등으로 치지는 않았기 때문에, 만일 그랬다면 엄청난 벌금을 물어야만 했다(같은 신분의 사람을 주먹으로 치면 벌금이 4전이었던 반면에, 손등으로 치면 400전이었다. 그러나 하급자들을 손등으로 칠 경우에는 벌금이 없었다(미슈나, Baba Qamma 8:1-6). 손등으로 때리는 것은 하급자들을 훈계하는 통상적인 방법이었다. 주인은 종들을, 남편은 아내를, 부모는 자녀를, 남자는 여자를, 로마인은 유대인들을 손등으로 때렸다. 이것들은 불평등한 관계들로서, 각각의 경우 보복을 한다는 것은 자살과 다를 바 없었다. 유일한 대응 방법은 움츠려 굴복하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청중들이 누구였는지를 묻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경우에서 예수님의 청중들은 다른 사람을 때리거나, 고소하거나, 강제노동을 부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피해자들이었다(“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너를 걸어 고소하여 ...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그의 청중들 가운데는 이처럼 신분, 종족, 성별, 나이, 지위 등의 위계적 질서와 로마제국의 점령으로 인해, 그들이 당하는 치욕을 견딜 수밖에 없으며, 비인간적 대우에 대한 분노를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처럼 이미 치욕을 당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왜 왼뺨을 돌려대라고 가르치시는가? 왜냐하면 왼뺨을 돌려대는 행동은 그 압제자에게서 모욕할 수 있는 힘을 빼앗아버리기 때문이다. 왼뺨을 돌려대는 사람은 결국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좋다. (오른손 주먹으로) 다시 때려 봐라. 네가 처음 때린 것은 네가 의도했던 효과를 얻지 못했다. 나는 네가 나를 모욕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나는 너와 똑같은 인간이다. 너의 지위가 높다고 해서 이 사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너는 나의 품위를 떨어뜨릴 수 없다.”
이런 식으로 대응하면 그 때린 사람은 몹시 난처하게 될 수밖에 없다. 순전히 논리적으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그는 이제 더 이상 손등으로 칠 수가 없다. 이미 아무런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왼손으로 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만일 그가 (오른손) 주먹으로 친다면 그는 스스로 상대방을 동등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셈이 된다. 이처럼 손등으로 치는 것의 요점은 신분계급 제도를 강화시키고 불평등을 제도화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왼뺨을 돌래댄 사람을) 매질하도록 명령한다 해도, 그의 주장은 이제 취소할 수 없게 되었다. 즉 그 억압자는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이 하급자를 동등한 인간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도록 된 것이다. 이 강자는 약자를 비인간화할 수 있는 힘을 빼앗긴 것이다. 이런 대응 방법은 수동성과 비겁함을 권고하는 것이 아니라, 강자에게 도전하는 행동이다.
“누가 너를 고소하여 네 겉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두 번째 사례는 법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한 사람이 겉옷 때문에 고소를 당했다.7) 누가 그런 고소를 하며 어떤 상황에서 고소하는가? 구약성서는 이 문제에 대한 단서들을 제공한다.
당신들은 이웃에게 무엇을 꾸어 줄 때에, 담보물을 잡으려고 그의 집에 들어가지 마십시오. 당신들은 바깥에 서 있고, 당신들에게서 꾸는 이웃이 담보물을 가지고 당신들에게로 나아오게 하십시오. 그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면, 당신들은 그의 담보물을 당신들의 집에 잡아 둔 채 잠자리에 들면 안 됩니다. 해가 질 무렵에는 그 담보물을 반드시 그에게 되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가 담보로 잡혔던 그 겉옷을 덮고 잠자리에 들 것이며, 당신들에게 복을 빌어 줄 것입니다... 과부의 옷을 저당잡아서는 안 됩니다.(신명기 24:10-13, 17)
가장 가난한 사람들, 즉 극빈자들은 겉옷 이외에는 담보물로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유대 율법은 해질 무렵에 그 담보물을 되돌려줄 것을 엄격하게 요구하였는데, 그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이 덮고 잘 수 있는 것이 겉옷뿐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런 상황은 그의 청중들 모두가 매우 익숙했을 상황이었다. 즉 가난한 채무자는 더욱 가난 속으로 깊이 빠져들게 되어 빚을 갚을 수 없게 되자, 그의 채권자는 법적인 수단을 통해 그의 재산을 몰수하기 위해 그를 법정으로 끌고 갔던 것이다.
부채(負債)는 1세기 팔레스타인의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예수님의 비유들에는 채무자가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애쓰는 이야기들이 많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무능한 사람들에게 덮치는 자연재해가 아니었다. 이것은 로마제국 정책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즉 로마 황제들은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부자들로부터 무자비하게 세금을 걷었다. 그러자 부자들은 자기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비유동성 투자방법을 물색했다. 토지가 최고였지만 문제가 있었다. 즉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토지를 시장에서 매매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아 자손들에게 상속하는 방식이었다. 적어도 팔레스타인에서는 토지를 파는 경우가 없었다. 그러나 (돈과 곡식 등의 채무에 대해 - 역자주) 엄청난 이자를 매겨, 토지 소유자를 더욱 큰 부채 속으로 몰아넣어, 마침내는 그들의 토지를 팔 수밖에 없도록 만들 수 있었다. 예수님 당시에 이미 이 과정이 상당히 진척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대규모 농장(latifundia)들을 부재지주(不在地主)들이 소유하고, 그 관리는 청지기에게 맡기고, 일은 종들과 소작인, 품꾼들이 했다. 기원후 66년 유대 혁명가들의 첫 번째 행동이 성전 금고, 즉 부채문서가 보존되어 있던 성전 금고를 불태운 일이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그 청중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다(“누가 너를 걸어 고소하여”). 그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토지, 살림살이, 그리고 심지어는 겉옷까지 빼앗아 가는 그 체제를 죽이도록 미워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들에게 속옷까지 넘겨주라고 가르치시는가? 속옷까지 벗어서 넘겨주게 되면, 그들은 완전히 벌거벗은 채 법정을 나서게 된다는 말이다. 당신이 그 채무자의 입장이 되어, 이 말씀대로 했을 경우 벌어질 우스운 꼴을 상상해 보라. 그 채권자는 한 손에 당신의 겉옷을 들고, 다른 손에는 엉겁결에 당신의 속옷을 받아든 채, 당황해서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서 있을 것이다. 당신은 갑자기 그 공을 상대방에게 넘긴 것이다. 당신은 그 재판에서 이길 가능성이 없었다. 법은 완전히 채권자에게 유리했다. 그러나 당신은 모욕당하는 것은 거부했으며, 동시에 그처럼 높은 이자를 받는 체제에 대해 정식으로 맞서서 항의를 표시했다. 당신은 결국 이렇게 말한 셈이다. “네가 내 옷을 갖고 싶다고? 좋다. 여기에 있다. 모든 것을 다 가져가라. 너는 이제 내 몸 이외에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가져갔다. 다음에 네가 가져갈 것이 내 몸이냐?”
유대교에서는 벌거벗는 것이 금기(taboo)였으며, 그 수치는 벌거벗은 사람에게 돌아간 것이 아니라, 그를 벌거벗게 만든 사람, 혹은 그 벌거벗은 몸을 본 사람에게 돌아갔다(창세기 9:20-27). 즉 당신이 채권자 앞에서 벌거벗으면, 당신은 그 채권자로 하여금 가나안이 저주받게 된 똑같은 금지조항을 어기도록 만든 것이 된다. 그리고 당신이 벌거벗은 채로 길거리를 행진하면, 당신의 친구들과 이웃들이 아연실색하여 그 이유를 묻게 된다. 당신이 그 이유를 설명하면 그들도 당신의 행진에 가담하여, 오늘날 개선 퍼레이드 비슷하게 된다. 이로써 채무자들을 억압하는 체제 전체가 공개적으로 폭로된다. 즉 그 채권자가 “존경할만한” 대부업자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한 계급 전체를 무산자와 극빈자로 떨어뜨리는 장본인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나 이런 폭로는 단순히 그 채권자에게 벌을 주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이런 폭로를 통해 그 채권자로 하여금 아마도 그의 생전에 처음으로 그가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었는지를 직시하도록 만들어,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로써 가난한 사람은 불의에 협조하기보다는, 법을 이용하여 그 착취적인 법을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예수님은 결과적으로 어릿광대 짓을 후원하고 있다. 그러는 중에 그는 유대교의 유서 깊은 전통을 지키고 있다. 탈무드의 후대 말씀처럼, “만일 네 이웃이 너를 나귀라고 부르면, 네 등에 안장을 올려놓아라.”8)
권세는 문자적으로 뽐내고 있다. 그 권세를 무력하게 만드는 데 재치 있는 풍자보다 빠른 것은 없다. 그들의 힘에 놀라기를 거부함으로써 약자들은 비록 구조적 변화가 불가능한 경우에도 대담하게 주도권(initiative)을 잡을 수 있다. 이 메시지는 이 세상에서는 얻을 수 없는 완전한 충고가 아니라, 억압당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넣어주기(empower) 위한 실제적이며 전술적인 조치이다. 이것은 체제 전체를 어떻게 다룰 때 그 잔인성을 폭로할 수 있을 것이며, 정의와 법과 질서를 가장하는 그 체제를 하나의 사람 웃기는 노릇으로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한 힌트를 제공해준다. 여기서 가난한 사람은 더 이상 부자들이 쥐어짤 수 있는 핫바지가 아니다. 즉 그는 현행법을 받아들이고, 그 부조리가 드러날 때까지 법대로 하자고 밀고 나가, 그 현행법들이라는 것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를 부자들에게 드러낸다. 그는 벌거벗은 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걸어나감으로써, 채권자와 그 경제구조 전체를 완전히 적나라하게 벌거벗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apartheid) 정권 시절에, 당국자들은 오랫동안 어떤 한 빈민촌을 없애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하루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하러 나간 후에 군인들이 도착했다. 군인들은 남아있던 몇몇 여자들에게 5분 이내로 물건을 챙겨 떠나면 불도저가 작업을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 여자들은 아마도 그 군인들 대다수가 점잔빼는 농촌 출신이란 점을 알아챘는지, 불도저 앞에서 자기들의 옷을 훌훌 벗어 던졌다. 결국 군인들은 물러나고 말았다.
남아프리카의 변절한 민족주의 사업가 요한 스탠더가 1986년 4월 인종차별 정권에 반대 시위를 하던 도중 포트 엘리자베쓰 시청 앞에서 하의를 벗어던진 것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단지 충분했다고 판단한 때문이었을까?9)
“누가 너더러 억지로 5리를 가자고 하거든”
예수님의 세 번째 사례는 10리를 가는 것에 관한 것으로서, 이것은 로마 군인들이 식민지 백성들에게 부과할 수 있는 강제노역을 제한시키는 매우 용의주도한 관습에서 비롯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전쟁이나 반란 시기를 제외하고는 로마의 군단 병력을 만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억지로 5리를 가자고 하는 군인들은 유대에 사령부를 두고 있었던 외인부대로서, 로마의 군단 소속 군인들보다 봉급이 절반밖에 되지 않는 초라한 군인이었을 것이다. 갈릴리에는 헤롯 안티파스가 로마의 군대 편제를 따른 부대를 갖고 있었는데, 아마도 이들 역시 강제노역을 부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주요 도로 상에는 정기적으로 거리 표지가 놓여 있었다. 따라서 군인은 민간인에게 자기의 배낭(30~38Kg)을 꼭 5리만 지고 가게 할 수 있었다. 그 이상을 지고 가게 할 경우에는 군법에 따라 엄중한 처벌을 받았다. 이런 식으로 로마제국은 점령지 백성들의 분노가 폭발하지 않도록 했으며, 동시에 군인들이 편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강제노역은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이 심지어 약속의 땅에서조차 예속된 백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쓰라린 현실이었다.
이처럼 자존심이 강하지만 예속된 백성들에게 예수님은 반란을 권고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군인들을 “돕는 척” 하다가 길옆으로 데리고 가서 칼로 찌르지 않았다. 예수님은 로마제국의 군대에 맞서서 무장 반란을 일으킨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체 그런 말씀을 하지 않았다. 만일 그런 말씀을 했다면 혁명가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 테지만 말이다.
그러나 왜 10리를 걸어가라는 것인가? 10리를 걸어가면 그만큼 적을 도와주어 그들이 더욱 설치도록 만들지 않을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여기서도 문제는 앞의 두 가지 사례와 마찬가지로, 억압당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다시 주도권을 잡을 수 있으며, 얼마동안은 변하지 않을 상황에서 어떻게 자신들의 존엄성을 주장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강제노역의 규칙들은 로마 황제가 만든 것이지만, 그 규칙들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으로서, 로마 황제도 이 문제에 관해서는 힘을 쓸 수 없는 것이다.
거리 표지에 따라 5리를 간 다음에 그 군인이 할 수 없이 자기의 배낭을 돌려 받으려 할 때, 당신이 “아니오. 내가 5리를 더 지고 가겠소”라고 말하면 그 군인이 얼마나 놀라게 될 것인지를 상상해 보라. 왜 그러느냐?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이냐? 그는 보통 당신의 동족에게 강압적으로 자기 배낭을 지고 가도록 시킬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 당신은 그 일을 기꺼이 하면서 또한 멈추지 않겠다고 하니 어찌된 영문인가! 지금 누구 약을 올리겠다는 것인가? 당신은 그의 체력을 얕잡아보고 그러는가? 아니면 좀더 친절을 베풀겠다는 것인가? 아니면 당신이 지고 갈 거리보다 더욱 멀리 지고 감으로써, 그 군인을 혼내주려고 그러는가? 당신은 그 군인을 고소할 작정인가? 말썽을 일으키려는 수작인가?
(이렇게 함으로써) 비굴한 강제징발의 상황에서 당신은 또 다시 주도권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당신은 선택할 능력을 되돌려 받은 것이다. 그 군인은 자신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당신의 반응 앞에서 어리둥절할 뿐이다. 그는 예전에 이런 식의 문제를 다루어본 적이 없었다. 이제 당신은 그로 하여금 결정을 내리도록 밀어 부쳤는데, 그의 이제까지의 경험으로는 그 결정을 내릴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못한 상태이다. 만일 그가 피정복민보다 우월하다고 느껴왔다면, 오늘은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되었다. 로마제국의 보병이 유대인에게 “제발 내 배낭을 돌려주시오”라고 애걸하는 통쾌한 장면을 상상해 보라. 독실한 믿음을 가진 척하는 사람들은 이 장면의 해학을 파악하지 못할 것이지만, 예수님의 청중들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을 것인데, 그들은 자기들의 압제자들이 그처럼 쩔쩔매게 될 것을 예상하고 배꼽을 쥐고 웃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일부 독자들은 그 군인을 쩔쩔매게 만드는 것이나, (속옷까지 벗어줌으로써) 채권자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것에 대해 반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억압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그 자신들의 행동 자체로 인해 당혹스럽게 되지 않는다면,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회개할 수 있는가? 물론 비폭력적 행동을 보복과 치욕감을 주기 위한 전술로 사용할 위험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그 정반대로, 예수님의 타협하지 않는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잘 대해주는 것과 혼동하는 부드러움과 감상에 빠질 위험도 있다. 사랑으로 대결할 때, 억압당하는 사람을 양순함에서 해방시키며 동시에 압제자를 죄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다.
비폭력적 행동이 비록 즉각적으로 압제자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비폭력적 행동에 헌신하는 사람들에게는 영향을 끼친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증거했듯이, 비폭력적 행동은 그들에게 새로운 자기 존경심을 갖게 하며, 자신들이 갖고 있는 줄 몰랐던 힘과 용기를 불러일으킨다.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권고가 힘있는 사람들에게는 하찮은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한평생 주인들에게 굽실거리며 등을 긁어주던 사람들, 또한 자신들의 역할이 열등하다고 내면적으로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작은 발걸음이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된다. 이것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 파출부들이 합심하여 거의 불가능한 발걸음을 시작한 것, 즉 자신들의 고용주들에 대해 그들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것에 견줄 만한 일이다.
이 세 가지 사례들은 “악한 자에 맞서서 폭력적으로 대응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선언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그것은 수만 년 동안 (사회적) 환경을 통해 생물학적 위협에 대해 무분별하고 맹목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우리들 몸 속에 배어 있는 두 가지 선택, 즉 도피냐 싸움이냐 대신에, 예수님은 제3의 길을 제시한다. 이 새로운 길은 인간의 진화과정에서 역사적인 돌연변이, 즉 적자생존의 원칙에 대한 반란으로 기록될 것이다.10) 예수님을 통해서 악을 악으로 맞서서 대항하지 않는 길이 열린 것이다.
루터의 율법 망치는 별개로 하더라도, 제가 말씀 드린 율법은 어쩌면 부정적이라기 보다는 긍정에 더 가까울수도 있습니다.
율법의 준수에 근거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부인하려는 태도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유대교인들의 반감에서 그 증거를 찾을수 있습니다. 바울도 더더욱 강조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복음서의 기자들도 상당부분 그리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이땅에 이룬다는 의미는 이 땅이 변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된다는 의미이기 보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땅을 점령한다는 의미겠지요. 그러므로 자체변화는 불가능한것으로 생각합니다. 산상수훈을 이룰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케리그마를 역사와 대비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케리그마는 이미 구약속에서도 씨앗으로 존재하였지요. 존재행위에 대한 해설이 존재이후에 가능하다고 해서 존재자체가 부정되는것이 아닌것처럼 케리그마가 후에 형성되었다고 하더라도 예수의 구원은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케리그마의 부인은 역사유일주의적인것 같습니다. 역사 이외에 신앙과 신화가 존재하는것처럼 케리그마도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케리그마를 부인하는식의 논법이 주장된다면 같은 논법으로 역사도 부인될것입니다.
사실 역사도 존재하지 않는것으로 설명가능하지 않습니까?
최근에 읽은책중 하나가 교수님이 보내주셨던 다윈 이후의 하느님입니다. 이 책의 핵심 가운데 하나도 바로 자기비움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제 이야기의 내용은 그렇습니다. 원수를 대적하는 부분이나, 십리를 가라는 이야기등은 행위에 대한 부분이 아니고 자기 비움에 대한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율법으로 가득찬 자들에게 그들을 비우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이라는것이지요.
정확하게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역자가 말한 흠정역이 최초의 영어성경은 아닌듯 합니다. 제 기억으로는요...
최초의 영어성경을 번역한 사람은 아마 그 이유로 처형당했던듯.... 집에 가면 책을 찾아봐야할것 같네요...
그리고 악한자에 대한 대적에 관한 내용은 한번 추후에 제 의견을 게시해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미 게시된 제 글 "율법이란 무엇인가" 에도 충분히 내포 되어 있습니다.
http://dabia.net/xe/?_filter=search&mid=free&search_keyword=%EC%9C%A8%EB%B2%95%EC%9D%B4%EB%9E%80&search_target=title&document_srl=553605
혹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악한자를 대적하지 말라는것은 대적하라, 하지 말라 하는 의미가 아닌 이미 너희는 대적하며 살아왔고, 율법을 어기지 않고 지킨다는것은 악한자를 완전히 대적하지 말고, 조상들이 대적했던 행위를 정당화하지 말라... 는것으로 생각합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마태복음 5:38-41 표준새번역 개정판)
위의 구절도 결국 겉옷, 십리등은 도저히 할수 없는 상황을 말하는것입니다. 같은 의미로 맞서지 말아라도 도저히 할수 없는 상황을 제공해주신것입니다. 대적, 겉옷, 십리등은 다 평행구절이니 하나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오리를 가자하는 사람에게 십리를 가주는것은 실제로 오리 초과를 가자하는 사람은 상관없고, 오리 이하만 가자는 사람에게 해당되는것이 아니고, 만리를 가자는 사람에게는 이만리도 동행하라는 의미지요... 결국 상대의 요구가 커지면 커질수록 자신의 봉사와 희생이 더욱 커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율법안에서 자신들이 믿어왔던 정당성과 도덕성에 대한 예수그리스도의 안티테제인셈인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이라고 불리우는 부분은 아시다시피 피안의 세상에서나 가능한 설교이며, 이 땅에서는 지켜질수 없는 불가능한 도덕입니다. 무한의 사랑... 이는 오직 하나님께 포함된 부분이며, 인간이 이를 행할수 없는것은 바로 선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산상수훈은 바로 무한한 사랑을 보일것을 요구하는것이며, 이는 결국 인간이 지킬수 없는 불가능을 제시함으로써 인간의 나약함과 율법을 지키는것에 대한 무력감을 느끼게 해주는것으로 생각합니다.